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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전투 사료집 C
책사풍후 ・ 2016. 10. 10. 9:02
상촌선생집 제56권
지(志)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적병이 처음 부산에 이르렀을 때 망을 보던 관리가 대략 4백여 척쯤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부산을 함락하고 잇따라 그 지역 일대의 진보(鎭堡)를 함락하자 여러 고을에서 멀리 바라만 보고 저절로 무너져 그 뒤로는 망을 보며 정탐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적의 대군이 후속 부대를 계속 보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바다를 덮으며 왔는데도 변장(邊將)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처음 보고해 온 것에 의거하여 늘 적의 병력은 단지 4백 척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은 말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되지 않는데 한 척에 수십 명밖에 싣지 못하는 실정이고 보면 다 합해도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성일의 이러한 주장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도 그렇게만 여겼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서 이일만 단기(單騎)로 몸을 빼어 달아나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ㆍ박지(朴篪) 등은 모두 죽었다.
宋子大全卷一百三十九 / 序 / 尹文烈公延諡圖序
神宗皇帝萬曆壬辰。倭奴犯境。上命武將李鎰爲防禦使。以尹公暹,朴公篪爲其從事。踰嶺以禦之。軍至尙州猝遇賊。衆寡不敵。鎰棄師遁去。尹,朴二從事不去曰。吾受命討賊。苟欲全吾義。安可全吾身。遂安坐帳中。不動如山。卒以致命遂志。於是遠近聳動。爭以全軀保妻子爲羞辱。徵發之外。儒生白徒左提右挈。義旅蜂起。以助天兵。以成中興之偉績。夫被堅執銳。摧鋒陷堅。其功豈不大哉。然而皆曰此功反小何也。夫仁以爲干櫓。義以爲戈矛。折衝尊俎之間。談笑鋒刃之前。俾有血氣之倫。皆盡親上死長之心。以至
國命不墜。宗社再安。豈所謂不殺之武。不宰之功者非耶。於是上命元老大臣。論功行賞。追賜二公丹書鐵券。尹公啓封爲龍陽君。錄用其後。後九十年今上丙寅。賜諡曰文烈。其曾孫以健守珍山郡。吏部郞金昌集汝成奉諡來宣于珍郡。郡守備儀物以迎。以對揚聖主光榮。嗚呼休哉。公孫棨當丙子虜亂。以南陽府使。殉節而死。其弟校理集。秉志立慬。以明春秋大義。世號爲一家三節。二孫眞可謂善繼。而公之風敎將及於無窮矣。其有功於世道何如也。上亦下恩命。並易校理名。故金吏部自珍仍往其胤
子以徵任所。宣賜于陰城縣。祖孫恩榮。燀赫無限。人皆曰有是祖宜有是孫也。金吏部以文正老先生聞孫。來頒二諡。理固有以氣類冥會者。是亦一奇事也。目今詖淫邪遁之辭。塞路滔天。甚於秀吉,淸正兇飆矣。聖上之特用新命。眞超出百王之意見也。斯可以祈永命於萬歲矣。郡守君登諸繪事。俾余題其首云。時崇禎紀元著雍執徐孟春日。德殷宋時烈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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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一百四十六 / 跋 / 書尹文烈公延諡圖序後
嗚呼。體元寔孝子聾啞君諱柔之胤子。其弟曰以性
復元。此三父子。實皆所以無忝公者。當延諡日。復元自京來會。觀者嘖嘖稱公錫類之盛也。不幸今年。復元遽作千古人。士友之慟。曷有其極。聾啞君。顯考朝命旌其閭。蓋以市南兪公棨諸賢之建白也。丙丁亂後崇德僞號。不欲聞不欲言。故以此自號。復元之夭。亦因其喪毀雖云過中。亦可謂尙類也。翌年孟秋。書于復元遊賞之懷川南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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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39권
서(序)
윤 문열공(尹文烈公) 연시도(延諡圖) 서
신종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적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임금이 무장(武將) 이일(李鎰)을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윤공 섬(尹公暹)과 박공 지(朴公篪)를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넘어서 방어하도록 하였다. 군사가 상주(尙州)에 막 도착하였을 때 갑자기 왜적을 만났는데,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당해 내지 못하여 이일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갔으나 윤ㆍ박 두 종사관은 피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왕명(王命)을 받고 도적을 토벌하러 왔으니, 우리의 의리를 온전히 하자면 어찌 우리의 몸을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군막(軍幕) 안에 어엿이 앉아서 움직하지 않다가 마침내 명을 바쳐서 본디 뜻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원근(遠近)에서 의기(義氣)를 분발하여, 제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妻子)를 보존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 나머지, 군정(軍丁)으로 징발된 이외에도 유생(儒生)과 백도(白徒 훈련을 거치지 않은 장정들을 말함)가 좌우(左右)로 모여들고 의병(義兵)이 벌 떼처럼 일어나서, 천병(天兵 명 나라 군사)을 도와 중흥(中興)하는 거룩한 공을 이룩하였다.
