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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삶의 중심 잡기: 가온 찍기
가온찌기: 이제, 여기 나의 삶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중심을 찍기
가온찌기는 하루살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삶을 파고든다. 다석에 따르면 인생이 무력한 이유는 과거사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현재사를 비판하지 않고 장래사에 신념이 없는 탓이다.1) “과거는 과장하지 말라. 지나간 일은 허물이다. 나도 조상보다 낫다. 순(舜)은 누구요 나는 누구냐?...죽은 이들은 가만 묻어 두어라. 족보를 들치고 과거를 들추는 것은 무력한 증거다.” 중국에서 특히 유교전통에서 이상적인 임금으로 여기는 순 임금보다 내가 낫다면서 “죽은 이들을 가만 묻어 두어라”고 선언한 것은 신분과 족보를 내세운 양반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지금 여기 나의 삶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이다. 그러나 현재의 삶은 과거에 매여 있고 세상의 질서에 붙잡혀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비판하라...학문을 통해서 현재를 비판하지 않으면 현재는 죽어버린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래는 관을 가져라. 인생관, 세계관, 관념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세밀히 계획을 세워야 한다. 관념이 없으면 미래가 죽는다. 과거에 겸손하고 현재에 비판적이고 미래에 계획적이어야 한다.”(1, 821-4) 지금 여기의 삶의 중심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 삶의 ‘가운데’를 찍고 하늘로 솟아 자유로워지고 앞으로 나가는 ‘가온찌기’가 다석의 삶과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다석이 신분질서를 강조하고 복고적인 유교전통을 강력히 비판하면서도 가온찌기, 중심을 찍는 것에 대한 그의 논의는 유교, 특히 공자의 중용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공자가 중용을 왜 말했는가? 사람의 목숨은 정중용(正中庸)에 있고 용기가 나와서 일을 바로잡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목적을 가진 과녁과 같다. 몸은 활이고 고디 정신은 화살이다. 몸이란 활에다 정신이란 화살을 끼워 쏘아 중정(中正)을 얻을 수 있다.”2) 여기서 다석이 몸을 활로 보고 마음의 곧음을 화살로 봄으로써 몸과 맘의 긴밀한 관계를 드러내고 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본다.
1 지금 여기서 사는 나
가온찌기는 지금 여기 사는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한 집중이다. 우주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돌아가고 있으며, 우리의 혈액도 돌아가고 있다. 우리의 삶이 머무르는 곳이 없다.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 사이에서 ‘이제 여기’라는 것이 접촉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의 접촉점이 ‘이제 여기’인 것이다. 그 한 점이 영원한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1, 745-8)
1) 이제 여기에 나는 없다
모든 삶은 지금 여기에 사는 나의 삶이다. 다석은 ‘나의 삶’에 집중하고 파고든다. 그에 따르면 “이제 여기에 나는 없다.” ‘나’는 零, 제로, 無다. 이제 여기의 點일 뿐 시간 공간을 쓸 수 없다. 자리만 있을 뿐 없는 존재다(位而無). 아무런 소유도 권리도 없는 존재다. 시간과 공간도 ‘이제’, ‘여기’란 하나의 점일 뿐 내 마음대로 시간과 공간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십 평생에 시간 공간을 맘대로 쓰는 것으로만 여기었었다...시간에 공을 쌓고 공간에 덕을 펼 줄로 여겼었다. 틀 두 어 개를 여기 내여 놓고 앞서 살림을 파산하겠다.”(1,649)
