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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직필이 만일 “구치소”에 수감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평생이 가도 전혀 읽어 보지 못 했을 책들을 “구속노동자 후원회”등이 보내주어 덕분에
읽어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 현대 한국사의 위대한 인물들 중에 하나인 전태일 선생님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에 대한 평전이었습니다.
정론직필은
아직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소선 평전”만을 읽고서도, 청년 전태일이 한국 현대사에서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아 알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정론직필의
판단으로는… 만일 앞으로 한국
현대사가 제대로 쓰이는 날이 온다면, 남한의 모든 “독재자”들은 그야말로 “인간 쓰레기, 오물 덩어리”로 묘사되겠지만, 그러나 “전태일 선생님”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 틀림없다고 봅니다. 무식한 정론직필이 전에는 전태일 선생님의 그런 위대성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곧 정론직필이
출소하게 되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전태일 기념관”과 동상을 찾아 볼 생각입니다.
나아가
정론직필이 출소 후 창간하게 될 인터넷 언론에서, 단지 “국제정치” 및 “경제” 문제만 전문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 분야도 추가하여 전문적으로
다루고, 나아가 주류 언론들이
보도하지 않는 노동 현장들을 정론직필이 직접 취재하여 보도할 생각입니다.
노동자의 어머니 – 이소선 평전
(650 페이지가 넘는 위 책의 극히 일부만 아래에 발췌해 보았습니다)
(p32) 전태일은 10명 남짓의 재단사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었다. (1969년 6월 말에) 모임의 이름은 ‘바보회’라고 지었다. 스스로 인간이면서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기계 취급을 받아왔기 때문에 바보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철저하게 깨닫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면 이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1970년 9월 16일, 그동안 자주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재단사들이 모여서 ‘바보회’를 일신해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고
새 조직을 만들었다. 삼동 친목회는 목적을 ‘연소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행동’ 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평화시장의 불법적이며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것을 하나의
발판으로 하여 공동으로 ‘투쟁’할 것을 활동지침으로
했다.
그들은 플래카드에 쓸 구호를 정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번 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 말이냐!
일단 구호가 정해진
뒤에는 세부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연설은 탁자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가 노동자들이 모일 때 그 자리에 내놓고,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그 위에 올라가서 근로기준법의 중요 조문을 소리 내어 읽기로
했다.
‘이런 조문이 다 무슨 소용이냐? 지켜지지도 않는 이따위 허울 좋은 법은 화형에 처해
버리자!’하는 취지의 선동 연설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선동 연설이 끝나면 곧바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전태일이 계속해서 구호를 선창한 뒤 삼동회 회원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함께 구호를 따라
외치면서 데모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화형식을 위하여
전태일은 휘발유통을 하나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계획이 세워지고 나자
전태일이 삼동회 회원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
전태일의 이 말이
바로 목숨을 던질 엄청난 결심을 품고 그 자신의 마음을 다지는 말인 줄은 아무도 깨닫지 못 했다.
분신
마침내 1970년 11월 13일 낮 1시.
몇몇 회원들이 복받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국민은행 앞길로 곧바로 뛰어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소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전태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희들 먼저 내려가서
담배가게 옆에서 기다려라, 난 좀 이따가 갈
테니.”
그들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의 말에 따라 전태일을
혼자 남겨두고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갔다. 삼동회 회원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웅성거리던 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경비원들과 경찰들의 몽둥이질에 이리저리 내몰리고 있었다. 먼저 내려온 회원들은 초조해하며 담배가게 옆에서 전태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약 10분 뒤에 전태일이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없이 한 친구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더니 눈짓으로 그를 사람 뜸한 옆 골목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누구 한 사람 죽어야 될 모양이다.”
전태일은 음성을 낮춰
말했다.
“내가 눈짓을 보내면
성냥을 켜서 내 몸에 불을 댕겨라.”
