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장;
전통적 중국과 전통적 한국 - 종말적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들
이 장은 종교의 탄생과 주변 환경사이에 긴밀한 상호작용이 존재함을 전제로 쓰였습니다. 역사에서 이슬람과 같은 공격 성향의 종교들은 사막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험악하고 가혹한 자연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의 한 가운데서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온순하고 편안한 자연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환경에서 공격적이지 않은 종교들은 나타났습니다. 대부분의 이상주의 운동들도 동학과 태평이 그렇듯이 사회적 경제적 위기라는 엄혹한 배경에 대항해서 생겨났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침체와 관련, 중국과 한국의 새로운 종교 조직들은 소말리아에서도 그랬듯 그 세력이 커졌습니다. 카사넬리 교수가 주장하듯이 19세기 후반 20년간에 걸쳐 소말리아의 상인들과 농민들 그리고 유목인들이 겪고 있던 경제적 문제들은 정치적 분열을 가져왔으며 차례로 그 정치적, 경제적 침체 양상이 새로운 종교조직을 촉발시켰을 것입니다.
전통적인 중국
중국의 역사에서 여러 세기 동안, 특권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사이 : 지주대 소작인, 영주대 시민, 정권의 무능과 부패와 억압에 대항한 민중봉기 등의 수많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흔히 봉기는 한정적인 목표 - 생존 권리 보장, 고통의 경감 및 제거 등 - 를 위한 것이었고 가난과 차별과 억압과 부정과 고통은 정권에 대항한 파괴적 분노 표출로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 주요요인이 되어왔습니다. 19세기 중엽, 중국이 어느 때보다 악화일로의 길을 걸어갈 즈음, 태평난이 발생했습니다. 서양의 권력, 특히 영국은 중국으로 세를 확장하면서 (동양의) 어떤 다른 외침, 심지어 몽골의 징기즈칸의 침입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온 나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국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서양세계로 부터의 충격은 군사, 경제, 정치적 영향뿐 만아니라 정신적, 종교적, 문화적 반향을 가져왔습니다. 정신적 영향력이 현저했던 서양의 정신주의(사상, 관념)들로는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계시적 견해, 그리고 종말론에 근거한 몇 가지 종교적인 것들이 있었습니다. 유럽 중세기 때, 가난한 사람들과 소작농들은 스스로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개선하기 바랐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욕구 속에는 지상의 새로운 낙원, 즉 고통과 죄로 부터 정화된 세계요, 성인들의 왕국과 같은 환상들이 자연스럽게 주입되었습니다. 중세 후반기 동안 완성된, 거칠지만 가히 혁명적인 종말론은 그 원전들이 고대 세계로부터 전해져온 예언들의 잡다한 모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예언들은 근본적으로 종교집단들에 의해 고안된 것들입니다. 초기 유대교와 후기 기독교는 억압의 위협 혹은 억압적 현실에 직면해서 그(예언적) 지혜로 자신들을 위로하고 (마음을) 강화시키며 (비젼을 갖고) 나서려 했습니다.
일부 중국 사람들이 서양으로부터 기술을 습득하고 있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로 부터 이상주의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름 없고 권력도 없는 사람들이 중국의 전통적 권위에 대항하여 정신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이상주의 사상을 들고 나왔을 때, 그것은 어마어마한 봉기(반란)를 촉발시켰습니다. 태평 반란은 이제까지 보아 왔던 형태와는 아주 다른 반란이었습니다. 그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이상주의였습니다. 태평 반란은 이상주의의 기독교적 개념에 상당히 많은 덕을 입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이상주의 없이 그런 반란은 발생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논쟁 지점이 있습니다. 중국사회의 전통적 본질, 그리고 서양의 침입으로 인해 뿌리째 흔들렸던 그 물질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손상 정도는 이상주의 운동과 관련하여 필자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핵심 초점입니다.
전통 중국 사회의 구조
중국사회는 만주 청나라 통치 시기(1644-1911) 동안 전 근대 농업과 봉건 사회였습니다. 그렇지만 서양 유럽(봉건)사회와는 전혀 다른 노선입니다. 청 왕조는 중국 한족이 아닌 이방 만주족에 의해 통치되었던 나라였습니다. 청 왕조는 명 나라(1368-1644)에 이어 권력을 잡았습니다. 만주인들은 약해진 명왕조의 통치권 밖의 반란을 진압하며 도움을 준 것을 기회삼아 1644년 베이징을 함락, 중국 통치를 시작했으며 중국 남부지방의 통치는 정복 전쟁에 협력했던 중국 장수들에게 위임했습니다. 누르하치(1559-1626)는 최초 만주인 황제였고 수 세기 전에 징기스칸(1167-1227)이 범했던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만주족 정부의 지속성은 여러가지 요인들에 기인한 것입니다. 한 가지 이 정부는 인상적인 군사력을 보유했습니다. 청 왕조기간 동안 중국 국경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정부 고위 관료들과 중요 지위는 만주인들이 차지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중국 사상을 활용하고 주의 깊게 관료통치를 유지 하였습니다. 수도 북경은 만주인과 중국인 관리들을 함께 배치했습니다. 왕조 통치라 불릴 만큼 수많은 관리들이 있었으며 만주인 지배 하에서 소수민족들과 청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중국(한족) 사람들에게 행한 군사 강제력과 일련의 억압적 정책의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당시 정치 군사조직에 황제의 사람들과 만주 귀족 상류층이 집중되어 몰려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황제의 한 마디는 군사행정조직을 통해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하달되었습니다. 일부 중국인들이 권력 구조에 들어 있기는 해도 만주인들은 주의 깊게 정치적 지배를 총괄했습니다. 만주인들에게 중국 엘리트들의 중국지배 활용은 만족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만주와 몽골과 중국인들로 편성된 20만 명의 팔기군(바쿠이)과 중국인(한족)으로만 구성된 록영(루잉)이 중국 전역에 배치되었고 록영군은 보병대장의 지휘아래 놓여있었습니다. 두 가지의 군대조직은 청나라가 통치권을 행사하는 주요 권력이었습니다. 청은 점차로 억압 정치를 확대해 나가는 정책을 채택하고 피정복인을 나타내기 위해 중국인들로 하여금 머리를 밀게 하여 변발시켰습니다.
