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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단일 민족에 연연하는가? 외부(外婦) 침략에 대한 방어기재가 바로 폐쇄성이다. 기피요 도피하며 축소하고 경계한다.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외부 침범에 대한 자기 방어 논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제 강점기와 기타 국권 침탈 사건들에서 단일민족을 강조해왔던 근간을 발견해야 한다. 피해의식의 소산이라고 하기엔 조금 과하게 들일지는 모르지만, 단일민족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동북공정인가? 제 조상 찾기인가?
2010년 마침내 중국에서는 단군과 치우천왕, 고구려, 발해는 물론 역사적으로 한번도 침범당했다고 볼 수 없는 백제와 신라마저 자신들의 지방 정부라고 동북공정의 핵심을 선언했다. 중국에서 만주 지방의 역사, 지리, 민족 문제 따위를 연구하는 국가적 연구 사업의 명칭. ‘동북변강사여현장계열연구공정’을 줄여 이르는 말인 동북공정에서 우리는 분노에 앞서 한가지 먼저 생각해볼 것이 있다. 고조선과 백제 신라 등 우리 역사를 다 왜 끌어들였을까?
산너머 동쪽에 있던 동이족의 나라, 환국(桓國)
동서남북. 우리는 방위조차 잘 모르는가? 서융, 북적, 남만, 동이... 그 동이들이 사는 곳. 산너머 동쪽. 거기가 동이족 본거지가 아닌가? 산동(山東), 거기 제수(濟水)가 있고, 제수 남쪽 제남(濟南)이 있으며 제(齊)나라가 있었고 그 제(齊)나라 패자의 이름이 환공(桓公)이었다. 동이족의 특징 중의 특징은 상투다. 상투는 곧 문명이요 문화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머리는 고대인들에게는 청결 문화 의식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 상투. 진시황 무덤이라는 지하궁전의 수많은 토용(土俑)에서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진시황이 중국인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을 전혀 모르는 한국 가짜 국사의 내용 때문입니다. 진시황은 한민족이었습니다. 1973년 진시황릉을 재조사한 바 있는 전 북경대학 화춘구 교수 (당시62세)는 74년 중국 제1의 언론사인 신화사 통신 사회부 이귀형 기자와 인터뷰에서 "진시왕은 동이족이었고, 유적은 모두 동이족 유적임을 확인하였다."라고 인터뷰한 사실이 당국에 보고되어 74~75년 당국으로부터 당국에 먼저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년간 감금되었다가 하남지방 관리직으로 전출된 후,
5년 후인 80년에 폐암으로 사망한 바 있습니다. 79년4월, 이분을 만난 삼우 선생은 "중국 대륙에서 우리 화하족 역사는 천 년이 안 된다. 중국역사 4천 년 중에 조선(단군조선)의 역사가 3분의 2가 넘으니 중국역사는 동이족의 역사다."라고 하면서, "당국은 역사조작을 하려 하는데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이다."라고 말한 사실이 육성 녹음되어 있다.”
중국의 역사서들에 있는 “상투는 동이족만의 문화다.”라는 문구와 진시황릉과 시안의 유물, 그 거대 피리미드들은 모두 발굴이 중단되어 있다.
백제도 신라도 대륙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재야 사학자들의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고조선 유물과 고구려 유물에 이어서 중국 남조 시대 유물은 곧 백제와 신라 유물들과 연계되어 있다. 단순히 교류만 되었다면 동북공정에서 백제를 자신들의 지방국 또는 조상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무엇이 숨어 있다.
백제의 8대 성씨, 대륙의 족보만 찾아보아도
중국정사인 수서에 보면 백제에는 다음과 같은 "백제유 대성팔씨 사씨 해씨 진씨 목씨 국씨 연씨 묘씨 협씨 (百濟有 大性八氏 沙氏 解氏 眞氏 木氏 國氏 燕氏 苗氏 協氏)" 8개의 큰(大) 성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상한 점은 현재 이들은 한반도에는 없고 거의 대륙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혹시 중국 역사학자들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 중에 족보만 찾아 검토해보아도 대륙 백제 설은 확인될 것 아닌가?
“최근 발굴된 유물 싸고 팽팽한 한국과 중국 학자들의 문답이다.
“백제 도읍인 부여성 바깥에 쌓은 나성을 동아시아 최초로 추정하지요.”
“무슨 말씀인지… 중국 남조에도 도시 외곽 성터는 이전부터 있었어요.”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중국제 항아리 안에 복어 뼈가 있었어요. 복어 젓갈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도 있어요. 저장성 사오싱(소흥)에서는 옛적부터 복어 젓갈을 삭혀 먹었지요.”
