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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쇄엽성은 이태백의 출생지
붉은 중국 정착기에 활약한 유명한 문인 궈모뤄[郭沫若,1892~1978]에 의에 제기된 ‘이태백의 쇄엽고향설’은 요즘은 그대로 굳어져 토크목에 기념관을 건립하려는 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백(李白,701~762)은 이곳 악베심의 쇄엽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성이 ‘오얏이씨(李)’인 것으로 미루어 보면 쇄엽성이 건설된 후에 정략적 차원에서 이주시킨 한족 중에 이백의 조부도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아마도 그의 조부는 이재에 밝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쇄엽성의 원주민은 모두 장사의 귀재라는 소그드(Sogd人)인들, 즉 소그디안(Soghdians, 粟特人)인데, 이들과 장사를 하여 돈을 벌 자신이 있었기에 그 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범전생(范傳生)이 쓴 이백의 묘비명에 의하면 “이백은 원래 양(梁)의 무소왕(武昭王) 9대손이지만, 그의 가계는 수말(隨末)에 조상의 일부가 ‘쇄엽’으로 쫓겨 가 방랑을 하며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성명을 은밀하게 고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장사의 달인이라는 소그디안의 기록을 한 번 살펴보자. 소그드인은 소그디아(Soghdia) 또는 트랜스옥시아나(Transoxiana)를 근거지로 하는 이란계(系)의 민족을 말한다. 그들의 고향은 여러 개의 실크로드 지류들이 모여드는 교통의 요충지로 옛부터 동서양교류사에 이름 높은 지역이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중국과 인도, 동로마제국에 걸친 실크로드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 악베심 유지 인근지도-토크목시가지. 스이얍유지, 부라나타워
▼ 이태백 초상
특히 그들의 전성기는 5~9세기였는데, 중국 사서에서는 그들을 속특(粟特), 속리(速利), 소리(蘇利) 또는 소무구성(昭武九姓)으로 불렀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상술의 달인으로 당시 로마나 중국 사서에 나타나고 있다. 「당회요(唐會要)」에는 이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소그드인[康國人]은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꿀을 먹이고 아교를 손 안에 쥐어준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했을 때 입으로는 항상 감언을 놀리며 아교가 물건에 붙듯이 손에 돈을 가지게 되었으면 하는 염원이다.
그들은 장사를 잘하며 적은 이윤이라도 다툰다. 남자는 20세가 되면 다른 나라에 보내는데, 중국에도 온다. 그들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간다.
소그드인들은 8세기 신라와도 교역을 하였다. 신라의 고분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고학적 유물들과 사서의 기록들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최치원의 속독(束毒)은 바로 속득(粟特)의 동의이자명(同意異字名)으로 소그드의 탈춤을 묘사한 것이고 처용무의 주인공인 처용(處容)과 괘릉(掛陵)의 무인석상이 소그드인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새삼스러운 가설이 아니다. 또한 신라 음악이 서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그렇다.
특히 두 문화권의 금관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오게 만든다. 아마도 소그드인의 선조인 스키타이의 금세공술이 신라로 전해졌음에 대한 근거물이 아닐까 한다. 나아가 고구려 평강공주와 결혼한 온달(溫達)이나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호위 무사였던 온군해(溫軍海)도 소그디아 왕족이라는 이야기도 중국측 기록인 ‘소그드 온(溫)씨’와 연결된다.
각설하고 시 한 수 읽어보고, 다시 이태백의 ‘쇄엽고향설’로 다시 돌아가 보자.
<변방의 노래[塞下曲]>
5월에도 눈 쌓인 천산엔 꽃은 없고 추위만이 있을 뿐.
절양류 피리 소리 들려오지만 봄빛은 아직 찾을 길 없다.
새벽엔 종과 북소리 따라 싸우고 밤에는 말안장 끼고 잠을 자노니
허리에 찬 칼 뽑아 곧 바로 누란왕을 베려 하노라.
