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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사도행전 19:29-32
에베소는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로 불리는 아데미 여신과 그 신전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아데미 신전이 아무리 거대하고, 또 그 속에 있는 아데미 여신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유방을 24개나 달고 있다고 해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바울이 보기에 그것은 단순한 금속과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실을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에베소에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다닌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이 없이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뿐만 아니라 오늘날 튀르키예 대륙의 서부지역을 일컫는 아시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우상을 섬기던 자리에서 주님을 믿는 자리에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마법사들도 주님을 영접하고 은 5만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의 마법 책들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렸습니다.
한 도시에서 이처럼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인간의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함께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상과 성적 타락으로 죽어가던 에베소가 복음 앞에 다시 새롭게 거듭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은으로 아데미 여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팔아 풍족한 생활의 부와 번영을 누리던 에베소의 은세공업자들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울 때문에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 여신에게 등을 돌리는 사태를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그동안 자신들이 누려왔던 풍족한 생활이 위협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세공업자들의 우두머리였던 데메드리오는 자신의 동업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들을 충동질했습니다. 그는 교묘하게 아데미의 신전이 무시를 당하고, 아데미 여신의 위엄이 추락할 위험을 부각시켰습니다. 그가 겉으로 내세웠던 명분은 당시 소아시아 반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데미 여신의 위엄과 그 신전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본심은 바울 때문에 자신들의 영업이 천하여질 뿐 아니라, 그동안 아데미 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누려왔던 풍족한 생활이 위협 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데메드리오의 본심은 동업자들을 충동질해서 바울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자신들이 누려왔던 풍족한 생활의 부와 번영을 그대로 고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악한 행동은 데메드리오만의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인을 고용했던 주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면서 내걸었던 명분도 그랬습니다. 귀신들린 여인을 고용해서 돈벌이를 했던 주인들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그 여인의 생명이나 인권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돈이었습니다. 주인들은 그 여인이 계속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점을 쳐주면서 많은 돈을 벌어주기만 하면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온 떠내기 바울이 그 여인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버림으로써 더 이상 그 여인을 통해 돈벌이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바울을 우격다짐으로 붙잡아 장터에 있는 관리들에게로 끌고 가면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경제적 이권에 눈이 먼 이기적이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에서의 데메드리오와 은세공업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데메드리오의 동업자들은 데메드리오의 충동질에 간단하게 선동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자신들의 풍족한 생활의 부와 번영을 위협하는 바울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분노에 가득 찬 그들은 “에베소 사람들의 위대한 아데미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들이 아데미 여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외친 것은 아데미 여신과 신전을 명분으로 내세운 데메드리오의 의도에 동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말로 ‘외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아데미 여신의 이름을 한두 번 부르고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 “에베소 사람들의 위대한 아데미여!”라고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벌이며 소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살인이나 강도, 혹은 성폭행과 같은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은세공업자인 데메드리오가 그렇게 앞장서서 나설 리도 없었겠지만, 설령 나섰다고 할지라도 그는 바울이 저지른 흉악한 범죄 그 사실만으로 그를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업자들은 바울을 제거하기 위해 에베소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아데미 여신과 그 신전을 명분으로 앞세웠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행위 역시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이 세상의 부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는 거짓에 기인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명분’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의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본분입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명분’의 두 번째 의미는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나 구실로써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나 구실은 거의 대부분이 속마음과는 동떨어진 거짓이거나 허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명분’은 두 번째 부정적인 의미의 명분입니다.
