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 간장 -
음식 맛은 장맛이라던가. 어머닌 해마다 음력 정월이 오면 장을 담갔다. 배가 불룩한 옹기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그며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마치 한 해 농사를 수확한 농부마냥 흐뭇해했다.
나도 어머니의 대를 이어 해마다 장을 담근다. 장을 담그며 지난날 가슴 아픈 가족사를 떠올린다.
송홧가루가 날리던 어느 봄날, 어머닌 아버지가 좋아하는 된장, 고추장, 간장을 퍼 담아 머리에 이고 길을 떠났다. 시오리 남짓한 읍내에 새살림을 차린 아버지의 신접(?) 살림집에 갖다 주기 위해서였다.
어머닌 그 길이 얼마나 멀게만 느껴졌을까. 아무리 지아비를 위하는 일이라지만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시앗을 보러 가는 길이 편할 리 있었으랴. 아버지의 여자는 새파란 처녀였다. 읍내에 있는 전화국 교환양이었다.
그녀는 우리 집에 올 때면 큰물방울 무늬의 원피스를 날아갈 듯 차려입고 왔다. 굽 높은 뾰족 구두를 신고 추호도 거리낌 없이 오만한 태도로 굴었다. 손에는 우리들의 환심을 사고도 남을 물건들이 늘 들려 있었다. 달콤한 크림빵, 오징어, 비과, 눈깔 사탕 등….
철없는 우리들은 어느 샌가 그녀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그날도 마침 어머니가 고추장을 담그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어머닌 식혜를 고았다. 겨우내 장독대에 엎어져 있던 항아리도 부셔냈다. 아버지의 손을 정답게 잡고 그녀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녀는 어머니가 차려 바치는 점심상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었다. 상을 물린 그녀는 미안했던지 어머니를 돕겠노라고 팔을 걷고 나섰다. 그러자 아버지가 황망히 그녀를 제지했다. 홀몸도 아니니 안정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그 때 어린 눈에도 순간 어머니의 눈가에 번지는 분노를 분명 보았다. 본처가 알까봐 쉬쉬 해야 할 첩의 임신을 당당히 밝히는 아버지의 그 뻔뻔스러움에 어머닌 눈에서 불꽃이 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어머닌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장만 담갔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해 고추장 맛은 몇 해 전에 담근 것에 비하여 맛도 짜고 깊은 맛이 없었다. 훗날 어머니의 말씀으론 순전히 아버지께 향한 분노 때문이었다고 했다. 손으로는 장을 담그지만 그날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장이란 원래 정성을 다하여 담가야만 제 맛이 나는 것이다.
요즘이야 돈 몇 푼만 쥐고 동네 슈퍼마켓에 나가면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각종 장류를 쉽사리 구할 수 있다. 손쉽게 장류를 구입하는 현대인들은 우리 어르신들이 장 담그는 데 기울인 정성을 전혀 알지 못한다.
무서리가 내린 시월 상 달 어느 말날(일간이 갑오, 을오, 병오 등으로 끝나는 날) 그날은 어머니의 발길이 더욱 분주하였다. 마당가 걸개 솥에 물에 불린 메주콩을 넣고 장작불을 때어 메주를 쑤었다. 주전부리가 귀하던 그 시절 우리 형제들은 가마솥에서 ‘부르르 부르르’ 콩물이 넘치며 익어가는 메주콩을 어머니 몰래 그릇에 퍼 담아 뒤울안에서 숨어서 나눠 먹곤 했었다.
몇 시간 동안 가마솥에서 고아진 누런빛의 콩을 어머닌 절구에 넣어 찧었다. 그땐 오빠의 팔뚝 힘도 큰 힘이 되었다. 메주를 찧다가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위하여 우리 형제들은 번갈아 고사리 손의 힘을 보태기도 했었다.
힘들게 찧은 메주콩을 모양 틀에 넣어 어머닌 메주를 만들었다. 그것을 건넌방 윗목에 깔아놓은 지푸라기 위에 옮겼다가 꾸득꾸득 해지면 짚으로 단단히 묶어 시렁에 매달았다. 마당가 감나무에 매달린 까치밥 홍시가 몇 번이고 얼었다 녹았다하는 긴 겨울, 메주는 시렁에 매달려 묵묵히 겨울을 난다. 시렁에 매달린 메주 뜨는 냄새는 어린 코에 매우 구수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새롭다.
마치 곶감 속처럼 검고 노리끼리하게 잘 뜬 메주로 어머닌 정월 첫 말일을 택해 간장을 담갔다. 나는 어머니가 장을 담글 때 왜? 꼭 말일을 택하는지 여쭤보았다. 굳이 말일에 간장을 담그는 이유는 말의 피처럼 간장이 검게 잘 우러나라는 뜻이라고 했다.
