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Ordo) / 정치적 올바름(P.C.)과 영적인 질서 (S. O.)
최근 몇 가지 일을 겪었다. 학회에서 발표도 하고, 높은 사람들도 만났고, 낮은 사람들도 만났다. 뉴스에서 다양한 소식도 들으면서 무언가 내 정신 안에 뚜렷하게 질서가 지어졌다.
중세철학자 중에는 《질서(Ordo)》라는 책을 쓴 철학자들이 많다. 지금이야 이러한 주제는 너무나 식상한 주제일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세계는 질서로 되어 있고, 인간 사회도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질서가 곧 진리는 아니겠지만, 진리는 가장 먼저 질서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자연 질서’는 진리가 가장 기초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질서 이전에 ‘혼돈’이 있었다. 창조의 시작이 ‘무엇을 있게 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면, 질서의 확립은 일종의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사회를 만든다는 것도 사실은 자연 질서의 연장이요, 이것이 문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이란 ‘창조 작업’의 연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명의 반대는 ‘야만’이다. ‘혼돈’ 그 자체가 야만은 아니겠지만, 이미 만들어진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곧 ‘야만’이다.
예술가들이 말하는 문명이나 창조 작업이란 기존 질서의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 질서를 존중하면서 기존 질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만이 신의 창조 작업에 동참할 수 있고 그 작업을 완성까지 이어갈 수가 있다. ― 만일 누군가 인간과 반려견의 차이를 말해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의 ‘창조 작업’에 동참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유무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현대에는 기존 질서를 파괴만 하고 새 질서도 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창조 작업’이라고 부른다. 언어의 남용이다. 그리고 이는 어떤 의미에서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를 파괴하는 자, 이 자를 과거의 대다수 문명에서는 ‘악마’ ‘마귀’ ‘악귀’ ‘귀신’ ‘더러운 영’ 등으로 말해온 자이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자를 “더러운 영, 마귀”로 부르고, 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군대”라고 부르고, “돼지 떼”에게 넣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의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르 5, 9] /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마르 5 26-17].」
왜 질서를 파괴하는 자가 “군대”라는 이름을 가졌는가? ‘군대’라는 말은 상징적인 말이다. ‘다수’ ‘무리’라고 해야할 것이다. 인간과 마귀도 영적인 진리 앞에서는 매우 나약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진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 대신에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연대’ ‘결탁’ ‘다수’가 되는 것이다. 군대는 또 다른 상징을 가진다. 오직 대장에게만 명령권한이 있고, 모두는 그 명령을 따라야 한다. 한 마디로 자유의지는 오직 단 한 사람, 우두머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군대는 대장이 눈이 멀게 되면, 모든 군사들이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진리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절대자 앞에선 단독자여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은 군중, 무리,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힘, 물질, 돈을 차지하는 것이다. 모든 문화가 문명이 돈을 좀더 벌기 위한 목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질서’를 먼저 파괴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질서의 파괴는 영적인 질서의 파괴를 의미한다. 자연의 질서, 생태계의 질서, 사람의 질서는 사실상 모두 영적인 질서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이 세계는 ‘영적인 질서’로 되어 있다. 영적인 질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창조주’를 알아보는 것이다. 가장 하찮은 것 같은 들꽃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그것이 영적인 질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러한 영적인 질서가 무질서하게 되고, 파괴되고 있다. 소위 ‘정치적인 올바름(pc주의 / political correctness)’이란 기존에 존재하였던 ‘영적인 올바름(spiritual correctness)’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선(善)’을 창출하는 한, 좋은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가 오히려 기존에 존재하였던 ‘선’을 파괴하는 한, 그것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악이란 가장 먼저 건전하고 건강한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폭력, 야만적 행위는 악의 가장 일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자연 질서를 파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질서를 파괴하고, 부모 자식간의 질서를 파괴하고, 남녀 간의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과 기계 사이의 질서를 파괴하고, 선과 악의 질서를 파괴하고, 심지어 신과 인간 사이의 질서마저 파괴하면서 세상에 온갖 종류의 무질서를 낳는다.
오늘날 가장 두드러진 악의 현현은 ‘질서의 파괴’ ‘영적인 질서의 파괴’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도처에 물질주의가 득세하는 것이다.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이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하는 '모호한' 용어나 사상을 만들어 내는 것도 사람들이 질서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악귀들이 왜 돼지 속에 자신들을 보내어 달라고 했을까? 돼지는 당시 사람들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물질주의와 부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오늘날 마찬가지이다. 진리를 만난 악마는 오직 물질에 도피하고 그곳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다. 평생을 써도 모자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도 오로지 목적은 돈을 축척하려는 이 이상한 기현상은 곧 그것을 추구하도록 뒤에서 부추기는 자가 ‘악마’라는 것 외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분명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시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