1786부터 태평난이 있기 전인 1820년 시기 동안, 300만 명 이상의 중국 인구 중 90%가 소작농이었습니다. 이들이 내는 농지세가 청나라 전체 세수의 75%에 달했습니다. 중국 전통사회에서 지주들은 노동(근로)세, 물품(생산)세, 통화(유통)세 등 세 가지 항목으로 소작인들을 착취했습니다. 주로 물품세가 많이 차지했습니다. 사회, 경제적 양상에 비추어 중국 전통 사회는 중세기 유럽 봉건사회와 달랐습니다. 사회에서 계급적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 구성계급의 구조와 지위와 관심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골은 전통 중국 사회의 대표되는 모델로서 가난한 자와 부자, 농업 노동자와 가난한 소작인, 지주 등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 특징 안에서 시골은 다차원적이기도 했습니다. 지주들은 대부분 부유했고 일부는 만주인 귀족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습니다. 다수 지주들은 청나라의 정치적 질서를 지지했고 일부는 문무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이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특권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반란에 적대적이었습니다. 금천에서 태평천국난이 발생했는데 그곳 지주들은 토지세를 늘여 잔인하게 소작농민들을 착취했습니다. 또 홍수, 한발, 기근 등 자연재앙이 지역을 휩쓸 때마다 소작인들에게 높은 이자로 재활을 위한 자금을 빌려주며 고리대금 사업을 했습니다. 전통적 중국 사회에서 국민들 대다수는 대체로 개별 지주들과 청나라 당국에 의해 억압받기 십상이었습니다. 중국 토지 제도와 전통의 미명아래 지주들과 소작인들 양쪽 모두 불안정한 경제적 환경 속에 살았습니다. (지주 쪽) 사람들은 자신의 토지를 감소시킬지도 모르는 측정방식에 대해 불안스러워 했고 (소작인들은) 충분한 곡식들을 생산해서 역경이 닥쳤을 때도 살아갈 수 있도록 애를 써야한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가난한 소농들과 소작인들은 서로 협동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로운 공동체 정신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어떤 단 한 가족도 자급자족을 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토지를 확보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자연재해를 맞거나 혹은 과잉인구가 되면 다른 땅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태가 이런데도 사람들은 보다 안정된 생존조건을 만들기 위해 길을 찾았고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부를 쌓을 잠재성이 큰 관직을 얻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관리 시험에 합격하면 공직이 보장되고 사회경제적 관점으로 봐서 마르크스계열 사학자들은 당시 이러한 현상을 '천국의 토지제도(tianchao tianmou zhidu)'를 통해 태평신도들에 의해 파괴되어 없어지고 말 체계지만 중국사회의 봉건적 특징을 기본적으로 잘 나타내는 것으로 평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예를 들자면 16C 유럽에서 있었던 토마스 뮌쩌의 이상주의 운동에 나타난 반봉건 운동과 결정적 차이인 것입니다.
중국 소작농들은 그들이 관직을 갖는 토지소유주가 되려는 마당에 평등권 실현을 이루기 위한 의도들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전통적 중국사회에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봉건적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토지는 공유재산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시대의 중국에서는 관리가 되는 것이 토지가 있어 그것이 생존을 보장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관리들은 여러 분야의 특권을 누렸고 세금문제, 평민들과의 분쟁에서도 유리한 선처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토지를 소유할 기회도 많았고 그들 생애에 토지개별소유였지만 부모 소유의 토지를 유산으로 받고서 그 토지들은 자손들에게 균등분배 되었습니다. 이런 상속제도는 세계에서 드문 것입니다. 지주들이 관리들과 권력싸움을 하게 되면 토지를 잃게 되는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그 일례로 홍수전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토지를 사 주는 것보다 관리 시험에 합격해서 정부 관리가 되게 하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중국 국민들은 반복해서 대내외적인 고난을 겪었으나 중국을 통합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충분히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황제와 유교 지식인들, 그리고 유교 교육을 받은 관료들뿐이었습니다.
전통 중국 농경사회는 작은 규모의 수많은 지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토지소유주 사망 시 토지가 장남에게 유산 상속되지 않았고 아들들에게 고루 분배되었습니다. 황제일가와 귀족들과 같은 특권층들은 유산제도를 통해 나라의 요직들을 물려받고 보통 소작농민들은 매년 지주들에게 농업 생산품판매액의 절반 정도를 소작료로 내야했습니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했던 광서지역에서 물품세율이 50%를 넘어섰고 60%, 70%를 거쳐 최악의 상황인 80%까지 뛰었습니다. 세금 외에도 소작인들은 대가없이 지주 노역을 해야 했고 징벌 수준의 과세에 광서지방은 중국의 여타 다른 지방보다 더욱 심한 빈곤에 시달려 고통스러웠습니다. 토지는 중국의 주요 수입 자원이라 사람들이 늘 할 수만 있으면 땅을 차지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병합과정을 거쳐 그 결과로 소수의 거물들에게 토지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부자는 대토지를 갖고 있지만 빈자는 설 땅도 없는 사회'로 변질되었습니다. 광서지역에 왜 이렇게 수많은 객가인들(Hakkas)이 배상제회와 태평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알기위해 여태 우린 중국전통사회의 사회, 경제, 이념, 종교적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했습니다.