대저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아 적의 칼날을 꺾고 굳은 진(陣)을 함몰시키면 그 공이 어찌 크지 않으랴마는, 모두가 그 공을 도리어 적다고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저 인(仁)으로써 방패를 삼고 의(義)로써 창을 삼아, 술잔 사이에 절충(折衝)하고 봉인(鋒刃) 앞에 담소(談笑)하면서, 혈기(血氣) 있는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고 그 장(長)을 위해 죽도록 만들어, 나라의 운명이 떨어지지 않고 종사(宗社)가 다시 안정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어찌 ‘죽이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다스리지 않아도 공이 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임금이 원로 대신(元老大臣)에게 공(功)을 논하고 상(賞)을 주도록 명하여, 이공(二公)에게 단서철권(丹書鐵券)을 추사(追賜)하는 한편, 윤공(尹公)에게는 용양군(龍陽君)을 봉(封)하고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였다. 그 뒤 90년이 지난 금상(今上) 병인년(1686, 숙종12)에 ‘문열(文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 증손 이건(以健)을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삼았다. 이부 낭관(吏部郞官) 김창집 여성(金昌集汝成 여성은 자)이 공의 시호를 받들어 진산군에 와서 선포(宣布)하자, 군수가 의물(儀物)을 갖추고 맞이하여 성주(聖主)가 내린 광영(光榮)을 온 세상에 천양하였으니 아, 아름답다.
공의 손자 계(棨)는 병자호란 때에 남양 부사(南陽府使)로서 순절(殉節)하였고, 그의 아들 집(集)은 뜻과 용기를 관철시켜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밝혔으므로 세상에서 한집안의 세 절의(節義)로 일컬었으니, 두 분 손자는 참으로 선대의 업적을 잘 계승했다 이를 만하였고, 공의 풍교(風敎)는 먼 후세까지 미칠 터이니, 그 세도(世道)에 끼친 공로가 어떠하겠는가. 임금이 은명(恩命)을 내려 교리(校理)라는 작명(爵名)으로 바꾸었다. 이부(吏部) 김자진(金自珍)이 그 맏아들 이징(以徵)의 임소(任所) 음성현(陰城縣)에 와서 은명을 선사(宣賜)하여, 조손(祖孫)의 영광이 한없이 빛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이다.’ 하였다. 김 이부(金吏部)가 문정공(文正公) 노선생(老先生)의 문손(聞孫 명망 있는 손자)으로서 두 분의 시호를 반포하러 왔음도 그 기류(氣類)가 은연중에 서로 부합된 것이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지금 세상에 피음사둔(詖淫邪遁)한 설(說)이 길을 막고 하늘에 닿은 것이 수길(秀吉)과 청정(淸正) 따위의 흉악보다 더 심하다. 성상께서 새로운 명(命)을 특별히 내린 것은, 참으로 백왕(百王)에서 뛰어난 의견이니, 이는 만세토록 영원하기를 빌 만하다. 이번에 군수군(郡守君)이 시호 맞이하던 일을 그림으로 만들어서, 나에게 그 서문을 청하였다.
