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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카페를 이제 찾았습니다. 박종명 기자님 감사합니다.
먼저 새로오신 이혜훈 회장님께 첫 인사 드립니다.
저는 유관순 열사의 학력을 인정받아 역사 바로세우기에 10년을 넘겼습니다.
담당자들에게 물어보면 전퇴학 관련 서류를 제시하라는데 일제에 의하여 강제폐교 되었던 학교라서 흔적도 없습니다. [영명100년사] 책자를 직접 들고 가도 인정을 아니합니다.
1914,1915학년도를 공주영명여학교에서 2년 수료하고,
1916년 4월 1일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으로 편입학하여야
당시의 학제상 맞습니다.
다행히 국가보훈처 유관순 공훈록에 2월 17일자로 공주영명여학교 수학 뒤에 편입학 까지는 인정 받았지만 영명학교 [ 2년/이화학당 3학년 ]은 인정하기 어렵다는 전화응답을 받고 고민 중입니다.
이런 오류는 유관순 저자 이정은 전독립기념관연구관의 오류를 메일로 증언 받았기 때문에 걱정도 아니하였는데 10년을 넘도록 인정을 못받아 지지부진 되었습니다.
이정은 메일 증언(2005.11.14)
최근 공주 3․1운동 학생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강윤 선생(이분의 성명은 강윤이 맞습니다.)의 아드님이 미국에서 건축가로 일하시다가 은퇴하여 샌디에고 근처에 사시는데, 그분은 1955년 미국에 와서 공주에서 봉사했던 윌리암스(우리암) 선교사를 만나 들었던 이야기를 제게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습니다.
가. 유관순은 공주에서 영명학교를 다녔다.
나. 명철했던 유관순은 집이 매우 가난하여 교회에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사애리시 부인이 공주로 데려다 기르며 영명학교 초등과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킨 것이다.
다. 사 애리시 부인은 유관순에게 2년간 공주에서 교육시키면서 남녀평등, 계몽사상, 자주독립정신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유관순 저자가 증언한 이 말도 못 믿는다고 하더군요.(국가보훈처, 천안시유관순열사기념관) 어이가 없어 [국민신문고]를 울려서 국가보훈처는 [공주영명여학교]만 인정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정리한 향토연구(2014)에 기고한 원문을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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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柳寬順) 열사 첫 학교수업은 공주영명여학교(公州永明女學校)에서
- 2년 수료(二年修了) 후 이화학당(梨花學堂) 보통과3학년 편입학 -
박철희(朴哲熙)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의 초기 역사와 유관순(柳寬順)의 학력이 규명되었고, 그 외 관련자료를 제출하였는데도 국가보훈처는 ‘전출입 학적부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면 공훈록에 영명의 학력(學歷)을 첨가할 수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10 수년 동안 그 난제의 해답을 얻지 못하여 다시 각종 자료를 검토하여 재정립한다.
지난 2005년도 기대를 걸고 이화여고동창회사무실을 방문하여 얻은 자료는 1994년 발간한 『이화100년사』 단 한권이다. 본문 중에서 ‘공주 감리교 충청도 교구에서 일하던 사애리시 부인을 따라 편입학 하였다’는 사실과 부록 연표에서는 1916년 ‘류관순 입학’ 다섯 글자도 확인하였다. 퇴임한 편찬인 정영무 선생을 수소문하여 편입학 전 학력을 문의 하였으나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유관순이 1915년 ‘이화학당 교비생(校費生)으로 공부할 때’ 어록이 어떻게 편입학 이전에 생성되었을까? 선후가 맞지 않지만, 이화여고에서도 유관순의 이화학당 편입학 당시 전학력(前學歷)을 알수 없다고 한다. 1916년에 이화학당 편입학한 사실은 ‘두 학교의 100년사’와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도 일치한다.
수집한 자료 중에 1995년 『天安獨立運動史』는 유관순의 생몰년 오류, 영명여학교 입학사실도 누락, 유관순 오빠 유준석(俊錫)의 공주시장 항일독립만세운동은 천안 아우내장 만세와 동시 발생하였는데, 그 시기 역시 오류이다. 2004년 『유관순』의 저자 이정은 연구원은 하필 박화성의 『타오르는 별』을 인용하여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교를 다니지 않았고,”라고 단정한다.
필자에게 큰 충격이었다. 박화성과 이정은이 같은 오류를 범한다. 『유관순』을 읽던 중 매우 다급하여 이정은 연구원에게 10여 항의 문의 메일을 보냈다. 이정은 독립기념관연구원의 2005년 11월 14일 12:53에 “근래 들으니 ‘유관순은 영명학교를 2년간 다녔다’라는 반가운 답 글”을 받고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까지 ‘유관순의 학력’을 수정하려 하여도 이정은의 『유관순』 때문에 유관순역사 바로세우기를 할 수가 없다. 오류를 인정한 이정은이 기회가 되면 글을 다시 쓴다고 말한 것이 10년이 흘렀지만, 문의 결과 수정 글을 쓰지 못하고 퇴임하였다고 한다. 이 문제 때문에 이정은이 여러 차례 전화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해결책이 모호하다고 하니 무책임하다. 와병 중인 필자는 언제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래서 필자가 경험한 ‘영명100년사 편집 초심’으로 돌아가 공주 영명학교 초기 역사를 간략히 요약하고, 유관순(柳寬順, 1902~1920)과 사애리시(史愛利施, Mrs. Alice J. Sharp, 1871~1972)의 관계를 재확인하여 ‘사애리시 여사가 유관순을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2년 수료’ 시킨 후 이화학당에 편입학 시킨 사실과 우리암 교장(선교사)은 대한민국 건국공로자요, 김관회 교사는 유관순 남매를 가르친 애국지사라는 진실도 밝히고자 한다.
