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칠곡(漆谷) 귀봉서당(龜峯書堂) 통문(通文)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
귀봉서당, 옥동서원 |
경상북도 구미시 임오동 |
1922 |
크기: 44 X 87.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
안내정보
1922년 칠곡(漆谷) 귀봉서당(龜峯書堂) 통문(通文)
1922년 칠곡 귀봉서당에서 여헌선생문집을 임의로 수정한 견산 장명상(1865~1937) 등을 규탄하고, 새로이 보완된 판목을 간행하는 것에 대하여 옥동서원에서 도움을 주길 요청하는 통문이다. 통문은 반수 신익균 외 32명이 연명하였는데, 인동장씨 24명, 평산신씨 5명, 동래정씨 2명, 야성송씨 1명, 한양조씨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던 당시에 문집 중간에 참여했던 자들로 짐작된다.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발생하였다. 하나는 장명상이 멋대로 문집의 내용을 고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명상의 사촌 동생들이 마음대로 중간을 위해 제작한 판목을 훼손한 것이었다. 칠곡의 유림들은 이들을 규탄하고 중벌을 결정하였는데, 이들은 잘못을 했음에도 오히려 멋대로 소리치고 힘으로 억압하고 횡포를 부리는 지경에 이렀다. 장명상이 마음대로 고쳐서 문제가 된 내용을 보면 첫째, 원본에 수록된 「무제」 시를 옮기면서 그 내용을 임의로 고쳤다. 둘째, 「무제금」이란 시에 임의로 여러 선현들의 글을 잘라 붙였다. 셋째, 여헌이 지은 「경현록발」을 장명상이 「정문헌공실기발」로 고쳤다. 이외에도 장명상이 잘라서 고친 것이 수십 개의 조목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칠곡 유생들이 이를 수정하여 간행하려고 하는 때에 장명상의 사촌 동생들이 난입하여 판목을 훼손하고, 유생들을 억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칠곡 유생들도 문제가 된 이 세 가지 조목을 그들이 무리하게 첨부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탄하였다. 나아가 부득이 다른 지역 사림들에게도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정을 알리고, 전체 사림이 이들을 규탄하여 문집의 간행이 바로잡힐 수 있도록 도와주길 요청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22년 漆谷 龜峰書堂에서 旅軒先生文集을 임의로 수정한 見山 張命相 등을 聲討하고, 새로이 補板을 내는 것에 玉洞書院에서 도움을 주길 요청하는 通文
1922년 漆谷 龜峰書堂에서 旅軒先生文集을 임의로 수정한 見山 張命相(1865~1937) 등을 聲討하고, 새로이 補板을 내는 것에 玉洞書院에서 도움을 주길 요청하는 通文이다. 통문은 班首 申翊均외 32명이 聯名하였는데, 仁同張氏 24명, 平山申氏 5명, 東萊鄭氏 2명, 冶城宋氏 1명, 漢陽趙氏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오랜 세월 칠곡 지역에 세거하는 성씨들로서 서로 世誼를 다져왔으며, 문제가 발생하던 당시에 文集重刊에 참여했던 자들로 짐작된다.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발생하였다. 하나는 장명상이 멋대로 문집의 내용을 고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명상의 從弟들이 武斷으로 중간을 위해 제작한 판목을 훼손한 것이었다. 칠곡의 유림들은 이들을 聲討하고 重罰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잘못을 했음에도 오히려 멋대로 소리치고 힘으로 억압하고 횡포를 부리는 지경에 이렀다. 그러자 부득이 전체 사림들에게 일의 顚末을 알리고 전체 사림이 이들을 성토하여 문집의 간행이 바로잡힐 수 있도록 도와주길 요청하였다. 통문을 보면 旅軒 張顯光의 文集이 간행된 지 오래되어 판목이 닳아 흩어지고 글자가 조밀하여 1920년에 本孫과 鄕儒가 東洛書院에 모여 重刊을 결정하였다. 이때 한 글자도 더하거나 빼지 않는 뜻을 公議로 정하였다. 이것은 이미 당시의 及門諸賢이 校正한 것을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설혹 그 사이에 한 둘의 의심스러운 사안이 있더라도 망령되이 일의 是非曲直을 헤아려 그 可否를 의논하는 것은 윗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라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판본을 베끼는 날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本孫 張命相이 감히 스스로 영리하다고 여겨 이를 보고 손가는 대로 베끼고, 점을 찍고, 더하고, 삭제해서 글을 지었는데, 나아가 글을 과장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칠곡 유생들은 程頤와 朱子도 선배의 글을 함부로 고치지 않고, 힘써 변명하였는데 이는 대개 선배의 문자로서 신뢰하는 것은 그대로 전하고, 의심하는 것도 그대로 전해야 옳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명상은 몇 글자만 고친 것이 아니라 수십 조목의 글을 고치고, 그 뜻을 왜곡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입장을 바꿔 장명상의 후손이 후대에 先集을 멋대로 고치면 변명도 필요없이 悖孫亂賊이라 불릴 것이라며, 현재 장명상의 입장이 그러하다고 했다. 