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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咸鏡道 北靑府
坊里
老德社。 府坐。 四方十里。 民戶八百三戶內, 男二千六百四十六口, 女二千四百七十九口。
學校
鄕校。 在府北三里, 北門外里三角峯前。
老德書院。 白沙李恒福萬曆戊午正月, 抗章謫來, 越五月十三日易簀。 府儒全天則等欽仰忠烈, 通于洪、利、端, 合力建祠於靈德山下, 入享。 而休軒鄭弘翼仍爲追配。 崇禎甲戌, 移建于冠山下, 卽府東八里, 老德社。 再丙寅, 醒翁金德諴追配。 乙丑北御史李徵明入啓, 丁卯賜額老德。 甲戌, 老峯閔鼎重、陽谷吳斗寅, 疏請配享, 而再戊子, 晩庵李尙眞、雙柏堂李世華, 疏請追享。
人物
胡克己。 卽大宋朝名臣文定公季子五峯先生宏之後也。 世居岳陽樓下。 年十九中司馬。 以冬至陪表使, 萬曆庚申自洞庭湖乘舟, 到登州, 遇風飄泊于本朝海西鳳山郡。 仍以淪落北土, 居于府北德城社。 卒于城洞, 子孫仍居焉。 雍正乙巳, 克己之孫斗弼上言駕前, 則親寫名字于淸州華陽洞皇明祠宇錦屛上, 特賜司勇祿, 又以給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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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촌집(塘村集) 황위(黃暐)생년1605년(선조 38)몰년1654년(효종 5)자자휘(子輝)호당촌(塘村)본관장수(長水)특기사항조위한(趙緯韓), 정홍명(鄭弘溟), 김집(金集)의 문인. 윤겸(尹㻩), 유계(兪棨), 이지무(李枝茂), 이기발(李起浡) 등과 교유
塘村集卷之一 / 詩○七言絶句 / 鰲城書院 白沙李相國。昏朝被謫。卒于北靑。人爲之立祠。
인조 | 27 | 1649 | 기축 | 順治 | 6 | 45 | 咸鏡道 都事가 되다. ○ 7월, 부친을 위해 〈陳辨先誣疏〉를 올리다. |
효종 | 3 | 1652 | 임진 | 順治 | 9 | 48 | 10월, 平壤 庶尹이 되다. |
萬丈高峯百尺松。雪中猶保歲寒容。可憐鐵嶺歸雲曲。志士千秋恨豈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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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東溟集) 정두경(鄭斗卿)생년1597년(선조 30)몰년1673년(현종 14)자군평(君平)호동명(東溟)본관온양(溫陽)특기사항정순붕(鄭順朋)의 5대손. 이항복(李恒福)의 문인
東溟先生集卷之三 / 五言律詩 一百四十八首 / 謁北靑白沙相國祠
相國邊城謫。當時雨雪霏。靑松兀受命。白日可爭輝。不召寇萊老。終成丁令威。也知千載下。人有願同歸。
동명집 제4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185수 / 북청에 있는 백사상국사를 배알하다〔謁北靑白沙相國祠〕
상국께서 변성으로 귀양 가던 때 / 相國邊城謫
그 당시에 부슬부슬 눈이 내렸지 / 當時雨雪霏
푸른 솔과 같은 성품 타고났으며 / 靑松元受命
하얀 해와 빛을 다툴 만하였다네 / 白日可爭輝
구래 같은 노인네를 안 불러들여 / 不召冦萊老
이에 끝내 정영위가 되게 했구나 / 終成丁令威
내 알겠네, 천년 세월 흘러간 뒤에 / 也知千載下
공과 함께 돌아가려 할 이 있을 줄 / 人有願同歸
[주-D001] 백사상국사(白沙相國祠) : 북청(北靑)에 있는 노덕서원(老德書院)을 가리킨다. 당쟁으로 인해 1617년(광해군9)에 북청으로 귀양 간 백사 이항복(李恒福)을 추모하기 위하여 1627년(인조5)에 건립하였다.[주-D002] 구래(寇萊) …… 했구나 : 백사 이항복을 귀양지에서 불러들이지 않아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는 뜻이다. 이항복은 1617년(광해군9)에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金氏)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 이어 폐모론이 대두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래는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로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진 구준(寇準)을 가리키는데, 구준은 당시의 대표적인 명상(名相)으로 칭해진다. 정영위(丁令威)는 한나라 요동(遼東) 사람으로 나중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정영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어서는, 천년이 지난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새여, 새여, 정영위여, 집 떠난 지 천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라고 하였다. 《搜神後記》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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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敏求 | 1589 | 1670 | 全州 | 子時 | 東州, 觀海 |
동주집 시집 제3권 / 시(詩)○철성록3(鐵城錄三)
길주 목사 최유해가 청해의 백사 사당에 들러 지은 시의 운자에 맞춰 짓다〔次崔吉州過靑海白沙祠韻〕
사당의 소나무 삼나무 몇 해나 묵었는가 / 遺廟松杉歲幾經
지나던 사람 말 멈추고 영령 참배하네 / 行人駐馬拜英靈
봄가을로 북쪽 땅에 향불 전해 오고 / 春秋北土傳香火
밤낮으로 동쪽 바다에 달과 별이 잠기네 / 日夜東溟浸月星
옛 정신은 푸른 하늘에 의지했고 / 終古精神依碧落
지난날 훈업은 단청에 비추도다 / 向時勳業照丹靑
새 시에 현인 그리는 눈물 뿌리지만 / 新篇一灑懷賢淚
고개 돌려보니 구름 낀 산이 푸르게 막아섰네 / 回首雲山隔翠屛
[주-D001] 최유해(崔有海) : 1588~1641.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대용(大容), 호는 묵수당(默守堂)이다. 1638년 길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宋子大全 卷176 承旨崔公墓碣銘》[주-D002] 청해(靑海)의 …… 시 : 청해는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北靑)을 가리킨다. 백사사(白沙祠)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배향한 노덕서원(老德書院)을 가리킨다. 이민구가 차운한 최유해의 작품은 〈북청에 들러 백사 선생을 그리며 감회가 있었다[過北靑懷白沙先生有感]〉라는 시이다. 《嘿守堂集 卷2》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김문갑 오승준 정만호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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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協 | 1651 | 1708 | 安東 | 仲和 | 農巖, 三洲, 洞陰, 寒碧 | 文簡 |
농암집 제29권 / 제문(祭文)
북청(北靑)에 있는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의 사우(祠宇)에 대한 사액제문(賜額祭文) 충정공(忠貞公) 정홍익(鄭弘翼)과 충정공(忠貞公) 김덕함(金德諴)을 배향하였다.
