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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그 사나이] 12
S#1. 시골집 마당 (밤)
(11부 엔딩에 이어)
순간 눈이 똥그래져 택기를 보는 지현.
지 현 (무심코 반지 낀 손으로 자기 가리키며) 나를 좋아한다구요...?
이때 지현의 손에 낀 반지를 보는 택기.
택기, 눈이 똥그래져 반지를 보면,
지현, 얼른 반지 낀 손 뒤로 감추려는데,
택기, 지현의 손을 덥썩 잡아다가 반지를 본다.
택 기 반지 이쁘네? 못 보던 건데...?
지 현 어... 저기... 경민오빠한테 받았어요.
택 기 그래... (당황해서 실없이 히죽 웃는다.)
지 현 근데 좀 전에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요? 나 좋아한다 그랬어요?
택 기 (갑자기 정신 혼미한) 어... 그래... 내 니... 좋아해. 친구로서. 우리 앞으로 친구로 잘 지내자. 거 반지 이쁘네...! 다이안가?
지 현 (택기 반응에 약간 실망) 아니요... 다이아는 아니래요...
택 기 (허둥대며 갑자기 일어나) 가만 있어봐...
정신없이 어디론가 가는 택기.
지 현 어디가요?
택 기 어? 저기 화장실에 좀...
지 현 화장실은 이쪽이잖아요.
택 기 어, 참, 물 한잔 마시고 갈라고.
지 현 물은 저기서 마시고 화장실은 저쪽으로 가야죠.
택 기 아, 맞다. 내가 더위를 먹었나? (부엌으로 간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지현.
S#2. 동 부엌 (밤)
택기 들어와서는 멍하니 서있다.
갑자기 한쪽에 둔 항아리를 열더니, 포도주를 퍼 벌컥벌컥 마시는 택기.
택 기 (혼잣말) 아이고 뭉디자슥... 말라 그런 말은 해가지고.... 으이...
이때 들어오는 지현.
지 현 뭐해요?
택 기 어... 물 마셔.
지 현 그건 포도주잖아요.
택 기 그래, 포도주... (먹던 잔 들어올리며) 우리 친구 된 기념으로 한잔 할까?
S#3. 동 마당 (밤)
지현에게 술 따라주는 택기.
지 현 근데, 아까 나한테 좋아한다고 그랬던 거... 정말 친구로서 좋아한단 얘기에요?
택 기 (당황, 되려 반격) 그럼. 내가 니를 으트게 좋아해 주길 바라는데?
지 현 네? 아뇨... 뭐...
택 기 (자기 잔에도 따르며) 니... 내가 겪어보니까... 친구 할만 하다 그 말이야.
지 현 그래요...?
택 기 (혹시나 해서) 와? 뭐 다른 거를 기대했는가?
지 현 아뇨. 제가 뭘 기대한단 말이에요? (괜히 시선 피하는데)
택 기 그래.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어.
지 현 맞아요. 우리 앞으로 좋은 농사 파트너가 되요!
택 기 농사 파트너?
지 현 네. 농사 파트너.
택 기 좋아. 파트너를 위하여! 건배!
지 현 건배! (부딪치며) 짱!
호들갑스럽게 잔을 부딪치며 호탕하게 웃는 두 사람.
하지만 고개 돌리고 술잔 입에 대면서는 둘 다 왠지 섭섭하다.
지현은 살짝 맛보듯 입술만 대는데,
택기, 한 입에 쭉 털어 넣는다.
지 현 뭔 술을 그렇게 빨리 마셔요?
택 기 어? 아, 술맛 좋네. 한잔 더 할까?
지 현 그래요. (술 따라주며) 이거 우리가 담근 포도주예요?
택 기 내가 담궜지. 3년 된 기야.
지 현 그래요? 맛있다.
택 기 포도식초도 좋지만, 포도주도 피로회복에 좋다꼬. 매년 담가놔서 많아. 종종 마셔.
지 현 네...
괜히 택기 표정을 보면서 술을 마시는 지현.
지 현 저... 실은 장택기라는 사람을 알게 되서 참 좋아요.
택 기 내도 그래. 니가 뭐 다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좋다꼬 생각해.
지 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택 기 말 그대로야.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뭐 좋다꼬.
지 현 (삐쭉대고는, 잔 내밀며) 농사 도와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좋은 가르침 바랄게요.
택 기 내도 니 한테 많이 배웠다.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될 거 같네...
서로를 향해 씩 웃어보이고는, 좀 찜찜한 기분으로 각자 술 마시는 두 사람.
택 기 (속마음소리) 내는 마음에 있는 여자랑도 친구 안하는데...?
지 현 (섭섭하지만. 속마음소리) 그래, 차라리 잘된 거야. 햄버거하고 된장국이 어울리니? 이참에 아예 친구로 못 박고 그냥 속편하게 지내자.
잔 내려놓으며 다시 시선 마주치자, 히죽 웃는 두 사람.
이때 갑자기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택 기 어? 비 오네? (일어나면)
지 현 (서둘러 일어나다) 한잔 더 하고 싶은데...? 방에 들어가서 한잔 더 할래요? 친구 된 기념으루!
택 기 그래, 내방으로 가지 뭐.
이내 술 주전자, 술잔들 들고 택기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두 사람.
S#4. 동 택기방 (밤)
술 주전자는 뒹굴고, 아예 항아리 째 갖다놓고 퍼마시고 있는 두 사람.
둘 다 매우 취했다. 빗소리는 들려오고...
지 현 (술 따르며, 혀 좀 풀린) 근데 장택기씨... 마지막으로 극장가서 본 영화가 뭐예요?
택 기 극장가서?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 터미네이터 툰가?
지 현 (기가 막혀) 아니 터미네이터 쓰리(!)도 아니고 투요?
택 기 응. 투...!
지 현 그럼 멀티 플렉스가 뭔지도 모르겠네?
택 기 멀티 플렉스?
지 현 좋다! 내가 수확 끝나면 영화구경 한번 시켜줄게요! 서울에 복합 상영관 가서.
택 기 뭐... 좋지... (히죽 웃는다.)
지 현 그럼 장택기씨는 무슨 재미로 살아요?
택 기 니 갈구는 재미로 산다. 와?
지 현 못됐어...! 댁은 그 성질만 죽이면, 참 괜찮은 놈인데...
택 기 (취해서 고개 흔들흔들) 뭐? 놈...?
지 현 (손가락질 하며) 바로 그 성질 말이야. (옆으로 휙 넘어가면)
택 기 (얼른 잡아주는데) 니 취했어?
지 현 어머, 나 취했나봐... (히죽히죽 웃고)
택 기 취했네. 가서 자. 내도 자게. (일어나 비틀비틀 침대로 가고)
지 현 그래요. 나도 자야겠다. (하지만 앉아있고)
택 기 니방으루 가서 자. (침대에 돌아눕는다.)
지 현 네. 잘 자요. (혼자서 한잔 더 마신다.)
잠시 후 이내 택기의 코 고는 소리 들려온다.
지 현 누웠다 하면 바로 잠이 드네? 딱 머슴 체질이구만...! (비틀비틀 일어나며) 나두 가서 자자. 내 방으루 가자. 내 방으루...
비틀비틀 나갈 듯이 문 찾아 방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지현.
불 끄더니, 택기 침대에 와서 눕는다.
지 현 아, 자자. 내 방에서 자야지...
택기 등에 붙어서 나란히 잠이 드는 지현.
S#5. 시골집 마당 (아침)
처마 밑에서는 빗물이 한두 방울 떨어지고, 이른 아침햇살이 반짝인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경민.
마침 세수를 하던 병달이 경민을 맞는다.
경 민 안녕하셨어요?
병 달 아이고, 선생님이 아침 일찍 웬일이신교?
경 민 서울 올라가는 길에, 지현이 좀 잠깐 보구 갈라구요.
병 달 그래요...
병달이 지현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린다.
