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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전문수 교수/문학의 존재방식
II. 문학의 의식
37p-72p
2. 문학의 의식
1. 서언
우리의 문학 연구 경향은 대체로 작품론, 작가론, 비평론, 문학사론 등으로 되어 왔다. 이에 비해 문학 원론을 위한 연구는 접하기가 매우 소원했다. 물론 모든 문학 연구가 문학 원론 수립에 기저가 되는 것이지만 순수 이론의 개발이란 측면에서 이는 지적되어 마땅하다고 본다. 문학에서 문학을 알고자 하는 입문생들에게 문학 개론이나 문학 원론이란 명칭으로 강의를 하고자 하면 그 교재라는 것이 외국의 어느 문학 원서를 그대로 옮긴 듯 하고 상당한 수의 저자에도 불구하고 목차만 적당히 바꿔 논 감이 없지 않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볼 필요 없이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학자에 따라서는 나름대로의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으나 각기 사상론 배경이 다른 철학자나 문학 이론가들의 단편적인 개념 정의들을
모자이크 식으로 조립하여, 개념 혼란이 많고 또 일관성 있는 전개를 결하고 있기도 하다. 가령 문학에서 흔히 체험을 다루지만 실제 체험이 어떤 성격이냐는 깊게 규명되지 않은 채 상식 선에서 사용된다. 문학은 체험의 기록이라고 했을 때 문학적 의식의 성격을 보다 깊이 탐구하지 않고는 과거의 기억을 기록한 것도 문학이냐는
문제가 생긴다. 왜 체험의 기록인가를 따지면 소위 개성이니 감성이니 상상력이니 창조니, 기능이니 하는 등의 여러 문제가 그 내부 구조에서 한데 엉킨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일련의 개념들이 어떤 체계 속에서 일관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 이는 한 예에 불과하지만 문학 원론과 연구가 그 나름대로 정립되어진 기반이 필요하듯이 문학 원론도 계속 다시 해 가는 모습은 매우 부진한 상태다. 가령 문학사 한 권이 제대로 쓰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작가의 경우 수십 편 이상의 작품론, 작가론이 쓰여지면서 이론적 깊이를 더해 가야 함은 물론, 어떤 요소에 따라서는 많은 연구가 쌓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연구가 문학의 본질을 캐는 사변적 측면은 약한 것 같다. 이 말은 철학적 연구를 다지지 않고 외국의 개발
된 이론만 빌려다 쓰는 손쉬운 타성이 팽배하다는 것이고 그만큼 얇은 지식 위에 서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외국 학자의 이론을 이해하는 단계에서 창조하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본다.
본고는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문학 원론을 나름대로 수립해 보고자 하는 시도로서 이미 문학의 존재 방식7)이란 제하로 생각해본 바 있고 다시 「문학적 대상론」8)을 다룬 바 있어 그 연계성으로 「문학적 의식론」을 전개해야 할 필요에서 입론되었다. 그러므로
단위 연구로서의 「문학적 의식론」이란 논제가 다소 생경할 수 있으며 문학적이란 단서가 붙었다고 해도 의식 문제를 다룬다고 하니 용어부터가 중압감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문학적 의식이라고 한 것은 유리컵 한 개가 개체 존재로 현전하는 것과 문학 작품 한 편이 개체 존재로 현전하는 것을 동일 구조로 보아 그 기본 구조소로서 「질료」 「목적 의식」 「형상」을 갖는다는 존재 방식의 입장에서 하나의 존재소로서 본 이유이다. 한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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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졸고, “문학의 존재 방식" (사림어문연구 제3집, 창원대국어국문학회), 1986. 3, p.5-22.
졸고, “문학의 존재 방식" (사림어문연구, 제4집), 1957. 3, p.28~56.
8) 졸고, “문학의 대상에 관한 연구"(창원대학 논문집, 제8권, 제1호), 1986. 6, p.13-38.
유리컵은 유리라는 질료에 인간의 목적 의식이 만나 외형을 갖춘 형상을 하고 나타난다. 이런 구조 관계를 볼 때 한편의 문학 작품도 그 기본 구조면에서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실로 모든 존재 조건을 살핀다면 이 삼요소가 구조소가 되며 이 삼요소 중 어느 하나도 각기 개체성을 가름한다. 즉 단위 개성체가 되려면 질료, 목적 의식이 같아도 형상만은 달라야 하기에 형상도 개체 존재의 요건이 되며 질료는 물론 의식 역시 그렇다. 사물로
존재하는 어떤 것도 동일한 존재는 없음을 확인하는 바이고 보면 문학 작품 역시 이런 존재 방식임엔 예외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존재자(者)에 따라서는 각기의 요소 성질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윤리의식, 정치의식, 종교의식이 그 의식면에서 그 성격이 다르듯 문학적 의식 역시 그 특질이 다른 것이기에 이를 밝히고자 한다. 도대체 문학은 사물(대상) 즉 문학적 질료에 접하여 어떤 성격의 의식을 발휘하기에 문학 작품이 되며 또 문학적인 것이 되는 가이다. 결국 문학적 의식의 근본 성격을 묻게 되는데, 본래 의식이란 어떤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또 인식이 일어나는 것은 대상(인식의 객체)과 의식(인식의 주체)의 상호 작용에서이니 소위 인식의 구조 관계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다. 즉 인식론의 여러 입장에 따라 일단은 의식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문학적 의식의 성격이라고 하지만 단순한 것이 아니나, 인식의 주체로서의 의식과 객체로서의 대상을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관념론과 실재론의 입장으로 크게 갈라 우선 논의의 기본 틀을 설정하기로 한다. 즉 인식의 객체인 대상에 대한 주체로서의 의식이 대상과 갖는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일차적으로 밝혀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대상에 대한 의식의 존재 양식이 결정되며, 의식의 성격이 포괄적으로 검토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식 구조면으로 인식 주체, 인식 객체라는 간단한 도식적 구분을 하지만 철학의 경우 합리론, 경험론의 양극 입장이 있는가 하면 절충 이론으로 비판론,합리-경험론의 변증법적 이론도 있어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에 따라 미학의 경우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 그 배경이야말로 간단히 도식적 구분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가령 조요한이 요약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위로부터의 미학"은 美를 선험적 판단 내지 主觀的 보편성이라고 보는 칸트로부터 ~ 셀링이나 헤겔에 이르렀는데 이 "형이상학적 미학"은 그것이 갖고 있는 사변적 독단을 배제하고 동시에 경험적 미학의 상대성을 극복하는 칸트學派의 “批判主義 美學"에로 발전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훗설의 本質直觀이라는 現象學의 방법에 의거 개개의 직관적 통찰에 의한 미적 향수를 기도하는 "現象學的 美學” ~存在를 엄폐된 상태에서 끌어내어 “비은폐성"(Unverborgenheit)에로 이끌어가 "존재의 建立"(Stiftung des Seins)를 시도한 하이데거 (M.Heidegger)의 “存在論的 美學"이 두드러진 독일미학의 조류를 이루었다.