숭정 기원 후 무진년(1688, 숙종14) 1월 일에 덕은 송시열은 쓴다.
○ 기축년 2월 1일에 나는 특명으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어 4일에 조정을 하직하였다. 처음에는 6일에 길을 떠나려 했는데, 3일 밤에 심백구 희수(沈伯懼喜壽 백구(伯懼)는 자)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일 삼사에서 차자를 올려 자네가 떠나는 것을 만류하려 하는 데 그것을 아는가?”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조금만 늦으면 반드시 낭패가 되겠다 싶어, 4일에 지레 떠났다. 동문 밖까지 나와서 전송해 주는 친구와 사대부들이 많아 해가 떨어진 뒤에 남벌원(南伐院)에 다다르니, 승정원 서리 수십 명이 모두 말머리에서 절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전별 술잔을 올리겠나이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이리 하느냐?”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은 일찍이 본 일이 없으니, 우리들이 마음으로 적이 탄식하여 감히 이렇게 하나이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도성 문이 닫힐 터이니 너희들은 오래 있을 수 없다. 너희들 중의 우두머리 되는 자가 대표로 잔을 들어 주면 나는 마시리라.”
하고, 말 위에서 두어 잔 마시고 파했다. 사우(士友)들 사이에 이 말을 듣고 아름다운 일로 전한다. 당초 특명이 승정원에 내리니, 늙은 서리 강수천(姜壽千)이 와서 앞에 엎드리면서 문득 눈물을 떨어뜨리기에 내가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를 입어 장차 노모(老母)를 봉양하게 되었으니, 이는 사사로운 기쁨 중의 큰 것인데, 네 어찌 이같이 하느냐?”
하였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공의 말씀은 옳습니다만, 오랫동안 승정원에 있으면서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마음이 동해서 이같이 됩니다…….”
하였다.
내가 함창(咸昌)에 이르러 동헌에 씌어 있는 시를 보니, 김양경(金良鏡)의 절구시가 있었다. 그 끝에,
승지가 일을 말한 때문에 / 以承旨言事
상주 목사가 되었군 / 爲尙州牧使
했는데, 흡사 내 일과 비슷하니, 괴이한 일이다. 양경은 고려 때 재상으로 시를 잘 짓는다는 이름이 났다 한다. 그의 시에,
어찌 하늘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랴 / 豈向蒼蒼有怨情
귀양 와서도 오히려 한 고을을 다스리네 / 謫來猶自得專城
어느 때나 영각에서 황각에 올라 / 何時鈴閣登黃閣
태수로서 재상이 되어 가리 / 太守行爲宰相行
하였는데, 뒤에 과연 재상이 되니, 사람들은 시참(詩讖)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원정(怨情)’이란 두 글자는 반드시 마음속의 생각을 표현한 말이고, ‘황각(黃閣)’ㆍ‘재상(宰相)’이란 말은 더욱 희망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니, 군자가 마음을 평탄히 갖고 이치에 순히 하는 도리로는 아마 이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의 일이 우연히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나의 글솜씨가 졸한 것을 따지지 않고 여기에 화답하였다.
성주께서 신의 까마귀 반포하는 정을 알아 / 聖主知臣烏鳥情
특별히 한 고을을 내주어 봉양하라 했네 / 洪恩特許養專城
상산(상주의 옛 이름)에 내일 관청 일이 파하면 / 商山明日新衙罷
문소로 빨리 가서 어머님을 모시리 / 將母聞韶敢緩行
그 뒤에 《동인시화(東人詩話)》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니, 모두 김양경의 시가 실려 있었다.
상주는 성이 몹시 허물어져서 조정에서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쌓을 것을 결심하고 온 고을을 모조리 8결(結)로 나누어 8결을 1부(夫)로 삼아, 1부에게 너비 두어 자씩 맡겨서 그 옛터대로 쌓도록 하여 열흘이 채 못 되어 공사가 끝났던 것이니, 이는 신묘년(1591, 선조 24) 봄의 일이다.
