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마태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마태 22,2-3).”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5-6).”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8ㄴ-9).”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10).”
여기서 ‘하늘나라’는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이고,
‘혼인 잔치’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어떤 임금’은 하느님이고,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이시라면 신부는 누구일까?
바로 우리, 또는 바로 나, 즉 신앙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2코린 11,2ㄴ-3).”
신랑이 예수님이고, 신부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집’이고,
아버지의 집은 자녀의 집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우리나라이고, 우리 집입니다.
우리는 남의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를
가족으로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신앙인들이 ‘손님’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비유의 내용에 맞춘 표현일 뿐입니다.
‘초대’ 라는 표현도 뜻으로는 ‘신부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응답한 사람은 신부로서 신랑과 함께 잔치의 주인공이 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은 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없고,
아예 그 잔치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자기가 응답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비유의 전반부에 나오는 ‘잔치에 가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또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세의 삶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질 사람들입니다.
비유의 후반부에 나오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받아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표현만 보고서,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유대인들로,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이방인들로만 생각하면,
뭔가 많이 이상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유대인들의 ‘대타’인가? ‘대역’인가?
만일에 유대인들이 응답했다면 이방인들은 부르심을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고, 복음을 선포하신 것도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일입니다.
비유에는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그 표현은 ‘사람들을 모두’ 부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유를 단순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셨는데,
어떤 사람은 응답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응답했다고......
부르심과 응답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는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버려지는 처지가 되었는가?”의 차이만 중요합니다.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혼인 예복’ 이야기는(11절-14절),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라.”,
“응답했다면 응답한 사람답게 살아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믿고 응답하는 일은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고 끝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의 기회가 없는가?”
‘혼인 잔치의 비유’는 종말의 심판 상황에 대한 비유를 겸하기도
하니까, 비유 안에서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점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믿고, 응답하면, 그리고 신앙인답게 살면,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신랑과 함께 그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