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의 멘토
삶의 아픔을 글로 토해낸 소설가
[金周榮 ]
출생 | 1939.12.7. |
---|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감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글은 글쓴이의 자서전이고 자신에게는 반성문이라는 소설가, 김주영. 내면의 아픔을 담아내며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볼 줄 아는 그의 글에는 참회와 눈물이 있기에 독자들로 하여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철저한 현장 조사 자료를 기반으로 탄탄하게 써 내려간 글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선물하는 그의 소설 같은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앞줄 맨 오른쪽이 김주영 작가다. 김 작가의 어린 날은 눈물로 얼룩져 있다. 교과서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형편이어서 기성회비를 단 한 번도 제때 낸 적이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의 집 밭의 무를 뽑아 먹다 어머니께 혼이 나서 울고, 학습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해서 선생님께 혼이 나서 울고, 결손 가정이라는 환경에 울었다.
보통 7~8세 정도가 되면 가족 구성원에 대해 인식을 하게 되잖아요. 저는 그 시절에 어머니는 계셨는데 아버지가 안 계셨어요. 그래서인지 무척 우울한 기억이 있어요. 자유분방하게 자라긴 했지만, 사실 울고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늘 혼자였고 외톨이였죠. 친밀하게 지낸 친구도 없었고 저를 기억해주는 친척도 없었어요. 게다가 아주 가난했기 때문에 먹을 것을 찾아서 들판을 헤매는 그런 아이로 자라났어요. 집안에 먹을 것이 없으니 봄이 되면 진달래꽃으로 배를 채우고, 여름에는 남의 밭에서 무를 뽑아 먹으며 허기를 메웠죠. 과수원에 가서 덜 익은 과일들도 훔쳐 먹었어요. 그게 중학교 진학할 때까지 이어졌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자주 야단을 맞았죠. 그러다 보니 늘 울었어요. 배고파서 울고, 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서러워서 울고……. 툇마루에 누워서 울다가 잠이 들곤 했었죠.
공부도 잘 못했어요. 공부할 여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거든요. 교과서를 살 형편이 못돼서 초등학교 6년을 교과서 없이 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창호지를 잘라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 주신 공책 한 권만 들고 다녔지요. 그렇게 6년을 다닐 동안에 기성회비를 한 번도 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화장실 청소는 제가 도맡아 했고, 선생님께는 늘 미움을 받다 보니 제 이름보다는 ‘야 인마!’라고 불리기 일쑤였어요. 교과서 없이 학교 다니죠, 기성회비도 안 내죠, 게다가 장이 서는 날이면 학교에 안 가고 장 구경하느라 결석을 밥 먹듯 했으니 선생님이 좋아할 리가 없었죠.
한번은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자란 곳이 시골이었으니까 미술 시간에 풍경화를 그리라고 하면 산과 시냇물을 그리게 되잖아요. 밑그림을 그리고 크레파스로 색칠을 해야 하는데 저는 크레파스가 없었어요. 교과서도 없었는데 크레파스가 있을 리 없죠. 같은 반 친구들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면서 모두 푸른색, 초록색 크레파스를 쓰고 있으니까 빌려 달랠 수도 없었죠. 고작 빌릴 수 있는 건, 아무도 쓰지 않는 흰색 크레파스였어요. 그래서 산과 하늘을 모두 흰색으로 칠해서 제출했더니 선생님이 저를 불러요. 칠판 앞으로 나가니 선생님이 제 귀를 잡아당기며 앞산이 보이는 창가로 데려가서 물어 보시는 거예요. “저게 무슨 색깔이지?” “파란색이요.” “그런데 왜 흰색으로 칠했어?” 제 양쪽 귀를 세게 잡아당기면서 선생님께서는 벌을 주셨죠. 파란색인 줄 알면서도 흰색을 칠한 제 사연은 묻지도 않고 말이죠. 저는 그걸 왜 흰색으로 칠했는지를 설명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났어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도 울고, 집에서도 울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울고, 울었던 기억이 제 유년 시절의 기억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제 가슴에는 가난으로부터 비롯된 응어리가 있었어요. 결손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피해의식이 있었고 늘 수치심 같은 게 있었죠. 그것을 토해내는 방법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 어려움들이 글을 쓰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숫자에 어두워요. 아주 기초적인 셈에도 능숙하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처음엔 동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시를 써서 지방 신문에 투고를 하면 잘된 것은 실리기도 했어요. 그렇게 몇 번 글이 실리고 난 다음부터는 자신감이 생겨나면서 글쓰기를 계속 하다 보면 빛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나더라고요. 그것도 글을 쓰게 된 계기 중의 하나에요. 명작을 읽고 감명 받아서 나도 한번 해보자 라든지, 혹은 주변에서 누군가가 글을 써보라고 권유를 했다든지, 그런 동기는 없습니다. 그냥 혼자서 글 쓰는 것이 좋았고, 신문에 실리기도 하니까 재미도 붙고 그래서 글을 쓰게 된 거죠.