“그럼, 중국에서 젓갈도 수입했을 가능성은…”
남조 유적은 이미 10년 전부터 국내 학계에서 답사 교류를 진행해왔다. 그럼에도, 갈 때마다 ‘백제 고유의 문화재가 하나씩 없어진다.’라는 농을 던질 정도로 백제 유물과 빼닮은 막대한 육조 유물·유적들이 잇따라 쏟아지는 상황이다. 2000년대 초부터 난징의 도시 재개발로 옛 유적에 대한 발굴이 확대되고 있는 까닭이다. 워크숍에서도 난징시박물관 연구원 왕즈가오가 시내에서 처음 확인된 옛 남조 왕성의 성벽 윤곽과 함께,
한국 고대 삼존불상과 똑 닮은 불상의 출토 경위를 공개해 분위기를 술렁거리게 했다. 백제 문화와 잇닿는 와당, 시유 도기, 정원석, 절터 등은 한국 학계의 관심 덕분에 중국 쪽에서 뒤늦게 연구에 나서게 됐다고도 한다. 양자강 대운하 길목인 난징 인근 양저우와 장두의 박물관 답사 또한 새 발견의 연속이었다. 무령왕릉 출토품과 똑같은 자루 달린 다리미와 백제 금동대향로와 기본 꼴이 같은 박산 향로, 닭머리 흑유병, 청자 사발 등을 볼 수 있었다. 한겨레 2010.04.27.에서 발췌“
거기, 양자강에 천몇백 년을 넘게 이어져 온 백제현, 백제성, 백제향이 있다. 이러한 역사 유물과 연관성 있는 지명들은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게 한다. 동북공정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등 우리 역사로만 알고 있던 것에서 한 발 더 멀리 보아야 할 시각이 있다. 과연 그들은 우리만의 조상일까? 고조선 사람들은 다 한반도로 이전했는가? 부여, 고구려, 대륙백제의 그 사람들은 지금 대륙에 얼마나 남아 있을 것인가? 우리 보다 많을까? 적을까? 과연 그럼 그들이 단군을 웅녀를, 치우를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을 자신들의 조상이라 하는데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의 유전자 dna에는 그 유전형질이 없고 우리에게만 있는가? 이런 생각, 맞아 죽을 각오 하면서 해야 한다고 해도 해보아야 한다.
3. 역사 왜곡은 민족 내부에서 더 치열하다.
중국과 일본. 그들은 한민족의 상고사를 왜곡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이는 역사를 통해 오늘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함이며 현재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우수한 민족의 고대 상고사는 민족에게 자긍심을 부여한다. 이러한 자긍심은 현대 사회에서도 발전의 모티브가 된다. 이는 오늘날 현재의 주도권을 다투어야 하는 세력의 형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도 강력하게 역사 왜곡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우수한 민족에 대한 열악한 민족의 왜곡은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 역사 바라 찾기는 매우 중요한 일이건만, 우리는 밖에서뿐 아니라 안에서도 치열한 기득권 세력에 의해 우리 역사의 왜곡을 경험하고 있다.
고대사는 어제,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 현재의 일이다. 고대 상고사로부터 이어져 오는 민족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 우리 민족 발전의 에너지가 되어왔다. 이제 남의 뒤를 쫓아가면 되던 시대에서 남들을 이끌어야 가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우리 민족 자긍심의 발로인 민족 고대사에 대해 냉철하고도 철저한 고증과 검진 나아가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제2대 조선총독으로 사이토(齊藤實)가 와서 문화정치를 표방한다. 이때 발표한 ‘교육시책’에서 사이토는 이렇게 발표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跡)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 일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이러한 근본정신 속에서 일제는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약칭 조선사편수회)를 만들고 1938년까지 35권에 달하는 『조선사』를 편찬했다. 진짜 목적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없애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상고, 삼한시대부터 다룰 듯 거론하다가, 차츰 연대가 낮춰지고 다시 삼국 이전이 됐다가 결국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다루는 것으로 결정되기에 이른다. 조선사 편찬을 위해 쌀 10만 가마니 이상의 당시 돈을 썼다.
토인비는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라고 했다. 일제는 36년 동안의 식민통치 시절 우리나라 역사를 철저히 파괴했다. 1910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모든 서적을 일제히 수색했으며, 다음 해 1911년 말까지 1년 남짓 동안 무려 20만 권의 서적을 강탈해갔다고 한다. 역사책이 최우선적으로 압수되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51종 20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라고 한다. 사료수집가 이상시 씨는,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관련 기록을 중점적으로 약탈해 갔다는 사실을 신문지상에 발표하여 일제의 무도함을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낸 바 있었다. (1985년 10월 4일 자 조선일보).
외세에 의한 왜곡에 부응하는 민족 내부의 문제
우리 역사에 대한 핵심문제는 외세에 의한 왜곡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다 인가? 아니다. 외세에 의한 왜곡보다 더 큰 문제가 바로 우리 민족 내부에서의 부응이요, 동조요, 기득권 지키기다. 특히 역사학자들과 문인들의 놀라운 활약(?)은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불편하게 한다.