병 달 지현아! 지현아! 손님 오셨다. (문 열어보고는) 없네? 벌써 밭에 나갔는가?
이내 택기방으로 향하는 병달.
병 달 (택기방을 두드리며) 택기야! 택기야!
S#6. 택기방 (아침)
밖에서 병달이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는 택기와 지현.
부스스 눈을 뜨다 서로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지르려다 서로의 입을 막는 두 사람.
이때 방문이 살짝 열리며,
병 달 택기 니 안즉 안 일났나?
순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숨는 지현.
택 기 (누운 채 고개만 들고) 네! 영감님. 일났심니더!
병 달 (어질러진 방을 의아해서 둘러보며) 지현이 어데 갔는지 아나?
택 기 (지레 당황해서) 예? 여긴 없는데예!
병 달 그래... 의사선생님이 오셨는데, 야가 어데 갔노...?
놀라는 택기.
이불 속의 지현도 놀란다.
이때 병달 문을 닫고, 지현 이불 밖으로 나오려는데,
갑자기 다시 문을 여는 병달.
순간 얼른 지현을 다시 이불 속에 감추는 택기.
병 달 (갑자기 문 확 열며) 눈 떴으면 그만 일나지 뭐 하나?
택 기 (여전히 이불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아 예, 일날라고예...
병 달 아침부터 푹푹 찌는데, 사내아가 이불은 꼭꼭 덮고, 니 어데 아프나?
택 기 아닙니더.
이때 보면, 이불 밖으로는 지현의 한쪽 팔과 다리가 나와 있다.
병 달 (불룩한 이불을 보며) 그란데 니 밤사이에 몸이 불었나? 뚱뚱해 뷘다?
택 기 에이, 그럴리가예...
괜히 지현의 팔과 다리를 마치 자기 몸인 양 긁는 택기. 마임하듯.
병 달 내 눈이 잘못 됐는가...? (문 닫고 가면)
택기 휴~ 한숨쉬고, 이불 속에서 나오는 지현.
이내 서로 기겁하며 화들짝 떨어져 침대 밖으로 튀어나오는 두 사람.
택 기 (나직하게) 아니, 왜 남의 방에서 잠을 자고 그래?
지 현 (나직이) 내가 언제요? 분명히 내 방에 가서 잤는데? 댁이 나 일루 데려온 거 아니에요?
택 기 무신 소릴 하노? 아후, 머리야...!
지 현 나두 머리 아파 죽겠단 말이에요.
택 기 웬 술을 그렇게 마셨어?
지 현 누가 할 소리를? (밖을 향하며) 갔나 좀 봐요.
택기와 지현, 빼꼼히 문틈으로 눈을 들이민다.
S#7. 동 마당 (아침. 택기와 지현 시야)
병 달 야가 화장실엘 갔나... 멀리 가진 안았을 기요. (찾으며 뒤꼍으로 가고)
기다리는 경민, 무심히 택기방을 향해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S#8. 동 택기방 (아침)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떡해요! 화를 내는 지현.
얼른 창문을 여는 택기.
택 기 일루 나가.
지 현 거기루 어떻게 나가요?
택 기 왜 못 나가? 얼른 나가!
지현, 할 수 없이 택기의 부축을 받아 창문 밖으로 몸을 내미는데,
택기는 자꾸 지현 엉덩이 밀어올리고...
지 현 아휴, 가만 좀 있어봐요...! (창문에 몸이 끼어 낑낑댄다.)
S#9. 동 마당 (아침)
앉아서 마당 둘러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빙긋이 웃는 경민.
이때 문득 택기방 앞에 놓여있는 지현의 신발을 본다.
다시 자세히 보더니 다가오는 경민.
지현의 신발을 집어 들려는 순간.
이때 택기방 뒤쪽에서 맨발로 달려오는 지현.
지 현 어머, 오빠...! 언제 왔어?
경 민 어... 방금. 넌 어디 갔다 오니?
지 현 어... 텃밭에 좀...
경 민 근데 왜 맨발이니?
지 현 어... 오빠 왔단 얘기 듣고... 막 달려오느라고... 헤헤헤...
지현, 얼른 택기방 앞에 있는 신발을 신는다.
경민, 이상하다는 듯이 지현을 보는데,
지 현 근데 아침 일찍 웬일이야?
경 민 (의아해서 택기방 슬쩍 보고는) 어... 서울 가는데, 며칠 못 볼 거 같애서... 얼굴 좀 보고 갈려고.
지 현 그래...? 나가자. 오빠.
얼른 경민을 데리고 나가는 지현.
두 사람 나가고 나면... 방에서 나오는 택기. 기분이 좋지 않다.
S#10. 안방 (낮)
병달, 택기, 지현이 식사를 한다.
택기는 지현에게 괜히 어색한 기분인데,
지 현 (괜스레 복싱하듯 택기를 툭 치며, 남자처럼) 거기 물 좀 줘 봐요!
병 달 물은 니 옆에 있는데?
지 현 네? 아, 그러네요. 헤헤헤...
병 달 납품할 포도가 밀?다. 이백박스 주문 받아논 거 오늘 포장 들어가야 된대이.
지 현 그거 한 시간이면 다해요, 할아버지. 택기씨랑 저... 환상의 복식조잖아요! 안 그래요 택기씨?
괜히 택기를 주먹으로 툭툭 치며 과장되게 웃는 지현.
택기 뜩 쳐다보자, 지현 참으로 어색한데,
병 달 (지현에게) 니 오늘 어데 아프나?
지 현 (머쓱하게) 아뇨...
병 달 오늘따라 뭐를 잘못 묵었나, 와 머슴아를 툭툭 치쌌노?“
지 현 그, 그냥... 친구니까요... 헤헤...
이때 TV뉴스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나운서 (E) 본격적인 포도 수확철을 맞아 포도농가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모두 TV로 시선이 향하는데,
아나운서 어제 하룻밤 사이에만도 포도를 도난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농가수가 10여 건에 이릅니다. 최근 포도 도난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지역은...
택 기 (서둘러 일어나며) 빨리 나가봐야겠네?
병 달 설거지는 내가 하꾸마. 퍼뜩 나가봐라.
S#11. 마당 (낮)
병달방에서 후다닥 튀어나오는 택기와 지현.
택기는 바삐 창고로 가 플라스틱박스며 포도상자 챙겨 경운기에 옮겨 싣는데,
지현, 장화를 신다가 문득 손을 보면, 반지가 없다.
지 현 어? 반지? 반지 어디 갔지? (마루와 근처 둘러보며) 이상하네...? 세수하다 빠뜨렸나?
수돗가로 달려가 살펴보는 지현.
택 기 (물건 들고) 니 뭐해?
지 현 저기, 먼저 가요. 금방 따라 갈게요.
택 기 빨리 와! (급히 경운기로 나가버리면)
지현 마당을 죽 살피다가 평상 밑을 들여다본다.
지 현 분명히 어제 커피마실 때까지는 끼고 있었는데...? 술 먹다 잃어버렸나?
병 달 (방에서 상 들고 나오며) 니 뭐 하나?
지 현 저기, 할아버지, 마당에서 반지 못 보셨어요?
병 달 반지? 못 봤다.
지 현 어떡하지? 그거 찾아야 되는데...?
병 달 무신 반진데?
지 현 네? 아니에요.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택기방으로 들어간다.
S#12. 동 택기방 (낮)
들어와서 반지를 찾는 지현.
방바닥 택기양말도 질색하며 들어보고, 아후~ 냄새...
이불도 털어보고, 침대 밑도 들여다보고...
지 현 아이, 씨... 어떡하지? 여기도 없네...?
S#13. 포도밭 원두막 (낮)
플라스틱박스에 수확한 포도를 들고 원두막으로 올라오는 택기.
혼자 포도상자 만들고, 만든 상자에 포도를 넣는다. 분주하기만 할뿐 일손이 더디다.
