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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윤홍식의 화엄경 강의 46강 - 6지 현전지(現前地)(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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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절에 가서 이렇게 공부 혼자 명상에 집중하기 좋잖아요. 그럼 거기 가서 그렇게 많이 하고 그랬어요. 그 시대는 이제 유교시대라 보살들이 또 선비로 많이 와가지고 또 활약하고. 또 요즘은 이제 시대가 바뀌면 요즘 또 그러면 보살들이 또 목사님으로도 많이 오셔야 될 텐데요 기독교가. 목사님으로 오신 보살 분들 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종교 불문하고요 보살들은요 거죽이야 뭐든지 입고 다녀요. 그 중생들 도와주기만 도와줄 수 있으면요 어디든 나타나서 그 모습으로 진리를 설파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많은 분들이 농담 삼아 하지면 역행보살이라고 반대로 행동해 가지고 중생들을 자극시키는 보살도 있어요. 역행보살일지도 몰라요.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분들 있죠. 반대로 행동해 가지고 “전 양심 없는데요.” “이래도 양심 없냐?” 하고 괴롭혀서 우리 안에서 양심을 찾아주는,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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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게 해주는 그런 보살들도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 보살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사실은 보살행이라서 그래요. 여러분이요 아무리 우리가 나만 생각하고 나만 돈 벌고 나만 잘 먹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분도 현실적으로 경제라는 게 이루어지려면요 남한테 이로움을 줘야만 돈을 받게 돼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보살행을 안 하고는 여러분은 돈을 벌 수가 없게 돼 있어요. 회사 가서 남의 일이라도 열심히 해줘야 그 월급을 받게 돼 있습니다. 남한테 감동을 안 주면요 음악도 돈을 못 벌어요. 즉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들은요 재화나 서비스의 이런 창출행위들은 다 누군가한테 도움이 되는 행위들이에요. 그걸 했을 때 나도 도움을 받는 겁니다. 인간의 삶이 기본적으로 6바라밀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돼 있어요. 여러분이 어떤 분야에 계시더라도 그 분야에서요 반야 올바른 판단해야 되고, 보시 남하고 나눠야 되고요 이익을. 지계 룰을 업계의 룰을 지켜줘야 되고요.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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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해야 되고 선정 늘 평정심 유지해야 되고 인욕 참아가면서 사시는 거예요. 중생은 6바라밀을 어디서든 닦고 있어요. 그게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분들이 어느 시대나 또 등장해서 “이왕 닦을 거면 제대로 닦자”고 주장하는 분들이 꼭 나오는 거예요. 왜 제대로 닦자는 말이 중요하냐면요 이 현상계가 학교고 도량이고 우리는 중생들이 그대로 보살도를 닦는 사람들이라면 제대로 된 학교랑 엉터리 학교가 나뉘겠죠. 지금 이 사회는 좀 엉터리 학교예요. 뭐냐 면요 교사가 가르쳐 줄 교사가 없다고요. 초딩들끼리 모아놓고 “니들끼리 서로 성숙해 봐라” 하고 놔두면요 꼭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수업이 진행되지 않겠죠. 지금 상황이 그래요. 즉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서 건전한 피드백을 못 받는단 말이죠. 멘토가 없단 말이죠. 내가 올바르게 했을 때 사회가 바로 그 부분을 잘했다고 해주지 못 하는 학교는요 선생님이 없는 학교예요. 이해되십니까?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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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선을 했는데 인정을 못 받고 악을 했는데 근데 칭찬받는다면 잘못된 학교에 와 계시는 거예요. 이 중생이 사는 이곳이 사바세계가 안 좋은 학교라는 거지 학교는 학교예요. 배우고 계신데, 학교가 좀 안 좋은 학교 문제 학교, 교사들부터 문제가 있는 학교예요. 여길 다니니까 지금 자습해서 혼자 공부하는 분이 오히려 잘 되고 선생님 말 들었다가는 오히려 망가지는. 이해되시죠? 선생님 말 듣는다는 게 뭡니까? 사회에서 하라는 짓 하다가는 오히려 이상해진다고요. 공부가 안 되게 돼 있어요. 즉 보살도를 못 닦게 유도한단 말이죠 사회가. 이건 문제가 있는 학교죠. 그래서 정토를 만들고 이상사회를 만든다는 건 간단합니다. 악이 벌 받고 선이 칭찬받는 사회를 카르마 그대로 집행되는 사회를 만들면 돼요. 우주 카르마는 선에는 선인낙과(善因樂果) 그러거든요. 선한 원인을 지으면 즐거움을 주게 돼 있고 결과가. 이게 비로자나불이 다스리는 세계입니다. 악인고과(惡因苦果) 악을 했으면 고(苦)라는 결과가 와야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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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카르마법상 맞죠. 비로자나불이 다스리는 세상은 선악이 없는 게 아니라 현상계엔 선악이 있어요. 선하면 상 받고 악하면 벌 받는 사회가 정토사회예요. 정토에서 얼마나 멀어졌느냐를 보시면 알아요. 선이 어떻게 평가받는지? 이 사회에서 악이 어떻게 평가받는지? 이것만 보시면 우리가 얼마나 난세를 살아가고 있는지 잘못된 학교에 다니고 계신지 알 수 있어요. 근데 학교 탓하실 게 아니라 일단 여러분이라도 살아남아야 되니까 자습을 해서라도 홍익학당 강의를 유튜브로 들으시면서 방송통신교육을 받으시더라도 인강으로라도 꼭 공부를 하셔서 선생님, 잘못된 선생님을 따라가지 마시고 정신 차리셔야 돼요. 그리고 이 학교를 개조할 운동을 벌이셔야 돼요. 학생들이 나서서 해야 돼요. 선생님 중에 공감하시는 분 있으면 같이 해야 돼요. 그래서 같이 해 가지고요 학교를 바꿔놓지 않으면, 즉 그래서 학교 다니는 사람이 초등학생도 딱 봐서 “악을 하면 확실히 벌을 받는구나” 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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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우리가 카르마 법칙을 진리로 금방 인가하고 금방 존중하겠죠. 진리를요 금방 인가하고 금방 존중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고 그 사회가 그대로 도량인 겁니다. 제대로 된 도량이 아니라서 중생들 공부가 늘 지금 계속 유급만 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거죠. 합격생이 안 나오는 학교인 이유는요 이 세계가 학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학생과 선생님이 없단 말이죠. 서로 건전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이 관계가 없으니까.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어디든 학교가 펼쳐질 수 있어요 불법승만 모이면. 불이 뭡니까? 선생님 승은 학생 법은요 교과 내용 가르칠 내용. 진리가 있고 진리를 아는 사람이 있고 진리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도량이 펼쳐지는데 그러면 이 사바세계가 그대로 도량이어야 되는데 왜 안 되느냐? 불법승이 안 갖춰져 있다는 거죠. 진리를 가르칠 사람이 없고, 간절하게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고, 진리가 자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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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하니까 도량이 지금 제대로 된 공부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싸리 공부 안 하면 그만인데 안 할 수도 없다는 거예요. 삶이 그대로 보살도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우주 공식이 보살도니까 보살도 안 하고는 밥 못 먹게 만들어 놨다고요 우주가 애초에. 근데 가짜 보살들이 나타나는 거죠. 그러면 이 중생계는 지금 뭐가 존재하겠습니까? 진짜로 남에게 이익을 주고 제값을 받는 보살로서 살아가는 사람과 이익을 준다고 하면서 등을 처먹는 사기꾼들로 이루어졌겠죠 극단적으로 나누면. 이 사기꾼들을 지금 못 가르니까 제대로 대처를 못하니까 학교 전체가 썩어버린 거예요. 썩은 사과가 하나가 끼니까 전체가 썩어버린 거죠. 이거를 지금 막겠다고 부패방지위원회가 있다면 보살들이죠. 보살클럽이라고 해야 되나요. 아무튼 우주에 보살 클럽이 있어요. 그래서 끝없이 지구에 보살들을 보내는 겁니다. 부패를 막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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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이 되라” 예수님 와서 한 얘기가 이게 보살이에요. 빛이 되고 소금이 돼서 부패를 막고 어둠에 빠지는 걸 막아야 돼요. 무명(無明) 사람들이 다 어두워져 가면 빛을 뿌려 쬐어주고 썩어가면요 소금처럼 해서 자꾸 맛을 내고 부패를 막아줘야 돼요.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그런 존재가 안 되면요 이 사회는요 “태어나서 사는 게 공부지” 이렇게 막연히 말할 게 아닌 게 공부가 안 될 수도 있어요. 학교 보내놓는다고 다 공부하는 거 아니듯이 잘못된 학교는 뜯어 고쳐야 됩니다. 간단해요. 선이 상 받고 악이 벌 받는 사회. 부처님이 얘기한 선은 하고 악은 하지 마라는 게 사회적으로 권장되고 인정받는 사회가 정토사회예요. 막연하게요 우리가 정토 그러면요 오감이 만족되는 사회를 정토사회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거기 천사들도 다 이뻐야 되고 다 막 꽃미남들 식스팩 가진 사람들이 와서 가르쳐주고 해야 되겠네요. 그쵸. 정토는 그런 게 아니고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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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인 일을 하면 바로 알아주고, 양심을 어기면 바로 누군가 와서 가르쳐주는 사회라는 거예요. 카르마가 그대로. 이게 예수님이 말한 하늘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는요 카르마가 엄정이 집행됩니다. 땅에서도 그 뜻이 이루어지다. 땅에서는 카르마가 엉망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사형당하잖아요. 이해되세요? 뭔 얘기가 하다가 제가 또 흥분했죠? 다시 돌아가서 진도. 12연기의 관찰. 