사람은 진실과 멀어질수록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에 더 집착하고, 거짓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내세우는 명분은 더 거창하거나 구체적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야욕이나 이해득실과 당리당략에 밝은 정치인들일수록 언제나 거창하게 국민의 뜻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그 국민 속에 정작 국민이 포함되어 있다고 느껴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국민의 뜻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의 실제 언행과는 거리가 먼 명분에 불과할 따름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진실, 혹은 사실에서 벗어나 거짓이나 허구에 기인한 명분을 내세우는 사람은 그 허구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폭력을 수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거짓이 갖는 속성입니다. 거짓은 폭력에 의해서만 지탱이 됩니다. 빌립보의 귀신들린 여인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돈벌이가 되는 일에 장애가 되는 바울을 제거하기 위해 무리들을 충동질해서 우격다짐으로 바울을 장터로 끌고 가서 고발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막대한 돈을 벌어주었던 사업의 원천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자 바울에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업자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2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본문에서 우리말로 ‘요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마치 홍수 때 물이 갑자기 밀려들듯이, 바울을 반대하는 은세공업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워 온 성읍이 몹시 혼란스러워진 모습에 대한 묘사입니다. 바울을 제거하기 위해 아데미 여신과 신전을 명분으로 내걸었던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업자들 탓에 에베소에는 일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폭도로 변한 무리들은 바울을 잡으려고 했지만 바울이 안보이자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붙들어 야외극장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붙들어’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완력으로 낚아채는 형국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달려 들어가는지라’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맹렬히 앞으로 돌진하다’라는 뜻으로, 앞뒤를 재지 않고 이성을 내버려둔 채 그냥 돌진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완력으로 낚아챈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끌고 야외극장 안으로 돌진해 달려 들어간 것입니다. 이들의 행동은 이성의 지배를 뛰어넘은 다른 세력의 지배 하에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발작과도 같은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이렇게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업자들로부터 곤경을 당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 두 사람이 “바울과 같이 다녔다”는 이유였습니다. 원문의 표현으로 보면, 이들 두 사람은 바울과 특별히 친밀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말로 ‘같이 다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단순히 ‘여행을 함께 하는 동료’라는 의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들 두 사람을 가리켜 ‘친구’나 ‘제자’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사이가 아주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사람은 바울과 같이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서 큰 곤경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아데미 여신과 신전을 명분으로 내걸었던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업자들이 그 정도로 폭력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명분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명분은 이미 허구이기 때문에 그 허구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든지 물리적인 힘과 폭력을 동원하는 길 이외의 다른 방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본문에 등장한 2,000년 전 에베소의 은세공업자들과 이 땅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참과 동떨어진 거짓은 언제나 명분을 필요로 하고, 거짓에 기반을 둔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이든 반드시 폭력을 수반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진리는 결코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명분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진리는 겉과 속이 다른 거짓과는 달리, 겉과 속이 일치하는 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개인의 명분을 내세우고, 자기 개인의 명분에 집착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까? 가는 곳마다 온갖 폭력에 시달렸던 바울이었지만, 자신이 당한 폭력을 사랑의 명분하에 정당화시켜 주거나, 혹은 바울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우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울은 진리이신 주님을 쫓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신의 명분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진리 위에 세워져 있지 않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허구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지금 누구에겐가 우리가 폭력이라고 자각하지도 못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명분을 필요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영원한 진리이심을 명분이 아니라,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이미 영으로 임재하여 계시고, 벌써부터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품어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그 주님을 의지해서 우리 자신의 명분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십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거짓된 삶을 위장하는 허울 좋은 명분에서 벗어나 모든 형태의 거짓과 폭력을 단호하게 배격하는 이 시대의 바울로 살아갈 수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3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바울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폭도들에게 붙잡혀 야외극장으로 끌려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동역자들이 끌려갔다는데,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가만히 있을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즉시 폭도들이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고 들어간 그 야외극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순결한 양심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던 바울은 조금도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약의 경우 두 사람과 운명을 같이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베소의 제자들이 바울을 말렸습니다. 바울이 사나운 짐승과 같은 폭도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것을 제자들이 알면서도 바울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말리고’라는 헬라어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폭도들이 있는 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하는 바울과 그 바울을 말리는 에베소의 제자들 사이에 밀고 당기는 승강이가 계속 벌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당시의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또한 에베소의 제자들이 바울을 얼마나 존경하고 아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로마제국은 당시 많은 식민지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종교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즉 자신들의 식민지에 황제의 신전과 로마의 다이아나 여신의 신전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황제와 여신을 숭배하게 함으로써 로마제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게 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러한 통치에 필요한 관리들을 세웠는데, 그들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관리’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우리말로 ‘아시아의 관리’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시아의 대제사장’이라는 의미로, 에베소와 에베소가 속한 아시아 지역을 총괄하는 제관이었습니다. 이들 제관은 아시아의 여러 식민지에서 가장 존경할만하고 부유한 시민들 중에서 황제 신전과 다이아나 신전을 관장하는 정치적 종교적 책임을 맡은 상당한 고위 관리였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에베소에서 바울의 복음이 상류층에까지 전파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제관 가운데 바울과 친구 사이로 지내는 한 제관이 바울에게 폭도들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의 뜻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의 뜻을 접은 이유는 단지 친구로 지내던 제관이 자신을 말렸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가 바울에게 에베소의 서기장이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미 출동했으니까 성급하게 폭도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말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32절은 그 시각에 야외극장 안에서 벌어진 일을 밝혀주고 있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우리는 이 본문을 “온 시내가 요란하였다”라는 29절의 장면과 연결하여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0년 전 에베소의 중심부에는 ‘아카디안 대로’가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폭 11미터에 대리석으로 포장된 도로는 항구에서부터 아데미 신전을 거쳐 야외극장까지 이르는 대로입니다. 이 도로 양편에는 에베소 최고의 상점들이 계속 이어져 있었습니다. ‘상가’를 뜻하는 ‘아케이드’라는 단어가 바로 이 도로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에베소에는 앞의 사진에서 보듯이 아카디안 대로의 일부가 옛 모습 그대로 잘 발굴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의 어느 장소에선가 데메드리오에게 선동을 당한 은세공업자들은 분노에 차서 계속 “에베소 사람들의 위대한 아데미여!”라고 아데미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아카디안 대로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대로는 상가가 밀접한 에베소의 중심 대로인 데다가 원근 각처에서 아데미 신전을 찾는 참배객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로였기 때문에 항상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뛰쳐나온 에베소의 은세공업자들은 분비는 인파들 속에서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불문곡직하고 이들 두 사람을 완력으로 붙잡아서 아카디안 대로의 인파를 뚫고 야외극장 안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에베소의 중심부인 아카디안 대로에서 난리가 난 것이었습니다.
