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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합의 원리, 용해의 미학 -산림문학{계간평]
결합의 원리, 용해의 미학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문학의 원리는 곳곳에 늘려 있다. 문학의 속성 네 가지는 참신성, 형상성, 함축성, 탄력성이다. 참신성은 이 네 가지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다. 그만큼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 걸까? 한마디로 발상의 전환에서 나온다. ‘순질이화’라고나 할까. 가왕 나훈아가 ‘테스형’이란 노래를 가지고 다시 세상의 문을 두드렸을 때, 아무도 ‘테스’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인 줄 몰랐을 것이다. 물론 나훈아는 결합의 원리보다 ’분해의 원리‘를 적용해서 낯익은 것을 낯설게 했던 것이다. ’분해의 원리나 ‘나 ’결합‘의 원리나 같은 원리다. 나누고 붙이고가 따로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기발한 생각은 사유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보편‘에 저항하고, ’통념에 맞서고, ‘평범’을 거부하는 데서 나온다.
논어에 ‘절문이근사’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주변에서 미쳐 발견해내지 못한, 또는 너무 흔해서 관심이 없던 것은 ‘가까운 곳’에서 나온다고 할 것이다. 절실하면 전봇대에 꽃도 피워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새로움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없이 어찌 멋진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진실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뭔가를 발견해내겠다거나, 새롭게 하겠다는 인식의 전환이 가져올 변화에는 결합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결합의 원리에는 용해의 미학이 녹아 있다. 융해, 용해의 뜻으로 쓰이는 ‘퓨전’은 서로 이질적인 것의 결합에 의해 창조적인 생성으로 이어진다.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도 이와 같은 결합의 원리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별개의 것들이 결합하여 ‘어떻게 용해되느냐’에 따라 주제가 달라지고 문학성의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Ⅱ.
순질이화나 이질순화나 그게 그거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거나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는 작업은 이제 창작의 기본이 된 지 오래다. 드라마의 경우, 대체로 결합의 원리가 많이 작동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금수저 남자 주인공과 흙수저 여자 주인공을 서로 결합하면 독자는 그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극의 전개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된다. 거꾸로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외의 결합이나 분해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여행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뇌인지시스템은 낯설고 평범하지 않은, 새로운 것에 주목한다. 산림문학 가을호 수필에서도 이런 결합과 용해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김진의 <나만의 텃밭>에 제일 먼저 주목해 본다. 시골 인심이 풍성하게 묻어나는 이야기 한 토막이 발단부를 푸근하게 장식하고 있는 이 수필은 전원주택을 짓고 주말농장이나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지만, 여기서 작가는 이웃에서 얻었거나, 보고 있는 사물이나 사건을 그 자체의 의미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결합의 원리 용해의 미학이 빛난다. 김진은 문학의 기본 원리, ‘이것’을 ‘저것’으로 치환시켜내어 결합해서 용해하는 방법을 통해 미적 울림을 가져오고 있다. 작가도 사십대 때에 이웃의 권유로 주말 농장을 가져본 적이 있는데, 세 평 정도 되는 밭에서 수확한 상추를 볼 때마다, ‘양이 넘쳤다’고 생각한다. 세 평 정도 되는 땅에서 나는 채소가 어찌 많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부자인 그녀는 ‘적은 양’을 ‘많게’ 본 것이다.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ㄴ)의 첫 문장이다. 용해의 미학이 작가의 해석과 그 의미화의해 빛을 발한다.
(ㄱ) 작년 이맘때즘 한성도성길을 둘러볼 때가 생각난다. 내려오는 길에 오밀조밀한 동네를 걷다가 내 눈길을 사로잡은 풍경이 있었다. 복잡한 골목길에 자리한 작은 집 대문 앞에서 런닝셔츠 차림의 노인이 기다란 플라스틱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서너 개의 화분에는 고추와 토마토가 앙증맞게 달려 있었다. 한 눈에도 노인의 정성과 사랑이 느껴지는 정겨운 모습이었다.
(ㄴ) 고추와 토마토는 노인에게 먹거리를 위한 농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토마토는 노인의 말벗이자 가족이 아니었을까. 세상살이가 버거운 사람에게 자연은 언제나 편안하고 건강한 삶을 제공한다. 채소 한 잎이나 고추 한 개, 감자 한 알까지도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돌보아주는 자연의 일부이다.