한편, 영국과 미국에서는 “~分析的美學”~ 그리고 “意味論的美學"을 이루었다.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미학"으로서의 “心理學的 美學”은 20세기에 들어와 프로이드(5.Freud)의 “精神分析學의 방법”~의 미학을 적용했고, 經驗學的인 미학추구는 분트(W,wundt)의 사회학적 관점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예술의 사회적 효과와 예술의 사회적, 경제적 제약 등을 추구하여 “社會學的 美學”으로 이루어 나갔다. 이 사회학적 미학의 가장 전형적인 것이 예술을 일정한 사회계급의 이데올로기의 제약으로 보는 “마르크스主義 美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 이론적 배경을 보게 되면, 크게 관념주의, 경험주의 즉 '위로부터의 미학" "아래로부터의 미학"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 질 수 있어서 도식적 구분을 하였으나 각기의 타당한 미학론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고가 문학적 의식을 다루는 그 하위의 응용 과학이기에 그 기본 정신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록 지나친 도식적 비약이 되더라도 큰 구조의 틀에 벗어나지 않기에 입론 근거로 한다. 실제 살아 숨쉬는 유기체가 정신과 물질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미적 인식도 주체, 객체가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상호 우위를 주장하거나 상호 작용의 절충으로 보는 것은 일종의 우주관을 가름하는 사상이 되는 것이라 그럴 뿐이다. 물론 학적 체계로 봐서 어느 것이 더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며 타당한가도 이론은 그 가치가 있기도 한다.
본고는 문학적 의식의 성격을 보다 합리적으로 파악하여 일반 문학 원론을 정립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어떤 주의에 의한 방법론 제창은 아니다. 어느 쪽의 이론도 그 실제성으로는 받아들이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흐름의 큰 구분을 시도한 것이다. 의식의 존재 양식이라고 굳이 큰 과제를 전제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였다. 이런 큰 구조의 이해 없이 단편적으로 산재한, 뿌리 모르는 이론들을 이래저래 모자이크하는 식의 다양한 개념의 문학 이론들이 현실적인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론을 첫째, 문학적 의식의 존재 양식 둘째, 문학적 의식의 성격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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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조요한, 예술철학(경문사, 1973), p.18~20
2. 문학적 의식의 존재 양식
의식이 대상에 대하여 관계하는 기본 양식을 찾기 위해서는 철학에서 다루는 인식론의 두 입장이나 미학의 두 입장을 근거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인식의 기본 구조로서 주체인 의식과 객체인 대상을 두고 합리론이나 관념론에서는 현상의 본질 파악을 의식쪽에 둔다. 인식의 정신 능력을 이성, 오성, 직관 등으로 보면서 정신이 대상의 감각 질료를 구성하여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10) 이런 입장은 주관 의식의 우위로서 경험적 실재성을 종속시킨다. 따라서 이런 인식 구조에서는 대상에 관계하는 의식의 양식이 주관적 의식의 지위를 갖는다. 한편 인식이 경험적 실재론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정신이 사물의 감각적 진료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의식의 관계 양식은 객관적 의식의 입장이 된다. 대상에 대한 의식의 존재 양식을 이렇게 둘로 갈라 설정하는 것은 의미를 형성하는 의식의 기능이라 성격을 있는 대로 수용한다는 것이며 이로 하여 달라지는 의미의 형식이나 내용을 살펴보자는 뜻이다. 또 인문 과학으로서의 문학은 철학의
인식론처럼 의식의 지위에 따라 인식 과정이 옳으냐 그르냐나, 존재의 본질은 정신이냐 물질이냐 와 같은 것을 따지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적 의미를 실제로 형성하는 의식의 기능이나 성격을 다루기에 의식의 두 입장을 수용하는 것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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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칸트의 "구성설"을 근거로 하였으나 관념 우위란 입장에서 보면 훗설, 하이데거까지도 이런 입장일 것이다(cf. 한단호, 「칸트 철학사상의 이해(서울, 양영각, 1983), p.121~123).
11) 의식이란 개념은 여러 차원을 가진 정신을 뜻한다. 그래서, 감각, 감성, 감정, 이성 등 모두, 정신을 가리키는 개념들은 의식에 내포된다. 따라서 의식이 대상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의미란 다양해진다
그러나, 원론적 입장에서는 이렇다하더라도 문학 사상적 측면에서 는 이 두 입장의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식이라고 하면 벌써 인식의 주체를 말하는 것인데 인식 구조상 주관적이나, 객관적이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두 양식의 의식이 대상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의미가 달리 형성되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데 그 예비 단계로 인식의 성격을 인식 내용에 따라 일단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인식은 인식 결과의 내용에 따라 이성적 인식과 감성적 인식으로 갈라 볼 수 있다. 논리성에 의해 파악되는 지식은 이성적 인식의 결과로서 실제 주체적인 의식 우위나 객체인 대상 우위나 간에 그 결과가 상식적으로는 동일하게 된다. 그러나, 감성적 인식12) 인 문학적 인식은 인식 결과가 대개 정서이고 지적 인식이 있다 해도 논리적 확실성이 없기 때문에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각개의 인식 결과가 같
을 수 없다. 이런데도 인식 행위가 되는 것은 감성적 인식이 특수한 상황을 구성해 놓고 그런 조건하에서는 개연성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성적 인식이 일상의 보편적 상황으로 열려진 상태에서 보편 논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식인데 비해서 감성적 인식은 일정한 조건으로 상황 구성을 해 놓고 개연성으로 합리화시켜 인식하는 점에 차이가 있다. 물론 이성적 인식이라는 지식도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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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박이문, 현실학과 분석철학, 일조각, 1985), 9. 35),
12) 바움가르덴은 그의 저작 'Aesthetica'(1. 1950, 1(1758)에서 미에 관한 학문은 "감성적 인식의 과학"이라 규정한 바 있다(조요한, 예술철학, p.14참조). 그리고, 크로체 역시 예술은 정서의 활동이 아니라 인식활동, 즉 개체의 인식이라고 한바 있다(cf. 클링우드, 역사와 인식 -소광희역(경문사, 1979, p.194).
의미에서는 기존 지식의 정합성을 뒷받침하는 것이지만 이는 개별적인 자의성이 없기에 이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 차원이 아닌 의미 차원으로서의 의식 문제를 다루는 문학적 의식의 경우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의식과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고 감성적 인식에 관련된 의식이기에 이성적 인식구조와 확연한 구별을 위해서도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문학이 감성적 인식이라고 해도 인식 방식이 다를 뿐 지적 인식이 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서가 주된 의미로 되는 것은 주관적 의식의 주된 임무가 되지만 객관적 의식의 임무.역시 큰 것이라는 점을 감안함으로써 이런 구별의 타당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주관적 의식은 어떤 기능으로 문학적 의미를 형성시키며 객관적 의식은 또한 어떤가를 순차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주관적 의식의 존재 양식
어떤 대상을 향해 문학적 의미를 형성하려고 할 경우 필연적으로 의식이 이에 관여하게 되고 문학인 한 그 의미란 감성적 인식작용의 결과물일 것이다. 즉 인식 내용이 정서가 주가 되고 부득이 무엇인가의 교시적 기능도 있는 것이 문학이라면 아마 사색이 부수될 것이다. 그래서, 주된 정서가 체험화되고 체험적으로 전달하려 할 것이다. 가령 한 송이 꽃을 보고 "내 누님 같다"라고 했다면 꽃이 누님인 이성적 인식이 아니라 꽃이 주는 체험적 감정적 정서와 어떤 사색이 누님에게서 받는 감정적 정서 및 사색과 같다는 말인 것이다. 결국 "내 누님 같다"는 진술은 꽃에서 받은 감정적 정서를 전달하는 방식이고 또 그 정서의 내용을 결정해 주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문학은 이런 식의 감성적 인식일 수밖에 없는데, 이 때 의식 주체가 꽃에 대해 일으킨 정서와 사색 일체를 원관념이라고 하고 누님에 대해 일으킨 관념은 보조 관념이라 한다. 그래서 원관념을 보조 관념으로 대치하면서 원관념의 내질 까지를 규정하는 기능을 하는데 그 관계가 꼭 같을 수는 없다. 최대한의 전달일 뿐인 것이다. 본래 정서는 개념적으로 설명하거나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다른 대상의 경험적 보편성을 통해 주관적 체험을 외화 시키되 다른 정서적 상관들로 대치시켜 체험적 제시를 하는 것이다. 즉 꽃의 원관념이 미적 정서라서 설명할 수 없으니 이미 체험된 누님에게 얻은 미적 정서로 대치시켜 들어내는 방식인 것이다.