택 기 (후회막급) 하, 어제 괜히 그런 말은 해가지고... 그 가시나 감 잡았을 거 같은데... 신경 쓰이네... (그러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남자가 소심하게 굴면 안돼! (그러다 내다보며) 아니, 금방 온다매, 뭐하고 아직도 안 오는 기야? 뭐? 환상의 복식조?
S#14. 뒤꼍 축사와 화장실 앞 (낮)
나뭇가지 하나 들고 여기저기 땅바닥을 뒤지며 반지를 찾는 지현.
지 현 (여물통도 보고) 아침에 얘들 밥 주다 빠뜨렸나...? 갱숙아, 내 반지 못 봤니? 이상하네...? 샅샅이 다 뒤졌는데...? 화장실에 빠뜨렸나?
싫지만 화장실 문 열고, 안으로 고개 숙여 살펴보는데,
이때 전화가 오면, 나와서 참았던 숨 내쉬며 전화를 받는다.
지 현 네, 저에요.
택 기 (E) 니 뭐해? 금방 온다매?
지 현 미안해요. 뭐 좀 찾느라고요...
택 기 (E) 뭘 찾는데?
지 현 (반지라는 말은 못하고) 네, 저기... 아니에요, 아무 것도.
택 기 (E) 나 지금 포도 납품하러 가니까, 빨리 와서 포도밭 지키고 있어.
지 현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전화 끊고는 착잡한 표정으로 급히 달려 나간다.
S#15. 포도밭 원두막 (밤)
지현 혼자 포도상자를 만들고 있다.
지 현 (울쌍) 그거 경민오빠한테 받은 반진데... 꼭 찾아야 되는데...? 어떡하지...?
이때 피곤한 택기가 원두막을 올라와 지현을 못마땅한 듯 본다.
지 현 (미안한) 늦었네요? 납품은 잘 했어요?
택 기 뭐? 농사 파트너? 니 오늘 포도상자 한 개도 안 쌌어. 알아?
지 현 그래서 지금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오늘은 내가 여기서 밤새 지킬게요.
택 기 여자 혼자 놔뚜고 내가 으트케 들어가? 니나 빨리 들어가!
지 현 그럼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왜 승질은 내고 그래요?
택기 못마땅하다는 듯 마주앉아 포도박스 만든다.
이때 어디선가 인기척 소리가 들리면,
지 현 (돌아보며) 어? 무슨 소리지?
택 기 그러게? 거 누구요!
택기 후레쉬를 비춰보면,
멀리 포도밭에서 따던 포도상자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내 서너 명.
달려 내려가는 택기와 지현.
택 기 당신들 누구야! 거기 서!
지 현 도둑이야! 도둑이야!!
S#16. 동 포도밭 인근 일각 (낮)
도망가는 도둑들. 손에 포도가위며, 몽둥이 등 하나씩 들었다.
들고 가던 플라스틱 포도박스를 택기에게 집어던지면서 달아난다.
호르라기 불며 쫓아가는 택기.
뒤에서 지현도 달려오고 있다.
지 현 도둑이야! 도둑 잡아라!!
택 기 (쫓아가다 돌아보며) 저 가시나? 니는 오지마! 위험해! 오지 말라니까!!
지 현 (이때 택기 뒤를 보며 놀라며) 조심해요!!
지현의 외침과 함께 택기에게 날아드는 몽둥이들.
택기 순간 팔로 막으며 쓰러지고, 도둑들은 도망간다.
지 현 (눈 감으며 비명) 악! 사람 살려요! 이 나쁜 놈들. 어떡하지? 어떡하지? 택기씨...!
이내 택기에게로 달려간다.
S#17. 동 포도밭 일각 (밤)
경찰차 경광등 불빛이 반짝이고...
피해를 입은 밭을 둘러보는 경찰1,2와 택기, 지현.
따다만 포도들과 담다만 플라스틱 박스들 널브러져 있고,
엉망이 돼버린 포도밭.
택 기 니는 겁도 없이 와 쫓아왔어?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우짤라고?
지 현 내가 뭘요? 도둑 하나 못 잡고 놓친 게 누군데? 무슨 남자가 그렇게 뜀을 못 뛰어? 겁은 많아 가지고...
택 기 뭐?
경 찰 그만들 하세유...
지 현 (경찰에게, 울쌍) 꼭 잡아주셔야 돼요.
경 찰 그래야쥬...
택 기 사실 으트게 잡겠습니까. 포도 쫌 따간 거 같은데... 돈으로 치면 을매 되지도 않고... 그냥 두세요.
지 현 아니. 그걸 어떻게 돈으로 계산해요? 내 피와 땀인데? 그리고 그런 도둑은 반드시 잡아야 되요!
경 찰 걱정마세유. (이때 무전기 신호음 오면) 어, 톨게이트는 검색강화했지?
무전기 (E) 예! 국도 쪽도 다 막고 검문검색하고 있습니다.
경 찰 그래. 수고혀! (끊고는) 하유, 이놈들이 정말 신출귀몰하단 말이야? 에이, 천하의 나쁜 놈들. 농부들 땀 흘려 일한 거를 이렇게 해놓구... 아무튼 최선을 다해볼게유.
경찰들 인사하고 포도밭을 나가면,
지현, 포도밭의 잔해를 치우는데,
택 기 (지현을 말리며) 냅두라. 내일 내가 하께.
지 현 (그제야 택기 팔뚝에 흐르는 피를 발견하고) 어머, 피나요!
택 기 (오른 팔뚝이 찢기고 몹시 부풀어있다. 많이 다친 느낌.) 벨 거 아니야. 아까 잠깐 긁힌 거야.
지 현 긁힌 게 아닌데요? 어디 봐요. (만지면)
택 기 (비명) 아야! 조심해!
지 현 (놀라며) 어머, 많이 다쳤잖아? (아무 생각 없이 급한 마음에) 빨리 보건소에 가요.
택 기 됐어. 보건소는 안가.
지 현 그럼 병원이라도 가요, 빨리!
택 기 됐다니까? (가버리면)
지 현 저 고집불통. 왜 이렇게 속을 썩혀? 병원 가자니까요? (쫓아간다.)
S#18. 택기방 (밤)
끙끙 앓는 택기.
급히 얼음을 수건에 싸서 택기의 팔에 냉찜질을 해주는 지현.
지 현 열두 나네? 정말 병원에 안 갈 거예요?
택 기 (조용히 하라는) 영감님 깨시겠네! 걱정마. 며칠 있으면 싹 나아. 몽둥이로 한대 맞은 거뿐이야.
지 현 남자가 그런 것도 하나 못 피하고. 난 또 열심히 쫓아가길래 싸움 좀 한다구?
택 기 니만 없었어도 내가 그 놈들 다 잡았어.
지 현 큰소리는?
택 기 (할말 없다. 잠시 후) 그나저나 니 수확량 차질 생겨서 우짜제?
지 현 지금 그게 문제에요? (잠시 후) 저기, 그 약초 그게 뭐라 그랬죠? 생각나무라 그랬나?
택 기 생강나무?
지 현 네. 그거 어떻게 생겼어요? 잎이?
택 기 와? 따러 가게?
지 현 빨리 말해봐요. 그거 어디 가서 땄어요?
S#19. 산속 (아침)
새 지저귀는 소리 들리고, 푸대자루 하나 들고 오는 지현.
지 현 아이, 씨... 어디야? 바로 뒷산이라더니 되게 머네. 시골사람들 말은 이상해. 바로 조기라 그러면 한 4키로야... 아! 저 바윈가? (둘러보며) 씨... 여기도 바위, 저기도 바위, 다 바위잖아? 더 가야 되나?
벌써 땀에 흠뻑 젖고 지쳤다.
나무잎들 유심히 살펴보며 문득 한 나무로 다가가는 지현.