자 12연기는요 현상계 돌아가는 공식입니다. 그런데 12연기 자체가요 대승이랑은 좀 안 맞는 구조를 갖고 있어요. 뭐냐면 12연기는 무명(無明)에서 출발하는 걸로 돼 있어요. 그럼 이미 그 가치관에 뭐가 있습니까? 현상계는 어두운 세계라는 게 있어요. 절대계가 열반은 좋고 현상계는 어둡다라는 전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초기불교나 소승불교에서 중시하는 가르침이지 대승에서는 12연기를 활용해먹지 12연기 본뜻 그대로 따라가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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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승의 12연기를 따로 정립해야 돼요. 제가 그 모델을 하나 보여드리려고요. 예전에 틱낫한(Thich Nhat Hanh, 1926-2022) 스님이 이걸 그대로 하시는 걸 봤어요. 다만 이제 저는 내용을 제가 공부한 내용으로 바꾸긴 했지만, 비슷한 시도를 틱낫한 스님이 어떤 책에서 하신 걸 봤어요. 그분도 똑같은 문제 의식을 가진 거예요. 대승에서는 12연기를 어둡게만 보면 안 된다 하는 의식 때문에. 그런데 일단 12연기 자체를 한번 이해를 해보셔야지 우리가 대승보살은 12연기를 어떻게 활용할지가 나오겠죠. 대승보살은요 탐진치도 활용하셔야 됩니다. 탐욕(貪慾), 현상계에선 탐욕이 없으면 여러분 일을 못 하세요. 원(願)도 탐욕이에요. 원이 안 열어지면 분심(憤心)도 일어나요. 근데 공부할 때 분심이 없으면 공부가 안 돼요. 분노도 하실 줄 알아야 돼요. 짜증도 내셔야지 공부가 된다고요. 중생 도와주는데 뜻대로 안 되면 짜증이 나는 게 당연하죠. 치(痴) 어리석음도 활용하셔야 돼요. 여러분도 어리석음이 뭔지 아셔야 중생의 어리석음도 아는 거고요. 어리석음을 적절히 활용하시지 않으면요 보살도 중생 구하러 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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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먼저 쓰러집니다. 왜냐? 너무 보살심이 강해서 지고 왔더니 지구에 있는 모든 악을 보고는 앓고 계실 수도 있어요. “‘아이구야!” 하고 도와주러 오셨다가. 적당히 어리석어야 돼요. 이해되시죠. 내 관할 아닌 거는 적당히 좀 마음 비우셔야 돼요. 몰라야 돼요. 그래야 사람이 살게 돼 있어요. 현상계는요 한 개체가 서는데 그렇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보살로서 오셨다는 건요 인간의 어떤 힘든 삶도 존중해주는 겁니다. 인간을 구제하려고 인간으로 온 거기 때문에 예수님도 인간적인 아픔이나 그런 욕망을 다 갖고 오셔야 되는 거지 그거 없이 와서 뭐 놀러 오신 것처럼 “아이고 인간들 힘들게 사네” 하고 가시다가 구경하고 가면 보살이 아니죠. 인간의 힘든 걸 다 받기 때문에 탐진치도 그대로 보살한테는 보살도의 도구란 말이에요. 12연기도 똑같은 관점에서 접근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무명 자체도 모든 법이 청정하다고 했기 때문에 보살한테 대승보살한테는 무명도 청정한 거예요. 접근법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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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2연기 전체의 맥락은 똑같아요. 석가모니가 얘기하신 12연기 자체는 존중돼야 돼요. 왜냐? 인간한테 고(苦)가 발생하는 원리를 정확히 설명해 주시거든요. 현상계가 왜 이렇게 어지러워지는지 그 원인은 정확히 설명을 해주시기 때문에 참고를 해야 됩니다. 보세요.
[3. 그리고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범부는 지혜가 없어서 ‘나’에 집착하여 항상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을 구하며(① 무명無明, 무지ㆍ아집, 탐진치貪瞋痴), 올바른 사유를 하지 못하여 망령된 행동을 일으키고 사특한 길을 행하며, ① 죄를 짓는 행위(욕계의 악업) ② 복을 받을 행위(욕계의 선업) ③ 움직임이 없는 행위(색계와 무색계의 선정, 불고불락不苦不樂의 4선정에 비해 1선정~3선정에서는 미세한 생각(尋伺), 희열(喜), 즐거움(樂)이 있어 미세한 움직임이 있으나, 욕계의 업과는 달리 업을 짓는 자리와 과보를 받는 자리가 이동하지 않음)를 쌓아서 모으고 증장시킨다(② 행行).
復作是念 凡夫無智 執著於我 常求有無 不正思惟 起於妄行 行於邪道 罪行福行不動行 積集增長]
이 보살은 다시 생각을 해요. 범부는 지혜가 없어서 나에 대해 집착하여 항상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을 구하며. 자 이게 뭔 말이냐면요 자 이 중생들이 빠진 함정입니다. 내 에고가 이대로 영원하기를. 근데 이건 꿈이죠. 왜냐하면 우린 죽어야 되니까. 자 에고 자체가 영원하길 바라는 거랑 좀 다른 얘기입니다 이거는. 일반적으로 범부가 생각하는 건요 윤회를 통해서 에고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지금 뭡니까? 솔직히 여러분 죽는 것 자체가 싫으시잖아요. 이대로 영원하길이죠. 옛날 탄허(呑虛, 1913-1983)스님이 이런 얘기하신 적 있어요. 이승에서 아무리 못 사는 사람한테 가서 “너 죽으면 다음 생에 대통령 시켜줄 테니까. 죽어라” 할 때 죽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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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다는 거죠. 이승에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노숙을 하고 있더라도 이생이 중요하지 그 사람한테. 그렇죠? 물론 이것도 이제 정상적일 때고 이제 더 극단적으로 몰리면 자살도 택하시겠지만, 그게 무슨 마음인지는 아시겠죠? 그 탄허스님이 얘기한 그 마음이. 고게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존재하고 싶다는 거는 이 부모 이 가족 우리 부모 안 돌아가시고 내 가족 안 죽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가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게 존재하고 싶은 거고요. 존재하지 않고 싶다는 건요 너무 이 삶이 괴로우면요 아까 자살하는 분. “나는 그냥 존재하기를 포기하겠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싶지 않다.” 예전에 저도 이 느낌을 한번 느껴본 적이 있는데, 시험도 안 되고 뭐도 안 되고 하나도 안 되니까요 죽고 싶다가 아니라요 그냥 존재하고 싶지 않다 있죠? 존재 내가 이 현상기 안에 비집고 들어온 것만으로 너무 많은 고가 발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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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존재만 싹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데 그것도 안 돼요. 왜냐? 내 존재를 내가 지울 수도 없는 게 내가 죽는다고 하는 게 지우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도 같이 죽어요. 그 고를 같이 겪어야 되는 거예요. 즉 고를 아무 영향도 안 주고 싹 사라져야 되는데 그게 진짜 이제 열반인데 이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요 현상계는. 그래서 사실은 열반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현상계에서 여러분 하나를 따로 뺄 수가 없어요. 법의 본성을 이해한다면요 대승보살 눈에는요 열반에 든다는 게 전혀 그거는 옛날 석가모니가 방편을 썼지 저거 진짜는 아니다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석가모니는 진지하게 생각하시거든요. 그래서 두 입장은 다르다는 겁니다. 석가모니는 진지하게 열반이 답이라고 생각하셨던 분이고 대승보살은 열반이 답일 수가 없어요 대승의 이론세계에서. 대승의 이론 세계에서는요 티끌 하나에도 부처가 있기 때문에 티끌 하나도 마음대로 못 없애요. 그것도 참나의 나툼이기 때문에 여러분 티끌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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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안 든다고 못 없애요.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곤충 있죠. 모기. 벌레. 도대체 쟤는 뭔 이득이 있을까? 와서 남의 피만 빨아먹고 다니는데. 그래도 이거 하나를 없앨 수가 없다고요. 수많은 인연 속에서 걔가 존재하는 거기 때문에. 내가 싫은 것도요 어떤 인연 속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에 안 드는 습관이라고요 그거 바로 못 없앱니다. 그거 없애버리면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봐가면서 없애야 돼요. 마음에 안 드는 습관도 그 습관 하나가 딸랑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여러 삶의 여러 원인 때문에 그 습관이 있어요. 어떤 분이 자꾸 술을 드신다. 술만 못 드시게 하면 될 것 같아 술을 없애버리면 이분이요 삶 전체가 망가져 버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 술을 꼭 먹자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정을 해 들어가야지 그거 하나만 딱 없앤다고 인간이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나쁜 습관 하나만 딱 오늘부터 안 하기로 한다. 잘 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게 꼭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말 못 하는 이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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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나가 일어나기 위해서 여러 원인이 있거든요. 인연이 있거든요. 그 인연들이 전체적으로 조정이 되지 않으면요 고거 하나만 딸랑 없애는 게 힘들고. 또 반대로 얘기하면요 작은 습관 하나만 바꿔도요 전체 삶이 긍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어요. “오늘 하루 10분 운동하자. 10분이라도 하자”라고 해서 그 한 게 하나가요 삶 전체를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어요. 왜? 다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해되시죠? 우주의 모든 존재와는 모든 건 연결돼 있어요. 그래서 어느 존재 하나를 없앤다는 발상이 대승에서는 이미 그건 아닌 겁니다. 존재는요 모두 통으로 드러난 거예요. 참나가 통으로 나타난 게 이 우주이기 때문에 여기서 이건 마음에 안 드니까 없애고 이건 어쩌고 하는 건 이미 에고의 조작이지 참나의 뜻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걸 인내하고 살아가야 될 뿐입니다 우주가 지시하는 길을. 이거 알아 두시고. 우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인과법을 부정할 수 없듯이 인과법 인내하셔야 되죠 마음에 안 들어도. 