이런 이해가 타당하다면 꽃에 대하여 의식이 관계하는 구조는 그 의미 형식에 있어서 전적으로 의식 내부의 주관에 종속됨을 알게 된다. 물론 대상의 꽃이 갖고 있는 속성 중 어떤 특질이 감정적 정서나 인지 요소를 제공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실제 인식된 내용은 지극히 주관적 기존성에 의존하게 되니
그렇다. 빨간 꽃잎을 보고 촉발된 미적 정서가 어떤 사람은 애인의 입술에 대한 미감으로, 어떤 사람은 귀여운 동생의 뺨으로, 어떤 사람은 누님의 입술로 대치된다면 각기 체험에 관련시키고 있으며 개별성을 갖는다. 그리고 인식해 내는 방식도 이럴 뿐이며 그 인식을 전달하는 방식도 이런 체험적 전달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의미가 형성되려면 물 그 자체인 단독으로는 불가능함을 재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 13) 의식과 만나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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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졸고, "문학적 대상에 관한 연구", 전게서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응당 그렇다 하더라도 단순히 형식적 관계로만 있어서는 안되고 의식주관 내부에 현상적 대상과 관계적으로 관여할 심적 타대상이 최소한 하나는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본 예대로 현상의 꽃이 현상적 의식과 1:1의 형식적 대좌에 있다해도 의미가 형성되지 않는다. 반드시 의식 내부에 있는 비가시적 심상과 현상적 대상의 꽃과 만나야 되는 것이다. 즉 주관적 의식의 누님이나 애인과
외계의 꽃이 관계적일 때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 인식의 경우는 의식 내부의 심상과의 관계없이 현상적 대상이 주는 여러 감각적 질료를ㅡ 의식적인 감각 기관의 작용으로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보편적 인식 형식 - 이성 또는 오성에 의해.구성해서 개념적 지식을 직접적으로 얻을 수가 있다.14) 이에 비해
미적 정서의 인식은 직관력이기 때문에 인식 형식을 거칠 수가 없어서 직접 구성 방식으로 의미를 생성시킬 수가 없다. 언어화 이전의 관념이 있다 해도 의식 자체가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합의되지 않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다.15)
따라서 주관적 의식은 현상적 대상과 1:1의 대응 관계 양식이면서 현상의 대상이 의식 내부의 기존 체험 대상과 관계적 의미를갖게 됨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을 이해의 편의상 도식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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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칸트, 세계사상대전집 - 칸트(24), p.286~292참조.
15) 분석석학에서는 언어 이전에 사고(思考)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위 도식에서 대상 꽃(A)과 의식(B)의 현상적 또는 형식적 관계는 지극히 개념적인 "예쁘다" (C)로 이성적 인식을 할 수 있으나,감성적 인식인 정서(의미)는 실제로 꽃(A)의 원관념 정서가 누님(A')의 정서(보조관념)로 파악되고 이것은 주관적 의식(B')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예쁘다(C)의 구체적 의미(정서)는 누님(A')이된다. 이로써 형상적 대상과 의식의 1:1의 대응은 주관적 의식의 양식에 의거 의미가 형성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대상에 대한 주관적 의식이 존재하는 양식을 살폈거니와 이것은 객관 의식의 존재 양식에서 의미가 형성되는 것과 비교함으로써 더욱 개념이 확실해질 수 있다.
2) 주관적 의식의 존재 양식
앞에서 우리는 문학적 의미가 물자체인 대상 그 홀로는 형성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상황이 다를 뿐 어떤 타대상과 관계하지 않고는 안되며 의식의 기능도 이런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 문학적 인식인 감성적 인식은 대상의 의미가 그 대상을 특정 상황으로 구성시킨.조건하에서 개연성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도 또한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가령 한 그루의 목련꽃 나무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앞에서 본 주관적 의식의 관계 방식으로도 의미를 형성시킬 수 있지만 이를 동일한 현상적 타대상 즉 외계의 하늘이나 구름과 관계하여 의미 공간을 구성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객관적 의식이란 의식 내부에서가 아닌 의식 외부에서,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과 동일 공간의 타대상을 관계시켜 의미를 형성하는 방식이
다. 그러니, 이는 대상 : 대상의 의미 있는 관계 설정을 의식이 수행하고 그 관계 속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때, 관계 설정은 개연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럿셀Bertrand Russell이 각 대상은 일정한 관계를 구성하여 존재하므로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인식이다.16)고 하며 신실재론을 주장했던 것과 같이 대상과 대상의 관계가 의미인 것이다. 럿셀은 실재론으로 주장했어도 그것은 이성적 인식의 경우이고 보면 문학적 인식인 감성적 인식은 그 관계를 창조적으로 또는 개성적으로 구성해서 의미를 형성시켜야 하니 역시 의식이 선행할 수밖에 없다. 문학에서 선후를 따질 필요는 문학 사상 면일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의식은 주관적 의식에 의한 의미 형성보다 객관적인 위치에 있으며 의식내부에 있던 심상을 외계의 실제 대상으로 환치시켜 즉, 환상적 외계를 원대상과 관계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관성을 배제하게 되며 이렇게 되니 감정적 정서의 의미 못지 않게 사색을 통한 지적인 인지 효과를 수행할 수가있게 된다. 주관적 의식의 기능이 주정적(主情的)이라면 이 객관적 의식의 기능은 주지(主知), 주의적(主意的)이라고 할 것이다. 가령 시에 있어서도 주정적 시가 있는가 하면 주의, 주지적 시가 있다. 소설에 있어서도 1인칭 소설의 시점이 있는가 하면 작가를 대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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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김준섭, 철학개론(서울, 박영사, 1985), p.54.
그(주인공)"가 3인칭 시점으로 행동하는 소설이 있다. 한편 장르별 특성도 서정 문학보다는 서사 문학이 객관적이며 극문학은 더더욱 객관적이기도 하다. 한편의 시에 있어서도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의식은 실제로 공존한다. 가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보면 전체적으로는 주관적 의식(시인)에 있으나 더 구별하면 국화꽃과 누님의 관계, 무서리와 시적 자아와의 관계는 주관적 의식으로 그리고 국화와 소쩍새, 국화와 천둥 먹구름은 객관적 의식의 인식 구조에 있어 의식 내부의 심상을 객관화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은 모든 대상과의 관계를 유연화(有緣化)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서 제공하는 것이다. 의식 내부나 의식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정신 활동인 것이다. 의식을 이렇게 갈라서 구체적으로 갈라보는 작업도 문학 현상을 보다 논리적으로 해명하고자 함이며 그.이해 역시 보다 확실히 하고 과학적으로 논의하자는 것일 것이다.