임진년(1592, 선조 25) 여름. 왜적이 크게 이르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서울에서 변고를 듣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으나 고을 사람들이 이미 흩어져서 성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북쪽 냇가에 나가 진을 치고 적과 교전했으나 크게 패하여 주성(州城)이 드디어 적에게 점령되었는데, 계사년 여름에 비로소 적이 물러났다. 내가 전에 고을에 간직된 옛 문서를 상고해 보았더니, “공민왕(恭愍王) 말년에 왜적이 본주를 불태워 함락시켜서 성이 모두 무너졌던 것을 안성(安省)이 판관으로 있을 때 다시 쌓았다.”하였다. 그런 지 2백 년 뒤에 내가 새로 쌓았는데, 겨우 1년 만에 적에게 함락되고 말았으니, 원통하고 또 원통한 일이다.
본주의 돈과 곡식을 윤상중(尹尙中) 목사 이전에는 중기(重紀 사무 인계 때 전하는 문서)가 없고, 경진년(1580, 선조 13)에 서애(西厓)가 목사가 된 이후로 비로소 중기(重紀)가 있기 시작했다. 서애가 덕순(德純)에게 전한 것이 18만이었고, 덕순이 만기가 되자 공원(公遠)에게 전한 것이 23만이었으며, 공원이 4년 만에 병으로 체직되자 나에게 전한 것이 25만이었다.
내가 3년 만에 만기가 되어 사회(士晦)에게 전한 것이 27만이었으니, 창고의 풍부함이 도내에서 제일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모두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적이 물러난 뒤에도 오히려 몇만 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 내가 상주를 다스린 지 3년 동안 온 집안의 위아래가 아무런 병 없이 늙은 부모를 극진히 봉양해서 명절이나 좋은 때든 혹 그런 때가 아니라도 잔치를 벌여 즐겼으니, 망극한 임금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었다. 난리(임진왜란을 말함) 후에 다시 이곳을 지나가니, 노래하던 집이나 춤추던 누각이 모두 여우나 토끼의 굴이 되었으니, 마음이 상하고 보기 참혹함을 어떻게 이루 형용하겠는가. 높은 것이 극에 달하면 무너지는 것이 비록 이치의 당연함이라고는 하지만, 뜻밖에 재앙을 당하게 되니 하늘이 차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고 눈을 닦고 기다렸건만, 요망스러운 기운을 쓸어내지 못하니, 통곡한들 무엇하랴.
○ 신묘년(1591, 선조 24) 가을. 나는 상주 목사에서 갈린 지 얼마 안 되어 공저(公著 이성중(李誠中)의 자)를 대신하여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
대궐에 나가 하직하던 날 임금이 명하여 편전(便殿)에서 인견하였다. 겨우 자리를 정하고 앉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잘 있었는가? 상주를 정성껏 다스렸다고 하니, 대단히 기쁘오.”
하므로 나는 임금의 말씀을 듣자 감격하여 눈물이 저절로 흘러서 자리를 피하면서 사례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이어서 또 묻기를,
“그 고을 인심과 풍속이 어떠하였소?”
하시기에 나는, ‘진실로 아름다웠다.’고 대답했다. 임금이 또 묻기를,
“그 지방 인재가 어떠하였소?”
하시기에 나는, ‘그 고을 습속이 글을 숭상해서 공(功)과 학(學)에 흥기하는 자가 많다.’고 대답했다. 또 묻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네가 그 고을에서 인재를 얻었느냐?” 《논어》〈옹야편(雍也篇)에 보임 고 하였으니, 여기에 대해서 말해 보라.”
하시기에 나는,
“진사 정국성(鄭國成)은 노성하고 효행이 있으며, 유학 윤진(尹瑱)도 효행이 있었습니다.”
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조에서는 어찌 이들을 수용(收用)하지 않느냐?”
하였다. 이때 승지 조인득(趙仁得)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에게 “잊지 말고 거행하라.”하였다. 또 묻기를,
“백성들이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이었소?”