청나라 초기로부터, 부분적으로 건륭황제와 도광황제의 통치기간 동안 중국 인구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여 1741년 중국 전체 인구는 1억 4천이었습니다. 태평난이 발생했던 광서의 인구는 1661년 58만 명에서 1840년에는 763만 명에 달해 당시 중국의 다른 지역 인구증가율의 두 배 가량 되었습니다. 청나라의 통계에 의하면 1724년 광서의 인구는 20만 명, 그러나 1851년에 782만 명으로 거의 40배나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18세기의 빠른 인구증가의 결과로 사람들은 대거 (북동쪽)광동지역에서 광서로 이동했습니다. 게다가 복건과 강서지방의 객가족(Hakka)이 광서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북쪽 중국에서 남쪽 중국(광서지방 포함)으로 이주했던 중국 이민자들을 '객가'라고 불렀다. 객가 이민은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송나라와 연나라 때 전쟁을 피하려고 일부 한족들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런 유랑민들을 손님 족이라는 뜻의 객가, 즉 하카라고 했습니다. 하카는 하카어를 말하는 중국인들이었습니다. 홍수전의 가족이 하카였고 하카 족은 후대에 남부로 이동해왔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분야-정치, 사회, 경제 등 에서 심한 차별을 받기 쉬웠고, 대부분 산간 지역에서 가난한 삶을 영위하며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원래 중국인들이었지만 제한된 경작지 때문에 남부에 살던 중국인들에게 냉대 받아가며 직업을 찾고 토지를 얻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금천의 모든 땅이 서족(畲族, She)인들 소유였는데 태평난이 일어났을 때 가담한 약 600명의 금천사람들 중 절반은 광동 출신 서족과 Wei족과 Huang족 이었습니다. 중국 남부에 소수의 객가 토지소유주들이 존재했는데 대다수가 고액의 토지임대료를 내거나 경작이 된다면 상당히 많은 노동의 대가가 필요한 지역을 떠맡거나 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객가(하카)인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고액 세금과 심한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민족적으로 18세기 초 광서지역 토착민들은 장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족과 같이 산간지역에 살았던 다른 민족들도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광동, 복건, 호남 등 여러 지역에서 광서로 이동했습니다. 이런 이동의 결과 1851년 1인당 경작면적은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특히배상제회가 있던 계평(Guiping)에서 지주와 소작인 그리고 새로운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사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수확 철에 지주에게 내야하는 소작인들의 도지(대가)가 너무 높아 수입의 50%가 넘었지만 그래도 땅을 얻으려는 소작인들 사이에 심한 경쟁,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850년대에 본토인과 객가인들 사이에 싸움이 빈번하였고 객가 이주민들의 수효가 늘자 중국 귀족, 엘리트들 사이에 중국전통 의례행사에 '객가인 참여'를 놓고도 갈등이 생겼습니다. 관직이 있고 본토에 살았던 중국 엘리트들은 전통적인 신들과 의례들을 (객가인들 및 다른 이민자들을 향해) 자신들의 협동심과 일체감을 키우는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리하여 객가인들과 다른 차별받는 소수민족들은 전통적인 마을 의례와 의식에 참석조차 제한되고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고립은 어려운 경제여건과 함께 증폭되어 하카 인들이 전통적 청나라 사회경제 질서에 대해 불평을 갖게 했습니다. 하카 여성은 객가와 함께 일해야 했고 하카 족뿐만 아니라 장족과 요족 같은 소수민족들도 고립되어 본토인으로 부터 차별받기 십상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생활환경이 청나라의 질서에 항거하도록 터전을 제공했었고 (그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의 호소력을 갖고 적합한 비젼을 찾을 수 있는 이상이 있다면 전통적 중국의 종교, 사회, 정치적 질서들에 대항하여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남부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정책
명나라 때부터 쭉 광서와 광동을 포함 중국 남부지역에는 Juang족과 Fuan족이 대거 살고 있었습니다. 농업 경작을 하다 보면 소수민족 출신의 도적들과 야만인들이 출몰해 자주 경작지를 훼손시켰습니다. 청나라 초기에 이런 비 중국계 소외된 사람(야만인)들의 도적행위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인들을 남부로 보내는 정책을 썼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중국인들에게 남부와 그곳 토지를 경작하도록 권장했습니다. 특히 야만족들을 억제하기위해 광서와 광동에 병사들을 보내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당국은 북쪽 지역 출신 병사들과 사람들이 뭔가 좋은 조건을 제시받고 그곳으로 가, 정착하게끔 도와줬습니다. 객가인들은 농사에 부지런했고 정부 관리가 되려고 청 황실의 시험 정책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류족들은 "자식농사 잘 지어라. 가족과 문중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학식을 추구하라. 의식주가 해결되면 열심히 공부해라. 시험에 통과해서 정부 관리가 되면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너의 명예를 드높이면 가문의 영광 또한 드높아 지리라" 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전통적 중국에는 사람들이 관직을 가지려는 보편적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 어느 정도 (나라의 일이 보장되지 못한 객가인들도) 상업, 무역, 목공일, 도구제작, 예술 등과 같은 다른 업종에 뛰어들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업적 추세는 궁극적으로 비 중국인들을 유교 이념으로 유도하기위해 중국남부를 안정적인 농업사회로 조성하는데 집중되어 있던 청나라의 정책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하카인들의 기업가로서의 활동을 적대적 행위의 한 형태로 여겨, 하카인들이 상업(business)분야로 진출하지 못하게 곧 공식적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정책 변화에 하카인들이 반대할 때, 청나라 관료들은 그들을 청나라 정치와 유교이념 질서를 파괴하려는 반항 도당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념 논쟁은 청나라 정부 관리들과 하카인들, 그리고 하카인들 사이에서도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하카인들도 청나라 정부 정책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관리들은 농업을 가장 고귀한 직업으로 옹호했고 유교의 가르침이 담긴 성유광훈(聖諭廣訓)이란 책으로 공직 시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시험을 봐서 공직을 얻으려면 사람들이 유학 공부를 부지런히 할 것을 권했습니다. 정부 관리들은 하카인들의 비 농업적 상업 활동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도박으로 비난했으며 이에 대해 하카인들은 모든 직업은 동등하며 사람을 차별, 고귀한 자로 아니면 천한 자로 판단하는 것은 직업이 아닌 ‘일에 대한 근면함 혹은 게으름에 달려있다’라고 응대했습니다.