그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성냥을 든 친구는 어제저녁에 태일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내일 누구 한 사람 죽는 쇼를 한판 벌여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
그는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다. 순간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불길을 순식간에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전태일은 사람들이 아직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쳐나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을 쉬게 하라!”
“근로자를 혹사하지
말라!”
전태일은 몇 마디
구호를 짐승처럼 외치다가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때마침 그 자리에
서 있었던 한 회원이 근로기준법 책을 전태일의 불길 속에 집어던졌다. 삼동회가 계획했던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3분가량 타 들어갔다. 전태일의 몸은 옷의 엉덩이 부분을 제외 하고는 전신이 숯처럼 시커멓게 타고, 온 살결은 화상으로 짓물러 터졌다. 눈꺼풀은 뒤집혔고, 입술은 퉁퉁 부르터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간의 모습이라 믿기지 않는 그 참혹한 몰골로 전태일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내듯 울 부
짖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죽어가던 아들과의 약속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
어머니(=이소선)는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한 듯 아들이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이 아들을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 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 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이소선은 아들의 말을
듣자 웬일인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 같았다. 흉하게 탄 아들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태연한 것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에미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절대로 원망하지 않는다.”
“역시… 우리 어머니는 나를
이해해.”
전태일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 한마디를 하고는
손을 내밀려는 듯 몸을 움직여 보다가 도리어 잠잠해졌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요.”
아들이 꿈틀거렸다. 아들의 이 한마디는 어미의 가슴에 깊이 파고 들어와 박혔다.
이소선은 그 일이
고난에 찬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미루어 짐작하였다. 그래서 조금은 망설였지만, 입술을 깨물며 아들의 말을 되새기고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약속했습니다!”
전태일이 크게 외치더니
꿈쩍도 하지 않는 몸을 뒤척였다. 어머니는 놀라서 아들을
붙들었다.
“나는 왜 죽는가 하면,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요! 가냘픈 생명체(=평화시장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가 계속 병들어 가니까, 하루하루 병들어가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었어요. 안 보이는 벽과 창살이 우리를 가두고 옥죄고 있어서 그 단단한 벽을
허물기 위해 나는 작은, 아주 작은 바늘구멍이라도
내기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 작은 구멍을 자꾸 키워 가난한 사람, 근로자를 어두운 곳에 가두고 옭아매는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없는 사람도 살고 근로자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죽음을 서러워하거나 원망을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어머니보다 조금 일찍 죽는 것뿐이니까요. 나를 낳아서 키워 준 우리 어머니는 우리 친구들하고 같이 하면 슬프지도 않을 것이고, 외롭지도 않을 거예요.
전태일이 그 말을 마치더니 자기 친구들을 불러 달라고 했다. 병원에 와 있던 서너 명의 친구들이 전태일의 머리맡으로 다가섰다.
“…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도 꼭 이루어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 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게!”
(p48) 숨을 쉴 수가 없는지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오더니 그 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잦아들어 갔다. 의사가 면도 칼로 (전태일의) 목에 감긴 붕대를 잘라 냈다. 그러자 전태일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숨을 벌렁벌렁 내쉬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그 구멍으로 피가 주르륵 주르륵 쏟아졌다. 그리고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소선은 생각에 잠겼다. 아들 전태일의 뜻을 이룰 기회는 지금이다. 태일이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을 때까지 장례식도 시신 인수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신문기자들이 찾아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는 분명히 잘라 말했다.
“우리 아들의 뜻인 근로조건 개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체를 여기에 둘 겁니다. 우리 아들은 3년 전부터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불철주야 정당한 노력을 해왔어요. 나는 압니다. 노동청의 기만과 배신 때문에 죽어 갔어요. 하지만 내가 살아서 EDJEJS 일이 있더라도 태일이의 뜻을 이룰 겁니다.”