내게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있는 것은 점으로서의 ‘나’밖에 없다. 그리고 ‘내’게는 ‘이제’밖에 없다. “이제랄 돌 삼아서 ‘내’란 옥을 닦을란다. 그제저젠 못 좇나니 오직 이제 내 때로다. 사는 날 닦는 때로만 우리 백년 하리라.“ [今石我玉 一生攻. 呑日吐月百年光] ‘이제’로 ‘나’를 닦아서 늘 빛나는 삶을 살려 한다.(1,649)
다석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나’는 쌓으려거나 이루려는 욕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이 이루신 일에 감격하고 숨쉴 뿐이다. “時永, 空遠을 그대로 주관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다. 位而無한 내가 主하면 시간은 ‘이제’란 칼날로 닿고, 공간은 ‘여기’란 이빨로 물어넘긴다. 今刃에 깎기고 玆齒에 씹히는 인생이다...인제 붙어는 나는 쌓려 일우려 안 한다. 주께서 이미 풍후히 쌓으시고 완전히 일우셨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더 감격하느냐? 더 消息하느냐?가 願이오, 禱다.”(1,650)
이제에 사는 사람은 아무 걸림이 없고 자기의 때를 사는 것이므로 흥겹고 자유롭다. 詩經에서 詩는 時 또는 是와 통한다면서 이제의 삶이 나 자신의 자유롭고 흥겨운 삶임을 말 한다: “詩軸이 서 가지고야 올(理)이고 이(是-)고가 날 것입니다. 詩는 일어나는 짓거리입니다.(興於詩) 詩經에 時, 是로 통합니다. 사는 때는 사는 이의 때, 이 때, 제 때 -이제-ㅂ니다. 이것이 목숨의 올(命理)이요 살라는 말씀(生命)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짓이 안 날 놈이 어디 있겠으며 제로라 일어나지 않을 이가 있으리까?...인생은 詩. 時, 是-이젭니다....제가 이제 사는 것...아까는 죽은 이제, 이 담은 못난 이제를 따지느라 生 ‘이제’를 드리렬 ‘이’는 없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이제 살았습니다.”(제소리. 새벽 1955. 7월호. 다902)
2. 가온찌기
‘나’는 오직 걸어가는 한 점 ‘·’이요, 지순한 진리에 명중하는 것은 ‘한울’이다. “거름거름 걸어만 가고지고, 내가 세상에 있기는 消息하는 ‘·’요. 한울이로다, 지순한 진리에 명중하기는!”(1,650) 오직 내가 할 일은 진리와 생명의 중심인 ‘하늘’을 맞추는 일이다.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사명이다. 그래서 다석은 “꽂으려면 하늘에 꽂을 것이지 여인의 살에 꽂으려느냐?”고 말한다.
빛나려면 깨져야지
진리와 생명의 중심인 하늘을 내가 맞추려면 사욕에 사로잡힌 내가 깨져야 한다. 몸의 사욕과 물욕에 사로잡히면 시간과 공간에 붙잡히고 세상을 옆으로 기게 된다. 그러므로 몸뚱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물질을 섬기는 우상숭배생활이다. “몸뚱이의 충족은 죄를 낳는다. 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못쓴다. 무엇을 좀 갖겠다든지, 좋은 소식 좀 듣겠다 하는 것은 실제 마음이 거기 머뭇거리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니 삼가야 한다.”(1,749-52) 물질이나 물질적인 삶에 대한 온갖 집착이나 생각이 ‘우상’이다.
다석은 18888일째 되는 날에 破私를 체험하였다....‘나’가 깨져 “無私만 하고 보면, 흑암이나 사망의 두려움이 없음을 알았습니다.”(성서조선 139호 저녁찬송. 진다1, 382) 破私의 깨달음을 이렇게 말했다. “목숨은 썩는 거야 그러나 말씀은 빛나는 거야. 빛 날래면 깨야지, 깨져야지. 죽어야지.”(1,841-4) 내 뜻 없이 볼 때 바로 보고 분열 없는 절대의 진리에 이를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영원한 평화가 깃들이는 그늘...완전과 성숙이 영그는 영원한 그늘에...들게 된다.”(1,841-4)
