弘齋全書卷六 / 詩二 / 謁思陵志感
龍旂拂拂曙光寒。靈雨新添十里灘。小子敢言當日事。天心曾卜萬年安。
東峰曉月瞻燕院。杜宇春風感越壇。兩地仙鄕知不隔。更看楓柏露漙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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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1권 / 시(詩)○어정(御定) 갱화록(賡和錄) 삼가 〈어정범례(御定凡例)〉에 따라 유고의 각 편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수합하여 이 〈갱화록〉을 만들었다.
9월에 상께서 사릉을 참배하고 칠언율시를 써서 내렸다. 명을 받들어 화운해 올리다〔九月 上展拜思陵 書下御製七律 承命賡進〕
하늘이 임금 위해 날씨도 아니 춥고 / 天爲宸衷未肯寒
노송 위엔 오색구름 여울엔 달그림자 / 彩雲籠檜月橫灘
예부터 정도 권도 모두 성인 일이었고 / 經權自古同歸聖
오늘날 감정 예의 두 가지 다 온전하네 / 情禮于今兩得安
동쪽의 이 산길을 어가(御駕)가 찾아오니 / 騩御不迷東峽路
과주의 제단 앞에 눈물이 맺히었네 / 鮫珠新結果州壇
왕가의 능침 나무 흥건하게 젖은 이슬 / 漢家陵樹離離露
이 이슬 몇 움큼을 군왕께 바치고파 / 采獻君前幾掬漙
[주-C001] 갱화록(賡和錄) : 채제공이 죽은 이듬해인 1800년(정조24)에 정조가 채제공의 유고 초고를 살펴보고 〈어정범례(御定凡例)〉라는 편집 지침을 내렸다. 그 내용에 의하면, 각 편에 흩어져 있는 임금의 시에 화운한 작품들을 모아 따로 한 편을 만들고 그 이름을 ‘갱화록’이라 하여 책머리의 처음 표제어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어정(御定)’이란 임금이 정한 것이란 뜻으로, ‘갱화록’이란 편명을 정조가 정했다는 것이다. ‘갱화’는 순 임금이 “대신들이 즐겁게 국사를 펴면, 군왕도 그로 인해 떨쳐 일어나, 백관의 공이 모두 넓어지리라.[股肱喜哉, 元首起哉, 百工熈哉.]”라고 노래하자, 고요(皋陶)가 그 뒤를 이어 “군왕께서 뛰어나 지혜로우면, 대신들이 어질고 재능 발휘해, 모든 일 편안하여 순조로우리.[元首明哉, 股肱良哉, 庶事康哉.]”라고 노래하였다는 데서 생긴 말로, 신하가 임금의 시에 화운하는 것을 말한다. 《樊巖集 御定凡例》 《書經 虞書 益稷》[주-D001] 9월에 …… 올리다 : 신해년(1791, 정조15) 9월 25일 정조가 경기 양주(楊州) 진건읍(眞乾邑) 사릉리(思陵里)에 있는 사릉(思陵)을 참배할 적에 지은 시에 차운한 것이다. 사릉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능호이다.[주-D002] 예부터 …… 온전하네 : 정도(正道)는 세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왕통의 정당성을, 권도(權道)는 단종을 복위시킨 것을 가리킨다. 정도와 권도가 모두 성인의 일이었다는 것은 숙종과 정조가 조선의 왕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시킨 일을 말하고, 감정과 예의가 모두 온전하다는 것은 단종과 정순왕후에 대해 동정(同情)을 보이는 것이 애도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국가의 의례로 행해졌음을 말한다.[주-D003] 과주(果州)의 …… 맺히었네 : 원문의 ‘교주(鮫珠)’는 인어인 교인(鮫人)의 눈물이라는 뜻인 교루(鮫淚)와 같다. 흔히 자기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용어로 쓰인다. 원문의 ‘과주단(果州壇)’은 ‘동협로(東峽路)’의 대구이므로 ‘과천(果川) 고을 제단’으로 풀이할 수 있으나 양주의 사릉과는 지리적으로 완전하게 부합하지 않으므로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치 않다.[주-D004] 왕가의 …… 바치고파 : 원문의 ‘한가(漢家)’는 한(漢)나라 왕가라는 뜻인데, 조선의 왕가를 그에 견주어 한 말이다. 사릉 주위의 수목에 흥건하게 내려앉은 이슬을, 억울하고 비참하게 살다 죽은 정순왕후의 한 맺힌 눈물로 간주하고, 이것을 두 손에 받아 임금에게 바침으로써 그 한스러운 감정을 임금에게 전해 주고 싶다는 뜻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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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석관유집 제1책 / 시(詩)
사릉에 행행하고 난가(鑾駕)를 돌려 능동을 나올 적에 지은 어제시(御製詩)에 화운하다〔思陵幸行 回鑾出陵洞 御製賡韻〕 신해년(1791, 정조15)에 직각(直閣)으로 있을 때 화운하여 올린 시가 분실되었으므로 병진년(1796)에 추후로 제진(製進)하였다.