하므로 대답하기를,
“그 고을은 땅이 넓고 백성이 많아, 부역에는 조그만 고을처럼 고생을 하지는 않지만,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들도 다 같은 백성들인데, 시초(柴草)의 공물이 과중함을 고통으로 여겨 더러는 이 지방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자리가 파할 무렵에 상이 이르기를,
“방백(方伯)으로서 할 책임이 교서 속에 다 씌어 있으니, 정성을 다해서 봉직하오.”
하고 또 ‘잘 가오.’라고 분부하였다. 이런 지 얼마 안 되어, 정국성(鄭國成)은 목청전 참봉(穆淸展參奉)이 되었고, 윤진(尹瑱)은 제릉 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 그러나 정국성(鄭國成)은 늙었다고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날 경립(敬立)이 사관(史官)으로 입시(入侍)하여 부자가 함께 임금 앞에 나아갔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어서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지난해로 말하면, 의립(義立)은 과거에 올라 사관이 되고, 경립은 옥당에 들어갔으며, 나는 또 비변 당상(備邊堂上)으로 있게 되어 혹 인견할 때나 또는 경연에서 특진관(特進官)의 강(講)이 있을 때에는 3부자가 함께 입시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영화스럽고 경사로움이 분수에 넘어 황송하고 민망한 마음이 지난 신묘년 때보다 몇 배나 더했다. 아이들이 성대하고 가득찬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늙은 아비와 같다면 끝까지 복을 누리는 데에 거의 도움이 될 것이다.
○ 아조(我朝)의 종계 악명(宗系惡名)을 변무(辨誣)하는 주청에 관해서는 조종조(祖宗朝)부터 사신을 보내서 여러 차례 중국 황제에게 주달했으나, 성상(聖上) 대에 이르러 비로소 황제의 승낙을 얻어 2백 년 동안의 억울함이 시원히 씻어졌으니, 온 나라의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어떻겠는가. 상이 전후 사신들의 공을 의논하여 광국(光國)이란 호를 내렸으니, 이는 무자년(1588, 선조 21)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임금의 성효(聖孝)와 지극한 덕을 형용할 길이 없어 휘호(徽號)를 올리고자 대신들이 힘껏 청했으나, 상은 완강히 거절하고 겸손한 덕을 지켰다. 나는 이때 부제학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주연(晝筵)에서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휘호를 올리기를 청하는 것은 실로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옛날 당 나라나 송 나라 때에 허례를 숭상하던 일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굳이 사양하시고 받지 않으시는 것은 지극히 겸손한 덕에서 나온 처사이시오니, 그 거룩하고 아름다움이 도리어 휘호를 받으시는 것보다 빛이 납니다. 성상의 마음이 곧 요순(堯舜)의 마음이신 것에 깊이 탄복합니다. 여러 신하들의 계사(啓辭)에, 방훈(放勳 요(堯) 임금)이나 중화(重華 순(舜) 임금)로 존호를 삼는다 하였는데, 이는 사관들이 추술(追述)한 것이고 존호는 아니옵니다. 이것을 끌어다 같이 하려고 한다면 이는 너무도 억지인 것입니다. 전모(典謨)의 문자를 사실대로 인용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면 그 폐단이 말할 수 없게 될 것이오니, 몹시 옳지 못한 일이옵니다.”
했다. 기축년간에 조정에서 다시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했는데, 헌납 백유함(白惟咸)이 독계(獨啓)하기를,
“존호를 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감히 백관들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조정에서 청한 것이 윤허를 받게 되어 ‘정륜입극 성덕홍렬(正倫立極成德洪烈)’이란 존호를 올렸다.