공직시험에 합격해 지위를 보장받은 청나라 중국인들은 상류층 계급의 다양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게 되길 원하며 상류인사와 관계하길 바라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관리가 되지 못한 야만인들은 토지 경작, 상업, 무역 등 다른 사업에 종사하려했습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들 중 일부, 즉 정상적으로 관리직을 얻지 못했던 사람들은 성공만 한다면 지위를 얻을 목적으로 정부 측 혹은 반란 측 어느 한편에 가담했습니다. 좋은 예가 류(Lu Shunde) 가족의 행동입니다. 이들은 적대행위가 발생했을 때, 청나라 정부쪽과 태평 쪽 양 쪽에 다 가담했습니다. 류 가족은 진지한 종교적 동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부 관리가 되려고 애를 썼고 양쪽 어디에든 투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보이는 쪽에 의지했습니다.
홍수전은 청나라를 악마로 묘사하며 태평세력에 의한 청나라 타도를 실현할 이념으로 '기독교 정신'을 내세웠습니다. 전통 중국 사회에서 정부 관리와 관료들은 대개 존경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런 직위를 성취 목표로 삼았습니다. 농업은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고 정부도 사람들이 농업관련 일들을 하기를 권고했습니다. 황제의 궁정은 가장 큰 농업 지주였습니다. 농업을 존중했던 전통은 한국에서도 똑같습니다. 한국은 농업이 하늘아래 제일 큰 산업(농자천하지대본)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본토인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농토를 마련하는데 고초를 겪은 많은 하카인들은 경작할 새로운 토지 혹은 일거리들을 찾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소말리아의 사회는 동아시아 사회와 달랐습니다. 지리학적 환경으로 "햇볕에 익는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이어 나가는 어려움이 바로 소말리아의 가장 놀라운 모습중 하나입니다. 강우량이 대개 부족하고 예측 불가능합니다. 땅에는 수 마일을 봐도 유일한 식물이라고 해야 거친 사막잡초나 혹은 뚫고 들어가기도 어려운 가시덤불만 있는 그런 곳이어서 생활은 항상 투쟁입니다. 금세기로부터 보고된 기상학적 기록과 구술 자료들은 소말리아 반도가 최소 25년에 한 번 심각한 가뭄을 만났다는 것, 그리고 덜 심각하거나 짧은 가뭄이 오는 건조기도 중간에 몇 차례 있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그런 가혹한 환경 속에서 "소말리아는 기실 오랜 목초 전통을 지닌 유목 국가이며 대다수가 영구 정착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영구 정착을 하지 못했던 중국 하카인들도 이런 점에서 소말리아 유목민들하고 처지가 비슷합니다. "사회적 지위 면에서 유목 목축은 가장 일반적이며 높이 평가되는 소말리아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목축인들이 농경 정착인들에 대해 가졌던 경멸적 견해로 인해, 농민들은 다수의 목초 유목인들 보다 한 단계 아래 계급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농민들은 군사적 안정과 거래 상대를 찾아 그 지역 힘 있는 유목부족에 붙어서 예속자인 듯 열악하게 지내야했고 결과적으로 다수의 지역 소말리아인들은 흑인 농부들이 노예들의 후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 주변 환경과 사회, 종교, 정치 운동과 사이에 어떤 일관된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고된 환경은 안정에 위협이 됩니다. 중국 하카인들과 소말리아 유목민 경우, 가혹한 주변 조건들로 인해 자신들에게 닥친 생존 보장 욕구가 컸고 이에 상응하는 입지를 받아주는 공격적인 종교운동을 도와 의당 자신들의 주변 여건을 개선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악화된 환경은 그런 종교운동이 나타났던 배경이기도 할 것입니다.) 최초의 현대 민족지학자가 19세기 후반 소말리아를 연구했던 때, 중국에 비해 인구가 훨씬 적었던 소말리아 사회에서 소말리아어를 말하는 인구는 6개 주요 씨족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으로 이주해서 약 25~30대를 이어온 (공동 조상으로 부터 이어져온) 인척 그룹들의 큰 연합체들 입니다.
"소말리아가 이들 씨족의 하나에 속해있고 공통조상을 주장하는 대규모 사람들과 일치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무리 짓기는 너무 규모가 크며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정치적 행위의 효과적 단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가딘이나 메지르틴 처럼 가장 큰 씨족들의 일부는 여러 이웃 씨족들보다 규모가 큰 '하위 씨족과 혈통'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하위 씨족들 스스로는 정치적 단위 조직으로서 때로 서로 대립하면서 경우에 따라 경쟁적 씨족에 대항하여 통합을 하면서 기능을 하였습니다." 중국 하카인들에게는 본토인과 청나라에 대항하여 통합을 희망해볼 수 있는 어떤 강력한 이웃 씨족이 없었습니다.