본문 29절이 “온 시내가 요란하였다”라고 증언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폭력은 늘 흥미로운 볼거리입니다. 아카디안 대로를 가득 메운 인파들 역시 아데미를 연호하며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완력으로 끌고 가는 은세공업자들의 무리를 뒤따라 야외극장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오늘날 원형 그대로 발굴되어 있는 에베소의 야외극장은 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야외극장이었습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야외 집회장소가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완력으로 낚아챈 그들이 하필 대규모의 야외극장으로 끌고 간 것은 아카디안 대로로부터 그들을 따라간 인파가 그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음을 의미합니다.
야외극장에 몰려든 에베소의 인파는 군중심리에 빠져서 함께 함성을 질러댔습니다. 함성 소리는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을 것이고, 그 함성 소리에 더 많은 인파가 야외극장 안으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외치는 함성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졌을 것은 눈에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그런데 그들이 소리쳐 외치는 내용은 저마다 다 달랐습니다. 본문 3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본문에서 우리말로 ‘태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많은 수’를 뜻합니다. 당시 2만 5천석 규모의 야외극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소리를 질러대었고, 그들의 함성 소리는 에베소의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왜 그곳에 몰려와 있으며, 자신들이 왜 그토록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인 무리가 …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폭도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성과 자신들의 목적을 상실한 집단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분란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통 속에 들어 있는 물을 쏟아 부을 때에 땅바닥에 부딪힌 물이 튀어 오르거나 사방으로 흩어지는 혼란스러운 형국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누가는 그들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외극장으로 밀려들어간 엄청난 군중들이 저마다 큰 소리를 질러댔는데도 의견이 통일되거나, 뭔가 일치된 해답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땅에 부딪힌 물이 사방으로 튀거나 흩어져 버리듯이 야외극장 안의 군중들은 점점 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외극장 안에 모였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엄청난 소요를 일으켜야만 했던 이유와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그 이유는 폭동을 주도했던 데메드리오가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7절에서 폭동을 일으켰던 데메드리오는 어느샌가 사라져서 큰 소요가 일어난 이후에는 전혀 그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안전에 상당히 예민했던 데메드리오는 시위가 자신의 생각보다 격렬해지자 슬그머니 몸을 피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외극장에 몰려든 군중들은 자기 발로 극장에 몰려가서 자기 입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기가 왜 거기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미련한 군중들의 모습을 오늘의 본문에서 처음 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이나 능력으로 해방을 쟁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의 자비로운 배려로 혹독한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묶어두려고 했던 바로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노예로부터의 자유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향하여야 할 목적지는 오직 한 곳, 언약의 땅 가나안이었습니다. 언약의 땅에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속에 있을 때에만 이 세상의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를 넘어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땅에서 제사장 나라의 백성으로써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갈 자유를 만끽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먼저 정탐꾼을 보내어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자고 요청을 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열두 명의 정탐꾼들로 하여금 가나안의 지형과 정세를 살펴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40일 만에 돌아온 열두 정탐꾼들의 보고 내용은 일치하지 않아서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얼마나 장대한지 그들 앞에서 자신들은 스스로 메뚜기처럼 느꼈다고 말하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선동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나머지 두 정탐꾼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원주민이 아무리 거인처럼 장대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하면서 조금도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 다수결의 원칙에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열 정탐꾼들의 보고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밤새도록 통곡했습니다.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것은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며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물음에 조금이라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즉시 소중한 자유를 박탈당한 채 혹독한 노예살이의 압제와 고통만이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가나안 진군을 주장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도 역시 자신들이 왜 가데스 바네아에 서 있는지, 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미련한 군중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진리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언약의 땅 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두고서도 영영 상실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군중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2,000년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신 주님의 이적을 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으로 하여금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씻게 하심으로 