예로부터 호걸은 / 惟古豪傑
몇 대 만에 나오는데 / 間世乃生
공업(功業)과 절의는 / 勳業節義
각기 길이 다르다네 / 亦各殊程
누가 둘을 겸비했나 / 孰克兼之
오직 우리 경이거니 / 其惟我卿
출사한 처음부터 / 爰初發跡
명성이 뛰어났네 / 已負儁聲
성스러운 선왕께서 인정(仁政)을 베푸시어 / 聖神在宥
걸출한 인재들이 무리 지어 진출하니 / 髦彦彙征
비유하면 가을날 맑디맑은 밤하늘에 / 譬彼秋旻
수많은 뭇별들이 총총히 뜬 듯했네 / 衆星縱橫
우리 경은 그중에서 / 卿在其間
장경처럼 빛났으니 / 爛爲長庚
희문 같은 넓은 도량 / 希文之廓
치규 같은 큰 재목에 / 稚圭之宏
경학으로 수양하여 / 養以經學
고명함이 대단했네 / 蔚然高明
어려운 때를 만나 / 値時之囏
요직에 발탁되어 / 擢秉樞衡
임기응변 책략 내고 / 謨謀應機
동분서주 정성 다해 / 奔走殫誠
중흥의 공 으뜸이라 / 功冠中興
앞설 자가 없었다네 / 莫之與京
엄숙한 묘당이며 / 巖巖廊廟
빛나는 대궐에서 / 赫赫丹靑
경륜을 맘껏 펼쳐 / 肆其彌綸
태평성대 이룰 판에 / 將還太平
태양이 서산에 져 / 日入明夷
천지가 캄캄하니 / 天地晦冥
사특한 간신들이 / 羣姦奰慝
인륜을 어지럽혀 / 斁亂大經
국모를 원수 삼는 / 謂母可讐
사설이 넘쳤건만 / 邪說盈庭
형벌 갖춰 기다리니 / 鼎鑊以胥
나서는 자 없었다네 / 人莫敢攖
경은 그때 초야에서 / 卿時在野
비분강개 터트리며 / 發憤氣盈
의리를 내세우길 / 引義昌言
성난 우레 밝은 태양 그처럼 하였다네 / 雷轟日晶
실추되는 인륜 기강 / 倫綱幾墜
한 손으로 붙잡다가 / 隻手以擎
필마로 북쪽 변방 유배를 가면서도 / 匹馬北戍
겁내거나 놀라는 기색 전혀 없었네 / 不震不驚
머나먼 변방의 거친 풍속 익은 자들 / 逖矣荒俗
공의 기풍 앞 다투어 본보기로 삼았으니 / 爭覩典刑
배우기를 청하여 찾아오는 이들로 / 有來摳衣
문전성시 이루었네 / 踵錯門屛
가르침을 받고 나자 / 經承講畫
배추벌레 벌이 되듯 풍속이 변했으니 / 如化螟蛉
소상강(瀟湘江) 가에 쫓겨난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 匪直湘纍
시름 속에 홀로 깨어 있던 그 일보다 뛰어났네 / 枯槁獨醒
경자일에 올빼미가 방 안으로 날아들어 / 鵩集庚子
경의 정신 기성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 神返箕星
울적한 맘 펴지 못해 / 喑噫未伸
눈물 아직 반짝이리 / 淚睫猶熒
변방 하늘 떠도는 넋 / 關塞楓林
누가 불러 달래줄꼬 / 孰招英靈
유생이며 사대부 애모의 정 끝이 없고 / 衿紳永慕
변방의 몽매한 백성들도 애모하네 / 及于夷氓
사당 세워 제사하니 / 立廟以祀
맘 같음을 알 수 있고 / 可見同情
배향된 이 돌아보니 / 迺睠配列
충정공 두 분일레 / 有二忠貞
절의를 지키어서 / 抗節扶義
세 분 모두 우뚝하니 / 鼎峙崢嶸
한겨울에 푸른 소나무의 지조요 / 大冬松操
뜨거운 불 견뎌내는 무쇠 같은 심지였네 / 烈焰金精
한 시대에 같은 행적 / 幷世同軌
논평 달리 할 수 없어 / 不容異評
한 사당에 제사하니 / 俎豆一室
그야말로 영광인데 / 休有光榮
처소가 멀고 외져 / 惟是僻遠
그 소식을 내 못 들어 / 限于予聽
표창하는 은전을 / 褒表之典
거행하지 못하였네 / 曠不擧行
어떤 이가 아뢰기를 / 有或白予
속히 좋은 이름 내려 / 亟賜嘉名
후인들로 하여금 / 尙俾來者
더욱 존경하게 하라기에 / 益聳瞻聆
관원 시켜 술을 보내 / 遣官馳酹
향기로운 술이며 살진 희생 올리나니 / 牲酒肥馨
영령 행여 있거든 / 不昧者存
부디 흠향하소서 / 歆此尊鉶
[주-D001] 북청(北靑)에 …… 사액제문(賜額祭文) : 작자의 나이 37세 때인 1687년(숙종13)에 지은 것으로, 노덕서원(老德書院)에 대한 사액제문이다. 이항복은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본관은 경주(慶州)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도승지로서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였으며,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맞아들였고 병조 판서로 병권을 잡고 활약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에 올랐고,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 관작이 삭탈되었으며, 이듬해에 북청에 유배되어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은 해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주-D002] 장경(長庚) : 금성(金星)의 별칭이며 태백성(太白星)이라고도 하는데,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주-D003] 희문(希文) : 송 인종(宋仁宗) 때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의 자이다.[주-D004] 치규(稚圭) : 송 인종 때의 명재상 한기(韓琦)의 자이다.[주-D005] 경자일에 …… 말았으니 : 이항복이 죽은 것을 말한다. 경자일에 올빼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한 무제(漢武帝) 때에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된 가의(賈誼)가 3년 뒤인 무제 7년 4월 경자일 저녁에 올빼미가 방 안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했는데, 이항복 또한 벌을 받고 쫓겨나 경자일에 죽었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정신이 기성(箕星)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은(殷)나라 재상 부열(傅說)이 죽어서는 하늘의 별이 되어 동유성(東維星)과 기미성(箕尾星)을 타고 뭇별들과 나란히 있게 되었다는 데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항복의 죽음을 부열에 견주어 한 말이다. 《漢書 卷48 賈誼傳》 《莊子 大宗師》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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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相琦 | 1657 | 1723 | 恩津 | 玉汝 | 玉吾齋 | 文貞 |
