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과 노량해전, 이순신과 조선의 바다
땅이야기 두번 째 주간 오후시간에는 <칼의 노래>의 구체적 배경이 되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부터 명량해전, 노량해전까지의 맥락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점심먹고 졸리기 쉬운 오후 시간인데도 학생들은 진지한 눈빛으로 이순신의 마음에 공명하고 있었습니다. 자원교사로 참여하며 아이들의 성실하고 열정적인 눈빛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신성하고 가슴떨리는 일인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이순신으로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알아가고 성장하고 있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상근 선생님들의 열정과 수고에 대해서도 다시금 경의를 가지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이 생명을 지키고 자라게 하는 이 시대의 '전라좌수영'이 되기를 기원하며 수업에 임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개전부터 수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왜 삭탈관직, 백의종군의 길을 가야 했을까요? 학생들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 전세의 변동, 고니시 유키나가 일본 제1선봉장의 책략 등을 설명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은 개전 2년만에 강화협상에 돌입하게 됩니다. 1593년 1월 명나라의 이여송부대와 조선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고 행주성에서 권율장군이 10배 가까이 되는 적을 성공적으로 격퇴(행주대첩)하게 되면서 일본군은 사기가 꺾이고 안전하게 남해안 일대의 왜성으로 철수하고자 합니다. 이 때 시작된 것이 바로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입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조선은 강화협상의 테이블에도 끼지 못했지요. 스스로 전쟁의 주체가 되지 못한 조선은 강화협상의 가장 큰 피해자였습니다. 전투력을 상실한 일본군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를 막는 것이 상국인 명나라였고 이후 전력을 재정비한 일본군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1만 명의 민관군을 철저하게 무너뜨립니다.
강화협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협상이었습니다. 일본과 명국의 이해와 요구수준의 격차가 너무도 컷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강화를 통해 자신들의 자구책을 모색하던 심유경과 고니시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강화를 추진합니다. 이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을 왕으로 책봉하려는 황실문서의 진의를 파악하게 됩니다. 왕은 자신이 하고자해서 된 것인데 왕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명나라 황제가 준다는 개념자체에 화가 난 것이지요. 결국 강화협상은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재침을 명령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일본의 2차 침략에서의 전략적 목표는 전라도 일대였습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까지의 공격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임진강 이남의 4개도(경상도,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를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강화협상의 결렬은 곧 전쟁이라는 사실을 조선도 잘 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조정과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포를 공격하여 적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 적이 상륙할 수 있는 정보를 준 것이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 요시라를 통해 부산상륙의 본진 장수가 바로 가토 기요마사라는 사실을 조선 조정에 알린 것입니다. 고니시가 강화협상의 주도자로 일본측에서는 실패책임을 묻고 있는 상황이었고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와 계속 앙숙관계였던 사실을 조정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시라를 통한 고니시의 정보를 믿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순신은 계속해서 출정을 거부합니다. 적의 정보가 반드시 옳다는 보장이 없고 오히려 반간계 전략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순신은 선조와 조선조정에게 모든 판단은 현장 지휘관에게 맡겨달라고 거듭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미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데다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 장수인 이순신은 선조에게는 매우 우려스러운 존재입니다. 이미 의주로 도망간 전력이 있는 선조에게 이순신은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존재였지요. 계속된 이순신과 조선조정과의 갈등은 결국 이순신의 잘못된 보고를 기점으로 이순신의 삭탈관직, 백의종군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에 원균이 부임하지만 곧 칠천량해전에서 1만 명의 조선수군이 괴멸됩니다. 조선수군을 무너뜨린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남원과 전주를 거쳐 수도 서울을 공략하기에 이릅니다. 이 때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됩니다.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도 잃게된 이순신은 몸도 마음도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배는 모두 12척, 12척의 배로 수십 배의 적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바로 울돌목 명량해전입니다. '죽고자 하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이 결기로 뭉쳐 결국 승리를 이끌어 내지요.
1598년 전쟁의 일으킨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은 더욱 빠른 철수를 하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의 정치적 구심점이 사라지고 일본 본토에서는 도요토미 이후의 치열한 정치투쟁이 전개되기 때문이지요. 명나라 군대나 일본 군대 모두가 안전한 철수를 원합니다. 명나라도 남의 나라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기 싫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순천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보내주지 않습니다. 모든 무기와 군량미를 배에 실으라고 명령합니다. 순천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천왜교성의 시마즈가 합세해 이순신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이 노량앞바다였습니다. 혈투끝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순신은 마자막 임진왜란 전장에서 서거하고 맙니다.
작전권도 같지 못한 당대 조선의 현실은 오늘의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습니다. 당대에도 명나라 군대의 눈치를 살피며 강화협상 정국을 지나야 했던것이 바로 조선의 현실이지요. 이순신은 기실 자신을 죽이려는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일본의 전략적 구상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린 이순신을 일본은 끊임없이 죽이고자 했습니다. 같은 조선의 사람이었던 선조와 조정조차도 이순신에게는 기댈 곳이 못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작전권에 종속되지 않는 이순신을 명나라 역시 불편하고 까다롭게 여깁니다.
이순신은 어떻게 억울하고 답답한 현실을 극복했는지 그의 정신세계도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순신은 무과 시험에 합격하기위해 10년의 시간을 단련합니다. 21세까지는 문과시험에 응시하여 과거를 준비하기도 했기에 이순신의 글은 어느 선비 못지않은 표현력과 정확성을 자랑합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이순신의 무과성적입니다. 이순신 정도면 엄청난 성적으로 무과에 급제했을것 같은데 당시 이순신의 무과성적은 최하위 등급인 "병"과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최하위 무관으로 변방을 전전하며 관직생활을 시작한 겁니다. 이순신은 좌절하지 않고 조급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시간표대로 끈임없이 자신을 단련해 나갔습니다. 그런 이순신에게 모든 생명을 책임지는 역사의 과제가 주어진 것이지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며 모든 생명을 지키고자 자신의 존재를 던질 줄 알았던 이순신의 책임감이 아이들에게 감동과 도전으로 전해졌기를 기원하며 수업을 마쳤습니다.
이순신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과 다른 영웅 이순신이 아닌 몹시 외롭고 고통스러웠음에도 자신이 사랑한 생명을 지키기위해 분투한 한 인간 이순신을 알았습니다. 지금도 이순신처럼 날적이를 적으며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고 있는 경당 친구들이 다른 생명을 책임지고 보호하는 존재로 성장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강의 후 학생들의 나눔을 들으며 이순신을 만나가고 있는 친구들의 진실한 눈빛이 어떤 열매로 나타날지 더욱 기대가 되었습니다.
"사랑과 정성의 깊이 만큼 창의성이 발휘된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사랑과 정성이 이순신과 전라좌수영처럼 이 시대의 책임을 감당해내는 창의적 도전으로 이어질 것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첫댓글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현장에 있는 것 같은 감동이 밀려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