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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에게 보내는 편지
이홍사
모나리자!
부르고 또 불러도 자꾸만 부르고 싶은 그대!
이렇게 서두를 꺼내는 게 천박하고 상투적인 그리움의 표현인가요? 이상하게도 당신에게는 현학적인 용어를 쓰고 싶지 않아요.
지금 시간의 주머니를 뒤집니다. 주머니를 뒤져 흩어진 자투리 시간을 모아보니 참으로 여유롭고 평온한 시간이오. 이런 시간이면 어김없이 내 그리움의 좌향, 그 나침반 바늘은 어김없이 당신을 향해 돌아앉습니다.
이런 심정을 두고 애통하고 절실하다고 말하는 건가요? 못 견디게, 미치도록 그야말로 환장하도록 그립다는 말은 아물어가는 내 가슴의 상처를 위하여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당신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런 시간이면 당신이 앞치마를 걸치고 캔버스 옆에 서서 유화로 그리던 모나리자의 기름기가 마르지 않은 물감의 색체를 구상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물결은 참으로 잔잔합니다.
나의 모나리자!
작년과 달리 올 겨울은 너무 조용합니다. 당신이 가기 전에 견적을 넣고 재설계하고 다니던 수몰지역의 고택은 이주 자리로 완벽하게 옮겨 준공이 끝났고 보수하던 제실공사도 마쳤습니다. 고택은 서까래 몇 개 바꾸고 기와 몇 장 바꾸고 나머지는 다 그대로 재현했죠.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작품입니다. 지금 견적 넣는 정자 보수공사가 낙찰될 때까지 시간이 남아돕니다. 업종이 문화재와 고건축개보수는 현대건축과 달리 시청 관내 입찰이 아니라 도내 입찰이거든요. 경쟁이 치열합니다. 적당한 가격을 뽑아 눈치껏 견적을 넣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시간이 남아돌아 당신이 더욱 애잔하게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레오나로도보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더 잘 그리던 당신!
붓을 들고 서 있는 당신을 찾아 화실에 들어서며 행숙이라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모나리자라고 불렀지요. 그래요. 당신은 행숙이라는 이름을 무지 싫어했지요. 그래요. 행숙이 보다 모나리자라는 호칭이 더 마음에 드는지 당신은 그리던 모나리자의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지요. 지금도 여느 때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고 모나리자라고 호칭하며 이 편지을 씁니다.
모나리자! 어제 오전에도 편지를 썼습니다.
어제는 두루마리 한지에다 4B연필로 도면을 구상하며 스케치하듯이 제문 같은 편지를 막힘없이 줄줄 썼죠. 장문의 편지를 써서 한번 읽어보곤 작업실 연탄난로에 태웠지요. 그 글을 소지하는 행위가 당신에게 읽히도록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제 그 편지를 읽으셨겠죠?
어쩌면 이 글은 행숙이나 모나리자에게 쓰는 글이 아니라 내 작업실에 서 있는 당신의 유작, 미완성 모나리자에게 쓰는 편지인지도 모릅니다. 글을 쓰고 있으면 그 작품이 자꾸만 눈에 아롱거립니다. 당신이 떠나고, 주인 잃은 당신의 화실에서 가져온 미완성의 모나리자 유화를 내 작업실에 걸어놓고 미완성 미소를 보며 편지를 씁니다. 달리 말하면 모나리자, 당신이 아니라 미완성 모나리자의 미소에게 보내는 편지인지도 모릅니다.
화가가 가장 아름답게 죽는 게 어떤 죽음일까요?
바로 당신처럼 죽는 것입니다. 작업실에서 붓을 입에 물고 작품을 구상하다가 코피 몇 방울 흘리고 그렇게 조용히 요절하는 것. 그게 작가로서 순직이지요.
가장 아름다운, 가장 치열한 작가다운 순직을 당신은 택했습니다.
나의 모나리자! 그 장렬한 순직을 생각하면 당신이 없어 서운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옆에 없지만, 밤이 되면 내 곁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되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자위하면 마음이 느긋해집니다.
당신은 나에게서 가장 가까운 별이 된 게 확실하지요?
대답을 좀 할 수는 없나요.
하늘에서도 모나리자의 미소를 그리고 계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곳에서 그리는 모나리자의 미소도 나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작품세계에 대해서, 모나리자의 미소에 대해서 토론해야 합니다. 그 소통의 수단이 꿈이라도 좋습니다.
솔직히 당신이 없는 시간이 너무 무료합니다. 내가 한 번도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죠. 사랑에는 공식이 있죠. 그렇게 입으로 나불대는 사랑은 두텁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느끼는 거죠. 당신이 그리는 모나리자에 가장 애착을 가지던 내가 당신이 없어도 이렇게 살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죄스럽군요. 하지만 절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입으로 나불대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상투적이니까요.
모나리자!
어제 일어난 일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좀 해줄까요?