옥오재집 제16권 / 제문(祭文)
북청 노덕서원에 성옹 김 선생을 나란히 제향하는 축문〔北靑老德書院醒翁金先生竝享祝文〕
사당을 세운 이후로 충절(忠節) 지킨 분을 함께 모시니 세운 공로(功勞)를 살펴보면 대개 우열(優劣)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누가 처음 발의하여 선생을 제사하기로 하였습니까. 선생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바른 기운 훌륭하게 빛나십니다. 한마디 말로 인륜을 바로 세워 만고에 해와 별처럼 빛나니 같은 시대의 사람들을 낱낱이 헤아려 보면 그 누가 공과 나란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백사(白沙)와 휴암(休菴)이 공과 더불어 동일합니다. 사람들은 그 지조를 일컫지만 공에게는 말단에 불과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척화(斥和)를 주장한 소장(疏章)은 대의(大義)를 분발시켰습니다. 이것으로 배향하는 것이 어찌 나란하다고 하겠습니까. 높이 받드는 의식이 혹 부족하여 지금 새로 함께 제사 지내니 이에 반열을 높이려 합니다. 이미 임금의 재가를 받고 드디어 좋은 날을 골라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려 하니 많은 선비들이 서로 기뻐합니다. 정위에 신주 올려 나란히 모셨습니다. 이에 마땅히 신주를 다시 쓰고 간소하고 향기로운 제수를 바치니 신령이시여, 우리를 멀리하지 말고 흠향하시기를 바랍니다.
[주-D001] 북청 …… 축문 : 노덕서원은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에 있던 서원이다. 1627년(인조5) 지방 유림의 공론으로 이항복(李恒福)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6년(숙종12)에는 이곳에 유배된 바 있었던 김덕함(金德諴)과 정홍익(鄭弘翼)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687년에 ‘노덕(老德)’이라고 사액되었다.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성옹(醒翁)’은 김덕함의 호로 자는 경화(景和), 본관은 상산(商山), 시호는 충정(忠貞)이다.[주-D002] 백사(白沙) :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호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이다. 1617년(광해군9) 이이첨(李爾瞻) 등 강경 대북파가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주-D003] 휴암(休菴) : 정홍익(鄭弘翼, 1571~1626)의 호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익지(翼之)이며, 다른 호는 휴옹(休翁)ㆍ휴헌(休軒)이다. 1617년(광해군9)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극력 반대, 극간하다가 진도, 종성, 광양 등지에 유배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박종훈 오승준 이관성 정만호 (공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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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健命 | 1663 | 1722 | 全州 | 仲剛 | 寒圃齋, 霽月齋 | 忠愍 |
한포재집 제10권 / 제문(祭文)
노덕서원에 노봉과 양곡을 추향하는 고유제문〔老德書院老峰陽谷追享告由祭文〕
높은 산처럼 우러르며 / 高山攸仰
사당을 베풀었노라 / 俎豆攸設
여기 두 현인 계시니 / 爰有二賢
같은 시대에 절개 드러내셨지 / 共世著節
제향은 본래 해 왔지만 / 腏食有素
주벽과 배향이 비로소 구별되니 / 主配始別
선비들이 다 함께 추대해서 / 士論咸推
나란히 배치하길 꺼려 않았지요 / 不嫌竝列
조주의 백성 배울 줄 알게 된 건 / 潮人知學
한문공에게 비롯했으니 / 肇自文公
변방의 백성들 비루하다 하지 않고 / 不鄙荒裔
정사에서 교육을 우선시하셨지요 / 政先牖蒙
예교를 천명하고 / 闡明禮敎
유풍 크게 진작시켰으니 / 丕振儒風
백성들 그 은택 입고 / 民涵其澤
선비들 그 공에 감복했네 / 士服其功
올곧은 신하로 바른말 하여 / 直臣抗辭
실로 윤상을 붙들었으니 / 寔扶倫常
표창과 은총 이미 융숭하여 / 褒寵旣隆
성대한 덕이 빛났어라 / 盛德彌光
명성이 나라 안에 떨치고 / 名振箕域
자취가 동향에 남았으니 / 迹留桐鄕
그 영광 어찌 감히 사사로이 하리오 / 榮豈敢私
그 의리 잊을 수가 없도다 / 義未可忘
송덕과 경모 모두 간절하고 / 誦慕俱切
융숭한 보답이 마땅하니 / 崇報是宜