서세동점과 청나라의 위기
19세기에 중국에 들어온 서양세력의 팽창은 점점 우세해졌고 기독교 종말론의 증대하는 영향력은 전통적인 사회, 정치, 철학, 종교질서에 대항한 태평 이상주의 운동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반란운동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독교와 중국 국가주의 사이의 동맹 또한 청나라에 대항한 태평운동의 발흥을 도왔습니다. 1840년대는 태평난의 발효시기인 듯 보입니다. 정치 경제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와 종교까지 서양세력의 빠른 팽창은 각양 각층의 중국사회를 강타했으며 태평운동의 발흥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사회경제 질서가 외세에 크게 흔들렸습니다. 공직자들은 은을 차지하기 위해 더욱 탐욕스러워졌고 지주들은 도지(토지세)와 저당세를 올리고 돈 대신 은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부유한 상인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은 은(silver) 대신 구리(copper)로 교환하는 교묘한 수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이자가 매일 누적되는 대출사업을 확장시켜 갔습니다. 이런 극단의 착취로 소작농 대다수가 경작하고 있던 조그만 땅 뙤기를 잃고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일부 소지주들조차 그런 폐해를 당하는 입장이었고 그 결과 대 토지 소유주는 집중적으로 더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국가 토지의 절반이상이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기 약 100년 전 지주들과 관리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 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50~60% 땅이 부유층의 소유다. 이전부터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이제 소작인이 되고 연간 수입은 겨우 매년 수지를 맞추는 정도다" 1840년 ~ 1850년 사이에 토지편중 문제가 더욱 심각한 국면이었고 14개 지방으로 부터 수집된 청나라 통계에 의하면 약 40%~ 80%의 토지가 10%~30%인구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다지 전형적인 곳은 아니나 금천지역의 상황은 토지 소유주들이 갖고 있는 문제적 본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장'으로 불리는 한 지주는 매년 도지로 (은) 80만근을 모았으며 또 다른 백만장자 '송'은 수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는데 매년 (은) 100만 근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균적으로 지주들이 30평방Km이상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흔히 알려져 있으나 같은 사회의 구성원인 소작농들은 아주 작은 땅 뙤기를 갖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었습니다.
서양세력의 확장의 충격은 중국사회 고유의 외세반대에 덧붙여져 부자와 가난한자 사이의 극적인 대조현상을 불러왔습니다. 1840년대에 도처에 소작농과 수공업자들의 반란이 있었고 소수민족들도 들고 일어났습니다. 10년 사이에 100회가 넘는 폭동, 징과세, 임대료 지불에 대항하는 투쟁과 지주들에게 바치는 곡물 배달지연, 도시와 토지 점유에 대항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이들 폭동의 대부분은 반청 비밀 결사에 의해 시작되었고 조직 되었습니다. 이 비밀 결사의 최대조직은 양쯔강을 따라 두루 퍼져 남부지방 전역에 있던 천지회였습니다. 이 비밀결사조직은 오래 동안 사회에 발붙일 곳 없는 사람들의 집결처 역할을 하며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아편전쟁이후 격변기를 틈타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어떤 이가 지적하듯 그 주요 이유는 지방정부가 점점 더 농민들에게 중과세를 매긴 탓입니다. 1850년대가 시작되자 지배계급은 광서의 폭동 상황에 매우 놀랐습니다. 관리들은 청 황제에게 청원하여 조사를 실행할 것을 훈수했습니다. 광서지역 사람들은 도적떼와 강도단의 늘어가는 수효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광서에 하느님 숭배회 무리들은 만 명이나 되는 시끌벅적한 남자들 집단이었는데 아주 무서웠습니다. 이 조직은 홍수전이 이끈 반란 조직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여전한 청나라의 억압과 함께 세양세력 팽창의 결과로 중국 민중들의 삶이 형편없이 어려워졌습니다. 영국의 팽창주의자들은 전쟁배상금으로 중국에게서 2,100만 달러의 은화를 강탈당했습니다. 청나라에게 침력자들이 입혔던 손실과 전비 지출이 상당한 정도 금액에 이르자 전시 총 지출비용은 극단적으로 비대해지고 이런 충격적 부담은 전적으로 중국 민중들의 어깨에 직, 간접으로 지워졌습니다. 영국 침략자들은 홍콩을 그들에게 조차해달라고 압력을 넣었으며 상해, 영파, 광쩌우, 하문, 복주 등 항구들을 난징조약에 의거하여 대외 무역항으로 개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1850년 대, 아편수입은 연간 5만~6만 상자에 달했습니다. 아편이 보통 은으로 지불될 때, 2,000만~3,000만 냥의 중국 돈이 국외로 빠져나갔습니다. 은의 증가하는 국외유출은 구리값과 관련, 국내에서 은의 치솟는 가격 문제를 최고로 악화시켰습니다. 은화와 동화의 교환율은 약 1,000배에서 1850년 대에 2,200 ~ 2,300배로 올랐습니다. 농부들과 수공업자들은 오르지 않는 구리동전으로 노동이나 상품의 댓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금을 낼 때 그들은 은화로 지불요구를 받고 은화로 평가 되어 사실상 은화를 더욱 교묘하게 강요받게 되고 그 외의 다른 의무도 자주 부과 되면서 사람들은 빈번하게 은화 한 냥에 8,000배, 심지어 10,000배의 구리 화폐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은값의 상승과 주요 과세의 부담으로 농부들의 실제 수입은 낮아졌고 청나라의 특권을 받은 사람들과 외세 팽창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국민으로 부터 큰 이득을 얻었습니다. 아편유입 말고도 서양에서 만든 의류와 면화가 중국의 개방무역 항구에 넘쳐났고 중국제 의류와 면화는 경쟁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중국의 면화 직물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지주들에 의한 토지 합병이 전국에 걸쳐 더욱 심화 되었습니다. 중국은 재정적 손상을 입었고 아편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재정은 최악 상태였었습니다.