에고를 다 들어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 에고의 욕망을 들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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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영성들이 다 뭘 얘기하는지 아십니까? 첫째로 하는 게 인과법 부정이에요. “인과법도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있지 없는 거야”라고 시작합니다 모든 사이비 영성은. 왜냐? 그래야 선인고과(善因苦果) 악인낙과(惡因樂果)가 올 수도 있으니까요. 이것도 무슨 인과법 안에서 얘기한 거지만 애초에 인과법이 부정돼야만 악을 저질러도 좋은 일이 올 수가 있잖아요. 사실 여기 있는 분 다 죄인이란 말이에요 뭔가 따져보면. 그거 분석을 안 시키고 ‘죄인이라 하더라도 인과를 내려놓으면 우리는 그대로 다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이 얘기부터 하고 시작한단 말이에요. 에고가 그걸 좋아하니까. 이거는요 우주법을 인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문제가 됩니다. 진리는요 인내할 때 이루어지지 인내하지 않아버리면 진리를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우주가 그걸 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우주는 내 뜻대로 안 되더라. 고(苦)’라는 뜻이 그겁니다. 우주는 내 뜻대로 안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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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常) 행복한 순간도 곧장 지나가 버리고 만다. 무아(無我) 내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이걸 인가할 때 인내할 때 여러분이 해탈하지 성숙되지 이걸 부정하고는 성숙이 안 된다는 게 불교 이론이기 때문에요. 요거 좀 알아두세요. 대승도 그 입장은 똑같애요. 다만 대승은 그런 ‘현상계도 결국은 참나의 작용이니까 인내하고 그 안에서 살자’라는 얘기를 하는 것뿐이지 그 요즘 말하는 그 욕망대로 뭘 만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왜곡되게 해석시켜서 ‘일체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 만들 수 있다.’ 이러면 부처님 진리랑 완전히 안 맞게 됩니다. 대승에서도 무상․고․무아를 부정하지 않아요. 그 자체도 사실은 절대계의 작용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거부할 게 아니라 잘 활용하자는 얘기를 하면 대승입니다. 그래서 지금 첫째로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이. 별말 아닌 것 같지만 이거예요. 내 에고 무상한 에고를 영원하게 끌고 가려는 마음 하나랑 무상하니까 버리고 없애버리자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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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소승성자들은 대승에서 볼 때는 존재하지 않음에 집착하는 범부로 보이는 거예요 대승성자들한테는. 관점이 이렇게 다릅니다. 이것 자체가 다 무명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소승에서는요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게 대승이 오면 그게 무명이 돼버려요.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가 이렇게 우기는 게 아니라 경전에 써져 있는 것을 풀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씩 12연기를 한번 따라가 볼까요?
처음에 12연기의 모든 시작은요 어둠에서 시작이에요. 그래서 이게 12연기가 긍정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탐진치에서 시작해요. 무명(無明)은 탐진치거든요. 여러분의 번뇌. 이 무명(無明)이 뭘 낳겠습니까? 뭔가 행위, 형성 작용을 낳아요. 무명이 탐진치로 바로 끝나는 게 아니고요 뭔가 여러분 이제 카르마를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무명이 카르마를 만들어가요. 행(行)은요 카르마가 만들어져 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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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명으로 인해서 안 좋은 카르마가. 그럼 이 카르마는 이미 또 부정적이죠. 애초에 무명에서 시작하니까 뭐 건질 게 없어요. 다 없어져야 될 것들이지. 이게 대승불교에서 지금 12연기를 얘기하면서도 소승의 12연기를 가져오니까 또 모순에 빠지는 게 이런 겁니다. 대승의 주장을 제대로 못 드러내고 있잖아요 지금. 수단을 소승 꺼 이론을 가져다가 얘기하니까. 그런데 지금 무명에는요 그런 망상이에요. 만법이 본래 청정함을 있는 그대로 봐야 되는데 소승 성자들도 만법을 부정하게 보니까 그쵸 그것을 갖다가 내려놓은 놓으려고 한단 말이죠. 무상한 것을 피하려고 하는 욕망이 있다 보니까 그것도 무지(無知)라는 겁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 것도 무지지만 사라지고 싶다는 것도 무지가 돼요. 그 무지로 인해서 이런 무지가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으면 뭔가 조작이 일어납니다. 행(行)을 하게 돼요. 생각 감정 오감을 총동원해서 여러분 뭔가 업을 짓습니다. 그 업(業)을 지어 놓은 것이 그 작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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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제 뭘 일으킵니까? 올바른 사유를 하지 못 하고 망령된 행동을 일으키고 사특한 길을 행하게 합니다. 그게 결국 그래서 이제 그렇게 행하며 자 어떤 행위들을 하냐면요 그 행위를 좀 설명해 주네요. 첫 번째 죄를 짓는 행위. 악업을 저지르는데 이거는요 지금 이게 불교에서 업을 나누는 3업(三業)인데요. 세 가지 업을 나누는데 그 행위들을 세 개로 나누는데 첫 번째, 죄를 짓는 행위. 죄를 짓는 행위를 하나 하고요. 그 다음에 뭡니까? 복을 받는 행위. 이거는 뭘 상징하냐면요 이 안에 상징이 내포되어 있는 게 죄를 짓는다는 건 우리가 사는 욕계(欲界), 욕망의 세계에서의 악업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을 받는다는 건요 욕계가 아니라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하늘나라에 있죠. 하늘나라의 세계의, 아니 욕계의 뭐죠 여기서는 악이 있으니까 선업(善業)이 들어가고. 그 다음에 죄도 복도 아닌 행위가 있어요. 이거는요 색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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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작용, 형상은 있는데 욕망이 없는 세계나 무색계, 순수한 정신의 세계에서 있는 그런 선정의 세계죠 여기는. 선정에 드는 행위는 죄도 복도 아니라고 따로 분류한 거예요. 이렇게 따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악업은 벌 받고 선업은 복 받는데 현상계에서. 이제 이 현상계 중에서 이런 욕계가 아니라 더 신비한 세계들,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세계에서는 선정 능력으로 거기를 들어간다고 보고요. 거기에는 고(苦)도 락(樂)도 없다는 거죠. 죄(罪)도 복(福)도 고도 락도 없다. 참나와 하나 된 상태를 말하잖아요. 그런데 여기도 엄밀히 따지면 4선정 중에서 1선정이나 3선정에서는요 1선정에서는 이게 있습니다. 1선정에서는 그 호흡이건 뭔가 어떤 눈앞에 나타난 빛이건 뭔가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거든요. 집중하고자 하는 미세한 생각이 있어요. 그게 있고 그러니까 아직 움직임이 사실은 있죠. 그다음에 희열, 2선정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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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희열과 은은한 즐거움이 같이 있어요. 3선정에서는 거친 희열은 없는데 은은한 즐거움이 있어요. 만족감이 있어요. 이것들은 여전히 뭔가 움직임이죠. 그런데 불교 이론상 그래요. 얘네들은 욕계 업이랑 달리 욕계 업은요 여기서 지어서 그 복으로 죄로 지옥을 가고, 여기서 지어서 그 복으로 천국을 가는데, 색계 무색계 선정에서 짓는 그 업들은 미묘한 이 업들은 그 자리에서 짓고 그 자리에서 받는단 말이에요. 즉 다른 과보가 없고 그냥 명상을 미세하게 방해하는 그 업과 그 과보가 그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얘네들은 움직임이 없는 업이라고 한다는 거죠. 죄(罪)와 복(福)과는 달리 ‘움직임이 없는 행위’라고 따로 분류합니다. 이게 불교 이론이라 여러분이 다 아실 필요는 없는데 지금 이렇게 나눠서 봅니다. 그래서 이걸 쌓고 모아서 증장시킨다. 이런 업들을요 그러니까 속세에서 죄도 짓고 착한 일도 하고 명상도 들면서 이렇게 업을 쌓아간다. 그 모든 행이 쌓여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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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니다. 여러분이 전생에 여러분이 전생에 해놓으신 거예요. 지금 이거는 무명(無明)~행(行)까지는요 지금 12연기에서 무명 행은 이전 거예요. 그걸로 인해 식(識), 뭐죠 여러분의 의식이 이제 현생에 지금 여러분의 지금 그 의식이 생겨난 겁니다. 무명 행으로 인해. 여러분이 지금 찾아가실 때는 지금 식(識)에서 시작하셔야 돼요. 여러분은 지금 알아차리고 계시죠? 세상을 분별하고 계시죠? 세상을 알아차리고 분별하고 계신 여러분의 그 의식이요 지금 그 의식에 어떤 카르마가 있는지는 이렇게 설명된다고요. 과거의 어떤 탐진치로 인해 어떤 카르마를 이미 쌓고 계시단 말이죠. 과거의 업이 있어요. 그러면 그게 이제 과거의 업 중에 과거에 쌓은 업이 있고 그 업이 현재 발현된 업이 있습니다. 지금 이 의식은 이미 과거 중에 현재 발현된 업이 지배하고 있어요. 미래업이란 게 또 있어요 아직 오지 않은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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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직 안 왔기 때문에 나중에 미래로 이어지는 미래 부분에서 중요하고.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로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측면에서 볼 때 과거의 이런 카르마가 여러분을 지금 형성했어요. 여러분은 지금 이제 발동된 이미 관련된 현재의 업을 지금 굴리고 계신 겁니다. 그 업이 굴렀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 마음에는요 가족이 누가 오느냐 뭐가 보이고 들리느냐가 지금 과거의 카르마로 인해서 뭔가 이렇게 만들어져 가고 있죠. 펼쳐지겠죠 여러분 안에서.
