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출가 전 수행도량 대원사
Posted by admin on Apr 26, 2011
② 출가 전 수행도량 대원사
출가 전 성철스님이 속인임에도 불구하고 참선공부를 위해 들어가 겨울을 났던 탑전. 펄펄 뛰며 경계하는 주지 스님을 오히려 나무라는 그 기상이 느껴지는 듯하다. 아래 작은 사진은 일주문에서 올라가다 본 대원사 전경.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참선수행 40여일 만에 ‘동정일여’ 경지에 들다
“참선공부 한다는데 웬 말이 많노”
속인 신분으로 탑전서 수행한다고
펄쩍 뛰는 스님을 오히려 꾸짖어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대원사(大源寺)는 성철스님이 출가하기 전 수행한 절이다. 스님은 이곳 탑전에서 참선 수행, 40여 일만에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이르렀다. 스님은 출가 전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는 화두를 들고 집에서 참선, 정진했다. 정진을 거듭하는 가운데 차츰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서 하는 정진은 아무래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출가도 하지 않은 몸으로 대원사로 갔다. 당시 이야기를 당신께서 나중에 이렇게 들려주셨다.
“젊었을 때 사상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불경(佛經)을 보니까 아주 마음에 들더라 이거야. 그래서 참선하려고 대원사를 찾아갔지. 그때 대원사 탑전이 참 좋았어. 그래 거기 들어 가봤거든. 참선하기에 좋아 보이기에 안에 들어가 좀 있었지. 그런데 주지가 그걸 보고 펄쩍 뛰어. 본시 탑전이란 데가 스님들만 있는 곳이지 속인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한판 했지. 너거들은 절에서 처자식 거느리고 살림 다 살고 떡 장사도 하지 않느냐. 그러고도 중이냐. 내가 참선공부 한다는데 웬 말이 많노. 절이 불교공부 하는 곳이지 살림 사는 곳이가. 그런데 얼마 안가 주지가 바뀌었지. 젊은 중이 주지대리인가 뭐를 맡았는데 그 사람하고는 그래도 말이 통했거든. 그래서 그 탑전에서 겨울을 보냈지.” (원택스님의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스님은 이후 탑전에서 용맹정진 했다. 밤낮으로 열심히 정진했다. 누구의 가르침도 없었다. 오로지 스스로 확인하고 체득한 참선수행이었다. 스님 이야기를 또 보자.
“그 때만해도 지리산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친다는 소문이 자자했거든. 그래서 나도 호랑이밥이 될까봐 겁이 나서 밤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정진했지. 하루는 갑자기 ‘내가 뭐 땜에 이리 겁을 먹는고’ 하는 생각이 들었지.
<사진> 방장산 대원사 일주문.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호랑이를 겁내어 떨고 있는 내 꼴이 우습더란 말이야.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때는 먹히더라도 겁내지 말아야겠다 싶어 그 뒤부터는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잤지. 그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었어. 그 다음부터는 호랑이를 안 무서워하게 된기라. 그래서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나다녔지.”
일타(日陀: 1929~1999)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또한 재미있다.
“성철스님은 대원사 탑전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말씀하셨지. 입에 침을 튀기면서 설명하시는데 얘기를 하다 입에 든 밥숟가락을 확 빼면서 말하시는 거야. ‘그게 42일만이었어. 내가 42일만에 동정일여가 됐거든. 동정일여가 되니까 정말 참선 부지런히 하면 도인되겠다 싶데’ 늘상 얘기하시면서도 그 대목에서는 흐뭇해 하셨지.”
동정일여란 일상에서 화두라는 의심덩어리가 오나 가나 앉으나 서나 말할 때나 묵언(言)할 때나,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상관없이 머릿속에 가득한 그런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비구니 법일스님, 화재로 폐허됐던 도량
탑전부터 완공하며 대가람으로 일궈 내
대원사는 당신의 생가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다. 겁외사에서 자동차로 약 30분가량 걸렸다. 지금은 포장이 잘 된 도로라서 가기가 어렵지 않지만 80년 전을 생각하면 그렇게 가기 쉬운 길도 아니었다.
지리산 첩첩산중에 있는 절. 대원사 가까이 갈수록 골짜기는 깊고 수풀은 우거져 그야말로 첩첩산골에 난 길 따라 갔다. 그 옛날엔 이 길을 걸어서 가고 왔을 게 아니냐고 생각하니 오늘의 이 길이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했다.
문득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중국 북송의 문인으로 불교공부가 깊었다)의 글귀가 생각났다.
“골짜기 물소리는 부처님 말씀이요
저 푸른 산 모습은 어찌 청정한 부처님이 아니랴”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차창을 열고 계곡물과 푸른 숲 사이를 불어오는 바람을 마신다. 그 맑고 향기로운 바람에 부처님 말씀이 담겨 있음을 느낀다.
지리산 대원사는 언양 석남사, 수덕사 견성암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절을 둘러싼 경관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을 마냥 보여주고 있다. 절에서 조금 올라가면 용이 100년간 살았다는 용소(龍沼)가 있다. 바위가 굴처럼 뚫려서 된 것으로 항아리 모양이다. 깊이는 약 5미터(m)정도란다.
또한 대원사 주위에는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과 관련된 지명이 이곳저곳 남아있다. 그가 소를 먹였다는 소막골, 그가 넘었다는 왕산(王山)과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군량미를 저장하였다는 도장굴(稻藏窟) 등이 오늘날까지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천혜의 자연공간에 자리한 대원사는 해인사 말사(末寺)로 신라 진흥왕 때(서기 584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처음엔 평원사(平原寺)라 불리었고 이후 조선 숙종 때 중암운권 선사가 대원암이라 개칭했으며 그 후 고종 때 구봉혜흔(九峰慧昕) 선사가 지금의 대원사라 개칭했다.