1. 영명학교 초기 역사 요약
『영명100년사』 편찬 때에 간추린 영명학교 초기 역사는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남학교 ‘명설학당(明設學堂)’은 1904년 사(史, Robert A. Sharp, 1872~1906)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당시 남학교는 한명의 교사(助事, 배재학당 윤성열 尹聲烈)와 몇 명의 소년으로 구성된 작은 학교(a small school)라고, 우리암(禹利岩, Frank, E. C. Williams) 교장이 작성한 문서에서 밝혔다. 여학교 ‘명선학당(明宣學堂)’은 사(史) 선교사와 결혼한 사애리시(史愛利施, Mrs. Alice J. Sharp) 부인이 1905년 설립하였다. 사(史) 선교사가 1906년 갑자기 소천(召天)한 후 미망인 사애리시(史愛利施) 부인이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음식을 전폐하고 오열을 토하였다.
공주 영명여학교 창설자 샤프(史) 선교사 부인 이미지
그러나 몇 개월 후 마음을 수습하고 다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신앙심으로 버티면서 전도하는 나약한 사애리시부인의 안정을 취하기 위하여, 휴가가 주어져서 잠시 귀국한다.
이때(봄 학기)는 학교가 문 닫을 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보이나, 대한매일신보에 ‘공주부 야소교사립중흥학교 公州府 耶蘇敎私立中興學校’ 라는 교명이 확인되고, 구조의연금납부자 명단에 남·녀학교 학생명단과 교사명단이 한 면에 나타났다. 학교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근근이 운영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애리시 부인의 뒤를 이어 1907년 서사덕(Mrs. May Shattuck, 徐思德) 부인이 명선여학당을 맡게 되었으나, 얼마 뒤에 남편 서원보(W.C. Swearer, 徐元輔) 선교사의 건강 악화로 귀국한다. 그 빈 틈을 O. M. 터틀 교장이 전임되고, 우애리시부인이 거들어 운영되고 있었던 것 같다. 이화부속여학교 일람표에 [공주여학교]라고만 적시되어 감리교계통의 학교는 공주영명여학교 뿐이다. 사애리시 부인은 1908년 8월, 2년 만에 재입국하여 폐쇄직전의 명선여학당을 소생시킨다.
1906년 가을에 우리암(禹利岩, Frank, E. C. Williams) 선교사 부부가 파송되어 10월 15일, 15명의 학생과 2명의 교사를 모집하여 ‘공주부 야소교사립중흥학교 公州府 耶蘇敎私立中興學校’를 재조직하고, 다음해 교장으로 재직하기 시작한다. 우리암 교장의 남학교는 1909년 7월 26일자로 ‘사립영명학교 私立永明學校’ 설립인가를 받았다. 명선여학당도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 설립인가를 별도로 받았는지는 확인이 안 된다. 당시 사애리시 부인은 인접지역을 오가며 지성으로 전도한 소득으로 강경 ‘만동여학교’, 논산 ‘영화여학교’를 설립한다.
당시 명선여학당의 교육목표는 아래와 같다.
1) 신앙에 터를 두고 자아발견으로 생활을 정화하자.
2) 생명을 존중하고 개화에 힘쓰자.
3)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는 사상을 갖자.
4) 고결한 성품과 가정의 융화로 생활습속을 바로잡자.
5) 배우고 또 배워서 지식을 축적하여 인류에 공헌하자.
6) 인류 공존의 의의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자.
7) 국가와 민족 의지를 굳게 하자.
이 교육목표는 노마리아, 박루이사, 유관순 등의 영명여학당 생도들의 인생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사애리시 부인과 유관순의 운명적 만남
사애리시 부인은 1913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 제1회 졸업자 중에는 유관순 사촌 오빠 유경석과 결혼한 노마리아(盧馬利亞)는 한국최초의 여성경찰서장을 역임 후에 장로가 되며, 성악가 박화숙(朴華淑, 박루이사, 공주장 항일운동 참가자)은 미국유학 후 영명학교에 돌아와서, 교편 잡고 있던 이묘묵(李卯默) 교사(훗날 영국공사)와 혼인한다.
사애리시 부인은 당시 천안지역에도 열심히 전도하였다. 유관순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령리 교회(혹은 야학당)를 심방(부흥회)할 때 동행하면서 이다. 특히 ‘관순의 두터운 신앙심과 주일학교를 열심히 인도하는 것을 보고 관순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관순도 사애리시 부인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사회 봉사활동에 감화를 받아 존경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사애리시 부인은 관순의 신앙심, 지도력, 자신감, 봉사정신 등에서 장래가 유망한 소녀상을 발견하였던 것 같다.