난가를 맞는 송백에는 서리가 아직 안 내리고 / 迎鑾杉檜未霜寒
회가(回駕)하는 교외에는 여울에 빗방울 소리 / 回蹕郊原雨響灘
능원 표시 보묵은 큰 바위에 새겨져 있고 / 寶墨院標穹石在
주구는 하늘이 지어 침궁이 편안하다오 / 珠邱天作寢宮安
거룩한 조정은 뜻을 이어 의례에 빠진 것이 없고 / 聖朝志繼儀無闕
공주의 저택은 은혜 깊어 제사 올리는 단이 있네 / 主第恩深祀有壇
백월의 꽃을 보고 귀신도 감응했으리니 / 百越看花神理格
훈호하여 이슬꽃이 흠뻑 맺게 하리라 / 焄蒿應結露華漙
漙 이슬 많을 단
[주-D001] 주구(珠邱) : 능침(陵寢)이 있는 구역을 말한다. 중국 고대의 성왕(聖王)인 순(舜) 임금을 창오(蒼梧)의 들판에 장사 지내자, 참새 모양의 새들이 입에 푸른 사주(砂珠)를 물고 와서 떨어뜨려 구슬 언덕〔珠邱〕을 만들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拾遺記 虞舜》[주-D002] 백월(百越)의 꽃 : 향불을 말한다. 향이 빨갛게 타들어 가는 것을 꽃으로 비유한 것이다. 명나라 구준(丘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에 “옛날에는 지금 세상에서 쓰는 향(香)이 없었다. 한(漢)나라 이전에는 단지 난초와 지초와 쑥과 발 따위를 태웠을 뿐인데, 뒤에 백월이 중국으로 편입되면서 비로소 있게 되었다. 이것이 비록 옛날의 예법이 아니기는 하지만, 통용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귀신도 편안하게 여길 것이다.〔古無今世之香 漢以前只是焚蘭芷蕭茇之類 後百粤入中國始有之 雖非古禮 然通行已久 鬼神亦安之矣〕”라는 말이 나온다.[주-D003] 훈호(焄蒿) : 제품(祭品)의 기미(氣味)가 위로 퍼져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그 기운이 발산하여 위로 날아 올라가서, 소명하고 훈호하고 처창함이 된다.〔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해설에 “귀신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 소명이고, 그 기운이 위로 퍼져 올라가는 것이 훈호이고, 사람의 정신을 오싹하게 하는 것이 처창이다.〔鬼神之露光處是昭明 其氣蒸上處是焄蒿 使人精神竦動處是悽愴〕”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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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 영조 46년 경인 > 윤 5월 9일 > 최종정보
영조 46년 경인(1770) 윤 5월 9일(갑인)
46-윤05-09[03] 운남군 진이 사릉에 비각이 없는 일로 상소하다
운남군(雲南君) 이진(李榗)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동서 각릉(各陵)에 비(碑)를 후일에 세운 것은, 곧 우리 성상(聖上)께서 즉위(卽位)하신 뒤에 처음으로 시행한 바인데, 사릉(思陵)에 있어서는 유독 비석이 없으니, 후일 설치할 때에 어찌하여 이 일에는 미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장릉(莊陵)에는 어필(御筆)의 비석이 있다고 하는데, 장릉과 사릉 두 능은 의리(義理)에 있어 다름이 없습니다. 선조(先朝)의 어제시(御製詩)에 이르기를, ‘능명(陵名)을 추상(追上)하니 곧 장릉과 사릉인데, 묘도(墓道)의 석물(石物)은 모두 후릉(厚陵)ㆍ경릉(敬陵)의 의식에 따랐네.