이소선은 (평화시장 업주들과
기관) 사람들이 장례 준비를
하느라고 이것저것 써 놓은 종이를 빼앗아 짓밟아 버렸다. 그는 8개 항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주일 휴가(유급 휴일) 제 실시,
둘째, 법으로 월급공 임금 인상,
셋째, 8시간 근로제(오버타임 수당제) 실시,
넷째, 정규 임금 인상,
다섯째, 정기적인 건강진단 실시,
여섯째, 여성 생리휴가 실시,
일곱째, 이중 다락방 철폐,
여덟째, 노조 결성 지원
이러한 요구 조건은(1970년) 10월 8일 전태일을 비롯한 삼동회 회원들이 평화시장 주식회사에 건의한 내용들이었다. 그야말로 근로기준법에 명시되어 있는 사항이 대부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 조건이었다. 제시된 요구 조건을 보더니 당국자들은 일단 장례를 치러 놓고 그런 것들을 해결하자고 했다. 이소선은 그들의 태도가 뻔뻔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어차피 육신에서 영혼은 떠났다. 중요한 건 태일이가 원하는 그 뜻이지 그 따위가 아니다. 태일이의 장례는 나 혼자서라도 치를 수
있다. 시체가 크고 무거워서 나 혼자 못 들고 가겠으면 내가 태일이를 썰어서
목은 목대로 내 치마폭에 싸 가지고 이산 저 산에다 하나 묻고, 다리는 다리대로 저 산에도
묻고 해서 장례를
치를 테다. 내가(전태일의
시신을) 동강내서
이산 저 산에다 묻는 한이 있더라도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장례식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 내 맘대로 하는데, 왜 너희들이 장례식을 하자 말자 하느냐? 너희가 죽여 놓고
너희가 장례식 하도록 기다릴 줄 아느냐!”
이소선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들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그 목사는 여러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돈을 합치면 4,700만
원 정도
되니까 이 액수면 유례가 없는 것이고, 또 집사(=이소선) 님은 남편도 없고 아이들도 어리니까 돈이 있어야 남은 네 식구를
먹여 살리고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목사가 하는 소리에
옆에 있던 다른 목사가 귀를 쫑긋하기에 이소선은 참고 있던 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재빨리 신발까지 벗어서 어깨 높이로 쳐들었다.
“야! 이 나쁘고 양심 없는 목사야! 너도 목사냐? 연약한 여자가 자식 잃고 남편도 없어 가지고 돈을 받고 죽은 자식 시체 값 받고 팔려고 하면, 너는 자식 뜻을 이루어야
한다고 나한테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말해줘야 옳지! 개놈의
새끼! 모가지를 빼기
전에 절대로 내 앞에 보이지 마라, 내가 이 고무신 짝으로 너를 때리고도 남지만은 그래도 하나님의 종이라니까 하나님의 입장을 봐서
참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가지를
빼서 죽여버린다. 이 돼먹지 못한 놈의 새끼, 지금 어디다 대고 무슨 말을 하는거야!”
태일이가 살아 있을
때 근로기준법 책을 펼쳐 놓고 자신에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대학생들은 미리 공부를
해서 이런 근로기준법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나는 학교를 못 가서 이제야 이런 것을 알게 되었는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으면 이 어렵고 한문
투성이인 근로기준법을 보다 쉽게 공부할
수 있을텐데…” 이소선은 태일이의
그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학생이라면 정말로 이런 사정을 알고 우리 편이 되어 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만나 보자 결심을 굳혔다. 삼일 다방에 들어서자 대학생 3명이 있었다.
“저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다니는 장기표라는 학생입니다. 얼마 전 저희가 『자유의 종』이라는 신문에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에 관해 기사를 실었는데, 그 이후 이 문제에 대해서 꾸준히 관심을 갖지 못해 전태일 군은 결국 죽게 되었군요. 죄책감도 있고, 또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의논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이소선은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한번 말 좀 해보라고 대뜸 물었다. 그 학생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자신들이 학생상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시신을 자기들에게 인수해 주시면 자기들이 전국의 학생들을 모아서 장례를 치르고 노제를
평화시장 앞에서 지내겠다고 했다.
