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발에서 빈손으로
민수기 27:12-20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명절은 잘 쇠셨는가? 연휴가 길어서 훨씬 여유만만하게 보낸 표정이다. 올해는 양띠 해라고 하니, 모두 의기양양하게 지내길 바란다.
설 연휴가 시작한 수요일부터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시작하였다. 가장 시각적인 특징이 강단색이 보라색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는 성만찬을 한다. 사순절은 말 그대로 40일의 기간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 동안 광야로 나가 금식하셨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침묵과 금욕의 시간을 맞은 것이다.
사순절 ‘Lence’는 앵글로 색슨족의 말로 ‘바라 봄’(lens)이란 뜻이다. 내 안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적 성장과 성숙을 의미한다. 사실 사순절에는 교회마다 절제와 금욕 등 더 많은 ‘특별한’ 열심을 강조한다. 사순절은 ‘특별화’하는 기간이 아니다. 예전에 ‘특별’해 보이던 것을 ‘일상’화 하는 기간이다. 내 삶에서 조금 더 침묵하고, 말씀이 더 깊어지고, 사랑의 마음을 더 실천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우리는 제자로서 사순절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더 열심히 본받으려고 한다. 사순절에는 더 철저하게 ‘톨레레게’에 임하여 말씀과 친숙한 기회로 삼기 바란다. 사실 오랜만에 하니 특별하고 고달프지, 날마다 하는 것은 일용한 양식, 일용할 은혜가 된다.
오늘 설교는 모세의 죽음을 주제로 한다. ‘톨레레게’ 첫 부분인 모세오경을 읽으면서 모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고, 위대한 영웅인가 하는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유대교는 자칫하면 모세교가 될 뻔하였다. 현존하는 세계적 종교는 중심인물의 이름을 따오지 않았는가? 불교는 붇다에서, 마호멧교는 예언자 마호멧에서 비롯되었고,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모세교가 탄생하지 않은 것은 아마 모세의 매장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의 무덤이 있다면 사후에 그를 숭배하는 사람이 그곳을 성지로 받들고, 순례했을 것이다. 사실 유대교 신앙의 입장에서 모세교란 있을 수 없다.
유대인들은 “모세는 같은 날에 죽고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같은 날은 ‘아달월 7일 째’를 말한다. 보통 태어난 날을 먼저 말하고, 죽은 날을 나중에 말하는 데 모세의 경우는 거꾸로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죽지 않고, 유대인의 마음에 살아있다고 고백하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곧 진실하고 올바른 계명은 모세와 더불어 그들의 삶 속에 늘 살아있다.
1)
우리가 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 5권의 율법은 ‘모세오경’이라고 부른다. 모세가 기록한 다섯 개의 두루마리란 뜻이다. 모세에게 얼마나 큰 명예인가?
신명기의 마지막 두 장은 모세의 일대기를 정리한다. 33장은 이스라엘 12지파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33:27).
34장 끝에는 모세에 대한 평가를 한 마디로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34:10).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둘도 없는, 전무후무한 존재였다.
신명기 34장은 모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기록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다만 히브리 문학에는 위대한 고인의 작품에는 저자의 사망기사까지 덧붙이는 관례가 있다. 아마 그의 후계자들에게 사망기록이 구전되어, 전승되었을 것이다.
이제 모세의 역할은 다 끝났다. 그는 모압 평지의 느보 산에 올랐다. 민수기에는 아바림 산이라고 부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1).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 약속의 땅을 멀리 바라보았다.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땅이었다. 40년 전 출애굽과 40년 동안 광야 생활의 최종 종착지요, 신세대가 목표로 삼은 최초 정착지였다. 그런데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길, 너는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이제 ‘너를 향한 백성의 복종을 그 후계자에게로 향하게 하라’, ‘네 존귀함을 네 후계자에게 넘겨주라’고 말씀하신다. 쉽지 않은 이야기다. 여전히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모세는 자기 권위를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모세의 말년이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최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만 모세는 한 가지 소원을 하나님께 아뢴다.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16-17).
마침내 지난 40년 동안 모세 곁에서 준비된 후계자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의 권위를 이어 받았다. 모세의 나이 120세이며, 장소는 느보 산이었다. 비로소 모세는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마지막 유언을 한다.
“담대 하라”(신 31:6).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 앞에서 떨지 말라’고 하였다.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
예수님도 최후의 순간, 제자들과 작별하시면서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여러분을 향하신 믿음의 언약임을 분명히 깨닫기를 바란다.
2)
모세는 어떤 인물인가? 오늘 설교제목은 모세의 삶을 요약한 것이다. ‘맨발에서 빈손으로!’ ‘맨발에서 빈손으로’는 모세의 소명 이력서이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훨씬 운명적이고, 드라마틱하다.
그는 이집트에서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죽임의 강인 나일이 구원의 강이 되었다. 그를 태운 갈대상자는 이집트의 공주에게로 향하였다. 애니메이션 만화영화 ‘이집트 왕자’와 최근 개봉한 ‘엑소더스’는 모세를 이집트의 존귀한 왕자로 묘사하였다. 그는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들과 함께 ‘제왕 학’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모세는 나이 40세가 되어 고난 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고, 이는 왕자에서 해방자로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젊은 모세는 의욕만 넘쳤을 뿐, 자기 백성에게도 환영받지 못해 결국 도망자가 되어 광야를 건너 피신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40년 동안 목자로 살았다. 광야를 전전하면서,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존재였다. 그는 두려움이 많은 겁쟁이가 되었고, 더 이상 재기를 꿈꾸지 못한 채 늙어갔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이 놀랍다. 하나님은 호렙 산 아래에서 양을 돌보던 모세를 부르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모세의 인생에서 하이라이트는 이집트 왕자도, 미디안 목자도 아니다. 모세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함으로써 다시 태어난 셈이다.
