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필공 . 최필제
- 중인 출신 ‘사학의 괴수’ 와 그 사촌 -
▲ 최필제는 주님 봉헌 축일에 신자들과 그의 약방에 모여
신앙 집회률 갖던 중, 도박 모임으로 오해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최필공 : 1745〜1801, 세례명 토마스, 서소문 밖에서 참수
최필제 : 1769~1801, 세례명 베드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
최필공(崔必燕, 토마스)과 그의 사촌 동생 최필제(崔必除. 베드로)는 중인 신분의 의원 집안 후손으로, 모두 약방을 운영하며 교회 활동을 하였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는 있으나, 1790년에 같이 입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인 사학도의 괴수는 최필공
최필공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은 마혼다섯 살 때였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부지런하고 용맹스러웠다는 그는, 일단 천주교에 입교하자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희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위험을 무를쓰면서까지 공공연하게 선교 활동을 폈다. 큰 거리나 시장 등에서 설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필공의 존재는 곧 박해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791년 진산(珍山) 땅에서 일어난 신해박해가 서울로 비화되자, 최필공은 다른 대표적인 신자들과 함께 체포,투옥되었다. 서울에서 체포된 최인길 - 손경윤 - 현계홈 등 많은 신자들이 당국의 압박과 회유, 그리고 친족들의 읍소와 설득으로 신앙에 등을 돌리고 석방되었으나, 입교한 지 겨우 1년밖에 안된 최필공은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여 박해자가 애를 먹었다고 한다.
당시 정조(正祖)는 천주교를 스스로 생겨나 스스로 없어질 사교(邪敎)로 규정하고,되도록이면 희생자를 내지 않고 회유와 설득을 통해 배교를 받아 내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대표적인 신앙인으로 보고된 최필공을 어떻게 해서든지 배교시키도록 지시하고, 이를 정책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국왕의 특명을 받은 박해자들은 수단 방법을 다 썼으나 그의 신심을 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최필공과 같은 때에 체포되었다가 친족의 호소로 신앙을 접었던 권일신을 보내 간곡하게 설득하였지만, 그의 지조는 꺾이지 않았다. 관에서는 다시 가족을 동원하여 눈물과 울부짖음으로 배교를 호소하도록 명하였다. 이 지경에 이르자 그의 동생 필제가 형을 대신하여 자백서를 꾸며 관에 제출하였다. 관에서 이의 진실 여부를 최필공에게 묻자, 그는 깜짝 놀라며 그 문서가 거짓임을 고하고,동생에게는 “어찌 감히 하늘을 속이는가”라고 크게 꾸짖으며 결단코 배교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다.
최필공의 신앙은 형법의 강제나 동료 신자들의 권고, 그리고 혈육의 간절한 호소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정조는 ‘양반 사학도의 괴수는 권일신이요,중인 사학도의 괴수는 최필공’ 이라는 생각에서,권일신의 굴복을 받아 낸 것처럼 최필공의 배교를 기어이 받아 낼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방법을 바꾸어 “목에 씌운 칼을 풀어 주고, 형조의 옥에 가두어 두되 춥지 않게 해주고, 굶주리지 않게 배려하라”는 명을 내렸다. 참으로 놀라운 특별 조치요 은전이었다. 이른바 ‘사학 무리의 괴수’ 로 지목된 죄인에게,그것도 양반도 아닌 일개 중인에게 생각할 수 없는 이러한 특별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이런 정조의 생각이 옥중의 최필공에게 전해졌는지, 요지부동이던 그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닷새 후에 마음을 고쳐 먹겠다는 의사를 옥리에게 표명하였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까닭을 묻는 관계관에게 그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아니하나, 저에게 베풀어 주신 국왕의 특별한 은전을 생각할 때,그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죽는다는 것은 짐승보다도 못한 일이기에 임금의 명에 따라 마음을 고쳐 먹기로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떠한 악형을 받아도, 동지와 혈육의 호소와 권면을 받아도, 갖은 유혹으로 꼬임을 받아도 당당하게 신앙을 고수하였던 최필공도 충효 윤리를 인륜의 기본으로 삼던 사회에서 자란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놀라운 보고에 접한 정조는 만족해 하며 그 죄를 모두 사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의원 명부에 올려 관서 심약(關西審藥)의 관직에 임명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심약이란 중앙 정부에 납입하는 난개를 관장하는 지방 관직으로,대다수 의원들의 선망의 대 상이 었다. 한편 정 조는 그가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혼인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도록 은전을 베풀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평안도 감사 홍양호가 평양에 부임해 온 최필공을 만나 보고 지은〈최필공전〉(崔必蔣傳)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평안도에 부임한 최필공은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하느님께 등을 돌린 죄책감에 짓눌리는 듯, 우울한 나날에 자괴와 자책의 감정은 날로 깊어졌다.