지 현 (히죽 웃으며) 여긴가 보다...! 멀리도 와서 땄네. 이렇게 깊은 데까지 와서 따갔나...? (메모지 펴서 택기가 삐뚤빼뚤 그려준 나뭇잎 그림을 본다.) 그래, 이 나문 거 같다. 달걀모양. 동그랗게 3개로 갈라진 잎... 아닌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네? (나뭇잎 뜯어 찢어서 냄새 맡아본다.) 생강냄샌가? 잘 모르겠는데? 에라 모르겠다. 아무 거나 다 따가자. (고무장갑 끼면서) 풀독 오르니까, 조심해야 돼.
이 나무 저 나무 마구 따는 지현.
손을 뻗어 높은 가지의 이파리도 따고, 폴짝폴짝 뛰면서 딴다.
S#20. 시골집 마당 (낮)
포대자루의 약초를 쏟아놓는 지현.
잡초와 온갖 종류의 이파리들이 어지럽게 섞여있다.
지 현 (땀과 흙으로 어수선한 옷차림) 할아버지, 어떤 게 생강나무에요?
병 달 (뒤져서 찾아내며) 이기 생강나무다.
지 현 (활짝 웃음이 번지며) 그래요? (뒤적이며 똑같은 이파리들 찾는다.)
병 달 이것도 좋은 기다. 잠 안 올 때 먹으면 좋다. 이건 뒀다 니 묵어라.
지 현 제가 무슨 잠이 안와요? 맨날 잠이 모자라죠. 택기씨 주면 되겠네. 요즘 잠 잘 못자는 거 같던데...
병 달 그래도, 착하네...! 산에 가서 이런 거도 다 따오고.
지 현 (약초 고르며 히죽 웃는데)
병 달 (택기방을 보며) 택기 자가 와 저래 고집이고? 빙원을 가자케도 싫타카고... 원래 건강 체질이긴 한데, 저래가 팔이 잘 나을라나 걱정이라...
지 현 그러게요... (문득 생각난) 참, 근데 할아버지, 마당에서 혹시 반지 못 보셨어요?
병 달 니가 하도 찾길래, 내도 찾아왔는데, ?더라.
지 현 그래요... 혹시 보시거든요, 제 꺼니까 잘 놔두세요.
병 달 그러마.
지현이 깨끗이 씻은 약초를 약탕기와 절구에 나눠 넣는다. (몽타주 느낌)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약탕기를 달이는 지현.
약초 파편이 여기저기 튀고 절구에 약초를 찧는다.
팔이 아픈지 절구방망이를 다른 손으로 바꿔 쥐고 계속 짓이기는 지현.
병달이 지나가다 말고 빙긋 웃으며 지켜본다.
S#21. 택기방 (낮.)
택기의 팔뚝에 약초를 붙여주는 지현.
팔뚝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아주는 지현.
택 기 이거 정말 니가 거까지 가가 따왔나?
지 현 그럼 내가 따오지, 누가 따와요?
택 기 니 마할라고 이런 거 따러 산에 가? 그러다 벌집 건들면 클 나는데?
택기의 팔을 어깨끈에 고정시키는 지현.
택 기 이런 거 하문 불편해서 일 못하는데?
지 현 (약초물 내밀며) 시끄러워요. 하루 종일 이 거나 마셔요! 밭에는 나올 생각 하지도 말고.
병 달 (문밖에서 들여다보며) 그래, 밭일은 일절 중지씨겨라. (사라지고)
택 기 (약초물 맛보고) 제법 잘 다렸네? (이내 죽 마시는데)
지현 나가려다 말고 방바닥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지 현 혹시 여기 떨어졌나?
택 기 니 뭐 찾아?
지 현 아니에요. (나간다.)
S#22. 포도밭 (낮)
지현이 포도를 담은 바구니를 가져다 놓으면,
아낙들 원두막 밑 그늘에서 포도포장을 하고 있다.
이장댁 아이구, 택기가 큰일 날 뻔 했네...
명 숙 그러게요. 우리도 있다가 택기총각 좀 보러 가자구요.
마리아 (걱정스레) 그래요...
이장댁 오골계 한 마리 가져가야겠다. 그게 뼈가 짱짱하게 잘 붙고 좋댜.
지현이 사람들 보며 미소 짓고는, 얼른 빈바구니 들고 밭으로 달려가 포도를 딴다.
S#23. 시골집 (석양)
지현이 밭에서 들어오면,
평상에 앉아 옷을 벗는 택기. 팔을 쓸 수 없어 옷 벗기가 힘들다.
언제 왔는지, 수진이 대야에 물수건을 준비해가지고 와서 택기를 도와준다.
수 진 (옷 벗겨주며) 큰일이네? 팔을 못 움직여서?
택 기 됐어. 내가 하께...
수 진 아니야. 이렇게 해봐. (벗겨주며) 입고 벗기가 힘드네...
그러다 지현과 눈이 마주치는 두 사람.
지 현 오셨어요?
수 진 네. (이내 물수건을 짜서 옷을 벗은 택기를 닦아주려는데)
택 기 됐다. 내가 하께. (물수건 뺏으려는데)
수 진 아냐. 등이나 대봐. (택기의 등을 닦아주며) 날도 더운데, 맘대로 씻지도 못하고 어쩌니...?
그 모습을 보다가 지현, 그냥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 지현을 힐끗 보는 택기.
S#24. 지현방 (밤)
지현이 헌 옷가지를 이용해 재봉질을 하고 있다. 노트북에 뭔가를 하고 있던 수진이 지현을 본다.
수 진 그게 뭐예요?
지 현 택기씨 환자복이요.
수진 그런 지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지 현 (실밥 뜯고는) 됐다.
옷을 펼쳐보면, 여러 천으로 만든 제법 멋진 가운 식 환자복이 완성되어 있다. 만족스러운 듯 들고 나가는 지현.
S#25. 택기방 (밤)
택기에게 환자복을 내미는 지현.
지 현 자, 이거 입어요.
택 기 (받아들고 보며) 이게 뭔데?
지 현 환자복이요. 혼자 입고 벗기 편할 거예요. 단추 몇 개만 풀면 되니까. 나중에 한 벌 더 만들어 줄게요. 이거 빨면 갈아입게.
택 기 농사일도 힘들텐데, 이런 건 와 맹글었어?
지 현 친구로써 그냥 볼 수 없잖아요.
이내 괜히 머쓱해서 뚱하니 나가는 지현.
택기 이내 갈아입으려고 힘들게 옷을 벗기 시작한다.
S#26. 동 택기방 밖 (밤)
나오는 지현.
지 현 (괜히 삐쭉대며) 고맙단 말도 할 줄 모르나? 에휴... (포기한 듯 자기 방으로 간다.)
S#27. 동 택기방 (밤)
지현이 만든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택기. 일어서서 자기 자신을 둘러본다.
택 기 좋네...! 재주가 있네. (문득 거울 보더니) 누가 만들어 준 옷 입어 본 건 참 오랜만인데...!
Insert. - 옛날 허름한 시골방. 지금 지현이 쓰는 미싱을 돌리는 택기모.
입으로 실밥을 뜯더니, 완성된 작은 사내아이 옷을 펴본다.
활짝 웃는 택기모가 까까머리의 어린 택기를 향해 옷을 들어 보인다.
택기모 (E, 경상도 사투리) 택기야. 이리 온나. 엄마가 만든 옷 입어보제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혼자 생각하다 거울 속을 보는 택기.
감동적인지 환자복을 여미며 혼자 미소 짓는다.
S#28. 시골집 마당 (아침)
하얀 거품 묻히고서 거울을 보며 왼손으로 혼자 면도를 하고 있는 택기.
옆에 수진이 들어주는 대야에 칼날을 헹구며 면도를 하고 있다.
문득 따끔하며, 턱밑을 베었는지, 찡그리며 칼날을 떼는 택기.
수 진 (놀라서 얼른 대야 놓고) 어머, 비었잖아? 줘봐. 내가 해줄게.
택 기 됐어. 괜찮아.
수 진 줘봐... (면도칼 받아 조심조심 면도 해준다.)
이때 창고에서 포도상자와 플라스틱박스 등을 내가던 지현이 본다.