다음 날 전태일의
장례를 학생장으로 치른다는 보도가 나가고 전국의 학생들이 성모병원으로 집결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긴장감이 더해져가는
가운데 학생들이 떼를 지어 성모병원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조문객이 늘어났다. 복도를 가득 메운 조화가 급기야는 성모병원 밖에까지 늘어서기 시작했다. 정부의 고관에서부터 노동청장, 평화시장 업주들,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생판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조화를 갖다 놓는 것이었다. 병원 복도는 말할 것도 없고 성모병원의 마당에까지 ‘고(故) 전태일’ 이라고 쓴 조화는
늘어만 갔다. 그날 밤 학생들은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여 30여 명이 영안실에 와서 함께 밤을 새우며 얘기를 나누었다.
영안실에 조문 온
노동청장이 이소선을 만나자고 했다. 이소선은 그 사내(=노동청 장) 앞으로 가서 어떻게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장례를 못 치르고 있다기에 제가 장례식에 도와드릴 것이 있나 협조하러 왔습니다.”
‘내 아들 태일이를
죽게 한 책임자요, 또 태일이가 분신하고
나니까 질병 때문에 죽었다느니, 집안 사정으로 죽었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기자들한테 지껄이며 태일이의 끗을 왜곡하던 놈이 아닌가!’
이소선은 노동청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의 살찐 볼이 한층 더 밉살스럽게 보였다.
“이놈의 새끼, 네가 죽여 놓고 네가 장례식을
하러 왔다는 거냐! 이
돼먹지 못한 놈들, 국정감사
때 속여 놓고 너, 내
아들 살려 내. 노동청 장이면 노동청장이지 네깐 놈의 새끼가 어디다 대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뭐, 협조하러? 죽여 놓고 협조냐!”
이소선은 다짜고짜로
노동청장의 멱살 쥐고 흔들어서 넘어뜨려 버렸다. 이소선은 쓰러진 노동청장의
목을 이빨로 물어뜯어 버렸다.
갑자기 불어난 조문객들로
영안실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중에서도 평화시장 어린 시다들이 찾아와서 영정을 향해 “오빠!오빠!” 외치면서 목 놓아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워서 돈을 주겠다는 회유를 물리쳤다. 그리고 결국은 전태일과 삼동회 친구들이 제시했던 요구 조건을 무조건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노동청과 평화시장 업주들로부터
받아냈다.
경찰에서는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장기표 학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설치고 다녔다. 장기표는 학생들을 끌어 모아서 장례준비를 차곡차곡 진행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들은 1백 명은 희생할 각오를
하고 이 일을 해내야 한다면서, 어머니가 자기들에게
모든 것을 인계해 주기로 했으니 사명감을 갖고 장례식을 치러 내자고 결의 중이었다.
이소선은 1백
명이 희생된다는
말이 곧 그만큼 죽는다는 말로 들려 섬뜩했다. 그러자 유인태라는 학생이 “어머니, 1백 명이 죽는 것이
아니라 1백 명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싸우자는 겁니다”라 설명하고 이소선을
끌어안으며 웃음을 띠었다.
장례식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장례위원장은 최용수
한국노총 위원장, 부위원장은 김원규
노동청 차장, 호상은 이승택 노동청
장등이 맡기로 했다.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영결식은 창현 교회에서 하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태일이가 어린 여공들을 위해 그렇게 근로기준법을
연구했는데, 평화시장도 안 돌아보고
어딜 간단말이야’
“평화시장도 안되면
국립묘지로 가자! 내 아들은 만인을 위해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국립묘지로
갈 수 있다. 국립묘지로 가자!”
창현 교회에서 거행된 영결식에는 몰려온 평화시장 근로자들을 비롯해 노총 간부, 정치인, 지식인, 종교인, 동네 사람 등 각계각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교회를 꽉 메웠다.