금년 7월에 임금이 비변사의 여러 당상들을 인견할 때 나도 입시하게 되었다. 그날 임금의 얼굴은 온화하고 말소리는 명랑했다. 그래서 적의 정세를 논하는 데도 응대하는 것이 분명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각각 포부를 말하라고 재삼 하교하시어, 엎드려 듣고 감격하여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난리가 있은 뒤에도 존호를 그대로 쓰는 것은 변고를 만나면 몸을 낮추는 도리에 벗어남이 된다.’고 여겨 매양 아뢰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여 감히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다. 이날은 군신(君臣) 사이에 마음이 서로 통하여 마치 한집안의 부자간과 같으니, 어찌 감히 생각하는 바를 아뢰지 않아서 성교(聖敎)를 저버릴 수가 있으랴. 마침내 아뢰기를,
“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 감히 아뢰고자 합니다. 존호는 당초에 상께서 사양하고 받지 않으시므로 신이 진실로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복종하여 ‘요순 같은 성군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 전하께서 조정의 청을 받아들이신 것은 필경 마지못해서인 것으로 아옵니다. 지금은 변란을 겪은 뒤라, 몸을 조심하여 수행하는 일이 지극하지 않으신 것이 없사온데, 유독 이 존호만은 그대로 쓰시니, 스스로 몸을 낮추시는 도에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대신들이 좌중에 있으니 물어보시어 존호를 버리신다면 천지 신명에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시는 뜻을 보여주심이 적지 않을 것이니, 위로 종묘사직에 고하고 아래로 사방에 교서를 반포하시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일찍이 그런 뜻이 있었으나, 결행하지 못했는데, 경이 지금 말하니 참으로 충신이로다. 내 당장 존호를 버리리라.”
하므로, 나는 감격해서 일어나 절을 했다.
수찬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신도 아뢰려 하였으나 소관(小官)이옵기로 감히 아뢰지 못했는데, 윤모(尹某)가 아뢰자, 전하께서 충신이라고 칭찬까지 하시오니 누군들 감격하지 않으오리까…….”
하였다. 내가 아뢴 말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는 없고 그 큰 줄거리만 따서 적는 바이다.
이튿날 대신들이 계사를 올렸는데, 어떤 이는 “이것은 오늘날 말할 것이 아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당 나라 때는 사세가 급박해서 자신을 허물하는 조서(詔書)를 천하에 반포하여 강한 장수들의 마음을 진압해 복종시키려고 소장(疏章)에도 신성문무(神聖文武)란 호를 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니, 이는 일시의 우연한 거조였다.……”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며칠 동안에 대신들이 4~5차례나 아뢰자, 좌상이 조정에서 또한 힘써 아뢰기를,
“신 등이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이것을 봉행(奉行)하지 못하게 하겠나이다.……”
해서, 이로 인하여 중지되었다.
내가 계달(啓達)하던 날에 비망기를 내렸는데, 대강의 내용은,
“오늘 다행히 등에 찔린 가시는 빼냈으나, 바늘 방석에 앉는 것은 언제나 면하려나. 존호를 삭제하는 일은 예관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고 교서를 반포하도록 하라. 존호는 마땅히 중국 조정에는 숨겨야 하므로 중국 장수가 서울에 있으니 할 수 없고, 종묘에 고하는 일 역시 참작해서 하라.”
하였다. 삼공(三公)의 계사에 전후 비답한 것은 이러하다.
“내가 서토(西土 관서 지방)에 있을 때부터 이것을 면하기를 빌었어도 얻지 못했는데 이제 다행히 말이 나왔으니, 실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일이다. 이 일이 실로 아무런 유익함도 없이 죄인의 몸에 그대로 씌워진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으랴. 전교대로 지체하지 말고 속히 삭제하고 종묘에 고하는 것이 좋겠소. 교서를 반포하는 일은 참작해서 지휘하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렇게 분분하게 끌지 말고 속히 거행할 뿐이니, 행하기 어려운 아무런 곡절도 없는 일이오.”
하고, 또 이르기를,
“이 일은 이대로 두어도 유익함이 없고, 없애기도 어렵지 않으므로 속히 행할 뿐이니, 마땅히 번거롭게 말하지 마오.”
하고, 또,
“이 일은 결코 그대로 둘 수 없고 명령도 이미 내렸으므로 하루라도 지체할 수 없으니, 다시는 말하지 마오.”
하였다.-문소만록(聞韶漫錄)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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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만록(聞韶漫錄)
판서 윤국형(尹國馨) 저
[출처] 상주전투 사료집 C|작성자 책사풍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