자기를 깨뜨리고 하늘의 한 가운데, 자기 마음의 한가운데를 맞혀야 한다. 마음의 한가운데를 맞히려면 사사로운 마음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의 뿌리를 뽑으면 “그 뿌리 뽑힌 속의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삶 물이 江이 되어 흐를” 것이다. 속이 뚫리면 위로 솟아오르는 가운데 길이 있다. 그 길은 義의 길, 예수의 길이다. “나는 죄 세상은 악인데 가온대 한 길이 있으니 의이니 예수니 세상을 이기고 웋으로 솟아나려는 이만 갈 길이다.”(“이것이 주의 기도요, 나의 소원이다” 성서조선 158호, 1,668)
자아가 깨진 사람은 빈 마음으로 가운데 길을 갈 수 있다. “...내 마음을 내가 내야 한다...희노애락 따위 태울 것은 태워야 한다. 희노애락을 화합시켜 나가는 가운데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은 본래 븬데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中和의 길이다.”(1,749-52)
가온찌기
다석은 시간과 공간의 중심, 지금 여기의 한 가운데, 우주적 생명, 참 생명의 중심, 하늘, 하나님, 마음의 중심을 찍어 바른 삶을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이라고 본다. “하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여 고디 고디 가온찌기가 인생의 핵심이다.”(긋 끝 나 말씀. 버8. 1.734) 내 삶의 중심도 우주자연 생명의 중심도 내 마음 속에서 잡을 수 있다. ‘이제’, ‘여기’에서 사는 ‘나’의 참 모습은 한 점이니 이 점을 잘 찍는 일이 가온찌기다. 가온은 가운데를 뜻하며 가고 오는 한 가운데를 뚯한다. 그래서 다석은 ᄀᆞ(가)ᄋᆞᆫ(온)이라 하기도 하고 ᄀᆞᆫ이라고도 한다. 다석의 삶은 한 마디로 가온찍기다. 가온찍기는 다석사상의 중심을 이룬다.다석의 가온찌기는 유교의 중용사상에서 빌어온 것이다. 다석은 中庸을 ‘가온대 쓸’로 옮기고 가온대 中을 “...좋고 싫고 섧고 즐검이 펴지 아니한 적”이라 하고 고론을 “픠여서 다 마다에 마딤”이라 했다. “가온은 뉘웋에 한밑이오 고론은 뉘웋에 드딤발이니라.” 가온은 세상의 근본이요 고론은 세상의 기초다. 가온과 고론이 일치하면 “한늘 땅이 자리로 스며 잘몬이 길리위나니라”( 하늘 땅이 잘 돌아가고 만물이 잘 자란다.)(김다5. 531-2)
다석은 가온찌기를 일상의 삶에서 중용의 길을 걷는 것으로 풀이한다. 먹고 싶다고 많이 먹어도 고생이고 힘들다고 힘을 아껴도 배설물로 나가버리므로 더도 덜도 말고 중용을 지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3)
가온()은 만물과 삶의 중심이므로 “저절로 제 가운데 돌아온다...우주 ·인생의 모든 것은 모순된 것, 못 된 것을 다 버리고 돌아가면 으로 돌아간다.”(젖은 눈물 버6. 1,728)고 다석 보았다. 근원의 중심에로 돌아간다는 것은 동양적인 사고라고 여겨진다. 그는 ‘솟낳가온’이란 글에서 자아를 부정해도 자아의 중심이 되살아나고, 밥을 먹어도 몸은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자아의 중심과 자연의 중심이 있어서 그렇다. 이 글의 마지막 연은 “울얼어 울월울림만 한웋나라 솟낳가온”인데 김흥호는 이렇게 풀이한다: “우러러 하늘을 쳐다보고 울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내 마음 속을 울려 회개하고 하웋나라를...솟아나가 올라가서 하나님 가온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참 삶이다.”4) 본능적 자아의 중심과 자연의 중심에로 돌아가는 흐름에서 솟아올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게 가온찌기다. 다석에게 가온은 사람의 중심이면서 뭇 생명의 참된 중심인 하나님을 가리킨다. 가온은 ‘내’가 서는 자리이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하나님께 위로 솟아오르려면 먼저 마음에 한 점을 찍어야 한다. 다석은 가온찌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心線路 接境이오 一線이다 前進이 一路다 直上 一點心.”5) 풀어보면 “마음에 길이 생기고 끝에 이른다. 하나의 선밖에 없다. 앞으로 나가는 한 길밖에 없다. 곧게 위로 올라 마음에 한 점을 찍는다.” 마음이 경계에 부딪치면 앞으로 나아갈 길은 마음에 한 점을 찍고 위로 곧게 올라가는 길 밖에 없다. 마음에 한 점을 찍어 마음의 온갖 욕심과 허영을 한 점으로 줄이면 “그저 나므름 업시 제게로브터”6)의 경지에 이른다. 남을 나무람 없이 불평불만 없이 제 속에서 하늘 길을 열고 무한 영원의 생명을 이끌어낼 수 있다.