[4. 여러 행위에 의해 심어진 ‘마음의 종자’(③ 식識)에 번뇌가 있고 집착이 있어서, 다시 뒤에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일어나게 된다. ‘업’은 밭이 되고, ‘의식’은 종자가 되며, ‘무명無明’은 덮개가 되어, ‘갈애’(愛)의 수분이 윤택하게 해주며, ‘나라는 교만’이 물을 대주고, ‘견해의 그물’이 증장하여 ‘이름’(名, 추상적 표상)과 ‘색깔’(色, 경험적 표상)의 싹이 생겨난다(④ 명색名色).
於諸行中 植心種子 有漏有取 復起後有生及老死 所謂業爲田 識爲種 無明闇覆 愛水爲潤 我慢漑灌 見網增長 生名色芽]
그래서 지금 여러분 그 여러 행위에 의해서 심어진 그런 카르마에서 심어진 의식의 종자, 마음이라는 종자가 있는데, 여기에 번뇌가 있죠. 무명이 이미 찌들어 있죠. 번뇌가 있고 집착이 있어서 다시 뒤에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일어나게 된다. 이 의식이 있어서 미래에 또 태어남과 죽음도 이미 예정돼 있는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이렇게 돌아가요. 그런데 업은 밭이 되고 여러분이 그동안 지으신 업은 밭이 되고 의식은 종자가 씨알이 되고 무명은 그걸 덮어줘서 그리고 갈애, 욕망이 거기에 수분이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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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택하게 해주면서 나라는 교만이 물을 대주면 그리고 견해의 그물, 잘못된 견해의 그물이 여러분을 이제 덮어서 잘 자라게 해주면 뭐가 생겨나요 이 의식에서? 이 의식이 방금 이런 카르마와 이런 잘못된 업보들로 인해서 그리고 집착, 아집과 이런 법집. 나라는 교만은 아집(我執)이고요 견해의 그물은 법집(法執)이에요. 여러분을 가로막는 이 2개의 장애가 뭐라고 했죠. 무지랑 아집이라 그랬죠. 이 아집은 나에 대한 집착이잖아요. 내가 제일 귀하다. 무지는요 현상계 법을 잘 몰라서 일어나는 거기 때문에 법집이라 그래요. 그래서 아집과 법집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무지와 아집 때문에. 나라는 교만과 견해의 잘못, 잘못된 무지의 편견 때문에 여러분 의식은요 무슨 짓을 하게 돼 있냐면 명(名)과 색(色)으로 명과 색의 싹이 의식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즉 여러분이 여러분 정신이 있으면요 반드시 뭐가 나타나요? 여러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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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에 바탕을 두고 명(名) 이름과 색깔이 나타나는데 색(色)은 지수화풍이고요 명(名)은 수상행식(受想行識)입니다. 색이 있죠. 색 아닌 게 수상행식. 이해되세요? 색 아닌 거는 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이름으로만 구분되는 이런 생각과 감정들. 형체는 없고 이름으로 구분되는 것들 있죠. 그걸 명(名)이라고 합니다. 추상적인 표상인데요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추상적인 것들, 생각이나 감정. 감정도 사실은 구체적인 건데요. 그건 이제 따로 얘기하죠. 색(色)은 지수화풍(地水火風). 땅 물 불 바람. 물질을 이루는 요소들이고요. 명(名)은요 수상행식(受想行識) 정신의 요소예요. 자 보세요. 의식이 발동하면요 정신작용과 물질작용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생각 감정 오감, 합치면 생각 감정 오감이 발생한다는 거예요 결국. 정신이 구르기 시작하면. 구를 때 그냥 구르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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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특정 카르마가 있기 때문에 그 카르마가 발현되기 때문에 여러분마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생각, 느끼는 방식 그리고 보고 듣는 오감의 세계가 달라요. 환경이 달라요. 마음 위주로 보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에 각자 다른 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마음 위주로 보셔야 돼요. 불교는 지금 마음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니까. 여러분 마음에 이런 다양한 개념적인 표상과 구체적인 표상들이 나타나서 여러분 마음을 수놓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요 감정도 되게 구체적이거든요. 자 1+1=2라는 건 보편적인데 지금 느끼는 이 슬픔은 구체적이에요. 그런데 내가 그걸 ‘슬픔’이라고 불러버리면 보편적이 돼요. 근데 그 슬픔이라고 이름 붙여지기 전의 그 감정은 구체적이죠. 그거는 이것만큼 구체적인데 형체가 없다는 측면에서 지금 이쪽에서 처리하는 겁니다. 이름으로 구별되는 정신작용과 색깔로 구별되는 구체적인 물질작용을 나눠서 얘기합니다.
[5. ‘명색名色’이 증장하여 ‘5가지 감각기관’(五根)이 생겨나며(⑤ 육입六入), 여러 감각기관이 서로 부딪치면서 ‘접촉’(觸)이 생겨난다(⑥ 촉觸). 접촉이 부딪쳐서 ‘느낌’(受)이 생겨나며(⑦수受), 느낌으로부터 바라고 구함이 있으니 ‘갈애’(愛)가 생겨난다(⑧ 애愛). 갈애가 증장하여 ‘취함’(取)이 생겨나며 (⑨ 취取), 취함이 증장하여 ‘존재’(有)가 생겨난다(⑩ 유有). 존재가 여러 갈래 중에 ‘5온蘊의 몸’을 일으키는 것을 ‘태어남’(生)이라고 부르고(⑪ 생生), 태어나서 쇠약하게 변화하는 것을 ‘늙음’이라고 하고, 마침내 소멸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⑫ 노사老死). 늙어서 죽는 동안,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를 원인으로 하여 근심(憂)ㆍ걱정(愁)ㆍ슬픔(悲)ㆍ한탄(歎)의 온갖 고통이 모두 모이게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생겨나나(유전문流轉門) 생겨나게 하는 자는 없으며(본래 텅 빈 법法에 따라 인연이 스스로 생겨남), 자성(logos)대로 소멸하나(환멸문還滅門) 또한 소멸하게 하는 자는 없다(본래 텅 빈 법法에 따라 인연이 스스로 소멸함). 보살은 이와 같이 ‘연기緣起’(인연에 의해 일어남)의 형상을 순차적으로 관찰한다(반야바라밀로 12연기가 본래 텅 비어 청정함을 관찰함).
名色增長 生五根 諸根相對 生觸 觸對生受 受後希求生愛 愛增長生取 取增長生有 有生已 於諸趣中 起五蘊身名生 生已衰變爲老 終歿爲死 於老死時 生諸熱惱 因熱惱故 憂愁悲歎 衆苦皆集 此因緣故 集無有集者 任運而滅 亦無滅者 菩薩如是 隨順觀察緣起之相]
명색(名色)이 나눠지면 뭔 짓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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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그다음에 그게 싹이 나면요. 12연기를 총체적으로 12연기를 어떤 관점에서 관찰하냐면요 연기의 요소가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관점에서 지금 설명해 가는 겁니다. 12연기를요 10가지 관점에서 다양하게 설명을 해요 화엄경은. 다 12연기 얘기인데 첫 번째, 연기의 각 요소. 12가지 요소죠.