단군은 신화다. 이런 문구는 전혀 낯설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곰의 후손이다. 이런 정신 가치관을 누가 심어왔고 누가 이어왔는가?
역사학자 이병도는 이마니시류(今西龍))의 수서관보가 되어 ‘조선사 편찬’이라는 우리 역사 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다. 일제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그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학계에는 직접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 기득권층이 문제다. 한국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 유지되었다는 반도사관론이 팽배하다. 이 반도사관에 더해진 것이 바로,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해 우리 역사 왜곡을 공고히 하고 있다. 사료를 빼앗고 불태우고 나서.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라고 스스로 회고했다. 더욱이 이병도는 죽기 직전,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반성문을 발표한다. 그간 최태영 박사, 송지영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등의 설득으로 과거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 자에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어떤 이는 ‘노망드셨네!’ 하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참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기 650년부터 신라는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빌어다 썼다. 통일신라 때에도 당나라의 연호를 썼음은 물론이다. 그 후 고려 시대는 송나라의 연호를, 조선 시대에 와서는 명나라, 청나라의 연호를 쓰는 것이 국시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역사를 쓰는 학자들이 우리의 주체적 입장에서가 아닌 다른 관점이 두드러지게 된다.
문제는 중국이다. 중국? 언제부터 우리는 중국을 중국이라고 했을까? 중화주의에 물든 사대주의 역사관을 우리는 왜 가지게 된 것일까? 친일파 사학자들의 주장과 더불어 교묘하게 실로 오랫동안 주입된 모화사상 사대주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우리 역사의 왜곡과 폄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서 「삼국사기」(1145년), 역대 최고의 사대주의 사서마저도
고려 중기 때,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던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썼다. 그는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고 했다.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불손하여, 임금께서 장차 토벌하려고 했다. 이 부분은 누가 보아도 중국에 편중된 역사 서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는 식으로 쓸 수는 없다.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해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 갈 수 없다. 이 삼국사기에 보면 “진덕왕 3년(649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쓰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모든 관직이나 명칭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복장제도를 바꿔 버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한민족의 가치관과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오직 중국에서 뿌리와 사상을 찾으려는 중화 사대주의 정신의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이리 왜곡을 한다고 해도 진실을 다 숨기거나 왜곡하지는 못한다. 삼국사기에서 그 단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거기 조금만 상식이 있다면 알 수 있는 위대한 백제가 숨어 있었다.
“삼국사기에 통일신라의 대학자 최치원 선생은 고구려·백제 전성 시에 강병 백만이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를 흔들어 백제가 중국의 큰 좀[두]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蠡)”
오나라와 월나라가 어디인가? 유, 연, 제, 노 나라의 영역을 그려보면 백제에 가장 박하다는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대학자가 제시한 그 기록을 따라 대륙에 색칠하면 지도를 만들 수 있다. 오, 월나라는 양자강 일원을 장악했고 제나라는 산둥이 근거이며 연나라는 요서, 화북 지역이 아닌가? 그런데 가장 박한 삼국사기의 통일신라 학자의 말을 지도로 그려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강역도를 중국 지형도와 참고하면…. 거기 오나라 양자강 중상류에 난공불락의 성이 있다. 천 년 넘게 내려온 그 이름이 백제성이니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책 속 한쪽에 숨겨져 있는 대백제 찾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식에서 출발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역사 전문가들은 발견하지 못한다. 아니 안 한다. 사학계에만 그럴까? 문학은? 문인들은 어떠한가? 왜 우리는 삼국지와 초한지, 수호지에 열광하는가? 왜 서울대 대학생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위가 삼국지여야 하는가?
찌질이 백제와 위대한 백제, 그 진실은 무엇인가?
tv, 미디어 매체의 역사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항상 궁금한 것이 있다. 백제는 왜 그리 못 났을까? 왜 그리도 한 많은 것만 있을까? 겨우 서동요만이 신라 선화공주를 얻어오는 그 얘기를 빼고 나면 참 민망한 스토리들이다.
kbs tv 역사대하드라마 [근초고왕]을 보면서 가슴이 메어져 온다. 과연 그랬을까? 그렇게 아비가 자식을 어미가 배다른 자식과 남편을. 그리고 오직 권력에만 눈이 어두운 집권층을 믿고 백제가 그리도 오랜 세월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런 기록들은 어디에 있는가? 백제에 가장 박한 삼국사기에서도 비류왕 때 계속 가뭄을 걱정하여 백성을 위무하고 곡식을 나눠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 왕의 아들로 백제 최대 전성기를 만들었다는 근초고왕이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그랬을까?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 어떤 사료에도 없는 창작품인 드라마 근초고왕은 왜 그리도 찌질한 백제를 그려야 하는가?
왜 백제만 패망한 역사인가?
근초고왕 다음에 광개토대왕이고. 2012년 태종무열왕을 방송한다는 계획을 보면서 왜 백제 이야기는 위대할 수 없는가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시절 백제는 어떠했을까?
