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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방 신들의 무력함과 야곱/이스라엘을 위한 주님의 약속(41,1-42,13)
41장부터 48장까지 두 번째 서곡의 주인공이었던 야곱/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주요 주제들이 전개된다. 먼저 두 개의 담화 안에서 각각의 주제가 전개된다. 첫 번째 주제는 법리 논쟁 형태로 전개되는 이방 민족과 그들의 신의 무력함이다(41,1-20), 두 번째 주제는 야곱/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확신이다(41,21-42,13). 이 단락의 장르를 살펴보면, 이방 신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41,1-7; 41,21-29), 종을 위한 구원의 신탁(41,8-16; 42,1-9), 구원의 말씀과 종말론적 찬양(41,7-20 ; 42,10-12)의 형태로 대칭 구조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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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첫 번째 담화 | 두 번째 담화 |
이방 신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 | 41,1-7 | 41,21-29 |
종을 위한 구원의 신탁 | 41,8-16 | 42,1-9 |
구원의 말씀 / 종말론적 찬양 | 41,17-20 | 42,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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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방 민족과 그들의 신의 무력함(41,1-20)
지중해의 여러 섬을 의미하는 “섬들”과 겨레들이 하느님의 명령을 받으면서 참되고 유일하신 하느님과 이방 신들의 법리 논쟁으로 41장은 시작된다.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이다. 아직 그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이방 신들과의 대결 구도에서 고대 근동의 새로운 강자로 키루스를 일으키고(41,2), 그의 군사적 행동을 실행하게 만든 이(41,4)가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어서 야곱/이스라엘이 “종”으로 등장하고 그에게 하느님의 구원 신탁이 전해진다(41,8-16).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광야를 수원지로 변화시키는 구원의 말씀을 전해주시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17~20절).
1-7절 이방 신들과의 법리 논쟁
이방 민족을 의미하는 섬들과 겨레들이 하느님과 이방 신들 사이의 재판 증인으로 소환된다(41,1). 여기서 하느님과 신들의 대결은 무기를 갖고 싸우는 전쟁의 모습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신학적 논의로 진행된다. 재판의 요지는 누가 역사를 움직이는 참된 하느님이냐는 문제다. 논쟁을 전개하기 위해, 역사의 주도권을 쥐고 자신의 통치권을 확대해가는 키루스가 언급된다. 키루스를 소환하고 그를 움직이는 신이 참된 신이라는 논리이다. 물론 여기서도 의문은 남는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이방인의 손에 의해 이뤄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미 제1부에서 이방인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이 심판받았던 것처럼(10,5), 이방인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도 가능하다. 그래서 키루스가 막강한 권좌에 오른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을 계획하고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방 신들은 침묵하며 논쟁은 마무리된다(41,28).
▶ 키루스를 쓰신 역사의 주관자
키루스는 기원전 555년에 페르시아의 임금이 되어 바빌론 주변 지역을 점령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한다. 그가 바빌론을 공격할 즈음,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의 전통적 신인 마르둑을 섬기지 않고 달의 신 신(Sin)을 섬겨 마르둑의 사제들과 충돌을 빚었다. 이후 키루스가 바빌론에 입성하였을 때 마르둑의 사제들은 그를 환영하며 마르둑이 그를 통해 자신들에게 해방을 선사하였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키루스는 바빌론을 정복(기원전 539년)한 뒤 선포한(기원전 538년) 칙령에서 유배지에서의 귀환과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기본적으로 점령한 국가와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식민 정책을 펼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해방을 선사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키루스를 통해 자신들을 구원하셨음을 고백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이사야서에서 하느님과 마르둑의 대결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곧 승리하는 임금 키루스를 소환하고 그에게 다른 민족들을 넘겨준 이는 마르둑이 아닌 하느님이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하느님과 이방 신(마르둑)의 법리 논쟁이 전개되고, 하느님이 참된 하느님이심이 증명된다.
8-16절 종을 향한 구원의 신탁
여기서 처음으로 야곱/이스라엘이 주님의 종으로 등장한다. ‘주님의 종’은 제2부의 신학적 주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좋은 제2부에서 단수 형태로 20회 등장한다. 그 가운데 12회는 이스라엘을 지칭한다[41,8.9; 42,19(2번); 43,10; 44,1․2․21(2번); 45,4; 48,20; 49,7]. 종에 관한 담화는 56-66장에서 “종들”로 표현되면서 제2부의 주제가 제3부에서도 계속된다. 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예로운 호칭이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다윗, 이사야, 즈루빠벨이 주님의 종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하느님께 소속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이사야서는 야곱/이스라엘을 주님의 종으로 언급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나의 종”이라 부르신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렇게 먼 옛날부터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야곱/이스라엘의 탄원(40,27)에 대해 약속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주실 것이다(41,11-13). 그들이 벌레와 구더기 같아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며, 그들에게 구원자가 되어 그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다(14-16절).
17-20절 구원의 말씀
여기서는 물이 중요한 모티브로 쓰인다. 황량한 광야에 하느님께서 샘물을 솟아나게 하실 것이 약속된다(35,6 참조). 광야에서의 목마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간 광야 여정을 연상시킨다(탈출 17,1-7; 민수 20,2-13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목마름을 해갈해주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이끌어주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유배 중인 가련하고 가난한 야곱/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들에게 물을 마련해줄 것을 약속하시며 당신을 구원자로 확실하게 드러내신다.
2) 주님의 종을 위한 하느님의 약속(41,21-42,13)
앞 단락에 상응하여 이 단락도 장르와 주제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느님의 능력을 두고 이방 신들과의 법리 논쟁이 전개되고(41,21-29), 이어서 주님의 종이 다시 언급되는 가운데 그에게 하느님의 사명이 부여되고, 아울러 하느님의 이름이 선포된다(42,1-9). 마지막으로 주님을 찬미하는 종말론적 찬양이 새로운 노래로 울려 퍼진다(42,10-13).