영결식은 평화시장 어린 시다들의 눈물 바닷속에서 엄수되었다.
“만약에 노동조합하게 해주지 않고 태일이의 뜻을 이뤄주지 않으면, 내가 칼을 갖고 다니면서 너희 놈들 다 쑤셔 죽일거야!” 이소선은 우뚝 서서
손에 칼을 쥐듯이 주먹을 휘두르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아들 전태일은 (무덤) 구덩이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울지 않으리라, 어떻게 해서든 노동조합을 해서 내 아들의 뜻을 이루리라!’
이소선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그리고 통성기도를
시작했다.
태일아! 부모 잘못 만나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공부도 못하고, 한창 클 나이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 골목 저 골목 구두 통을 메고 신문팔이로 뛰어다니게 해야만 한 부모로서 한없이 부끄럽구나.
태일아! 그래도 이 못난 부모를 원망하지 아니하고, 그 지옥과도 같은 평화시장 먼지 구덩이 속에서 제품 일을 하면서도 너 혼자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항상 네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던 너를 생각하면 슬픈 가운데서도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구나.
태일아! 나는 너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깨달았다. 착한 사람 복받고 악한 사람 벌받는다는 막연한 생각으로는 선악을 구분할 수도 없고, 부귀와 공명을 따질 수 없음을 알 것만 같다. 착하게 살려고 발버둥 친 우리가 죄가 없듯이 평화시장 저 어린 근로자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런데도 왜 저들은 고통을 느낄 여유조차, 아니 몸이 아파도 아플 시간도
없어야 한단 말이냐. 분명 인간으로 태어났건만, 어째서 인간다운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버림받아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조차 힘들 정도의
고통과 질병 속에서 신음해야 한단
말이냐. 여기에는 무언가 근본적인
잘못이 분명히 있다.
우리 모두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너(=전태일)에게 감사하고 또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항상 근로자와 가까이하여 네가 못다 이룬 뜻을 이루기 위해 내 온몸을 바치마.
네가 불탄 그 자리
평화시장에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열악한 작업환경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개선해 노동자도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래야 네 마음의 고향인 평화 시장에서 네 영혼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억압과 착취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없는,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는
사회가 건설되어 너의 영원한 안식을 이룰 수 있게 내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하겠다.
태일아! 네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세요, 우리 어머니는 할 수 있다’ 말했건만 내가 무엇을 알아서 할 수 있겠느냐. 이럴 줄을 알고 너는 내게 ‘근로기준법’을 읽어주며, 언젠가는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구나! 그때 그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겼으니 이 안타까움을 어찌하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으니 너의 그 사랑이, 충만한 죽음이 어찌 헛될 수 있단 말이냐. 진리는 끝내 승리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죽은 너는 반드시 부화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그것을 오늘 사람들의 가슴마다 확인할 수 있었고 앞으로 그것이 더욱 꽃 피어 나갈 것을 확신한다.
아무쪼록 앞으로 평화
시장에서 노동조합 결성과 근로조건 개선 그리고 가난하고 찌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너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게 도와주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그 일을 위해
내 전부를 바치리라.