풍성을 듣고서 공경심 생겨나고 / 聞風起敬
덕에 감동하여 사모하는 마음 피어나네요 / 感德興思
같은 사당 안에서 나란히 아름다우니 / 同堂儷美
훗날에도 다름없으리라 / 無間異時
술잔을 올리며 고하나니 / 薦斝申告
살펴 주시기 바라나이다 / 尙冀監玆
[주-D001] 노덕서원(老德書院) :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에 있던 서원이다. 1627년(인조5) 지방 유림의 공론으로 이항복(李恒福)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1686년(숙종12)에는 이곳에 유배된 바 있었던 김덕함(金德諴)과 정홍익(鄭弘翼)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687년에 ‘노덕(老德)’이라고 사액되었다. 1694년 민정중(閔鼎重)과 오두인(吳斗寅)을, 1708년에 이상진(李尙眞)과 이세화(李世華)를 추가 배향하였다. 민정중의 호가 노봉(老峰)이고, 오두인의 호가 양곡(陽谷)이다. 민정중은 함경도 관찰사, 오두인은 북청 판관을 지냈기에 이곳에 배향되었다.[주-D002] 조주(潮州)의 …… 비롯했으니 : 조주는 중국 동남부인 광동(廣東) 지역이다. 당(唐)나라 때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어 고을 사람들이 워낙 무식한 것을 보고, 진사(進士) 조덕(趙德)에게 그들을 가르치게 한 결과, 선비들이 학문과 행실을 독실하게 닦아 풍속이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東坡全集 卷86 潮州韓文公廟碑》 문공(文公)은 한유(韓愈)의 시호(諡號)인데, 여기서는 민정중이 1664년(현종5)에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문풍을 크게 진작시킨 일을 가리킨다. 《국역 승정원일기 현종 5년 6월 9일》[주-D003] 실로 윤상(倫常)을 붙들었으니 : 오두인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를 반대하여 상소를 올린 일을 가리킨다. 《국역 숙종실록 15년 4월 25일》[주-D004] 표창과 …… 융숭하여 :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오두인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워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케 하였으며, 파주와 양성(陽城)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에 배향한 일 등을 가리킨다. 《明谷集 卷26 贈領議政忠貞吳公墓誌銘》[주-D005] 동향(桐鄕) :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인데, 흔히 자신이 다스리던 고을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한(漢)나라 때 주읍(朱邑)이 어려서 동향의 색부(嗇夫)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사랑하며 존경하였다. 그 뒤 주읍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옛날에 동향의 관리가 되었을 적에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였다. 그러니 반드시 나를 동향에다가 장사 지내라.”라고 하였다. 주읍이 죽자 아들이 동향에다가 장사 지냈는데, 동향의 백성들이 과연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여기서는 오두인이 판관(判官)을 지냈던 북청을 가리킨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채현경 이주형 유영봉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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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農巖集) 김창협(金昌協)생년1651년(효종 2)몰년1708년(숙종 34)자중화(仲和)호동음거사(洞陰居士), 한벽주인(寒碧主人), 삼주(三洲), 농암(農巖)본관안동(安東)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 이단상(李端相), 조성기(趙聖期)의 문인. 노론(老論) 낙론(洛論)의 종장
農巖集卷之二十九 / 祭文 / 北靑文忠公李恒福祠宇賜額祭文 忠貞公鄭弘翼。忠貞公金德諴配。
惟古豪傑。間世乃生。勳業節義。亦各殊程。孰克兼之。其惟我卿。爰初發跡。已負儁聲。聖神在宥。髦彥彙征。譬彼秋旻。衆星縱橫。卿在其間。爛爲長庚。希文之廓。稚圭之宏。養以經學。蔚然高明。値時之囏。擢秉樞衡。謨謀應機。奔走殫誠。功冠中興。莫之與京。巖巖廊廟。赫赫丹靑。肆其彌綸。將還太平。日入明夷。天地晦冥。羣姦奰慝。斁亂大經。謂母可讎。邪說盈庭。鼎鑊以胥。人莫敢攖。卿時在野。發憤氣盈。引義昌言。雷轟日晶。倫綱幾墜。隻手以擎。匹馬北戍。不震不驚。逖矣荒俗。爭覩典刑。有來摳衣。踵錯門屛。經承講畫。如化螟蛉。匪直湘纍。枯槁獨醒。鵩集庚子。神返箕星。喑噫未伸。淚睫猶熒。關塞楓林。孰招英靈。衿紳永慕。及于夷氓。立廟以祀。可見同情。迺睠配列。
有二忠貞。抗節扶義。鼎峙崢嶸。大冬松操。烈焰金精。並世同軌。不容異評。俎豆一室。休有光榮。惟是僻遠。限于予聽。褒表之典。曠不擧行。有或白予。亟賜嘉名。尙俾來者。益聳瞻聆。遣官馳酹。牲酒肥馨。不昧者存。歆此尊鉶。
농암집 제29권 / 제문(祭文)
북청(北靑)에 있는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의 사우(祠宇)에 대한 사액제문(賜額祭文) 충정공(忠貞公) 정홍익(鄭弘翼)과 충정공(忠貞公) 김덕함(金德諴)을 배향하였다.