가온찌기는 ‘이제의 나’ ‘이긋’을 잡는 일이다. ‘이제’의 ‘나’는 한 점이지만 공간 속에 나타나 이어나가는 ‘영원한 이의 한 긋’이다. 나는 제긋이다. “제긋은 영원한 정신의 한 토막이요 영원한 말씀의 한 끄트머리다. 영원전부터 이어이어 여기어 이여저 내려온 한끝이다. 여기 예에서만 볼 수 있는 예긋이다. 가온찌기는 “태초의 맨첫긋과 종말의 맨 마지막 긋이 한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긋 끝 나 말씀 버 8. 1,733-6) 내 속에 영원전부터 내려오는 생명줄이 있고 이 줄의 끄트머리가 ‘나’다. “우리의 숨줄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나다. 우리의 숨줄, 영원한 생명줄을 붙잡아야 한다. 이 숨줄 끝을 붙잡는 게 가온찌기다.”(정2. 1,737-40) 이 생명줄을 붙잡으면 멸망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이긋’으로서의 ‘나’는 영원한 첫긋(태초)과 맞긋(종말)을 알고자 그리워한다. 그러나 첫긋과 맞긋도 이긋에서 시작해야 한다. “...참을 찾는 것은 이긋을 찾는 것이다. 이 끝이 참이다. 이 끝에서 처음도 찾고 마침을 찾아야 한다...산다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 점을 찍는 것이요 점을 도려내는 것이다.”(깨끗. 1, 753-6)
다석은 가온찍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맞히듯이 곧이 곧아 신성(神聖)하고 영명(靈明)하고 영원한 나(하느님)의 한 복판을 똑바로 맞추어 참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이다. 내 맘에 하느님으로부터 온 영원한 생명(얼나)의 긋(點)이 나타난 것이다. 이 가온찍기야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요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다.”(다석 류영모 명상록. 33)
‘이긋’으로서의 ‘나’를 아는데서 나의 삶은 시작한다. “가온찌기는 나를 보는 거고 나를 보는 거울은 경·말씀이다. 가온찌기는 말씀풀이다. 말씀에 점찍고 모든 말씀이 나로 압축된다.” “나를 안 자만이 형이상도 알고 형이하도 안다.” “가온찍은 이끗을 갖고 사는 것뿐! 이름은 감옥에서 죄수에게 붙인 번호같은 것! 이름은 수치다. 영원한 생명에 이름없다. 긋을 알면 된다.”(1,733-6) ‘이제의 나’는 “영원 속에 한 순간, 무한 속에 한 받침점”이고, 사람은 “한순간 한 받침점에 한 알캥이다. 우리는...있는 것은 가온찌기 나뿐이다.”(깨끗. 1, 753-6)
가온찌기는 영원의 한복판을 찍어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가온찌기는 고디고디 신성하고 영특한 영원의 한복판을 명중시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1,734) 가온찌기는 ‘ᄀᆞᆫ’, ‘ᄀᆞ ᅟᆞᆫ’이며, “가고가고 영원히 가고 오고오고 영원히 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가온찌기, 진리를 깨닫는 순간, 찰라 속에 영원을 보는 것”(1,734)이다. 흘러가고 흘러오는 시간의 한복판을 찍어서 영원을 잡는 일이다.다석은 가온찌기를 한글 ㅡ ㅣ ㆍ로 푼다. “ㅡ ㅣ ㆍ 는 수평선 수직선 태극점, 세상 죄의 수평선을 義의 수직선이 뚫고 올라가서 아버지 가슴 한가운데 도달하는 가온찍이 점심이 으이아요 십자가다.”(1,288) 한글과 십자가 신앙이 절묘하게 결합되었다. 가온찌기는 세상 죄의 수평선(ㅡ)을 義의 수직선(ㅣ)이 뚫고 아버지 가슴 한가운데 (·) 도달하는 것이다. 가온찌기는 위로 솟아올라 하늘 아버지 가슴 한가운데 이르는 것이다.
