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강의 창조, 상승의 욕망
- 이어령의 「폭포와 분수」를 중심으로 -
전영순
1. 들어가며
인간/자연, 동양/서양, 인공/자연을 이원화시켜 한 편의 작품으로 맛깔나게 담아낼 수 있을까? 근대적 성찰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 봄 직하다. 문학은 역사의 기록보다 진지하고 철학적인 진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추상적 사상에 대한 개념화가 쉽지 않다. 특히 수필과 같은 산문은 타 장르와 변별성을 문장에 두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문장이 산문의 문학성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이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인만큼 수필에 있어 문장력은 작품 전체를 지탱하게끔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 작가의 내심에 투영된 감정이나 정서, 철학적 인식 등을 탄탄한 문장으로 형상화해 놓는다면 누가 감히 수필을 신변잡기라고 말하겠는가. 논픽션을 토대로 한 수필은 타 장르와는 달리 독자와 공감대가 형성되어 불확정성이란 공란을 쉽게 메워갈 수 있는 대중적 접근성이 크다. 한 편의 수필로도 작가의 기량을 알 수 있는 건 작가의 정서와 사상, 교양, 지식 등이 작품 속에 녹아있어 작가의 총체적 곳간이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을 접하면 정서적 울림을 넘어 삶의 활력소가 된다. 감성과 이성, 동양과 서양, 자연과 인공에 대한 관점이 모나지 않게 균형감각을 이루고 있는 수필「폭포와 분수」는 누가 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문제는 편향되지 않는 균형감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학자, 문학가, 언론인, 정치가로 명성이 있는 이어령의 수필「폭포와 분수」가 왜 좋은지를 저울대에 올려놓고 균형감각의 관점에서 비평해 보고자 한다.
2. 펼치며
로마제국 귀족들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불문율을 중요시했다. 이 말은 자칫 귀족들만 고귀하다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차별화에 익숙한 서구인들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은 권력과 부에 대한 욕망이 깔려 있다. 인간이 고귀하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부와 권력 따위가 필수적이고, 부와 권력은 본질적으로 가진 자에게 수평적 존재들을 지배하려는 수직적 사고가 부여한다.
서양적 사고는 한마디로 주체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원화로 타자를 억압하여 얻은 불평등한 결과다. 헤겔의 백색 신화는 이를 잘 증명한다. 만민평등, 미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인본주의 동양사상과의 차이가 있다. 이에 따라 인간의 타자 지배, 억압 욕망은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자연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수필 「폭포와 분수」를 통해 동양인과 서양인이 바라보는 시각과 정서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근대적 성찰의 한 측면이라 하겠다.
우리는 어떤 국가나 문화, 사물이나 개인으로부터 받는 인상을 토대로, 그것의 특징이 이러이러하다고 개인의 의견을 말한다. 이 인상이 단편적일 때 우리가 내린 단정은 속단이 될 수 있고, 속단은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 과정에 있어서 이 일반화 작용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 작용으로 우리는 개념을 형성하고 그 개념을 통하여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다. 속단이 아닌 정확하고 타당한 일반화 작용이 되기 위해서는 경험의 단편적 인상을 뛰어넘어 그 본질을 파악할 때 가능하다.
타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일반화한 개념을 사용하여 그 문화의 특징을 지적하는 일은 흔히 우리가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한 불가피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편적 인상으로 일반화할 수도 있고, 본질적 파악에서 오는 개념을 일반화할 수도 있다. 물론 동서 문화의 본질적 파악으로부터 오는 개념을 가지고 동서 문화의 특징을 묘사할 때, 이런 묘사는 동서 문화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흔히 동양과 서양에서 동서 문화의 특색을 말할 때, ‘서양의 물질주의’와 ‘동양의 신비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일반화는 깊은 생각과 성찰이 없는 동서 문화의 특징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동양에도 물질주의 사상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서양에도 신비주의 사상이 결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식별은 아마도 서양은 물질주의이고 동양에는 이런 물질문명이 발달하지 않아서 신비주의라는 말로 묘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철학적 또는 사상적 흐름을 깊이 살펴보면, 이러한 대조와 비교는 타당성을 잃고 만다.