어떤 글쟁이든 그 사람이 쓴 글은 곧 자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객주는 보부상을 다루는 이야기이지만, 제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제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작품이거든요. 어릴 적에 저희 집 바로 옆에 장터가 있었는데, 장터와 집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없었어요. 그러니 집이 곧 장터라고 해도 될 정도였죠. 그런 곳에 살면서 장터에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며 자랐어요. 그래서인지 소설가로 데뷔한 이후 제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장터 이야기를 한번 써보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장터 이야기를 쓰려고 어린 시절에 본 것을 기준으로 골격을 만들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보부상’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처음에는 중편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보부상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굉장히 긴 소설이 되어버렸죠. 그 후 신문사와 연결이 되었고 연재를 해보자고 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소설 [객주]입니다. 지금까지 권수로는 아홉 권이 되었는데 아홉 권이 나온 이후에 30년이 흘렀어요. 너무 힘들어서 중단했었거든요. 최근에 열 번째 권을 쓰고 있습니다.
소설 [객주]를 위한 취재 당시 청송 우시장에서. 김 작가는 [객주]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달 중 이십일 이상을 노트를 들고 장터를 찾아 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 ‘길 위의 작가’라는 별명은 이때 얻은 것이다.
[객주]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제가 [객주]를 쓰기 시작하면서 많이 떠돌아 다녔어요. 한 달이면 집에 머물렀던 기간이 열흘도 안 될 정도였죠. 한 달에 이십일 이상 노트를 들고 장터를 찾아 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어요. 그 글을 들고 신문사 지국에 찾아가서 본사로 부쳐달라고 했고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떠돌아 다니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시골에 있는 여인숙이나 여관에 머물면서 글을 쓰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숙박료만 지불하면 되니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밥도 먹고 싶을 때 먹으니 굉장히 자유로웠죠.
저는 기본적으로 조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현장에 안 갈 수도 없었어요. 제가 사학과 출신이 아니거든요.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 아니어서 조사를 안 하고는 역사소설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무조건 발로 뛰어다니게 된 거죠. 역사소설을 쓸 때 실수를 한다든지 얼토당토않는 말을 가져다가 집어넣는다든지 하면 비평가들에게 무식하다는 지적을 받게 되죠. 독자들에게도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아주 철저하게 조사를 했어요. 그때 ‘길 위의 작가’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입니다.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격의 없이 친숙하게 된다는 점이죠. 현장 답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관직에 있는 그런 사람들보다는 주로 노동자나 농사꾼, 말하자면 우리 생활의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분들과 어울려 이야기도 나누고,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그랬어요. 때로는 거리의 노숙자들과도 같이 잠을 잔 적이 있어요. 그러면서 그분들의 입에서 나오는 삶의 애환을 듣게 된 거죠. 인생살이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요?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다고 해서 대단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밑바닥에서 기어가듯 사는 사람들이 풍기는 애환과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제 마음을 살찌게 만들었어요. 한곳에 앉아서 소설을 쓰는 것보다 돌아다니며 현장에서 얻게 된 소득이 정말 값진 것이었죠.