객관적 의식의 기능을 주관적 의식과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식해 보기로 한다.
위의 도식은 대상인 A와 의식인 B의 형식적 관계가 실질적으로는 A'와 B'의 관계로 의미 형성 관계로 되어 대상 A의 내질(內質)을 들어내는 의미 C를 얻는 보기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특정 상황을 구성한 조건하에서 천둥, 먹구름 등을 관계시켜 국화꽃 A와 연쇄시킨다면 국화꽃과 먹구름, 그리고 소쩍새와 연결되는 삼각형이 덧붙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대상들의 관계는 열려진 상태로 구조적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문학적 의식이 존재하는 양식을 이분해서 이해해 보았거니와 굳이 의식을 갈라 본다고 해도 문학이 예술인 한 의식이 대상에 대하여 주체적임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있는 대로의 법칙을 기술하는 객관적 과학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세계의 창조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정도에 있어서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문학을 보느냐하는 사상 문제는 있으며, 오히려 이런 안목이 실제적으로 문학을 이해하는 것일 것이다.
3. 문학적 의식의 성격
공간성에 승(乘)한 고정된 사물은 일단 세계의 “닫힘”에 있고 시간성을 승(乘)한 변화와 진행의 사물은 세계가 열림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기존 존재학에 대해 반박하면서 ‘존재’는 우리로부터 은폐되었고 우리들은 '존재'로부터 전락되었다17)고 하고 세계-내-존재로서의 자아 실존을 주장한 것처럼 우리들의 진정한 의식 본질은 기존성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사르트르 역시 실존을 인간의 존재양식으로 보고 인간 본질은 자유에 있음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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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박이문 현상학과 분석철학, p.92.
한 것도 의식의 본성을 들어낸 것이다. 훗설은 아예 의식의 성격을 지향성(Intentional itat)으로 보고 현상학을 수립한 바 있다.18) 심리학에서도 역시 무의식(프로이드)이니 잠재의식이니 하는 정신세계의 인정은 이 의식의 역동성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의식은 매우 역동적인 것으로 능동적이고 항상, 아니 필연적으로 무언가의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19) 그러나, 의식의 본질이 이렇다 해도 의식은 또한 기존성, 정착성을 가지는 것도 사실임을 유의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의식이란 의식된 의식의 단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를 존재 차원의 의식과 의미 차원의 의식으로 구별하고자20) 하는 것을 보면 그렇고 분석 철학이 의미 차원의 언어를 대상으로 하려는 것도 그 예증인 것이다. 하이데거가 기존성에의 전락을 막
기 위하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한 것은 존재 차원의 시간이 의미를 얻고 나면 공간성으로 변화되어 기존성으로 전락을 고집하고 그 정착성 또한 완강한 것이 의식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의식의 이런 정착 고집성을 깨자면 실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지향성과 정착성을 양면에 갖고 변증법적 진행을 한다고 봄이 온당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대자적 존재와 즉자적 존재를 구별하고 "무"와 "유"를 대립시켰고, 즉자의 완결성에 대자가 지향하려는 성질이 있음을 주장하게 되고 자아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또한 선택이라는 제약이 대립됨을 말했던 것도 의식 곧 자아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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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영호역, 훗설에서 사르트르에로」, 에도 피브체비치 저(서울, 지
학사, 1983), p.88 참조.
19) 박이문, 전게서, p.83.
20) 박이문, 전게서, p.82.
면성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21)
그래서, 의식은 의식 주관이 자유로운 지향을 할 수 있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대상의 객관에 제약을 받거나 대상과 같은 성질로 되려는 선택성, 정착성이 있는 것이다.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의식으로 존재 양식을 나누었던 것도 이런 의식 성격에 연유한 것이다. 결국 의식의 “열림”과 “닫힘"이 순환함은 의식 홀로만은 의식이 될 수 없음이고 대상 또한 대상 홀로 만은 의미가 없음을 말해준다. 나는 환경의 영향만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향하는 자인 것
이다.
이제 의식 일반 성격을 이와 같이 확인하면서 문학적인 의식의 실제면을 검토하기로 한다.
1) 문학적 의식의 개연성(probability)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아는 데는 인지적(認知的)인 것이 있고 감지적(感知的)인 것이 있다고 본다.22) 그러나 이들 앎이 이루어지려면 합리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인지적인 것은 그 합리성이 논리성(Logicality)에 의해 이루어지고 감지적인 것은 개연성(probability)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것이다. 문학적 철학이 궁극적으로 철학적 앎을 지향하는지 과학적 앎을 지향하는지는 인문
과학의 성격에서 가름할 일이지만 문학적 의식 활동도 인식인 것은 분명한데 그 인식 방식에서 문학적 의식의 일차적 성격을 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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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21) 사르트르, 세계사상대전집 (50)(서울, 대양서적, 1975), p.268-271
22) 인지적 지식과 비인지적 지식으로 나누는 예도 있다.(cf.Kenneth B, Henderson, "Use of 'subject-matter", Language and Concepts
in Education, Chicago ; Rand McNally and Co. 1961, pp.49~50).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인식은 합리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 인식의 합리는 논리성과 개연성인 것이므로 인식을 일으키는 의식은 이 두 성격에서 구별된다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이성적 인식의 의식은 논리성이 본질이고 문학적 인식의 의식은 개연성이 본질인것이다.
그래서, 논리성은 인과 관계 즉 원인과 결과의 규칙성에 의해 확보되는 믿음이라면 개연성은 목적 관계 즉 수단과 목적의 규칙성에 의해 확보되는 믿음인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의식은 본질적으로 개연성인 목적 관계를 갖는다. 우주관이 인과관과 목적관으로 대변된다면 문학의 우주관은 목적관에 있다는 뜻이다. 자연과학이 현재의 존재를 과거의 결과로 보려한다면 문학은 현재의 존재를 미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려 한다. 왜냐하면 문학의 세계는 있는 세계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예술은 지각된 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이상에 의하여 "교정된 현실" (eine korrigierte Realität)이다. 가장 사실주의적 작품들, 즉 졸라(Zola)나 꾸르베(Courbet)의 자연주의 소설이나 회화에 있어서도 그 방식은 언제나 이상주의적(idealistish)이다. 그래
서 예술은 "인간을 덧붙인 자연" (homo additus nature)이라고 하였다.23)
예술작품은 확실성을 도외시하고, 世界를 수정하거나 왜
곡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별적인 것으로 특수한 것들을 반영하기보다 오히려 세계에 관한 보편적인 진리를 반영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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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H. Read의 “Art and Society, 1945"에서 인용한 조요한, 전게서, p.25.
다. 혹은 그것은 우리가 아는 實際世界를 초월해 있는 절대적 진리의 세계나 어떤 理想的 世界를 묘사하려고 열망할지도 모른다.
보는 사람의 주의가 표현된 대상에 고정되는 거울의 自然主義的 特徵을 보유한다 할 때도 그 예술품은 왜곡하는 거울이거나, 아니면 理想化하는 投射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주의와 이상주의는 둘 다 技術的 自然主義의 수정이거나 技術的 自然의 類型이다.24)
해롤드 오스본 Harold Osborne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도 예술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예술적 의식이 항상 가능성을 향하여 지향하는 본성 그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식의 지향성 내지 가능성의 본질은 반대로 의식의 기존성을 파괴한다. 흔히 기존 관념을 깨며 나아가는 것이 예술이요 문학이라는 것은 의식이 지향성을 갖고 가능성을 유지하려면 불가피한 것이다. 건설을 위한 파괴가 자연히 뒤따르는 것이다.
