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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탄절을 준비하고 싶다(4)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주옵소서
2024년 12월 1일 / 마 5:7, 눅 5:1-11
마 5: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 세상 부귀 안일함과
❶ 세상 부귀 안일함과 세상 근심하다가 주님 나를 찾으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근심 버리고 두손 들고 눈물로써 주만 따라 가오리다. ❷ 세상 일에 얽매어서 세상 일만 하다가 주님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권세 버리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만 따라 가오리다. ❸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주님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며 무어라 하실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영광 버리고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만 따라 가오리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만 따라 가오리다.
만일 베드로에게 ‘위의 복음성가에 볼 때에 어떤 생각이 나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대답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다. 폭이 넓게, 속이 깊게, 길이가 길게 사랑을 베풀게 되었다.
■ 천사를 대접할 때(창 18:1-15) / 반 건조 기후 사막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아브라함은 어느 날 낮에 집 앞으로 지나가는 세 명의 나그네들을 발견하였다. 그는 세 사람이 그의 장막 문 가까이 와서 섰을 때에 장막에서 달려 나가서 영접하고 몸을 땅에 굽히고 말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3-5절)’ 그때에 ‘그리하라’고 하는 나그네의 대답이 떨어지자 아브라함은 기쁘게 다시금 그들을 위해 송아지를 잡고 잔칫상을 차리게 된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아브라함이 이 같은 환대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아브라함이 살아가는 믿음의 삶의 모습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남겨 둔 채로 정처 없이 떠났다. 나그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광야 한복판에서 지치고 기진한 나그네들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나그네를 돌보는 일을 했다. 아브라함이 대접하는 요리를 배불리 먹은 나그네들은 아브라함에게 느닷없이 아내가 어디있는지 물었다. 아브라함은 ‘예! 장막 안에 아내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내년 이맘 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에 있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났지만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그 약속이 되는 아들이 없었다. 아브라함도 사라의 신체 조건이 나이가 들어 출산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때에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긍휼을 실천하는 순간, 내년 이 맘 때에 아들이 있으리라는 축복의 선언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얻은 아들이 '이삭'이다. 그 이름 해당하는 히브리말의 의미는 ‘웃었다’이다. 이유인즉 자신의 신체 조건을 알고 있는 사라가 나그네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장막 뒤에서 웃었기 때문이다.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절)
▣ 긍휼을 베푸는 삶 / 긍휼 없는 죄는 긍휼 없는 형벌을 받는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산다. 차머스라는 분이 쓴 「정오의 강풍」이라는 소설이 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런 얘기이다. 건축 기사인 피어홈은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을 건설했다. 이 때문에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질병과 실패로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여 산다. 피어홈의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은 매우 사나운 개를 기르고 있어 피어홈은 늘 위협을 느꼈다. 피어홈은 개가 너무 사납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히려 번번이 피어홈은 모욕만 당했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왔다. 그 개가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인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개 주인인 노인을 비난했다. 파종기가 되었지만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다. 그 노인은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오히려 노인이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은 냉소하였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본 피어홈은 다음날 아침 일찍 광에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다. 얼마쯤 지나자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다.
긍휼은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한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진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베푼 후에 내가 손해보는 일이다.
▣ 하나님의 긍휼 /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우화적인 이야기를 담아 놓은 책이 있다. 이 책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기 직전에 먼저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천사인 ‘의의 천사’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의 천사가 대답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 인간들은 온갖 불의로 이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천사인 ‘거룩의 천사’라는 이름의 천사에게 똑같은 질문했다. 거룩의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됩니다. 그 인간들은 이 세상을 더러움으로 가득 채워 놓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천사인 ‘빛의 천사’를 불러 또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빛의 천사는 ‘하나님, 절대로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됩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번째 천사인 ‘긍휼의 천사’를 불러서 또 다시 질문을 했다. ‘내가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긍휼의 천사는 다른 천사와는 전혀 다르게 대답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 이 세상은 불의하고 더러워지고 어두움에 잠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불의와 더러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저는 기어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과 긍휼로 돌보시며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도저히 상대하고 싶지 않은 그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향해서 다가오시고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신다.
▣ 판사의 긍휼 /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 뉴욕을 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다. 그런데 뉴욕에는 케네디 공항 외에 또 하나의 공항이 있다. 그 공항은 라구아디아 공항이다. 본래 이 라구아디아라는 이름은 뉴욕 시민이 아주 사랑했던 유명한 한 시장의 이름이다. 라구아디아는 시장이 되기 전에 아주 유명한 명 판사였다. 추운 겨울 어느 날 한번은 라구아디아 판사가 재판석상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노인은 추운 겨울에 가족들 없이 외롭게 사는 분이었다. 그는 돈도 없고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다른 사람의 지갑에서 20불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판결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판사가 그 노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노인장!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했다. ‘판사님, 저에게 한 번만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잠시 동안 그 노인장을 조용히 굽어보던 판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맞습니다. 노인장에게는 정말 긍휼이 필요하시군요. 그러나 노인이 잘못한 그 20불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침 제게 10불이 있군요. 제가 이 10불을 노인장을 대신해서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장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둔 데에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불이 더 필요한데 여기 계신, 이 법정에 계신, 방청하시는 여러분, 우리 사회와 여러분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파 방황하도록 그리고 도둑질하도록 버려둔 데에 여러분도 공동 책임이 있습니다. 이 노인을 위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기부를 좀 하시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 재판관의 명 판결을 보고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여 그 노인을 구했다. 그 후 뉴욕 시민들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긍휼이 많은 판사’라고 인정하였고 그는 후일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다.