사실 그전까지는 저에게 대인기피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장 답사를 하고 다니면서부터는 신기하게도 다 고쳐졌어요. 이제는 대통령과 면담을 한다고 해도 마음이 편안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갖다 보니까 저를 마주하는 분들도 마음이 편하다고 해요. 감사할 따름이죠.
김 작가가 어머니와 함께 고향 노인회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순탄하지 않은 가정사의 주인공이자 열등감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를 숨기고 고향을 숨겼지만, 일흔이 넘어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잘 가요 엄마]는 김 작가가 어머니와 화해하고 반성하여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게 된 작품이다.
[천둥소리]와 [홍어] 그리고 [멸치]나 [빈집] 등 제 전작들은 모두 어머니를 중심에 놓고 썼으면서도 정작 내 어머니가 아닌 다른 어머니에 대하여 쓴 것입니다. 상식적인 선에서 볼 수 있는 어머니 이야기였죠.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처럼 가족을 위해 많이 기도하는 분들도 드물 겁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의 공통점은 남편과 아이들, 가족을 위해 기도할 뿐이지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어머니상을 작품 속에 자주 넣었는데, 언제부턴가 제가 그 글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돌려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 이야기는 단골소재로 등장하는데 늘 무언가 아쉬움과 부족함이 남는 것이, 제가 남의 얘기만 하고 있구나 싶었지요. 그렇게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많이 주저했어요. 하룻밤에 단편소설 한 편 정도를 단숨에 쓰던 제가 900장밖에 안 되는 소설 한 편을 쓰는데 무려 1년 반이 걸린 것은 그만큼 고민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죠.
어머니는 제게 감옥 같은 존재였습니다.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버림받은 어머니, 평생 글자도 숫자도 볼 줄 몰랐고, 오로지 품팔이만 하며 사신 분이죠. 그런 어머니의 누더기 같은 삶을 다 털어놓지 않고서는 감옥 같은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을 필요가 있나 갈등이 되기도 했지만, 소설에 속임수를 써선 안 된다고 생각했죠. 사실 저는 오랜 세월 어머니의 과거가 부끄러워 어머니 이야기를 잘 안 했습니다. 또 너무 가난했고, 제가 자라난 고장이 산골이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고향을 물어보면 엉뚱한 도시를 대며 살아왔죠. 지독한 열등감이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나이 일흔을 넘기고 난 이후부터 그런 거짓된 것에 대한 참회와 후회가 생겼습니다. 지난 과거를 털어버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게는 글을 쓰는 것이 하나의 반성문인데 반성문을 거짓말로 쓸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일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하게 된 겁니다. 어머니를 용서하고, 제 자신을 용서하고, 또 제 주변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용서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용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머니와 제 관계를 철저하게 털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잘 가요 엄마]에는 가공 인물도 나오지만 어머니와 제 이야기는 백 퍼센트 그대로입니다.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 어머니께서 서울 집을 방문하셨던 이야기, 또 제가 내려가서 어머니를 뵈었던 이야기, 어릴 때 도시락 쌌던 이야기 등 모두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참회하기 위해서, 그리고 올바른 반성문을 쓰기 위해서 그렇게 제 어머니 이야기를 쓰게 된 거죠.