사고의 유연성 내지 유연성이 필요한데 기존성의 과감한 파괴를 요구하는 것이다. 상상적(imaginative)인 것도 그 상상력이란 것이 이런 과감한 초험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존재에 이 상상력을 불어넣으면 용해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기존적으로 사물이 관계하는 양식을 깬다. 구조 파괴력을 갖는 것이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문화는 사실 이런 파괴와 건설로 부단히 연속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수정을 가하여 소유하는 초기부터 그 수정은 부단히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그 우주관이 목적관에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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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서배식역, 「미학과 예술론」 -Harold Osborne, Aesthetics and Art Theory (1870) (대왕사, 1984), p.85.
학이 현재를 미래로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선취하는 현상이고 선취하는 정신 활동인 것이다. 문학을 허구라고 하는 것도 실은 이런 깊은 뜻인데 허구란 용어가 거짓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리 탐탁한 용어가 못된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생각 때문에 문학적 의식은 개연성이 본질이라고 하겠다
.
2) 문학적 의식의 구성성(Constructiveness)
본래 개연성이란 주어진 상황 조건이 전제된 합리화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상황 조건이 바뀌면 그 개연성은 상실되고 또 다시 다른 개연성을 갖는다. 이 말은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를 형성(formative)하여야 개연성을 얻게되고 한편 개연성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상 속에서는 이질적이고 괴리적인 사물 관계를 어떤 상황 조건 속에 넣음으로써 공통 속성이 발견되어 그로
서 개연성을 얻고 의미 있는 형성을 이룬다. 문학은 사물을 보되 관계적 구성을 통해 본다고 할 것이다.
프라이(Northrop Frye)25)가 문학적 의미는 가설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아마도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그 가설적이란, 말 그대로 임시 또는 임기적 설계를 세워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외부 세계와의 가설적, 즉 가정된 관계 속에서 생기는 의미가 문학적 의미라는 것이다.
프라이는 그의 가설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확실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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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임철규 역, 비평의 해부 - Northrop Frye, Aanatomy of Criticism(한길사, 1982), p.107.
문학에 있어서 사실 또는 진실의 문제는, 언어구조를 그 구조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 낸다는 제1차적인 문학적 목적에 종속되고 있으며, 상징의 기호가치는 상호 연관된 모티프의 구조로서의 중요성에 종속되고 있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자율적인 언어구조를 가지는 경우, 우리는 문학을 갖는 것이 된다. 이 자율적 구조가 결여되어 있을 경우에, 우리는 인간의 의식이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을 돕고, 또 그 밖의 일을 이해하는 것을 돕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지는 언어를 가지게 된다. 언어가 전달의 특수한 형식인 것처럼 문학은 언어의 특수한 형식이다.26) (방점 : 필자)
즉 문학과 의식은 형태(Gestalt)를 갖추어 세계를 보는 본성인 것이다. 쉴러(Friedrich Shiller)는 형식 충동이라고도 했지만 흔히 문학을 “의미 부여의 형식"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것이다. 결국 의미란 형식을 통하여 본다는 뜻과 같다. 문학의 내향적 의미는 자족적(self-contained)인 언어 패턴의 기쁨, 아름다움, 그리고 흥미와 연결되는 반응 영역인 것이다.27) 자족적 구조를 만들어서 흥미를 느끼고 아름다움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구조 속에서 의미를 갖는 임시, 임기적 의미일 뿐인 것이다. 특정 구조 내에서의 임시적 자족체일 뿐인 것이다. 동일한 벽돌이 집을 지을 때 쓰이면 집이란 전체의 구조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화단을 만들 때는 화단이란 구조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성인이 아버지가 되고 남편이 되고 직장인이 되는 교차성은 구조마다에서 갖는 기능 즉, 구조적 의미 때문인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변화하는 상황적 구조마
다 임기적 의미를 갖는 것이 진정한 의미가 됨을 알 수가 있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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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N. Frye, 전게서, p.108.
27) 상게서, p.108.
로 개연성이란 이런 구조화에 의해 확보되는 합리화인 것이다. 즉 자족적 질서가 곧 개연성인 것이다. 화자가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린다고 해도 그 구성은 이미 화폭 내의 사물들이 자족적 질서로 관계적 의미를 갖는 특수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찮은 어린이들의 그림에도 이런 이치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거의 본능적인 것이라 해도 지나 친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의식이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대상을 초월하려는 성격이 본성이듯 그로 하여 생기는 개연성은 필연적으로 구성 내지 구조화의 본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문학적 의식의 구성성 내지는 형성성은 문학에 어떤 특질을 주는 것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는 두가지 특질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하나는 표현 및 전달의 문학적 특질이요 또 하나는 문학적 의미의 특질이라 하겠다. 먼저 표현 및 전달 면에서 문학이 갖는 특성을 살펴보면, 동일한 실재가 철학에서는 순수한 개념적 용어로 파악되는 반면 예술에서는 인지 가능
한 감각적 형태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감각적 형태로 제시 즉 표현된다는 말은 체험적 형태로 제시된다는 말인데 인식하는 방식이나 전달 방식이 감지 방식이며 감지(感知)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철학적 전달이 인지 방식인 것과 대비된다. 흔히 형상화를 통한 표현이 돼야 한다는 뜻은 바로 이것이다. 개념적 의미 전달이 건조한 비생명적, 직선적 전달 방식이라면 형상적 전달 방식은 생명적, 생동적 전달 방식이며 간접적 방식이다. 어느 것이 실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수정하는 힘이 강한가는 일반적으로 말할 수 없으나 우리가 알고 있다'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면 실제 가치 문제인 예술은 그리고 가치화가 궁극인 예술은 생동적 감동 방식이 본령이며 그 힘 또한 강하다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아버지의 논리적 설득보다 몸으로 보여 주는 어머니의 감정적 애정이 더 설득력이 강함을 느껴 본 바이다. 문학은 인생의 천리를 말하되 구체적 실상을 통해 말하는 방식인 것이다. 문학은 언어로 말하되 언어의 특수한 구조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즉 언어의 구상적 그리고 자족적 사용인 것이다. 사르트르가, “애당초 의
미란 단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와는 반대로 단어 하나 하나의 뜻이 이해 되도록 만드는 것은 독자이고 문학의 객체는 언어를 통해서 실현되기는 하지만 언어 속에서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28)고 한 것도 문학은 언어를 특수하게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런 의식의 형성성 내지 구성성은 문학적 의미에는 어떤 특질을 부여하는 것일까? 우리는 앞에서 이런 구성성은 가설적일 뿐이라고 했다. 의식의 주체인 작가의 의도에서 보면 추측의 대상(객체)을 구성하며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경험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29) 이것은 작가가 어떤 이념적 형(型)으로 세계를 구성하
는 것이며 그 구성된 세계로 작품 외부의 세계까지도 수정하려는 것이라 할 것이다. 결국 작품은 외부 세계를 향해 '열려진 창문'인 셈이다. 그러나, 의식의 대상 쪽에 기울어져 작가가 구성하는 질서란 실은 이미 대상 세계 즉 외부 세계가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한 것 뿐, 그것을 절대자의 합목적성으로 봄으로써 의식 주체의 자유
나 이념은 그 쪽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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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장-볼 사르트르, "왜 쓰는가?" - 윤진관외 2일 역, 20세기 문학비평』(까치글방, 1984), p.321.