사애리시 부인은 관순을 조용히 불러 말하기를,
“관순 양이 공부하기를 원하면 내가 서울의 이화학당에 보내줄 수 있으니, 우선 영명학교에서 교육을 받아보는 것이 어때요?”
하고 관순의 의향을 묻는다. 당시 관순의 아버지는 홍호학교를 경영하다 빚을 졌던, 유학에 밝은 교육자, 신앙인이었다. 아버지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관순이는 이튿날 사애리시 부인을 따라 공주에 오게 된다.
따라서 사애리시 부인이 관순을 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시켜 2년 동안 공부 시킨다.
1915년에는 사립영명여자고등학교로 개편되어 보통과, 고등과가 병설되었으나, 사립영명학교 남학생은 재정상 1916학년도부터는 보통과를 폐지하게 된다. 교육비부담이 늘어나던 당시 사애리시 부인은 이화학당 프라이 학당장에게 사정을 말한 결과, 마침 교비생 자리가 비어 있어서 사애리시의 양녀로 관순은 손쉽게 편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관순은 이화학당에 전학 간 후에도 방학 때는 고향에 내려와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특히 모교인 영명여학교에 찾아와 옛 선생님들과 친구들을 만나 서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사애리시 선생님의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공주 영명학교에서 배움의 싹을 틔운 유관순이 3·1항일독립만세를 외치다 산화한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고 본다. 또 어린 두 남동생을 길러주는 황인식 교감 선생님과의 인연도 간과할 수 없다. 영명학교에는 친오빠가 재학한다. 동생 유관순이 아우내시장 독립만세운동을 주도, 같은 시각에 오빠 유준석은 공주시장 독립만세운동을 주도, 같이 옥고를 치른다. 공주와 천안의 항일만세운동은 영명여학교 출신 이화학당 박루이사(박화숙 공주 항일만세 관련자)가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우리암 교장이 처참한 사실을 감리교 본부에 아래와 같이 보고 한다.
“그 중에 제일 참혹 잡언(雜言)한 것은 한 교우(유중권)의 가족이 당한 사실이외다. 주인 부부(유중권, 이소자)는 참살을 당하였고, 그의 자제(유준석)는 여러 달 동안 감옥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고생을 당하였고, 그의 여식(유관순)은 3년 징역의 선고를 받았고, 그의 유자 2아(황인식 교감이 양육)는 무의한 가련한 경상(境狀)을 목불인견(目不忍見)이외다. 큰 환란을 당하였으나 신자들이 소무퇴보(少無退步)하고, 일향전진(一向前進)하여 교무(교회의 사무)를 처리하는 중이외다.”
( )속 성명은 필자 주관으로 넣은 것임 (우리암이 본 유관순 가정 3.1운동 참상)
3.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 2년 수료 후에 이화학당으로 전학
유관순이 2년간 수학한 공주 영명여학교 고등과는 1932년 영명실수학교로 남·녀 공학하며, 영명여자보통학교는 심상소학교로 바뀐다. 결국 1940년 우리암 부부와 사애리시 교장이 강제 출국 당하고, 1942년 두 학교가 모두 폐교 당한다. 학교 건물은 군부대로 사용되는 등 우여 곡절로 8년간 문 닫혀 사립영명학교의 일제강점기 공적 기록부는 남아 있지 않다.
불행 중 다행히 2002년에 철거한 1921년 건축물 주초 속에서 ‘1916년까지의 학교역사(타임캡슐)’가 출현되어 남학교의 초기 역사는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으나, 여학교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증언’과 개인 소장의 ‘사진’ 몇 매와 ‘신문지상의 기사’ 몇 점뿐이다.
이화백년사에 1916년 이화학당에 “유관순 입학”은 분명하나, 기타 유관순에 관련된 저서들을 살펴보면 잘못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심지어 ‘유관순은 영명학교를 다니지 않았고,’라고 기술한 예도 있다. 때 늦었지만 공주영명개교 제100주년기념행사 준비로 다음과 같이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한다.
유관순 열사 행적 소개(흉상 받침대에 계시함)
영명개교100주년기념탑에 우뚝한 유관순 열사 흉상(왼편 조순형, 정진석, 김현태, 유근창, 김철운 등)
첫째, 이정은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유관순』 저자의 답 글.
“최근 공주 3․1운동 학생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독립운동가 강윤(姜沇) 선생의 아드님이 미국에서 건축가로 일하시다가 은퇴하여 샌디에고 근처에 사시는데, 그분(강신근)이 1955년 미국에서 당시 공주에서 봉사했던 윌리암스(禹利岩) 선교사를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제(이정은 본인)게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습니다.”라고 필자에게 알려왔다.
1) 유관순은 공주에서 영명학교를 다녔다.
2) 명철했던 유관순은 집이 매우 가난하여 교회에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사애리시 부인이 공주로 데려다 기르며 영명학교 초등과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킨 것이다.
3) 사애리시 부인은 유관순에게 2년간 공주에서 교육시키면서 남녀평등, 계몽사상, 자주독립 정신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둘째, 애국지사 강윤(姜沇) 아들 강신근이 전하는 우리암의 증언.