중국의 심각한 재정적 타격 등 그 사례는 태평반란이 최초로 발생했던 광서지역 금산의 연간기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마을(금산) 단지 750무(땅 면적 단위)정도의 땅이 있었는데 지주들이 88.3%정도인 662무를 차지하고 있고 농부들은 단지 11.7%의 땅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고혈을 빨아내는 착취아래 도시 상인들은 고리대금과 사채, 일수(印子钱) 등을 통해 농부들을 착취하는데 연루하기 시작했습니다. 농부들의 삶은 가난하고 홍수나 가뭄 기근 등의 자연재해에 아무런 안전망도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 수공업에 고용된 사람들의 상황도 더 나을 것이 없었고 저임금 고경쟁의 결과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잠자리 덥히는 정도의 최저 생계조건을 유지할 수도 없는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대내외의 이런 위험한 상황 속에 중국 국민들은 계시록적인 세계관을 믿으려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이상주의의 꿈을 옹호했던 지도자의 뒤에 몰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중들은 청나라 말엽의 위기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필사적으로 희망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한국 - 전통적 한국 사회의 구조
(청나라의) 중국이 이방인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동안 한국은 이씨조선(1392-1910) 치하에서 한국인들 스스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중국사회 비슷하게 (이씨조선의)한국사회도 전 근대적인 농업사회였으며, 신분질서가 엄격한 사회체계가 존재했습니다. 한국의 신분질서는 중세 유럽이나 막부 일본과 같은 사회질서와는 뚜렷이 대조되는 것으로서 결론적으로 봉건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봉건사회 모델과 전통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유사한 점들이 있었습니다. 정치 군사조직에서 거의 모든 권력은 왕과 양반 귀족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권력이 황제와 귀족들에게 집중되었던 만주 청나라와 유사합니다. 중앙 군사와 정치권력은 1732년에 군대 통수기관이 생겨난 이후 정부 관료로부터 군사 당국으로 이동되었습니다. 이씨왕조의 정치력은 왕과 신하(귀족)들에게 있었으나 군대 통수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통 한국사회에서 왕은 사회 위계질서의 꼭대기였습니다. 왕 밑에 사회질서가 엄격하게 네 그룹(계급)으로 나뉘었는데 첫째가 양반계급으로 특권층입니다. 양반과 그 가족들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 특권 등을 선조로부터 물려받고 관리가 되기 위한 공직시험(과거시험)을 볼 기회와 같은 다양한 특권들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법 질서상의 면책특권, 노동과 과세 면제 등 다양한 형태의 혜택도 받았습니다. 이씨조선 말기에 외척세력인 민씨 일가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민영준은 왕가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했습니다.
두 번째가 중인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은 양반들의 서자들이었고 불법적 탄생의 한계로 인해 정식으로 공직에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 계층의 구성원들은 특별한 지식이나 특별한 분야에 대한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들은 의학, 천문학, 외교 통역, 혹은 아전 등 관직 주변의 일거리 등을 맡아 살아갔습니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최제우)도 서자, 즉 중인신분이었습니다.
세 번째 계급은 상민(일반백성)이었습니다. 이들은 과세의 부담을 지고 있었는데 아무 특권도 없었습니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바로 이 계급에 속합니다. 거의가 가난한 농민으로 조그만 땅 뙤기를 갖고 있거나 다른 사람의 땅에서 노동을 해주거나 혹은 도지를 빌려 소작을 했습니다. 상민의 아주 일부는 상업이나 도자기나 가구와 같은 기술 분야의 업종에 종사했습니다.
네 번째 가장 낮은 계급은 천민이라 불렸고 부랑자 집단을 포함, 인구 구성의 나머지를 차지했습니다. 이씨 왕조가 통치 시작 때부터 불교를 배격하고 유교를 촉진시키는 정책을 택했기 때문에 불교스님들도 이 천민으로 대했습니다. 천민의 수효에 비해 양반에 속한 인구 비율이 높았는데 17세기 초반 1/4이하로 추정되던 양반의 인구비율이 19세기 중반 무렵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구 프랑스 정치체계에서 비 특권층이던 3계급에 비해 그 수효가 적었던 평민들이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97%를 차지한 것에 준하는 현상입니다.
한국 이씨 왕조(이씨 조선)의 통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사회변동의 분열상을 예방하기위해 이씨 조선은 사회적 신분을 명확히 하기위해 호패법 체계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제한하였고 사람들의 쓰고 말하고 하는 특징에 이는 마치 도쿠가와(막부) 일본 봉건사회가 그렇듯 중요한 단서 같은 것을 고정화 시켰습니다. 경제적으로 한국 왕가와 지배 양반층들은 농민층에 대한 착취 구조로 주로 유지 되었습니다. 이 착취구조는 과세 제도에 반영되어 농민들이 그 대들보 역할을 했고 재정적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씨 왕조는 이를 농자천하지대본(농업이 하늘아래 가장 큰 자본)이라는 당대의 금언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념적으로 유교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위한 철학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그 중요 강조점들은 임금과 신하, 상류계급과 낮은 계급,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복종이었습니다. 유교는 개인적인 덕성, 예를 들어 지도자의 지식과 관용을 강력히 옹호했습니다. 사회적 현상을 유지함에 그런 가치에 의거하여 한국의 지배계층은 정치에서 일상생활의 행위에 이르는 모든 것에 유교를 보호하고 널리 권장했습니다. 청나라의 중국도 유교를 지배계급의 이념으로 기능하게 했고 도쿠가와 막부 일본의 지배자들 또한 인간의 고상한 윤리 체계로서 유교의 교의를 옹호했습니다. 막부 일본은 다만 한국의 이씨 왕조와는 달리 불교를 현실종교로서 인정하여 특전을 주었고 유교 도덕과 사고방식이 백성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일본과 만주세력의 영향, 그리고 약화되는 이씨 왕조
한국은 마지막 왕가인 이씨 통치하에서 격리(차단) 정책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정책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거의 마비가 되다시피 한 점점 커져가는 정치 문화적 경직의 결과를 가져왔으며 몽고와 일본의 침입과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침략 가능성과 같은 총체적인 외국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해할 수 있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씨 왕조의 원기 왕성한 개국자 이 태조가 새로운 수도를 서울에 세워 점진적으로 이 격리 정책을 발전시킨 성과인 1400년대 초의 조선 인쇄(판각, 주조) 기술은 참된 문예부흥의 시작이었습니다.
16세기 후반까지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했으나, 나라는 이전보다 더 고립되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연결고리는 크게 중국 조공의 형태로 정치적인 관계 정도에 국한되어 있어 두 나라 사이에 어떤 실질적 민간차원의 거래와 문화교류는 없었습니다. 청대에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제 활동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만주에 근원을 두고 유교와 중국문화의 확산을 원치 않던 청나라의 통치자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요 위치에 놓여있어 1592-1598년(임진왜란), 1627-1636년(병자호란)에 각기 일본과 청으로 부터 침략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군사 침략행위들은 정체되어 있는 한국사회를 자극, 심각한 재정문제를 불러와 강력한 저항과 함께 이씨왕조의 근간을 약화시켰습니다.
