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인문학이 왜 우리 삶에 꼭 필요한가
쓸모없는 인문학이 왜 우리 삶에 꼭 필요한가
※누치오 오르디네(Nuccio Ordine),
이탈리아 칼라브리아대학 이탈리아 문학과 교수이자 철학자이며
르네상스와 조르다노 브루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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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 누치오 오르디네 著
‘고전을 읽으면 성공한다’는 신화가 한국 사회에 번진 지 10년이 넘었다. ‘고전은 천재가 썼다. 고전을 열심히 읽으면 우리도 천재가 된다. 고전 탐독은 성공의 비결이자 엘리트의 자녀 교육법이다.’ 이 주장에 감화 받아 한동안 고전 열풍이 불었으나 그 결실은 초라하다. 인문 고전을 10년 읽은 결과가 궁금하다면 전국을 떠도는 시간강사들을 보라.
실용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전은 선택할 수 없는 한가로운 도락(道樂)의 정점으로 쓸모가 없다. 고전 탐독은 결코 성공의 비결이 아니다. 고전을 열독한다고 해서 이제껏 없던 ‘여친’이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옛 ‘남친’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탈리아 문학 연구자이며 철학자인 누치오 오르디네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우리 시대에 고전과 인문학이 ‘쓸모없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전을 읽고 인문학을 배워야 할 이유를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컬처그라퍼)이라는 책에서 제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야만의 시대는 ‘쓸모없는 지식의 유용성’이 ‘지배적인 유용성’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책 구성 자체가 지배적인 유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르디네가 “오랫동안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기록해 두었던 생각과 인용문들을” 조각조각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짤막한 단편 속에서 수많은 고전과 현자의 가르침이 인용되고, 이를 발판 삼아 오르디네의 사색이 전개된다. 눈 밝은 독자라면 서장(‘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에 대한 선언’)만으로도 저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핵심만 추려내는 실용적 독서법으로는 이 소품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없다.
오르디네는 ‘쓸모없음의 유용함과 유용함의 쓸모없음’을 다양한 변주로 들려주며 독자의 영혼을 깨운다. 쓸모없는 지식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과 존재 자체다. 뭇 스승들과 오르디네의 가르침을 제대로 새겨듣고 고전과 인문학으로부터 더 많은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삶의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 “쓸모없는 것에 할애할 시간이 없는 현대인은 영혼 없는 기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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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을 읽고
Hye Jung Shin
➪ 눈 지그시 감고 음악 감상하기
➪ 아름다운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 관람하기
➪ 역사적 가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 찾아가기
➪ 독서로 작가와 만나기, 여행하기, 상상하기
이러한 것들은 나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고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다. 유용, 효용, 실용 그리고 이득을 따진다면 할 말이 없다. 모두가 시간과 비용을 소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를 논한다면 내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들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중년이 되고 보니 나의 쓸모없는 행동들에 대한 그리고 누릴 수 있는 여유에 대한 가치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쓸모없음’은 ‘쓸모 있으나 ’쓸모 있음‘은 쓸모없다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책이다. 200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의 다소 무리 없어 보이는 양의 책이지만 다루는 내용은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실용과 유용성 그리고 효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인들. 이익과 권력의 가치를 둔다면 눈앞의 보여지는 실체가 없는 철학과 인문학 등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일은 쓸모없을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현실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기술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가치만 추구한다면 진정 중요한 것과 유용한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나무는 정말 쓸모가 없구나! 그래서 이렇게 크게 자랄 수 있었던 거지. 성인 또한 쓸모없는 목재와 다름없나니 !“ 쓰일 데가 많은 사람은 불행에 빠진다”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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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年(작일산중지목 이불재득종기년), 장자 산목(莊子 山木).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不材) 때문에 천수(天壽)를 다할 수 있었다.
莊子 外篇 第20篇 山木(장자 외편 제20편 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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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고전에서 배우는 진정한 가치를 설명하고 친절하게도 저자가 인용한 고전을 부록에 실었다. 학문의 전당이 되어야할 대학은 기업이 되어 효용성만을 강조하고 학생은 고객이 되어가는 현실을 비판하고 인간의 소유하려는 속성이 인간의 존엄성, 사랑, 진리를 오히려 말살시키려 한다는 점을 들어 현대인들이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를 생각해보게 한다.
양서를 발간하는 착한 출판사 컬쳐그라퍼의 책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 득과 실을 따지며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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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
p.31
<작가이자 문화철학자 롭 리멘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화도 사랑처럼 구속하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얻고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문화와 자유로운 교육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고전작품과 인문교육, 즉 이윤을 생산하지 않는 잉여 가치를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공리주의에 저항하고 품위 있게 걸어가도록 우리를 비춰 주는 희망의 불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불확실한 것들 중에 한 가지는 확실하다. 쓸모없는 것을 생산하길 거부한다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달려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무분별하고 병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말 것이다. 이 공동체는 결국 길을 잃고 자기 자신과 생명의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 정신이 황폐해지고 상상력이 고갈되면 어리석은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적인 것과 더욱 멀어지고 말 것이다.