창건이후 화재와 재건이 거듭되었다. 임진왜란과 여순(麗順)사건(1948년)때 화재로 불타 폐허가 되었으나 1955년 이후 비구니 법일(法一)스님이 재건하여 오늘의 웅장한 대가람이 되었다. 법일스님(1904~1991)은 1936년 출가, 1937년 대원사에서 영암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1950년 효봉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1991년 (음)10월10일 새벽3시 입적했다. 세수88세, 법랍55세.
1955년 폐허가 된 대원사를 중창하기로 원력을 세우고 탑전을 시작으로 어렵고 어렵게 불사를 이어 나갔다. 진주에서 대원사까지 50킬로미터(km) 길을 걸어 다니면서 탁발하고 불사대금을 만들었다. 장마철이면 계곡의 물이 범람하여 한동안 길이 끊기기 일쑤였고 비가 그친 뒤에도 급류에 휩쓸려 가버린 길은 자취도 없었다. 허리까지 차오는 강물을 건널 때는 목숨의 위험도 각오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불사는 1956년 여름을 지나는 동안 기둥감이 될 목재를 비롯해 재목들이 장만되었다. 그러나 당시 비구.대처간의 사찰 소유 싸움은 법정투쟁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대원사 중창불사 원력은 점점 스러져 갔다.
그러나 이를 굳건히 딛고 일어선 법일스님과 상좌들은 원력을 추슬러 다시 불사를 시작했다. 법일스님은 대웅전 중창보다 앞서 탑전부터 완공했다. 이어 천광전, 요사채 등이 들어서고 도반인 인홍(仁弘: 1908~1997, 석남사)스님.수옥(守玉: 1902~1966, 내원사)스님도 법일스님의 원력을 좇아 만인동참 정신으로 직접 탁발에 나서 불사를 도왔다.
지금은 19채의 건물이 4000여 평 위에 번듯이 들어서 그 웅장한 모습이 지리산의 ‘한 송이 연꽃’이 되고 있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참다운 불공
집집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부모님입니다.
내 집 안에 계시는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거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받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발밑에 기는 벌레가 부처님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벌레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머리 위에 나는 새가 부처님입니다.
날아다니는 생명들을 잘 보호하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넓고 넓은 우주, 한없는 천지에 모든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수 없이 많은 이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부처님을 아무리 피하려고 하여도 피할 수가 없으니 불공의 대상은 무궁무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공을 하여도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한량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항상 불공을 하며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께 한없는 공양구를 올리고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들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억 천 만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복이 많다고 석가세존은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불보살이 큰 서원이며 불교의 근본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듯 거룩한 법을 가르쳐주신 석가세존께 깊이 감사하며 항상 불공으로 생활합시다.
(1983년 5월 종정법어)
이진두 / 논설위원
[불교신문 2705호/ 2011년 3월23일자]
3. 출가도량 해인사ㆍ출가시
Posted by admin on Apr 26, 2011
③ 출가도량 해인사ㆍ출가시
초연히 나 홀로 만고의 진리를 향해 가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 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미천대업홍로설(彌天大業紅爐雪)이요
과해웅기혁일로(跨海雄基赫日露)라
수인감사편시몽(誰人甘死片時夢)가
초연독보만고진(超然獨步萬古眞)이로다. – 출가시(出家詩)
가야산 해인사. 성철스님의 출가도량이자 열반도량이다. 1936년(25세)에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 그 해 3월 하동산스님(河東山: 1890~1965)을 은사로 수계 득도했다. 해인사는 스님이 1966년 가을부터 평생을 보낸 도량이다.
“불교공부 잘 하려면
절에 가서 중 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해인사 평생 주석
수행견처 담은 선문정로
방장때 백일법문 등
큰가르침 남긴 도량
출가무렵 성철스님.
사진제공 = 도서출판 장경각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주련(柱聯)에는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이라 새겨져 있다. “천겁의 긴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만세를 뻗쳐 항상 지금이다”라는 이 글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자리해 온 해인사를 말해준다.
한국불교만이 아니라 중국불교를 보아도 역대 선지식이 출가하면서 ‘출가시(出家詩)’를 남긴 예는 거의 없다. 당신의 출가시에서 볼 수 있듯 스님은 이미 출가할 때 스스로 갈 길,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이를 선포한 것이다.
출가수행자는 자신의 출가의지, 수행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왜 출가하는지, 무엇을 위해 출가하는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불명확한 상태에서의 출가는 수행의 진척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되레 세월이 지나면 물러설 마음이 나고 어떤 경우는 아예 하산하여 환속하는 예도 있다. 이처럼 출가수행인의 의지와 첫 발걸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출가 전 이미 참선수행이 대각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익히 알고 실참수행으로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를 체득한 스님이기에 어느 면에서는 당신의 출가시만으로도 출가 때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스님은 훗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나는 중이 되려고 절에 온 게 아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다 불교에서 찾았고 불교공부를 더 잘하고 더 넓고 깊게 하려고 절에 왔다. 불교공부를 잘 하려면 절에 가서 중이 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결국 당신은 진리를 찾았고 그 진리를 내 것으로 체득하기 위해 절에 가서 스님이 되었다는 말이다.