내 생활 습관이 바뀌었어요. 당신이 떠나고 작품이나 일보다 술에 의존하는 시간이 더 늘었지요. 당신이 없는 허전한 시간을 메워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와 수단이 술이라고 할까요. 내 작품의 구성과, 작업하는 작품의 완성도와 성취감보다는 술이 더 허전함을 달래준답니다. 연말이라 그런지 술자리가 기가 막히게 연결되네요. 어제는 수미공방 최 작가가 찾아왔습니다. 가마에 불을 지피기 전이라 초조하다며 찾아와 한 잔하며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뒤 늦게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하던 전문대학 강단에조차 서지 못한 최 작가는 그 점은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어요. 작업실에서 소주를 사다가 얘기를 취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얘기 중간에 모나리자 당신 얘기도 많이 했습니다. 최 작가가 돌아가고 나는 집으로 들어가 바로 잤습니다.
숙면이라고 칭할 정도로 푹 잤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당신 꿈도 꾸지 않고 실컷,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몸과 마음이 가뿐했죠.
잠이 깨면서 잠시 숙면에 대해 생각 했었고, 모나리자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잠시 허전함을 느끼고 머리맡에 스탠드를 켜고 시계를 보니 웬걸! 겨우 열시 십 분인 거 있죠.
어라? 초저녁인데? 시계를 잘못 보았나 싶어 휴대폰 폴더를 열어보니 열두시 반이었어요. 만취한 최 작가를 보낸 게 오후 네 시였으니 실컷 잔 것이죠. 손목시계를 다시 보았습니다. 삼 년 전에 당신이 생일 선물로 준 그 시계 말입니다. 열시 십 분에서 초침이 멈춰있었어요. 어라? 이게 숨을 거두었군! 한마디 뱉고 검지로 시계를 한번 툭 쳐보았죠. 그래도 초침은 꿈적도 않았어요. 순간적으로 당신이 가고 없으니 당신이 준 시간마저도 당신을 따라간 모양이라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아마도 시계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었어요.
오밤중에 깨어난 정신은 초롱같았어요. 모나리자! 그런 시간에 잠이 깨면 무얼 해야 할지 당신이 가고부터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담배부터 한 대 물고 거실로 나가 보니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아들 녀석이 주방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어요.
그때까지 공부를 할 리가 없고 보나마나 제 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출출함을 달래려고 라면을 끓이는 것이겠죠. 슬며시 주방으로 들어가 젓가락을 들고 섰다가 녀석이 먹는 라면에, 냄비뚜껑을 들고 싱크대 앞에 선채로 개평을 좀 들었지요. 아내는 작은 방에서 자고 있는지 조용했지요. 불콰한 얼굴로 들어와 저녁도 먹지 않고 잤으니 연일 술이라고, 입버릇처럼 잔소리하는 것보다 훨씬 낫죠.
-라면을 하나 더 끓일까요?
아들 녀석은 나를 보며 제의 했어요.
-아냐! 됐어. 라면국물에 밥 말아 먹자.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은 밥솥을 열고 밥을 푹 퍼서 라면국물에 말았습니다. 그것도 나는 식탁에 앉지 않고 싱크대 앞에 서서 부자간에 사이좋게 나눠먹었죠. 모나리자! 라면 얘기를 하니까 당신 작업실에서 둘이서 라면을 끓여 서서 먹던 생각이 나네요.
-너 저녁 안 먹었냐?
-이게 저녁이죠.
아들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으며 한마디 덧붙였죠.
-제 시간에 좀 챙겨 처먹어라.
먹고 나니 속이 좀 풀렸어요. 잠은 올 것 같지 않고, 이 시간에 뭘 하나? 당신이 없는데 그런 시간을 넘기기에 익숙하지가 않죠. 까딱하다간 낯선 시간 속에 그대로 방치되는 게 아닐까 염려스러웠죠. 이제 무얼 할까 궁리하다가 아들 녀석에게 제의했죠.
-야! 아버지하고 금오산에 한 번 가볼까?
-산에는 뭐하려고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자식이 원래 퉁명스럽잖아요. 대답이라고 한 푼 어치도 맘에 들지 않았죠.
-잠이 안 오니까 산책삼아 가는 거지!
-잠이 안 오는 건 초저녁에 정신없이 주무신 아버지고, 저는 이제 잠이 오는데요.
-그런가? 지금부터 뭐하지?
-아버지 혼자 다녀오세요. 잠이 안 오는 과부들이 많이 올라올 거예요.
-이 자식이 대가리가 좀 컸다고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또 아들 녀석의 목덜미를 철썩 때렸죠. 아들 녀석도 지지 않습디다.
-아버지 호색가잖아요? 카사노바!
-그래 맞다. 이 자식아! 아버지 과부 찾아 산에 갈란다.
그렇게 대꾸하며 아들 녀석의 목덜미를 겨냥해서 다시 손을 드는 찰라, 아들 녀석이 내 손목을 움켜잡았죠. 상황이 그렇게 되면 물리적으로는 안 되는 걸 당신도 아시죠. 턱도 없죠. 전공이 체육학이고, 80킬로가 넘는 거구를 물리적으로 재치고 목덜미를 다시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놔라! 놔! 아부지 산에 갈란다.
그제야 녀석은 손목을 놓아주고는 낄낄거리며 잽싸게 후다닥, 주방을 빠져나갔죠.