백제는 특히 근초고 시대 백제는 위대한 문명국가였다. 칠지도 하나만 보아도 최강의 제련 제강 기술과 금을 상감하는 특수합금 형상 기술 등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당시 최고급 문명을 알 수 있다.
백제는 하얀 황금으로 불리는 소금의 주산지다. 당시 소금은 국력이었다. 소서노의 아비 연타발부터 염전원인으로 불리는 소금상인이었다. 수리농업 기술을 가진 최대 곡창지대와 야철터 즉 철기시대 철광생산지를 갖고 있었으며 삼(蔘)과, 양잠 밭이 널려 있던 경제 대국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다문화 국가였다. 한국의 고대국가 중 국제화에 가장 접근한 것은 백제다. 그것은 근초고 시대에서 최전성기를 이룬다. 백제는 바로 고대 한류의 중심지였다.
동진(東晋)의 왕조를 보면 근초고 시절 제12대 애황제(슬플 哀: 재위 361~365), 제13대 폐황제(폐위할 廢: 재위 365~371), 태화[太和], 제14대 태종(太宗) 간문황제(簡文皇帝) 재위 371~372)이다. 시호에 슬픈 애와 폐위할 폐가 있고 다시 창업 군주 태종이 ‘편지 쓴 황제’로 나온다. 이는 근초고 시대에 동진과 백제에 다른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오나라 월나라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동진의 황제 이름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삼국사기에 기록된 최지원은 동진이 장악했다는 오나라 월나라를 백제 최전성기의 영역으로 표출하고 있는가? 작가적 상상력이 발휘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잘못 배웠다.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가장 백제에 야박(?)한 삼국사기 백제 이야기를 뼈대로 중국의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사(南史), 통전(通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백제 영역을 근거로 지형도를 바탕으로 강역을 만들었다. 만주원류고에서 중국 동해안 일원이 다 백제라 하였는데…. 일명 정통 역사학자들은 이들의 자료를 부정하고 있다. 오히려 한반도 내의 한강 이남으로 백제를 축소하고 기타 자료를 부정하는 일제 강점기 치하의 역사인식을 벗어나지 못해 안타깝다.
정통 사학계 말대로라면 2010년 10월 말. 북한강 최상류인 강원도 화천군 원천리에서 발견된 3~4세기 백제 유물, 도시 집터와 병마구, 등자 등등 그 많은 유물은 어찌 된 일인가?
기존 역사학자들의 반도사관론에 입각된 주장은 한강 이남에만 국한된 백제다. 그러면 한강 최상류. 그것도 추가령 계곡 그 길을 따른 그 다량의 백제 유물 발견으로 그동안 반도사관의 사학계 주장이 허위였음이 여실히 증명된다. 재야 사학자들은 오래전 원산방면으로 원산시 북쪽 문천시에 속고봉(速高峰), 속고산(速高山 722m = 신증동국여지승람 ; 所依達山, 즉 쇠달산) 같은 백제 초고대왕의 별명인 속고왕(速古王)의 이름을 딴 지명에 주목하고 있었다. 함흥시 동쪽에는 초고대령(草高臺嶺)도 있다.
3~4세기 유물이 발견되고 한강 이남 백제만을 주장하던 일명 정통 역사학자들의 반성이 있었나? 아니 다시 침묵과 외면, 그리고 망각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아쉽다. 그러나 역사소설 근초고대왕 책 지도에서는 자신 있게 북한강 최상류는 원산 함흥으로 가는 길목, 근초고의 백제 영토로 그려져 있다. 전략적으로 백제 최강성기 때 근초고라면 반드시 고구려와 신라의 군사적 교류를 막았을 것이고 그 길목 중의 길목인 원산 함흥을 노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작가적 관점은 가장 오랫동안 전승 되는 지명 연구를 빌어 근초고의 백제영토에 그 지역을 편입시킨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료를 바라보는 상식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고 우리 역사계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소설가의 상상력이 할 수 있는 역사적 양심이다.
4. 우리 민족 열린 민족의식을 되살려야 한다.
역사소설 근초고대왕의 시작은 적석총이 있는 홍산이다. 그 이유는 바로 위대한 백제인의 꿈이 환한 나라 환국(桓國)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홍산 문명은 고조선 문화이며 우리 동이족 문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거기 환국이 있었다. 우리 상고사는 환국에 대한 이해부터 막혀 있다. 먼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사학계에는 “반도적 시각(半島的 視覺)”과 “반(半)의 반도적 시각(半島的 視覺)”이 횡행하고 있다. “한반도”라는 말 자체가 반쯤 섬이라는 대륙의 냉소적 관점이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우리 스스로 그것을 두 동강 내고 남한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과거에도 그랬을까?