두 사람을 보고는 말없이 돌아서서 나가는 지현. 경운기 몰고 떠나고...
수 진 (조심조심)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첨 해보는 거라 무섭다...
택 기 됐다. 그만해. 내가 하께. (면도칼 다시 받아 쥐는데)
수 진 (친근하게) 왜 그래?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택 기 (잠시 멈칫, 못할 소리라 미안하기도 하고 사정하듯) 수진아... 니... 가라...
수 진 (쳐다보면)
택 기 니가 여 와서 해충도 잡아주고 고마운데... 내가 실습장은 도와주께. 근데 느그집에 가서 자고 출퇴근해라. 니가 이집에 와가 있는 거... 내는 보기만 해도 힘들다. 미안하지만...
수 진 (말 막으며) 택기야... (애써 웃음 지으며) 너 나한테 자존심 지키라 그랬지? (한숨) 근데 나 자존심 버렸어. 너한테 바라는 거 없다는 건 거짓말이고... 니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 나에겐 굉장히 중요한 문제야. 그래서 자존심 버렸고... (이 말은 정말 하기 싫지만) 니 마음에... 다른 사람... 있는 거 같지만... (미소 지으며) 나 비참하지 않아. 널 기다리는 게 좋고, 편해...
미소 지으며 들고 있던 수건 택기에게 건네주고는, 그대로 들어가는 수진.
그런 수진을 착잡하게 바라보는 택기.
S#29. 포도밭 (낮)
그늘에 앉아 포도포장을 하는 지현.
지 현 (혼자 궁시렁) 내가 왜 자꾸 신경을 쓰는 거야? (그러다) 친구니까 신경을 쓰지. 농사 파트너잖아. 파트너가 어떻게 돼봐라. 클 나지. 안 그래? 근데 수진씨는 언제까지 여기서 계속 살려나...? 에라 모르겠다. 근데 이 놈의 반지는 어디에 꽁꽁 숨었는 거야...? 진짜 잃어버렸나?
S#30. 어느 고급 주택 마당 (낮)
헤드폰끼고 핸드폰통화하면서 개에게 빗질을 해주는 은영.
처음엔 한 마리였다가... 은영 주변이 점점 개들로 득실득실 하다.
은 영 나? 휴가간 집에서 애완견 돌보기 알바하고 있어. 죽겠다, 얘. 개가 무려 열두 마리야. 목욕 한번 다 시키는 데 4시간 걸린다. 이거 괜히 했나봐. 차라리 애기 봐주는 거 할걸.
지 현 (E) 근데 은영아, 나... 경민오빠가 사준 반지 잃어버린 거 같애.
은 영 뭐? 경민오빠가 준 커플링을 잃어버렸다구? 안돼! 뭔가 불길하다. 그거 꼭 찾아야 돼.
S#31. 포도밭 (낮)
지 현 (포도 따서 바구니에 넣으며, 헤드폰 통화) 그렇지? 나두 왠지 불길해. 분명히 택기씨 방에서 잃어버린 거 같은데... 그 사람한테는 말도 못 하겠구, 어떡하지? 있다가 경민 오빠 만나기로 했는데...? 그거 끼고 가야 되는데...
S#32. 지현방 (낮)
지현 외출 차림으로 화장을 하는데,
거울 속으로 보이는 수진, 착잡하게 생각에 빠져있다.
지 현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수 진 아니요.
수진 갑자기 일어나더니, 화장대 위의 자기 화장품을 모두 가방에 쓸어 담는다.
지 현 어머, 어디 가세요?
수 진 (미소) 주중에는 연구소로 출근하고, 앞으로 여긴 주말에만 올려구요.
지 현 (내심 잘됐다.) 네...
수 진 그 동안 나하고 같이 방 쓰느라 힘들었죠?
지 현 아니에요... 근데 갑자기 왜요...?
수 진 갑자기는 아니구요... 그 동안 연구소를 너무 비워놔서요... (하지만 돌아서면서 비참한 기분. 가방 들고 밖으로 나가는데)
지 현 (거울 속으로 인사) 그럼 안녕히 가세요.
수 진 (문득 돌아보며) 또 올 거예요.
지 현 아, 네... 그럼 또 뵈요.
거울 속으로, 수진 나가고 문이 닫힌다. 문득 의아해서 돌아보는 지현.
S#33. 동 시골집 마당 (낮)
잘 차려입은 지현이 신발을 신으면,
택기 마당에서 왼손으로 농기계 기름칠하며 닦다가 지현을 본다.
택 기 어데 가?
지 현 데이트하러 요...
택 기 그래...? (고개 돌리고 기계 닦는데)
지 현 참, 아까 수진씨 가던데, 봤어요?
택 기 수진이가 갔어?
지 현 네. 인사도 안하고 그냥 갔나보네? 앞으론 주말에만 오겠대요.
택 기 그래...? (뭔가 생각하는데)
이때 지현, 열린 택기방 안을 기웃거리면,
택 기 니 와 자꾸 남의 방은 디다봐?
지 현 아니에요. (나가려는데)
택 기 데이트 하러 가는데, 무슨 옷을 그래 입고 가나?
지 현 이 옷이 왜요?
택 기 그런 옷은 여자가 싸게 뷔는 거야. 남자는 그런 옷 입은 여자를 보면,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꼬.
지 현 (문득 경계하듯) 댁두 그래요?
택 기 (당황하며) 나는 친구니까 안 그렇지.
지 현 (자기 옷 내려다보며) 그래요...?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그런 지현을 힐끗 돌아보는 택기.
S#34. 경민의 차안, 멋진 오솔길 (낮)
윗씬에서와는 달리 차분한 옷을 입고 나온 지현.
운전을 하는 경민이 근사한 초콜릿상자를 내민다.
경 민 자, 서울에서 사온 거야.
지 현 어머! 초콜릿이잖아? 이게 얼마만이야?
경 민 하나씩 꺼내 먹을 때마다 내 생각하라고 사왔어.
지 현 고마워. 오빠. 아까워서 어떻게 먹지?
경 민 (웃으면)
지 현 (창밖 보다가) 어머, 오빠. 이길 멋지다. 차 좀 세워봐. 잠깐 나가서 걷자.
경 민 나가면 더워.
지 현 그래두. 길이 너무 멋있잖아.
경 민 원래 보는 게 멋있지, 막상 나가면 별루야. 그냥 차 안에서 보자.
지 현 아이, 나가고 싶은데...?
S#35. 동 오솔길 (낮)
지현과 나란히 걷는 경민.
지 현 덥긴... 좀 덥다...
경 민 그 봐. 차안에서 시원하게 볼 때하고 다르지?
지 현 아니야. 그래도 이런 길은 걸어보지 않으면 기억에 남질 않아.
경 민 (귀엽다는 듯 지현을 보더니) 그런가? (슥 손을 잡고 모르는 척 간다.)
지 현 (손 잡혀 이끌려가며) 경민오빠 손은 참 부드럽네? 장택기 그 사람 손은 우악스럽고 꺼칠꺼칠한데...
이때 어디선가 맴, 맴, 맴... 전주곡처럼 낫게 시작되더니... 매미울음 소리 들려온다.
지 현 음... 이 매미소리. 너무 좋지?
경 민 좋긴 한데, 어떤 땐 너무 시끄러워서 귀가 아파. (나무에 대고 리모컨 누르듯) 그럴 땐 리모컨으로 소릴 줄이고 싶어.
지 현 (웃고는) 그래두 이건 도시매미하고는 다른 소리야. 잘 들어봐, 오빠. (귀 기울이며) 이건 참매미소리고... 이건 애매미 소리야... 번갈아 듀엣으로 울어주는 게 음악보다 더 아름답고 근사하지 않아?
경 민 너 매미에 대해서 박사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지 현 여기 와서 배웠어.
경 민 그래...?
지 현 난 서울 가면 여름 내내 들었던 이 시골 매미소리가 정말 그리울 거 같애.
