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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점검37: 달마의 구년면벽(九年面壁)의 뜻
달마대사는 양나라에서 위나라로 건너가 낙양의 소림에 이르러 면벽하고 앉았다. 9년이 지나고서 2조를 얻고 법을 전하였다.
達磨大師自梁涉魏。至洛陽少林面壁而坐。經於九年。方得二祖傳法。
여기에 대해 인터넷에서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다.
“구년면벽(九年面壁)은, 구세제민의 번거로움마저 버리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최후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성취하는 것이다. 달마 대사는 도를 얻기 위해 면벽하고 참선한 지 9년만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 글에서 ‘멸진정에 들어 최후의 무여열반에 들었다’는 것은 소승에서 ‘구해탈 아라한’을 일컫는 말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어찌 달마대사를 일컫는 말이겠는가? ‘구세제민의 번거로움’이라고 했는데, 이는 곧 세상을 구제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수고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곧 달마대사께서 오히려 구년 동안 공연히 수고하며 중생을 위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참고로 구세제민은 불보살이 모두 동참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불사(佛事)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코멘트는 순전히 소승적인 발상으로 달마대사를 엿보고자 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또한 어떤 분은 말할 것이다.
“저 달마대사께서 구년면벽을 한 것은 몸소 법신의 도리를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이다.”
무엇을 법신이라고 하는가? 일체를 끊고 돌아앉는 것을 법신의 도리라고 할 수 있을까?
교학을 조금 아는 자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는 곧 해탈을 말한다. 그리고 해탈은 곧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 또는 無所有, 無作)으로 얻는다.”
소승의 아함부에서는 ‘공이란 곧 오온이 영원하지 않음으로 무아(無我)인 것이고, 무상이란 색성향미촉법의 모양을 끊어서 일체의 모양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고, 무원이란 탐진치를 끊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 이제 해탈의 의미를 이해했으니, 법신의 도리를 밝힐 수 있을까? 과연 그러한지 한번 시험해보지 않을 수 없겠다.
『화엄경』에서는 말했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오히려 허공(虛空)과 같은데, 물(物)에 응하여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물속의 달과 같다.”
又教中道, 佛眞法身, 猶若虛空, 應物現形, 如水中月.
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법신(法身)입니까?”
운문이 말했다.
“육불수(六不收)이다.”
육불수란 곧 ‘여섯으로는 거두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거둔다는 것은 곧
‘가지런히 하다, 쉬다, 잡다 등’의 의미가 있다. 이는 곧 해결하다, 어떤 일을 마치다, 마무리를 하다, 정리하다 등의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섯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섯은 곧 육근, 육진, 육식인가? 저 육근, 육진, 육식으로는 법신을 거두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이러한 견해를 짓는다고 해도 그저 스스로의 견해일 뿐 저 운문선사의 뜻과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이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천 겹의 구름을 뚫고 지나가지 않는 자라면 어찌 계합을 얻을 것인가? 무엇이 저 여섯인가?
여기에 대해 옛 사람을 노래하였다.
육불수라고 대답함이 가장 참신하니
어찌 양나라 티끌에 얽힌 것을 (가지고) 노래하리오.
바람을 가득 품은 배에 수천의 꽃들이 (강변에) 어우러지니
바뀌지 않는 건곤에 특별한 봄이다. (백운 단)
六不收兮調最新, 能歌何待繞梁塵. 和風滿檻花千樹, 不換乾坤別是春. (白雲端)
한 때, 협산스님은 처음 윤주 경구 학림사에서 상당하여 법문을 하였는데, 그때 마침 도오스님이 그것을 듣게 되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법신입니까?”
협산스님이 말했다.
“법신(法身)에는 모양이 없다.”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법안입니까?”
“법안(法眼)에는 티끌이 없다.”
夾山初住潤州京口鶴林寺。道吾到。遇上堂。僧問。如何是法身。夾山云。法身無相。僧云。如何是法眼。夾山云。法眼無瑕。
이것을 보고 있던 도오스님은 무심결에 실소를 금지 못하였다. 법문을 마치고 자리에서 내려온 협산스님은 도오스님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이렇게 대답했는데, 반드시 옳지 않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이에 도오스님이 말했다.
“나는 끝내 말해주지 못합니다. 수주(秀州) 화정(華亭)에 가면 선자화상(舡子和尚)이 계십니다.
道吾不覺失笑。夾山下座。請道吾。問云。適來祗對這僧話。必有不是處。望上座慈悲指示。道吾云。某甲終不說。請往秀州華亭。見舡子和尚。
선자화상은 협산스님을 보자마자 물었다.