어느 때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처음 절에 가서 선방에 있으니 어간(御間: 부처님과 마주보는 자리, 어른들이 앉는 자리)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스님들이 주욱 앉아 계셨어. 그중 한 분에게 내가 물었지. ‘스님, 스님은 무슨 화두를 잡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노스님은 ‘글쎄, 조주라 카던가, 개라 카던가 그라대. 나는 잘 몰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스님 그래 가꼬(그렇게 해 가지고) 무슨 참선한다고 앉아 있능교. 참 답답합니더.’ 그러니까 그 노스님이 ‘그라모 젊은 수좌는 많이 안다고 들었는데 내 좀 갈차주소(가르쳐주시오)’ 그라더라꼬. 그래 내가 그랬지. 스님요, 참선공부는 지가 하는 기지. 누가 갈차주는 거요. 그라고 스님은 내가 공부할 때 내게 쌀을 주었소, 밥을 주었소. 내한테 묻지 마소 했지.”
목표를 분명히 하고, 가는 길(里程)을 알고 가야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흉내만 내는 정진은 아무 소득도 없는 헛공부임을 일러주는 말이다.
스님은 훗날 당신의 사상과 학문 그리고 수행의 견처(見處)를 담은 책 <선문정로(禪門正路)>와 상당법어집(上堂法語集: 법상에 올라 사자후를 한 법문을 모은 책)을 발간하고는 부처님께 ‘밥값’했다고 흔연해 하셨다.
1967년 해인총림 방장으로 있으면서 그해 동안거에 펼친 백일법문(百日法門) 역시 후학을 위한 큰 가르침으로 오늘날에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도 벌겋게 단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일 뿐이요 바다를 덮을 정도의 큰 기틀이라도 해가 뜨면 스러지는 한 방울 이슬이라”고 한 그 말씀은 당신의 기개를 여실히 드러낸 게 아닌가.
“인생이란 잠깐 왔다가는 것인데 제 갈 길도 모르고 꿈속에서 꿈꾸다 죽는 것이다. 그 누가 그 잠깐의 꿈속에서 단꿈을 꾸다 가려 하겠는가. 나는 초연히 나 홀로 만고의 진리에 살다 가련다.”
되씹고 되씹고 또 생각하고 생각해도 당신의 드높은 기상과 당당한 자세를 느끼게 한다. 이야말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 아니랴.
생전에 스님은 불교 공부하는 청년이나 젊은 보살들에게 “니 중 돼라, 중 안할래?”라는 말을 자주했다. 당신이 보기에 젊은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자기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세월을 보낸다면 얼마나 헛된 삶인가. 그것도 모르고 사는 저들이 얼마나 안타깝고 안쓰럽게 느껴졌으면 그런 말을 했겠나 싶다.
끝없이 넓고 넓은 우주공간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의 아주 작은 별이고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그것도 반토막이 된 땅덩어리, 그런 중에서도 어디어디에서 어느 누구의 아들딸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한갓 먼지나 티끌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나 한 생각 크게 돌이켜 자기를 바로 보면 내 한 몸, 먼지보다 작은 이 몸 안에 온 우주가 들어차 있음을 일러주는 가르침이 불교다.
스님은 항상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다. 왜 그걸 모르는가. 바로 보고 바로 알아라”고 했다.
당신은 이 진리를 깨치고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성철스님 은사인 동산 대종사(1890~1965).
1912년 백용성스님(白龍城: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 대표)을 은사로 득도, 선.교.율에 통달한 선지식으로 50여년 널리 중생을 교화했다. 조계종 초대 종정(1954년)이후 1955, 1958년 두 번 더 종정을 역임. 범어사 조실로서 범어사를 참선수행도량인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으로 만들고 그 위상을 굳건히 다졌다. 1965년 4월24일(음력 3월23일) 범어사에서 입적했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열두 가지 다짐(十二銘)
성철스님이 수행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12가지 항목이다.
아녀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리라
속세의 헛된 이야기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으리라
돈이나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으리라
좋은 옷에는 닿지도 않으리라
신도의 시주물에는 몸도 끄달리지 않으리라
비구니 절에는 그림자도 지나가지 않으리라
냄새 독한 채소는 냄새도 맡지 않으리라
고기는 이(齒)로 씹지도 않으리라
시시비비에는 마음도 사로잡히지 않으리라
좋고 나쁜 기회에 따라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절을 하는 데는 여자아이라도 가리지 않으리라
다른 이의 허물은 농담도 않으리라.
- 구담족의 후손 성철
目不注 簪裳之儀 (목불주 잠상지의)
耳不傾 塵俗之談 (이불경 진속지담)
手不捉 錢弊之寶 (수불착 전폐지보)
肌不接 絹帛之 (기부접 견백지유)
身不近 檀家之施 (신불근 단가지시)
影不過 尼寺之垣 (영불과 니사지원)
鼻不 辛之菜 (비불후 신훈지채)
齒不齧 生靈之肉 (치불설 생령지육)
心不繫 是非之端 (심불게 시비지단)
意不轉 逆順之機 (의부전 역순지기)
禮不揀 童女之足 (예불간 동녀지족)
舌不弄 他人之咎 (설부농 타인지구)
- 瞿曇後末 性徹 구담후말 성철
이진두 논설위원
[불교신문 2709호/ 2011년 4월6일자]
4. 선찰대본산 범어사ㆍ내원암
Posted by admin on Apr 26, 2011
④ 선찰대본산 범어사ㆍ내원암
거침없는 ‘운수납자’ ‘괴각쟁이’ 일화 남겨
범어사 일주문. 선찰대본산 범어사의 사격(寺格)을 드러낸다.
성철스님은 1936년 3월 해인사에서 득도 후 범어사에 와서 그해 하안거를 금어선원에서, 동안거를 원효암에서 했다. 1937년 3월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아 지닌 스님은 그해 원효암에서 하안거를 하고 1938년엔 내원암에서 하안거를 했다. 스님의 일생에서 범어사에 머무른 시기는 이때뿐이다.