그러기를 3년여, 마침내 그는 심약의 자리를 사임하고 조용히 서울로 이사온 뒤 천주 신앙으로 돌아오는 용단을 내렸다.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약방 운영
서울로 거처를 옮긴 최필공은 편자동에 약방 문을 열고 배교하였던 유감을 갚기 위해 신심 생활에 힘쓰는 한편,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795년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를 자주 찾아뵙고,최창현,정약종 등 평신도 지도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 가며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을 하였다. 최필공과 같이 교회 초창기에 지도적 활동을 한 중인들 가운데에는 약방을 운영한 신자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약방은 각계각층의 사람이 치료나 약을 구입하기 위해 빈번히 드나드는 곳이어서 여러 부류의 사람과 쉽게 친분을 가질 수 있었고,당국의 주목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선교 대상을 물색하기 쉬웠고, 비밀리에 신앙 집회를 갖기에 매우 적당하였다. 최필공이 서울로 올라와 적극적으로 교회 사업에 나서면서 약방을 운영한 것도,단순히 생활 수단만이 아니라 신앙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열성적으로 교회 활동을 하던 최필공은 1799년 8월 평소 왕래가 있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일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형옥에서 취조를 받게 된 그는 앞서 신해년에 배교했던 일이 본심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당국자들이 최필공의 일로 애를 먹고 있다는 보고에 접한 정조는, 다시금 그의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넌지시 형옥(刑獄)에 들러 최필공을 타이르려고 대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최필공보다 38년 후에 순교한 신태보의 옥중 수기 에 쓰여 있다.
수기에 의하면 정조는 불교와 천주교에 관한 최필공의 생각을 묻고 자중해 주기를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필공은 천주교는 불교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녔다는, 시종 확신에 찬 답변으로 정조의 물음에 의연하게 답하였다. 여러 조항에 걸쳐 주고받은 정조와 중인 사교도와의 문답을 통하여, 다시는 배교하지 않으려는 최필공의 결연한 의지와 수준 높은 학문 정도를 느낄 수 있다. 끝내 불교를 배격하며 천주교가 더 나은 종교임을 역설하는 최필공에게, 정조는 “진리는 스스로 지탱되는 것이니, 매사가 마침내 바른길로 돌아가는 것이다. 더 두고 보자”고 타일렀을 뿐, 처형할 것을 거듭 상소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그를 석방하였다.
이번에도 그는 정조의 특은을 입어 무사할 수 있었다. 양반도 아닌 신분인데다가 하찮은 시정 의원이자 하느님을 고집하는 사교도 최필공에게 베풀어진 정조의 특은은, 단순히 정조의 후덕한 조치로만 생각하기는 어렵다. 인간 최필공의 카리스마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시적 배교를 뉘우친 장렬한 순교.
본격적인 박해에 앞서, 이미 활동이 노출되어 당국의 주목을 받아 오던 몇몇 천주교 신자들은 마침내 1800년 말부터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잠시 배교하였다가 신앙을 돌이킨 최필공도 12월 17일에 다시 체포되었다. 최필공은 여느 신자들보다도 더 심한 악형과 학대를 받아야 했다. 그것은 한때 배교를 약속하고 국왕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 맹세를 파기하고 다시 정부가 금하는 사교를 신봉했고 나아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가해진 형벌은 매우 혹심하였다.