-야! 인마. 설거지는 하고 가야지?
-잠이 안 오면 아버지가 설거지 좀 하세요.
녀석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갔어요. 엉덩이라도 한 대 차고 싶었지만 닭 쫓던 개가 따로 없었죠. 빈 그릇을 아내의 몫으로 개수대에 처넣고 방으로 들어왔죠. 문지방을 넘는 순간 방은 낯선 공간이 되어버렸다. 아니, 낯선 시간이죠. 아내는 딸애가 해외 어학연수를 떠나고부터 딸애 침대를 쓰고 있어요. 아내가 방에 있다면 슬며시 음탕한 수작을 걸어보겠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죠.
-이 시간에 무얼 할까?
낯선 시간에 고요히 담겨 잠시 생각했죠. 당신이 떠나고부터 그런 시간이 싫어졌어요. 정말 산에나 갈까? 아니면 당신과 언젠가 밤새 돌아다니던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바닷가를 한 바퀴 돌고 올까? 슬슬 도지는 역마살을 감당하기 힘들었죠. 그렇게 생각하다가 차에 기름을 넣지 않았음을 깨달았죠. 연료가 조금밖에 없는데....... 이 시간에 주유소에 영업을 할까? 그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도저히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어요. 다시 누우면 불면의 영역에서 괜히 당신에 대한 갖가지 망상에 시달릴 것은 불 보듯 하고,
창을 열어보았어요. 깊은 겨울의 깊은 밤이었죠. 그래 산에나 가보자. 그렇게 다짐하니 당신이 밖에 어디에선가 기다리는 것만 같았어요. 혹시 당신이 나를 불렀나요?
옷장을 열고 여태 한 번도 입지 않은 기능성 내의를 꺼내 입었죠. 지난 생일 때 딸애가 용돈을 모아 선물이라며 사 온 것인데 기능성내의라고 이름 붙여진 옷의 기능을 시험할 겸 입어본 것이죠. 기능성이라 그런지 활동에 지장이 없을 것 같고 착용감도 좋았어요. 그 위에 방한복을 찾아 입고, 접힌 부분을 내리면 귀까지 덮는 골프 모자를 썼죠. 그렇게 중무장 하면 눈밭에 굴러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양말도 두꺼운 등산용을 찾아 신고 현관을 나섰죠. 현관문을 여는데 아들 녀석이 방문을 열고 소리쳤어요.
-아버지! 정말 이 밤중에 산에 가실 거예요?
-정상은 무리고 가는데 까지 가보지 뭐. 폭포까지만 가보던지........
-아버지 이거 가지고 가세요.
뭘까? 잠시 현관 앞에 머뭇거리고 있으니 녀석은 기특하게도 제 방에서 등산용 손전등을 찾아 가지고 나왔어요. 그것을 받아들고 당신이 기다리고 섰을 것만 같은 계단을 내려왔어요. 역시 당신이 없는 바깥은 쌀쌀하고 허전했어요.
대문 앞에 선 차를 끌고 도로로 나섰죠. 달리 얘기하면 당신을 찾아 나선 거죠.
길은 한산했어요. 차가 없어 팅 빈 몇 개의 신호를 무시하고 중앙통을 관통하며 보니 중앙통은 불야성입디다. 연말이라 그런지 평소에도 그런지 모르지만 술집들이 문을 열고 있었고 취객과 야행성 젊은이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어요. 중앙통을 지나쳐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저수지를 지나고 곧장 금오산이죠.
금오산 초입부터 가로등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어요. 그곳도 도립공원이라 그 시간에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어요. 아내는 작년에 아들 녀석 대입을 앞두고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백일기도를 다녔죠. 그 사실은 당신도 아시죠. 새벽 운동 겸 폭포 아래에 있는 약사암에서 백팔 배를 하고 오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죠.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낮에 주차료를 받는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어요.
빈 주차장을 지나쳐 등산로 초입까지 올라가 구급차나 도립공원 관계차량을 돌리는 곳으로 올라가 길가에 차를 세웠죠. 낮이면 통제가 되겠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간섭하는 이가 있을 턱이 없었어요. 당신은 다녀봐서 알겠지만 거기서 폭포까지 올라가려면 보통 삼사십 분 정도 걸리죠. 왕복 한 시간이면, 당신을 그리며 달밤의 체조로는 적당할 듯싶었어요. 산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트렁크에 있는 등산지팡이를 꺼내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죠. 옆에 당신이 따라 온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생각하니 참 오랜만에 올라보는 금오산이었어요. 예전에 당신과 운동을 빙자한 데이트로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오르던 길이었죠.
그곳에 가니 당신과 함께한 즐거웠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당신이 아련히 그리워졌어요. 당신이 없다는 생각에 씁쓸한 입맛을 달래며 다시 나무계단을 오르며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당신은 없었어요.