은사 동산스님은 평생 범어사를 당신의 주석처(住錫處)로 삼은 데 비해 상좌인 성철스님이 범어사에 주석한 시기는 운수납자 시절이 전부다. 훗날 종단의 어른이 되고나서도 스님은 범어사에는 주석하지 않았다.
스승이 계신 곳에 제자가 함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그러나 스님의 이런 행적은 언뜻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필자가 해인사 백련암에 있을 때 스님은 당신이 범어사에 머무르지 않은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거기는 내하고 안 맞아. 물이 안 맞아서 안 갔어” 라고.
물이 맞지 않아서 가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의 건강을 헤아리면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산은 제각기 독특한 물을 지닌다. 그 산에서 솟는 물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건강에 각별히 유의해야 할 사람은 물을 가리게 마련이다. 성철스님이 범어사에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건강상 물 때문이라는 당신의 말씀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나 하고 짚이는 점이 없지 않으나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범어사의 상징인 일주문. 4개의 돌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일주문은 기둥 사이 3개의 문 중앙엔 조계문(曹溪門), 오른쪽에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왼쪽에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금정산에 자리한, 참선수행도량의 으뜸가는 절이라는 표시다.
범어사 내원암. ‘제일선원’의 현판이 말해주듯 역대 고승들의 참선 수행처로 유명하다.
범어사 금어선원서 사미 · 비구계 수지
내원암에서 하안거
“한국 고승 가운데
전라도 출신 누군가”
손상좌 ‘철스님’ 질문에
용성스님은 “… ”
범어사는 선찰대본산이라 내건만큼 참선도량으로서의 사격(寺格)을 크게 드러낸다. 범어사의 큰 절 선원인 금어선원(金魚禪院)은 지금의 관음전 자리에 있었는데 1968년 청풍당(淸風堂)을 헐고 이전, 신축하였다.
청풍당은 1613년 묘전스님이 창건한 선원이다. 금어선원의 크기는 앞면 6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범어사가 선찰대본산으로 선풍을 크게 드날리게 된 것은 오성월스님의 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월스님(性月, 1871~1943)은 범어사 주지로 있으면서 전각을 중건하고 선원을 창건하여 절이 선찰(禪刹)로 거듭나는데 크게 공헌했다.
성월스님은 경남 양산 출생으로 15세에 출가, 20세까지 여러 경전을 공부한 후 범어사 계명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참선수행에 전념했다. 이후 주지를 맡아 1910년까지 산내 여러 선원을 개설했다. 1899년 10월 금강암 선원을 시작으로 1900년 10월에 안양암, 1902년 4월에 계명암, 1906년 6월에 원효암, 1909년 1월에 안심료와 승당 그리고 1910년 10월에 대성암 등에 선원과 선회(禪會)를 창설하여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스님의 이러한 노력은 경허스님(鏡虛, 1849~1912)의 선종결사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경허스님은 1900년 범어사 결사이후 통도사 화엄사 송광사 등에 선원을 복원하고 선수행을 이끌었다.
성철스님이 수행한 내원암은 일주문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개울 옆 산길로 약 1.5킬로미터(km) 올라간다. 중간에 청련암을 지난다. 내원암은 ‘제일선원’이라 일컫고 있다. 근ㆍ현대 고승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도량이다. 지금은 범어사 어른이신 능가(能嘉)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성철스님이 내원암에서 정진할 때 백용성스님(1864~1940)이 계셨다. 용성스님은 동산스님의 은사다. 성철스님은 용성스님에게는 손상좌다. 용성-동산-성철, 이렇듯 3대가 된다. 스님이 내원암에서 정진할 시절의 일화를 흥교스님(興敎, 범어사 전계대화상)은 이렇게 들려주었다.
“성철스님이 용성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한국의 고승 가운데 전라도 출신이 누구 누구입니까? ○○스님이 전라도입니까? ○○스님이 전라도입니까? 유명한 스님 중에 전라도 스님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했다.
금어선원. 범어사 큰 절 선원으로 1968년 이전 신축했다. 성철스님은 득도 후 첫 하안거를 이곳에서 났다.
용성스님은 성철스님의 이 말에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철 수좌가 잘 모르는 말일세. 들어보시게. ○○스님도 전라도고 ○○스님도 전라도 아닌가. 그리고 나도 전라도지.’
성철스님은 용성스님이 전라도 출신임을 뻔히 알면서 던진 질문이고 용성스님도 성철스님의 말밑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 답한 말이다.
성철스님은 이어서 전라도 비하 발언을 직절적으로 용성스님에게 했다. 용성스님의 이에 대응한 말은 ‘그게 다인가. 내 말 더 들어보시게. 스승과 상좌가 있었네. 상좌가 아플 때 스승이 약을 지어 주었지. 상좌가 병이 낫자 스승은 상좌에게 약값 내놓으라고 했지. 또 있어. 스승이 차고 있는 주머니가 하도 예쁘기에 상좌가 갖고 싶어 했어. 스승은 상좌에게 주머니를 사라고 했지. 주머니를 상좌에게 팔고 돈을 받았지. 그런데 이보시게. 스승이 받은 약값이나 주머니값을 나중에 상좌가 알고 보니 시중가격보다 3배나 비싸더라는 거야. 스승은 그렇게 상좌에게 3배나 더 받은 거지.’ 그런 스승과 제자 모두 전라도야.”
흥교스님은 이 일화를 들려주면서 덧붙였다. “성철 사형님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흥교 니도 전라도제. 공부 열심히 하거래이’ 하셨어.”
스님의 행적을 좇다보면 스님을 일컫는 말에 ‘철 수좌’ ‘괴각쟁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철 수좌’는 성철이란 이름을 줄인 말이고 ‘괴각쟁이’라는 말은 스님의 성정(性情)을 일컫는 말이다.