12요소가 어떤 식으로 서로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겁니다. 자 정신작용과 물질작용이 발생하면요 6입(六入) 여섯 가지 인식의 감각기관이 생겨나요. 그러면서 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나눠지는 거죠. 보고 듣고 뭐죠 맛보고 만져보고 할 수 있는 오감의 영역과 의식의 영역이 구체화되면서 그놈이 6입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고. 명색이 6입으로 작용하면 그 다음에 뭐가 일어나겠습니까? 접촉이 일어나요? 촉(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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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눈은 뭘 만나게 됐나요 6입은? 색깔을. 귀는 소리를.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꿈속에서 눈과 귀가 없는데 색깔과 소리를 보죠. 그래서 저는 이거를 안식(眼識) 이식(耳識) 이렇게 부르는 것보다는요 색식(色識)이나 성식(聲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꼭 우리 눈만, 지금 안식(眼識) 그러면 우리 눈으로만 보는 게 되는데 여러분 눈 감고도 꿈속에서 사물을 다 보신다고요. 여러분 정신작용에서 그렇게 뭔가 보는 작용을 하는 그 식을 얘기하고 싶다면 안식이라고 해서 눈에 너무 눈에만 초점을 두게 하는 거는 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하나의 제안으로 드리는 거고요. 아무튼 이런 작용이... 오감과, 마음에는 뭐가 접촉이 되나요? 의근(意根). 마음에는? 법칙이 접촉이 돼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그래서 촉감 말고 색깔도 아니고 뭐죠? 법(法), 법칙이 여러분 마음에 접촉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뭘 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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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개념이 형성되죠. 법을 만나신 거예요. 뭔가 여러분 마음에 뭔가 접촉이 되면요 여러분이 그걸 생각이나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냐면 개념으로 표현하는데 그 개념에 담긴 게 뭡니까? 법이에요. 어떤 진리를 법칙을 담고 있어요 여러분 개념은. 소 그러면 어떤 애들을 소라고 한다는 그 정보가 들어있거든요. 그게 법이에요. 여러분 마음에는 법이랑 우주에 존재하는 법을 만나면서 이걸 개념으로 언어로 뭔가 표현합니다. 색성향미촉법이 지금 접촉이 일어나면 자 접촉한 다음에 뭐가 옵니까? 느낌. 수(受). 느낌이 와요. 느낌은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 이 3개가 크게 나뉩니다. 그 다음에 그러다가 ‘좋다’가 뭐로 변합니까? 예 신기한데요 이게 한자가요 똑같은 글자입니다.
이게 손이에요. 이것도 손이에요. 어떤 물건을 주고받는다는 뜻이거든요. 여기에 마음(心)이 담기면 사랑 애(愛)자가 됩니다. 수(受)자에 심(心)자 하나 더 들어가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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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주고받고 있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처음엔 그냥 접촉을 통해서 뭔가 느낌을 주고받다가 사랑이 담기기 시작하면은 여러분 이게 불교에서 지금 뭐냐면 갈애(渴愛). 욕망에 빠지기 시작해요. 즉 그게 없으면 안 돼요. 도파민이 나와서 그게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상태예요. 갈애, 갈망하는 사랑으로 변해요. 과거의 카르마 때문에 현재 의식이 생겼고 현재 의식이 이제 과거에 발현된 카르마에 따라서 굴러가다 보면 접촉까지는 현재 카르마가 만들어내죠. 그럼 여기서부터 이제 다시 여러분의 자유의지가 들어갑니다. 접촉(觸)에서 수(受)는 자동으로 따라오죠, 수(受)까지는. 여러분이 어떻게 못 해요. 여러분이 과거 지은 것 때문에 지금 여기 오게 됐고 여기서 어떤 접촉이 일어나고 느낌이 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여기서부터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접촉까지는 그냥 오는데 이제 과거 지은 카르마 이걸 원인(因)으로 해서 지금 여기가 과보(果)예요 여기까지가. 보세요. 여기는 지금 과거였고 과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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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이게(행․식․명색․6입․접촉) 원인이 돼서 현재의 결과물(수受)이 나왔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수(受)까지가. 그럼 현재의 원인, 다음 생을 또 여러분이 바꿔갈... 카르마는요 자꾸 짓고 받는 거지 알 수 없는 세월 전에 지어놓은 걸 지금 계속 받고만 계신 게 아니에요. 카르마대로 다 된 게 아닙니다. 이것도 배우셔야 돼요. 12연기를 관찰해보면요 “지금 내가 당한 일은 다 카르마의 소산이야”라고 말할 수가 없게 돼요. 현재 자유의지로 여러분이 여기(갈애)서부터는 원인을 쌓아 가시는 게 돼요. 이 원인이 다시 반영이 됩니다. 다시 결과에 반영이 돼요. 그래서 지금 이게(갈애) 또 하나의 원인이 됩니다. 그 원인이 어디까지 가냐면요? 사랑하면 뭘 하게 됩니까? 취(取)하게 돼요. 그걸 내 것으로 하게 됩니다. 집착하고 취하게 되면 유(有), 유라는 건요 다시 카르마가 만들어져요. 다음 생을 내가 살아야만 하는 카르마가 형성돼 버려요. 취(取), 집착과 그 실제, 집착만이 아니라 집착해서 그걸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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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까지 말해요. 취하는 행동까지. 취하고 나면은 다시 카르마가 형성돼서 존재가 형성되어버려요. 이걸(有) 존재라고 번역합니다. 존재가 형성되어 버리면 여기까지 해서 이 카르마 때문에, 카르마가 형성돼 버렸죠, 이게(有) 원인이 돼서 다시 어떤 과보가 올까요 여러분한테? 또 태어나야죠 뭐. 여기는 지금 태어나는 게 다 지금 잘못된 거라고 보는 전제를 하고 있죠? 대승이랑 안 맞다는 거 아시겠죠? 그래도 이 자체는 자명합니다. 보세요. 이게 진리를 다 설명 못 해준다는 거지 이 설명 자체는 자명하죠? 부분적인 자명함이라도 지금 자명해요. 대승에서 볼 때 부분적이라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시고요. 석가모니한테는 이게 최고 중요한 진리였는데 대승에서는 석가모니랑 다른 지향점을 갖다 보니까 이게 이제 부분적 진리로 변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만 너무 집착하는 것도 좋게 보지 않겠죠. 그런데 여기 담긴 진리의 자명한 결이 있는데, 존재가 형성되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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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뭐라고 설명돼 있습니까? 갈애(渴愛)가 증장하여. 느낌으로부터 바라고 구함이 있으니 갈애(愛)가 되고 뭔가 바라는 게 되고 그걸 바라다보니까 갈애가 자라서 취함(取)이 돼요. 실제 취(取)하게 돼요. 그래서 이 취(取)함이 증장하여 존재(有)가 형성되고, 존재가 여러 갈래 중에 ‘5온(蘊)의 몸’ 또 다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몸을 만들어내요 현상계에. 이거를 생(生)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생. 이거(生)는 이제 미래입니다. 과거 있었죠. 현재 지나갔고 이제 미래로 갑니다 여기서부터는. 생(生). 태어나면 또 뭐가 되겠습니까? 늙어서 또 죽겠죠. 노사(老死)가 일어나겠죠. 노사만 일어나겠습니까? 늙어서 죽는 동안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를 원인으로 하여 근심 걱정 슬픔 한탄의 온갖 고통이 모이게 된다. 이게 주로 설명할 때 이게 따라옵니다. 근심(憂) 걱정(愁) 슬픔(悲) 한탄(歎)이 따라온다는 게요 원래 12연기는 노사(老死) 생노사(生老死)에서 끝나는데 노사에 꼭 붙여서 추가로 플러스알파(憂愁悲歎)로 방금 말한 애들이 꼭 같이 설명돼요 경전에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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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같이 알아두시면 좋아요. 이런 인연으로 생겨나니 이게 유전문(流轉門)입니다. 만물은 이 흐름으로 생겨나니 생겨나게 하는 자도 없으며. 자 또 이상한 얘기로 들어가요. 대승은요 법을 가만두지 않아요. 소승불교였으면 이 법을 알아서 지금 빨리 여기를 없애면 다 없어진다는 데 초점을 둘 텐데, 대승은 여기까지 해놓고 또 뭔 소리 하냐면 ‘짓는 자도 없고 받는 이도 없느니라.’ 또 ‘12연기가 본래 공하니라.’ 이게(無明) 이걸(行․識) 만들어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 “인연법 자체가 본래 공하니라. 짓고 받고 하는 이가 원래 없느니라. 에고와 나와 남도 원래 없느니라.” 하고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짓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느니라. 생겨나게 하는 자는 없으며. 텅 빈 참나에서 그냥 자연히 발생하게 되거든요. 자성대로 소멸하니 또 소멸하게 되니. 자 생겨나게 하는 자가 없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게 이렇게 생겨나도 사실은 생겨난 게 없다. 그리고 자성대로 또 소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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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하게 하는 자도 사실은 없다. 생멸이 보인다 하더라도 현상계 생멸은 이 공식대로 진행되지만 그 자체도 본래 청정한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연기의 형상을 순차적 관찰한다. 그러니까 지금 다르죠. 대승보살이 보는 관점이 다르죠. 중생이 이래서... 봐 보세요. 보살은 의사예요. 의사. 열반에 들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중생을 고쳐주겠다는 의사고. 중생이 왜 아프게 됐는지를 분석할 때 12연기라는 틀이 중요하게 작용, 쓰이는 것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가 지금 괴로움 속에 또 태어나고 있구나!’ 하는 걸 알아내는 거죠. 중생의 경우. 왜 제가 중생의 경우라고 한정하냐면요 이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12연기를 돌리는데 그래서 이걸 3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제가 밑에 해놓은 게 이겁니다.