깊은 산의 밤은 웅숭깊은 사내의 속처럼 말이 없고 장엄했어요. 당신이 좋아하던 스카이라인을 훑어보았죠. 스카이라인은 고개를 바짝 쳐들고 올려보아야 했어요. 깎아지른 절벽위로 보이는 스카이라인은 한 폭의 산수화 같았어요. 실제로 보는 절경은 산수화보다 수려하죠. 주위 솔숲에는 잔설이 드문드문 남아있었어요. 당신을 생각하며 오르다보니 성문을 지나고 돌계단이 나왔어요. 예전에 그곳까지 가면 슬며시 당신 손을 잡아주던 그 돌계단. 조금만 올라가면 약수터가 있고, 약수터 위에 바로 약사암이 있죠. 몇 백 년 전 지극한 불심으로 정으로 바위를 쪼아 터를 만들고 그 위에 지은 작은 암자죠. 가로등은 약수터까지 길을 비추고 있었어요. 약수터를 떠올리자 숙취 뒤에 따라오는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계단을 올라 약수터로 올라서 보니 약수터는 휑하니 비어 있었어요. 스텐리스 걸이에 걸린 바가지를 떼어다가 돌 틈으로 당신 말마따나 사내아기 오줌 줄기처럼 흘러나오는 약수를 한바가지 받았죠. 당신에게 먼저 먹이고 싶은 마음에 돌 틈에 부었죠. 다시 한바가지 받아서 숨을 몰아가며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어요. 한바가지를 다 마시고 다시 반 바가지를 받아서 들이키다. 물을 버리고 바가지를 씻어 제자리에 걸어 놓고 생각했어요. 이제 내려가면 당신 생각을 접고 잠이 잘 올 것이라 생각하고 약사암에 들리지 않고 바로 하산 길로 들어섰어요. 하산하는 길에도 손을 잡아주던 당신이 없으니 허전했어요. 당신과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의 파편, 그 시간들을 형형색색 구슬로 만들어 색동실로 엮어 목에 걸고 다니는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그런 기분에 젖어 돌계단을 내려오고 나무계단으로 들어섰답니다.
그 사내를 만난 것은 성문을 지나고 조금 내려오던 솔밭이었었어요.
성문을 지나고 나무계단을 내려오는데 옆의 솔밭에 사이로 난 개울 건너에서 담뱃불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어요.
이 시간에 누가 저기에서 담배를 피우고 앉아있는 것일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주머니에 든, 아들 녀석이 준 손전등을 꺼내 나무 사이로 비춰보았죠. 나무 계단 아래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물이 말라버린 작은 개울 건너 솔밭에서 사내 하나가 낙엽위에 퍼질러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고개를 갸웃했던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죠. 당신도 그랬겠죠.
-누구세요?
사내는 대답이 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어요.
-게서 뭐하는 것이오?
역시 대답이 없었어요. 나는 다시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하니, 뭔가 심상찮은 구석이 있어 그냥 지나쳐 내려갈 성질이 아님을 깨우치고 기어이 계단의 밧줄로 된 난간을 넘고 개울 건너 사내가 앉은 근처로 갔죠.
모나리자! 한 눈에 보아도 무슨 짓을 하려는지 감이 잡히는 풍경이었어요. 사내는 옆의 소나무 가지에 흰색 태권도 띠로 올가미를 묶어 만반의 준비해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는 참이었었어요. 전등으로 비추어보니 빈 소주병 하나는 낙엽 위에 뒹굴고 한 병은 반쯤 비어 있고 안주는 없었고요.
소주를 다 마시면 올가미에 사내의 목을 걸 것이죠. 어쩌면 피우고 있는 담배가 생의 마지막 담배가 될 것이고. 띠를 묶어놓은 소나무 가지는 꽤나 높아, 발이 닿지 않았는지 올가미 아래 개울에 있던 넓적한 돌을 세 개나 쌓아 놓아 돌 위에 서서 키 높이와 연습을 이미 해 본 것 같았어요. 그 정도면 저승을 빗장을 풀기에는 부족함이 없이 완벽했어요.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요소를 두루 갖춘 분위기였어요. 손전등으로 주위를 비추어보며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고 사내에게 말을 걸었죠.
-준비를 완벽하게 해놓으셨군요. 마지막으로 그 소주를 한 모금 적선하고 가시죠?
내 말에 사내는 앉은 채로 힐끔 올려다봅디다. 그리고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어요. 말이 하기 싫은 내색이 역력한 청동입술을 지닌 인간이었어요.
-권하지 않으면 개평이라도 들어야겠군.
당신이 늘 못마땅해 하던 내 특유의 객기와 오지랖을 발휘하여 소주병을 들었죠. 사내 옆에, 사내와 똑 같은 자세로 앉아 소주를 한 모금 병나발 불고는 슬며시 낙엽위에 소주를 부어버리고 빈병으로 만들어 있던 자리에 세워 놓았죠. 사내는 개의치 않고 꽁초가 된 담배를 볼이 패이도록 빨고 있었어요.
-세상살이가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은근히 떠보아도 사내는 말이 없었어요. 역시 청동입술이었죠.
-어허, 이거 어떻게 하나? 내가 그냥 내려가면 자살방조죈가? 뭐 그런 고약한 법에 저촉되는데 그냥 내려갈 수는 없고........ 이거 참 난감하네!
그 말에 사내는 힐끔 나를 한 번 쳐다보았어요.
