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세기 초 -중국 길림(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시 완바오팅(萬寶汀) 78호 고분이 축조되다.
고구려의 말안장이 부장되다.
완바오팅 78호 고구려의 말안장은 6세기 초 유물로 추정된다.
★ 요서 라마(喇&)동 고분 II M101 출토의 금동 말안장이 완바오팅 78호 고분 고구려 말안장의 원류이다.
거기에는 비교적 사실적인 용의 무늬가 중앙에
용 한 마리를 두고 좌우대칭으로 다섯씩 모두 11마리가 투조돼 있다.
그 무늬를 극단의 추상적 무늬로 만들면 바로 완바오팅 78호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말안장이 되는 것이다.
서기 514년 - 지증왕이 사망하다. 신라 조정이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추존하다. 이 때부터 신라는 시호를 최초로 쓰기
시작했다.
참고 사료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514년 -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하다.
- 그의 이름은 원종(原宗)으로 김씨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 사료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그의 성은 모씨(募氏)이고 이름은 진(秦)이다.
서기 5 ~ 6 세기 - 와카야마 현 오타니 고분 和歌山?大谷古墳出土에 말 투구가 묻히다.
서기 520년 - 양나라가 고구려 안장왕에게 영,평이주제군사 영동장군의 봉작을 준다.
(영,평 이주는 영주,평주를 말한다. 영주는 요서. 평주는 하북성이다.)
서기 521년 (양 무제 보통(普通) 2년) - 양나라에 신라왕 모태(募泰)가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붙어 사신을 보내
양나라 무제에게 표(表)를 올리고 방물(方物·특산품)을 바쳤다.
신라의 습속은 고려(高麗·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 나무를 새겨 표시로 삼는다.
말은 백제를 거쳐야만 통할 수 있다. -양직공도 신라재기
서기 521년 - 보통普通 2년에 성姓은 모募, 이름은 진泰인 신라 왕(법흥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남사 신라 열전
"신라는 위魏나라 때는 신로新盧라 불렀고, 송宋나라 때는 신라新羅 혹은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남사 신라열전
★ 풍후의 주석 : 백제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 모태 말다왕이다. 어떻게 동성왕의 이름과 법흥왕의 이름이 같은걸까?
이 때 백제의 왕은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 사마융이다.
서기 521년 - 양나라의 무제(武帝)는 무령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서기 522년 - 대가야 왕실이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다.
서기 6세기 초 - 전남 영암군 시종면 태간리 774번지에 '자라봉 고분'이 축조되다.
자라봉 고분은 전방후원분이다.
역시 규슈 일본인 무덤이다.
횡혈식 석실 묘제를 사용했고 , 무덤 주위를 빙 두른 배수로인 주구周溝를 사용했다.
이 고분을 현지에서는 공중에서 내려다본 평면 형태가 마치 목을 내민 자라를 닮았다 해서
자라봉고분이라 일컫는다.
봉분과 주구에서는 일본에서는 하니와(殖輪)라 일컫는 붉은빛이 도는 원통형 토제품 50여 점이 출토됐다.
이들 토제품은 같은 전방후원형 고분들인 광주 명화동과 월계동 1·2호분 출토품과 비교된다
분구(墳丘. 봉분)는 광주 명화동, 월계동 1·2호 전방후원분과 신촌리 9호분, 고흥 안동고분,
무안 덕암고분 등지에서 확인되는 소위 '복발형'에 가까운 공법으로 축조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런 분구 축조 방법은 일본에서는 서일본 지역에서 주로 확인된다.
서기 6세기 초 - 일본 규슈 쿠마모토熊本에서 '후나야마 고분’(船山古墳)이 축조되고 전라도 전방후원분 금동관,
백제 무령왕릉의 금동관과 똑같은 금동관이 부장되다. 전라도 전방후원분,백제 무령왕릉의 금동 못신발과 똑같은
금동 못신발이 부장되다. ‘대왕’(大王) 명문(은상감)이 새겨진 철제 큰칼인 ‘대도’(大刀)가 부장되다.
백제 무령왕릉의 청동거울과 똑같은 청동거울이 부장되다.
- 이 고분은 구마모토현 다마나시 기쿠스이초 에다·熊本縣玉名市菊水町江田에 소재하는 ‘전방후원분'이다.
방패형의 주구 호(周濠:배수로)에 둘려진 즙석, 원통형 하니와(埴輪)로 둘러싸인 갖춘 전방후원분으로서
3단으로 축성되었다.
길이 63m, 후원부(後圓部) 직경 41m, 높이 10m이고, 전방부(前方部)는 남서향이며
폭 40.1m, 높이 7.5m로 양쪽에 돌출부가 있다.
