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아침은 침침하기 짝이 없이 하늘을 열어주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부여를 하루만에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을 했기에 9시 좀 넘어 정림사지 입구인 박물관 앞으로 갔으나 9시반이 넘어도 미동들도 없다. 할 수 없이 돌아와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며 꽃몇장 찍고 다시 올라가보니 10시가 넘어서야 문을 열어놓았다. 개장시간이 9시 반인데 왜 이제야 여느냐고 항의를 했더니 박물관이 10시에 개방하기 때문에 자기네 들도 10시출근을 한다고, 그럼 시간을 고치던가...그럼 짤리려나?...꼭 높은 대가리들 행동하고 꼭 같은 공무원들....
오늘의 목표는 이곳과 부여박물관, 그리고 부여시내와 부소산성 그리고 궁남지 이렇게 다 돌아볼 생각인데 정말 최대 난점은 짧은 겨울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정림사지 앞 쪽에 있는 커다란 부여관광 안내도를 열심이 들여다보며 한가지 더 찾았다. 부여 향교도 정림사지 근처에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정림사지에 들어서 뻘쭘한 것 같이 서있는 5층 석탑이 너무도 쓸쓸해 보였다. 우선 역사를 생각하며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드넓은 정림사지엔 금당지가 많고, 또 연못도 있는 그런 멋진 사찰이었다는게 한눈에 보인다.
사적 제301호로 지정된 정림사지는 서기 1942년 발굴조사 때 ‘대평 팔년 무진(大平八年戊辰) 정림사대장당초(定林寺大藏當草)’라고 쓰여져 있는 고려 초기의 기와 명문(銘文)이 발견되어 정림사라고 부르며, 이 기와가 1028년의 것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국보로 지정된 백제 때의 5층석탑은 그 이전에도 절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가람의 배치는 강당과 금당(金堂) ·중문(中門)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강당과 중문을 연결한 회랑(廻廊)이 있으며 금당과 중문 사이에는 1기의 탑을 배치한 1탑식 가람으로 전형적인 백제 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고 충남대 발굴조사에에 밝히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곳이 발굴되어 정확한 역사적 가치가 확정되기를 바랄 뿐이다.
[박물관 앞에사 한참을 기다려도 열리지 않고...]
[박물관 열기를 기다리며 식당에사 찍게된 아부틸론...]
[정림사지 박물관으로 들어가야 정림사지를 관람할 수가...]
[길 게 자리하고 있는 정림사지 박물관 전경...]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 9 호)...]
부여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정림사지는 백제인이 만든 2개 남은 석탑 중 하나가 위치한 절터이다. 백제 시대에는 이 절터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발굴 작업 중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 조각에 정림사라는 사찰 명칭이 있어 그렇게 불리울 뿐인데 삼국유사에는 정림사가 출현하지 않아 삼국시대의 이름은 아니다. 그러면 탑은 분명 백제인이 만든 탑이고 왕궁이 있던 곳에 세워진 사찰이니 상당한 규모였을 이 절의 백제 이름은 무엇일까? 탑이 말을 하지 않는한 어찌 알수 있겠는가? 정림사지가 있던 곳은 부소산과 왕실 연못이었던 궁남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위치상으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현재는 탑만 덩그런히 서있을 뿐이다. 뒤쪽에 위치한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그 안에는 고려때 만들어진 석불이 안치되어 있다. 그나마 머리 부분은 훗날 연자 방아돌을 깍아 다시 올려놓은 것인데 좌대(받침돌)부분의 연꽃 문양이 그 석불의 아름다움을 증명해 줄 뿐이다. 백제 지역 답사를 다닐 때 마다 전쟁에 패해 망한 왕조가 어떻게 역사속에서 완벽하게 지워질 수 있는지 세삼 뼈저리게 느낀다. 모든 것이 정확하지 않고 단편적인 것뿐이라 수천조각으로 나뉘어진 그림 맞추기 게임에 서너 조각가지고 전체 그림을 알아 내야하는 것과 같아 오로지 답답할 뿐이다. 이 석탑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을 가지고 추측해 보건데 익산 미륵사지석탑보다는 후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미륵사지가 목탑의 양식을 대체적으로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면 정림사지는 목탑의 모방에서 한단계 발전해 석탑의 조형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탑을 제작할 때 초기에는 나무로 목탑을 만들고 그 이후에 석탑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그렇다) 익산 미륵사가 백제 무왕조(600-641)에 만들어진 것이니 정림사지 석탑은 그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7세기 중엽에 해당한다. 백제인의 건축기술이 상당했음은 여러 기록에서 증명되고 있다. 특히 돌을 다루는 기술은 삼국중에 으뜸이었다.