[* 12연기(유전문流轉⾨/ 환멸문還滅⾨) → 무명無明의 12연기(유루有漏) ① 무명無明(무지ㆍ아집, 탐진치貪瞋痴) ② 행行 / ③ 식識 ④ 명색名色 ⑤ 육입六入 ⑥ 촉觸 ⑦ 수受 / ⑧ 애愛 ⑨ 취取 ⑩ 유有 / ⑪ 생生 ⑫ 노사老死 (3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1~2 전생/ 3~10 현생/ 11~12 내생, 1~2ㆍ8~10 인因/ 3~7ㆍ11~12 과果)
* ‘12연기’는 ‘윤회에 대한 거부와 열반에 대한 추구’가 있기에,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주장하는 대승은 이를 궁극의 진리로 보지 않음. ‘12연기’를 온전히 깨달으면 6지 보살(현전지現前地).
* 명明의 12연기(무루無漏) → 7지 보살(방편지方便地, 본연삼매ㆍ6바라밀) 이상.
① 명明(대원경지大圓鏡智) ② 행行(여실행如實行ㆍ원願) / ③ 식識(4종 지혜) ④ 명색名色(불심佛心ㆍ여래색신) ⑤ 육입六入(부사의업不思義業) ⑥ 촉觸(정념正念) ⑦ 수受(선열禪悅ㆍ자비심)/ ⑧ 애愛(무탐無貪) ⑨ 취取(무주無住) ⑩ 유有(선한 과보) / ⑪ 생生 ⑫ 노사(윤회를 통한 중생구제)
* 5온五蘊
① 색色(색깔) ② 수受(느낌) ③ 상想(생각) ④ 행行(의지) ⑤식識(식별)]
자 보세요. 3세양중인과가요 3세(三世)라는 건 요거죠. 과거 현재 미래. 여기 12연기에는 3세가 들어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가 들어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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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중인과(兩重因果)라는 것은 2중의 인과가 있다는 거예요. 인(因). 과거인(因) 그렇죠 현재과(果), 현재인(因) 미래과(果). 이해되시죠? 그래서 현재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현재는요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이기 때문인데 과거의 결과로 나한테 찾아온 것들을요 내가, 보세요, 뭐만 잘 지키면 될까요? 접촉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희로애락은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이것을 어떻게 내가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갈망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깨어서 다루느냐 6바라밀에 맞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와요. 그럼 보살은요 여기까지(無明~觸) 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되겠습니까? 최소한 여기(渴愛)서부터는 깨어서 느끼고 깨어서 집착(取)을 하지 않고. 그럼 이 존재(有) 형성이 되더라도 보살은 중생을 돕기 위해서 존재, 카르마를 형성시키고 노사(老死)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중생 구제하는 또 새로운 장으로 활용해버린다는 거죠. 6바라밀을 닦을 장으로 활용해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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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보살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들어가면 보세요 제가 보살 입장에서 써놓은 겁니다. 7지보살 이상은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무명(無明) 대신에 여기 뭐가 오겠어요 보살로 말하면? 광명(明)한 참나의 명령 때문에 연기(緣起)가 시작됩니다. 중생을 돕고자 연기를 하기 시작해요. 그 다음에 행(行)은 뭡니까? 여실행(如實行) 진리 그대로 수행하는 거고요, 닦고. 식(識)은요 지혜로 변해요, 인간의 지혜로. 그리고 명색(名色)은요 정신작용과 육체작용은 뭐로 바뀌겠습니까? 여래의 마음과 여래의 몸으로 바뀝니다. 그다음에 6입(六入)은요 불가사의한 업을 하는 6입은 6신통(六神通)이 되죠. 6가지 신통으로 변해요. 보고 듣고 맛보고 이게 다 신통입니다. 깨어서 하면 다 신통이에요. 6신통으로 변하고. 접촉은요 뭐가 됩니까? 정념(正念). 여기서는 깨어있음이 접촉과 항상 함께하면서 느껴지는 그 느낌은요 선열(禪悅)과 자비심, 법열(法悅)로 진리의 희열로 바뀌고. 여기서 갈애(渴愛)는 무탐(無貪), 보시바라밀이 와서 무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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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주고. 여기(取)에는 무주(無住), 취(取)는 무집착으로 바뀌고. 유(有)는 불멸의 선한 과보를 짓게 되니까 당연히 존재가 형성되면서 중생을 구할, 윤회를 통해서 영원히 중생을 구제하게 됩니다. 이 논리로 가야 ‘대승보살의 12연기’가 설명이 돼요. ‘명(明)의 12연기.’ 지금은 소승의 12연기는 ‘무명(無明)의 12연기’고요 대승의 12연기는 ‘광명의 12연기’여야 돼요. 위대한 원(願)을 세워서 큰 원을 세워서 광명한 참나에 기반해서 큰 원을 세우고 이 윤회계의 삶을 경영하는 그런 인과(因果)가 펼쳐지게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이게 공식은 맞습니다. 병(病)이 생기는 공식이 맞기 때문에 요걸 바꾸면요 치료하는 공식으로 바뀌는 거지 반드시 해탈에 들려고 이걸 연구하지 않는다는 거죠. 하지만 물론 설명하다 보면 지금 화엄경도 계속 원래 12연기가요 초기불교 때부터 계속 설명되어오던 소승의 중요한 교리가 되다 보니까 그런 부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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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가 실제 내가 이걸 깨달았다고 한 얘기가 12연기이기 때문에 존중돼서 지금 12연기의 원 결을 그대로 얘기해 주면서도 계속해서 살짝살짝 다른 식 설명을 집어넣고 있는 이유가 이렇습니다. 그 뒤에 한번 보실래요. 이걸 12연기를요 그래서 불자여 요걸 좀 저 7번까지 하고 또 좀 쉴게요.
[6. 불자여,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생각한다. ‘최고의 진리’(생멸이 본래 텅 비어 청정함, 諸法本空)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① ‘무명無明’이라고 부른다. 무명으로 업을 지은 과보를 ② ‘행위’(行)이며, 행위에 의지하는 처음의 마음이 ③ ‘의식’(識)이다. 의식과 함께 ‘사취온四取蘊’(色受想行의 4가지 집착의 다발)이 생겨나서 ④ ‘명색名色’(이름과 색깔)이 되며, 명색이 증장하여 ⑤ ‘6가지 인식이 일어나는 자리’(六處)가 된다. 6가지 인식기관(六根)과 6가지 인식의 대상(六境)과 6가지 인식(六識)의 3가지 일이 합하여 ⑥ ‘접촉’(觸)이 된다.
접촉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 ⑦ ‘느낌’(受)이며, 느낌에 물들어 집착하는 것이 ⑧ ‘갈애’(愛)이다. 갈애가 증장하여 ⑨ ‘취함’(取)이 되며, 취함이 일으킨 번뇌가 있는 업(有漏業)이 ⑩ ‘존재’(有)가 된다. 업을 따라 ‘5온蘊’(5가지 다발)이 일어나는 것이 ⑪ ‘태어남’(生)이며, 5온이 성숙함이 ⑫ ‘늙음’(老)이 되고, 5온이 무너짐이 ⑫ ‘죽음’(死)이 된다.
죽어서 헤어질 때 어리석고 미혹하여 탐하고 연모하여 마음이 괴로운 것은 ‘걱정’(愁)이 되며,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는 것은 ‘한탄’(歎)이 되며, 5가지 감각기관(五根)에 있어서는 ‘고통’(苦)이 되며, 마음(意)에 있어서는 ‘근심’(憂)이 되며, 근심과 고통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 ‘번뇌’(惱)이다.