세상을 보게 해 주신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인근 마을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소문을 듣고 열광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선동을 받은 그들은 불의한 강도였던 바라바를 풀어주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왜 그곳에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친 예수님이 대체 누구이신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군중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3,400년전 언약의 땅을 눈앞에 두고서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치며 통곡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2,000년전 불의한 강도는 풀어주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쳤던 예루살렘의 군중들, 나아가 야외극장에서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무슨 영문인지를 알지 못했던 본문의 에베소의 군중들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1,400년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가데스 바네아와 예루살렘, 에베소라는 공간의 차이도 있습니다. 각각 다른 세 공간에 운집했던 군중들도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적, 공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은 자기 존재와 언행의 의미와 까닭도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동일한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들 군중 속에 지식이 탁월한 사람이 왜 없었겠습니까? 누구보다도 계수에 밝고 사업 수완이 뛰어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도력과 예술적 창작력을 지닌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다 한데 어우러져서 자기 존재와 언행의 의미와 까닭도 모르는 미련한 군중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본문 32절을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본문에서 우리말로 ‘알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일차적인 의미는 ‘눈으로 보다’입니다. 에베소의 야외극장에 모여 소리를 질러댄 군중들은 자신들이 왜 그곳에 모여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지를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왜 그곳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것은, 알고 모름의 지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고도 보지 못함의 시각적인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단 하나의 외눈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두 개의 눈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단면적인 면이 아닙니다. 멀고 가까운 원근, 튀어나오고 들어간 요철, 높고 낮은 고저, 크고 작은 대소가 입체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루는 낮과 밤으로 구분되고, 시간은 어제와 오늘, 내일,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집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가 있는가 하면,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외눈만으로는 속에 감추어진 본질은 고사하고, 겉으로 드러난 눈앞의 현상조차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눈을 주신 까닭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두 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말은 “나에게는 눈이 있다”고 항상 눈을 단수형으로만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눈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지니고 있는 두 눈들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과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는 인간의 눈이 복수형인 ‘눈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한 눈이 아니라, 두 눈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정탐꾼들의 선동에 빠져 애굽의 노예살이로 되돌아가자고 했던 것은 현실에 사로잡힌 하나의 눈만을 가지고 있을 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과 그 언약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은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두 개의 눈들을 달고 있었지만 실은 외눈박이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던 군중들이나 본문의 야외극장에서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면서 소리를 질러댔던 에베소의 군중들도 모두 하나님과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 외눈박이들이었음은 매 한 가지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새벽빛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상대방의 웃음 속에 가려진 슬픈 눈물을 읽는 또 하나의 눈을, 정의의 구호 속에 감추어진 거짓을 분별하는 또 하나의 눈을, 군중의 함성 속에 파묻힌 진실을 헤아리는 또 하나의 눈을, 보이는 현실 너머에 보이지 않는 영원을 직시하는 또 하나의 눈을, 어떤 상황 속에서든 이미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시선을 마주치는 또 하나의 눈을 지니고 살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눈들로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존재와 자기 인생마저 상실한 채 누군가의 선동에 좌지우지 당하는 미련한 군중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루 6,000건의 광고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텔레비전, 신문, SNS, 도로, 전신주 등 온 천지가 광고로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광고가 신제품을 알리는 홍보수단이었는데, 이제는 광고가 홍보 차원을 넘어 세상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동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두 눈들을 지니고서도 외눈박이로 살아가면 이 세상의 무차별적인 선동의 억압과 굴레에 갇혀 깨어 있는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눈으로는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다른 한 눈은 하나님께 고정하면서 살아가십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적 시력을 회복하십시다. 육신의 시력은 점점 흐려져도, 영적인 시력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갖 선동과 억압과 굴레에 갇힌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균형 잡힌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드리십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갖 선동과 불안과 절망의 굴레와 억압 속에 빠져 있는 세상의 군중들을 건져내는 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