‘괴각(乖覺)’은 사전의 풀이에 따르면 ‘재주가 있고 총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절집에서는 특히 선객(禪客) 사이에서는 이 밀을 다르게 쓴다. 성질이 괴팍스러운 사람을 일컫는다. 절집 이야기 속의 괴각에 대한 풀이는 인습과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엉뚱스러우면서도 밉상이 아닌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언행은 한참 웃다가도 뒤통수를 한방 맞은 듯한 여운을 갖는다.
성철스님의 수행시절 여러 일화는 ‘괴각쟁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거침없고 당당하고 호호탕탕(浩浩蕩蕩)하다. 출가시(出家詩)에서 밝혔듯 ‘초연히 홀로 만고의 진리를 향해 가겠다’는 의지의 일관된 모습이라 하겠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아라 -
6.25 한국전쟁때 서울대에서 교수하던 문 박사라고 하는 이가 성철스님을 찾아와 나눈 대화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서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 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형제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자 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당신 여태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한 것이야. 내 부모 내 형제는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오직 큰 가족인 일체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당신 말처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자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진보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에 모두 그렇게 쓰여 있어. ‘남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고.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 1981년 6월 방장 법어에서 -
이진두 논설위원 · 사진 김형주 기자
[불교신문 2713호/ 2011년 4월20일자]
5. 통도사 백련암
Posted by admin on May 4, 2011
통도사 일주문.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 현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성철스님은 1937년 3월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아지닌(受持) 이후 그해 동안거와 1938년 동안거를 통도사 백련암에서 보냈다. 통도사 일주문, 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라고 쓴 현판 좌우의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는 주련이 통도사의 사격을 일러준다. ‘영축산 통도사’라는 이름은 이 절의 뒷산이 부처님이 설법하신 인도의 영축산과 그 형국이 비슷하고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이 절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수계(受戒)를 했으며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한다(通度)는 의미에서 통도사라고 했다고 풀이한다.
‘불지종가’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했으므로, ‘국지대찰’은 나라의 으뜸가는 절이므로 부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영축산 통도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주련의 글씨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조선 고종의 아버지)의 필적이다. 靈鷲山을 일반인이나 산악인들은 ‘영취산’이라고 발음하나 절에서는 ‘영축산’이라고 한다.
통도사는 서기 646년, 신라 선덕여왕15년에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 계율을 그 근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자장스님은 나라에서 재상을 맡으라고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이 칙명을 내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했다. 자장은 이 말을 듣고 “내 차라리 하루를 계율을 지키다 죽을망정 계율을 어기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고 했다. 창건주 자장스님의 정신에서 드러나듯 통도사는 불교신앙의 첫째 요건인 계율을 받아 지니고 불퇴전의 믿음을 지닐 수 있는 요건인 계율을 창사(創寺) 정신으로 삼았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통도사 일주문을 마주하고 서서 성철스님이 이 절에 발걸음을 한 심사(心思)를 필자 나름대로 헤아려 보았다.
비구계 수지 후 백련암서 두 차례 동안거 결제
계율 온전히 지니기에 평생 한 치 흐트러짐 없어
자장율사 정신 계승하듯 종정된 후 ‘지계청정’ 유시
당신의 행적은 이른바 삼보찰(三寶刹)인 통도ㆍ해인ㆍ송광사에 이른다. 통도사는 불보찰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기에 그렇게 불린다. 큰법당에 부처님 형상을 모시지 않은 것도 이런 연유다. 성철스님은 출가수행의 길에서 삼보찰을 두루 다녔다. 통도사에 머무른 뜻은 불보찰이기에, 또한 계율정신이 오롯한 절이기에 출가수행자로서 당연히 찾아야 할 곳이었다. 당신의 일생동안 계율을 온전히 지니기에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종정이 된 후 종도(宗徒)들에게 이른 유시(諭示)도 지계청정(持戒淸淨, 계율을 청정히 지킴)이었다. 더러 공부를 이루고 나면 계율지킴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 하여 계율에 어긋난, 막행막식(莫行莫食, 언행이 계율에 어긋나고 금지된 음식을 마음대로 먹는 행위)을 해도 좋다는 생각을 갖는 수행인이 있다. 성철스님은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고 당신 스스로도 그 본을 일생토록 보였다.
성철스님이 통도사 백련암에 머무르던 시절, 통도사는 1900년 경허스님이 직접 통도사로 와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던 때였다. 큰절 보광전에 선원이 개설됐고 구하(九河, 1872~1965) 경봉(鏡峰, 1892~1982), 월하(月下, 1915~2003) 스님 등이 통도사 선원에서 선지(禪旨)를 드높였다. 1928년에는 경봉스님이 극락암에 호국선원을 개원했다.
백련암의 백련선원은 1935년 개원했다. 개원당시 이석봉스님을 비롯한 대중 16명이 정진했으며 1942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백련암은 지금도 선원을 운영하지 않고 있다. 일주문 앞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난 찻길을 따라 취운암을 지나 약1킬로미터(m)도 못가 길이 세 갈래로 갈린다. 서운암과 극락암 길의 중간 길로 접어들어 1킬로미터 정도 가면 백련암이다. 통도사 산내 암자로 가는 길은 포장이 잘 된 도로다. 백련암 역시 길이 좋다. 게다가 암자에 이르기까지의 양쪽에 우거진 숲은 울창하여 그윽함을 자아낸다.