고려 후기 때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1281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조선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한 구절에 ‘석유환국’(昔有桓國: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의 환국에 대해 주를 달면서 환국과 불교의 환인이 글자가 비슷해 보이므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국가가 아닌 불교의 수호신 제석천 (帝釋天, 釋帝桓因陀羅)으로 바꿔놓았다. 다시 말해서 고려의 강산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고기(古記)」 원문에 없는 말을 제멋대로 갖다 붙인 것이 되었다. 이 왜곡은 철저히 일제에 의해 자행된다.
일제의 뜻대로 한국 고대사를 주물렀던 주모자였던 당시 교토대 강사 이마니시 류(今西龍:후일 경성제대 교수)는 이병도 등과 더불어 신라부터 고려 때까지의 조선사를 제멋대로 왜곡했다.
‘조선사편수회 회의록’을 통해,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가 ‘삼국유사’의 단군고기 중에 ‘昔有桓國’(석유환국)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昔有桓因’(석유환인)이라고 고친 사실이 드러났다. 이마니시류가 소장하고 있던 1512년의 삼국유사 정덕본에는, 일연이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
그 나라에 높은 서자 벼슬을 하는 환웅이 있었고 마지막 환웅 대에 단군이 나타나 조선을 세웠다.’라고 되어 있었다(현재 일본 천리대 소재, 국내에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그러나 이마니시류는 변조된 내용을 경도제대 (경성제대를 뜻함) 영인본이라고 하여 발표한다. 그리하여 현재 전해지는 ‘삼국유사’의 판본에는 환국(桓l)이 환인(桓因)으로 변조되었고,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뿌리 역사를 송두리째 뽑아버렸던 것이다.
이는 원래의 환국 시대가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것에 반해, ‘桓因’이나 ‘帝釋’으로 바뀐 것은 불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이며,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은 명백한 조작이다. 지금으로부터 4336년 전에 세워진 단군의 고조선이 3000년 전의 불교의 부처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이전의 사실이라는 점, 환국은 불교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점 등에서 환인 제석은 맞지 않다. 이를 기존의 역사학자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근초고대왕은 그 환국을 모델, 지향점으로 하여 쓰여 있다.
세계사에서 내해적 역사 관점은 유럽의 지중해 역사와 등치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중해와 못지않은 인구적 또는 지리적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는 황해(黃海)는 찬란한 역사의 꽃을 피우지 못했다는 역사적 학설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유물이 증명한다. 고조선 청동기 초기 철기 유물은 황해 일원에 폭넓게 퍼져 있다. 유럽적 용어인 극동(far east), 즉 황해 일원은 찬란한 청동기, 철기 문명을 갖췄고 더 많은 인구가 거주했고 시대적 이데올로기와 종교가 있었다. 자연적 조건은 물론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성숙한 토대를 갖고 있었는데 내해문명이 없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대한 백제는 지향점이 있다. 내해환국(內海桓國). 바로 황해 바다를 누빈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꿈을 담고 있다. 산둥반도에서 한반도 서해안까지 편서풍과 황해 해류를 타고 넘나들면 빠르면 3일에서 7일이면 넘나든다. 그 물품과 인력을 만약 육지로 건넨다면 최소한 한 달에서 두 달은 넘어야 할 것이다.
왜 지금 우리는 그 뱃길을 이용하고 그 시절 우리 조상은 그 뱃길을 이어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한반도 내에서 만의 생각으로 백제에서 신라 경주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한지 수천 명의 군사를 보내기가 얼마나 어려울 것이지 나제통문을 지나면 여실히 알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그 사실을 우리는 외면한다. 백제는 다문화 다인종 사회였다는 점에서 해류를 이용한 해운강국, 해상강국 백제를 읽게 된다.
흔히 중국의 역사를 북방민족과 한민족 간 투쟁의 역사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동천(東遷)의 역사로도 볼 수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秦)의 수도는 시안이었고 원(園)의 수도는 장안이었다. 그 이후 북경 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 도시들은 중국 서쪽의 도시들이다. 동쪽에는 자연조건이 훨씬 좋았고, 그 결과 더 많은 인구가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수도를 서쪽에 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의도적으로 그 시대의 동쪽의 역사를 숨겨 역사적 공백기를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5. 바른 역사 찾기가 곧 다문화 다인종 사회의 해법이다.
삼국지를 보면서 유비 제갈량, 관우, 조조 등 그 영웅들 이야기에 가슴 설레며 중화사상에 저절로 빠져들던 시절이 있었다. 삼국지에 해전이 없다. 동이(東夷)가 대륙 동쪽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적벽대전이다. 수십만은커녕 수만 척 배도 정박할 수 없는 그런 적벽대전에서 대전쟁이란다. 나관중의 상상력이 조금 과하다.