이에 門中과 鄕中에서 重罰을 이미 내렸다고 한다. 또한 간행하는 일을 마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 1921년(辛酉) 가을에 舊本에 의거하여 東洛書堂에 刊所를 설치하고, 지금 功役을 마치고 마땅히 인출하기만을 헤아리고 있다가 뜻하지 않게 장명상의 從弟 張泌相, 張轍相이 또 相命의 惡習을 이어서 이내 刊所를 엿보다가 사람이 없을 때 文集 6판을 釘으로 뚫고, 칼로 도려내었다고 하였다. 유생들은 이런 일은 실로 옛날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는 변고라고 하였다. 이후 서늘하고 떨리는 심정을 겨우 그치고 모두가 모여 이들을 성토하고 補削하는 것을 완료하였다. 그런데 저들이 도리어 멋대로 소리 지르고 門中과 鄕中을 힘으로 누르고 업신여기고 짓밟음으로써 수백 년 된 서당을 無人之境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칠곡 사림들은 자신들의 誠意가 부족하여 이러한 일에 이르렀다고 한탄하며 전체 사림들이 聲討하는 글을 발현하여 補板의 일을 도모하고, 先師의 문집이 그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이 일의 顚末을 간략히 추려서 聯名하여 아뢴다고 하였다. 통문의 말단에는 문집 내에서 무단으로 수정하여 문제가 되었던 부분을 添錄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제가 된 내용을 보면 첫째, 原本에 수록된 詩를 옮기면서 그 내용을 임의로 고쳤다. 장명상은 敬庵 盧景任(1569~1620)의 문집에 실린 「次盧甥草堂韻」를 고치면서 「無題」라는 했는데, 원래 이 시는 敬庵集 중 「崇巖草堂詩」에 있는 것으로 그 韻이 旅軒의 「無題」 詩와 동일하여, 좌측에 ‘次韻’ 두자를 기록해 놓았다. 또한 「無題唫」은 呂鑑湖의 伊川庄 序文에서 미완성의 시라서 ‘無題唫’이라 하였는데, 이를 장상명이 1901년 봄에 徐思遠, 呂大老 등이 朱子의 시를 分韻하던 것을 본떠서, 여러 賢人의 遺集에서 韻을 추가하여 지었다. 이처럼 시를 멋대로 고친 것뿐만 아니라 旅軒이 지은 「景賢錄跋」을 장명상이 「鄭文獻公實記跋」로 고쳤다. 이것은 旅軒이 文康公 寒暄堂 金宏弼의 碑文과 寒岡 鄭球의 行狀에서 考究하여 지은 것으로, �景賢錄이 한훤당 김굉필과 一蠹 鄭汝昌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나, 旅軒이 발문을 지었을 때는 경현록을 칭하는 것이었다. 그 후 一蠧集�을 간행할 때 文獻公實記를 편입하면서, 이 발문을 실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근거로 장명상이 여헌이 직접 쓴 제목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장명상이 刪改한 것이 수십 개의 조목에 해당되는데, 간행하는 때에 이들 세 가지에 이르러 굴복하지 않고, 그 從弟 필상 등의 무리가 그 뜻을 편들어 간행하려는 판목을 칼로 도려내어 차지하였다고 했다. 이들 유생들 역시 이들이 마찰을 무릅쓰고, 문제가 된 세 가지 조목을 첨부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탄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문집 간행을 두고 발생하였던 是非의 한 사례로서, 旅軒先生文集 重刊 당시의 구체적인 분쟁 사항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여헌집의 重刊 시기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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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去夐遙。聲聞久阻。頃因風便聞校理兄濱命穽擭。又承令宗姪老兄奄忽違世。驚慟交纏。不啻心冷而骨竦。近聽京耗。有天意俯臨。重律稍弛。蒙宥似在屬耳云。未知其然否。窃想大夫人年高戀深。作如何情境。洎退甫扣閤血叫。孝思動人。而摧頓憂悴。幾不支吾。種種馳念亡已。秋事闌珊。謹候僉動止何似。伏惟對序節宣。霽山不顧時諱。敢發言訟師。果不負平日之所期待。當作吾南第一人矣。但鬼輩之誣毁侵辱。以至於撤仁院而愈毒。斯文之汚衊極矣。吾先師泉下之目。將萬世不暝。而丹書之昭洗。無可蘄耶。况景賢錄跋文。爲趙家癡兒見拔云。彼一種毒螫醜詆。寧欲掩耳而不聞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