경내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띄는 커다란 나무가 있다. 몇 백 년이 됐는지 헤아리기 어려운 은행나무다. 이 암자는 고려 공민왕 23년(서기 1374)에 처음 지었다. 그 후 300여년이 지나 조선 인조12년(서기1634)에 중건됐다. 지금의 건물은 중건 당시의 것이라 단정 짓기 어렵다. 법당 건물은 다른 암자와 같이 암(庵)이라 하지 않고 백련사(白蓮舍)라 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 당시의 죽림정사나 기원정사를 연상케 한다.
‘백련사’라는 현판이 걸린 본당 건물이 옛날 선방이라고 이 절 어른인 원산스님(圓山, 조계종 초대 교육원장)이 일러준다. 지금 스님이 쓰고 있는 방이 당시 선방의 지대방이라 한다. 경봉스님이 큰절 주지 일 때(1935년)엔 백련사 선방에 연간 쌀 200가마를 보냈단다.
원산스님은 “백련사 선방은 살림에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큰절에서 대중들 식량을 보내주었기에 그러하기도 했지만 백련암 대중 스님들이 선원(당시 염불당) 개원이전에도 돈이 생기면 아끼고 모아서 인근의 논을 샀다고 한다. 좋은 논은 못 샀지만 자잘한 논, 수확이 좋지 않은 논들을 샀다고.
원산스님은 “당시 스님들은 염불회를 결성하여 신도들에게 염불을 권장하고 신행활동을 이끌었다”고 하다. 경봉스님도 ‘만일염불회’를 만들었고 상좌인 자신도 지금 백련암에 ‘만인동참 만일염불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만일이면 1년이 365일이라 햇수로 28년이 더 걸리는 세월이다. ‘만일염불회’는 이름이 ‘만일(萬日)’이지 그 내용은 불자가 평생 염불수행을 하라는 뜻이라 하겠다.
백련암 큰법당 오른쪽엔 명월선원(明月禪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원산스님은 “내 얼굴이 둥글둥글하니 선방을 하겠다는 내게 은사 경봉스님이 친히 써 준 글”이라고 한다. 원산스님은 은사인 경봉스님이 ‘만인동참 만일염불회’를 한 뜻을 이어받아 자시도 이 염불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스님은 ‘대중이 많이 모이면 옛날처럼 선방을 운영할 포부도 잊지 않고 있다”면서 요즘은 강원이나 선방을 막론하고 수행자수가 줄어 걱정이라고 한다. 점점 출가수행자가 줄어드는 추세라 자못 걱정스럽지가 않단다. 불교의 정법이 출가수행자의 숫자에 구애되려나마는 출가인이 적어진다는 일은 앞으로도 많은 생각을 가져야 할 사안임에 틀림없다.
백련암의 은행나무를 보면서 많은 세월의 온갖 풍상에도 의연한 그 모습에서 출가수행인으로서의 성철스님의 수행정신을 새삼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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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마당의 은행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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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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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선방이였던 백련암 본당.
현판은 ‘白蓮舍’로 되어 있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천지는 한 뿌리 |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없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구름 되어 둥둥 떠 있는 변화무쌍한 부처님들, 바위 되어 우뚝 서 있는 한가로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귀여운 부처님들, 허공을 훨훨 나는 활발한 부처님들,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여 낱낱이 장엄합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세계는 모든 고뇌를 초월하여 지극한 행복을 누리며 곳곳이 불가사의한 해탈도량이니 신기하고도 신기합니다.
입은 옷은 각각 달라 천차만별이지만 변함없는 부처님의 모습은 한결같습니다.
자비의 미소를 항상 머금고 천둥보다 더 큰 소리로 끊임없이 설법하시며 우주에 꽉 차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 나날이 좋을시고 당신네의 생신이니 영원에서 영원이 다하도록 서로 존경하며 서로 축하합니다.
- 1986년 부처님오신날 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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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두 논설위원 · 사진 김형주 기자
[불교신문 2717호/ 2011년 5월4일자]
6. 은해사 운부암
Posted by admin on May 24, 2011
선원뒤에서 본 운부암. 새롭게 단장하지 않은 고택(古宅)으로 ‘ㄷ’자로 되어있다.
오른쪽 앞 갓방이 성철스님이 머물던 방이다. 김형주기자
평생의 도반 향곡스님을 만나다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를 마친(1938년) 성철스님의 발길은 경북 은해사 운부암으로 향했다(1939). 하안거 한 철을 나기 위해 운부암으로 가는 스님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본다. 은해사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동 479번지가 지금의 주소다.
팔공산 깊숙이 자리 잡은 은해사. 운부암은 은해사 큰절에서도 산속으로 약3킬로미터(km) 더 간다. 산중의 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운부(雲浮)라는 이름도 산이 구름에 맞닿아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수행납자의 행리가 구름처럼 떠도는 것이어서 그리 한지도 모르겠다.북통만한 걸망을 지고 큰절에서 운부암으로 스님은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그 길을 필자는 지금 자동차로 휑하니 달려가고 있다. 70여 년 전엔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었던 것이 이제는 찻길이 뚫려 편히 가게 되었다고는 하나 포장된 그 찻길도 차 2대가 겨우 스쳐 지날 만큼 좁은 길이다. 문명발달의 혜택으로 차를 타고 산 속 길을 가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다. 옛날 스님이 가던 그때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는 게 제격이지 않나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운부암은 애초에는 어엿한 독립 사찰로 운부사라 했다고 한다. 절을 처음 지을 때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떴다하여 운부(雲浮)라 했단다.