경 민 (잡은 지현 손을 보며) 근데 너 반지 어쨌니?
지 현 어? 어... 그게... 깜빡 잊고 안 꼈네? 밭에서 일할 때 닳을까봐 빼놓거든...
경 민 괜찮아. 다음부터 꼭 끼고 다녀.
지 현 어? 응... (걱정이다.)
경 민 오빠가 집에 가서 저녁 해줄게, 장보러 갈까?
S#36. 영동 재래시장 과일상회 (낮)
포도를 고르는 지현. 경민은 뒤에서 좀 지겨운 듯 팔짱 끼고 보고 있다.
지 현 포도를 살 때는 요 송이 끝에 달린 거를 맛보고 사면 돼. 송이 끝이 달면 다 달거든.
경 민 그냥 아무 거나 사.
지 현 어머! 요게 정말 맛있다. 꼭 우리포도 같이 맛있네? 이걸로 주세요.
지현, 봉지에 싸인 포도송이를 골라 주인에게 주면, 주인 봉지에 담는데, 그러다 문득 봉지에 쓰여 있는 글씨를 보는 지현.‘여왕포도’라고 쓰여 있다. 어? 놀라는 지현. 말은 못하고 눈이 동그레져서 주인을 본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그 사이 주인과 경민은 계산을 하고, 경민이 돌아서자, 갑자기 경민을 끌고 가는 지현.
경 민 왜 그래?
지 현 (멈춰서더니) 오빠. 여기서 저 사람 좀 지키고 있어. 여기 꼼짝 말고 있어야 돼?
이내 포도 봉다리 든 채 달려가는 지현.
경 민 야, 지현아! 어디 가?
S#37. 경찰서 (낮)
숨차게 달려 들어오는 지현.
지 현 (다짜고짜) 저기, 포도 도둑 좀 잡아주세요. 빨리요!
경 찰 네? 무슨 도둑이요?
지 현 (포도송이 보이며) 이게 도난 당한 우리 포돈데요, 저기서 지금 팔고 있다니까요? 누구한테 띠어 왔는지만 조사하면 돼요! 빨리요!
우르르 지현을 따라 나가는 경찰1, 2.
S#38. 동 경찰서 형사계 (밤)
도 둑1 (조서 쓰는 형사에게) 우리가 키운 포도라니까요? 절도라뇨? 에이. (능청)
멀리서 조사를 받고 있는 포도도둑1,2를 택기와 지현에게 보여주는 경찰.
경 찰 저 사람들이 맞습니까?
택 기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고개 갸웃)
지 현 (포도봉지 보여주며) 아니, 여기 우리 포도라는 표시가 돼있는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해요?
이때 다른 도둑3이 수갑 채워져 형사1에게 끌려 들어오며, 택기 옆을 지나면,
택 기 (도둑3을 자세히 보더니) 어? 당신! 당신이 내를 몽둥이로 내리쳤지?
S#39. 시골집 마당 (밤)
지현과 택기가 들어서면, 병달과, 이장, 영배 등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마을 사람들이 있다.
이 장 택기야, 서울츠녀가 포도도둑을 잡았다며? (지현을 보면)
지 현 (수줍게 자랑스러운) 네...
영 배 (포도 들고) 요 포도봉지에 포도여왕이라고 표시를 한 덕에 잡았다면서요?
지 현 네. 머리를 좀 썼죠.
병 달 우리 집안이 원래 머리가 좋다카이.
홍이모 그러게유. 역시 배운 사람은 달러유.
지현 의기양양 목에 힘들어가고.
범 수 삼촌. 그럼 우리도 빨리 밭에 가서 표시를 하자구요.
영 배 근데 표시를 뭐루 하지?
범 수 포도왕이니까 포도킹콩으루 해요.
영 배 포도킹콩이 아니라 포도킹이지!
범 수 맞아요. 포도킹!
왁자지껄 웃으면서 나가는 사람들.
사람들을 보다가 즐겁게 돌아서는 지현과 택기.
택 기 니 오늘 정말 수고했다. 대견하네.
지 현 (좋아서) 그래요? (샐쭉 웃는데)
택 기 (같이 웃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참, 우리 핸드폰 커플요금제 하까?
지 현 (잘못 들었나?) 네? 뭘 하자구요?
택 기 (쑥스럽게) 핸드폰 커플요금제 하자꼬.
지 현 아니, 내가 왜 댁이랑 커플을 해요?
택 기 누가 커플을 하재? 커플 요금제를 하자 이 말이지?
지 현 (문득 혹시나 기대하며) 왜요...?
택 기 (궁시렁 궁시렁) 아니, 뭐... 우리가 친구로써 서로 전화할 일도 많고... 요금도 더 싸고 하니까,..
지 현 됐어요. (돌아서서 들어가면)
택 기 (따라가며) 와? 돈도 아끼고 좋잖아.
지 현 됐다니까요? 돈 몇 푼 더 내고 말지.
택 기 이상한 여자네. 이해를 몬 하겠네?
지 현 이해는 내가 못해요. 커플요금제를 할라면 커플을 해야 커플요금제를 하는 거지... (말이 꼬이는데)
택 기 (얼른 또 해명하는) 아니, 누가 커플을 하제? 내 말은...
지 현 됐다니까요? 난 친구하고는 커플요금제 안해요!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택 기 알았어... 안하면 안하는 거지, 와 화는 내고 그래...? (심드렁하게 자기 방으로 간다.)
S#40. 시골집 마당 (아침)
수세미로 요강을 닦으며 계속 수돗가 근처를 살펴보는 지현.
지 현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아무리 찾아도 없네? 정말 없어졌나?
택 기 (뒤에 나타나 같이 마당 들여다보며) 니 맨날 마당에서 뭐 찾아?
지 현 아니에요...
택 기 뭔데? 무슨 금덩어리 잃어버렸어?
지 현 아니에요... (말 돌리며) 팔은 좀 어때요?
택 기 많이 좋아졌어.
지 현 (뚱하니) 약초 다린 물은 잘 먹고 있죠?
택 기 응...
지 현 모자라면 더 뜯으러 갈 테니까, 빼먹지 말고 열심히 마셔요. (요강 들고 일어서는데)
이때 출근차림의 홍이가 뛰어 들어온다.
홍 이 워메, 택기 오빠. 정말 많이 다친겨?
지 현 (순간 요강을 뒤춤으로 감추며, 입 삐죽, 속마음소리) 걱정해주는 여자도 많아.
택 기 니는 출근 안하고 말라 왔나?
홍 이 지금 회사가 문제여? 오빠 팔이 더 중하지?
택 기 시끄럽다. 빨리 가라, 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홍 이 아이, 참? (그러다 지현의 뒷춤을 보며) 그건 뭐랴...?
지 현 아... 이거... 할아버지 요강 닦은 거야. (들고 들어가는데)
이때 병달이 쇠요강을 들고 나온다.
병 달 지현아, 내 오강도 쫌 비워라.
지 현 (얼른 사기요강 놓고 병달의 요강 받아들며) 네... 할아버지. (하면서 홍이를 본다.)
홍이 씩 비웃으며 나가고,
요강을 들고 다시 수돗가로 가는 지현. 입이 함박만큼 나왔다.
열린 방문으로 그런 지현을 보며 웃는 택기.
S#41. 서울 지현집 (아침)
지현모 (놀라서 보던 신문을 내려놓으며) 어머, 어머, 어머...!
지현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와서 신문 보면)
지현모 지금 매곡리가 난리가 났어요. 거기가 무슨 포도랜든지 뭔지 리조트를 만든다고 개발계획이 떴어요. 이거봐요. 이거...!
지 호 (신문 뺏어가며) 어디 봐. (신문 읽는) 동양 최대의 고급 휴양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 (고개를 들면)
지현부 지현이한테서는 이런 얘기 못 들었잖아?
지현모 걔가 뭘 알겠어요. (다시 신문 뺏어가며) 어머, 어머! 우리 잘하면 20억 보다 커지겠네? 아이구 좋아!