-우리 내려갑시다. 요 아래 가서 한잔 더 하고 나는 바로 내려가고, 올라와서 거사를 진행하죠? 내가 작년에 한 번 시도해봐서 아는데 소주 두 병으로는 죽지 못해요. 소주를 대여섯 병정도 마셔야 목을 걸 수 있지. 내가 작년에 실패했던 사람이오. 내려가서 소주를 댓 병 더 마십시다. 그리고 당신은 이리로 올라오고 나는 집으로 가고 그래야 내가 자살방조죄에 걸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말을 마치고 내가 먼저 일어섰죠. 사내는 대답 없이 뜨악한 눈길로 나를 다시 올려다보았어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사내의 팔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죠. 의외로 사내는 저항하지 않았어요.
-자! 한 잔 더 하러 갑시다.
사내는 팔을 잡아끄는데도 거부하지 않고 일어섭디다. 그렇게 거부하지 않는 작자가 더 무서운 법이죠. 내려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부하고 버티는 자는 결국 올가미에 제 목을 걸지 못하는데 이런 작자가 더 무섭고 독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며 사내를 뒤에서 부축해서 난간을 넘어 나무계단으로 올라왔어요.
-여기가 어디쯤인지 확실히 알아두시오. 술을 더 마시고 올라와서 어딘가 잊어버리지 말고, 난간에 표시를 하시던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걸었죠.
-찾아 올 수 있소. 매일 다니는 길인데........
얼래? 사내의 굳게 닫힌 입술이 열리는 거 있죠. 내려가면 술집에 마주 앉아서도 수월하게 입을 열 것이고 죽으려고 마음을 먹게 된 기구한 사연에 대해서 듣겠구나 생각하며 사내 옆에 나란히 서서 계단을 내려왔어요.
십 분 이상 서로가 말없이 나란히 걸었죠. 그 침묵의 동행은 서로가 저울질하는 시간이라는 건 말을 안 해도 아시죠. 차가 있는 곳까지 내려와 차문을 열자 사내가 먼저 조수석에 날름 올라앉았어요. 아마도 조금 아래 있는 도립공원 주차장 상가까지 타고 가자는 심산인 모양입디다.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아스팔트에 발로 비벼 끄고는 차를 돌려 길을 되짚어 내려와 주차장에 들어서서 상가를 쭉 훑어보니, 어라? 잘못 들어갔어요. 한 군데도 문을 연 식당이 없더군요. 그렇게 호객행위를 하며 붐비던 상가는 오밤중, 모두 잠이 들어있어요. 컴컴하게 아가리를 닫은 상가를 빠져나와 저수지 옆길을 내려오며 조수석에 탄 사내를 힐끔 돌아보고 말을 걸었죠.
-다시 올라가려면 발품을 엄청 팔아야겠는데?
대답 없이 사내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빼물고는 조수석 차창을 조금 내렸어요.
-내가 다시 태워다 주지는 않을 것이니 걸어서 올라갈 각오를 하시오.
슬쩍 떠보았지만 역시 사내는 말이 없었어요. 속에 말 못할 무엇이 잔뜩 들어 있는 모양이죠. 누구에겐가 후련하게 뱉고 나면 맘이 변할지 모를 일이죠.
저수지 아래에 있는 1번 주차장에 내려오니 매점이 문을 열어놓고 있더군요. 주차장에는 아베크족과 드라이브 나온 연인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음침한 곳에 차를 세우고 카섹스를 즐기는 족속들도 있었을 겁니다.
연일 북적이던 매점 앞 플라스틱 파라솔 탁자는 바람만 가득하니 비어 있었어요. 사내에게 턱짓으로 탁자를 가리키며 기다리라 하고 매점 안으로 들어가 소주 두 병을 사고 안줏거리를 찾다가 김이 술술 나는 어묵을 보고, 한 사발 담아달라고 아줌마에게 부탁하고 나왔어요. 날씨가 추운 탓에 김이 술술 나는 어묵이 먹음직스러웠죠.
플라스틱 탁자에 마주 앉아서 보니 사내는 모노물산이라는 마크와 이름이 새겨진 점퍼를 입고 있었어요. 모노물산이라면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의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유망 중소기업, 모나리자! 당신도 아시죠?
-모노물산에 다니시우?
사내는 안주도 나오지 않았는데 소주병을 따서 내 잔에 채워주며 긍정을 표시했어요.
-모노물산은 사원 복지도 좋고 인원감축도 없고 노사 간의 분쟁도 없다고 들었는데 무슨 연유로, 그런 아름답지 못한 거사를 집행하려 하시우?
사내는 제 잔에도 소주를 부어서 한잔 마시고는 입을 손등으로 닦으며 푸념처럼 늘어놓았어요.
-너무 좋아서 탈이지요. 자고로 인생은 질곡이 있어야 치유하는 법이 익히는데 너무 정확하게 인생이 시계 초침처럼 돌아가니 탈이 난거죠. 선생! 야간 근무를 하는데 갑자기 전력에 이상이 생겨서 생산을 중단하고 사원들을 퇴근시키면 집으로 바로 돌아갈 작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청동입술의 사내가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며 되물었어요.