본질적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동서 사고의 방법론적 고찰이 필요하다. 비교 철학을 연구하는 현대 철학자 가운데 많은 학자가 서양의 지성과 동양의 직관이라는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서양의 사고방식은 '지성적이성적논리적'인데 반하여 동양의 사고방식은 직관적이라는 것이다. 직관은 보는 전체를 관망하는 것이고, 지성은 이 보는 것을 분석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가정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서도 보지 않고 생각할 수는 없다. 먼저 보고 경험한 것을 분석하고, 궁리하고, 추리하고, 가정하는 것이다. 동양의 직관도 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생각하고 궁리하는 직관적 관망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2-1 동서양의 사고방식과 대조법의 효과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 차이는 분명하다.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실제로 동양인과 서양인이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데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폭포와 분수」는 동서양의 차이를 논한 수필이다. 동양인들은 상호의존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를 전체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지만, 서양인들은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를 전체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여긴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성공과 성취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영광을 의미하나,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개인의 업적을 의미한다.
동양인들은 인간관계 속에 조화롭게 '적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하지만, 서양인들은 개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동양인들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간관계의 조화를 추구하지만, 서양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인간관계를 희생해서라도 정의를 추구한다. 동양인들은 위계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집단의 통제를 수용하지만, 서양인들은 형평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선호한다. 동양인들은 모순과 논쟁을 회피하지만, 서양인들은 법률, 정치, 과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논쟁을 끌어들인다.
서양 문화가 이성 중심적인 데 비해 동양 문화는 감정에 포커스를 두고 있는 문화이고, 지적 논리의 추구보다 감성적 직관에 의한 경험적 실체 파악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서양이 물체나 결과에 관심을 두지만, 동양은 감정이나 사건의 과정에 관심을 두는 데 따른 현상이다. 서양 문화가 실증주의를 강조할 때, 동양 문화는 간결하게 본질을 꿰뚫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쉽게 말해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거나 어색함이 없음을 말한다. 어쩌면 자연스러움이란 태초의 본질적인 성질이 내포된 것이 아니라 이미 타자에 따라 정형화된 인간 중심의 지배담론인 헤게모니가 내재하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증주의, 과학주의 사고는 자연 과학의 발전, 기술 문명의 개발에는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서양적 사고는 주(主)와 객(客)이란 이중성이 개념에 입각한 논리 구조를 실체에 의한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무엇보다 과학, 물질문화 발전은 사회와 환경으로부터 인간의 가치를 괴리시키고 불안을 일으켰다. 권력이 개인을 타자화하면서 개인의 삶이 자유롭지 못해 불행하다고 한 푸코의 말처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태계는 약육강식하며 이분법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인간도 자연도 이분법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동서양인이 바라보는 시각 또한 그러할 것이다.
수필 「폭포와 분수」의 물줄기에서 동서양의 느끼는 정서와 시각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이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폭포와 분수는 서로 대립항적 가치를 지닌다. 이어령은 대립항의 고수다. 수사법의 대조는 설득의 방법이고 언어의 전략이다. 효과적 표현과 전달을 염두에 둔 새로운 언어의 발견이고 기술이다. 대조법은 문장의 평범성을 벗는 데 도움을 주고 독자를 이끌어 나가는 작용을 한다. 말하자면 진실성에 충실하고 평범성을 벗는 두 가지 요소를 지닌다. 대조는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표현 방법이라 했거니와 수필문장은 다른 산문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함축성이 담겨야 하므로 서로 다른 개념이나 질량감을 대립시켜 문장의 뜻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런 기법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2-1-1. 하강하는 폭포에서 피어나는 창조
인간의 감각 중 가장 간사한 것이 시각이다. 보는 주체의 기분에 따라 사물의 형상은 다른 모습을 띤다. 특히 현대는 과학과 매체 기술의 발전으로 시각문화가 지배적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던 우리 주위는 어느 때부터인가 온통 문명의 조형물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복합적인 시각물이 앞다퉈 우리의 삶 속으로 투과된 것은 불과 최근의 일이다. 문명이 개입되면서 수평적인 공간이 수직으로의 전환을 호소하고 있다. 딱딱한 공간에 들어선 조형물은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시각문화의 상업성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가 현대사회의 가장 역동적인 중심 영역이 되는 까닭은 시각문화의 지배적 속성 때문이다. 시각문화의 지배적 위상은 대중적 취향의 강화를 동반한다. 왜 시각문화의 지배성이 대중적 취향의 강화를 동반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어령의 <폭포와 분수>는 이런 속성을 잘 묘파하고 있다. 다음 인용 예문은 동양인이 사랑하는 폭포와 서양인이 사랑하는 분수에 대한 정서적 차이를 잘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동양인은 폭포를 사랑한다. 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란 상투어가 있듯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그 물 줄기를 사랑한다. 으레 폭포수 밑 깊은 못 속에는 용이 살며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한다. 폭포수에는 동양인의 마음속에 흐르는 원시적인 환각의 무지개가 서려 있다.