예로부터 호걸은 / 惟古豪傑
몇 대 만에 나오는데 / 間世乃生
공업(功業)과 절의는 / 勳業節義
각기 길이 다르다네 / 亦各殊程
누가 둘을 겸비했나 / 孰克兼之
오직 우리 경이거니 / 其惟我卿
출사한 처음부터 / 爰初發跡
명성이 뛰어났네 / 已負儁聲
성스러운 선왕께서 인정(仁政)을 베푸시어 / 聖神在宥
걸출한 인재들이 무리 지어 진출하니 / 髦彦彙征
비유하면 가을날 맑디맑은 밤하늘에 / 譬彼秋旻
수많은 뭇별들이 총총히 뜬 듯했네 / 衆星縱橫
우리 경은 그중에서 / 卿在其間
장경처럼 빛났으니 / 爛爲長庚
희문 같은 넓은 도량 / 希文之廓
치규 같은 큰 재목에 / 稚圭之宏
경학으로 수양하여 / 養以經學
고명함이 대단했네 / 蔚然高明
어려운 때를 만나 / 値時之囏
요직에 발탁되어 / 擢秉樞衡
임기응변 책략 내고 / 謨謀應機
동분서주 정성 다해 / 奔走殫誠
중흥의 공 으뜸이라 / 功冠中興
앞설 자가 없었다네 / 莫之與京
엄숙한 묘당이며 / 巖巖廊廟
빛나는 대궐에서 / 赫赫丹靑
경륜을 맘껏 펼쳐 / 肆其彌綸
태평성대 이룰 판에 / 將還太平
태양이 서산에 져 / 日入明夷
천지가 캄캄하니 / 天地晦冥
사특한 간신들이 / 羣姦奰慝
인륜을 어지럽혀 / 斁亂大經
국모를 원수 삼는 / 謂母可讐
사설이 넘쳤건만 / 邪說盈庭
형벌 갖춰 기다리니 / 鼎鑊以胥
나서는 자 없었다네 / 人莫敢攖
경은 그때 초야에서 / 卿時在野
비분강개 터트리며 / 發憤氣盈
의리를 내세우길 / 引義昌言
성난 우레 밝은 태양 그처럼 하였다네 / 雷轟日晶
실추되는 인륜 기강 / 倫綱幾墜
한 손으로 붙잡다가 / 隻手以擎
필마로 북쪽 변방 유배를 가면서도 / 匹馬北戍
겁내거나 놀라는 기색 전혀 없었네 / 不震不驚
머나먼 변방의 거친 풍속 익은 자들 / 逖矣荒俗
공의 기풍 앞 다투어 본보기로 삼았으니 / 爭覩典刑
배우기를 청하여 찾아오는 이들로 / 有來摳衣
문전성시 이루었네 / 踵錯門屛
가르침을 받고 나자 / 經承講畫
배추벌레 벌이 되듯 풍속이 변했으니 / 如化螟蛉
소상강(瀟湘江) 가에 쫓겨난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 匪直湘纍
시름 속에 홀로 깨어 있던 그 일보다 뛰어났네 / 枯槁獨醒
경자일에 올빼미가 방 안으로 날아들어 / 鵩集庚子
경의 정신 기성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 神返箕星
울적한 맘 펴지 못해 / 喑噫未伸
눈물 아직 반짝이리 / 淚睫猶熒
변방 하늘 떠도는 넋 / 關塞楓林
누가 불러 달래줄꼬 / 孰招英靈
유생이며 사대부 애모의 정 끝이 없고 / 衿紳永慕
변방의 몽매한 백성들도 애모하네 / 及于夷氓
사당 세워 제사하니 / 立廟以祀
맘 같음을 알 수 있고 / 可見同情
배향된 이 돌아보니 / 迺睠配列
충정공 두 분일레 / 有二忠貞
절의를 지키어서 / 抗節扶義
세 분 모두 우뚝하니 / 鼎峙崢嶸
한겨울에 푸른 소나무의 지조요 / 大冬松操
뜨거운 불 견뎌내는 무쇠 같은 심지였네 / 烈焰金精
한 시대에 같은 행적 / 幷世同軌
논평 달리 할 수 없어 / 不容異評
한 사당에 제사하니 / 俎豆一室
그야말로 영광인데 / 休有光榮
처소가 멀고 외져 / 惟是僻遠
그 소식을 내 못 들어 / 限于予聽
표창하는 은전을 / 褒表之典
거행하지 못하였네 / 曠不擧行
어떤 이가 아뢰기를 / 有或白予
속히 좋은 이름 내려 / 亟賜嘉名
후인들로 하여금 / 尙俾來者
더욱 존경하게 하라기에 / 益聳瞻聆
관원 시켜 술을 보내 / 遣官馳酹
향기로운 술이며 살진 희생 올리나니 / 牲酒肥馨
영령 행여 있거든 / 不昧者存
부디 흠향하소서 / 歆此尊鉶
[주-D001] 북청(北靑)에 …… 사액제문(賜額祭文) : 작자의 나이 37세 때인 1687년(숙종13)에 지은 것으로, 노덕서원(老德書院)에 대한 사액제문이다. 이항복은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본관은 경주(慶州)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도승지로서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였으며,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맞아들였고 병조 판서로 병권을 잡고 활약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에 올랐고,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 관작이 삭탈되었으며, 이듬해에 북청에 유배되어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은 해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주-D002] 장경(長庚) : 금성(金星)의 별칭이며 태백성(太白星)이라고도 하는데,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주-D003] 희문(希文) : 송 인종(宋仁宗) 때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의 자이다.[주-D004] 치규(稚圭) : 송 인종 때의 명재상 한기(韓琦)의 자이다.[주-D005] 경자일에 …… 말았으니 : 이항복이 죽은 것을 말한다. 경자일에 올빼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한 무제(漢武帝) 때에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된 가의(賈誼)가 3년 뒤인 무제 7년 4월 경자일 저녁에 올빼미가 방 안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했는데, 이항복 또한 벌을 받고 쫓겨나 경자일에 죽었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정신이 기성(箕星)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은(殷)나라 재상 부열(傅說)이 죽어서는 하늘의 별이 되어 동유성(東維星)과 기미성(箕尾星)을 타고 뭇별들과 나란히 있게 되었다는 데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항복의 죽음을 부열에 견주어 한 말이다. 《漢書 卷48 賈誼傳》 《莊子 大宗師》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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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28년 신묘 > 11월 19일 > 최종정보
고종 28년 신묘(1891) 11월 19일(기묘) 맑음
28-11-19[31] 노덕사원에 배향되어 있는 문충공 민정중의 위판을 경학원으로 옮기고 사액을 하사할 것 등을 청하는 북청 유학 조기계 등의 상소