29) 상게서, p.3~9.
즉 이데아의 결정론에 이르게 되어 인간 쪽에 귀속될 세계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결국 문학적 의미는 존재의 본질을 들어내는 것이냐 존재와 인간의 실천 관계를 중시하여 존재의 가치를 들어내는 것이냐의 큰 두 문제를 던진다. 이것은 형이상학이 20세기 이전의 존재 차원과 이후의 의미 차원 즉 실천 차원으로 대립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일단 의식의 개연성과 구성성을 일별해 보았지만 실은 개연성과 구성성은 서로를 포함하는 유기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개연성은 구성성에 의존해야 하고 구성성은 개연성에 의존해야 하는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일반 외계의 사물 세계는 인과성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지만 심상 세계는 어떤 특정 정서나.상황 조건, 즉 특정 상황 조건으로 심적 구성을 한 세계이기에 개연성이 유기성을 지배한다. 따라서 개연성은 특정 상황으로 구성된 조
건을 전제로 해서 생기는 합리성이며 구성성 역시 그 역으로서 의식 주관의 목적인이나 의식 객관의 인과성에서 유혹된 동인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니 서로는 안팎 관계의 유기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대상(세계), 개연성, 구성성의 삼자 관계는 상보적인 것이다. 이를 도식하여 좀더 상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도식에서 C의 개연성은 주관적 의식인 경우, 주체의 의도인 목적인에 의해 확보되는 성격과 객관적 의식인 경우, 대상 우위.인과인에 의해 확보되는 두 성격을 갖는다, 즉 대상을 의식 주관의 목적으로 일방적 재구성을 할 경우의 구성성(A)과 외적 세계의 대상을 지배하는 인과성을 중시하면서 대상을 재구성한 구성성(A)의 두 가지를 갖는다. 따라서 외적 세계로서의 재구성이 두 가
지 형태로 되는 변모를 겪는다. 그러므로 문학적 세계는 어차피 이 두 세계로 대분 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본고가 의식론인 만큼 의식 쪽에만 치중하여 다시 구성성과 개연성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데, 의식의 본질인 지향성은 의식의 순수한 성질이라고 볼 때 개연성의 저변에는 의식의 지향성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즉 목적인, 내지 인과인이 이 지향성과 결합해서 개연성을 이루고 그 개연성은 표상으로 구성성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알기 쉽게 도식화해 볼 수 있는 데, 앞 (가)와 비교하면 이해의 도움이 될 것이다.
앞에서 문학적 의식의 성격을 크게 개연성과 구성상으로 나누어 기본 구조를 보였던 것은 위와 같은 내적 관계의 얽힘을 의식의 존재 양식과 연계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기도 하다. 어쨌든 의식의 두 성격은 가장 기본적 구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의식은 이런 기본 구조의 이해만으로 그 성격이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다른 기준의 갈래로 의식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3) 문학적 의식의 현재성
여기서는 의식의 성격을 시간성에 의해 살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개연성을 목적인이나 인과적 동인과 순수 지향성으로 구분해 본 것과 같이 의식을 경험적 의식과 초험적 의식으로 구분해 볼 수가 있다.30) 경험적 의식이란 이미 경험함을 통해서 얻은 의미와 같은 것으로 마치 본질에 대한 현상과 같은 것이니 목적적이나 인과적인 성격을 갖는다. 즉 현상학적으로 경험된 것인데
여기서 일단 판단 중지를 하고 이 각종 경험적 의식의 저변에 보편으로 존재하는 순수 의식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보편 의식은 경험적 의식을 초험하여 있다고 보아 초험적 의식이라고 한다. 즉 순수 지향성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시간성으로 구분해 보면 경험적 의식은 그 순서상 과거성이고 초험적 의식은 판단중지 후의 반성적 의식이기 때문에 현재성이 된다.
우리는 흔히 문학을 체험의 기록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과거 경험의 기억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다시 경험하는 즉 재체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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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훗설(Edmund Husserl)은 현상학적 환원으로 Noema와 Noese개념을 도입하였다(of, 이영호역, 「훗설에서 사르트르까지』-Edo Pivcevlc 저(서울, 지학사, 1977), p.99~102).
는 것이다. 이때 재체험은 반성적 체험이라는 뜻이라야 한다. 대개의 기존 문학론이 재체험이라고만 막연히 하고 있어 기억과 혼동하게 하고 있다. 이는 의식을 경험적 의식과 초험적 의식(반성적의식)으로 갈라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미 경험된 것은 경험적 의식의 작용이고, 경험된 것을 다시 경험할 때는 반성적
의식의 작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된 것과 다시 경험한 것은 같을 수가 없다. 문학은 경험한 것을 기억하여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다시 경험하여 기록하는 것이다. 즉 과거성의 연장이 아니라 과거성의 현재화인 것이다. 문학은 체험의 현재화한 기록인 셈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본질적으로 일상적인 경험적 의식을 초험과 순수의식으로 다시 반성하는 정신 활동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의식은 항상 현재성을 갖는 것이 특성이다. 조르쥬 풀레(George Poulet)가 라신느의 시간 의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참고가 될 것이다. 31)
라신느의 순간은 하나의 점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 속에서 말해지고 있는 점이다. 즉 드라마가 일어났던 곳은 바로 여기 즉 이 점에서 이다. 그 점은 과거로부터 그어진 선과 미래로부터 그어진 선이 숙명적으로 만나게 된 곳이며 그 곳은 동인과 목적인이 충돌하고 뒤죽박죽으로 얽히는 점이다.(방점 : 필자)
라신느의 비극은, 인간은 누구나 존재 안에서 과거의 포로이며 사형수라는 사실을 알게 됨을 주장해야 하고 의식해야 하는 이중적 중압감을 지탱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에 일으키는 비극이지만, 위와 같은 인식은 인간 실존인 것이고 문학 그 자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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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George Poulet, "Notes on Racian Times", 김진국역, 「문학현상학의 이론과 실제」(서울, 명진사, 1980), p.245.
것이기도 하다. 과거성(경험된 의식 즉 기존 의미)은 현재성의 인과인 즉 동인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고 한편 현재의 반성적 대상(즉 현재화)이기도 한 것이다. 하이덱거의 존재학(fundamentalontology)처럼 인간 존재(dasein)를 세계 내 존재라고 할 경우 인간존재 즉 의식은 실존성과 기존성으로 나누인다. 즉 실재성은
자유를 가지고 계속 가능성을 갖고 기도하는 현재성이고 기존성은 반드시 어떤 구체적 시공 속에서 처하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실존을 규제하는 성격이며 시간상 과거성인 것이다.
이렇게 문학적 의식은 과거성과 관계하는 현재성의 특성을 갖지만 역시 미래성에 대하여도 현재성을 갖는다. 즉 미래의 현재화이기도 한 것이다. 미래는 의식의 목적인이 지배하는 현재인 것이다.
과거는 인과인이 지배하는 현재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앞에서 인용한 라신느의 순간처럼 현재는 인과율(과거성)과 목적률(미래성)이 충돌하는 점인 것이다.32) 그래서, 의식의 실존은 계속 자유를 가지고 앞으로 나가려 하지만 역시 목적률에 조정되면서 나간다.
즉 현재화인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률이란 현재를 수단으로 하는 미래성 이기에 현재가 수단이 되어 미래를 당겨 오는 관계가 되기.때문이다. 역시 과거성의 현재화는 객관적 의식의 양식에서 오는.양태이고 미래성의 현재화는 주관적 의식의 양식에서 오는 양태인 것이다.