폭포는 깊은 산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하고 있다. 내 것, 네 것,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넓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어 누구나 항시에 가서 향유할 수 있다. 자연 속에 묻혀 있다 보면 물아일체가 되어 전설 한 편 정도야 쉬이 우려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작가는 상승이 아닌 하강하는 폭포수 밑에 용이 살고 있으며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는 듯한 환상에 잠긴다. 이 수필에 의하면, 동양에서는 용과 선녀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상징물의 매개로 삼는다. 용은 땅속과 지상을 넘나들며 세상사를 훤히 꿰뚫어 보며 동양인에게 희망과 복을 주는 동물로 등장한다. 선녀는 천상의 여자로 지상에 내려와 하늘의 일들을 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에 도취하여 흠모하는 지상의 남자에게 발이 묶이고 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어령은 천상과 지상, 몽환적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무지개를 등장시키고 있다.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문장과 같이 호흡이 맞아야 한다. 떨어지는 폭포에서 원시적 전설이 꿈틀거린다. 한 문장 안에 이어령은 구운몽 한 편을 던져놓았다. 노드롭은 동양적 사고 방식은 ‘직관에 의한 개념’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보았는데 직관이란 직관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감지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위 인용문에 묘사된 ‘원시적 환각의 무지개’는 지각적 관점의 결과라 하겠다.
2-1-2. 상승하는 폭포, 솟구치는 욕망
현대 이후의 시대 즉, 미래를 다중의 시대라 한다. 후썰이 현대를 위기의 시대라 밝혔듯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매체의 발달로 우리 주위는 온통 인간의 욕망에 따른 부속물로서 인공물이 난무할 것이다. 인공물이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지나 않을까 우려마저 든다.
서구인들은 분수를 사랑한다. 지하로부터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오르는 분수, 로마에 가든 파리에 가든 런던에 가든, 어느 도시에나 분수의 물줄기를 볼 수 있다. 분수에는 으레 조각이 있고 그 곁에는 콩코르드와 같은 시원한 광장이 있다. 그 광장에는 비둘기떼가 날고 젊은 애인들의 속삭임이 있다. 분수에는 서양인의 마음속에 흐르는 원초적인 꿈의 무지개가 서려 있다.
분수는 폭포와 달리 빌딩 숲이나 탑과 함께 도시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자연에서 벗어나 인간세계에 뛰어들어 마치 인간의 욕망과 대적이라도 하듯 상승한다. 위치하는 곳도 도심의 광장이다. 향유자들도 특정한 공간에서만 볼 수 있는 불특정 다수다. 부와 문명의 권위로 인공의 힘을 가하면 가할수록 지칠 줄 모르고 솟아오른다.
모든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분수도 조각상을 대동시킨다. 평화의 상징물인 비둘기를 동원해 자연과 대적할 태세를 갖춘다. 마치 인공물이 자연물보다 우위라는 걸 과시하듯 말이다. 이어령은 젊은 애인의 속삭임을 끌고 와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분수가 설치된 광장에 무지개는 앞으로 이 세상을 지배할 젊은이들의 낭만과 욕망이 겸비하고 있다.