집 모양의 조립식 가형 석관이 고분 안에 안치되어있다. 내부는 2.2m 길이에 너비 1.1m이며 천장 높이가 1.45m이다.
특히 주목되는 부장품은 왕권을 상징하는 금동제 관모와 신발(沓), 한자어로 ‘대왕’(大王) 명문(은상감)이 새겨진
철제 큰칼인 ‘대도’(大刀)이다.
여기서는 청동거울과 두 쌍의 금귀고리, 곡옥, 벽옥, 관구슬 등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신구, 갑옷 등 무구(武具)와
‘삼환령’ 같은 마구(馬具)에 이르기까지 유물 92건(종류)가 출토됐다.
오사카시립대학 사학과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이 고분에서는 신라와 백제계의 금동관, 금동 신발, 금귀고리 등 풍부한 부장품이 동시에 출토됐다.
이곳 후나야마의 수장(首長, 왕 등 지배자, 필자 주)은 신라, 백제 어느 쪽인지 확정할 수 없으나
남조선에 종속했던 사람이 아닌가 한다"라고 말했다.
고분의 주인공이 쓴 환두대도엔
“천하를 다스리는 □□대왕 시대에 대왕의 명령을 떠받드는 관청 사람, 기리(?利)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다.
8월에 커다란 용해 가마(溶解釜)를 사용했다. 4척(尺)짜리 □칼(□刀)을 80번 담금질하여 60번 휘둘러
3재(三才, 우주의 만물)를 만들었다.
이 훌륭한 칼을 몸에 차는 자는 오래 살고 자손도 많을 것이며
그가 거느리는 곳(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리라. 이 칼을 친히 만든 자의 이름은 이태어(伊太於)이며
글자를 쓴 것은 장안(張安)이다.”
이태가(伊太加)는 일본 사람이고 장안(張安)은 대방군 계통 중국인이다”고도 했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발굴된 금동제 관모는 높이 13.6㎝, 밑변 길이 15.1㎝이며 뒷부분에 뱀처럼 구부러진 줄기에 달린
둥근 반구형(半球形)의 장식 금구(金具)가 큰 특징이다.
더구나 이 금동제 관모는 ‘입점리 백제 고분(전방후원분)’(전북 익산시 웅포면)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모와 비슷하며 반구형의 장식 금구까지 달려 있는 것도 똑같다. 그 제작 형식이
전라도 전방후원분,무령왕릉의 금동관모와 매우 유사해 주목된다.
후나야마 고분 출토의 길이 29.7㎝의 금동 신발 역시 입점리 백제 고분 출토 금동 신발과
매우 흡사한 제작 형태를 보이고 있다.
후나야마 고분의 청동거울도 공주 무령왕릉 출토 청동거울의 동물 형상의 부조와 구멍 뚫린 손잡이,
둥근 테두리 장식 부조 등 전체적인 생김새의 제작 양식이 매우 유사하다.
규슈 전방후원분의 규슈 호족 세력이 전라도에 진출하여, 전방후원분을 세우고 전라도를 지배하고
그 문화적 영향이 백제 무령왕릉에까지 미쳤단 증거다.
서기 523년 - 백제 무령왕 '사마 융斯摩 隆'(혹은 여융餘隆)이 62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서기 523년경 - 신라의 작은 노예 촌村(노인촌)이 되버린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사람들이 신라의 핍박을 견디다 못해
울분이 심해졌다.
거벌모라의 노인이자 '일벌' 직위인 '니모리'를 주동으로 하여 '일금지' 직위인 탄지사리 , '파단' 직위인 미의지,
아대혜촌의 나이리, 갈시지촌의 '거ㅁ척' 직위인 나등리 , 남미지촌의 '익사'와 '이즉근리' 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노예들이 이야은성으로 마구 불을 질러댔다.
서기 523년경 - 탁부의 주인이자 신라의 왕인 모진 메르겐 왕(모즉지 매금왕 = 법흥왕)이 울진의 반란 노예들을
진압하러 대군을 출동시켜야되는 수고를 겪다.
모진 메르겐 왕은 '작은 노예 촌'(노인촌)이었던 울진을 '큰 노예 촌'(대노촌)으로 더 낮추어 차별하였다.
서기 523년 - 탁부의 주인이자 신라의 왕인 모진 메르겐 왕(모즉지 매금왕 = 법흥왕)이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입종 갈문왕)을 불러 6부 귀족들과 함께 회의를 열어
울진의 반란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처벌하고 그 내용을 널리 알리는 비석 '울진 봉평비'를 세우기로
결정하다.