이백이 정확히 몇 살에 고향을 떠났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쇄엽성이 703년 서돌궐족의 한 지파에게 점령당하는 시기를 전후해서 이백의 아버지도 식솔을 데리고 사천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면 이백이 701년에 쇄엽성에서 태어났다하더라도 어린 아기였을 때 고향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위의 <쇄하곡>과 아래의 <전성남(戰城南)>이란 시귀절에서 보이는 전쟁의 짙은 구름과 이식쿨과 천산으로 비유되는, 쇄엽성의 기억들을 부친을 통해 전해들은 기억의 저편 속의 편린들을 묶어 창작되었을 것이다.
지난해에는 상건 벌판에서 전쟁이 있었고
금년에는 카슈가르 강에서 전쟁이 일어났네.
이식쿨호 흐르는 물결에 병장기를 씻고
천산 눈 덮인 풀밭에 말을 풀어놓았네.
해동의 나그네들이여!
혹시 토크목을 지날 기회가 있다면 이왕이면 보름에 맞추어 가시게나. 갈대 우거진 천년의 고성터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의 정취도 그럴듯하겠지만, 혹시나 이태백이 고향의 달 속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르잖은가?
“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 부라나 타워 박물관
* ‘삼이교(三夷敎)’가 사이좋게 이웃했던 소그드지방
‘삼이교’란 당(唐)나라 때 서방에서 유입되어 유행한 세 종교를 가리킨다. 그것들은 고대 페르시아에서 발원한 현교(祆敎:(Zoroastrianism)와 마니교(摩尼敎, Mani) 그리고 네스토리안(Nestorian)파 기독교인 경교(景敎)를 말한다.
이방의 종교에게 비교적 관대하였던 중원의 역대 왕조들은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 이외에도 예루살렘에서 발원한 기독교 및 아라비아반도에서 발원한 이슬람교 기타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종교들을 크게 배타적이지 않게 수용하였다. 그들 종교의 전파의 행동대 역할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대상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들어와 정착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믿었던 종교와 그 거점이 되는 사원들도 도처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하여 현교는 파사사(波斯寺)로, 마니교는 대운광명사(大雲光明寺)로, 경교는 대진사(大秦寺)라는 이름으로 차별하여 불리게 되었다. 어찌 보면 이들 종교는 이국적인 문화의 꽃에 해당되었기에 문화의 다양성을 훨씬 다양하게 만들었다.
이들 세 가지 종교가 장안에 연착륙하는 과정에서 소그디아라는 지방이 중계역할을 충실히 하였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이 되고 있다. 1931년부터 10년 동안 소그디아나 북방의 광대한 초원의 악베심 유적의 발굴 총지휘자인 키즈라소프는 다음과 같이 소그디아나의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을 지적한 바 있다.
여러 종교 공동체가 공존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불교, 기독교, 소그디아나의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투르크민족의 샤머니즘 등이 그것이다.
그럼 이 이방의 세가지 종교 중에서 먼저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 보도록 하자. 이 종교는 일부 언어에서는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라고도 불렸고 한역하여 배화교(拜火敎) 또는 천교(祆敎)라고도 하였다.
『자은전』에서는 현장의 순례 당시 서돌궐제국에 오직 배화교만이 마치 국교처럼 성행하고 있는 것처럼 쓰여 있으나, 이는 아마도 일시적인 상황이었고, 사실은 고고학적 고증에 의하면 소그드지방에는 많은 종교들이 공정하게 성행하고 있었다.
돌궐(突厥)은 불을 섬기기 때문에 침상을 쓰질 않는다. 왜냐하면 나무는 불에 타기 때문에 상극이라 하여 쓰지 않고 다만 땅바닥에 겹으로 된 요를 깔 뿐이다. 그래서 [현장]법사를 위해 쇠로 된 침상을 만들어 요를 깔고 앉도록 하였다.
배화교에 대해서는 우리 혜초사문도 ‘호국(胡國)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여섯 나라는 모두 ‘화천교(火祆敎)’를 섬기며, 불법은 알지 못한다.