결국 문학적 의식의 현재성을 요약하면 문학은 가치 있는 체험의 기록이 아니라, 가치 있는 체험을 현재화한 기록이라고 해야 온당하다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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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김준섭, 전게서, p.83의 「우주론」참조.
4) 문학적 의식의 개별성
문학적 의식에 대한 인식을 범주화하여 구분한다면 지금까지 앞에서 논의한 개연성, 구성성, 현재성은 다 문학적 의식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제 문학적 의식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할 차례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보편적 속성과 특수적 속성
을 갖는다. 흔히 논리학에서 말하는 본질적 속성과 우유적 속성과 같은 개념 구분인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의식의 특수성이 논의돼야 하는데, 이는 개별성 즉 개성의 문제이다. 예술의 모방설을 이야기한다 해도 보편성을 가진 특수성이란 것일 뿐 예술은 창조성이 본질이기 때문에 문학적 의식의 속성으로서 개성은 역시 본질
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성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개성적 창조다라는 일언으로 되는 것인가? 누구나 개성이 문학적 의식의 주요 요소라는 것은 알지만 왜 개성이어야 하느냐고 했을 때 그 대답은 명석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타분야에도 창작은 개성이 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부득이 문학은 무엇을 창조하는가 하는 창조 목적에서부터 물어야만 된다. 그러나, 이 문제 또한 복잡하고 큰 것이라 여기서 본격적 물음을 할 수는 없다. 대체로 일반화된 이해를 기준으로 하여 문제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웰렉(René Wellek)이, 미학사는 그 명제와 반대명제가 호라티우스의 이른바 '감미로운(dolce)'과 '유익한(utile)' - 즉 시는 감미롭고 유익한 것이다 - 이라는 변증법으로 대체로 개관할 수 있을 것이다.33)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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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김병철 역, 문학의 이론 - 웨렉과 워렌 저(서울, 을유문화사, 1982), p.41.
하는 것에 따르고자 한다. 문학은 인식 구조이면서 쾌락 구조라든가, 교시적 기능이면서 쾌락적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뿌리이니 그 어느 하나를 시대에 따라 강조한다고 해도 결코 어느.하나를 버릴 수는 없다. '변증법'이라는 용어가 편리한 것 같다. 문학은 이런 목적이나 기능으로 해서 "책임 있는 예술가는 정서와
사색을 감성과 지적 작용을, 즉 적당한 체험과 반성이 따르는 감정의 성실성을 혼동할 의사는 없다."34) 따라서 문학은 창작자의 정서와 사색이 표현되며 그것은 감성과 이성이 교호 작용하는 능률에 의한다. 한편 독자는 체험과 반성으로 향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체험적으로 전달하며 반성적으로 교시하기에 작가는
정서를 설명할 수 없고 사색을 개념적 사상으로 해설할 수가 없다.
「구상력의 표상들」로 표현되는데, 이런 표상들 즉 정서된 사색의 표상들은 “많은 사유를 유발하지만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상, 즉 개념도 이 표상을 감당할 수 없으며, 어떠한 언어도 이 표상에 완전히 도달하거나 가상적인 것을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35)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정서와 사색을 구체화시킨다. 이 구체화는 현상학적이다. 개별적인 것이다. 언어로 말하면 랑그가 아니라 빠롤인
것이다. 예를 들면 동서고금을 통해 사랑이 수많은 작품으로 노래되지만 사랑은 하나도 같은 미적 성질로 같은 이성적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상화시켜 그때마다 진실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이 구상적 진실은 일반화가 불가능한 개별성인 것이다.
칸트가 어떤 사람의 취미의 판단을 강요할 수 있는 논증의 경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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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김병철역, 전게서, p.52.
35) 서배식역, 「미학과 예술론」, "칸트의 판단력비판"-Harold osbone(대왕사(1984), p.207).
근거는 없다."36) 고 했을 때 개별적인 구상적 진실을 객관적 인식기준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는 것이 미의 특성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일반적인 제작물과 예술품은 구별된다. 같은 개별성이라도 제작물은 객관적 실용성의 이성적 판단 근거가 논리성으로 확보된다.
그러나, 예술품은 구상화된 유기적 생명성이 있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기준이 미치지 못한다. 더구나 개별적 진실성에 의하기에 확실한 기준의 적용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문학의 일반성은 보편성이라는 개념의 경험적 일반성으로, 감정의 인간적 보편성을 논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적 의식의 개성은 예술인 것의 본질 조건이 된다.
그러면 이 개성은 문학에서 어떻게 확보되고 있는 것인가? 즉 문학적 의식의 개별성이 실제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국면은 어떤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선 우리는 문학적 의식의 내용적 개성과 형식적 개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분법을 쓰자는 것은 아니다. 논의 편의상 구분해 본다면, 가령 “슬픔"이나 "기쁨"을 표현하려고 할 때의 슬픔이나 기쁨을 내용이라고 하고 이것의 표현은 형식이라고 해 보자는 것이다. 실제로 슬픔이라는 것, 기쁨이라는 것의 일반형이 어디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념은 그것의 개념에 알맞게 이루어진 현실성으로서 이상이라고 파악된다."37) 그러므로 표현 내용이나 슬픔이나 기쁨은 그것의 개념에 가장 알 맞는 현실적 구체 속에 있을 때를 이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슬픔이나 기쁨이라는 것의 경우는 너무나 다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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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상게서, p.129.
37) 헤겔의 미학이론을 인용한 조요한의 전개서, p.67 참조.
그 내질을 규정하기가 힘들기에 개념적 내용도 잡을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유동하는 물이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입장이 된다. 가령 슬픔은 부모와 이별할 때, 애인과 이별할 때, 친구와 이별할 때 기타 슬픔이라고 할 경우는 도저히 다 열거할 수 없다. 이 때 그 경우마다가 슬픔의 구체적 성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슬픔의 개념도 그 경우마다 달리되며 어떤 형식
구조를 갖느냐에 따라 실상이 드러난다. 물의 모양이 담기는 그릇에 따라 결정되며 어떤 물의 모양을 만들기에 따라 그릇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내용과 형식의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유기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의식의 개별성은 형식의 개별성이라고 해도 곧 내용의 개별성을 합의하게 되며 내용의 개별성
이라고도 해도 그것은 온 형식의 개별성이 되는 것이다. 문학이 노리는 것은 진리라기 보다는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진리라도 문학은 개성적 구체화에서 진실로 확보돼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인생의 진리인 것은 사실이나 그 사랑을 어떻게 진실한 것으로 실제 화하고 구체화하느냐에 문학은 관심 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미적 이념이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특수화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런 이념은 추상적이 되고 만다"고 하면서 그 현상방식의 원리를 자기 자신 안에 갖고 있고 그것으로써 이념은 자기를 자유롭게 형성하는 일을 한다고 하였다.38)
문학이 창조인 것은 이상과 같은 진리의 진실화한 개별성 즉 가성 때문일 것이다. 흔히 "낯설게 하기"란 표현적 특질을 말하는 것은 둔감해진 진리를 새롭게 진실한 것으로 다시 보게 해준다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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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G.W.F. Hegel, Asthetick, hrsg. von F. Bassenge. Bd.1. 5.80-8 조요한의 인용.