모세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경건이란 일상생활과 구별된 특별한 장소에서, 일상의 행위와 분리된 특별한 행위가 아니다. 내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문득 경험하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다.
모세의 출발점은 ‘맨발’상태였다. 모세는 다시 맨발로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던 시절, 무모한 시작을 가리켜 ‘맨땅에 헤딩’했다고 말한다. 처음 하나님을 경험할 때 모세는 신을 벗은 존재, 맨발의 상태로 부름 받았다. 맨발은 겸허함, 순종, 자기 비움, 참 자유, 종 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수도공동체의 출발점인 베네딕트 수도회는 맨발 상태를 중요시 한다. 수도자들은 밥을 먹거나 기도할 때, 또 대화하거나 독서할 때 언제든지 신발을 벗는다. 그들은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맨발로 지낸다. 그 이유는 맨발이야말로 의식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맨발을 통해서 땅과 공감하고, 생명을 느끼며, 거룩함을 깨닫는다.
이런 맨발의 상태를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속뜻을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맨발로 출발한 모세이지만 그는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던가? 무엇보다 십계명과 율법을 계시 받은 자요, 전달한 자였다.
예수님은 자주 모세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실 때에,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막 10:3)고 물으신다. 논쟁의 중심에 언제나 모세가 있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고백하기를, 모세와 빗대고 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히 3:1, 3).
모세가 집, 곧 계명을 전한 자라면, 예수님은 그 집을 지은 분, 곧 계명을 주신 분이라고 한다.
3)
신명기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한다. 마침내 천하의 모세도 죽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34:5-6).
죽음 이후 30일 간 성대한 추모의식이 있었으나, 무덤은 남아 있지 않다.
모세의 위대한 생애는 맨발로 시작해 빈손으로 마친다. 무덤을 남기지 않았으니, 철저히 빈손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만약 모세의 무덤이 남아 있다면, 모세는 유대교 종교의 시조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세의 무덤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오죽하면 모세의 무덤은 없지만, 훗날 사람들은 현재의 요르단 땅 느보 산에 모세기념교회를 건축하여, 모세를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서 보면 마치 생전의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듯이, 왼편으로는 사해가 오른편으로는 모압 평지가, 건너편으로는 여리고와 유다산지가 두루 보인다.
또 모세기념교회의 서편 끝자락에는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유했던 청동 놋뱀 상이 높이 세워져있다. 유명한 ‘놋뱀 십자가’인데,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한다. 그 아래 이런 메시지가 쓰여 있다. ‘보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왜 모세는 무덤을 남기지 않았을까? 지난 1월 말에 사망한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국왕은 재산이 18조원으로 최고의 부자지만, 이슬람 수니파의 법에 따라 관도, 묘비도 없이, 천만 뒤집어 쓴 채, 평민들의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죽음은 평등하다. 그 역시 빈손으로 돌아간 셈이다.
모세는 평생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를 경계하였다. 거듭거듭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행여 자신의 무덤조차 사람들에게 기념되고, 숭배될까봐 자취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신약 맨 끝 부분에 있는 유다서에서 모세 무덤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 1:9).
모세의 무덤이 없는 것은 우상숭배의 위험성 때문에 천사장 미가엘을 시켜 모세의 시체를 감춰버렸기 때문이라는 증언이다. 모세가 혼자 산에 오르게 한 다음, 죽은 모세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버렸다는 전승이다. 우상숭배의 위험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가를 새삼 일깨워 준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상의 유혹 속에 살고 있는가? 탐욕의 우상, 명예의 우상, 소유의 우상, 음란의 우상, 무엇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시하려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은 모두 우상과 다름없다.
그러기에 모세의 맨발과 모세의 빈손은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모델이다. 우리가 본 받아야할 신앙의 모범이다. 모세는 우리에게 ‘맨발에서 빈손으로’ 살다가 돌아가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과 약속으로 희망의 순례를 하는 존재임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다.
모세는 종종 거룩한 분노를 발하였지만, 항상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안내한 사람이다. 사순절에 우리가 광야의 모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계명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감(신 8:3)을 깨달아야 한다.
특별히 우리는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자세히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이야말로 모세처럼 맨발과 빈손의 주님이셨다. 죽으셨으나 빈 무덤만을 우리에게 남기셨다. 예수님은 삶의 정점에 계실 때에 제자들의 맨발을 씻겨주셨다. 그리고 당신의 빈손으로 때 묻고 부끄러운 우리들의 맨발을 만져주신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맨발로 선 내게 다시 출발할 용기를 주시며, 빈 손 가득 은혜로 채워 주시기 위해 나와 함께 하신다.
맨발로 서신 예수님, 빈손 가득 은혜를 채우시는 주님, 그런 예수님을 사순절 기간 동안 더욱 뜨겁게 묵상하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느릿느릿 다가오는 새 봄을 맞이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순절 기간과 내 평생 ‘일상’적으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