'선왕께서 그를 반드시 사람답게 대우하고자 하신 덕성스러운 뜻은 하늘 처럼 큰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목숨을 보전시키고,심약(審藥)의 직책 을 내려 항산(11産,생활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이나 직업)을 이루게 하였고, 아내를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집을 마련하여 주었으니, 비록 돼지나 물고기나 목석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감화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무지하고 간사하게 , 당초 뉘우치고 사교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것을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 이와 같이 사악한 자는 하루도 살려 둘 수 없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 라 취조관들은 “이전에 분명히 다시는 사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지금 또 사학을 받든다 하니, 그는 사학하는 죄 외에 국왕을 속인 죄까지 범하고 있다”고 규탄하고 나섰다. 이런 비난 속에서 최필공 자신은 국왕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생각할 때 인간적으로 한없이 괴로웠으나, 하느님을 향한 그의 결심을 다시 바꿀수는 없었다.
최필공은 이승훈,정약종 . 최창현 . 홍교만,홍낙민 등 조선 교회를 창설하고, 그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해 온 이들과 함께 2월 26일(양 4월 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최필공은 늙고 많은 병이 든데다가 오랜 옥고로 몸을 가누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에서는 거의 인사불성 상태였지만, 형장이 가까워지자 그의 얼굴에는 한없는 기쁨이 나타났다고 한다. 한편 다른 기록에는 그의 장렬한 순교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렇게도 곧은 성격과 고귀한 진실성으로 선왕의 총애를 받았던 최필공은 결연히 형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형을 집행할 망나니는 아직 경험이 적어서 그의 머리를 단번에 단절하지 못하였
다. 토마스는 손을 자기 상처에 갖다 댔다가 피가 훙건히 젖은 손을 다시 떼어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외쳤다. ‘보배로운 피’ 라고.” 장렬하고 성스러운 교를 한 최필공의 그때 나이는 쉰다섯이었다.
도박 모임으로 오해한 포졸들의 급습.
최필제는 집이 가난하여 약 파는 일을 업으로 삼았는데, 약값이 매우 싸면서도 좋은 약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진실함과 덕성스러움을 따랐다.
그래서 사촌 형 최필공은 비록 나이 차이는 많았으나, 모든 일을 사촌 동생 필제와 의논하였다고 한다.
최필제도 1791년에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당국의 회유와 친족을 앞세운 설득으로 배교하는 유감에 빠졌다. 그러나 박해가 가라앉자 배교를 뉘우치고, 자신이 저지른 유감을 기워 갚을 결심을 다지며 교회 활동을 부지런히 하였다. 최필제 부부의 신앙 생활이 얼마나 진실하고 모범적이었는지는 주문모 신부가 “부부가 같이 정절을 지키며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베드로 부부는 날이 갈수록 지조가 굳어지고 노력함이 더해 가고 있으니 진실로 어진 부부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한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1800년 12월 19일,최필공이 체포된 지 이틀 후에 필제도 불의의 사건으로 여러신자들과 함께 체포되 었다. 그날은 ‘주님 봉헌 축일’ 로, 그를 중심으로 여러 신자들이 큰 거리에 있던 약방에 모여 신앙 집회를 갖고 있었다. 첨례 중 가슴을 치며 기도를 합송하고 있을 때,마침 한성부의 순라군들이 지나가다 그 소리를 듣고, 정부가 금하는 도박 모임이라 여겨 집회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투전 패는 찾지 못하고 천주교의 축일표만 압수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던 순라군들이 그 정체를 알고 다시 집회 장소인 약방을 급습하였을 때는, 대다수의 신자들이 도망간 뒤라 최필제와 오현달만 체포할 수 있었다.
최필제는 포도청과 의금부 옥에서 심한 악형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두 번 다시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그의 지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연로한 그의 아버지가 선종하였다는 비보가 옥중으로 날아들었다. 최필제는 죄인으로 옥에 갇힌 몸이지만 돌아가신 부친의 장례를 지낼 수 있도록 가출옥 허가를 신청하였다. 당시의 법속(法!谷)에 따라 그의 가출옥을 허가한 관계 당국자는,돌아올 날짜를 정해 주면서 한편으로는 이 기회에 도망칠 것을 넌지시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최필제는 장례를 치른 후, 약속한 날에 죽음이 기다리는 옥으로 스스로 돌아와 모두틀 놀라게 하였다. 그는 옥으로 돌아오기 전 몇몇 친구들에게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이전에 내가 배교했던 유감을 기워 갚기를 원하여 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얻기를 바라는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내 머리를 바치는 일이다”라고 자신의 굳은 의지와 순교할 뜻을 밝혔다. 마침내 최필제는 4월 2일(양14일) 몇몇 남녀 신자들과 더불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