- 김진 <나만의 텃밭> 중에서
이 수필의 문학성은 작가의 개성적인 해석에서 나온다. 수필은 체험 -해석- 형상화 순으로 전개되는 삼단구조와 심층-표층-담론층이라는 중층구조의 결합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이 수필의 문학성이라고나 할까. 미의식의 결정판은 (ㄱ)에서 (ㄴ)으로 가는 프로쎄스에서 나온다. 인용된 문단에서 전자가 ‘체험’이라면, 후자는 ‘해석’이다. 수필의 잡문성은 경험이나 체험만 있고 해석이나 형상화의 부재에서 생긴다. 김진 작가는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나름대로 경험에서 찾아낸 것, 발견한 것을 (ㄴ)에 자신만의 언어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노인에게 고추와 토마토가 먹거리가 아니라 말벗이자 가족이 아니었을까’ 하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그녀는 “세상살이가 버거운 사람들에게 자연은 언제나 편안하고 건강한 삶을 제공한다. 채소 한 잎이나 고추 한 개, 감자 한 알까지도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돌보아주는 자연의 일부다.”라고 하면서 생태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은 미래의 유비쿼터스다. 코로나19로 지쳐가는 일상에 활기를 주기 위해 베란다 한쪽에 텃밭을 만들고자 하는 김진 작가의 건전한 사회의식에 박수를 보낸다.
영화 <백자의 사람> 장면 중에 타쿠미 씨가 죽기 전에 병상에서 “내게는 책임이 있어.”라고 힘겹게 말하는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9년 전 한국의 흙이 되겠다고 귀화를 결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P 씨를 만났다는 것도 생각났다. ‘어쩌면 애초부터 P 씨를 만나게 한 분은 타쿠미 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겐 책임이 있어.” 그의 유언이 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아사카와 타쿠미 씨가 한국을 사랑한 마음을 홍릉숲 반송을 심어 남겼듯이 나 역시 태어난 일본보다 더 많이 살아 온 한국을 사랑하고 있음을 무엇으로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그 마음을 새길 때마다 홍릉숲을 찾게 된다.
- 문효원의 <홍릉숲 반송과 백자의 사람> 중에서 -
27년 전 일본에서 한국남자와 결혼해 한국으로 들어와 귀환한 문효원 작가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효원 씨는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타꾸미 씨의 “내게도 책임이 있어.”라는 사회의식의 미세한 풍경을 이 작품 속에 잘 녹여, 한일우호 관계의 토대를 역사적 맥락에서 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필은 현재 국림산림원에 심어져있는 ‘반송’으로 불리는 소나무 한 그루가 ‘한국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면서 진한 감동을 안겨 주는 작품이다. ‘나 역시 태어난 일본보다 더 많이 살아온 한국을 사랑하고 있음을 무엇으로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라는 문장에서 결합과 용해의 미학이 발견된다. 작가도 주동인물인 타꾸미 씨도 둘 다 한국에 귀화한 사람이다. 이들의 한국에 대한 ‘부채의식’이 눈길을 끈다. 일본인이면서 총독부의 명령을 어기고 홍릉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소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타꾸미 씨의 이야기를 화소로 한 일본인의 한국사랑을 문학적 이야기로 보여주고 있어 감동적이다. 특히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홍릉숲을 찾아가는 문효원 작가의 의리가 한국을 상징하는 ‘반송’과 ‘백자’의 이미지로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생태문학의 고전인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월든'을 읽을 땐 지구별에 심각한 제동이 걸리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호숫가에 지은 오두막 한 채로 자족의 삶을 살았던 자연주의 방식이 동경의 대상이었을 뿐, 그의 소박한 삶이 오늘의 지구인들에게 무엇을 경고하고 있었는지를 정말 몰랐었다. 2년 2개월여를 자급자족하며 최소한의 물자로 자연주의를 실천했던 소로우!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수없이도 저질러온 필요 이상의 소유와 소모가 심히 부끄럽다.