서기 524년 정월 15일 - 신라 모진 메르겐 왕,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 ,6부 귀족들의 뜻을 받든
관리들이 울진 반란군을 처벌하는 형벌 집행 전에 얼룩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드리다.
서기 524년 1월 15일(갑진년 정월 15일) - 훼부(탁부) 모즉지 매금왕(신라 법흥왕 모진),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 본피부 무부지간지, 잠탁부의 미흔지 간지,
사탁부의 이점지 태아간지, 길선지 아간지, 일독부지 일길간지, 탁부의 물력지 일길간지, 신육지 거벌간지, 일부지 태나마,
일이지 태나마, 모심지 나마, 사탁부의 십부지나마, 실이지 나마 등이 (명령을) 하교하시고
울진 봉평비蔚珍 鳳坪碑를 세우다.
왕(모즉지 매금왕)께서 별도로 명을 내리셨다. 거벌모라(울진군 중심 지역)의 남미지는 본래 노인
(복속된 지역민을 낮추어 부른 말)이었다.
비록 노인이었으나 앞선 시기에 왕이 크게 법을 내려주시었다.(율령 반포 등을 통해 노인의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주셨다.)
그런데 길이 좁고 오르막도 험난한 이야은성에 불을 내고 성을 에워싸니 대군이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한 자들은 ( 처벌해야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땅을 안전하게 하고 왕을 높일 것이다.)
대노촌은 값 다섯을 함께 부담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여러 노인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하시었다.
신라6부가 얼룩소를 잡아서 (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일을 처리한) 대인은 탁부의
내사지나마, 사탁부의 일등지 나마,
구사 사족지, 탁부의 비수루 사족지, 거벌모라 도사(지방관의 명칭) 졸차 소사제지, 실지(지금의 삼척시)
도사 오루차 소사제지이다.
거벌모라 니모리 일벌, 미의지 파단. 탄지사리 일금지, 아대혜촌 사인(지방관 보좌역) 나이리는 곤장 60대에 처하고,
갈시조촌 사인 나등리 거<글자탈락>척,남미지촌 사인 익<글자탈락>근리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
여즉근리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 실지 군주(주의 장관)인 탁부 개부지 나마가 일을 맡았다. 글 쓴 사람은
모진사리공 길지지와 사탁부 선문 길지지이고,
돌에 새긴 사람은 탁부의 술도 소오제지와 사탁부의 모리지 소오제지이다.
석비를 세운 사람은 탁부 박사이다. 이때에 왕이 하교하시기를 , "만약 이와 같이 하는 자는 하늘에서
죄를 얻으리라."(논어에 나오는 구절)고 하셨다.
거벌모라의 이지파 하간지와 신일지 일척이 살아 있을 적에 일을 마쳤다. 398이다. - 울진봉평신라비
서기 527년 이전 어느 때 - 신라가 임나의 남가라와 탁기탄을 차지하다.
야마토 천황이 신라의 궤씸한 짓에 여러번 신라를 책망하였다.
참고 사료 : 일본서기
서기 529년 - 신라가 탁기탄(啄己呑:경남 밀양)을 멸망시키자 가야 남부지역의 여러 세력들은
대가야를 불신하고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자구책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때 아라가야는 백제·신라·왜(倭)의 사신을 초빙하여 국제회의를 여는 등 세력을 과시하였으나
통합의 움직임은 실패로 돌아갔다.
서기 530~540년 - 신라가 창원의 탁순국을 멸망시키다. 이후 신라 계통의 유물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서기 532년 - 임나가야(금관가야)가 신라 법흥왕에게 흡수당하다.
서기 530년대 후반경 - '양직공도'가 그려지고 양직공도의 부록 '재기'가 기록되다!
- 양나라 무제(武帝)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각국에서 조공을 온 정황을 기록하기 위해 당시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주재하던 소역이 형주에 온 외국인의 용모·풍속을 관찰하고, 경사인 건강(建康)에만 온 사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사람을 보내 조사시켜 편찬한 것이다.
서기 530년대 후반경 - 양나라에 전라도의 규슈 일본계 전방후원분 왕국이 사신을 보내다.
-양직공도에 그려져있다.
서기 530년대 후반경 - 고구려 , 백제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양직공도에 그려져있다.
(고구려 사신)
(백제 사신)
(신라 사신)
서기 530년대 후반경 - 인도가 사신을 보내다.
-양직공도에 그려져있다.
(인도 사신)
서기 530년대 후반경 - 카자흐스탄이 사신을 보내다.
-양직공도에 그려져있다.
(카자흐스탄 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