1919년 4월 1일(음3.1) 공주장터 3·1항일독립만세 운동의 주도자는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 33세, 영명고3회, 일본 와세다대학졸) 외, 영명학교생도 공주 유준석(柳俊錫, 愚錫, 寬玉 20세, 영명고10회-유관순 친오빠), 부여 노명우(盧明愚 20세, 영명고10회), 논산 강윤(姜沇, 21세, 영명고10회), 연기 윤봉균(尹鳳均 20세, 영명고10회), 공주 양재순(梁載順 19세, 영명고10회), 공주 이화학당생도 박루이사(朴婁以士 19세, 영명여학교1회) 등이며,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등 10명은 유죄, 옥고 4개 여월 만에 집행유예 2년으로 모두 석방(판결 8. 29)되었다. 최종식 한명은 면소처리 되고, 목사들과 동경 청산학원생들 8명은 무죄로 석방된다.
이 판결은 원칙이 무시되고, 4월 1일 사건을 4월 15일 제정된 신법과 구법을 부당하게 적용하였으며 또 유죄와 무죄의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 즉 ‘목사와 청산학원 생도 등은 범법행위는 명백하나 치안을 방해하는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무죄라 하며,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에게만 유죄로 판결한 것은 총독부(일제)의 잘못이라고 명치대학 교수는 평가한다.
<이미지 생략(찾지를 못하여 송구)>
공주와 천안의 4·1항일독립만세운동을 매개한 이는
이화학당생도 박루이사(朴婁以士 19세, 영명여고1회)로 추정(왼쪽3번째)
애국지사 강윤은 1920년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우리암 교장의 주선으로 일본 선교사겸 건축가 보리스(Vories W. M) 사무실에 근무하다가 1923년 간사이공학전수학교(關西工學專修學校: 지금의 大阪工業大學)에 입학, 건축수업을 받는다. 강윤은 학교·교회·YMCA,·병원 등 기독교 감리교의 선교목적을 위한 건축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1938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건물, 회현동 감리교회, 대표작 태화기독교사회관 등 ‘보리스건축’의 실현에 진력한다. 광복 후 설계사무소를 내고 감리교선교부 부탁의 건물, 중앙대학교, 한국신학대학교 등 많은 건물의 설계를 한다. 1967년 뇌출혈로 고생하다가 1975년 돌아가셨다.
정부에서는 2002년에야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한다. 뒤늦게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3묘역 111호에 안장되었다. 이름 모를 탈색된 꽃을 무궁화로 교체하고 성묘하였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영면하신 강윤 애국지사(애국지사3묘역 111호)
애국지사 강윤 선생 독립운동 내용과 가계
2005년 윤용권에게 미국 강신근(강윤 3子)이 제공한 우리암 선교사, 자기 고모의 말.
1) 우리암 선교사 부부와 사우어 목사 부부 말씀이, 사애리시 선교사가 유관순의 고향에서부흥회가 끝나고 공주로 데리고 와서 수양딸로 삼았고, 2년 정도 데리고 공부시키다가 서울 이화학당으로 편입시켰다.
2) 강신근의 큰 고모 강나열은 유관순과 같은 때에 영명학교를 다녔다. 그 고모 말씀에 사애리시 선교사가 관순이를 유별나게 친딸처럼 보살펴 주고, 사랑을 해서 학생들이 다 부러워했다고 한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관순이를 장래 여성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가 교사로 있던 이화학당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3) 관순이는 기초적 학문은 영명에서 배웠기 때문에 이화학당 편입이 가능했고, 또 사애리시 선교사의 딸로서 학비면제도 받을 수 있었고, 생활비도 대주었다고 한다.
4) 이때 관순의 오빠인 유준석이 영명학교를 다녔으며, 관순이는 공휴일, 방학 때에는 천안보다 공주에 내려와서 사애리시 선교사를 도와주며 전도활동에도 같이 다녔다고 한다.
셋째, 박홍순(공주 제일교회 장로)이 들은 노마리아의 증언.
1) 노마리아 장로님은 영명여학교 제1회(1913년) 출신이다.
2) 고등과(1917년) 졸업하고 유관순의 사촌 오빠 유경석과 결혼하여 2남 5녀를 두었다.
3) 1960년대 말 경 노마리아 장노로부터 유관순이 영명여학교에서 2년간 재학한 것을 보았다고, 조창석 담임 목사와 청년부 학생 30여 명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노마리아가 영명여학교 고등과에 재학하였기 때문에 유관순이 재학하던 1914~1915년에 같은 건물에서 선후배로 유관순의 언행을 보고 들은 것은 틀림없다.
유관순 동생 2명 숙식제공 영고2회 공주영명여학교 2년 수료
(유관순기념사업회 1947년 발기, 명예회장 조병옥 박사)
넷째, 손자 황용배가 전하는 영명학교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한 황인식 교장의 증언.
1) 조부님에게서 유관순과 오빠 유준석이 영명학교 다녔다는 이야기를 집에서 들었다.
2) 조부님은 영명중학교 제1회 출신이고, 조모님은 이화학당 우등생 출신이시다.
3) 선교사들은 가능성이 보이는 학생들을 학년 관계없이 남학생은 평양 숭실, 서울 배재, 여학생은 서울 이화학당으로 유학시켰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들었다.
다섯째, 박광희(전 동창회부회장)가 전하는 독립운동가 양재순의 증언.
