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2024.08.25일 주일 낮 예배
말씀:갈라디아서 6:7-8 KRV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제목: 스스로 속이지 말라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은혜찬양: 서로 사랑하라
- 들어가는 말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날마다 수고하고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현실적 목표는 각자도생입니다. 누가 책임져 주는 사람이 없는 고독한 현대인의 질고입니다.
그 질고는 누가 져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야박하고 치열한 경쟁의 시대가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고 어떤 미국인이 말합니다. 우울한 나라에서 우울한 백성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에 사도바울은 자기의 살(육체)을 기쁘게 하려 함은 그 살에 멸망이요 영을 기쁘게 하려 함은 영생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살에 기쁨이 되지 않는 단어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우울이라는 증세입니다 사전적으로 우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울(憂鬱, 영어: depression)은 활동력 저하를 특징으로 하는 정신적 상태 (mental breakdown)를 가리킨다.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변화가 생겨 '부정적인 감정'이 나타난다. 주로 우울한 기분, 정신활동의 저하, 초조와 번민, 식욕 저하, 수면의 증가 또는 감소, 불안감 등이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하는 길을 말씀에서 찾아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마음의 갑옷을 입으라
베드로전서 4:1-2 말씀에 보면;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가 당하는 최악의 고난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 가장 큰 고난은 그것을 잃는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셨을 때 가지셨던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죽음을 당하셨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셨나요? “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ㄱㄱ는 “죄를 위하여”입니다. 죄를 정복하기 위해, 죄의 사슬을 끊기 위해,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죄가 없으셨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께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의인으로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스스로의 죄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를 이겨내기 위해 질고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질고라는 말은 현실 사회에서 잘 쓰이지 아니하지만 말씀에 나오는 "질고(疾苦)" 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괴로움, 외로움, 아픔, 슬픔... 등을 뜻하며 이러한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병(病)" 이라고도 하며 또한 마음의 병(病)은 우리의 육신(몸)도 병들게 하여 여러 질병이 생기기도 하고 질환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가장 우울한 민족이라고 쓰디쓴 말을 한 어떤 미국인의 말입니다. 자기가 우울하다고 생각합니까? 노멘.
오늘 우리 만나인은 우울한 성도가 아니라는 것을 주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줄을 믿습니다.
아멘
2. 심는대로 거두리라
잠언 11:18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고린도후서 9:6에는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어찌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시는 거룩한 아버지 하나님을 감히 소홀히(만홀)하는 만나인은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아버지라 하지 않고 겉으로는 주여 주여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실제 자기판단과 자기 아집으로 살아가는 배역자가 있습니까? 노멘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 하는 것을 보면 완전히 자기 만족적 교만으로 살아가는 허울만 그리스도인들이 허다합니다.
오바댜 사도는 말합니다. 옵1:3"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오바댜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네가 높은 산악 지대에 산다고 해서 ‘누가 나를 아래로 끌어내릴 수 있겠느냐?’ 하고 말하지만 너는 네 교만에 속고 있다. 네가 비록 독수리처럼 높이 올라 네 보금자리를 별 사이에 만들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릴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현재 자기의 위치가 좀 낫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을 본문에서 질타하고 있습니다.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했습니다. 우선은 내가 배부르고 등따스우니 세상부러울 것이 없는 것같아도 심판의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십니다.
오바댜서는 구약 성경 중에서 단 1장으로 끝나는 가장 짧은 예언서입니다. 그러나 1장 안에는 에돔의 타락에 대한 심판과 백성들에 대한 회개 촉구와 하나님의 구원계속이 분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에돔은 유다가 멸망할 때 주변 나라들과 힘을 합해서 유다를 향하여 불의를 행했습니다.에돔이 볼 때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있는 유다를 버려야 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불만과 부정적인 생각을 습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부정적인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 조건으로 삼는다면 내게 불행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예루살렘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는 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편에 서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강한 자, 큰 자와 손을 잡아야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약하게 보여 진다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의 편에 줄을 서야 큰 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과 겸손의 편에 줄을 서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32: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
18세기 미국의 영적 대각성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배당에 모인 명목뿐인 교인들을 향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강력히 설교했다. 이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며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돌아오는 은혜를 누렸다. 지금이 은혜의 때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 원하는 교회, 영혼을 살리는 은혜에 붙잡히길 바라는 교회, 참된 부흥이 일어나길 소망하는 교회에서 이 책을 함께 읽는다면, 다만 주께 돌아올 뿐 아니라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참된 신자들의 모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3. 스스로 속이지 말라
인간은 죄의 노예로 죽을 때까지 살다가 결국 멸망을 향해 가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를 위해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죄를 찾아간다면 이것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인연이 끊어진 사람이고, 죄에 매일 필요도 없고 종노릇할 필요도 없는 사람입니다. 죄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잘 아는 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1-2).
부모가 받는 죄의 유혹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소명 가운데 부모 역할을 하는 것은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께 이끌도록 부르심을 받지만,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본성적인 거역, 곧 그들의 교만, 이기심, 죄에 대한 무심한 타락과 욕망, 아담으로부터 유전 받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끝없는 자괴감,. 본성적인 죄악성의 이런 공세에 맞서 부모는 자녀를 훈련시키고 자녀가 위험에 빠지지 않아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이 소명의식, 부모는 자녀의 죄악성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악성을 무릅쓰고 자신의 소명에도 순종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전념해서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일을 자녀에게 기대해야 하고, 자신이 계속 싸우고 있는 삶의 분야에서 자녀가 불순종할 때 징계해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부모는 위선자처럼 느끼고, 양심이 괴롭고, 자녀를 교정시켜야 하는 모든 시간이 매우 무겁게 다가온다. 자기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변명이 전혀 없지만, 자신도 극복하려고 싸우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부모가 자녀의 죄를 묵인하는 것은 다만 그 죄를 더 조장할 뿐이다. 부모는 자녀를 징계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부모는 끊임없이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이 꺼지지 않도록 부채질해야 합니다. 사실 이 말은 목회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은 부모의 역할이요 목회자의 임무입니다. 교회목사 아무나 못합니다. 목사라는 가면을 쓰고 양떼를 모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모습들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놀렐루야~
목회자는 더 많은 유혹에 빠집니다. ‘만약 마귀가 한 사람의 목회자를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의 목회자를 탐욕과 욕정에 빠뜨릴 수만 있다면, 그는 이를 통해 무지막지한 침략을 가할 계V획을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존경하는 리차드 벡스터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리차드 벡스터, 참목자상). 내가 처음 신학을 하면서 그것도 MDV 신학대학원은 그야 말로 목사 연수원이라고 해야 되는 대학원인데, 이 때 접한 책이 벡스터목사님의 책이었습니다.
목회자의 자리는 정말 힘든 자리입니다. 항상 승리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저 역시 넘어지고 죄와 싸우고 있기에 이 자리에 서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경건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수많은 유혹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저는 모든 죄의 유혹을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죄로 인해 넘어지면 끝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전투에서 종종 패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무장해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매순간 전쟁 중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신명기 32:35말씀은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가슴에 못박고 다녀야 합니다.
맺음
갈라디아서 5:16-2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미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5장에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며, 6장은 “성령을 위하여” 심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은 우리가 따라 걸어야 하는 길로, 또는 씨를 뿌리는 밭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5-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3: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만나인은 성령의 것만 생각하고 사는 나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더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우리 만나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전5:16-18입니다. 함께 봉독하면서 이 시간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