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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한때 진여원(眞如院)이라고 불렀다. [위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五臺山)의 중대(中臺)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부속 암자이다. [연혁] 705년(신라 성덕왕 4) 신문왕의 왕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 창건하여 진여원이라고 했다. 원래는 자장(慈藏)이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태백산 정암사(淨岩寺)를 비롯하여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그리고 이 절의 자리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보천과 효명 두 왕자가 오대산에 들어가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의 푸른 연꽃이 핀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의 푸른 연꽃이 핀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 두 형제는 오대에 나아가 항상 정성을 다해 예배하고 염불했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마침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오대산에 와서 두 왕자를 서라벌로 데려가려 했으나 보천이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자, 효명만 서라벌로 돌아가 왕위에 추대됐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으로 만들 것을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했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했다. 또 결사의 이름을 화엄사(華嚴社)라고 했고 복전(福田) 7인을 두었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주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 있었다. 이 때 나옹 혜근(懶翁 慧勤; 1320-1376)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이 오대산을 유람하던 중 터만 남은 이 절을 보고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金)씨의 시주로 1376년(우왕 2) 중창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그 해 겨울 선객 33명을 모아 10년 좌선을 시작했는데, 1381년(우왕 7)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직접 보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했다. 조선 태종은 억불정책을 편 대표적인 왕이었지만, 1401년(태종 1) 봄 이 절의 사자암(獅子庵; 지금의 中臺庵)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집과 목욕소를 만들었다. 또한 그 해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행차하여 성대한 법요식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 때 태종은 다시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부처님의 은혜를 받게 하고자 하니, 경은 기록을 남겨 오래도록 후세에 알게 하라"고 했다. 또한 세조(재위 1455-1468)는 이 절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괴질을 치료 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세조는 혜각 신미(慧覺 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이 절을 중창했다. 1465년(세조 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쌀 5백 석과 비단 1천 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했다. 1466년 나한전과 청련당(淸蓮堂), 재주실(齋廚室), 범종각 등을 지어 낙성했다. 다시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하기 위해 조(租) 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했다. 이어 세조도 이 절에 들려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했다. 그 해 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했다.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 1)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 조세하는 것을 금했다. 1946년 건물이 전소되어 1947년 월정사 주지 지암 종욱(智庵 鍾郁)이 금강산 마하연사(摩하衍寺)의 건물을 본떠 중창했다. 1951년 6.25전쟁 중에는 국군이 북으로 진격하면서 이 절이 공비의 소굴이 된다고 하여 소각하려 하자 한암 중원(漢巖 重遠)이 나서서 이를 막았다. 중원은 불 태우려는 국군에 맞서서 법당에 앉아 "당신들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듯이 절을 지키는 것은 승려의 본분이다. 나는 법당에 앉아 마지막까지 승려의 본분을 저버리지 않겠으니 그냥 불을 질러라"라고 말했다. 이에 불을 지르려던 장교는 상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한 방편으로 법당 문짝만 떼어서 불을 지른 뒤 돌아갔다.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유적.유물] 현존하는 건물로는 선원을 중심으로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후원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선원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목각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 3위의 소형 동자상, 서대(西臺)에서 이 곳으로 옮겨온 목각대세지보살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 중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이 동자상에서는 총 23점의 복장 유물(보물 제793호)이 나왔다. 또한 신중상(神衆像)은 일명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신중들이 탱화로서 봉안되어 있는데 대해 이 곳만은 유독 조상(彫像)으로 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이 상의 조성연대는 세조의 상원사 중건 때로 추정된다. 영산전은 선원 화재 때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며, 산내에서 가장 오래 된 법당이다. 내부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봉안했고, 또 세조가 희사한 39함의 <고려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다. 영산전 옆에서는 화강암 석재들이 출토되어 현재 법당 옆에 쌓여 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자장이 중국에서 모셔 온 부처님 사리가 있다고 하여 그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리탑조차도 없이 보궁 뒤에 석탑을 조각한 마애불탑만이 있어서 어디에 사리를 모셨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725년(성덕왕 24) 주조하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銅鐘; 국보 제36호)이 있다. [설화] 문수동자상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괴질에 시달리던 세조가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로 가던 중 시종들을 멀리하고 계곡 물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이 때 동자 하나가 숲속에서 걸어 나오자, 세조는 동자에게 시원하게 등을 밀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세조가 "그대는 누구에게도 임금의 옥체를 씻어 주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자, 동자는 "임금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만났다 말하지 말라"고 했다. 말을 마친 동자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세조는 몸에 났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았다. 세조는 감격하여 화공에게 명하여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으며, 이어 나무로 문수동자상을 조각하도록 하여 상원사에 봉안했다. 또한 이 절에는 고양이 석상이 있는데, 세조가 고양이 때문에 자객으로부터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하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오대산에서 괴질을 고친 세조는 곧 바로 법당으로 올라가 예배를 올리고자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 당겼다. 이상히 여긴 세조는 병사들을 시켜 법당 안팎을 샅샅이 조사하게 했다. 뜻 밖에도 불탁 밑에 자객이 숨어 있었다. 세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고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고양이를 위한 밭(猫田)을 하사하고, 한 쌍의 고양이를 돌로 새겼다. 이후 세조는 서울 근교에도 여러 군데 묘전을 설치하고 고양이를 길렀다. 지금도 이 절에는 법당의 돌계단 옆에 한 쌍의 고양이 석상이 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조선사찰사료,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