재정적 위기들을 극복하기 위해 지배계급은 사회의 낮은 계급에 직위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후대에 이 정책은 거의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소위 양반이라는 계급의 증가로 이씨 왕조의 재정위기를 더 악화시키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과세 의무를 졌던 농민들의 수효는 위험할 정도로 적었고 양반계급에 (농민들의 삶과 별 차이 없게 살던)가난한 양반들을 포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이씨 정부는 특정 개인들과 함께 세도가 양반들에 의해 주도되던 서원과 같은 기관들에 특혜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으로 관료들의 부패가 만연했고 상민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불공정한 과세를 부담시켜 백성들의 정부에 대한 환멸만 키웠습니다. 이씨 왕조의 지배자들은 한국 경제 위기 해결에 실패했으며 백성들 삶의 조건들을 개선시키지 못하고 대신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차별을 통해 낮은 계층들을 억누르는 선택을 했습니다. 농부들을 포함, 대다수 인구가 더욱 빈번히 불평을 토로 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서양세력이 문호 개방을 강요하기도 전에 나라의 기초가 부식되어있었습니다. 이 모든 단계들은 점차 동학운동의 성장에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결과적으로 이씨 왕조의 부패와 불의에 항거한 반란을 가져왔습니다.
서구열강의 침략과 한국의 위기
유교적인 사회정치 체제의 세계관에 갇혀 동아시아가 고립되어 살던 동안, 문명을 향한 새롭고 총체적 가치(태도)의 출현으로, 달리말해 르네상스에 의해 엄청난 변화가 15C유럽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프랑스어로 재탄생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는데, 중세 암흑시대의 오랜 공백기 이후 고대 희랍과 로마에 견줄만한 문명으로 귀환한다고 믿어졌던 것입니다. 르네상스는 유럽인들 사이에 사상과 탐험분야에 새로운 시대로 방점이 찍혔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극동까지 고르게 퍼진 르네상스의 파도는 한반도를 심각하고도 전례가 없는 시험에 빠지게 했습니다. 16~17세기에 일본과 만주의 한반도 침략의 충격보다 훨씬 중차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이전에 전혀 경험치 못했던 지역인 동아시아와 한국에 폭넓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1498년 인도에 도착했을 때 서구팽창의 첫 파도가 동양의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며 중국, 일본, 그리고 은자의 왕국인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를 향해 동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구의 힘은 계속 한국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통했습니다. 남쪽은 뱃길, 그리고 북쪽은 육로였습니다. 16세기 이래로 서양 열강들은 중국과 무역거래를 전개하고자 노력해왔고 초기에 광동이 중국 최초의 국제 항구로서 열강에 개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더 많은 서양 상인들이 무역을 하기위해 중국에 왔습니다.
서양 유럽 국가들은 뱃길로 중국과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상인들이 네르친스크 셀레긴스크 키아크흐타에서 (육지경로를 통해) 중국과 무역을 시작하고 북쪽 오호츠크 해에서 항해를 하여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했습니다. 일본에 거래를 요구한 최초 러시아 선박들은 결국 1792년 하코네를 필두로 1804년 나가사키에서 일본 교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1832년 7월에 동인도 회사에서 보낸 영국 배 아마스터(Amaster)호가 홍주군과 고대도, 그리고 충청지역에 교역과 선교임무 수행을 목적으로 한국 지방에 도착을 했습니다. 1860년에는 러시아가 시베리아 북쪽 경계에 영역을 확장하는데 성공하고 한국과 두만강 경계지역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인들은 그 다음 경계를 넘어 1864년과 1865년에 무역을 하려고 경원에 들어왔습니다. 1876년, 한국정부는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었습니다. 일본은 비싼 섬유와 의류를 한국에 팔고 쌀과 천연자원을 헐값에 사들이며 한국을 착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수탈은 한국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키워 일본에 대항한 동학이나 동양의 가르침을 생성하는 도우미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이 동학운동 창시자 수운이 태어났던 그리고 그의 운동이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맥락과 배경이었습니다.
결론
중세 유럽에서 반봉건적 정치, 사회, 종교적 공격은 이방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서양에서 중세기에 카톨릭은 세속 정치, 사회 그리고 지적인 세계를 지지하고 지배했습니다. 카톨릭의 사회 지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단 사상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한국과 중국에서 서양의 카톨릭처럼 강력한 국가 종교가 있지 않았지만 전통 사회정치적 질서를 지탱하는 유사국가 이념으로 기능했던 유교가 있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유교이념은 농부들과 천민 층을 억누르며 양반 지배층을 뒷받침해 주는 기능을 했습니다. 중국사회도 (유교이념의 역할이 한국사회와) 마찬가지였으며 이주민들과 하카인들 그리고 소수민족들까지도 농부와 천민계층 대하듯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에게 유교이념의 질서에 대항하기위한 새로운 종교 혹은 이념의 필요성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양과 한국-중국사회 사이에 차이점들이 좀 있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에는 중세 서양사회의 카톨릭과 국가권력의 결합 속에서 강화되었던 정치와 종교의 조합과 같은 국가 종교가 없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이상주의 운동들이 유교에 대항한 양상은 서양 사람들이 카톨릭을 적대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그보다 훨씬 약했었습니다. 한국과 중국 전통사회에서 유교는 사회지배와 통제이념으로서 기능을 하며 유사 국가종교 역할을 했습니다. 유교와 정치는 권력을 추구하며 개혁을 요구했던 비 특권층 사람들에 대해 (양반지배층의) 지배적 권위를 보호하는 일을 함께 도모했습니다. 다수 사람들이 관료가 되기 어려웠으며 스스로 사회질서에서 배제되었다고 여길 때, 그들의 반응은 왕조의 사회정치질서를 유지했던 전통적 유교 이념에 도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 정치 질서에 도전하기 위해 사람들은 유교로 대표되던 권위 대신 하늘, 즉 하느님으로부터 온 새로운 위엄을 필요로 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사람들이 믿었던) 어떤 종교도 유교 이념보다 더 깊이 있는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서양 봉건사회와 다른 점입니다. 서양사회에서 교황과 성직자들은 대단히 큰 정치적 권위와 권력을 가졌습니다. 서양의 국가들은 국가의 공식종교가 있어 종종 세속 정치권력과 권력투쟁에 연루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에서는 (그럴만한) 국가 종교는 없었고 어떤 유교 지도자도 왕, 혹은 황제와 권력다툼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왕과 황제만이 유교 이념과 하늘의 이름을 활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을 누렸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유교 윤리와 그 영향 아래 살았습니다. 하늘과 관료들을 존중하지만 그 외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푸대접 하는 것이 항용 있을 수 있는 전통 중 하나였습니다.