어머니께서는 아흔 넷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책에 쓴 대로 어머니가 제게 남겨준 유산은, 악어가죽 핸드백과 립스틱뿐이었어요. 제가 선물해드린 건데 아까워서 쓰지 못하시고 결국 남겨두고 돌아가셨어요. 저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물건이죠. 하지만 그 외에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것이 정말 많았다는 걸 일흔이 돼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제가 지금의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그루터기를 어머니께서 제공해 주셨다는 걸 이제야 안 것이죠. 소설을 쓰면서 느꼈어요. 제 모든 근거는 어머니가 마련해 주셨다는 것을요. 어머니의 실체를 글 속에 그대로 드러내고 싶은데 혹시나 돌아가신 분께 누가 되진 않을지, 그런 고민을 하느라 소설을 쓰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제가 40대나 50대였다면 누더기 같은 가족사를 쓰지 못했을 겁니다. 칠십이 넘고 산전수전 다 겪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참회하는 기분으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기분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동안은 어머니 이야기가 가슴속에 꽉 차있어서 다른 이야기가 제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 같아요. 다시 소설을 쓰려면 가슴속에 빈방이 있어야 에너지를 채울 텐데, 자꾸 제 어머니 이야기를 숨기느라 그 여지가 없었죠. 그래서 [잘 가요 엄마]를 쓰고 난 뒤에 정말 후련했고, 이제야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이 하나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정말 잘한 일이구나 싶어요. 마음에 있던 짐을 홀가분하게 덜어냈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옛날에는 삼대(三代)가 함께 사는 집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가족이 있으면 신문에 기사가 날 정도죠. 시대의 흐름으로 보면 요즘의 핵가족화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군대도 예전에는 긴 침상이 있어서 전부 살을 맞대고 같이 자곤 했죠. 그런데 요새는 침대를 하나씩 따로 다 주잖아요. 옆 사람이랑 살 맞대는 게 싫다는 얘기죠. 옛날에는 한 방에서 자고, 밥 먹고, 공부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거의 각자의 방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따로 사는 것이 편하고, 그것이 자신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흐름인 거죠.
가족에 대한 가치관을 새로 형성해야 한다는 게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시대는 변해 가는데 가족을 묶어주는 어떤 대안이 없다 보니, 이기주의가 성행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같이 사는 가족들에게 고민을 얘기하지 않고 학교 친구들을 찾아가는 아이들이 많아요. 이런 현상이 해체된 가족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연결시켜 주는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거죠.
저는 그 가치관의 기초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체되어가는 이 시대에 가족을 뭉쳐주는 유일한 도구가 사랑 말고 무엇이 있겠어요? 사랑에는 어느 것도 못 당합니다. 그런데 가족 간의 사랑을 강화할 수 있으려면 서로 함께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모두 개인의 삶으로 바쁘거든요.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의 밤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낮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지낸다 해도 밤에는 가족이 함께 만나 하루의 삶을 나누는 자연스러운 가족공동체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어찌된 게 밤이 더 밝습니다. 사람들이 밤이 되어도 도무지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모두 밖에서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족들과의 만남이 있어야 그 안에서 서로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가족공동체가 사랑으로 회복되고 응집력을 갖게 하려면 우리 사회의 문화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고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김 작가에게 파라다이스 그룹의 전락원 회장은 인생의 멘토다. 인생의 부족한 면을 일깨워 가르쳐 주고, 집필실을 마련해 주었다. 김 작가는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을 맡아 운영하며 각계 각층의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2005년 파라다이스 상 시상식 행사에서 관계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으로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 작가, 오른쪽은 정원식 전 총리다.
파라다이스의 ‘전락원’ 회장이신데 제 생애에서 그분과의 만남은 크나큰 사건이었고 또 행운이었어요.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은 그분의 누님 되시는 전숙희 여사를 통해서였는데, 전 회장님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저와의 첫 만남에서 제게 모자라는 것이 무엇이란 것을 당장 알아차리셨던 것 같아요. 제 등 뒤에 숨어 있는 거짓과 두려움을 단번에 간파한 분이라고나 할까요?
그분께서 베푸신 저에 대한 첫 번째의 배려는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숲이 있고 조용한 건물에 집필실을 마련해 준 것이었어요. 당시 저는 소설을 쓰기 위해 보따리를 싸 들고 전국을 떠돌고 있었거든요. 다섯 식구가 서로 몸을 비비대면서 살아가는 협소한 아파트에선 집중력을 발휘할 수도 없었고, 도시 어디에서도 엉덩이를 느긋하게 붙이고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그 집필실에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성공했어요. 글 쓸 일이 있을 때마다 또 다시 보따리를 싸 들고 시골의 여관이나 여인숙을 찾지 않아도 된 거죠. 그 집필실에서 저는 무려 12권에 이르는 소설을 완성했으니까요.