1970대 말경 동창회명부를 작성할 때 일어 국역과 동창 명단을 수집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양재순이 운영하는 공제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1) 유관순 열사의 영명여학교 재학한 사실에 대하여 들었다.
2) 조병옥 박사와 방인근 소설가 이야기, 모교와 나라 발전에 노력하라는 당부의 말도 들었다.
3) 모교가 기독교 학교임을 명심하라 하고 신앙생활도 강조하였다.
여섯째. 송현강 교수가 전하는 유관순 학력
필자는 최근 공주세광교회에서 “공주기독교의 기원과 전개”라는 학술발표를 듣게 되었다. 한남대 송현강 교수는 “사애리시 여학당장이 특히 유관순을 추천하여 영명학교와 이화학당에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라는 말에 귀가 번뜩 하였다. 이러한데도 유관순 열사의 학력(學歷)에 대하여 더 이상 의심할 이유가 있을까?
<유관순 열사의 학력에 관련된 증언 결론>
유관순(柳寬順)은 사애리시 여사의 주선으로
공주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 보통과 2년을 마치고,
1916년 이화학당(梨花學堂)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학 하였다.
4. 우리암 교장(선교사)은 대한민국건국 유공자, 김관회 교사는 애국지사
필자는 2004년 초에 70객의 선배들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1) 우리암 교장은 조병옥, 황인식, 안기영, 박화숙 등을 미국에 유학시켰고,
2) 2·8 독립선언을 주동한 윤창석과 졸업생 김관회, 강윤, 오익표, 방인근, 최종식, 안성호 등을 일본 청산학원, 와세다대학 등으로 유학 보냈으며,
3) 유준석과 민태식 등 경성법학전문학교, 안사영, 양재순 등 연희전문학교 의과 진학 시켰고,
4) 정환범, 오익표, 안기영 등은 중국에서 임시정부요원, 학교 운영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5) 영명학교 관련 독립운동가는 50여 명을 배출, 독립유공자 표창은 22명에 불과하다.
우리암 교장은 선교사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신교육을 통하여 한국의 농촌계몽에 이바지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항일독립만세운동의 기반을 다졌고, 실업기능을 길러 자주자립정신을 키워주는 등 영명학교와 한국을 진실로 사랑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을 당하였다. 즉시 인도로 가서 한·영 연합군에 배속된 한국공군에게 영어교육도 하였다.
공주영명학교 우리암(禹利岩, Frank, E. C. Williams) 교장은 건국유공자(建國有功者)
우리암 선교사 부자(父子)는 광복 후 미군정청 농업고문, 아놀드소장 정치고문을 각각 역임하고, 교사 이묘묵은 하지 중장 보좌관을 맡았으며, 우리암 제자 황인식은 군정청에서 군정내각조직에 참여, 조병옥이 경무부장(후 내무부장관), 또 충남 도지사가 3명(황인식, 서덕순, 박종만), 의사 양재순은 충남보사국장, 영명교감 도상규는 논산군수 역임 등 우리암, 우광복 외, 황인식, 조병옥, 안신영, 정환범, 박종만, 이묘묵, 임영신, 이규갑 등 관료와 정치가 등을 셀 수 없을 만큼 배출하였다. 즉 대한민국건국에 크게 공헌하였다. 국가에서는 우리암, 사애리시 등은 공적이 충분한데, 아무런 포상도 하지 않으며, 공주시민들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우리암 교장(선교사)의 사적이 점차 묻히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김관회(金寬會) 선생은 공주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주도한 애국지사(愛國志士)
즉 1913년부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한 김관회 선생이 1919년 4월 1일 공주시장 항일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거사에 필요한 모든 경비도 부담하였고, “태극기는 김관회 선생의 부친 포목점에서 점원들과 밤새워 그렸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김관회 선생이 금융조합에 입사한 시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친일자들이 지지하는 금융조합이사를 내세우려 하였으나, 공주읍 애국시민들의 열렬한 추천으로 계속 사양하던 김관회 선생이 금융조합이사직을 할 수 없이 수락하였다. 김관회 이사의 신망으로 자금이 몰려들고, 따라서 어려운 주민들에게 대여를 많이 하는 등 소외계층의 편에서 운영하니 사업이 날로 번창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앞잡이들이 시기하며 그에 따라 일제가 김관회를 도태시키려는 계략에 휘말려 대여금을 급히 회수하라는 강요에 할 수 없이 자기 재산을 다 팔아 대여금을 채워도 부채(대출금)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일제의 재촉에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빈털터리로 3-4개월 만에 부인도 모르게 어디로 몸을 숨겼는지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실은 “김관회 선생은 친구가 많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내는 중, 제주도 출신 인사의 권유로 다시 제주도로 피신, 작은 서당을 운영하며 고씨부인에게 연락하여 1926년대쯤 남모르게 부부가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에 참여해달라는 부탁도 뿌리치고, 소금 장사를 하는 등 자력으로 살다가 정부수립 후 지인의 추천으로 당진과 예산에서 중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김관회 선생이 친일자라면 누가 감히 공직에 천거하겠는가.
이렇게 항일독립만세운동을 목메어 외쳤던 애국지사를 한 순간의 애민정신으로 단 몇 개월 금융조합에 몸담은 것이 친일자로 몰리는 억울한 사연을 국가보훈처는 아는지 모르는지!