(p171) 어린 노동자와 만나기 위한 떡장사
사업주들과 시장 경비원들은
현장 근로자가 노조 사무실에 오는 것을 방해했다. 이소선은 현장 근로자들을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만날 수가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이소선은 어린 노동자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태일이가 그토록 사랑하던 저 나이 어린
근로자들, 저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동심들, 가진 자들의 더러운
탐욕에 시들어가는 저들을 나는 만나야 한다. 저들을 만나야 노동조합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이소선은 궁리 끝에
어린 노동자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상대로 떡장사를 하기로
했다. 평화시장 복도나 동화시장에
가서 떡을 팔았다. 점심을 못 먹는 노동자들이 태반을 넘었다. 점심시간에 떡이나 풀빵 몇 개를 먹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p214) 이후 함(석현) 선생은 『씨알의 소리』에 전태일 사건에 관한 글도 싣고, 해마다 전태일 추도식을 씨알의 소리 주최로 개최했다. (함석헌) 선생은 전태일을 항상 ‘전태일 선생’이라고 불렀다. 손자뻘 되는 태일이를
무슨 선생이라고 부르느냐, 듣기가 거북하다고
이소선이 말하면 함(석헌)선생은 “우리는 아무리 부르더라도 그에 맞게 알아서 부르니까, 어머니는 누구한테 가서 그런 말씀 마시오” 하면서 전태일이라는 사람은 젊은 나이였지만 살아서 인간으로서 할 일, 즉 도리를 다하고 먼저 죽었으니
당연히 선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을 했다.
(p240) 이소선은 이 무렵부터 목요기도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다. 목요기도회는 유신정권 시절에 재야 민주인사들이 모여 ‘기도회’ 라는 형식을 빌려
인권 문제를 비롯한 정치적 문제를 다루던 강력한 반정부 집회의 하나였다. 이소선은 (목요)기도회에 가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례들을 생생하게 들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도 양심적이고 올바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이 투쟁이 결코 외로운 투쟁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구속된 민주인사들의 재판정에 방청을 가서 그들이 당당하게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묶이고 갇힌 자가 죄인이 아니라 그들을 짓밟고 올라선 자들이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한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이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을 때는 함 선생이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삼베옷을 곱게 입은 채로 재판장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말했다.
“재판장, 내 말 들으시오. 지금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당신이 재판하지만, (그러나) 역사로는 당신들이 죄인 되는 날이 올 것인데 두렵지 않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올바로 만하는 사람들을 죄수하고 하지만, 역사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신네가 죄인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앉아서 재판을 받을 만한 죄인이 아니오.” 함 선생은 이렇게
그 서슬 퍼런 유신정권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p264) 평화시장의 작업환경은 한마디로 ‘비좁은 다락방 먼지구덩이’라 할 수 있었다. 비좁은 다락방 먼지 구덩이에서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면서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몸에는 각종 병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상당수가 폐결핵을 앓고 있고, 동상, 생리불순, 관절염, 두통 따위의 병이
언제든지 노동자들을 쫓아다닌다. 병을 몇 가지씩 달고 다니는 노동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평화시장 아가씨들은 시집가서 3년만 고생하면 고물이
된다’ 는 자학적인 말이
증명하듯 노동자들은 고통스럽게 살고 있었다. 하루하루 몸이 망가져가도
노동자들은 몸을 돌보지 못한다. 청계천 노동자들은 ‘아프려 해야 아플
시간이 없다’ 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당시에는 평화시장이
전국 기성복의 80~90%를 공급했기 때문에, 쉬는 날이라고는 한 달에 겨우 이틀뿐이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던 직접적인 이유는 이 작업 시간이었다. 오죽했으면 죽는 그 순간에도 “어린 동심들한테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보게 하라”고 외쳤을까. 청계천 노동자들은 햇빛을 거의 보지 못 했다.
(p585) 유가협 국회 앞 천막농성 해단식을 가지며
하지만 우리는 혈육들이 염원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발걸음을 결코 늦추지 않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없는 나라, 양심수가 없는 나라를 만들고 이 땅의 고통받는 민중이 없는 그러한 세상을 향해 끝까지 나아갈
것이다.
1999년 112월 30일 전국민족민주 유가협 의회
(p590) 아울러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우리가 왜 기념해야 하는가를 간략하게 말해보자.
첫째, 전태일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운 사상을, 즉, 인류애를 가졌으며
그것을 모든 것을 바쳐 실천한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둘째, 전태일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한테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전태일은 보잘 것 없는 학력에 스물두 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간 사람이지만, 이 땅의 수많은 대학생, 지식인, 종교인,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동과 감화를 주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셋째, 전태일은
우리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전태일이야말로 민주화의
가장 큰 공헌자이며 역사 발전의 최선봉에 선 위대한 인물임은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넷째, 전태일은
시대의 스승이며 그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인물이다.