간장을 담그기 하루 전에는 미리 소금물을 녹여내었다. 한지에 불을 붙여 항아리의 잡균을 소독한 다음 메주 한 덩이, 소금 한 바가지, 물 세 바가지의 비율로 대중을 잡아 간장을 담갔다. 달걀이 물 위에 3분의 1 정도 떠오르면 염도가 맞는다. 담근 간장에 붉은 고추, 대추, 숯, 통깨를 넣고 항아리 주위에 숯과 고추가 달린 금줄을 치면 어머니의 장 담그기는 끝이 났다.
어머닌 그녀가 다녀간 이후로 날만 새면 장독대에 가서 하루를 보냈다. 비가 쏟아지다 그쳐도 행주를 들고 빗방울 자국을 닦으러 장독대로 향하였다. 닦고 또 닦아 항아리들마다 윤이 반들반들 났다. 어머닌 어쩜 그때 항아리만 닦은 게 아니었으리라. 딴 여인 곁에 가 있는 아버지께 향한 마음속의 미움을 닦아내고 또 닦아 내었는지도 모른다.
그해 감꽃이 뒤울안에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초여름, 아버지의 여자는 딸을 출산했다. 일찍 친정어머니를 잃은 그녀를 위해 어머닌 산바라지를 해야 했다. 그녀가 아이를 낳던 날 아침 어머닌 분주히 장독대를 들락거렸다.
그녀에게 끓여 줄 미역국에 넣을 수년 된 간장을 퍼 담기 위해서였다. 지금처럼 플라스틱 용기가 없던 그 시절, 어머닌 큰 술병에 먹물 같은 단내 나는 간장을 한 병 담아 머리에 이었다. 어린 자식들을 혼자 양육하느라 어머닌 고생이 심해 다리마저 성치 않았다.
그런 몸으로 시오리가 넘는 그녀의 집을 향해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에 인 간장병을 깨트린 것이다. 먼 길을 다시 돌아올 수 없어 어머닌 빈손으로 그녀 집에 당도해야 했다.
산모에게 첫국밥을 끓여 주어야 하는데 간장이 없어서 소금으로 국 맛을 맞추었다. 산모는 미역국이 통 맛이 없다고 어머니 앞에 밥상을 밀어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눈을 부릅뜨고,
“여편네가 어찌 국을 끓였기에 선영이가 맛없다고 타박하는 거야? 다시 입맛에 맞게 끓이란 말이야.”
라고 역정을 냈다. 어머닌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때어 미역국을 다시 끓였건만 또 퇴짜를 맞았다. 어머니랑 함께 그 집을 갔던 나는 그날 아궁이 밖으로 나오는 연기 때문인지, 아님 아버지의 불호령 때문인지 처음으로 어머니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그날 어머니가 길에서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도 어머니의 훌륭한 장 솜씨로 그녀를 보기 좋게 굴복시켰을 텐데’ 라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드는 것은 어언 일일까. 어머닌 그녀처럼 젊지는 않았지만 집안 살림살이와 자식들 가정교육만큼은 그녀가 따라올 재간이 없었다.
무 한 개로도 반찬을 열두 가지도 더 넘게 만들었던 어머니, 어린 날 우리들에게 끓여준 새우젓애호박국은 지금도 그 손맛을 나는 흉내 내지 못하고 있다. 그뿐이랴. 그녀는 본처 자릴 넘보고 들어와 남의 남편을 꿰차고 산 탓인지, 아니면 딸자식 가정교육에 소홀했음인지 현재 세 명의 딸들이 서로 홀어머니 부양을 미루고 있다.
그러나 어머닌 온갖 정성을 다하여 우리들을 양육하여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당신 헌신과 희생으로 메웠다. 우리 형제들은 장 담그는 어머니 모습에서 옛것을 숭상하는 삶의 태도를 배웠다. 또한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것을 인간 도리로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 바람기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어머니 모습에서 강인함을 터득하였으리라. 머지않아 장을 담글 때가 다가온다. 올해도 어머니 마음을 떠올리며 정성껏 장을 담그리라. 그러면 아버지 마음도 어머니 정성도 내 마음 안에 살아, 살아가는 일이 조금은 어려워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랴 싶다.
문학 평론가. 수필가 하정 김혜식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옛 물건에 얽힌 추억과 효용 가치 등을 사유하여 테마로 쓴 글 1995년 ‘순수문학’에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한 김혜식 작가는 하정 문학 아카데미 원장, 드림 작은 도서관 관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평론집을 비롯해 수필집 ‘내 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등이 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