○ 북청(北靑) 유학 조기계(趙基鍥)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현인을 높이고 근본적인 것을 부식(扶植)하는 것은 나라의 큰 전례이며, 스승을 높이고 학문을 진흥시키는 것은 많은 선비들의 이성(彝性)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들은 아득히 먼 지방에 살고 학문이 본래 엉성하고 천박한데, 어찌 감히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을 거론하겠습니까.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정신을 보전하면 온몸이 안정되고, 근저(根柢)를 배양하면 여러 가지가 저절로 무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정신에 의지하여 살고 나무는 뿌리를 땅에 박아 번성합니다. 어진 선비가 나라에 있는 것은 사람에게 정신이 있고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하니 정신을 굳게 가지고 뿌리를 깊이 뻗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열성조에서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사양하는 기풍을 일으킨 교화가 잘 이루어져 아주 성대하였고 사기(士氣)를 부식시키고 사민(斯民)을 양성하여 큰 덕이 아름답고 훌륭하여 천하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종장(宗匠), 현사(賢師), 명신(名臣), 석보(碩輔)가 무수히 배출되었으니, 윗사람은 현명하고 아랫사람은 선량하여 당우(唐虞) 삼대(三代)에 견주더라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은 숙종조(肅宗朝) 때에 직접 강상(綱常)을 책임지고 풍화(風化)를 책임져 태화(太和)를 불러들이고 문교(文敎)를 도와 이루었습니다. 도덕과 정충(貞忠)이 민간에 심대하게 두루 미쳤으니, 무릇 온 나라 여항(閭巷)의 부인(婦人)이나 아이들이 지금까지 흠모하여 잊지 못하며 신들은 더욱 북두(北斗)처럼 우러르는 것입니다. 당시 본도의 감사를 맡았을 때 외지고 먼 변경 지방의 비루한 풍속이 오랫동안 지극한 도를 몰랐으므로 개연히 탄식하고 가장 먼저 학교를 일으킨 다음 곧이어 《가례(家禮)》, 《상례(喪禮)》 등의 책을 교감(校勘)하고, 여러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를 사방으로 널리 초청하여 역참(驛站)의 관사(館舍)에 묵게 한 다음 물품을 보내 주어 기르며 말로 학문을 전수하고 직접 가르쳐 인도하고 고서(古書)의 의리를 강명(講明)하는 데에 하루 종일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만 1년도 못 되어 몸이 단정하고 잘 단련되어 아주 멀고 후미진 지방의 어리석고 완악한 습속을 크게 변화시켜 수업을 받고 송독(誦讀)하는 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밖에 공업(功業)과 교화가 사람들에게 미치고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을 배우고 걸음걸이를 익히는 자도 똑같이 깊이 젖어든 것을 아는데, 남국(南國)의 백성들이 소백(召伯)의 덕을 노래하고 조주(潮州)의 사람들이 한 문공(韓文公)의 은공(恩功)을 기리는 것 같은 정도일 뿐만이 아니니, 장차 집집마다 숭배하고 집집마다 축원할 것입니다.
한 지방의 선비들이 논의가 모두 부합하여 함흥(咸興) 운전서원(雲田書院)에 배향하고 또 본 고을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추가로 배향하였는데, 본 서원은 일곱 현인의 신위(神位)가 안치되어 제향되는 곳으로서 일찍이 선액(宣額)을 받은 곳입니다. 서원을 설치한 초기에 고 상신 문충공 이항복(李恒福)이 주벽(主壁)이 되었고 추후에 충정공(忠貞公) 김덕함(金德諴), 충정공 정홍익(鄭弘翼), 문충공 민정중, 충정공 오두인(吳斗寅), 충정공 이상진(李尙眞), 충숙공(忠肅公) 이세화(李世華) 등 여섯 현인을 올려 배향할 때 조정의 의논이 유신(儒臣) 박세채(朴世采)의 서쪽을 주벽으로 하자는 의논을 그대로 따르고 나란히 벌여 봉안한 여러 신위에 제물을 갖춰 제사 지냈습니다. 73년 뒤인 병술년에 개수하고 물건을 배열하고 도로 모실 때 본 수신(守臣)의 개인적 의견으로 인하여 다시 주된 배위(配位)를 정하였는데 이항복을 주위(主位)로 하였고 그 밖의 다른 신위는 모두 배향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아, 사문(斯文)의 의리로 말하자면 민 문충공(閔文忠公)은 박학하고 예를 세상에 널리 폈으며 높은 덕이 있었고 홀로 충성을 다하였으니, 정(鼎)과 이(彝)에 새기고 태상(太常)에 기록하여 무궁토록 전할 뿐만이 아니라, 실로 마땅히 한 서원의 주향(主享)이 되어 사림이 백세(百世)토록 우러러보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구구하게 다른 서원에 덧붙여 배향되어 도리어 주향과 배향에 끼어들어 있는 형편이니, 사림이 억울해하는 마음을 품고 유감을 품은 지 오래되었지만 더욱 풀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번 신미년에 사당을 철거할 때에 운전서원도 철거되는 서원 가운데에 포함되었으므로 진영(眞影), 의복과 띠, 신과 지팡이를 노덕서원의 한쪽에 옮겨 간직해 두었는데 낮고 협소하며 구차하고 예를 소홀히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진심으로 보건대 불행한 것이 세 가지이고 또한 희망이 있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문충공이 나라에서 본보기가 되고 유림(儒林)에서 모범이 되었으니, 송(宋) 나라의 호전(胡銓), 장준(張浚),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에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우(祠宇)를 철거하여 사기(士氣)가 힘없이 저절로 꺾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첫번째 불행입니다. 문충공이 이 문충공(李文忠公)과 덕이 같고 업(業)이 대등하니 정위(正位)에 올려야 합당한데, 지금 그 왼쪽에 덧붙여 배향함으로써 현인을 높이는 체모를 크게 잃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불행입니다. 또 어리석은 선비나 학문이 낮은 자가 이로 말미암아 의심이 생겨 본업(本業)을 태만히 하여 내버려 두고 거만하게 스스로 방종한 생활을 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문충공이 가르쳐 인도하여 다스린 것이 쓸어버린 듯이 없어지게 된 것이 세 번째 불행입니다. 다시 삼가 생각건대,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고 덕화(德化)가 높고 성하여 무릇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은 떨쳐 일으키지 않은 것이 없으니, 혹 일시적으로 제사를 폐하라는 전교가 있었지만 반드시 결단하여 크게 마음을 돌려 폐한 것을 일으키고 위태한 국면을 구제해 주시어 문충공으로 하여금 이곳에 신위가 안치되어 제향되도록 해 주실 것이니, 하나의 다행입니다. 성상의 감식안이 크게 밝아 구례(舊禮)를 다시 시행하시어 다시 본 고을에 별원(別院)을 설치하고 그 위차(位次)를 바로잡아 노덕서원과 서로 마주 대하고 모두 함께 아름다우니, 이것이 또한 많은 선비의 다행 중 더욱 다행인 것입니다.