상서로운 구름아래 놓인 한적한 ‘아란야’에는
3평 남짓 무문관 같은 한주실이 그대로 남아
지금도 스님이 그곳에서 정진하는 듯 고요하기만...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 의상스님이 창건했다기도 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연 홍척(洪陟) 국사가 창건했다기도 한다. 운부암의 선원은 운부난야(雲浮蘭若)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적정처(寂靜處), 무쟁처(無諍處), 원리처(遠離處)라 번역한다. 시끄러움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수행하기에 적당한 숲속, 넓은 들, 모래사장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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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당호 ‘운부난야’ |
운부난야 현판 글씨는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필체다. 동글동글 하면서도 그 속에 뼈대가 느껴지는 글씨다. 선원이 근대에 들어 언제 개원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경허스님이 영남지역에 선방을 열었던 1900년대 초이거나 그 중반에 개원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1927년 동광(東光)스님이 운부선원에 들렀다는 기록으로 보건대 이때엔 선원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35년에는 조실 이성우(李聖雨)스님의 지도아래 입승 정한종(鄭漢宗)스님을 비롯하여 23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선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8년 하안거부터 금모(金毛, 일명 佛山)스님이 선원을 개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운부난야는 ‘ㄷ’자로 된 집이다. 오랜 세월 새롭게 단장하지 않아 옛 그대로의 고택(古宅)이다. 큰방은 지금 10평 정도 수용할 공간이고 큰방 죄우로 작은방이 있어 수행스님들이 거처하게 했다.
큰방 양쪽으로 3~4개 있는 이 작은방 중 맨 갓방이 성철스님이 머물던 방이다. 지금은 한주실(閑住室)이라 하는 이 방엔 군불을 땔 아궁이가 있다. 3평도 채 안 되는 이 작은 방에는 한쪽에 이부자리가 개켜져 있고 경상(經床)이 하나 있다. 마치 무문관의 한 방을 연상케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 운부암은 마냥 조용했다. 불산스님은 외출 중이었고 암자 내 행자들도 직지사 행자교육에 갔다고 한다. 암자 입구에는 큰 못이 있다. 그 못 한쪽에 달마스님 입상을 모셔 이곳이 전통선원임을 일러준다. 운부암은 입구의 큰 돌에 새겨진 ‘남운부 북마하(南雲浮 北摩珂)’ 남쪽은 운부요 북쪽은 (금강산에 있는 암자)마하연이라는 글 그대로 남쪽에는 선객들의 수행처로 유명한 곳이다. 성철스님은 운부난야에서 당신 평생의 도반(道伴) 향곡(香谷)스님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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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이 수행하던 당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운부암 선방 안. 달마그림과 함께 ‘용상방’이 눈에 들어온다. |
이 두 고승의 이때의 만남은 성철스님 일생에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향곡스님은 1912년 1월18일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출생했다. 성철스님과 같은 해 출생이다. 1927년 16세에 경남 양산의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에 입산, 1929년 18세에 조성월(趙性月)스님을 은사로 득도(得度)했다. 법명은 혜림(蕙林). 1931년 20세에 범어사에서 운봉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1944년 8월 운봉스님으로부터 크게 깨침을 인가(印可)받고 전법게를 받았다. 1947년 성철스님과 함께 봉암사(鳳岩寺) 결사(結社)에 참여했고 이해 활연대오 한 후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의 조실로서 후학을 길렀다.
경남 기장군 월내(月內, 지금은 부산 기장)에 있는 묘관음사(妙觀音寺)에서 눈 푸른 납자들을 길러내다 1978년 음력 12월18일 입적했다. 세수 67세 법랍 50세. 향곡스님의 봉암사에서의 활연대오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향곡선사 법어집>에 있는 기록에 그 이야기가 있다. 향곡스님의 법제자 진제(眞際 , 동화사 조실)스님이 쓴 ‘향곡대종사 행화비(行化碑)’에 있는 이 글을 보자.
“… 문경 봉암사에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던 중 한 도반이 묻기를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면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또 죽은 사람을 살려 다하면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殺盡死人 方見活人 活盡死人 方見死人)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었이겠느냐’ 하거늘 몰록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 3.7일동안 침식을 잊고 정진하다가 하루는 홀연히 자기의 양쪽 손을 발견하자마자 활연대오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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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이 공부하던 방으로 지금은 한주실로 쓰고 있다. |
이 때 향곡스님에게 물음을 내 건 도반이 성철스님이었다고 한다. 진제스님은 이 이야기를 필자에게 하면서 “당시 봉암사에서 이 물음이 나올 때 청담스님 성철스님 향곡스님이 한 자리에 있었다. 향곡스님이 3.7일 후 활연대오 한 후 ‘성철이가 아는 불법(佛法)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바른 법을 알았다’라면서 말싸움을 했다”고 한다. 절집에서는 도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자기 공부의 반(半)은 도반이 해준다고 말한다.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도(道)로서 사귄 벗이 도반이다.
성철스님은 당신과 동갑이면서도 당신보다 일찍 열반한 향곡스님을 못내 아쉬워했다. 성철스님은 향곡스님의 열반에 ‘곡향곡형(哭香谷兄)’이란 글을 남겼다.
“향곡형을 곡하여 – 슬프고 또 슬프다. 이 종문에 악한 도적아, 천상천하에 너 같은 놈 몇일런가. 업연이 벌써 다해 훨훨 털고 떠났으니, 동쪽 집에 말이 되든 서쪽 집에 소가 되든. 애닳고 애닳다. 갑을병정무기경. 도우 성철
(哀哀宗門大惡賊 天上天下能幾人 業緣已盡撒手去 東家作馬西舍牛. . 甲乙丙丁戊己庚. 道友 性徹)”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수행자가 지킬 5계
첫째 잠을 적게 자야 한다. 3시간이상 자면 그건 수도인이 아니다.
둘째 말하지 말라. 말할 때는 화두가 없으니 좋은 말이든 궂은 말이든 남과 말하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끼리는 싸움 한 사람같이 하라.
