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리 성지
주소 경북 문경시 문경읍 하리 2-1 교구 안동교구
진안리 성지는 영남의 관문인 새재와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해 있으며 사목보고차 서울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최양업 신부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이다.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곳)/하초리(새재 관문이 있는 곳의 지명으로 최양업신부, 강깔레 신부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통로)소백산맥 중 문경지방과 충정도 경계지역에 있는 주흘산(1109m), 조령산(1107m), 백화산(1063.5m), 대미산(1,115m)등은 이 지방에서 최고봉에 속하는 산들로서 조령(634m), 이화령(548m), 하늘재 등은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이름난 통로로서 숱한 전설과 애환이 서려 있다.
특히 일명 "새재" 라고 하는 조령(鳥嶺)은 옛날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이다. 그러므로 조선조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인 조령관이 서 있는데 각각 약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과거는 물론, 최양업신부와 깔레 강신부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는 최양업신부가 사목보고차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이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는 증조부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구교우 집안에 태어 났으며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는 1839년 기해박해때 순교했다.
한편 그는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서 최방재(사베리오)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가서 신학공부를 한 뒤 한국교회에서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1849년 4월 15일에 중국의 강남 교구장 마레스카 주교에세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해(1849년) 12월 변문을 떠나 입국에 성공하였다. 실로 입국을 시도한지 다섯 번째인 7년 6개월만에 입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후 12년 동안 매년 5,000리-7,000리를 걸어 다니면서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교우촌과 외교인들이 살고 있는 반촌과 빈촌을 사도 바오로 처럼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찾아 다녔고 그렇게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59년 말부터 1860년 경신박해를 맞아 경남 언양의 간월산 동굴에서 3개월간 피신을 하였고 마침내 1860년 8월 박해가 끝난 후에 매일 80리-100리를 걸으면서 밀린 교구방문과 사목활동을 하고서 그 이듬해인 1861년 6월에 서울에 계시는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보고를 하러 서울로 가다가 문경새재와 이화령 고개의 넓은 갈림길인 문경시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집에서 약주 몇잔과 황육(소고기)을 잡수시고 크게 취하시어 말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자 모시고 있던 복사가 ‘너무나 불편하신 모양이니 이 문경 읍내의 평창 이씨라는 교우 한 집이 괘약(약국)을 하고 있사오니 그 집으로 갑시다’하고 간곡히 권고하여 그 집에서 치료를 받으셨으나 원체 과로로 몸이 쇠약한데다 장티푸스의 합병증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셨다.
선종하시기 8-9시간 전에 여기서 170-180리 떨어진 배론 신학교의 뿌르띠에 신부가 달려와서 병자성사를 주었고 그때 최신부님은 의식은 있었으나 말은 못하고 다만 아주 열성적으로 예수 마리아의 두 이름을 되풀이 하며 부르다가 선종하셨다. 그리하여 뿌르띠에 신부의 지도로 상여를 꾸며 배론으로 운구하여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뒷산에 안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