공주영명개교제100주년기념탑, 항일운동사 조명, 국제학술회의 개최기념
(정명진전교장, 김호일 교수, 강영훈전총리, 윤병석교수, 명치대교수, 안창식(안신영아들))
전말을 자세히 조사 하지도 않고 심사하는 심사 위원들은 무엇을 근거로 판정하였는가!
공주영명의 영원한 스승 김관회 선생은 언제쯤 명예회복이 될까?
--- 민원을 찾아서 해결해주는 좋은 정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
영명학원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여 기독교 역사와 우리암 교장, 김관회 교사, 유관순 열사 등의 업적을 구명하여 ‘기독교 역사와 영명학원의 역사바로세우기’에 앞장서주기 바란다.
다행이 요즈음 공주기독교역사위원회에서 기독교 역사를 규명하고자 ‘기독교역사 세미나’를 개최하는 현장을 보고 한시름 놓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기독교단체, 학자, 지자체, 영명학원, 공주시민들의 공동 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맺음말
공주영명학교 교정에는 개교100주년기념탑에 우리암, 황인식, 조병옥, 유관순의 흉상이 우뚝하지만, 운동장 옆의 영명동산에는 샤프 선교사, 우리암의 아들 우광복과 조졸한 딸도 함께 묻혀 있고, 또 다른 선교사들이 잠든 곳이다. 접근할 수 없는 그늘지고 찬바람이 부는 북풍받이 언덕에 쓸쓸히 누어있는 선교사 묘역을 참배하던 장면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2014년 여름에 영명학교를 9년 만에 방문, 선교사묘지 정비와 답사길 개설 사업이 계획 중이라는 안정석 실장의 말을 듣고, 기독교연합회를 방문하여 확인하였다. 동시에 충남역사박물관에서도 유관순 열사 선양 계획을 수립 중인 것을 확인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2007 국제학술발표자를 안내, 禹光復 박사(Dr. George Z. Williams)墓所 참배 후 담화 모습
공주영명남학교 설립자 샤프 선교사/ 우리암 아들 우광복 묘소/ 차례로 참배
외쪽부터 윤우/ 日사사가와 노리가츠/ 中짱스/ 김태수/ [해설 윤용권]/ 정복기/리보온/ 필자는 촬영
그러나 아쉬운 것은 유서 깊은 기독교와 신교육 발상지 영명학교의 1918년 여학교 건물, 1921년 창건한 남학교 본부 건물들이 왜 철거 되었는지 자세히 모르는 공주시민과 학자들이 학교에 등 돌리는 사태도 있었다는 점을 영명학원, 학교, 동창회, 기독교계가 소상히 아는지 의문이다.
특히 학교 창립역사를 누락시키는 어이없는 일로 영명100년사 편찬위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 결과 영명학교는 2004년이 개교100주년인데, 어느 편견으로 2년의 학교역사가 축소되었다. 필자는 그 것이 부끄러워서 영예로운 편찬위원직을 사퇴하니 반송되고, 재차 사퇴서 송부할 때는 모모의 책상 속에 처넣어 두었다는 소식에 그 스트레스로 인하여 발병, 현재도 투병 중이다. 당시 영명중학교 윤용권 편찬위원장 주장으로 개교100주년 탑에 1906년 다음 줄에 간신히 1904~1905년의 영명학교 창립역사 소문자 두 줄은 기록되었다는 말을 듣고 확인한 바, 왜 1906년 이전의 2년 역사가 묵살 당하여 역순으로 씌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필자는 10수년간 잘못된 유관순의 연보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관련기관에서는 남의 탓으로 떠넘긴다. 존재할 가능성이 없는 근거(입퇴학 서류)를 제출하란다. 원하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유관순의 연보를 수정하는 선양작업은 현재의 규제 때문에 영원히 묻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 된 제도이다. 나아가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에 있는 대로 수정 요청하여도 차일피일 미루는 천안시(천안유관순열사기념관)의 행태는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다.
끝으로 더 늦기 전에 영명가족은 물론 공주시민이 합심하여 유관순의 영명학교 학력 찾기, 기독교 역사 재정립 등 20여명의 선교사 행적 규명, 사애리시 부부, 우리암 교장부부와 김관회 교사 등의 사상을 찾아 기리는 선양활동 등이 활짝 펼쳐지는 날을 학수고대하며 다음과 같이 제언한다.
<제언>
1. 국가보훈처와 천안시는 제발 죄짓는 일이 아니면 융통성을 발휘하여 주기 바란다.
(틀을 깨는 행정은 시간, 노력, 경비의 낭비를 줄이는 창조경제의 일환일 수 있다고 사려 된다).
2. 공주시민들은 신교육 발상지와 기독교 성지의 향토문화자원화에 협력하여주기 바란다.
3. 신교육발상지 영명학원은 분발하여 지역사회에 적극 이바지하기를 원한다. 특히 김관회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김관회3·1항일만세운동기념비]라도 세워주기 바란다.
4. 공주시는 우리암로타리, 유관순길, 항일만세로, 선교사 동산 등 그들 사적이 묻히지 않도록 배려하고, 아울러 공주3.1항일운동기념탑을 앵산공원으로 이설하여 그 뜻을 살려주기 바란다.