중화 입장에서 동북공정의 한계 때문에 이제 중국에서는 단군을 자신의 조상에 편입시키고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방정부 역사라고 하기 시작한다. 고대 문명의 유물들을 발굴하려면 단군 고조선 시대와 삼국시대를 편입시키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이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뻥 이라도 쳐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 역사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조차 터부시하고 있다. 왜 이러고 있는가? 왜 우리는 우리 조상을 멸시하고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가? 왜 패망한 역사, 궁중 암투에 빠진 이야기에 허우적거리게 하는가? 조상이 멸시당하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본 황실 서고에 약 30만 권의 우리 민족의 고서적이 있다고 한다. 이를 더 숨기지 않고 꺼내어 동아시아의 역사 진실을 밝혀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나관중의 삼국지처럼 우리 이야기가 동아시아 일원에 퍼져야 한다. 그래야 그 스토리를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이 파헤쳐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동아시아의 종주국이 된다. 숨길 수 없다. 우리 문화적 유전자에 도도하게 흐르는 단군 조선과 동이족,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이야기를 우리조차 모르고 그저 헐겁게 배운 것으로 덮으려 한다. 왜곡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인 정통적 관점인가? 강원도 원천리 유적처럼 파헤쳐서 밝혀지면 그것이 비로소 정통 역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한반도에 없는 백제 8대 성씨의 족보를 바탕으로 뒤져만 보아도 대륙백제의 진실은 쉽게 영역도와 함께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도들은 뭐 하고 있는가?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 역사, 그 정신을 지켜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가 아닌가.
history는 ‘hi+story’다.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읽히고 누구에게나 인정받아져 높아지면 역사가 된다. 삼국지연의를 바라보는 우리 청소년들은 그것이 마치 위대한 역사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 시대 우리 문인, 대가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무력이 중심인 시대 경제전쟁과 동아시아를 공동체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인 총력전으로서의 국력 신장을 다루고 이를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잘 살자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중국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부류와 분명히 차원이 다른 우리만의 역사다. 경제적 사회적 관점에서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역사적 인물, 영웅 스토리를 만들어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삼국지에 열광할 것인가?
언제까지 초한지를 읽으며 모화사상, 사대주의에 물들어야 하는가?
이제 정치적 의도가 있던 없든 간에 문화 콘텐츠에서 신라 중심의 협소한 사고에서 벗어나, 황해 바다를 누빈 위대한 백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우리 역사의 위대한 영웅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위대한 백제 이야기는 그래서 위대한 환국에의 꿈이 담겨 있다. 그래야 단순히 근초고대왕만의 역사가 아닌 위대한 백제인들 나아가 내해환국을 같이 살았던 백제인들, 신라인들, 고구려인들과 현재의 동아시아인들 모두에게 꿈과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초고는 싸움만 잘하는 왕이 아니다. 그런 왕이 아니라 천 수백 년을 훌쩍 넘는 백제성 백제현 백제향이라는 이름을 남긴 위대한 왕이었다. 바로 하늘. 2009년 양자강이 태풍 두 번에 넘쳐났다. 그때 양자강이 넘쳐서 문명화된 지금 시대에 이재민이 9천만이 발생했다. 근초고 시대에는 그런 홍수, 태풍 두 번 안 발생했을까? 왕조는 유지될 수 있을까?
삼 년 가뭄에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다. 임금 즉 왕의 할 일 중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하늘 뜻. 바로 천재지변, 가뭄과 홍수가 나는 것을 아는 것인데 역(易)이 바로 그 원리다. 천부의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의 사이클, 반복의 데이터베이스. 그 비밀. 그 수리. 언제 다시 가뭄이 오고 홍수가 나는 것인가를 아는 것. 그것으로 세상 사람들을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 되도록 바로 서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근초고가 큰 왕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베-필 국제결혼이라는 까페의 [다문화가정]이란 분의 글에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다. 역사 속의 다문화 사회, 화산 이씨의 선조는 베트남 왕족이다. 즉 한국과 베트남과의 교류 역사를 콘텐츠를 통해 밝히고 화해와 화합의 계기로 삼는 것이다.