고구려인들은 석탑을 만들지 않았고 신라인들은 초기에 벽돌모양으로 다듬은 모전 석탑(벽돌모양을 모방한 돌탑)을 만들었는데 재질은 화강암이 아니다. 경주의 분황사 모전석탑과 부여 정림사지석탑이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비교해 보면 그 기술적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뛰어난 돌기술자였던 백제인들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정림사 5층 석탑은 미륵사터 석탑 보다 규모가 1/3정도 이다. 목조 건축 양식을 그대로 돌로 표현해 놓았다면 정림사지 석탑은 그 형상미를 한단계 승화시켜 단아하면서도 절제된 석탑의 모범을 보여준다. 석탑은 이후 정림사 5층 탑의 구조를 그대로 계승발전시킨다.
이 탑은 한국 탑의 모범이며 그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분황사 모전석탑으로부터 의성 탑리 오층석탑과 감은사터 오층석탑 및 고선사터 삼층석탑을 거쳐 불국사 삼층석탑에 이르러 석탑양식의 신라 형태가 정착되어 진다. 라고 이승훈의 신한국기행이 자세히 알려주었다.
정림사 5층 석탑은 잘 다듬어 마름질한 화강석재 149매를 잘 짜맞추어 올린 높이 8.33m의 탑이다. 정형화된 모습이 담긴 탑이지만 목조탑에서 보여주는 가구적인 수법이 그대로 계승되어 목조탑이 석탑으로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 현재 국보 제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한 때는 1층 탑신에 새겨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신라 연합군과 함께 백제를 점령한 후에 그일을 기념하기 위해 남긴 비문으로 인하여 소정방이 세운 탑으로 오해 되었으며 또한 평제탑(백제를 평정한 탑)이라 하였다. 그간의 학술 조사와 연구 결과에 의하여 그 오명을 벗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백제의 패망 역사를 잘 보여준다.
탑신 1층 면석에 있는 소정방의 백제 평정 내용이나 겉에 남아있는 그을름이 그것이다. 연합군에 의해 부여가 점령당했을 때 1주일 밤낮으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하니 그 참상이 어떠했겠는가? 입은 상처를 정림사 석탑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그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탑이 말을 할 수 있어 그 당시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소정방의 정이 자신의 몸에 치욕의 역사를 기록할 때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있다면, 기단부 위에 5층으로 쌓아올린 정림사탑은 지붕돌과 그 받침(옥개석과 받침)의 수법, 우주의 배흘림 기법 등이 목조탑의 모양을 계승하고 있지만 간략화된 몸체와 규모 등이 석탑의 변화된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내부의 물건은 사라졌고 5층 사리함은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어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다. 이탑을 보신 분은 그 아래녘에 있는 익산 미륵사지 탑도 같이 보면 좋을 것이다. 백제인의 숨결이 담긴 둘남은 탑들이다. 차로 달리면 1시간 남짓 거리이다. 라고 지식리더 오현승님의 글을 추가로 올린다.
[석불좌상을 모신 강당의 용마루 치미의 아름다움...]
[부여 정림사지 석불좌상(扶餘 定林寺址 石佛坐像)...]
충남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불상에 비해서 대좌(臺座)는 잘 남아 있는데, 상대(上臺)는 앙련(仰蓮)이 조각되었지만 마멸과 파손이 심하고, 중대(中臺)의 8각간석(八角竿石)은 각면에 큼직한 안상(眼象)이 표현되었으며, 하대(下臺)는 3중(三重)으로 복련(覆蓮), 안상(眼象)을 새긴 각면이 중첩되어 복잡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8각대좌(八角臺座)라 하겠다. 라고 문화재청에서 알려준다.
동회랑지에 서는 강당지와 금당지의 동편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11개의 적심석군(積心石群)이 발견되었는데, 그 간격은 남북방향 도리칸이 3.85m 동서방향의 양칸이 4.2m정도이다. 회랑지의 북단에서도 적심석이 2개소에서 발견되었으나 대부분이 유실되고 기단이 파괴되어 그 윤곽만을 살필 수 있다. 서희랑지 에서는 남단부를 횡단하여 동서로 통화한 배수구가 발견되었고, 석탑과 금당이 서편에서는 회랑기단을 사이에 두고 여기에 와편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근거로 하여 서희랑의 통과선을 복원할 수 있었다.
[공주태실비석과 동서장군석, 그리고 5층석탑...]
눈이 왔다 비가왔다 하는 요즘날씨인데 오늘은 아침에 서리가 내려 잔디밭을 헤 메이며 다니느라 힘도 들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등산화덕에 양말은 젖지 않아 끕끕함은 없어 다닐만 하다. 이제 정림사지를 한 바퀴 돌아 박물관 앞 뜰에 마련된 야외 공연장까지 다 보았다. 이제 박물관으로 들어가 그 동한 발굴된 유물을 보아야 할 시간이다. 물론 좋은 것들은 다 부여박물관이나 아니면 서울 국립박물관에 다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르지만 제일 좋은건 생활토기들과 숨쉬고 있는 듯한 작은 유물들에 정을 주며 들어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