-없겠죠. 어디 가서 한잔 걸치고 들어가야겠죠.
-그렇죠? 그런데 끼리끼리 몰려간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불렀는데 제 마누라가 쑥 들어온다면 선생은 기분이 어떻겠소?
주객전도! 느닷없는 사내의 물음에 내가 문책을 당하는 꼴로 둔갑했어요. 그 때 아줌마가 어묵이 담긴 그릇을 테이블에 놓고 갔고 갑자기 말문이 막힌 나는 앞에 놓인 소주를 마시고 어묵을 하나를 집으며 그 물음에 되물었죠.
-선생께서 그런 일을 당했단 말이오?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소주잔을 들어 한 잔을 비우고 느긋하게 청동입술을 열었어요.
-오늘은 야간조라서, 네 시에 출근해서 다섯 시까지 일 하다가 퇴근을 해서 회사 근처에서 한잔하고 이 차로 간 노래방이었소. 초저녁에 그런 일이 벌어졌단 말이오. 그것도 바로 나에게.......
말꼬리를 사린 사내는 고개를 들고 나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내는 생산직 단순노동에 융통성이 없어 보였어요. 여기서 내가 말을 잘못하면 사내는 다시 올가미가 있는 곳으로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래야한다는 책임감과, 괜히 객기를 부린다고 심야산행을 와서 어지간히 성가신 작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갔어요. 참 이기적이죠?
-남의 일이라 그런지 흥미롭구먼, 그래서 어떻게 했소?
-지금 빈정거리는 것이오?
사내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번쩍, 살의가 실려 있었어요. 섬찍했죠.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다는 말이오. 직접 들은 적은 처음이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고 나왔소?
-그러니까....... 노래방으로 들어서는데 서로가 눈이 마주친 거죠. 워낙 화장을 진하게 해서 몰라볼 뻔 했소. 눈이 마주치자 마누라가 더 놀랐겠죠. 멈칫, 하는 순간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고 노래방을 빠져 나왔소. 물론 마누라는 나보다 더 먼저 노래방에서 날아버리고.......
그 다음은 더 듣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한 일이죠.
-혹시 잘못 본 건 아니오?
-제 마누라를 몰라보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회사 동료들이 아내의 얼굴을 알고 있소?
-석 달 전에 부서를 옮겨서 그 자리에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었슴돠.
-거 참, 잘 되었네.
-뭐가 잘 되었다는 말입니까?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이오. 얼굴을 아는 작자가 없었으니....... 그런데 아내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고 있소? 궁금하지 않소?
내가 잘못 넘겨짚었지요. 내 물음에 전혀 상반된 대답을 했어요.
따귀를 후려치고 아내를 내쫓은 사내는 노래방을 나와 전봇대 아래 서서 담배를 한 대 피고는 바로 집으로 갔는데, 이게 무슨 조화야?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던 아내가 평상복차림에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개수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었어요. 뭐에 홀린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하고, 아내는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긋나긋, 왜 이렇게 일찍 퇴근했느냐고 물으며 그를 대하더라는 것이었죠. 사내는 상냥하게 구는 아내를 소파에 난폭하게 밀치고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내달았다는 말을 했어요.
모나리자! 뭔가 이상하죠?
-노래방에서 여자를 잘못 본 것 아니오?
-틀림없이 마누라였소!
사내의 목소리는 단호했어요. 턱없이 강한 부정은 긍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법이라고 당신이 언젠가 말했지요.
-그래요? 평소에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소?
이런 사람에게는 말을 많이 시켜야 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죠. 굳어있던 사내의 입술이 상당히 유연해졌다는 건 말할 바도 없고요. 사내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노래방 도우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고 했어요. 노래방 도우미라니,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일마다 성당에 착실히 나가고 또 성당 교우들과 만든 봉사활동단체에서 교우들과 어울려 독거노인들의 목욕 봉사를 하는, 그야말로 천사의 라벨이 붙은 여자라고 했어요. 사내는 성당에 관심이 없지만 쉬는 주일이면 성당에 같이 가자는 아내의 종용을 뿌리치느라 편히 쉴 수가 없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하며, 덧붙여 중풍이 든 시어머니 대소변을 사 년이나 받아내며 봉양한 아내라고 하고는, 입 안이 쓴지 소주를 한 잔 털어 넣더군요.
그가 술기운에 컴컴한 조명의 노래방에 들어서는 여자를 잘못 보았거나 환시를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나는 자꾸 유도성이 짙은 질문을 해서 사내의 입이 닫히지 않게 만들었지요.
-아내를 보았다는 그 노래방에서 집까지 얼마나 걸리오?
-차로 십 분 정도 거리에 있어요.
-차를 끌고 바로 집으로 갔단 말이오?
-예. 차를 끌고 바로 집으로 갔지요. 마누라는 멀쩡히 있었고.......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어요.
-분명히 노래방에서 여자를 잘못 본 것이 확실하오. 엉뚱한 여자 따귀를 때렸구만....... 어떤 사태가 생길 거라고 추측을 집요하게 하고 보면 그런 환시를 느낄 수가 있는 법이지요.