공주영명학교 개교100주년 기념탑 야경
추기 : 그림파일은 시간상 모두 띠우지 못하였습니다. 미안합니다.
[부록] : 公州永明學校出身 獨立有功褒賞者 現況
姓名 | 褒賞 | 功績 槪要(예시) | 備考 | |
年度 | 勳格 | |||
강윤(姜沇) 1899. 4. 28∼ 1975. 1. 30 | 2002 | 대통령표창 | 공주영명학교 재학(고등과10회) 중 공주읍 독립만세 참여 옥고 4월, 졸업 후 일본 보리스 선교사 밑에서 건축을 배우고, 이화여대 등 주요 석조건물을 설계. | 충남논산 |
김현경(金賢敬, 卿) 1897. 6. 20∼ 1986. 8. 15 | 1998 | 건국포장 | 영명여학교 제2회졸업, 공주읍 공주시장에서 전개된 공주 영명학교 독립만세시위에 참여, 약 5월간의 옥고, 유관순 시신 인수하여 장례. | 충남공주 |
노명우(盧明愚) 1897. 8. 5∼ 1936. 6. 11 | 1990 | 건국훈장 애족장 | 공주영명학교 재학 중 공주읍 독립만세참여, 이후 신문사 지국장을 지내며 부여농민학원창설, 농민청년회와 농민조합 조직, 부여농민조합연합회 지부 대야구락부 조직 옥고 2년. | 충남부여 |
박장래(朴璋來) 1899. 1. 3∼ 1940. 4. 6 | 1992 | 건국훈장 애족장 | 서울독립만세 직접 목격 독립가 익힘, 아산군 송악면 고향은 효과가 없을 것으로 판단, 공주영명학교 학생 규합 독립가 보급, 고등법원 기각, 징역 1년6월 옥고. | 충남아산 |
신현구(申鉉九) 1881. 10. 21~ 1931. 6. 17. | 1968 | 건국훈장 독립장 | 1906년 공주영명학교 교사, 1915년 이화학당 교사 역임 중 3.1만세운동 참가, 대한독립애국단 결성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1920년 징역 5년 옥고, 1927년 <심경>에 항일사상 글 등재로 징역 3년 6월 옥고 후 순국. | 충남논산 |
신현창(申鉉彰) 1892. 1. 7∼ 1940. 10. 21 | 1990 | 건국훈장 애국장 | 공주영명학교(영명학교보통과4회재학)졸업, 세브란스의전 졸업, 대한독립애국단 가입 및 독립운동자금 전달, 병원개업 독립운동자금 제공, 임시정부의정원 활동 및 한국노병회 가입, 신간회 가입 독립운동. | 충남논산 |
안신영(安信永) 1902. 3. 1∼ 1975. 5. 25 | 2006 | 건국훈장 애족장 | 공주영명학교 8년 재학 후 배재학당 2년 편입, 3.1 독립만세운동 참가, 미결수로 4개월 기결수로 6개월 옥고, 1937년 공주영명학교에서 조선어 교육과 노래 가르친 것이 문제, 옥고 5개월에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3개월 피해. | 서울 (충남청양) |
안창호(安昌鎬) 1884. 1. 5∼ 1969. 12. 31 | 1993 | 건국포장 | 공주영명학교3.1독립운동 선도 인물, 영명학교 김관회 교사 등과 함께 만세시위, 1932년 하와이 애국단 가입, 윤봉길의거 후원회 조직 후원금 모금. | 서울 |
오익표(吳翼杓) 1888. 6. 8∼ 1922. 10. 15 | 1991 | 건국훈장 애국장 | 공주영명학교 졸업, 서울감리신학교 졸업, 동경 청산학원 재학 중 항일운동 전개, 공주읍3.1운동참가 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항일운동 계속, 소성학교설립운영. | 충남공주 |
유관순(柳寬順) 1902. 12. 16∼ 1920. 9. 28 | 1962 | 건국훈장 독립장 | 공주영명여학당보통과 2년 수료, 1916년 이화학당보통과3년 편입학, 1919년 고등과1학년 말 남대문 독립만세참여, 천안 아우내 3.1독립만세 주도 5년형에서 3년형 확정, 옥중 만세운동, 고문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 | 충남천안 |
유우석(柳愚錫, 俊錫,寬玉) 1899. 5. 7∼ 1968. 5. 28 | 1990 | 건국훈장 애국장 | 공주영명학교 재학 중 공주면4.1독립만세 전개, 원산청년회 조직 계속 독립운동 전개, 옥고 6월과 원산청년회 조직 4년 구형, 부인은 공주영명학교 교사 출신 조화벽 독립운동가. | 충남천안 |
윤창석(尹昌錫) 1889. 8. 1∼ 1966. 8. 23 | 1991 | 건국훈장 애국장 | 공주영명학교(영명학교보통과 4회재학), 동경 유학생 대표로 조선청년독립단 조직, 그의 사회로 2.8독립선언식 거행, 옥고 9월 후에 공주영명학교 교사 역임. | 서울 |
이규갑(李奎甲) 1888. 11. 5∼ 1970. 3. 20 | 1962 | 건국훈장 독립장 | 한성사범학교, 신학교 졸업, 기독교 목사, 1919년 3월 20일 인천국민대회 참석, 한성임시정부조직 평정관, 동년 4월 10일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 동7월 의정원 청원위원, 1919년 7월 신간회 동경지회 집행위원장 등, 조국광복운동 앞장. 공주영명학교 교사 | 충남아산 |