- 이문자의 <곰솔 밭에서 듣다> 중에서
이문자의 이 작품도 결합의 원리가 빛나는 생태수필이다. 지구위기라는 중차대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자연의 원형이기도 한 식물, 그 중에서도 꽃이나 나무를 제재로 한 수필이 감동스런 이야기를 만나 마음의 꽃이 될 때, 수필은 한 편의 작품으로 탄생한다. 자아와 세계의 만남이라는 차원에서 이 수필은 두 가지의 낯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수필은 이미지를 의미하는 '상'과, 인정을 의미하는 '정'이란 두 축으로 짜여진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용해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감동을 맛볼 수 있다. 이 수필에서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정’이다. 작가는 물신주의에 망가진 삶터를 복구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생태적 상상력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마지막 멘트, ‘이 땅의 산하는 너희가 주인이니 목숨처럼 아끼고 지키라는 말! 내가 곰솔 밭에서 들은 메시지다.’는 주제의식의 의미화로써 이 수필의 문학적 가치를 담보하는 증표라 하겠다. 생태문학의 고전인 소로우의 ‘월든’을 인용해서 우리가 가치로 여겨온 ‘소유’와 ‘소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안겨준 전략도 매우 성공적이라 하겠다.
아침이면 누가 오줌 싸고 혼났는지, 누가 사랑을 하다 눈물을 흘렸는지도 알고, 돈을 벌었는지, 도망을 갔는지, 언제 무엇을 하다 다쳤는지, 어떤 병을 앓았는지, 언제 죽었는지도 다 들어 알 것이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기억까지 다 품고 있는데 폐허가 되어가는 마을을 보며 그 나무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러면서 한 세대가 지나고 또 한 세대가 지나는 걸 보면서 함께 나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한창 사람들이 북적이던 시절을 기억하며, 늙은 몸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바람과 함께 지키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무 한 그루는 그냥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그 마을의 어른이요, 분위기요, 역사요, 문화요, 예술이란 생각이 들었다.
- 서상은의 <나무 한 그루> 중에서
이 수필 역시 대단히 수준 높은 사유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수필은 문학이기 위해서 문학적이어야 하고, 인간학이기 때문에 생의 의미 또한 인간적이어야 한다. ‘이 땅에 살다 가는 의미는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라는 말보다 더 인간적인 진술이 어디 있겠는가. 이 수필은 노르웨이 사람들의 인생철학 세 가지 중, 자식 한 명 남기고 가야 한다는 것과 책 한 권 남겨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무 한 그루 심고 가야 한다’는 말은 쉽게 수긍이 안 된다는 작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수필의 6요소가 주제, 제재, 구성, 문장, 서두와 결미라고 할 때, 수필의 서두는 그 어떤 구성요소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수필을 발단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발단부 출발이 성공적이란 얘기다.
작가는 ‘나무 한 그루 심어야 한다’는 말이 이해 안 되는 이유를 선입관 탓으로 돌렸지만, 뒤늦게 산골마을 느티나무 한 그루를 보고 나무의 가치를 깨닫게 된 작가는 나무에 삶의 역사를 그려 넣는다. 결합과 용해의 미학이 빛나는 지점이다. 감동을 주는 것이 어찌 노르웨이 국민들의 생활철학뿐이겠는가. ‘나무 한 그루가 그냥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그 마을의 어른이요, 분위기요, 문화요, 역사요,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대목은 이 수필의 압권이다. 문학적 성취가 가장 빛나는 언술이 아닐 수 없다. 한 그루 나무 앞에서 감성 편향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 지성보다는 인간 본연의 한계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이 세계 속의 작은 자신을 발견함으로서 작가는 먼 공감의 세계를 가까이서 확보하고 있다.
Ⅲ.
이렇게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것을 끌어오는 것은 작가의 상상력이지만, 그것이 따로 놀지 않고 작품에 영향을 끼쳐 땔래야 뗄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결합과 용해의 미학원리’를 잘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지만 알고 보면 이해가 되는 김진의 탈인간중심주의, 반송과 백자 사랑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다꾸미 씨의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그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홍릉에 갈 때마다 한국사랑을 확인하는 문효원 씨, 소유와 소모로 대변되는 문명의 이기를 비판하고 나무의 소리를 통해 생태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이문자의 생태문학도, 나무 한 그루가 그냥 나무가 아니라 그 마을의 어른이요, 역사요, 예술이요, 문화라고 하는 서상은의 깨달음도 문학의 주된 원리인 ‘치환’ 원리에서 나온다. 이런 ‘결합과 용해의 미학 원리’는 문학에서 분만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것을 결합시켜 생활주변의 이야기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의 생활은 일상적 사건이 아니라 문학적 사건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문학적 일상에서 생동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