“1995년 화산이씨 종친회가 베트남을 찾았을 때 베트남 정부는 "맥이 끊겼던 왕족이 돌아 왔다"며 크게 환대했다. 화산 이씨의 시조인 이용상은 베트남 첫 독립국가인 리 왕조(1009~1226) 왕자 신분이었는데 권력 다툼 속 왕족 몰살의 난을 피해 보트를 타고 표류하다 고려 고종 때 서해안 황해도 옹진반도 화산에 도착했다. 골든브릿지 금융그룹의 이상준 회장도 바로 베트남계 후손인 화산이씨. 그는 "베트남 왕족 후예로서 양국을 잇는 다리가 되고 싶다"며 2005년 베트남에 한국 증권회사 중 최초로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2007년 베트남 당국은 그의 혈통을 공식 인정해 내국인 대우를 해주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내국인 대우를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나라 국내 성씨 280여개 중 약 절반가량이 위의 화산이씨를 비롯해 양주 낭씨, 진양 강씨, 영양 남씨, 광주 노씨 등이다. 우리가 단일민족을 강조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이 우리의 조상과 함께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해마다 1만 명이 넘는 외국인 아가씨들이 한국으로 시집을 온다고 한다. 우리의 가족이 된다. 따스함을 넘어 혈연적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다. 이런 시대 역사 교육은 새로운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
“캐나다는 세계 최초로 인종다양성을 증진하게 시키는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다문화사회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다문화사회의 성격이 캐나다 bc 주 역사교육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검토하였다. 캐나다에서 다문화교육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인종적 편견을 줄이고 문화적 다양성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다. 역사도 이러한 교육 목적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과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역사인식은 선 개념이나 선 이해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다문화적 관점에 따라 교육내용을 선정한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고나 이해방식을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교육내용 못지않게 교육방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캐나다 역사는 그 자체가 다문화사회의 형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캐나다 역사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다문화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bc 주 역사교육에서는 특히 원주민(aboriginal people)의 역사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 이주민들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타협에 의해 캐나다 연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현재 캐나다가 가지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계 문화의 공존과 2개 공용어 정책의 역사적 근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캐나다 연방의 성립 이후를 다루는 현대사에서는 이민과 이로 인해 일어나는 여러 문제, 원주민의 소외와 권리회복 문제, 다문화정책과 퀘벡문제 등을 통해 오늘날의 다문화사회가 형성되는 과정과 이 때문에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게 한다.
지역이나 세계의 역사를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다문화사회의 관점과 방향을 같이 한다. 국가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정치사에 비해, 사회문화사는 지리적 조건이나 역사의 전개상황에 따라 다양한 생활모습과 문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교육의 내용은 bc 주의 지역사를 다루는 10학년 사회와 1, 2학년의 세계사 교과서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교육이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종의 문화에 대해 학생들에게 얼마나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역사교육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원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이를 보여준다. 또한, 다문화에 대한 인식이 캐나다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 다양성을 어떻게 캐나다의 정체성으로 확립하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문화사회의 역사교육
캐나다 bc 주의 경우. history education in a multicultural society - a case of bc in canada. 김한종(kim han jong)“
강선주_경인교육대학교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민족사관은 일제강점기에 일제로부터의 우리 민족의 독립은 ‘민족’이 통합된 주체로 나설 때 획득될 수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배태되었다. 따라서 제국주의적 팽창의 수단이 되었던 서구의 ‘민족주의’, ‘민족사관’과는 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고, 세계화 추세 속에서 국가, 민족 간의 갈등이 심화 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러한 민족 담론은 아직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현재 세계 변화는 민족만을 역사의 주체로, 분석 틀로 제시하는 역사교육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우리 앞에는 ‘민족’ 문제 이외에 다양한 문제가 놓여 있다. 그 문제들은 ‘민족’의 틀만으로는 이해될 수도, ‘민족’을 주체로만 해결할 수 없다. 나아가 민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를 은폐하고,
축소시키는 잠재적 기재로 작용할 수 있다. 사회의 다원화, 문화의 다양화, 집단과 사회간의 세계적인 상호의존성의 심화, 국가나 민족 간의 갈등 심화 등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문제들을 던지고 있다. 환경, 질병 문제, 외국인 노동자 문제, 경제적 갈등 문제, 실업, 빈곤, 노인․ 아동․ 여성 문제 등은 더 이상 ‘민족’만을 단위로 한 현실 문제 인식과 해결 방안 모색, 역사 이해와 미래에 대한 전망의 실질성과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즉 다원화, 다양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변화, 세계의 변화는 우리 역사교육에서 역사 이해 단위의 다양화와 역사적 관점의 민주화를 요구한다.”고 했다.
“교육은 발전의 동력이며 미래를 위한 계획이며 실천이다.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가속화되는 지구촌의 세계화는 한국이 감내해야 할 일상이 되었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변화와 도전의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변화하는 국제정치와 세계경제 속의 한국의 위상을 가늠하면서
‘세계 속의 한국’을 확고히 하고, 동시에 ‘한국 속의 세계’를 돌아보고 평화와 안정을 담보할 수 있는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국가적 과제가 되고 있다. 식민과 전쟁, 분단과 독재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20세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아 ‘한국 속의 세계’는 교육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실천을 요구한다. 세계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한국이 지켜 온 자기 민족 중심의 폐쇄적인 민족주의와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을 바탕으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한국인들이 받아 온 국가중심주의적 교육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나아가 세계화에 의하여 촉진되는 인적 물적 교류는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의 접촉을 증가시킴으로써 모든 한국인에게 세계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과 태도, 행동양식과 생활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국제적 평화와 사회적 정의 그리고 인간적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교육’이라는 과제를 던져 준다. 한국이
‘세계 속의 한국’을 구현하고 ‘한국 속의 세계’를 너그럽게 포용하기 위하여 단일민족국가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다인종 다문화 사회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의 모든 분야에서 교육적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유네스코의 21세기 교육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는 미래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중요한 요소(pillars) 중 하나로 ‘더불어 사는 학습(learning to live together)’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선언은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평화로운 공존과 포용의 출발이며,
다문화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삶의 바탕임을 확인하고 창조적 발전의 원동력이며 건강한 경쟁력의 토대임을 선언한다. 다수와 소수, 전통과 현대의 다양한 사고와 삶의 방식들을 인정하고 공존과 상호 존중이 실현될 때 사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잉태할 수 있다. 다름과 낯섦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관용과 섬김의 태도를 기르고, 세계인들과의 교류와 소통을 통하여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세계와 더불어 삶의 지평을 열어갈 다음 세대를 육성하는 것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의 사명이자 실천 과제이다.