폭포가 자연에 순응한다면 분수는 인간과 기계에 복종한다. 이어령은 물의 본질적 기질마저 바꾸어 놓은 문명의 지향성을 깊은 통찰력으로 잘 표현해 놓았다. 폭포 분수, 용과 선녀/조각과 비둘기, 무지개를 등장시켜 정서적 낭만과 인간의 욕망을 잘 대비시켜 놓았다. 이 수필에는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는 말이 놓여 있는데, 이 말은 그 폭포를 자로 재어보아 꼭 삼천척이 되니까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 폭포를 볼 때 삼천척이라고 직관하고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동양인의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고방식은 정밀하게 재어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보고 느끼는 바를 그대로 표현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동양적인 사고방식에는 정밀한 개념적 묘사는 없고 본질적으로 시적이라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반하여 그리스 문명을 토대로 하고 성장한 서양 문화의 철학적 견해는 억지로 꼬집어 말하라면, 아마도 서양인의 사고방식은 상인의 견해를 가진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희랍의 철인들이 활동하던 곳은 도시요 또 도시는 상인들의 활동이 빈번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인의 이성에 관한 이해가 오늘에 와서는 객관적이요, 타산적이요, 조작적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을 보더라도 서양 철학의 기본적 견해는 상인의 견해라고 할지라도 과히 틀리지 않는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위 인용문에 나타나고 있는 조각과 광장은 도시를 위한 도시인을 위한 인공물이라 하겠다.
2-2.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
어떤 일이나 사물의 성질이나 형태를 구분 비교하여 옳고 그름의 분별력을 주역에서는 음양으로 봤다. 자연현상 또한 인간사회와 같이 음양의 질서와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자연도 인간과 같이 동일한 존재로 본 것이다. 동양사상은 주와 객, 감성과 이성의 불가분적 음양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서양 문화가 시간과 공간을 이분법적으로 개념화하여 각자를 선형화(線形化)하고 정적인 것으로 보지만, 동양에서는 시간과 공간보다 그 사이에 있는 생태를 먼저 중요시하였다. 동양의 공간은 '공간으로 이루어진 시간'이고, 시간은 '시간으로 이루어진 공간'인 것이다.
동양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대상과의 '사이[間]'의 개념을 중요시한다. '사이'의 크기는 기능과 사회적 위계질서에 영향을 받는 탄성(彈性)이 있다. 또 공간, 시간, 인간 모두 사이의 한 동류(同類)이다. 서양의 과학적 사고가 물체를 부분들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불변하는 요소를 분석함으로써 본질 파악을 추구하였다면, 동양은 사이, 즉 요소 간의 관련성에 초점을 두고, 거기에서 가치와 원천을 찾았다.
폭포수는 자연이 만든 물줄기이며, 분수는 인공적인 힘으로 만든 물줄기이다. 그래서 폭포수는 심산유곡에 들어가야 볼 수 있고, 거꾸로 분수는 도시의 가장 번화한 곳에 가야 구경할 수가 있다. 하나는 숨어 있고,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 있다. 폭포수는 자연의 물이요, 분수는 도시의 물, 문명의 물이다.
장소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물줄기가 정반대이다. 폭포수도 분수도 그 물줄기는 시원하다. 힘차고 우렁차다. 소리도 그러고 물보라도 그렇다. 그러나 가만히 관찰해 보자. 폭포수의 물줄기는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낙하한다. 만유인력, 그 중력의 거대한 자연의 힘 그대로 폭포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물이다.
물의 본성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또랑물이나 강물, 아무리 거센 폭포라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중력에 순응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인생을 물 흐르듯이 살아야 한다고 한다. 이 물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다. 폭포수도 동양인의 성정과 같이 거역이나 폭력적이지 않고 더불어 사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동양인이 자연친화력을 이루고 있는 것도 사후세계와 현실 세계를 윤회사상으로 보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세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분수는 대개가 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분수들이다. 화산이 불을 뿜듯이, 혹은 로켓이 치솟아 오르듯이, 땅에서 하늘로 뻗쳐 올라가는 힘이다. 분수는 대지의 중력을 거슬러 역류하는 물이다. 자연의 질서를 거역하고 부정하며 제 스스로의 힘으로 중력과 투쟁하는 운동이다. 물의 본성에 도전하는 물줄기이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천연의 성질, 그 물의 운명에 거역하여 그것은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하듯이 솟구친다. 가장 물답지 않은 물, 가장 부자연스러운 물의 운동이다.