그뿐만 아니었고 전 회장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낙오자 격이었던 저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남들을 대할 때 행동하는 방식이나 자세, 그리고 예의와 절차 따위를 꼼꼼하게 가르쳐 주셨어요. 골프를 가르칠 때도 타수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선 별말씀이 없었지만, 라운드를 같이하는 골퍼들을 대하는 태도와 예절에 대해선 철저하리만치 꼼꼼하게 가르쳐 주셨죠. 심지어 장터국밥을 먹는 것에서부터 일식당에서 초밥 먹는 일에 이르기까지 자세와 법도를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인가를 알려 주셨어요.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것은, 제가 그 집필실에서 안정된 형편으로 일할 수 있도록 상당한 금액의 지원 역시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는 것인지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전혀 묻지 않으셨어요. 그 대범함이 오히려 저를 긴장시켰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사용처를 물으시면 그 즉시 대답할 수 있도록 지출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것에 대한 질문은 단 한마디도 없으셨죠.
추운 곳에서 잠들어야 하는 사람들, 벼랑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지원하고 배려한 것은 저 뿐만은 아니었어요. 이름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예술인들이 그분의 지원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대범한 분이었으면서도 당신 자신이나 가족들에 대해서는 완고할 정도로 엄격하셨다고 해요. 더불어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문과는 달리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저는 여러 번 목격했어요. 흔히 말하는 외유내강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분이셨죠. 그분께 받은 사랑을 어떤 방법으로 갚아야 할지 생각이 많습니다.
김 작가는 고려 무신 정권을 그린 소설 [화척]을 집필하면서 방북 취재를 위해 북한 측과 접촉을 시도했다가 여러 차례 약속을 어긴 북한 당국자의 태도에 화가 나서 한때 절필을 하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배신감으로 글을 쓸 수 없었던 때문이다. 사진은 이후 평양을 방문한 김작가 일행으로 왼쪽에서 세 번째에 김작가, 그 오른쪽으로 고은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1988년 신문에 [화척]이라는 소설을 쓸 때입니다. 고려시대의 무신란을 주제로 한 소설이었는데, 그게 개성에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런데 개성 한번 다녀오지 않고 그런 긴 소설을 쓴다는 게 왠지 철면피 같이 생각됐어요. 그래서 당시 무역관계 일을 하던 중국기관의 상무원 쪽에 알아보니 마침 조선족 한 분이 있더라고요. 그분께 제 사정을 말하고 개성에 다녀올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했어요. 그 시절에 북한과 접촉을 하려면 안기부에 신고를 해야 해서 안기부의 허가를 받은 다음 출판사 사장과 함께 북경에 갔지요. 그리고 식당에서 북한 대사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 안 오더라고요. 그쪽에서 그렇게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못 만나고 그냥 돌아왔죠.
그 일로 인해 잠시 의욕을 잃어버렸어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회의와 좌절감이 들어서 이젠 글을 그만 쓰자고 절필을 해버렸는데, 그 내용이 신문에 기사로 난 것이죠. 김주영 작가가 절필을 했다고……. 그런데 막상 절필을 하고 보니까 글 쓰는 일이 아니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1년이 넘도록 무얼 하면 좋을까 생각해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기도 했는데 할 만한 일이 없더군요. 그래서 이 직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글을 쓰게 되었죠.
제가 여성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다만 어머니에 대해서만 좀 알 뿐이죠. 저는 연애소설을 한편 쓰고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여성의 가슴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알 자신도 없어요. 그래서 쓰는 작품마다 남성 위주의 소설을 쓰게 되는 거죠. 남성들이 좋아하는 언어 구사, 남성들이 좋아하는 소설의 구성, 남성적인 문장, 이런 부분에 자연적으로 치우치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섬에 기도를 잘하는 한 남자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어보셨대요. 그랬더니 그 남자가 “제가 외딴섬에 있으니 육지와 너무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육지 사람들과 교류가 전혀 없어서 너무너무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리를 하나 놓아 주십쇼.”라고 했다는 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네 한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긴 다리를 놓는 건 무리일세. 다음 소원을 말해보게”라고 하셨죠. 그래서 그 남자가 “제가 어릴 때부터 이 섬에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여성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마음속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실 테니 여성의 마음을 한 마디로 정리 해주십쇼.”라고 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다리 놔줄게.”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게 제 마음이에요. 저는 전혀 여성들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그래서 연애소설을 못 씁니다.