佛子 此菩薩摩訶薩 復作是念 於第一義諦 不了故名無明 所作業果是行 行依止初心是識 與識共生四取蘊爲名色 名色增長爲六處 根境識三事合是觸 觸共生有受 於受染著是愛 愛增長是取 取所起有漏業爲有 從業起蘊爲生 蘊熟爲老 蘊壞爲死 死時離別 愚迷貪戀 心胸煩悶爲愁 涕泗諮嗟爲歎 在五根爲苦在 意地爲憂 憂苦轉多爲惱]
불자여 이 보살마하살은 지금 한 가지 관점에서 12연기 보는 게 아직 안 끝났어요. 불자여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생각한다. 최고의 진리. 다시 한 번 요약을 해줍니다. 최고의 진리를. 만법이 본래 청정하다는 걸 모르는 게 지금 무명(無明)이 돼버려요. 이게 좀 전혀 관점이 다릅니다. 소승에서는 그냥 나에 대한 집착과 무지가 그냥 무명이었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대승에 오면 만법이 본래 공한 줄 모르는 것도 지금 무지가 돼요. 그래서 이 무지의 내용이 좀 더 바뀌는 거예요. 아무튼 최고의 진리를 본래 깨닫지 못하는 것, 생멸이 본래 없는 줄을 모르는 것, 이것을 무명이라고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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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으로 업을 지은 과보를 행위(行)라고 하며 행위에 의지하는 처음의 마음이 의식(識)이요. 의식이 곧 4취온(四取蘊), 4가지 집착하는 집착의 다발. 5온이에요. 색수상행식을요 보세요. 어떤 분이 황당한 주장하시는 분을 제가 봤어요. 5온은 색수상행식이고 취할 취(取)자 취온(取蘊)이라는 게 있어요. 이거는 전혀 다른 거라고 분석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건 착각하시는 겁니다. 5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생각 감정 오감이고요. 취(取)는 색수상행식이 집착의 대상이 될 때 취(取)자를 더 넣어줍니다. 집착의 대상이 되는 5온이에요. 집착하고 있는 생각 감정 오감을 5취온이라 그래요. 근데 이거(5온)랑 이걸(5취온) 전혀 별개인 줄 알고 얘기하시는 분들도 제가 본 적이 있어요. 5온, 5취온은 그냥 5온입니다. 그러니까 의식이 생겨날 때 식이 생기면 색수상행도 같이 생겨나겠죠. 그래서 이게 식(識)이라면 명색(名色)이라는 건 별게 아니라 색수상행식이 갖춰지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식이 먼저 생겨난 다음에 그 식별능력으로 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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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식별하고 느낌을 식별하고 행위를 식별하고 상을 식별하다가 색수상행식이 다 나타난다. 그게 명색이다. 이해되시죠? 명색(名色) 이제 어려워하지 마세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명색입니다. 여기 색(色)이 있고 명(名)은 식(識)과 명(名) 사이에 있는 수상행(受想行)이나 수상행식(受想行識)을 말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상행식(受想行識)이죠 원만하게 말하면. 그렇게 돼서 명색이 증장하여 6가지 인식이 일어나는 자리가 형성이 되고 6가지 인식기관과 6가지 대상과 6가지 인식이 서로 합하게 되면 접촉이 일어난다. 접촉은 뭡니까? 눈이, 눈을 통해서 눈과 눈 안에 작용하는 안식(眼識)이 마음작용인 안식이, 안식이 안근(眼根)이라는 눈을 통해서 색깔(色)을 만나는 행위, 셋이 만났을 때 3합(三合)입니다. 셋이 만나면 접촉이라고 합니다. 둘만 만나도 접촉인데 더 정밀하게 설명하면 셋으로 설명해요. 그래서 12처라고도 하고 18계, 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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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만나는 걸 강조하면 18계가 되고요. 그래서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 세계는 18계밖에 없어요. 이해되세요? 보는 능력, 또 보는 기관, 그리고 보여지는 색깔. 똑같이 뭐죠 이렇게 해서 6개가 전개되면 그게 존재하는 모두라는 겁니다. 현상계는 다 마음의 세계일뿐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거 말고 있으세요?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계. 색깔이거나 보고 있는 의식이거나 뭐죠 어떤 밖에 있는 정보거나 내 마음 안에 있는 개념이거나 다 이런 식으로요 다 마음작용, 생각 감정 오감으로 만물을 구성해서 그 안에서 살아가고 계신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딱 이게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여기 우주에 여러분이 태어났다고 좁쌀만 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데, 불교는 마음 위주로 설명하니까 여러분 마음에 세계가 들어온 걸 가지고 얘기하는 거예요. 마음 관점에서 보니까. 여러분 마음에 우주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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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는데 여러분 카르마에 따라 태어났을 때 들어오는 우주가 다르다고요. 복을 좀 덜 지으면 탁 들어오는 게 막 소말리아나 북한이 확 들어와요. 그냥 태어났더니 지도자가 막 저 사람이고. 누구는 어떤 사람 마음에는 다른 현상계가 펼쳐지겠죠. 이런 식으로 관찰합니다. 거기 있으면 다른 걸 보게 됩니다. 물론 거기 태어났다는 게 벌이란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를 바꾸려고 보살이 거기 태어나셨을 수도 있어요. 또 그걸 그런 환경을 통해 어떤 영적 성장을 추구하려고 태어날 수도 있어요. 또 이게 부잣집에 태어났다고 복이 아니에요. 눈 떴더니 막 보석으로 가득 차 있다. 봤더니 맨 엄마는 아빠 따로 바람피우고. 막 어려서 마약에 손대고. 마약 살 돈이 또 하필 있어서 마약을 사게 되고. 또 팔겠다는 친구가 생기고. 이게요 이게 참 다르죠 사람마다. 그게 전생, 무명․행으로 인한 카르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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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을 때 의식 안에서 지금 나한테 접촉되는 게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 느낌(受)까지도 사실은 카르마대로 정해져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 걸 접촉시켜놓고 좋은 걸 느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그러면 카르마에 예정된 것들이 느껴지겠죠 다. 하지만 여기(受)서부터 자유의지가 들어갑니다. 사실 접촉에서부터 자유의지가 들어가죠. 깨어서 이 상황을 다스리면요 다른 판단을 할 수가 있어요. 갈애(愛)에 빠지지 않고 다른 판단을 해버릴 수가 있어요. 깨어 있으면 다른 걸 느끼고 거기서부터 다른 판단을 내가 할 수가 있어요. 다른 판단을 하면서부터 새로운 원인(因)이 생겨요. 이해되시죠? 자 이런 식으로 12연기를 이해하시면 아주 좋겠습니다. 이거 가지고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다시 돌아보세요. ‘내가 그때 그걸 느꼈을 때 거기서 참았어야 되는데’ 하는 ‘그럼 업 바꿨을 텐데’ 하는 그거. 그러니까요 무조건 접촉이 왔고 어떤 괴로움이 느껴(受)졌을 때 피하거나 참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제대로 풀어내야 돼요. 왜냐하면 이 현상계를 부정하고 사라질 목적으로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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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업을 안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소승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대승적으로 풀어가는 방식은 그게 아니에요. 업을 오히려 만들어내셔야 돼요. 둘 다 살 방향으로 업을 만들어 버려야 돼요. 그런데 이게 뭐죠 도피하려는 마음이 있다 보면요 누가 와서 괴롭히면 ‘이거 도망가야지’부터 생각합니다. ‘도망가야지. 도망가야지.’ 업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또 다른 업을 쌓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대승에서 보면 해결책이 아니에요. 도망가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대승에서는. 이런 관점도 하나 말씀드릴게요. “도망가야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러면 그 상황을 내가 “그 상황에서 내 집착을 어떻게 해결하고 어떻게 나는 또 새로운 업을 만들 것인가? 긍정적인 업을 만들 것인가?” 이걸 연구해야 됩니다. 학당에서 제시하는 게 뭡니까? “접촉이 와서 어떤 느낌(受)이 일어날 때 깨어서 그 느낌을 바로잡아서 양심 분석을 한 다음에 행동을 자명하게 해버리시라”는 겁니다. 6바라밀에 맞게 해버리시면, 업이 만들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시고 6바라밀에 맞는 업을 만드시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다음 생도 또 수행의 도량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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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을 도울 수 있는 도량에 또 태어나서 계속해서 도를 닦아 가시면 되거든요. 이게 이제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접촉(觸)과 함께 생겨나는 게 느낌(受)이고, 느낌에 물들어 집착하는 것이 갈애(愛)고, 갈애가 증장한 하면 취(取)하게 되고, 취하면 번뇌가 있는 업이 존재(有)하게 되며, 그 업을 따라서 5온이 다시 또 태어나서 또 색수상행식이 다시 태어나고(生), 그에 따라서 다시 5온이 무너지게 되면 늙고 죽게(老死) 된다는 거죠. 죽어서 헤어질 때 어리석어서 미혹하고 탐하고 연모하고 마음이 괴로운 게 걱정이라는 거고. 앞의 근심 걱정을 풀어줍니다. 걱정은 다른 게 아니라 이제 5온이 흩어질 때 어리석고 미혹하여 탐하고 연모하여 마음이 괴로운 게 걱정이고, 눈물 흘리며 탄식하는 게 한탄이고,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있어서는 그게 고통이 되고, 마음에 있어서는 근심이 되고, 근심과 고통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 번뇌라는 것이다 해서 개념을 다 정리해줍니다. 인간의 개념이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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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작용이죠. 단순히 색깔의 작용이 아니고 어떤 상(想)의 작용이죠. 개념화하는 거죠. 그러면 생각과 감정의 작용이 있죠.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작용 말고 생각과 감정의 작용들, 아까 왜 이름이라고 부르냐면요 이렇게 언어를 가지고 잘 구별하기 때문에 이름이라고 하고, 형체가 없고 이름으로만 구별되니까. 또 그게 왜 의근(意根)은 법(法)을 상대로 한다고 하냐면 그 각각이 뭔가 다 다르지 않으세요? 슬픔과 근심과 한탄이 각각 다른 법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마음속에서 각각 다른 이름을 갖게 됩니다. 다른 개념으로 저장이 돼요. 그래서 여러분 마음은 누굴 만나고 있다는 겁니까? 법(法)을 만나고 있어요 사실은. 요것도 재밌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법을 만나고 있어요. 이건 초기불교 이래로 내려온 생각이에요. 여러분 마음은 법을 상대하고 계십니다. 법을 인식해서 개념화하고 계신 거예요. 토끼 사자 말 다 이거는 법을 만나고 계신 거예요. 그 사자, 개별적인 사자 자체를 만나면 시각의 대상이 돼버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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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보면 촉각의 대상이 되고. 하지만 그 소를 만들어내고 사자를 만들어낸 그 법 자체를 여러분이 받아들일 때는 개념으로 마음에서 받아들이십니다. 여기까지 아시면요 불교가 설명하고 있는 게 엄청 많다는 거 아실 수 있습니다. 정밀하고. 자 이렇게 해서 자 마지막 한 줄 다음 단락 볼게요.