“대덕은 어떤 절에 머무는가?”
舡子纔見夾山。便問。大德住在甚寺。
협산: “절에 머물지 않습니다. 머물면 곧 닮지 않게 됩니다.”
선자: “그대는 닮지 않게 된다고 했는데, 무엇과 닮지 않는가?”
협산: “눈앞의 법이 아닙니다.”
선자: “어디에서 배웠는가?”
협산: “눈과 귀로는 미치는 바가 아닙니다.”
夾山云。寺則不住。住則不似。舡子云。汝道不似。不似箇甚麼。夾山云。不是目前法。舡子云。甚處學得來。夾山云。非耳目之所到。
선자: “한 구절과 합하는 말은 만겁토록 나귀를 묶는 말뚝이다. 실을 천 길로 (깊은 못에) 늘어뜨리는 것은 그 뜻이 깊은 못에 있(기 때문이)다. 갈고리(鈎)를 떠난(에서 벗어난) 세치(三寸)로 그대는 어째서 말해보지 않는가?”
舡子云。一句合頭語。萬劫繫驢橛。垂絲千尺。意在深潭。離鈎三寸。子何不道。
협산이 입을 떼려고 머뭇거리자
선자는 곧 떨어지는 낙수(落水)를 후려쳤다.
또다시 꺼내려고 머뭇거리자
선자는 또한 말했다.
“말해라. 말해라.”
협산이 입을 열려고 하자
선자가 또다시 후려쳤다.
협산이 (여기에서) 활연히 대오하였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세 차례 끄덕였다.
夾山擬開口。舡子便打落水。纔擬出。舡子又云。道道。夾山擬開口。舡子又打。夾山豁然大悟。乃點頭三下。
선자: “낚싯대의 줄은 그대를 따라 희롱하고
푸른 파도를 범하지 않는 뜻이 스스로 빼어나다.”
협산: “낚싯줄을 버리고 낚싯바늘을 던졌습니다. 선사의 뜻은 어떻습니까?”
선자: “낚싯줄을 매달아 녹수(淥水)에 띄우고 유무(有無)의 뜻을 판정한다. (자 여기에 대해) 속히 일러보라, 속히 일러보라.”
협산: “말(語)이 현(玄)을 끼고는 길이 없고, 혀끝으로 이야기해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선자: “낚싯바늘이 강의 파도를 다하고서야 금린(金鱗: 금빛 비늘)을 비로소 만난다.”
협산이 이에 귀를 막았다.
선자: “그렇다. 그렇다.”
舡子云。竿頭絲線從君弄。不犯清波意自殊。夾山云。拋綸擲釣。師意如何。舡子云。絲懸淥水浮。定有無之意。速道速道。夾山云。語帶玄而無路。舌頭談而不談。舡子云。釣盡江波金鱗始遇。夾山乃揜耳。舡子云。如是如是。
어찌 법신에 두 가지 뜻이 있을 것인가? 일천 성인은 입을 떼지 못하였고 불조는 억지로 한 글자를 일으켰다.
무엇이 금린인가?
한 번은 삼성(三聖)스님이 설봉(雪峰)선사에게 물었다.
“그물을 뚫는 금린(金鱗: 금빛 비늘, 금빛 물고기)은 무엇을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그물에서 빠져나오면 말해주겠다.”
“1천5백인의 선지식께서는 화두(말귀)도 모르십니까?”
“노승은 주지사(住持事: 주지의 일)로 번(繁: 많다, 복잡하다, 바쁘다)하다.”
舉, 三聖問雪峰, 透網金鱗未審以何為食. 峰云, 待汝出網來, 向汝道. 峰云, 老僧住持事繁.
저 삼성스님의 금린은 선자화상이 말하는 금린과 같은가? 다른가? 결국 그물을 빠져나온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만약 이것을 안다면 어찌 옥문의 금 자물쇠를 열지 못할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겠다. 삼성스님과 협산스님은 지음인가? 지음이 아닌가? 만약 이것을 밝힐 수 있다면 어찌 설봉선사에 이르지 못할 것인가?
무엇이 주지사로 번한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노래하겠다.
도요새와 대합이 다투어서는
결국 어부의 차지이다.