42,21-29 이방 신들과의 법리 논쟁
하느님과 이방 신들 사이에 법정 소송이 재개된다. 41,1-17에서는 섬들과 민족들을 증인으로 소환하여 논쟁이 진행되었다면, 여기서는 이방 신들이 직접 호명(“너희”)되는 가운데 논쟁이 전개된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임금님(41,21)”으로 등장하신다. 하느님의 왕권은 제1부에서도 중요한 신학적 주제였다. 40장 이후부터 하느님 홀로 참된 임금님이라는 주장이 전개되는 가운데,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야곱의 임금님”이라는 호칭이 사용된다. 이는 한편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다른 한편으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임금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함께 강조하기 위함이다(13-23장; 24,23 참조). 이방 신들과 비교하여 드러나고 강조되는 하느님의 능력은 다가올 일을 예측하고, 과거 사건을 옳게 해석하며, 알고 있는 결말을 통해 드러난다(41,22-24). 다른 신들은 이러한 일을 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법리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역사에서 주도권을 지닌 이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에 답변하기 위해 소환되는 이가 키루스다. 여기서 키루스는 하느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당신의 계획대로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로 제시된다. 그의 승리는 이방 신들이 할 수 없고, 오로지 야훼 하느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이다(41,25). 하느님께는 어떤 조언자도 필요하지 않으며(41,26), 우상과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한 하느님이시기에(41,29), 그분과의 논쟁에서 대답을 할 수 있는 신들은 아무도 없다(41,28).
▶유일신론, 단일신론, 그리고 다신론
이사야 예언서는 참되고 유일한 신은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곧 다른 신들을 인간들이 만든 우상으로 간주하며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의 신만을 전제하는 사상이 유일신론(Monotheismus)이다. 반면에,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수많은 신 가운데 야훼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상을 단일신론(Monolatry)이라고 부른다. 구약성경은 많은 곳에서 유일신론이 아닌 단일신론을 제시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근본적으로 단일신론을 배척하고, 유일신론을 전제한다. 참고로, 다신론(Polytheismus)은 다양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모든 신을 믿는 사상이다.
421-9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독일 성서학자 베른하르트 둠(B. Duhm)은 이사야서 연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는 이사야 예언서를 1-39장과 40-66장으로 구분해서 바라보던 관점에서 나아가 56-66장에 등장하는 익명의 예언자에게 ‘제3이사야’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아울러 그는 이사야서에서 ‘주님의 종의 노래’를 최초로 구분하여 언급하였다. 신약성경은 주님의 종의 노래들 가운데에서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예수님께 적용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주님의 종의 노래는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본문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오늘날에도 주님의 종의 신원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둠이 제2부에 언급되는 모든 종과 관련하여 주님의 종의 노래에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주님의 종의 노래에 등장하는 종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님의 종은 하느님께서 붙들어주시고, 선택하시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다(42,1). 이미 야곱/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주님의 종으로 등장하였다(41,8). 그러므로 주님의 종을 이스라엘로 바라볼 수 있다. 종은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기도 하고 세우기도 할 것이다(42,2-4). 공정을 바탕으로 통치하는 모습은 임금의 덕목이다(9,6;11,3 참조).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종에게 사명을 부여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종을 빚어 만드시고, 그에게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42,6)이 되라는 사명을 부여하신다. 이것은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해방하기 위함이다(42,6-7). 그러므로 전개되는 제2부는 주님의 종이 이러한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하느님과 종의 밀접한 관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나는 야훼,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42,8). 이 장면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드러내시는 장면을 떠올려준다(탈출 3,14-15).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신다는 계획은 하느님의 이름이 계시될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제 하느님께서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올 계획을 이 종과 함께 시작하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만이 아니라 새로 계획하시는 여러 일도 종에게 알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42,9).
42,10-13 종말론적 찬양가
이 단락은 “새로운 노래”와 함께 시작된다. 새로운 노래는 앞 단락의 “새로 일어날 일”(42,9)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이라는 의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것이 무너진 가운데 진행되는 ‘새로운 시작’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새로운 노래는 새롭게 창작된 노래가 아닌, 새로운 사건과 관련해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노래는 하느님께서 종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통해 눈먼 이들이 보게 되고 갇힌 이들이 해방되는 사건을 기리는 찬양가를 의미한다. 이방 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업적에 대한 찬양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서 단락이 마무리된다(42,10-12).
▶키루스와 주님의 종의 상호 보완
41,1-42,10에 등장한 키루스와 주님의 종은 모두 주님께서 세우신 이들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여 서로 보충한다.
우선, 둘은 부여받은 사명이 다르다. 키루스의 사명이 바빌론을 멸망하는 일이라면, 주님의 종은 주님에게서 백성의 계약을 위한 중재자가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명을 맡는다. 바빌론의 멸망으로 유배지의 백성이 해방되어 주님을 향해 나아가게 했다면, 그 해방으로 이제 백성은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고 민족들의 빛이 되어 모든 민족이 그분을 향해 다가오게 이끈다. 이처럼 둘은 모두가 하느님을 향해 움직이도록 계기를 마련한다.
다음으로, 키루스는 비록 주님을 알지 못했지만, 주님의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주님의 종은 주님의 영을 받고 공정을 펼치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키루스는 자신의 역할로 하느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증명하였다. 주님의 종은 공정을 펼치는 가운데 하느님의 통치를 현실화하면서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큰 주제를 형성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두 인물, 키루스와 주님의 종은 씨실과 날실처럼 하느님의 큰 계획 안에서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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