이규남(李圭南) 1898. 12. 27∼ 1971. 5. 9 | 2004 | 대통령표창 | 1919. 4. 1. 공주에서 김관회 등이 영명학교(고등과6회)학생 동원 공주시장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할 당시 태극기 4본을 제작,배부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5개월의 옥고 | 충남공주 |
이규상(李圭尙) 1894. 5. 12∼ 미상 | 2004 | 대통령표창 | 공주영명학교(고등과3회), 경성전문학교 졸업, 공주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 공주면 독립만세 참여 옥고 5월. | 충남공주 |
이애일라 (李愛日羅) 1894. 1. 7∼ 1922. 9. 4 이명 : 愛羅,앨라 | 1962 | 건국훈장 독립장 | 이화학당 졸업 후 동교 교사 역임, 독립운동가 이규갑과 결혼, 공주영명학교 교사, 3.1운동 참가 구류, 1920년 수원, 공주 아산교회 부인회 조직 발각 고문, 1921년 천안 양대여학교 교사 시절 망명 피체 고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 충남아산 |
이정방(李鼎邦) 1900∼? 異名 : 李約翰 | 1990 | 건국훈장 애국장 | 정환범과 같이 중국 망명 1919년 3월 임시정부요인과 교류 항일운동, 손문을 방문 독립운동자금 모금, 1919년 8월 국내 잠입 혈복단부단장 활동, 영명학교학생 장인식을 공주영명학교 밀파 독립운동, 1920년 옥고 6월. | 경기수원 |
장인식(張仁植) 1900. 11. 11~ 1966. 11. 4. 異名 : 萬石,本榮 | 1993 | 대통령표창 | 1919년 서울 관철동에서 이약한(李約翰)의 권유로 대한민국혈복단에 가입 서무원 활동, 의친왕 이강 논고문 등 교부받고 공주영명학교 이활란 교사, 동교학생 유준석 등에게 독립가 보급 및 독립운동 권장, 피체 옥고 6월. | 충남논산 |
정환범(鄭桓範) 1903. 10. 9∼ 1977. 7. 14 | 1990 | 건국훈장 애국장 | 공주의 경천원명학교 졸업, 공주영명학교 재학 중 상해 신규식이 설립한 박달학원에서 공부, 임정국무총리대리 신규식의 밀명 수행, 후에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역임, 해방 후 주일대사, 청주대학장 등 역임. | 충북청주 |
조병옥(趙炳玉) 1894. 3. 21∼ 1960. 2. 15 | 1962 | 건국훈장 독립장 | 공주영명학교(보통과2회), 평양숭실학교, 연희전문학교졸업, 1914년 미국에서 흥사단 조직, 한인회 조직 독립운동, 1925년 수양동우회 조직, 1927년 신간회 결성,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 계획 옥고 3년 등 국내항일. 해방 후 경무부장, 내무부장관 민의원 등 역임. | 충남천안 |
조화벽(趙和璧) 1895. 10. 17∼ 1975. 9. 3 | 1990 | 건국훈장 애국장 | 1919년 개성 호수돈여학교 3.1운동 시위 주도, 1925년 공주영명학교 교사 역임 중 유우석과 결혼, 유관순 가족을 양양에 은신시킴, 동생 관복, 관석을 양육, | 강원양양 |
현석칠(玄錫七) 1880. 1. 23∼ 1943. 9. 23 | 2004 | 건국포장 | 1919. 4. 1. 공주야소교 목사로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 등과 영명학교학생 동원 공주시장 만세시위 주동, 한성임시정부수립 기독교대표로 참가, 독립운동 자금 제공및 격문인쇄 등 주도적으로 활약. | 평남평양 |
(22명)
독립유공 미지정자(후보자) :
우리암 교장/ 사애리시/ 황인식/ 김관회/ 김사현/ 김수철/ 안성호/ 박루이사(박화숙)/ 양재순/ 윤봉균/ 현언동/ 이활란(이계순)/ 신성우/ 최종식/ 외
김양옥/ 방인근/ 안사영/ 안기영/ 안기상/ 신이균/ 김진철/ 임영신/ 김유실 등 23명(무순).
첫댓글 감사합니다...덕분에 많은 상식 얻게 되었어요....
앞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씩 잘못 기록된 역사를 바로 세워가는 일이 중요한 일입니다.
계속 관심을 가지시고 좋은 자료 있으시면 카페에 올려 주세요
이 카페는 자료 창고입니다...편하게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졸고 읽어 주시니 영광입니다.
혹 유관순 연보 게시한 곳이 있으시면 위에 적시한 대로 수정하셔야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이전의 뿌리가 밝혀집니다..
유관순 열사가 애국심을 싹틔운 공주영명여학교 2년이 얼마나 중요한 행적인지 전문가들은 알 것입니다. 국가보훈처(일부)나 천안시유관순기념관 유관순 연보는 수수 10년 오류를 양산하였습니다. 선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