혜초는 ‘화(火)’를 강조하여 화천교로 불렀지만, 혜초가 개인적으로 이 종교를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언급이 없기에 알 수는 없다.
다만, 후에 와칸계곡에서 읊은 시구절 중에, ”불을 가지고 노래한다[伴火上胲歌‘]“ 라는 구절과 연결시켜보면 혜초가 지나온 나라들이 배화교의 중심지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 종교에 대한 상당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 비정될 뿐이다.
이처럼 천교, 화천교, 배화교로 불리며 서역에서 맹위를 떨치던 조로아스터교는 과연 어떤 종교였을까?
기원전 7세기경에 아프간 북부 발흐 출신이라고 알려진, 예언자 조로아스터에 의해 창시된 이 인상적인 고대 종교는 고대 인도-이란에 근원을 둔 이원론적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하여 세상을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성전은 ‘아베스타(Avesta)’로, 수 세기동안 입으로 전승되어 내려오다가 3,4세기 경 사산(Sasan) 왕조 시대에 비로소 경전의 모습으로 집대성되었다고 한다. 한편 조로아스터의 종말론은 후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대개의 후대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배화교는 중국에서는 사라졌지만, 현재 고향인 이란과 중앙아시아 일부 그리고 인도에서 ‘파르시’라는 이름으로 대략 10여만 명의 교인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필자의 경험담에 의하면, 한 때 불교의 중간 전파경로로써 큰 역할을 했던, 와칸의 현지인들은 부디즘이란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조로아스터교는 ‘검은 두건’이란 뜻의 ‘시아포쉬(Siah-Posh)’라는 이름으로 친근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알라’ 이외의 신을 철저히 부정하는 무슬림 사회에서 이런 타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는 이례적이 아닐 수 없다
▼ 배화교의 사원유지
▼ 장안 인근의 경교사원 대진사. 경내에 <대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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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교 연구서
다음은 중원권에서 경교(景敎) 또는 대진교(大秦敎)라고 불렸던 네스토리안 동방기독교에 대해서 살펴보자. 431년에 열린 에페수스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배척된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는 그 뒤 시리아에 근거지를 두고 독자적으로 교단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단판결 이후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그를 사면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과의 무역에서 페르시아가 중간 이익을 많이 보는 것이 싫어서 정략적으로 사면을 했다지만,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단에서 이를 거부하여 여전히 이단으로 남게 되자, 그들은 동방으로 살길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당 태종(太宗) 9년[635년] 아라본(阿羅本)이라는 사제를 단장으로 하는 대규모 선교단을 장안에 파견하여 3년 뒤 황제로부터 선교의 허가를 받고 638년 장안 근교에 대진사(大秦寺)라는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 뒤 781년에는 경정(景淨)이란 사제에 의해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건립되었는데, 이 비석은 실물이 현재 <비림박물관>에 보존되고 있어서 경교의 전성기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 서안 비림박물관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 탁본
대진국(大溱國)에 아라본(阿羅本)이라는 높은 승려[上德]가 있었다. 그는 청운을 점쳐서 진리의 경전을 싣고, 바람의 흐름을 살피면서 힘들고 어려운 길을 달려, 정관(貞觀) 9년 장안에 도착했다.