p.45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도 유토피아 문학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유토피아』,『태양의 도시』와 함께 3대 유토피아 소설로 꼽히는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는 앞의 두 소설과 달리 사유 재산 제도가 정착된 사회를 그린다. 하지만 아틀란티스 섬사람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금, 은, 보석 비단이나 향신료 혹은 이런저런 상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직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전 세계의 발명품에 대해 알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한다. 베이컨이 구상한 이상 사회는 사람들이 경제적 욕구에 사로잡힌 사회가 아니라 근데 과학에 대한 지적 열망에 사로잡힌 사회였다.
p.60
<우리는 돈과 이익의 파괴적인 힘으로부터 지식을 보호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BC322)는 『형이상학』에서 지식 자체의 가치에 대해 중요한 글을 남겼다. 그는 가장 수준 높은 지식은 '생산적인 지식'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인간은 현 시대나 태초부터나 경이로운 것을 보고 철학적인 암시를 받았다." 손에 닿는 범위 내에서 보이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 깜짝 놀라서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학하기로 결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지식에 대한 순수한 목적으로 학문을 추구한 것이지 실용적인 욕구 때문이 아니다. (중략) 명백히 우리가 진리 탐구에 몰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탐구 그 자체와 관련이 없는 어떤 필요 때문이 아니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부르듯, 학문도 유일하게 자유로운 성격을 띤다. 왜냐하면 학문이야말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인간의 '신성함'은 유용함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철학의 자유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철학에 정통하는 것이 초인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p.101
<'쓸모없음'이라는 주제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현인 장자(莊子, BC369~BC289?)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고대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연의 끊임없는 변화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그의 사상이 집약된 『장자』에서 그는 쓸모없음의 주제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가령 수세기에 걸쳐 생명을 유지하는 나무에 대해 말할 때 "이 나무는 정말 쓸모가 없구나! 그래서 이렇게 크게 자랄 수 있었던 거지. 성인 또한 쓸모없는 목재와 다름없나니!", "쓰일 데가 많은 사람은 불행에 빠진다"고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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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가 산 속을 가다가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꾼이 그 옆에 있으면서도 나무를 베지 않아 그 까닭을 물으니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는 것이다.
莊子行於山中, 見大木, 枝葉盛茂, 伐木者止其旁而不取也. 問其故, 曰:「无所可用.
장자행어산중, 견대목, 지엽성무, 벌목자지기방이불취야. 문기고, 왈:「무소가용.
莊子曰:「此木以不材得終其天年!(장자왈:「차목이불재득종기천년!)
莊子 外篇 第20篇 山木(장자 외편 제20편 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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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앞서 친구인 혜자와 나누는 짤막한 대화에서도, 쓸모없음의 중요성을 모르면서 유용함이 무엇인지 아는 척하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자네의 말은 쓸모가 없네."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다. "유용함이 무엇인지 알려면 쓸모없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네."
p.159
<공리주의의 거센 파도로부터 과학과 학교와 대학뿐 아니라 '문화'라 부르는 그 모든 것을 구하려면 우리는 계속 투쟁해야 한다. 교육, 과학적 탐구, 고전 및 문화적 자산을 계획적으로 해체하는 흐름에 저항해야 한다. 문화와 교육을 방해하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읽었던 한 문장을 소개한다.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발견된, 사라진 필사본 도서관의 카드에 쓰인 매우 의미심장한 문장이다."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내가 가난해지지 않는 재산이다."그렇다. 오로지 지식만이 내가 가난해지지 않고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는 자산이다. 아니, 오히려 지식을 전수하는 사람과 지식을 받는 사람 모두 정신의 부자가 될 수 있다.
p.182
<브루노와 몽테뉴 두 사람 모두 종교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절대적 진리를 알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당시 교회가 폭력과 공포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광신으로 인해 결백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했으며 가정이 파괴되고 일가족이 죽음을 맞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평화를 열정적으로 옹호한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가 지적하는 것처럼, 잔인함은 종교의 본질과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을 읽어 보라.
모든 기독교 서적은 오직 평화와 정신의 통일만을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도들의 삶은 오로지 전쟁으로만 점철되어 있다.
<에라스무스의 이러한 비판은 기독교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예리한 성찰은 오늘날 갈등을 빚고 있는 다른 종교에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어느 종교에나 광신의 위험이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어느 시대에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중요한 예술품이 파괴되었고, 어마어마한 가치를 갖는 필사본과 서적을 보관하던 도서관이 전소되었으며, 지식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1600년 2월 17일 로마 종교재판소에 의해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에서 화형당한 브루노의 희생도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그보다 약 50년 전인 1553년 의학자이자 신학자인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이단자로 몰려 장 칼뱅에 의해 제네바에서 화형에 처해졌던 일도 있었다. 당시 최고의 문학자인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가 용기를 내어 그에 대해 가했던 비판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소장에 반박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사람을 불에 태워 죽임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스스로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중략) 한 인간을 죽이는 일이 결코 교리를 지키는 것이 될 수 없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을 죽였을 뿐이다. 끔찍한 역설은 바로 절대적 진리란 이름으로 마치 인류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인 양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광신과 불관용을 해소시켜 주는 해독제가 바로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