[7. 이와 같이 ‘나’도 ‘나의 것’도 ‘짓는 이’도 ‘받는 이’도 없는 가운데, ‘고통의 나무’는 증장한다. 또한 이와 같이 생각한다. “‘짓는 이’가 있다면 ‘짓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짓는 이’가 없다면 ‘짓는 일’도 없을 것이다. 최고의 진리에 의하면 모두 얻을 수 없다.” (유위有爲는 유위에 의해 성립하지 못 하고, 무위無爲의 신묘한 작용에 의해 성립함)
如是但有苦樹增長 無我無我所 無作無受者 復作是念 若有作者 則有作事 若無作者 亦無作事 第一義中 俱不可得]
이와 같이 나도 나의 것도 짓는 이도 받는 이도 없는 가운데. 또 이 소리를 합니다. 이게요 12연기가 참나에서 자동으로 펼쳐지는 거지 거기에는요 이 자체도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나와 남 이 안에서 보면 짓는 이 받는 이가 다 있는 것 같지만 그것도 본래 없다. 그런 가운데 고통의 나무는 증장(增長)한다. 그런데 이 12연기가 쌓여 가면 중생들은 괴로워진다. 중생이 왜 아픈지를 설명하는데 지금 12연기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근데 아까 말씀드렸죠. 이게 병리(病理)라면요 생리(生理)가 있겠죠. ‘병이 이렇게 해서 생긴다’면 ‘어떻게 하면 낫는다’도 있어야 되잖아요. 그 낫는 원리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밝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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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는요 중생을 고치는, 어떻게 해서 치료가 되는지에 대한 연기예요. 이건 어떻게 중생이 아픈지에 대한 연기예요. 어떻게 고통이 시작됐는지? 무명으로 인해서. 그런데 광명이 들어가면 어떻게 거기가 다시 정상화 되는지가 나오겠죠? 대승불교는 정상화를 시키고 싶은 거고, 그쵸 소승불교는 아예 이것도 저것 다 없애버리고 업 자체에서 초월하겠다는 발상이고. 그래서 2개가 다릅니다. 대승은 ‘초월할 게 없다’는 얘기를 하려고 애초에 없다는 얘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어디 열반으로 갈 필요가 없어요. 애초에 없는 거니까. 이해되세요? 12연기가 본래 공한 거니까 애초에 딴 데로 어디 가실 데가 없다고요. ‘12연기에 의해서 나는 어디로 가야겠다’ 그게 아니라 ‘12연기 자체가 공하다’니까요. 마음의 작용일 뿐이니까 그거랑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참나의 작용이니까. 짓는 이가 있다면 짓는 일이 있을 것이고, 하지만 짓는 이가 없다면 짓는 일도 없을 것이다. 누가 짓는 존재가 없다면요 이걸 받아야 할 대상도 없고 이런 행위도 없는 거니까 애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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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거니까 최고의 진리에 의하면 모두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12연기도 본래 공하다.’ 이러고 끝내버려요. 이게 대승의 맛입니다. 12연기에 너무 매이지 마시라고요. 이거는 중생의 아픔을 치료해 줄 때 여러분이 참고하셔야 할 공식입니다. “이렇게 아프게 됐구나!” 왜 중생이 이렇게 어둡게 태어나서 죽고 있으면서 지금 자꾸 학년을 못 올라가고 유급만 계속하고 있는가? 이 이유 때문에 그래요. 보세요. 이 이유에, 여기에 한번 걸리면 죽겠죠? 이 수레바퀴에 걸리면요 12연기에, 보세요
탐진치 한번 어두우면요(無明) 어둠의 카르마가 와가지고(行) 여러분을 지배하고(識),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까지 지배하고(名色․六入․觸), 거기서 느낌을 여러분이 깨어서 못 하고 다시 그 업대로 끌려가서 판단해버리신다면 자유의지가 있어도 못 써먹고 여러분은 더 일이 안 되는 방향으로 자유의지를 쓰게 돼서 그게 다시 여러분 삶을 어둡게 해요(受․愛․取․有․生․老死). 다 악순환입니다. 악순환이 일어나는 지금 공식이에요. 한 번 들어선 탐진치가 여러분 인생을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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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예요. 그런데 이 탐진치를 조금이라도 밝음의 지혜로 바꿔놓으면, 지혜와, 탐진치의 반대는 지혜와 사랑이겠죠, 지혜와 사랑으로 바꿔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역지사지와 거기에 진리에 대한 자명함이 들어가 버리면 다 바뀌어요. 성숙한 인생의 여정이 펼쳐집니다. 그러면 우주를 두려워할 게 아니고 그냥 밝음의 연기로 계속해서 살아가면서 남들도 고쳐주고 나도 스스로 죄 짓지 않고 선순환(善循環)이 일어나죠. 선의 순환이 일어나죠. 이게 대승의 목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자체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12연기를 받아들이되 “본래 청정하다”라고 생각해버리라는 거예요. “탐진치랑 싸우지 말고 탐진치도 본래 청정하다는 걸 알고 좋게 그냥 쓰시라”는 겁니다. 그걸 이용해서 화엄세계(華嚴世界)를 만드시라는 겁니다. 진리가 현실화되는 세계. 6지보살이 제일 잘하는 게 뭐라고 했나요? 이런 공의 세계에 있는 진리를 현상계에다 끌어내는 거 나타내는 거 제일 잘한다 그랬는데 만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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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2연기가 맞다면 6지는 뻘짓이죠. 공으로 들어가고 끝내야지 왜 도대체 공에 있는 걸 왜 나타내고 있어요 무상한 현상계에서? 무상․고․무아의 현상계에서 빨리 떠날 생각을 해야지 12연기 공식을 알았으면. 왜 6지는 이 공식을 알고 현상계에서 6바라밀을 더 잘하는 쪽으로 가고 있냐 말이죠. 이거는 석가모니도 좀 보여주는 모순입니다. 8정도를 그렇게 또 강조하세요. 그러면서 열반을 강조하니까 모순이 일어나는 겁니다. 8정도를 더 잘하는 쪽으로 가면 대승불교가 나오고, 열반을 강조하다 보면 소승불교가 나와요. 석가모니 안에는 이런 모순적인 모습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걸 해명하려다 보니까 일관되게 해명하려다 보니까 대승식 해명이 나와 버리면 대승불교로 나오고, 열반을 더 중심으로 놓고 해명을 전체를 논리를 꿰면 “살았을 때만 8정도 하고 빨리 열반에 드는 게 장땡이다”가 되고, 대승식 논리는 “열반에 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8정도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해서 “8정도를 잘하려면 현상계에 계속 와 가지고 또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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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해요. 이렇게 다르죠. 헷갈리실 수도 있는데요 제 얘기를 계속 들으시다 보면 뭐 별 거 아니다 하는 거 아실 겁니다. 그래서 이런 머릿속에 내비가 선명해야 여러분이 가시는 길을 정확히 안내해 줄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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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윤홍식의 화엄경 강의 46강 - 6지 현전지(現前地)(54:19)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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