이제 한국교육은 세계시민을 양성하는 새로운 교육으로 거듭나야 한다. 유네스코는 상대방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갈등과 전쟁의 원인임을 인식하고,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인권과 민주주의를 고양하고 상호이해와 협력을 촉진하며 문화다양성에 기초하여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학습하는 국제이해교육을 권장해 왔다. 국제이해교육은 세계화에 대응하고 다인종 다문화사회를 위한 교육적 대안이며 국제적 지지를 받는 교육이다.
이제 한국의 교육은 단일 민족국가의 국민을 양성하는 전통적인 근대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의 모든 사람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세계시민을 양성하는 새로운 교육으로 거듭나야 한다. 국제이해교육이 세계시민교육으로서 한국의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의 현장에서 보다 강화되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대근(아태국제이해교육원(apceiu) 원장) 2007.03.15. 다인종 다문화사회와 교육.”
환율전쟁, 경제 전쟁이 세계와 아시아에서 거세게 불고 있을 때 소설 [근초고대왕]을 썼다. 위대한 백제 이야기다. 드라마에서 뮤지컬 연극에서 백제 이야기는 왜 항상 패배자의 역사인가. 백제만 망했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편협한 생각만을 하고 있는가? 더 넓은 위대한 세상을 꿈꾼 큰 왕, 대왕을 만나고 싶었다.
대한민국의 21세기 국가 전략이 군사 강국 영토대국이 아니고 동아시아와 세계에서의 균형자 역할로 볼 때, 과연 그런 문화 강국, 해상강국의 비전을 가질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영웅 모델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있다. 우리에게 있었다. 소설 근초고대왕에 대한 구상은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002월드컵유치엽서 보내기 범국민운동을 기획하여 스위스 취리히 fifa 본부 앞에서 120만 장의 그림엽서 전시와 홍보활동에 참여했었다. 2002 월드컵이 집행위원들의 합의로 한일 공동으로 개최되자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한·중·일 동아시아공동체 시대가 예감되었다. 그러한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근초고대왕은 대륙과 한반도, 일본 열도, 나아가 대만과 동아시아 일원을 경략하는 데 성공한 백제의 대 정복군주였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날조에 대응하여 새로운 동아시아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역사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대백제 최대 전성기, 근초고를 꺼내 우리 민족의 대 영웅으로 그들에게 또 세계에 제시해야 했다.
왕이 아니라 대왕이다. 지방왕과 제후를 거느렸으며, 백성을 넓게 품은 큰 왕이었다. 중국 역사책들을 보아도 백제 땅에는 중국인, 가야인, 일본인이 섞여 거주한다고 했다. 백제의 문화는 그래서 일본을 비롯해 동아시아 문명의 꽃을 피워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무력이 난무하던 시대. 서로 살리는 상생의 문화와 교류의 백제는 이제껏 나약함과 무력함이 아닌 화려한 문화선도국가다. 이제 세계 1등 국가, 선진국으로 도약하여 지향해야 할 우리의 비전은 한민족 인류문화 선도국가가 아닌가? 근초고는 1700년 전 동아시아 백성을 아우른 큰 왕이었다. 그런 지도자를 우리는 만들어야 한다. 작가는 콘텐츠로 그러한 세상을 만든다면 역사가는 그런 세상을 살았던 우리 역사를 발굴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두 글로벌 시대 다문화 다인종 시대의 화합정신을 역사적 근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유산이 있다. 홍익인간, 재세이화. 그 정신의 바탕과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다.
그런 의미에서 결론적으로 다문화 다인종 사회에서는 단순히 한민족만의 미래가 아닌, 세상 인류의 공동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미래상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 교육이 역사를 중심으로 이행될 때, 우리 사회의 제반 문제를 바로 점검할 수 있고 더욱 밝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우리 인류를 인도할 것이다. 이는 세계 속의 한국이 세계를 포용하며 창조적 미래를 위한 인류적 도전이자 실천을 이루는 것이다.
아름다운 나라, 우리가 선도해야 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닐 수 없다.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74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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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루한 장마로 습한 공기가
집안 가득히 끈끈합니다
푸른 하늘이 그리워지네요.
장마 끝에는 무더위가 한층
더 기승을 부리겠지만...
7월의 마지막 날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