다섯째, 전태일은 청소년을 가장 사랑한 사람이다. 또한 전태일이 가장 사랑한 사람은 다름 아닌 14~18세의
연소 노동자들이었다. 전태일은 그들을 가리켜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 내 이상의 전부”라고 말하고,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으로 시들고 있는 그들을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태일은 그들을 위해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갔다.
-민종덕, 2004년 5월 16일 한겨레 신문 기고문 –
(정론직필의 추신)
과거 영국의 산업혁명
시절에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심하여, 어린 소년, 소녀 노동자들이 햇빛도 못 보고 장시간 저임금으로 일하면서, 창백한 얼굴로 시름시름 앓다가 병이 들어 죽어 갔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참상을 목격한 칼 맑스에 의해 “자본론”이 나오고 “공산주의”가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 20세 전후의 청년 전태일이
일하던 청계천의 무수한 영세 피복 공장들에는 14~18세의 연소한 어린 노동자들이 “시다”등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노동조건이 너무 열악하여, 그들 어린 노동자들이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어가듯 하자, 그에 연민을 느낀 청년 전태일이 그들을 보호하고 살려내기 위해 “노동운동”을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청년 전태일과 그
어머니 이소선 여사로부터 정론직필은 마치 기독교에서의 청년 예수와 그 어머니 마리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2016.11.02 정론직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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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신 정론직필님께 다시 한번 반갑다는 인사 드립니다.저는 이제 광화문으로...회원님들 광화문 촛불시위 현장에서 뵈요^^
우리까페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도
우리가 기어이 통일하려는 목표도 결국은
전태일선배님의 뜻과 같음을 절감합니다
눈물없이 읽을수가 없군요
구치소에 갇히셔야했던 직필님의 고난도
다 같은 삶의 길일 것입니다ᆢ
배운 자, 가진 자, 힘있는 자들은 부족한 이들을 끌어 주어야 할 책무가 있음에도
그런 사상을 가르치지 아니하는 교육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직필님의 혜안으로 많은 이들을 이끌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배운 자, 가진 자, 힘있는 자들은 부족한 이들을 끌어 주어야 할 책무가 있음에도
그런 사상을 가르치지 아니하는 교육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동감입니다..^^
알고 있으면서,,,몇몇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규범이나 법이 있어도 지키지 않는 어른들,,,
아이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뿐이죠...
그 것을 가르켜 주려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
고국의 훌륭한 분들의 헌신앞에 고개 숙이며
한편의 드라마같은 전태일님의 숭고한 이야기에 눈물을 지으며
그냥 이렇게 댓글을 씁니다.
아픔을 받은 자가 남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어디서 들은것 같든 기억의 소리에
눈물지으며 처음으로 전태일님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걸 고백합니다.
분노속에 앞길을 돌보지 않았던 전태일 님의 심정을 아주 조금 느껴봅니다.
제 자신이 몹시 부끄럽네요.
부모님 돌아가시고도 눈물을 흘리지않았습니다.
나름 부모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망상이 있었기때문입니다.
직필님 올린 글 읽고 지금까지 감춰 뒀던 눈물을 다 뽑았습니다.
오늘날 아 정도의 노동조건이 이루어지기까지 전태일 열사와
어머님의 희생이 바탕을 이루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건성으로 듣기만했지 관심을 갖지않은 것이지요~
자본주의란 자본이 주체요, 인간은 자본의 종속된 노예에 불과한
제도지요.
우리 상고시대가 시행했고, 앞으로 우리가 시행해야할 소명은
인간이 주체요, 인간이 주인인 세상 인본주를
실현하는 것이겠지요.
정론직필님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되니 감개 무량입니다.