늘 약자 편에서 글을 써왔기 때문인지 이젠 약자 편에 서지 않는 글은 못 씁니다. 그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 역사의 행간에서 배설되어버린 사람들, 자기 이름이 있다 해도 누군가가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불러주지 않은 그런 사람들, 그들의 삶이 가지고 있는 감동이 출세한 사람들의 감동보다 더 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제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겠죠.
제 작업은 그런 분들의 삶에서 나오는 진한 감동을 한 여름에 매미가 우는 것처럼 같이 울어줌으로 해서 그 매미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제가 상상력이 풍부하거나 감성이 있어서 무엇을 창조해 내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구니에 담아서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것뿐이죠. 저에게는 큰 능력이 없어요. 배운 것도 많지 않고요. 제 역할은 그것 하나입니다. 매미 울음소리를 바구니에 담아서 울지 못하고 있는 다른 매미에게 건네주는 거요.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강남스타일’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가만히 들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빠른 속도로 유행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분석을 해본 결과, 이 노래에는 아무런 철학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상이나 어떠한 의지도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가 있단 말이죠. 단순한 재미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겁니다. 두 번째는 망가지는 겁니다. 이 노래에서 나오는 말춤도 전통적인 춤사위가 아닌 막춤이라고 할 수 있죠. 막춤을 춤으로 해서 사람이 망가지는 걸 서로가 바라보는 겁니다. 그 단순한 두 가지 이유로 유행을 타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책은 유행을 타지 않죠. 책에 무슨 유행이 있습니까? 저는 책이야말로 우리 마음속에 오래 담아둘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행은 한때 반짝했다가 날아가 버리잖아요. 마음에 남지를 않아요. 그런 면에서 문학이 주는 힘과 미디어의 힘은 큰 차이를 갖게 되는 거죠. 문학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고민, 슬픔, 행복, 갈등, 투쟁, 열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가며 남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문학은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려주거든요. 누군가가 나보다 더 힘들고 비참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걸 알려 주고, 그것을 통해 위안을 얻고 측은지심(惻隱知心)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한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아는 것보다 세상은 훨씬 넓다는 걸 깨닫고 거기서 겸손을 배우기도 합니다. 이것이 모두 문학의 힘이겠지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머리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타고난 천재성보다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정신, 나는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 나는 이거 아니면 존재 가치가 없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왔기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소설가로 살아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금방 데뷔해서 얼마 못 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지난 70년대 작가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 받고 거론되곤 했었죠. 그러나 지금은 그 중에 거의 대부분이 글을 안 쓰고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몇 분만이 글을 쓰고 있죠. 지금까지 글을 쓰고 계신 분들을 보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근력에 자기중심을 두고 뚝심으로 버텨 나갔기 때문이죠. 제가 그렇게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다른 작가들도 그렇게 봅니다.