황제는 제상 방현령을 시켜 의장대와 함께 서쪽 교외로 보내, 깍듯이 환영하여 대궐로 모셔 오게 했다. 황실 서각에서 경전을 번역케 하고 내전에서도 (경교의)도를 물어 보았다. 그것이 옳고 참됨을 깊이 알게 되니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정관 12년 후 7월, 조칙을 내렸다
여기서 대진국은 당시 중동의 패자인 사산왕조 페르시아이고 아라본은 시리아어의 ‘랍반(Rabban)’으로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뜻인데 사제에 대한 존칭을 말한다. 아라본 일행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재상 방현령이 안내를 하고 의장대 사열을 받을 정도이면 주요 외국 사절단의 대우였다고 보인다. 현재 연구된 바에 의하면 그들은 만자형(卍字形) 비슷한 십자가를 심볼로 삼고 메시아를 ‘경전(景專), 신도를 경중(景衆), 경교회를 경문(景門)이라 불렀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교는 9세기 중엽에 이르러 무종(武宗) 대에 ‘회창법란’[845년]과 ‘황소의 난’[878년]등의 난세를 지나며 중원본토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리고 일부 잔존세력이 몽골과 한반도의 인접지역인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에서의 경교에 관한 연구는 과거 물레(A. C. Moule) 같은 외국학자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계의 여러분들의 연구가 진행 중이어서 상당한 성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현 토크막의 악베심 유적과 피슈렉(Pishpek) 유적에서 무려 610여 개의 비석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네스토리안 특유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100여개의 비문은 시리아어로 그 내용은 투르크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 연도를 알 수 있는 비석은 432개로, 가장 이른 것은 858년이고 그 다음이 911년이고, 나머지는 모두 13-14세기에 만들어졌고, 마지막은 1345년이다.
경교를 신봉한 민족은 주로 타타르(Tartar)족이었고 그 외 한족, 몽골인, 인도인, 위구르족 등도 있었다. 840년 이후 흩어진 몽골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당의 ‘회창의 법난’을 피해 이주한 경교의 일부 유민들과 조우하여 이른바 ‘복음화’가 가속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 토크목 인근 부라나 타워(Burana Tower)곁에 있는 조그만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과 악베심 유적 일대에서 발굴한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과 이슬람들이 사이좋게 지냈던 흔적, 심지어 그들은 죽어서도 합장까지 같이 한 사례도 있다. 또한 네스토리우스 교단 본부 예배당 구조에는 멀리서 온 신자들이 며칠 씩 묵어가는 여사(旅舍) 곁에 별도로 배려한 마니교 선교사들이 그림 그리는 방까지 있었다고 확인되고 있다.
전체 기독교의 선교역사로 보면 네스토리우스파의 시대가 지나고 1260년대에 마르코 폴로가 쿠빌리아 칸의 심복이 되어 원나라 황실 깊숙이 들어가 선교의 좋은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 역시 상인출신이란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리고 1580년대 마침내 예수회의 마테오리치가 청나라 수부인 연경에 교당을 세우기는 했지만, 이 역시 이방종교에 대한 한족의 뿌리 깊은 거부감을 때문에 깊은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붉은 중국 시대를 맞고 있다. 과연 기독교는 중국대륙 선교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가설을 하나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우리나라 기독교의 초전(初傳說)이다. 이 <대진비>는 통일신라시대의 선덕왕 2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당나라와 통일신라와의 밀접한 관계에 비추어 볼 때, 경교가 당시에 신라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가설에 대한 신빙성 있는 근거자료가 1956년 경주(慶州)에서 출토되었다. 불국사지에서 신라시대의 석제·동제 십자가와 마리아관음상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바로 통일신라시대의 경교 전래를 알려주는 근거자료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 불국사에서 출토된 마리아상
▼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 십자가
첫댓글 한참 기다렸습니다요.... 근데 사진이 ? ..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다구요?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고든여사는(E A Gorden)은 중국서 발견된 비와 동일한 모조비를 1906년 5월에 금강산 장안사 근처에 세웠다. 그런데 경교의 나대 전래의 가능성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고고학적 흔적이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이 석제(石製)십자가(Stone cross, 24.5×24×9㎝)와 2점의 십자문장식(十字文裝飾) 그리고 마리아소상(塑像)으로 추정되는 고고학적 자료였다. 이런 기독교적 흔적들이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경주에서 발견된 것은 신비롭기만 하다. 7∼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 4점의 유물은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제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
@다정/김규현 대칭적이어서 그리스형 십자가로 불리는데 중국에서 발견된 형태와 동일하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추정되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정/김규현 동방교회의 유산으로 보입니다.
가능성 유
역시 내공있는~
이태백이 놀던 달아
신라에도 경교가 전래되었다구요?
아직은 가설에 범주에 듭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