두 나라(한국과 중국) 사회에서 종교는 유럽에서 교회가 했던 것 이상의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정치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의 세속적 목적을 위하여 종교를 활용할 가능성들은 (서양보다) 더 컸습니다. 이런 요인들과 전통들이 태평과 동학 운동을 방해하는데 기여했고 태평과 동학이 교조적 이상주의 운동에 깊이 연루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이상주의 운동이 서양의 천년왕국(이상주의) 운동과 소말리아와 이슬람의 이상주의 모형들과 차이가 나게 만들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지배계급과 농부들 사이의 투쟁뿐만 아니라 중국인들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태평 혁명이 일어났던 광서와 복건, 저장, 장서 등지에 그 지방 외곽으로 부터 수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왔습니다. 광서에는 두 주류 민족이 있었는데 하나는 중국 족, 다른 하나는 태국으로 부터 온 장족이었습니다. 광서의 하카 족과 장족 그리고 일부 중국 족 사이에 서로 국가시험을 통해 정부관직을 얻으려 필사적 경쟁을 했습니다. 중국사회에서 안정된 재정으로 잘 살기위해 믿을만한 유일한 방법은 관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소말리아의 많은 사람들은 종종 마치 중국 하카 족 사람들이 농경지를 찾아 그랬던 것처럼 목초지를 찾아 이동했습니다. 중국 하카 인들은 규칙적 이동을 하지 않았지만 경작할 새 땅을 개발하기위해 이동했습니다. 소말리아 사회에서는 씨족들이 많이 있었고 또 이슬람의 명목아래 지도력을 추구하며 씨족 간 권력다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이주민들, 씨족들, 하카 인들과 같은 떠돌이들, 혹은 유목민들은 없었습니다. 정부의 관직을 얻기 위해 혹은 경작을 위해 이주민들 간의 경쟁도 없었습니다. 단지 토지를 소유한 정부와 특권층, 그리고 아무런 특권이 없는 농부나 중인 이하의 낮은 계급들 사이에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로 인한 심각한 갈등만이 있었습니다. 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아무 권한(힘)이 없는 사람들은 세금과 부패, 빈곤과 사회적 차별에 대해 불평을 했습니다.
청나라 왕조에서 최악의 천민을 제외한 농민이나 혹은 신분이 낮은 계층 출신의 어떤 사람도 황실이 주관하는 시험에 통과하여 정부 관리나 공직자가 되길 열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돈과 지역 유력인사(유지)와의 인맥 혹은 권력자들의 후견 등이 없으면 시험에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전통 중국 사회의 지주는 쉽게 소작농의 신분으로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땅 소유주는 가진 재산을 모두 장자에게 주지 않았으며 자식(아들)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후손 한 명이 많은 양의 땅을 소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주의 아들들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당시)중국에서 사람들이 땅을 팔고 사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지주가 농부에게 땅을 팔기 원하면 쉽게 그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빈곤 속에서 생존하고, 정부의 핍박에도 살아남기 위한 안전한 방법은 관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직 시험에 너무 매달려 있어 시험을 둘러싼 부패와 관리태만이 극심했습니다.
관료의 지위가 후손에게 상속되는 것은 아니나 재산을 늘리고 지킬 수 있는 입지를 갖고 있었고 또한 법정 소송이나 심문에서 유리한 처분을 받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카 인들은 땅을 소유하지 못했고, 관직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심각한 경제적 사회정치적 차별을 받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차별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정부의 직위를 얻으려 했습니다. 홍수전과 그의 가족들의 경우가 전형적 예인 데, 홍수전의 아버지는 아들을 공직자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고, 홍수전도 그렇게 되기 위해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시험제도에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이씨 조선 한국에서 농부와 상민, 중인들이 과거 시험을 보고 왕의 총애를 받으며 공직자가 될 기회는 없었습니다. 소말리아 사회에서 소말리아인들은 주로 유목민이었으며 공직자나 관리가 되길 열망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에 중국과 한국은 외세의 충격을 받았고, 중국은 영국의 경제적 착취, 한국은 일본의 경제적 수탈을 겪고 있었습니다. 둘 다 스스로의 위신과 독립을 지키려 애를 썼으나, 중국은 1842년 영국의 침입 이래 그리고 한국은 1876년 일본의 팽창 이래 대체로 반 식민지였습니다. 이것에 앞서 중국은 400년 간 청나라의 통치아래 수세기 동안 어쩌면 마찬가지 경우였을 것입니다. 19세기 말 소말리아 사회도 20년 동안 서양세력의 팽창국면을 맞아 상인들과 농부들과 유목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소말리아가 정치적으로 분열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방식을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의 침체(권태)는 새로운 종교의 유포를 도왔을 것입니다. 이슬람 타리카스 즉 형제애(신도회)같은 조직은 그 시대의 문제에 어떤 해결책들을 제공하는 듯 보입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그 시기의 다른 대륙들의 식민지 영토에서 수많은 이상주의 형식의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나라들에서는 대내외적으로 이상주의 운동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조화로운 환경'이 서서히 조성되고 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