분수는 화산과 로켓같이 대지의 중력을 거슬러 역류한다. 자연의 순응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거역하고 부정하며 도전이다. 분수는 물의 성질을 거슬러 주먹질을 하듯이 솟구친다고 작가는 말한다. 마치 서구인들이 말하는 역사와 인간 생활을 지배해 온 창조적 힘이란 것이 문명의 질서를 파괴하여 얻은 산물인 듯 말이다. 서양인이 동양인과 달리 사후세계에 대해 이질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는 이상 자연을 인간의 욕망 대상으로밖에 볼 수 없다. 분수는 인위적인 힘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자연의 질서를 거역해 이룩한 인간의 욕망이 기계문명에 지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수필을 통해 어떤 문화 현상이나 사회 현상 등을 묘사하거나 부각시키고자 할 때, 작가는 그 실상을 정확하고도 철저하게 파헤쳐 올바른 판단을 거쳐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수필 작품으로서의 가치와 권위를 지닐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명확한 진단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령은 명쾌한 논리와 제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동서양의 차이를 예리하게 파헤쳤을 뿐만 아니라 비교 분석 종합이라는 인식 과정을 통해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와 그 가치까지 묘파하고 있다고 하겠다.
3. 나오며
지금껏 이어령의 수필「폭포와 분수」를 가지고 동서양의 사고와 문화의 차이에 대해 알아보았다. 물이란 성질을 가지고 자연미와 인공미, 동양인과 서양인의 성정, 순응과 거역 등 과학과 철학, 문학성을 겸비한 한 편의 수필이었다. 모든 문학이 그러하듯이 좋은 수필은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연상과 상상이란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수필가들은 자신의 삶에서 부딪히고 체득하는 여러 가지 역사적, 시대적 상황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이를 자신의 수필 작품 속에 투입시켜 구체화하기 마련이다. 이어령도 마찬가지다. 자신 속한 문명권의 특성을 대조해서 문학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갖고 있는 민족의식을 논리적 진술로 작품에 반영시켰다.
동양의 순환적인 시간관과 서양의 직선적인 시간관은 현대를 장악하고 있는 문화와도 직결된다. 요즘 서양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동양인들의 자존심이 서양의 직선적이고 솟구치는 욕망에 군림 되어 하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동양은 사단칠정론,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뿐만 아니라 유교사상, 도교사상 등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생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믿어왔다. 반면 서양은 신본주의에서 실존주의로 건너오면서 이미 신도 죽었다 할 만큼 인간의 존엄성은 개인주의의 욕망이 만연하는 세계로 전이되어 권력과 투쟁을 앞세운 자본주의로 변모하였다. 때문에 이 수필을 읽으면, 작가의 역사의식과 시대 의식을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의식이 올바르고 명징하므로 이 수필의 수준 또한 높이 평가된다.
자연의 순리에 거역하지 않고 떨어지는 폭포수 아래에 용이 살고 있다는 비단결 같은 전설은 분수대 앞에 자리한 비둘기 조각이 아니라 무력과 폭력을 잠재우는 평화의 메타포다. 작가는 작품 속에 우리의 전설적인 상상의 세계를 도입시켜 동양적 사고와 문화의 자연스러운 힘과 미학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갔다. 미디어의 발달로 신속하게 변화하는 현대문명의 난폭한 질주와 무분별한 상승이 만연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좋은 수필은 언제 누가 봐도 고전의 전범이 된다. 대조 기법을 적용한 문학성과 방법론적 고찰을 통한 철학성이 가미된 「폭포와 분수」는 신변잡기로 천대받고 있는 수필적 가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