아, 문충공이 나라에 대하여 충정(忠貞)을 다 바치고 밝으신 성상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도모하고, 본도(本道)에 대하여 예교(禮敎)를 숭상하고 문학을 크게 천양(闡揚)하였으니, 공리(功利)가 미친 것을 말하면 마땅히 선액(宣額)의 은전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년 사이에 차츰차츰 다른 서원에 배향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태평한 세상에 현인을 높임에 있어 흠전(欠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사문의 의리에 있어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매우 다행스럽게도 기축년 봄에 본도의 도신(道臣) 조병식(趙秉式)이 본 고을의 수신 김유성(金裕成)과 함께 많은 선비를 솔선하여 인도하고 조정의 영을 받들어 부(府)의 동쪽 향로봉(享老峯) 아래 경학원(經學院)을 창설하고 군(郡)의 선비 가운데 준수한 자 30인을 뽑아 두고 마음을 집중하여 학습에 힘쓰는 곳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문원(文垣)의 한장석(韓章錫)이 본도의 관찰사로 부임하여 개연히 사문을 부흥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무릇 기강에 관계되는 일과 유학자에 관계되는 일은 직접 솔선해서 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본 고을의 사론(士論)이 똑같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영학(營學)의 유생을 보내 본 고을의 장보(章甫)와 함께 노덕서원에 간직된 문충공의 진용(眞容)을 경학원으로 옮겨 봉안하여 권도(權道)를 따라 구차하게나마 편안하도록 하려는 계책을 행하였습니다. 서원 한쪽에 안치하였던 것에 비하여는 조금 억울해하는 여론을 위로하였습니다만, 위판(位板)을 옮겨 봉안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신칙을 공손히 기다리며 감히 아래에서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예전대로 봉안하여 두었습니다. 금년 봄에 본 고을의 수신 이승재(李承載)가 다시 도신의 간절하고 지성스러운 뜻을 이어받아 재물을 내어 경학원 안에 집을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성상의 은택이 미친 것으로 도신과 수재(守宰)가 교화를 받들어 봉행한 것입니다. 그 터가 새뜻하고 아름다우며 큰 건물은 크고 널찍하니 존봉(尊奉)하기에 적합하고, 봄가을에 제사 지내는 것은 의절(儀節)을 또한 이미 구비하였으니, 조정에서 사액(賜額)하는 예전(禮典)을 받는다면 적은 재물도 소비하지 않고 밝으신 성상의 현인을 예우하는 예의가 영구히 빛날 것이며 또한 신들이 우러러보고 의지하는 정성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천릿길을 발을 싸매고 달려와 한목소리로 성상께 합동하여 하소연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굽어살피시어 확연(廓然)히 현인을 높이고 근본적인 것을 부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속히 노덕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문충공 민정중의 위판을 즉시 경학원으로 옮기도록 하고, 이어 사액을 하시어 더욱 오래도록 위판을 안치하고 제향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선사(先師)의 위(位)를 바로잡으시고 한편으로는 사림의 억울해하는 마음을 펴 주심으로써 성상의 은택을 노래하고 민정과 풍속을 살펴 흥기할 수 있도록 하신다면, 조정에 매우 다행이고 사문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들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서원의 서쪽에 안치하는 주벽을 누구로 하고 여러 신위를 종사(從祀)하는 것은 유현(儒賢)의 정론(定論)을 따라야 할 것이다. 사액을 청한 것에 이르러서는 당장 의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주-D001] 남국(南國)의 …… 노래하고 : 소백(召伯)이 남국을 순행하면서 문왕(文王)의 정사를 폈는데 그 덕화(德化)가 백성들의 마음에 깊이 들어가서 백성들이 그의 덕을 그리워하며 노래하였다. 《詩傳 召南 甘棠》[주-D002] 조주(潮州)의 …… 기리는 것 : 한 문공(韓文公)은 당(唐) 나라의 한유(韓愈)이다. 한유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갔는데 조주(潮州)의 악어 떼가 백성과 가축을 많이 헤쳐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에 한유가 악어문(鰐魚文)을 지어 타이르니 악어가 감화되어 피해 갔다고 한다. 이러하므로 조주의 사람들이 한유의 은공을 기린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필용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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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北靑)
노덕서원(老德書院) 숭정 갑오년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李恒福)ㆍ김덕함(金德諴)ㆍ정홍익(鄭弘翼)ㆍ이상진(李尙眞)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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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咸鏡道 北靑府