다석은 가온찌기를 가온,ᄀᆞᆫ으로 쓰고, ᄀᆞᆫ을 ㄱ, ㄴ, ㆍ로도 풀이한다. ᄀᆞᆫ 은 무한과 영원에 끝을 찍는 것이다. “무한과 영원에 끝이 찍힌다. 영원한 기역(ㄱ)과 영원한 니은(ㄴ) 가운데 한 점(·)이 찍힌다. 가온찌기(·)가 끝이다.” 그리고 가온찌기한 끝은 “一點靈明, 우주의 켜진 하나의 불꽃이다.”(깨끗. 1, 753-6)
나가면서 돌아오는 길
가온찍기는 이제 여기서 영원의 한 점을 찍는 것인데 이 한 점은 앞으로 나가는 원점이다. 이것은 영원의 한 점이면서 우주공간의 한 점이다. 머물면 썩고 그친다. 삶은 앞으로 나가는것이다.
“우리는 불꽃을 피움으로써 미래와 과거의 영원에 접촉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제 여기 가온찍기 이다. 나의 원점 나가는 것의 원점이다. 목적을 말하는 것은 우스운 것이다. ‘여기 이제’가 바로 ‘곳’이다. 우주공간이 우리의 주소이다. 머물면 썩고 만다. 산다는 것은 자꾸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1,745-8)
가온찍기는 영원한 생명의 우주적 중심을 찍는 일이고 ‘나’의 중심을 찍는 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머무름이 아니라 영원히 오고 영원히 가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 길은 “내가 있는 곳에 오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영원히 오고 가는 길을 내가 자꾸 가다 보면 “내가 곧 길이 된다. 이쯤 되면 내가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된다...‘내’가 없으면 길이 없다...나 있는 곳에 길이 있다.”(주일무적 1,749-52)
바탈 살려라
가온찌기의 목적은 바탈, 속알을 살리는 것이다. “나는 영원자의 아들이요 내 속에는 속알이 있다. 속알은 덕이요 인간성이요 인격, 신성,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이 있다. 나는 그릇에 담긴 보배요, 속알 실은 수레다.”(1,733-6) 가온찌기는 “고디 곧장 오르고 올라 내 속에 있는 고디(神)를 살려 내어...내 속에 가장 온근 속알이 있는 것을 자각하여 깨닫고 나오는”7) 것이다. “생각하고 추리하여 영원에 들어가는 길은 자기의 속알을 깨치고 자기의 뿌리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 헤맴은 어리석고 죽은 짓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자기임을 정말 깨닫고 찰라 속에 영원을 찾는 것이 믿음이니라.”(하나. 1,757-60)
속알을 깨침으로 영원에 이른다. 사람은 만물의 근원이요 밑둥이다.(건. 버23. 1, 793-6) 사람의 바탈이 하늘과 통하고 영원에 닿아 있기 때문에 바탈, 속알을 꿰뚫고 자기 생명의 목적과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전통사상의 핵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삼일신고 진리훈의 문귀 ‘성통공완시’(性通功完 是)를 다석은 “바탈을 트고 마틈을 마츰이 이다”고 풀이한다.(55.10.6) “바탈이 뚫리고 통하여 자기 사명을 완성하는 일이 나의 일이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자기 본성을 통하고 역사와 사회 속에서 하늘이 준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삼일신고 마지막 결론에 “안으로 본성을 통하고 밖으로 사명을 이룬 사람은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다”(性通功完者 永得快樂)고 했다.
다석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본성을 완성하는 것이 진리이고 진리를 깨쳤다는 것은 본성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리와 성숙은...죽음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1,825-8)
다석의 가온찌기에는 ‘나의 바탈’, ‘속알’ ‘한가운데’를 찍는다는 뜻과 내 중심을 찍고 위로 솟구쳐 오르고 앞으로 뛰쳐나간다는 뜻이 있다.(주일무적, 1,749-52) 나의 바탈, 속알이 영원, 하늘과 통하고 ‘참된 나’라고 보고 가온찌기를 통해 참된 나, ‘늘 가운데’로 돌아간다는 것은 동양적이고 한국적이다. 그러나 가온찌기를 통해 곧게 솟아오르고 앞으로 나가는 것을 강조한 것은 기독교적이고 서구적이라고 생각된다.