주지의 일로 바쁨이여
삼경에 밝은 달이 못에 떨어졌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달마대사께서 9년 동안 면벽한 뜻이 무엇이겠는가? 이것을 제대로 살피는 자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하겠다.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양왕과 계합하지 못하고 어둠에 강을 건너서
한 몸을 피신할 땅이 없음이 부끄럽고 두렵다.
구년면벽으로 무슨 일을 이루었을까?
평인(平人)을 팔아서는 가마솥 탕으로 들어가리라. (호은 제)
不契梁王暗渡江。一身無地避慚惶。
九年面壁成何事。賺卻平人入鑊湯。(湖隱濟)。
‘평인(平人)을 판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벽암록』에서 원오선사는 ‘조계(曹溪)의 물결과 비슷해서는 무한평인(無限平人)이 육침(陸沈)을 입는다(曹溪波浪如相似 無限平人被陸沉).’라고 하였다. 이 말이 결국 무슨 말이겠는가? 이 구절은 사실 번역에서부터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해인사 장경각 번역의 『벽암록』에서는 ‘조계의 물결(두 스님의 말씀)이 서로 닮았다고 한다면, 수없이 많은 멀쩡한 사람을 땅속에 파묻는 꼴이 되고 만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해결해야만 다시 저 ‘평인(平人)을 판다’는 구절을 눈앞에서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 호은선사는 ‘평인(平人)을 팔아서는 가마솥 탕으로 들어가리라.’라고 말을 했을까? 이것을 드러낼 수 있어야 달마대사가 구년면벽한 뜻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정진(精進)을 뒤집어 게으름을 이루면
치선올좌(癡禪兀坐)를 지키지 않는다.
소림의 면벽구년은
진작에 양왕에게 감파당했다. (조인 명)
精進翻成怠墯。莫守癡禪兀坐。
少林面壁九年。已被梁王勘破。(祖印明)。
치선올좌란 어리석은 선(禪)을 닦는다는 말이다. 곧 묵묵히 공을 앉아서 지키는 것을 어리석은 선이라고 질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지막 구절이 백미이다.
“진작에 양왕에게 감파당했다.”
어째서 감파를 당했다고 말했을까? 여기서 양왕이란 곧 양무제를 말한다. 그렇다면 저 양무제가 달마대사보다 낫는 것인가? 이렇게 말한 선사의 의도는 결국 무엇이겠는가? 만약 이것을 꿰뚫는다면 저 ‘노파소암’의 화두 또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진작에 양왕에게 감파당했다.’라고 하는 구절을 토해낼 수 있는 역량이어야 비로소 달마대사 구년면벽의 뜻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선문염송』의 구절을 인용해보겠다.
자명(慈明)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 “구년면벽의 뜻이 무엇입니까?”(九年面壁意旨如何)
자명: “연만한 나이에 덕이 없다.”(有年無德)
그 스님이 다시 양기(楊岐)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구년면벽의 뜻이 무엇입니까?”
양기: “서천사람이 당나라 말을 몰랐다.”(西天人不會唐言)
다시 회당(晦堂)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구년면벽의 뜻이 무엇입니까?”
회당: “추위에 덮을 이불이 없다.”(寒無被蓋)
여기에 대해 심문분(心聞賁)은 말했다.
“이 세 구절 가운데 한 구절은 마치 흰 옥에 티가 없는 것 같고, 한 구절은 옛 골짜기에 바람이 이는 것 같고, 한 구절은 화살이 바위를 꿰뚫는 것과 같다. 그대들이 가려낸다면 그대들이 친히 조사를 보았다 허락하리라.”心聞賁擧話云房三句中一句如白玉無瑕一句如風生古澗一句如箭穿石若辨得 許親見祖
여기에 대해 답해보겠다.
화살이 바위를 꿰뚫는 것과 같고 (如箭穿石)
옛 골짜기에서 바람이 이는 것과 같고 (如風生古澗)
흰 옥에 흠이 없는 것과 같으니 (如白玉無瑕)
산술(筭)을 해서는 진작에 수레바퀴(輪)의 앞이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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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 감사합니다...()...
네ㅡ
강사합니다
도요새와 대합이 다투어서는
결국 어부의 차지다
주지의 일로 바쁨이여 삼경에 밝은달이 못에 떨어졌다 ㆍ (합장)
구년 면벽이여
회당ㅡ추위에 덮을 이불이 없다ㆍ
낚싯바늘이 강의파도를 다 하고서야 금린 을 비로소 만난다
ㅡ합장 ㅡ
ㆍ
서천 사람이 당나라 말을 몰랐다
추위에 덮을 이불이없다ㅡ합장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