-환시? 그런 것 같죠?
사내의 눈이 잠시 빛났어요.
-그 딴 일로 왜 거사를 집행하려고 했소? 죽을만한 일이 아닌데?
-마누라가 노래방 도우미로 들어왔더라도 죽을 일이고, 내가 환시를 느낄 정도로 미쳐도 죽을 일이고.......술기운에 생각하니 모두가 죽을 일뿐입니다.
-그 딴 일로 죽으면 세상에 남아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그 일 뿐만이 아니란 말이오.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한마디를 불쑥 뱉었어요.
-다른 일이란 뭐요?
사내는 말하기 곤란한 듯, 안 해도 될 소리를 한 듯이 고개를 팍 숙였어요. 뭔가 심상찮은 구석이 있었다. 보아하니 사내가 쉽게 일을 열 성질의 고민이 아닌 듯 했어요. 그건 들으나마나 분명 돈 문제나 여자 문제죠.
-사나이 대 사나이의 얘기요. 뭔지 말해보시오. 혹시 도박해서 왕창 날린 것이오?
-그게 아니라.......
사내는 말꼬리를 사렸어요. 잠시 침묵은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고 침을 꿀꺽 삼키고 사내의 입술이 열리는 그 잠시를 기다렸지요.
-여자가 있었소. 그런데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고.......
-남편이 있는 여자였소?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어요.
-그럼 과부란 말이오?
-이혼녀였소.
-이혼녀? 어차피 내 물건이 아니잖소? 잊어야 하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소.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내가 너무 좋아했소. 이렇게 비참하게 차이고 보니 세상사는 맛이.......
-단도직입적으로, 그건 사랑이 아니오. 불륜이지. 어차피 내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이 있다! 이것을 명제로 삼고 남의 물건 잘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시고 미련을 접어시오.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거리라고 생각하시오. 살다보면 더 좋은 여자를 또 만날 수가 있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한지.......
사내는 들고 있던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고개를 숙였어요. 그런 사내는 삶의 의지와 희망, 책임감을 심어 주어야하죠? 그런 데는 자식들 이야기가 최고죠? 나는 말머리를 돌렸어요.
-아이는 몇이나 두었소?
남매를 두었다고 했어요. 큰 애는 아들인데 고등학교 이 학년이고 둘째는 딸인데 고등학교 일 학년, 연년생으로 두었고 다들 공부를 잘한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술술 했어요.
-당신이 죽으면 그 애들 어떻게 되겠소? 자! 날씨도 추운데 이제 정리합시다. 초저녁에 노래방에서 본 아내는 술기운에 잘못보고 엉뚱한 여자의 따귀를 때렸죠? 맞지요? 알리바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인정하시오.
내 말에 사내는 부정을 표시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잘 생긴 남자가 목을 매도록 매정하게 차 버리고 간 그 이혼녀는 뭐하는 인간이오?
대수롭잖게 물었는데 사내의 대답에 나는 흠칫 놀랐어요.
-미용실을 하는 여잡니다. 비산동 미성상가에서.......
제 이종사촌 동생이 비산동 미성상가에서 미용실을 하거든요. 아, 참 모나리자! 당신도 한 번 보았죠. 재작년엔가, 그 애가 마음을 못 잡고 있을 적에 당신에게 그림을 배우라고 내 소개로 한 번 만났었죠. 추 희정이라고, 미용실을 한다고 했잖아요. 미적인 감각을 지닌 동생이죠. 총명한 아이였는데 시집을 잘못 가서 남편이 부도 왕창 맞고 파산에 결국 이혼까지 했죠. 그 아이를 생각하고 미성상가에 미용실이 몇 개나 되나 싶어 사내에게 물었어요.
-혹시 추 희정이라는 여자가 아니오?
모나리자! 정말 세상이 좁더군요. 내 말에 사내는 더 놀라는 거 있죠.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어떻게....... 어떻게 아시는 사이죠?
사내는 몸이 달았고 나는 최대한 능청을 떨었어요.
-첨단 디지털 도시라고 불리는, 인구 겨우 40만인 이 조그만 공단 도시에 한 다리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 여자 두어 달 전부터 나랑 사귀고 있거든요. 왜? 돌려드릴까요?
-그게 아니라....... 정말 어,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내가 말했잖소? 나랑 사귀는 사이라고, 이제 거사를 집행하러 올라가야죠. 부디 극락왕생하시오. 내가 그 여자에게 당신이 참신하게 죽었다고 전해주겠소.
말을 마치고 나는 자리를 털었어요. 차가 있는 곳으로 가며 힐끔 보니 사내는 벌떡 일어섭디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조수석에 올라앉더군요.
나는 시동을 걸며 사내에게 말했어요.
-나는 당신이 거사를 집행하는 곳까지 태워다 줄 생각이 없습니다. 내리시오.
-그게 아니라 아이들을 한 번만 보고 가야겠습니다. 가시는 길까지만 좀 태워다 주세요.