3 가온찌기 無等 세상
‘나’를 한 점으로 찍고 하늘과 영원을 살면 걸림 없이 자유로우면서 서로 하나되고(大同) 평등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
1) 未定論과 窮神知化
지금 여기 나의 한가운데를 점으로 찍으면 이 한 점밖에 없고 이 한 점에서 영원한 하나님과 통할 수 있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만 있으므로 모든 일은 지금 여기의 한 점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석은 기정론, 결정론을 거부하고 미정론을 내세운다. “무슨 종교, 무슨 신조, 무슨 사상을 내세워 생평[生平: 인생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기정론(旣定論)에 지나지 않는다...인생이란 끝날 때까지 미정일 것이다.”8) 인생은 언제나 그 때 그 때 주어지는 순간의 삶에서 결정되고, 모든 일이 하나님과 내가 한 점으로 만나는 가온찌기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욕심과 집착에 매인 마음에 가온찌기로 한 점을 찍으면 ‘마음을 마음대로’하게 되고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일을 이룰 수 있다.(하게 되게. 1, 809-12)
가온찌기는 과거와 미래에 매이지 않고 공간에 사로잡히지 않고 있고(有) 없고(無)를 떠나서 자유롭게 사는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계신 임이 시키신 대로만 사는 삶9)이면서 자유로운 주체적인 삶이다. 지금 여기에 가온찍는 자리는 한 점이면서 우주이며 순간이면서 미래와 과거의 영원에 닿아 있고, “자꾸 움직여 나가는” 원점이다.(무거무래 역무주. 1, 745-8 버 11)
마음에 한 점을 찍는다는 것은 마음이 텅 비게 하는 것, 빈탕한데에서 놀게 되는 것이다. 내 속에서 빈탕한데를 보고 그 빈탕한데에 맞추어 놀자는 것이다.(빈탕한데 맞혀노리. 1, 890쪽 이하)
노래 누리 가온: 이 세상 中道를 사는 노래
몸ᄆᆞᆷ 하루가온이 늘금 가까주금넘에 올금 그믐 마음몸
올늘 가온이 올늘제날 그믐업시
늘늘 늘늘 늘느리야
우리오늘 올 하이아해 햇것 올 것
하이아해 들 올 것 햇것
모려는 마음으로 쓰지 마음 예
마는 마음이 모인 몸 계 오늘 삶느리(다6,57)
다석은 ‘이 세상 中道를 사는 노래’( 노래 누리 ᄀᆞᆫ)에서 몸ᄆᆞᆷ 하루를 가온찌기로 살면 늘 법도에 어긋나지 않고, “오늘 하루가 자기의 날이고 영원을 사는 날”이라고 했다. 불평불만없이 기쁘게 사는 삶이 “늘늘늘늘 늘느리야” 노랫가락이 터져 나온다고 했다. 다가 올 “하늘 나라를 위하여 ”오늘 우리가 “새것, 옳은 것을 힘껏 하여...햇것, 올것이 밝아지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마음을 모으고 살고 “마는 마음이 모인 몸”은 하늘에 있으면 오늘 삶은 늘어난다.김흥호에 따르면 가온찌기는 중심을 잡고 중용을 지켜서 알맞게 먹고 알맞게 일을 해서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으로 “알맞이 지혜로운 삶”(다5,557)을 사는 것이다. 또한 가온찌기는 마음에 점을 찍어 정신을 일깨워 ‘솟아오르게’ 하고, ‘앞으로 나가게’ 한다. 정신은 “매임없이 모음없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매인 생활은 몸을 우상으로 섬기는 우상생활이다. “ ᄆᆞᆷ 은 항상 窮神하는 자리에 가 있어야 한다.” 궁신은 위로 하나님을 탐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탐구하면 지화(知化), 자연 자체의 변화를 알게 된다. 하나님을 탐구해서 하나님과 통하면 모든 인간, 만물과 통할 수 있다. 그러면 “맴에서 떠나 자유, 몸에서 떠나 평등이다.”(매임과 모음이 아니! 버10. 1, 741-744)
2) 가온찌기 無等 세상
다석은 현대인을 “오줌 똥도 못가리고 밤낮 싸는 싸개들”이라면서 “밥을 끊고 남녀를 끊어야 부처다 부처가 되어야 이 누리 건너 제 그늘[안식]에 드느니라.”(1,841-4)고 했다. 식욕과 육욕에서 벗어나 “오직 참 하나신 한우님 계 맨꼭대기”에 서야 참 평안과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석의 가온찌기는 신비한 명상과 내면적 수행에 머물지 않고 끝끝내 표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다석은 이것을 ‘디긋, 딱딱한 땅을 딛고 사는 우리의 긋’이라고 한다.(긋 끝 나 말씀. 버8. 1.734) 가온찌기를 끝끝내 표현해 보는 것, 자기의 생각을 펴보는 실천을 ‘디긋디긋’이라 한다. 가온찌기에서 ‘나’를 하나의 점으로 찍음으로써 점으로서의 자리만 남고 무화되고 부정되었으나 끄트머리 한 점으로서의 ‘나’는 무의 심연 속에 가라앉지 않고 “딱딱한 땅을 딛고 사는 긋”으로서 책임적인 실천의 주체로 된다.
