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등 외 1편
이성렬
빛과 그림자 사이로 걸어 들어간 자들은
모두 재가 되었다. 싸락눈 내리는 아침에
목을 반쯤 자른 편지들이 서쪽을 서성인다.
푸른 대문 앞을 내닫는 길의 허허로움을
토로할 길 없는 등불. 몇 명의 미아들이
붉은 심장을 꺼내어 보이는 부모를 버린다.
동공에 당의정을 박은 개가 젖은 눈을
비비는 상주의 침묵을 향해 컹컹, 짖는다.
대기의 언 손바닥이 눈송이에 새겨 넣는
수시로 변하는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듯.
사진틀의 등에 숨겨진 낡은 연애편지가
축축한 반점들에 유서를 남기며 숨지듯.
컴컴한 뒷골목을 헤매는 경적음들의
심실에 쌓여 늙어가는 기별처럼 인생들은
터널 속에서 안개의 홀씨로 충돌하여
심야의 정적 사이로 스며들었다. 전생처럼
미망 속에 명멸하는 붉은 미등에 떠밀려
네거리에서 기다리는 저들의 증오를 향하여.
내 마음의 휴경지
- 단편으로 본 미시근대사 제 23화
그림자를 떼어내며 사라진 수많은 배역들 – 흘러간 드라마의 식모역 단골배우 공춘이와
연속극 <재회> - 교통사고로 딸을 죽인 가해자를 만나게 되어, 이십년 전 자신을 버린 애인(김무생)임을 알아보는 디자이너 은영(고은아)
사장할머니의 철부지 손자(이승기)를 다독여 사랑을 이루는 설렁탕집 아가씨(한효주)
(나는 그토록 많은 노래를 들었구나)
이은미 노래 <기억될 거야>의 몹시도 쓸쓸한 현악 도입부와
재즈 가수 나윤선이 <천사>를 부를 때에, 세 단계로 풋, 풋, 풋, 잠자리의 날갯짓처럼 날아오르던 손짓
몇 주일 동안 내 구두코에 모여 살던 먼지들이 헤어져간 후에
마포도서관에서 수학문제 풀이를 물어오던 어린 고학생의 가지런한 노트
그리고 누군가 빗속의 벤치 위에 놓고 간 삼각김밥의 오랜 기다림
해롤드 핀터의 <생일파티>에서 정체모를 괴한들에게 끌려가는 주인공 스탠리의 몸부림만큼이나 간절한
엄지와 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간 곤충의 온도
또한 한밤의 책표지 위로 떠오르던 프란츠 카프카의 강렬한 검은 눈빛처럼
오래 기억될 것은 남과 북으로 찢어진 쌍둥이 형제(최무룡)를 번갈아 가며 사랑하는 여자(김지미)의 운명과
조해일 소설 「왕십리」의 마지막 장면 –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된, 돌아온 용병 준태를 기다리는 콜걸 윤애의 설렘
(하지만 이 모든 부끄러움들을 어찌하나)
아시아의 열대야 아래 가정부를 겁탈했다는 파블로 네루다의 고백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
사랑을 잃은 후 신길동 선술집 여자에게 가한 졸렬한 손찌검의 자학과
신촌 색시집에서 밤새워 마신 후에 나선 거리의 새벽빛 속에 떠오르던 - 먼 행성을 찾아 떠날 채비하던 민들레 꽃씨들의 부푼 희망을
이성렬
서울 생. 2002년 <서정시학> 등단. 시집 <비밀요원>, <밀회> 등. 산문집 <겹눈>.
<문학청춘 작품상>, <시와경계 문학상> 수상.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