식주의로서만 생각하기보다, 수없이 많은 미적 내용을 다양하게 해준다는 내용주의로서도 생각해야 한다. 문학은 우리들이 지각하지 않게 된 것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만 진리가 거기 있어도 보지 못한 것을 보이게 해주는 진리의 들어냄이라는 발견, 즉 창조인
것이다. 예술은 진리를 발견하거나 혹은 통찰하는 것이라는 견해와 진리의 발견자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진리의 전달자라는 건해39)는 어느 쪽도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상으로 문학적 의식의 성격을 마무리하고자 하거니와 그 밖의 여러 측면으로 논의해 볼 수 있지만 사실상 기준을 달리하는 것뿐 그 내용에서는 대동소이하며 오히려 혼란만 가질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문학적 의식과 문학 작품의 관계를 총괄적으로 일변하는 것으로 본론을 정리하고자 한다.
4. 문학적 의식과 문학 작품
문학적 의식은 부단히 기존 의미를 파괴하면서 창조해 가는 모순된 역설성을 갖는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질은 의식에서 보았고 의식의 본질을 자유라고 규정했다. 이와 같은 인간을 실존이라 불러 사물과 그 밖의 모든 존재들과 구별했다. 그리고 그는 실존을 존재학적으로 대자라고 불러 그 밖의 존재인 즉자와 구분했다. 대자, 즉 의식은 '무'로서 존재한다고 했다. 그것은 언제나 비어 있는 것, 허전한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대자의 본질을 결핍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결핍으로서의 대자는 그것을 충만 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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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김병철역, 『문학의 이론, 르네 웰리와 오스틴 웨렌저(을유문화사,
1992), p.50.
려는 욕망을 항상 나타낸다. 만인 대자의 이와 같은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그는 즉자, 즉 물질이나 그 밖의 의식 없는 존재로 변할 것이다. 따라서 대자의 목적은 스스로를 부정하고 즉자로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순간 그는 충족된 존재로서 완전한 안정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자는 또 한편으로 대자로 남아 있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그렇게 충족된 상태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만약 대자가 완전한 즉자로 변했을 때 그러한 확인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대자, 즉 인간은 근본적으로 모순된 두개의 욕망을 갖고 있다.40)
그러므로, 문학 작품은 문학적 의식의 대자적 결핍을 채우기 위한 즉자화 욕구로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완전성에서 즉자를 갈망한다. 예술품은 이런 불완전한 인간의 욕망이 자기를 즉자화시킨 것이라 할 것이다. 자유는 '무'로 그 세계를 넓게 가지지만 일정한 '유'를 갈망하는 한에서 상대성을 갖는다. 문학적 의식은 그
본성이 자유이다. 따라서 어떤 기존 관념도 무화시킬 수 있다. 모든 존재에서 내 의식을 제거하고 나면 무화된다. 상상력은 이런 무화의 능력이면서 다시 새로 재건하는 힘인 것이다. 인간의 또 하나 욕망인 낭자화의 욕구로 인한 것이다. 문학작품은 이와 같은 본질적 인간 욕망의 유희성, 상상력의 부수고 만드는 유희성을 기저로 하여 존재의 본질 구현이나 존재와 인간 사이의 의미 형성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작품은 부단히 기존 관념을 깨면서 새로운 관념을 인간적 차원에서 재창조하여 제시한다. 아마도 새로운 관념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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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박이문, 전게서, p.119~120.
간적 차원은 인간성의 무한한 확대와 옹호에 있을 것이다. 현대는 인간 정신의 물신화를 경계하면서 인가의 주체를 옹호하는 것이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의식은 구체적 삶의 양상이 변화함에 따른 진리의 은폐성을,무의식적인 인간 본성의 자기 기만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면서 부단히 존재의 재해석을 해주는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적 의식의 정직성과 성실성이 또한 필요한 것이다. 문학작품이 진실해야 하는 것은 문학적 의식의 정직성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안되며 한편 성실성이 없이는 작품의 역사성이 죽을 것이다.
실로 오늘의 문학은 정직성에서 작가 정신을 가름하는 것이라본다. 자기도 모르게 허위 의식을 진정한 의식으로 착각하는 자기 기만성에 빠지는 것이 현대 사회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의식은 항상 정직성과 성실성을 끓지 않는 데에 실재적 실천관계가 놓인다.
대자의 즉자화 욕구가 단순한 취미일 때 우리는 예술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인간 보편성을 충족시키는 단계의 치밀한 성실성이 필요한 것이다. 문학적 의식은 기존 관념을 파괴하면서 건설하는 과정에서 문학 작품을 낳지만 그것은 인간 정신사적 책임을 갖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인간적인 것이다.
따라서 문학작품은 어떤 이데올로기에서도 실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특히 문학적 의식의 정직성은 이런 자유가 없을 경우 왜곡되기 때문이다.
5. 결론
서두에서 밝힌 바대로 본고는 문학적 의식의 성격을 밝혀 “문학적 대상론"과의 연계성을 살리고자 한 것이다.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크게 묻는 방식으로 문학원론을 수립하고 싶었던 것이며 각종 방법론이 근거하는 기본 구조를 확립하려 한 것이다. 따라서 사변적인 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첫째, 문학적 의식이 존재하는 기본 양식을.그 대상을 전제로 하여 둘로 갈랐다. 즉 문학적 의식은 대상에 대하여 주체의 목적률이 강하게 작용할 경우 주관적 의식의 양식을 가지며 다른 하나는 대상의 인과율에 의존한 경우 의식 주체가 제약을 당하는 객관적 의식의 양식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문학적 의식이 의미를 형성하는 방식을 구체화시키고 또 전체적 기술
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현상적 형성 관계」와 「실질적 형성 관계」로 구분하여 그 상호간의 의미 형성 실제를 밝혔다.
이런 문학적 의식의 존재 양식은 각종 문학 사상이나 연구 방법의 가장 기본적 토대를 확인할 뿐 아니라 문학적 의식의 전체적 기능을 객관화하는 기본임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근거 위에서 다음 문제인 문학적 의식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문학적 의식의 성격은 가장 기본이 된다고 본 4가지 성격을 제시했는데, 개연성, 구성성, 현재성, 개별성으로 보았다. 첫째의 개연성은 문학적 의식의 순수 지향성을 기준으로 다루었고, 둘째의.구성성은 문학이 갖는 감성적 인식의 필연성을 근거로 다루었으며, 셋째의 현재성은 의식의 시간성을 기준으로 기존성과 실존에 근거해 논의했고 넷째의 개별성은 보편성에 대립한 문학의 예
술성의 조건 충족으로 논거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의식과 문학 작품 문제를 덧붙였는데, 이는 문학적 의식이 인간 존재와 갖는 상동성을 요약해 보이고 그 역설성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고자 했다. 여기서 문학적 의식의 당위적 실천성으로 의식의 정직성과 성실성 문제를 취급하고 싶었다.
이것은 문학적 의식의 존재 본질 규명보다는 실천적 당위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 실례나 현실적 문제는 생략했다. 그 성격상 본고와의 직접성을 견지하고자 한 것이나 의식의 다른 측면으로 깊이 다를 여지가 있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강조해 두고 싶다.
이상으로 “문학적 의식론"의 큰 얼개를 잡고자 했으나 본래 이 문제는, 실제로는 문학이 무엇이냐는 본질 문제만큼이나 큰 것이라서 보충해야 할 면이 없지 않다. 즉 심리학적 기반에 의한 의식론의 자세한 접근이 보강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다음 과제로 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