S#42. 시골집 마당 (낮)
수건으로 탈탈 털면서 지현 밭에서 들어오면,
평상복으로 옷 갈아입고 왼손으로 면도를 하고 있는 택기.
지 현 어디 가요?
택 기 어... 읍내에 나가서 볼일 좀 볼라고. 손이 이래서 영 미안네? 밭일 도와주지도 몬하고?
지 현 괜찮아요. (보고는 다가오며) 일루 줘봐요. 내가 해줄게.
택 기 됐어.
지 현 줘봐요. 왼손을 잘 써야 창의력이 있다는데, 되게 버벅대네?
택 기 그래. 나 창의력 ?어.
지 현 (면도칼 받아들고 해주며) 전기면도기 하나 사줄까요?
택 기 내는 그거 싫어.
지 현 왜요?
택 기 깎이는 소리도 싫고. 손으로 하는 거 맨치 깨끗하게 안 된다꼬.
지 현 까다롭기는... (면도하는 포즈. 입술 잡아당겨 삐뚜름하게) 요렇게 해봐요...
택 기 (그대로 하며 대주면)
지 현 이번엔 요렇게...
택 기 (똑같이 해서 대주며) 잘하네...
지 현 우리아빠 수염 많이 깎아봤어요.
그러다 아주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게 되고, 기분이 이상한 택기.
지 현 아이, 좀 잘 해봐요. (턱 들이대라며) 요렇게...
택 기 (턱 들이대 주며 지현 보면서) 니, 얼굴 많이 탔네....
지 현 가만 좀 있어봐요. 말 좀 하지 말고.
S#43. 읍내 화장품 가게 (낮)
택 기 (쭈삣쭈삣 하다 대뜸) 썬크림 좀 주이소.
여주인 (몇 개 내놓으며) 어떤 걸로 드릴까요?
택 기 제일 좋은 걸로 주이소. 참! 벌, 모기 이런 거 안 달라들게, 냄새 안 나는 걸로요.
S#44. 정화조 변기시공집 앞 (낮)
막 수세식 변기를 트럭에 싣고 있는 기술자들.
커다란 정화조 통은 이미 트럭에 실려 있고, 트럭 아래에서 택기가 보고 있다.
택 기 조심하이소. 조심하이소.
S#45. 시골집 뒤꼍 (낮)
여기저기 자재들 널려있고, 화장실에 수세식 변기를 설치하는 기술자들.
택기는 왼손으로 시멘트 개고 있고, 병달이 지켜보고 있다.
병 달 와 비싼 돈 디려가 이런 걸 하노?
택 기 영감님 손녀딸이 아침마다 요강 닦는다 아입니까.
병 달 그래... 지현이가 보믄 좋아하겠네...
택 기 (괜히 자기가 좋아서) 밭에 가서 불러오까예?
병 달 그래, 불러와라. 입이 찢어질기다. (흐뭇하다.)
시멘트 놔두고 밭으로 가는 택기. 왠지 모르게 자기도 설렌다.
S#46. 포도밭 (낮)
택 기 이지현! 이지현이!
포도밭으로 달려 들어온 택기가 둘러보며 지현을 찾으면,
이랑 사이에 수건을 깔고 잠시 잠이 든 지현.
옆엔 따다 만 포도바구니와 가위, 장갑 등이 널브러져 있고,
따가운 햇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택 기 (보고는 다가오며) 뭐? 혼자서 일 다해? 도둑을 지켜? (그러다 보고는 안됐는지) 을매나 피곤하면 아무데나 씨러져서 잠이 들었겠나... 여자가...
문득 어깨에 고정한 팔을 빼더니 힘들게 남방을 벗는 택기.
포도나무 위에 남방을 널어 잠든 지현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준다.
그늘이 되자, 꿈을 꾸는지 잠결에도 살포시 미소를 짓는 지현.
잠시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보며 같이 웃는 택기.
택 기 (이내 씁쓸하게) 내가 와 이라노... 친군데...! (한숨 쉬더니 일어나 다시 달려 나간다.)
(시간경과)
택기의 남방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잠든 지현이 뒤척이다 눈을 뜬다.
지 현 어머, 깜빡 잠이 들었네? 해지기 전에 포도 다 따야 되는데?
급히 일어나다가 문득 포도나무에 걸려있는 택기의 옷을 보는 지현.
지 현 밭엔 나오지 말라니까... (하면서 둘러보면)
아무도 없다.
다시 옷을 보는 지현.
지 현 옷은 왜 저기다 걸어놓고, 어디 갔어? (일어나 툭툭 털고 포도 딴다.)
S#47. 시골집 앞 (밤)
지현이 경운기 몰고 오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민이 지현을 보고 놀란다.
지 현 (시동 끄며) 어머, 오빠! 언제 왔어?
경 민 (질색하며) 아니, 니가 경운기까지 모니? 여자한테 왜 이런 걸 몰게 하지? 장택기 그 사람 정말 너무하네?
지 현 (경운이에서 내리며) 아냐... 이거 재밌어.
경 민 재밌다니...?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쩔려구? 보기에 좋지도 않고, 다음부턴 하지 마.
지 현 괜찮아... 근데 무슨 일이야?
경 민 어... 이번 주말에 보건소로 놀러 좀 오라고.
지 현 왜?
경 민 우리 부모님이 내려오신대. 자연스럽게 인사좀 시켰으면 해서.
지 현 인사?
경 민 응... 알았지? 주말에 꼭 와?
지 현 (약간 당황도 되지만) 응... (이내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그러다 집안을 보며) 근데 집에 무슨 일이 있나? 왜 불을 환하게 켜 놨지?
S#48. 시골집 뒤꼍 (밤)
지현, 들어와 보면,
병달이 수세식 화장실을 흐뭇하게 보고 있고,
택기는 왼손으로 널린 자재들 줍고 뒷정리 한다.
지 현 (택기를 보고 대뜸) 아니, 집에 가만있으라니까, 뭐하는 거예요? 이게 다 뭐예요? 이래가지구 팔이 낫겠어요?
택 기 아니... 할 거도 없고 심심해서... (하면서 화장실을 보면)
완성된 수세식 화장실이 보인다.
놀라는 지현. 어머나... 세상에...! 경이로운 표정으로 다가가는데,
택 기 (지현 뒤에서) 니 쓰라고 만든 기야...
지 현 그래요...! (화장실 보며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데)
택 기 (기분 좋아서 괜히 쑥스럽게) 뭐... 니도 쓰고... 수진이도 오면 쓰고... 좋지?
지 현 (순간 표정 변하더니, 돌아서며) 난 이제 적응돼서 괜찮은데? 쓸데없이 이런 건 뭐 하러 만들어요?
택 기 니 이제 적응돼서 괜찮나?
병 달 그럼 다시 바까라.
지 현 아니, 뭐... 있으면 좋죠... (배시시)
S#49. 시골집 마당 (아침)
택기가 지현에게 뚱하니 썬크림을 내민다.
택 기 자, 이거 발라. 썬크림이야. 하나 샀어.
지 현 밭에 나갈 땐 썬크림 바르지 말라면서요? 벌레 꼬인다고? 경민오빠가 사준거도 안 바르고 그냥 있는데?
택 기 (그 소리에 괜히 더 심통 나서) 이건 괜찮아! 냄새 안 나는 기야.
지 현 그래요? (뚜껑 열어 냄새 맡아본다. 히죽 웃으며) 고마워요... (그러다 뚱한 택기 표정 보고는, 답답해서) 근데 이런 거 줄 때는 좀 부드럽게 주면 안돼요? 어차피 돈 들여서 선물 사다 주면서, 이왕이면 좋은 말도 좀 하고, 친절하면 어디 덧나나?
택 기 친절 너무 좋아하지마. 친절이 가식일 수도 있어! (가버린다.)
지 현 그건 또 뭔 소리야? 친절이 가식이라니? 아후 증말...!