김 작가에게 문학은 신앙이다. 신앙이기 때문에 참말을 해야만 한다. 한때는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참말을 참말처럼 하는 것이 진정한 작가정신이자 문학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나야 합니다. 여기서 타고남이란 글재주가 아니라 견딜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거예요. 자기가 계획했던 분량의 소설을 쓸 때까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 끈기, 그게 곧 소질입니다. 내용이 시시해도 좋아요. 그만한 분량을 쓸 때까지 내가 자리에 얼마나 앉아있었는지 그걸 보면 돼요. 그럼 내가 타고났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자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뚜렷한 종교가 없습니다. 그 대신 저에게는 문학이 신앙이죠. 신앙을 거짓으로 가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저는 소설가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참말처럼 이야기하는 게 소설이라는 말에 한때는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참말을 참말처럼 해야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면 그건 사기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참말을 참말처럼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작가정신이자 문학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아주 단순한 이야기지만 이것이 진리라고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 드린다면 소설가는 도덕이라는 사회적 규범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이병주 선생이 저에게 "절대 도덕적인 것에 얽매여선 안 돼. 생활도 그래야 돼."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니 자꾸 어떤 틀에 갇히게 되더라고요. 규범 안에 너무 갇히게 되면 감성을 잃어버리거든요. 감성을 잃는다는 것은 예술가에겐 지극히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감성이 죽어버리면 예술적 감각도 없다는 겁니다. 오직 살아있는 것은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이익이냐 손해냐 그런 계산적인 부분인 거죠. 그렇다면 예술가의 생명은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더 많이 고민해야 할, 제 스스로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작가는 소설 [객주]를 쓰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현장 기록용이었지만 이제는 전문가의 반열에 올랐다. 사진을 찍기 위해 두 차례나 아프리카를 다녀오기도 했다. 사진은 아프리카 마사이족을 방문했을 때 찍은 것. 왼쪽이 김 작가이다.
사실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줄 조언 같은 건 없습니다. 저 또한 젊은 사람들처럼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절대로 중견작가 행세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도 배우고 있는데, 제가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얼마나 있겠어요? 함께 배우는 입장인데요.
다만 제가 경험한 이야기를 한 말씀 해 드린다면 어깨에 힘을 빼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어깨에 힘을 주고 쓴 소설치고 잘된 소설이 없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라고요.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이 어깨에 힘을 주고 씁니다. 그 어깨의 힘을 빼는 데는 적어도 10년은 걸립니다.
제가 [객주]라는 긴 소설을 쓸 적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긴 소설일수록 어깨에 힘을 빼라. 이를 악물거나 어깨에 힘을 주고 하지 마라. 척추를 곤두세우면 글 못 쓴다. 마음 자세도 물론이거니와 물리적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야기가 아주 잘 풀린다. 그래야 끝까지 갈 수 있다.”라고요. 그 이야기가 괜찮다 싶어서 그대로 해봤죠. 그때는 컴퓨터가 아니고 철필(鐵筆: 펜촉에 펜대를 끼워서 글씨를 쓰는 펜)로 글을 쓸 때인데요. 정말 의식적으로 팔에 힘을 뺐어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야기가 잘 풀려나가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깨 힘을 빼라.”, “이 악물지 마라.”, “누구누구를 뛰어넘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품지 마라.”, “적을 두지 마라.”, “자기 나름대로의 개성을 살려나가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가 죽게 되면 묘를 쓰고 가족이 있으니까 조그마한 비석 하나 세워주겠죠.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산행을 하다가 혹은 그 묘 앞을 지나다가 “어? 김주영 무덤이 여기 있네? 우리 잠시 한번 보고 갈까?” 이런 말을 해준다면 좋겠습니다.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정말 더도 덜도 말고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 순간을 제대로 잘 살아야겠죠. 다른 사람들에게 원망 듣지 않는 삶을 살고, 저 스스로도 누구에게 원수 갚겠다는 마음 없이 편하고 자유롭게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런 결과가 오지 않을까요?
김주영
1937년 경상북도 청송에서 태어났다. 눈물로 얼룩진 유년시절에 문학은 가슴속 응어리를 토해내는 방법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70년 <여름사냥>, 1971년 <휴면기>가 [월간문학]에서 수상하면서 작가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치열하게 현장을 발로 뛴 취재 끝에 [객주], [활빈도], [천둥소리], [화척] 등의 선 굵은 역사소설을 남겼다. 모든 글은 작가의 자서전이자 반성문이라고 생각하며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작가를 꿈꿔왔다. 진실을 진실되게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작가정신이자 문학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길이라 믿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주영 [金周榮] - 삶의 아픔을 글로 토해낸 소설가 (우리 시대의 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