[陵名追上卽莊思 象設皆從厚敬儀]’라 하였고, 어주(御註)에 이르기를, ‘석물(石物)의 체제는 후릉에 따르고, 수효는 경릉에 따랐다.’ 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우리 성고(聖考)께서 정축년에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특명하신 성전(盛典)은 만세(萬世)에 내세울 만한 일이요, 그 높이 받드는 의식에 있어서도 두 능에 차이가 없음은 곧 이 어제시에서 성의(聖意)의 소재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더구나 후릉과 경릉의 비석도 성상께서 을해년에 뒤따라 세우셨으나, 유독 사릉에만 지금까지 빠졌습니다. 원하건대 미처 시행하지 못한 성전을 속히 거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정릉(貞陵)에 비각(碑閣)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상고하여 아뢰라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정릉에 비를 세운 사실이 없고, 지장(誌狀)에 먼저 기재하라고 특명하였다고 한다. 어찌 다만 정릉과 사릉뿐이겠는가? 공릉(恭陵)ㆍ순릉(順陵)ㆍ온릉(溫陵)의 경우 모두 지장에는 기재되었으나, 비는 세우지 않았는데, 이것이 어찌 다만 세울 겨를이 없어서 그러하였겠는가? 일의 체통이 매우 그렇지 않으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먼저 동쪽의 두 능과, 다음에 서쪽의 세 능에 곧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주-D001] 사릉(思陵) : 단종 비(端宗妃) 정순 왕후(定順王后)의 능.[주-D002] 장릉(莊陵) : 단종(端宗)의 능.[주-D003] 후릉(厚陵) : 정종(定宗)과 그 비 정안 왕후(定安王后)의 능.[주-D004] 경릉(敬陵) : 덕종(德宗)과 그 비의 능.[주-D005] 정축년 : 1697 숙종 23년.[주-D006] 을해년 : 1755 영조 31년.[주-D007] 정릉(貞陵) : 태조(太祖)의 계비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능.[주-D008] 공릉(恭陵) : 예종 비(睿宗妃) 장순 왕후(章順王后)의 능.[주-D009] 순릉(順陵) : 성종 비(成宗妃)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능.[주-D010] 온릉(溫陵) : 중종 비(中宗妃)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능.[주-D011] 의조(儀曹) : 예조.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홍혁기 (역) | 1993
○雲南君 榗上疏言:
"東西各陵追建碑, 卽我聖上臨御後所創行, 而至於思陵, 獨無碑石, 未知追設之時, 何以不及於此? 曾聞莊陵則有御筆碑石, 莊ㆍ思兩陵, 義無異同。 先朝御製詩曰, 陵名追上, 卽莊ㆍ思, 象設皆從厚 敬儀, 御註曰, 石物體制, 從厚陵, 數從敬陵。 臣竊惟我聖考丁丑特命復位之盛, 可以有辭於萬世, 而若其崇奉之儀, 無間於二陵, 卽此御製詩, 而可見聖意之攸存矣。 又況厚陵。 敬陵碑石, 亦於聖上乙亥年追建, 而獨於思陵, 至今闕焉。 伏願亟擧未遑之典。"
上命考奏貞陵碑閣有無, 仍敎曰: "貞陵無建碑之事, 誌狀特命先載云。 而豈特貞陵ㆍ思陵ㆍ恭陵ㆍ順陵ㆍ溫陵, 皆載誌狀, 而俱不建碑, 此豈但未遑? 事體大不然, 令儀曹, 先東二陵, 次西三陵, 卽爲擧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