나는 사내를 태우고 우리 집이 있는 부곡동을 향해 달렸어요. 사내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입을 떼지 못하고 줄담배를 피우더군요. 중앙통을 지나쳐도 내려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더군요. 이 작자가 결국 우리 집까지 가서 탯시를 타고 돌아가겠다는 예감으로 나는 내처 집으로 향해 달렸어요. 그 사내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그런데 부곡동 입구 그린 아파트 앞을 지나는데 세워달라고 하더군요. 그 인간 집이 그린 아파트라고 하더군요. 우리 집에서 걸어서 십 분도 안 걸리는 곳이죠. 그 사내는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요. 그 사내가 무슨 말인가 꺼내려면 내가 계속 말문을 막았거든요.
저어....... 하며 말문을 열면 날씨를 들먹이고, 또 저어....... 하면 경기를 들먹여 사내의 입술을 청동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끝내 내가 누군지 밝히지 않고 내려주었어요.
모나리자!
어제는 참 이상한 날이었죠?
낮술에 취한 것도 이상하고 그 시간에 작업실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 저녁도 먹지 않고 잔 것도, 당신이 부르는 것처럼 몽롱하게 금오산을 간 것도 그렇고 모종의 사내를 이상한 인연으로 만난 것도 마찬가지, 혹시 당신이 나를 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네요.
혹시 당신이 어디선가 나를 조정한다면 당신과 똑 같은 여자를 하나 만나게 해주면 어떻겠소? 마음씨도 당신과 똑 같고 외모와 우아한 행동들이 당신과 똑 같은 여자, 내가 따귀를 맞을 소리를 모나리자에게 한 건가요?
아니면 보이지는 않지만 늘 내 곁에 머물며 나를 조종해주세요. 당신이 보고 싶을 땐 당신을 그리워하고 작업을 할 땐 잡념 없이 작업 몰입할 수 있도록 당신이 보이지 않지만 옆에서 조정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래도 골목 슈퍼에 가서 소주를 두어 병 사와야겠어요. 일주일 전부터 짜던 목조창의 격자무늬가 맘에 들지 않고 작업이 하기 싫어졌어요. 그대로 밀쳐놓고 보기만 하고 있습니다.
아, 참!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생긴 그대로 목각하고 싶었어요. 키와 손의 크기 다리의 길이, 체격 그대로 목각을 조각하고 싶은데 재료가 마땅찮아 미루고 있었어요. 그렇게 목각하더라도 당신의 혼을 불어넣을 수야 없겠지요. 그런 작품을 완벽하게 만들더라도 무늬만 모나리자, 아니 행숙이가 되는 건가요. 오늘도 낮술을 먹으며 내 머리에서 당신의 체격과 미소를 떠올리고 머리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 작업을 해야겠죠. 어떤 재료의 목질이 좋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모나리자! 잠깐만요.
아무래도 나사서 소주부터 사와야겠어요. 먹다 남은 육포가 냉장고 어디엔가 있을 겁니다. 그걸 안주로 한잔 합시다. 술보다 당신에게 취하고 싶네요. 보이지 않는 당신과 건배를 하며 한잔하고 이 글을 마무리 짓고 좀 취한 다음에 이 편지도 소지를 하여야겠지요. 그래야만 당신이 읽을 수가 있을 거니까요.
무엇에 대해서 건배를 하죠?
당신과 나의 돈독하고 특별한 우정을 위하여? 아니면 내가 구상하는 당신의 목각에 영혼을 불어넣기를 기원하면서?
아무튼 나가서 소주부터 사오는 게 순서인 것 같군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이 있게 마련이지만 내 가슴에 달라붙은 당신에 대한 그리움은 소멸하지 않을 것 같군요. 종이컵은 두 개를 마련하겠소. 비록 내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마주앉아 한잔 합시다.
모나리자!
이렇게 빈 작업실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당신이 그립고 애틋하겠소? 당신이 꼭 같이 마셔주어야 하오. 내가 취하면 주저리주저리 당신에게 무슨 푸념을 할 것이 분명하오. 그 푸념이 먼저 떠났다는 원망으로 변할 수도 있겠지요.
술을 마시다가 그리움을 제어하지 못하고, 만취상태에서 지난번처럼 당신의 빈 화실로 찾아가 당신의 그림을 보며 울다가 또 취기에 잠이 들 수도 있겠지요. 소주를 사러 나가기 전에 이 편지를 당신에게 보내야겠습니다. 어제처럼 저 연탄난로에 소지하면 당신이 읽을 수가 있겠지요. 이 글을 읽고 당신이 꼭 내 작업실로 와야 합니다.
그리운 모나리자!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음이 존재의 이유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늘 내 곁에 붙어 다니며 나를 실의에 찬 인간이나 그리움의 도가니로 빠트리지 마세요.
소지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불러봅니다.
나의 모나리자!
사랑한다는 상투적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이 편지를 연탄난로에 소지하고 소주를 사러 나가겠습니다. 그 사이에 편지를 읽은 당신이 와서 기다리면 좋겠어요. 빈 작업실에서 혼자서 처량하게 술을 마시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꼭 오세요. 연일 술이라고 아내처럼 잔소리만은 하지를 말고.
당신이 모나리자의 미소를 머금고 대작하러 꼭 오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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