그러나 이내 씩 웃으며 얼른 썬크림 바른다.
이때 뒤꼍에서 배를 부여잡고 잔뜩 불편한 기색으로 나타나는 병달.
병 달 아이고... 하, 참... (어기적 어기적 걷는다.)
지 현 왜요? 할아버지? 어디 아프세요?
병 달 내는 저 눔의 수세식 화장실이 영 맘에 안든다.
지 현 왜요? 물이 잘 안내려가요?
병 달 그기 아이고... 꼭 의자에 앉아가 똥 누는 거 같아가 잘 안나온다.
지 현 그러세요? 그냥 맘 편하게 앉아 계시면 되는데?
병 달 (소리 버럭) 니는 의자에 앉아가 똥이 나오나! (구부정하게 배를 부여잡으며) 니들이 좋다 그래가 했다만... 내는 영... 하루에 ?번을 가도 안나온데이...
지 현 (얼른 병달 부축해 평상에 앉히며) 그래요? 큰일 났네? (문득 생각난) 아! 할아버지! 포도식초 좀 드실래요?
병 달 됐다, 마! (엉거주춤 일어나며) 송여사네 똥두깐으로 함 가보까...?
S#50. 송할멈네 집 마당, 화장실 앞 (낮)
송할멈이 초조하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성이며,
송할멈 (화장실에 대고) 좀 괜찮으세유?
명 숙 (밭에 가는 차림으로 나와) 엄마. 누구하구 얘기해?
희 정 (흙 담아 소꿉장난하며) 안골 포도밭 할아버지가 우리 화장실에 볼일 보러 오셨대.
명 숙 그래? (송할멈에게) 왜요?
송할멈 넌 어여 나가 봐. 어여.
명숙 나가고,
이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흡족한 표정으로 나오는 병달.
병 달 아이구, 시연허다...! 잘 썼구먼.
송할멈 뭘요. 매일 와서 보세유.
병달 수돗가로 가 손 씻으면, 송할멈 얼른 쫓아가 물 퍼주는데...
병 달 (문득 송할멈을 보더니, 넌지시) 송여사두 혼자 된지가 꽤 됐제?
송할멈 갑자기 우리 영감 간 얘기는 왜 하세유...
병 달 혼자 농사짓기도 힘들낀데...?
송할멈 감자밭이나 쬐끔 있는 걸유, 뭐...
병 달 그래... (손 닦고 일어서는데)
송할멈 (수건 건네며) 이젠 일도 못 하겠구... 감자 캘 일이 죽을 일만큼이나 두렵네유. 시방두 가야 되는데, 가기가 싫어서 이러구 있어유... (수줍게 웃으면)
병 달 그래? 감자는 내가 잘 캐는데?
송할멈 아이구, 영감님이 무슨 밭일을 하신다고. 포도밭두 손 떼셔놓구... (하지만 속으로는 기대하는 표정.)
병 달 어데? 내가 감자 캐는 데는 선수라니까!
S#51. 마을회관 앞 (낮)
마을회관 안이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박영감.
박영감 이상하네... 이노무 영감탱이가 왼 종일 워딜 간겨?
홍이모 (바닥에 고추 널며) 병달어른은 왜 죙일 찾아댕기신대유? 무슨 일 있으세유?
박영감 안보이니까 그렇지...
이장댁 (푸대의 고추 쏟아놓으며)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시면서 뭐할라구 찾으신대유?
박영감 이 눔이 워딜 간겨? 집에도 없구... 노인정에도 없구? 이상하단 말이여? (이내 둘러보며 어딘가로 간다.)
S#52. 송할멈네 감자밭 (낮)
땡볕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송할멈과 함께 감자를 캐는 병달.
아주 숨이 차고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송여사를 보면서는 씩 웃고,
송할멈 (수건으로 땀 닦아주며) 어머, 니 땀 좀 봐. 이러다 더위 드시겠슈. 쉬엄쉬엄 허세유...
괜히 기분이 좋아 더 열심히 캐는 병달.
이때 박영감이 나타난다.
박영감 아니, 저 눔이? (밭으로 뛰어들며) 병달이 너 여기서 뭐하는 겨?
송할멈 (화들짝 놀라 떨어져 앉으며) 저기... 우리 감자 캐는 거 좀 도와두신다고 하셔서유...
박영감 (병달에게서 호미를 뺏으며) 니눔이 무슨 감자를 캐봤다구? 인줘. 빨리 썩 못 꺼져?
병 달 아니, 저 눔이? 호미 일루 못 내놓나?
서로 호미를 뺏으려고 싸우자,
조용히 들고 있던 호미를 병달에게 내미는 송할멈.
송할멈 호미, 여기 또 있구만유...
병달 호미를 받아들고, 박영감에게 질세라 전투적으로 감자를 캔다.
감자는 이렇게 캐는 거여... 모르면 가만이나 있어, 이눔아... 등등.
경쟁적으로 앞 다투어 감자를 캐는 두 할아버지.
S#53. 시골집 병달방 (밤)
문이 열리고, 지현과 택기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서는 병달.
아이구, 아이구, 아구구구...
더위 먹고 횡하니 풀린 눈에 얼이 빠진 얼굴이다. 다리도 달달 떨린다.
택 기 이 더운데 어데 가서 일을 하셨다 말입니꺼?
지 현 큰일 났네? 경민오빠 보구 좀 와보라고 할게요.
병 달 됐다. 동네 소문나구로. 내 병났다는 얘기는 일절 하문 안된대이. 으이구 허리야!
지 현 (의아하지만) 네...
택 기 어데 파스가 있을 낀데... (나가고)
지현 끙끙 앓는 병달을 걱정스럽게 본다.
S#54. 택기방 (밤)
서랍을 뒤져 파스를 찾는 택기.
문득 파스 꺼내다 거꾸로 잡혀 파스가 쏟아진다.
파스를 줍는 택기. 이때 빨래 바구니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꺼내는 택기.
지현의 반지다.
이게 뭐지? 왜 여?지? 하는 표정으로 반지를 본다.
Insert. - 경민오빠한테 받았어요... 하며 수줍게 반지를 보던 지현.
이내 착잡한 표정이 되더니,
택 기 (한숨) 가시나... (주머니에 반지를 넣고는, 파스를 들고 나간다.)
S#55. 병달방 (밤)
누워있는 병달의 등에 파스를 붙이는 택기.
병달. 끙끙 앓는 소리 하며 누워있다.
택 기 괜찮으시겠습니꺼?
병 달 됐다. 그만 나가봐라... (돌아누우며) 아이구...!
이때 지현이 베개를 가지고 들어온다.
지 현 제가 오늘은 이방에서 할아버지랑 같이 잘게요.
택 기 (뜩 볼뿐) ...
지 현 왜요... 아프시잖아요... (베개 놓고 앉아 병달의 흐트러진 머리칼 넘겨주는데)
택기 나가려다 멈춰 서서, 주머니 속의 반지를 꺼내 잠시 고심한다.
이내 반지 손아귀에 반지를 쥔 채 지현을 돌아보는 택기.
택 기 니 잠깐 나와 봐. (나간다.)
S#56. 동 마당 (밤)
방에서 나온 지현이 택기에게로 오면, 돌아서서 착잡하게 서있는 택기.
지 현 (등 뒤에서) 왜요?
택 기 (돌아서며 반지 내민다.) 이거... 내방에 있더라.
지 현 (당황. 선뜻 받지 못하고) 그래요...? (머뭇거리는데)
갑자기 지현의 손을 턱 잡는 택기.
지현 놀라서 보면,
지현의 손가락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주는 택기. (슬로우)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지현.
반지를 끼워주는 택기도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마치 청혼이라도 하며 반지를 주고받은 양 착각이 드는 두 사람.
서로를 엇갈려 쳐다보고, 반지를 쳐다보는데,
끼워주느라 잡은 손을 어색하게 놓으며 시선을 돌리는 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