▣ 율법대신 긍휼로 /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겉치레에만 사로잡혀 상처 입은 세상에 긍휼의 손길을 뻗치는 데 실패한다면 하나님은 매우 불쾌해하신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일을 ‘행하는 것’에 너무 바빴던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1-13).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 절기, 그리고 종교 의식들이 다 속임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행한 일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행치 않은 것’들 때문에 말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긍휼이 필요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 1960-70년대에 고압적인 종교적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예수는 좋다. 그러나 교회는 싫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그들이 예수님과 교회를 이렇게 구분하게 된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는 교회 속에만 고립된 채, 하나님의 긍휼 어린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 자신을 단절시켜 버리진 않는가? 그렇다면 그건 바로 바리새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이 아닌 은혜로, 긍휼로 이웃을 대하길 원하신다.
▣ 인류를 구원하신 위대한 긍휼 / 학가다는 유대인의 민족 문학서 또는 민족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유대인들의 최대 축제인 유월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 있다가 탈출하여 유대로 귀환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로, 학가다는 유월절의 환희와 소중함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다.’ 세계 어느 민족사에서 이와 같이 굴욕적인 패배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예가 있을까? 더욱이 제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라 ‘해방되었다’라고 수동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해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 곧 사람들의 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패배 속에서도 살아남게 한 비결이었다. 세상의 모든 문명은 다른 민족에게 정복되는 즉시 사라졌지만, 유대 문명은 이러한 태도 때문에 수천 년 전에 잃어버린 땅을 오늘날에 다시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고귀한 태생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구원은 바로 우리 자신이 처참한 죄인의 후예임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복음은 자신이 이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인간의 가장 큰 긍휼은 그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킬 때 참된 해방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팔복의 다섯 번째 가르침은 긍휼히 여기는 자에 관한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이 말은 우리가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길 원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경험과 상관없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 상관없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미 입었기 때문이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분의 긍휼하심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다른 영혼에 대해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성도는 상처 입은 치료자(Wounded healer)이다.
고난과 고통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절망하며 생명까지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의 긍휼로 인하여 회복된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위로해 주신 그 위로로 다른 영혼들을 위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요한복음 3:16절에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사랑일 것이다. 거저 주시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요 3: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8에서 바울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였다.
롬 5: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에베소서 2:4-5을 보면 이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엡 2:4-5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리고 예수님 역시 이 긍휼의 마음으로 이 땅에서 많은 사역들을 감당하셨다.
마 9:36 /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나고, 그 사랑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품은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그가 곧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품은 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며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히 여기며 사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불쌍히 생각하고 마음으로만 측은히 여기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빌립보서 2:5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긍휼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는데 이어지는 6절 이하는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빌 2:6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의 마음은 ‘내가 좀 나으니까 불쌍히 여겨줘야지! 내가 측은히 여겨줘야지!’ 하는 마음이 아니다. 예수님은 단지 불쌍히 여기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죄악된 세상에 내려오셨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음이 아닌 위에서 내려오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긍휼의 마음이다. 그래서 긍휼을 ‘함께’라는 의미의 com과 ‘고난’, ‘고통’이라는 뜻의 passion의 합성어인 compassion이라고 말한다. 고난의 자리에서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다.
▶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는 긍휼을 베푸는 삶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해 주셨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성으로 가는 중에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곁을 지나가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반면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갔다. 마음이 움직였고 발도 움직였다. 뿐만 아니라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 치료해 주었다.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그 사람을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다. 심지어 여관 주인에게 이틀 치 품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까지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는 것도 모자라 돈이 모자라면 내가 돌아올 때 더 주겠다고까지 이야기했다. 이때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물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긍휼을 베푸는 삶이다. 긍휼을 베푸는 삶에는 수고가 따른다. 시간을 들여야 하며 물질을 내어놓아야 한다. 내가 전혀 손해보지 않으면서, 내가 전혀 수고하지 않으면서 단지 동정만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그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처럼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긍휼을 베푸는 삶, 긍휼히 여기는 자의 모습이다.
로마서 1:29 이하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의한 자들의 모습 21가지가 나오는데, 이 중에서 마지막 두 가지가 바로 무정한 자와 무자비한 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길 원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셔서 나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다른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나 자신만이 아닌 나의 식구들 그리고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과 주변의 이웃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교회는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공동체이다. 기쁜 일에 함께 웃고 슬픈 일에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곳이다. 나의 삶에 어려움이 있고 기도의 제목이 있는데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면 그것은 신앙의 큰 위기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직 믿지 않는 그들을 향한 불쌍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가서 생명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인 긍휼을 품고 삶 속에서 자비를 베풀며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마음껏 누리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결론을 이렇게 맺고 싶다.
베드로는 누가복음 5:1-11에서 평생토록 마음에 깊이 되새김질을 하게 하는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예수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❶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많은 군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왔다. 그런데 어부들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호숫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 배들 중 시몬의 배에 오르셨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셔서 피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씀을 전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베드로를 향한 말씀이 많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왜 베드로의 배를 타셨을까? 그 당시에는 ‘그럴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겠지만 나중에는 베드로는 자기를 사랑하사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개무량(感慨無量)하였을 것이다.
❷ 말씀을 다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제 깊은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 그러면 많은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사 이에 시몬은 ‘선생님, 저희가 어제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시 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그물이 가득차서 찢어질 지경이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소리쳐 도움을 청하였다. 배가 가라 앉을 정도로 곧 두 배에 고기가 가득 찼다.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보면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곧 배를 호숫가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과감히 예수님을 따라 제자의 길을 갔고 후일에는 사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베드로는 모든 염려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렇게까지 긍휼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베드로는 사도의 길을 기쁨으로 갈 수가 있었다. 연약한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가게되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마치며 금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구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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