현장의 노동조건은 전태일 선생님 이전으로 돌아간거 갔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렇게 직필님 글을 보는게
좋습니다
그리고 깨우침이 있구요
전태일 평전은 조영래변호사가 생전 익명으로 출간했던 책입니다.
인용하신글들은 전태일평전의 일부로 보여지네요.
눈물나는 글 입니다.
전 직장...그것도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 이지만
현 대학졸업장과 함께 빚을 지고 사회에 진출하는 대학생들을 보면
참 맘이 아픕니다.
열심히 살려해도 도저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
무엇보다 희망차게 사회에 웃으며 나와야 하는 젊은이들이
빚에 허덕이며 고시원 골방에서 생활하며 미래에 대해
희망대신 절망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요...
우리 책임이죠..지역감정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 거리며
인물이 아닌 지역에 투표해준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전태일이 일했다던 그 평화시장이 고등학교 졸업 후 처움으로 상경해 일한 곳이고
그 곳에서의 짧지않은 소위 공돌이 생활 이였지만 제겐 엄척난 충격을 갔다준 곳
아침 4~5시에 일어나 저녁 10시까지 봉재공장서 죽으라 일하며 화장실 변기 수돗물로 밥 지어먹고 설거지 하던 곳
세상사 처움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분노를 느껐던 곳
그 곳(삼일고가)을 지나는 전두환 경호원과 충돌로 겨우 목숨건저
야반도주 한 곳 후일 그 곳에 전태일이란 사람이 있었다는 애기를 들었고~
그 때나 지금이나 구조적 모순속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닌지?
학교에서 노동과 자본, 문제를 가르키지 안는 것
노동현장은 그러한 노동운동의 역사와 정신, 노동과 자본의 상관관개를 읽어버린곳으로
(경계가 사라저버린, 일방적 관계) 밀려버릴수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자본과 노동 , 지배와 착취를 당연시 하는것이 아닌 공부를 통해 균형감있게 볼수 있으야 자본주의 시민사회민의 조건이지 안을까요)
교육에서 꼭 노동 과 자본 부분을 공부하는 사회를 볼수 있는 사회가 오길 기대 해봅니다.
현실은 민중들에 의해 견재대지 못하는 자본과 권력으로 인해 지배과 착취의 단계가 깊어만 가는것 가네요
주 5일 근무제가 정착한지 오래되었지만,
실제 산업현장 일선에서 혜택을 누리는 노동자는 많지 않다고 봅니다.
저 역시 오늘도 일하고 이제야 퇴근했습니다.
진정한 노동자의 권리가 실현될 날은 아직도 멀다는 생각입니다!
^^
전태일선생처럼 사회적약자에 눈길을 놓치않는 우리시대의 예수같은,전봉준같은, 다른계층이라도 공감할 그런 각성을 이끌어주시지요 각성한만큼 우리운동도 성장하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 이소선이 된다면 이 곳이 바로 낙원이 될 듯 합니다.
일반 노동자들은 생각도못하는 꿈같은 일이죠.
이곳을 드나들 면서 우리교회 목사님이 자주 하시던 선악과 설교를 떠올리곤 하였습니다. 국제정치를 논하시는 직필님의 글을읽고 눈이 열렸지만 내가 그것을 안들 무슨 도움이될까? 내가 이세상에 도움이 될수 있을까? 요즘의 사태를 보면서 더 자괴감에 빠지곤 하였지요! 다른 일부회원님들도 여기를 드나들며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데 괴리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실어하는거같다는 댓글을 읽었을때 "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나에게도 여기까페가 선악과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수감중 쓰신이글을 보니 눈이 열리신 직필님께서 이제는 마음도 열리시나 봅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선악과 같은 존재이죠! 지혜는모든것을 다할수 있을거같지만 아무것도 할수없죠! 사랑만이 이시대를 구할수있습니다~ 직필님의 변화를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