인간은 자기의 욕심과 주장을 점으로 가온 찍어 버리면 자유롭게 되고 남을 섬기는 평등, 無等 세상을 이룰 수 있다. 가온찌기는 사사로운 자기의 중심을 비우는 것이고 참된 중심, 하나님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을 다석은 ‘아 가온따위 가온맨꼭대’라는 글로 표현한다.
내줁를 내가 가지고 제절롤 제가 쓰줁뉠
맨들 수 잇사오릿가 돼됨도[될 수가] 잇사오릿가
두어라 줁둘[하나님 아들] 솀판 땅땅따딜 따위가온(다6. 26)
땅 위에 가온을 찍고 하늘 맨 꼭대기에 가온을 찍는다. 내가 스스로 자유로워져서 저절로 내가 나를 쓰는 세상을 이룰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나님 아들에게 맡겨서 하나님 아들이 주관하면 땅 위에 땅땅한 굳건한 중심이 세워진다. 가온찌기가 제대로 되어야 세상에도 중심이 세워진다. 내 마음에 가온 ·을 찍어 하늘을 맞춤이 땅 위에 하늘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일이다.
다석의 가온찌기에서 ‘나’는 없음, 無, 零으로서 無爲의 존재이면서 하나님과 통하는 ‘나’, 내 생명의 본성과 통하는 ‘나’이다. 이 ‘나’는 생명의 본성인 참과 어짐을 이루는 책임적 실천의 주체이다.
내 삶의 한가운데를 점으로 찍으면 한 점으로서의 ‘나’는 세상에 대한 권리도 소유도 없으므로 남과 부딪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에 가온찍은 나에게는 원수가 없다. 누구와도 서로 살리며 더불어 살 수 있다.
이런 다석의 사상은 권리 개념에 기초한 서구의 사상과는 구별된다. 서구에서는 자아의 권리를 실현하고 보호하는데 법적 정치적 노력이 집중되었다. 법은 자아의 권리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독일어 Recht, 라틴어 ius는 법과 권리를 함께 나타낸다. 영어에서도 right는 정의와 권리를 함께 나타낸다. 권리가 곧 정의이고 법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권리를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줄기차게 투쟁해온 서구의 정치사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자아의 권리를 위한 투쟁만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 세상을 이룰 수 없다. 자아와 자아가 화해하고 공존할 수 없는 한 권리를 위한 투쟁은 갈등과 대립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와 다석의 인간관에서는 자아를 없음과 빔으로 보니까 권리 개념이 없는 셈이다. 자아가 없으니 권리도 없고 싸울 일도 없다. 불교에서는 자아가 부정되고 해탈의 몰아세계로 몰이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서 다석의 사상에서는 자아가 부정되면서도 똑똑하고 분명한 실천주체로 선다. 이것이 다석의 인간이해가 돋보이는 점이다. 가온찍은 인간의 ‘나’는 물질적 욕망과 갈등과 경쟁의 수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하늘의 별처럼 멀게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