學校
鄕校。 在府北三里, 北門外里三角峯前。
老德書院。 白沙李恒福萬曆戊午正月, 抗章謫來, 越五月十三日易簀。 府儒全天則等欽仰忠烈, 通于洪、利、端, 合力建祠於靈德山下, 入享。 而休軒鄭弘翼仍爲追配。 崇禎甲戌, 移建于冠山下, 卽府東八里, 老德社。 再丙寅, 醒翁金德諴追配。 乙丑北御史李徵明入啓, 丁卯賜額老德。 甲戌, 老峯閔鼎重、陽谷吳斗寅, 疏請配享, 而再戊子, 晩庵李尙眞、雙柏堂李世華, 疏請追享。
여지도서(輿地圖書) 咸鏡道 北靑府
坊里
老德社。 府坐。 四方十里。 民戶八百三戶內, 男二千六百四十六口, 女二千四百七十九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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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정유고(藫庭遺藁) 김려(金鑢)생년1766년(영조 42)몰년1821년(순조 21)자사정(士精)호담정(藫庭), 담사(藫士), 담수(藫叟), 담옹(藫翁), 담원류자(藫園纍子), 한고류자(寒皐纍子), 귀현자(歸玄子), 해고(海皐)본관연안(延安)특기사항이옥(李鈺), 김조순(金祖淳) 등과 교유
藫庭遺藁卷之七 / 坎窞日記 / 北遷日錄
정조 | 21 | 1797 | 정사 | 嘉慶 | 2 | 32 | 부친이 龍潭 縣令으로 나갈 때 모시고 가다. ○ 11월, 姜彛天의 飛語事件에 연좌되어 慶源府에 유배되는 도중 특명으로 富寧으로 移配되다. |
丁巳十一月十二日丁丑。余坐姜彜天飛語獄。辭連被逮。拘留刑曹。
二十七日壬辰。陰霾。過龍岸村。踰三家嶺。午入北靑府。遇大雪不得發行。
是日陰曀。且土雨昏黑。過龍岸村。踰三家嶺。一名霜加嶺。或曰雙嶺。午入北靑。雪霔如雨。府使申學士大尹。方被臺論罷職。有拿命。自官厨供飯。且送酒欵待。使吏傳行李保重之意。是晩大雪。遂不得發行。昔光海丁巳。有金墉之變。白沙李公竄北靑。有詩曰古堠松牌記北靑。板橋西畔少人迎。羣山定欲囚豪傑。回望千峯鎖去程。公以翌年戊午五月十三日庚子。卒于謫所。是行也。終始侍側。捐舘之後。運櫬歸襄。心喪三年者。鄭錦南忠信也。
其後北靑士人。追懷德義。創書院於城外老德社。立祠以享公。號曰老德書院云。
是日余旣以雪不得行。欲馳往拜謁。本府諸吏。以迂路呵禁不許。不勝悵黯。錦南字可行。號晩雲。家世寒微。本系羅州正兵。壬辰之亂。年十七。都元帥權忠莊慄。購人可以奔問行在者。錦南自奮請行。持狀啓。穿倭陣至義州。時白沙方判兵部。一見知爲英才。召置左右。使之讀書。能讀先秦古文。遍交門下名士。如李延陽時白,張新豐維,崔完城鳴吉。皆折輩行屛人地。後奉使建州。察虜情。其酋欲試之。幽於一室而餓之。達夜念書。其聲琅然。乃左傳也。登武科。官至副元帥漢城判尹。以振武元勳。封錦南君。謚忠武。其爲乶下僉使時。有詩曰千年往迹鳥飛間。文肅公碑碧蘚斑。可笑玉門班定遠。幾年辛苦乞生還。可以想見其氣槩也。野史言錦南爲人短小。雙眸炯炯。精彩映發云。是夜。懸燈獨坐。店主人姓葛名輔漢者。乃本府旗牌。頗爽闓多識關北故蹟。語次因言近年以來北靑治績。當以林尙書蓍喆爲第一。歷叙其事。亹亹不已。且曰北靑之民。恩浹骨髓。沒世不忘。因凄然下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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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고략(嘉梧藁略) 이유원(李裕元)생년1814년(순조 14)몰년1888년(고종 25)자경춘(景春)호귤산(橘山), 묵농(墨農)본관경주(慶州)소자육희(六喜)시호충문(忠文)특기사항박규수(朴珪壽), 남병철(南秉哲), 김세균(金世均) 등과 교유
嘉梧藁略冊六 月城李裕元景春著 / 䟽箚 / 辭咸鏡監司。請省先院䟽。
伏以時序遄邁。禮制有限。幽宮永閟。成事奄過。聖慕哀廓。益復靡及。臣於先朝。受恩罔極。而冥頑不滅。未效蓐蟻之忱。徒抱攀髯之恨。南望長號。有淚無從。仍伏念臣歲初陳籲。猥將公私懇迫之情。蘄蒙憫覆曲遂之仁。恩批隆摯。諭之以益勉分憂。臣拚命增惕。靡所止屆。洊瀆是愳。淟涊蟠泊。迄至于命。臣情益急。若窮無歸。不敢自阻於孝理之天。而妄效必呼無隱之義焉。臣之老母年旣癃衰。病又侵尋。經歲關塞。幸以支保者。恩眷攸及。便養適宜也。入此年來。一倍凘綴。政如下瀨之舟挽回不得。兼以北土風氣。寒暄多乖。水泉不服。千里客舘。又經三夏。究之事理。實有深慮。已於月前。奉還京闉。爲在家調將之計。念臣情界不可晷刻離捨。而旣不能納節徑歸。焦迫之私。度日如年。玆敢冒死仰籲。冀倖於聽卑之下。劃賜遞改。俾卽歸護。則臣之母子相依爲命。無往非感頌之日也。且臣有區區私懇。敢此尾陳焉。臣之先祖文忠臣恒福。曾因被謫。畢命於北靑。
而老德書院。卽賜額妥靈之所也。子孫之因公行過此者。輒皆往拜祠版。庸伸追慕。而臣則按藩周年。歷謁路阻。山川入望。心焉如結。計其程塗。不滿二百里之地。如得八九日之假。優可以來往。拚㫌旄而告喜。薦俎豆而展誠。幽明之間。榮感極矣。惟聖明特垂仁惻。仰禀東朝。遞臣之職。許臣之由。爲親爲先。兩得以伸情。卽我聖上初元軆下之政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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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당집(峿堂集) 이상수(李象秀)생년1820년(순조 20)몰년1882년(고종 19)자여인(汝人)호어당(峿堂), 오하(梧下), 산농(山農)본관전주(全州)일명최상(㝡相), 최수(㝡秀)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윤정현(尹定鉉), 박규수(朴珪壽), 신헌(申櫶), 서승보(徐承輔), 임헌회(任憲晦) 등과 교유
峿堂集卷之十三 / 記 / 謁二公遺像記 壬子
北靑故襄烈公靑海伯之所封也。鴈臺祠祀之。白沙李文忠公以謫沒。老德書院祠之。皆奉遺像。白沙眼有稜。眉爲卧蚕。豐厚魁岸而有愁色。遭世禍亂。備經艱危。手障狂流。以身殉義。此宜如泰山之松。磊砢多節。碩大聳秀。足以凌犯風霜。干冒日月。不爲春容之腴澤。獨怪夫靑海奮起邊裔。功冠開國。偉奇特出。百世之下。想見其英風。乃玉面朱唇。端好瑰麗。美男子耳。余謂從者曰。異哉似子房。昔張子房貌如婦人。太史公歎之。公解甲而歸。杜門自晦。固已出常人萬倍。旣又斷髮焚朝服。超然立於禍福之表。一切榮辱。無如公何。殆與謝病辟穀。願從赤松者並駕而遊。故其像亦近之歟。視白沙之貌。稱其人尤奇矣。盖功成而勿居。炳先幾而遐擧。襄烈公全身也。震而不喪。伸大義而俱終。文忠公全節也。二公皆偉人也。其晩節愈不可及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