셋째 문자를 보지 말라. 부처님 경(經)도 보지 말고 조사어록도 보지 말고 신문 잡지는 말할 것도 없다. 참으로 참선하여 자기를 복구시키면 이 자아(自我)라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다 해도 설명할 수 없고 소개할 수 없는 것이다. 세속적인 어떤 문장으로도, 부처님이라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자아를 완전히 깨치려면 불법(佛法)도 버려야 한다. 불교를 앞세우면 그것이 또 장애가 된다. 참으로 깨끗한 자아에 비춰보면 먼지요 때(垢)다. 오직 화두만 해야 한다.
넷째 과식하지 말고 간식하지 말라. 음식은 건강유지가 될 정도만 먹어라. 과식하면 잠이 자꾸 온다. 혼침(昏沈)해선 안 된다.
소식(小食)이 건강에도 좋고 장수비결이다.
다섯째 돌아다니지 말라. 해제하면 모두들 제트기같이 달아나는데 그러지 말라.
이 5계를 못 지키면, 그런 사람은 공부 안하는 사람이다. 이 5계를 지키며 10년을 공부하면 성불할 수 있다. 이 5계를 수백 명에게도 더 일러주었는데 그대로 지키는 사람 아직 못 보았다. 아마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물론 숨어서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
2011.05.23 – 이진두 논설위원
7. 동화사 금당선원
Posted by admin on Jun 8, 2011
동화사 금당선원 전경. 해제철에도 고요와 정적, 엄숙과 경건함이 주변 공간에 꽉 차 있었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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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 –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1940년 스님은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동안거를 했다. 1939년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를 한 스님은 그해 동안거를 금강산 마하연에서, 1940년 하안거도 금강산 마하연에서 하고 동안거는 금당선원에서 했다. 여기서 스님은 오도(悟道)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대구 동화사에 갔다. 절 입구 큰 길 양쪽은 벚꽃이 만발하여 가히 벚꽃터널이었다. 맑고 하얀 꽃들이 활짝 피어 하늘을 가리고 간간이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벚꽃이 필대로 다 피었다가 한잎 두잎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며 내 인생은 언제 저렇게 밝고 환한 모습으로 무성했던 때가 있었는가를 생각했다. 사람도 저 꽃처럼 한 때는 화려했다가 결국은 스러져가는 것인데 내 삶 가운데서는 어느 때가 가장 밝고 환한 때였는가를 따져보니 별로 짚이는 때가 없어 서글펐다.
해제철이라 해도
선원의 출입은 엄했다
작은 문의 위력은
그렇게 대단했다
금방이라도 장군죽비의
싸늘한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
혈맥을 서로 이어받은
종통은 제삼자가
바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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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쪽문. 김형주 기자 |
금당선원은, 대웅전을 마주보고 서면 오른쪽에 계곡이 있다. 폭은 좁으나 깊은 계곡을 지나 경사가 완만한 언덕을 50m(미터)도 채 못가면 아늑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보통사람 키만큼 높은 쪽문이 선원과 바깥 공간과의 경계다. 해제철이라 해도 선원의 출입은 엄했다. 안내하는 사람 없이는 그 작은 쪽문도 외부인은 함부로 열지 못했다. 작은 문의 위력은 그렇게 대단했다.
소리죽여 문을 열고 발소리도 삼가며 선원마당에 들어섰다. 선방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고요와 정적, 엄숙과 경건함이 주변 공간에 꽉 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장군죽비의 싸늘한 소리가 들여올 것 같았다.
성철스님은 이 선원에서 안거하며 도를 깨쳤다. 스님은 이후 우리가 여느 고승의 행적에서 보듯 누구를 찾아 자신의 공부를 드러내 보이고, 인가(認可)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스님은 생전에 “나는 누구의 법을 받았고 누구에게 전했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오도에 대해, 견성(見性)에 대해 명확한 이론과 실천방법을 일러주었다.
스님은 “내 법을 누구한테 받아서 누구한테 전했다라는 말은 하지 말고 내 법을 알려거든 <본지풍광(本地風光)>과 <선문정로(禪門正路)> 두 권을 보라”고 했다. ‘본지풍광’은 스님의 상당법어집(上堂法語集)으로 1982년 펴낸 책(불광출판부 간)이며 ‘선문정로’는 이름 그대로 참선수행의 지침서로서 견성은 무엇을 말하며 참선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나를 명확하고 세세하게 밝혀 선문수행의 바른 길을 제시한 책(1981년 장경각 간)이다. 스님은 또 <한국불교의 법맥>이란 책(1976년 장경각 간)에서 법을 잇고 등불을 전하는 사법전등(嗣法傳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혀놓았다.
‘선문정로’에서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선문(禪門)은 견성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을 철견(徹見)함이다. 자성은 그를 엄폐한 근본무명, 즉 제8아뢰야의 미세망념이 영절(永絶)하지 않으면 철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문정전(禪門正傳)의 견성은 아뢰야의 미세가 멸진(滅盡)한 구경묘각(究竟妙覺) 원증불과(圓證佛果)이며 무여열반(無餘涅槃) 대원경지(大圓鏡智)이다.
이 견성이 즉 돈오(頓悟)이니 오매일여(寤寐一如) 내외명철(內外明徹) 무심무념(無心無念) 상적상조(常寂常照)를 내용으로 하여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선문의 견성과 돈오가 아니다. 따라서 오후보임(悟後保任)은 구경불과(究竟佛果)인 열반묘심(涅槃妙心)을 호지(護持)하는 무애자재의 부사의대해탈을 말한다.
견성방법은 불조공안(佛祖公案)을 참구함이 가장 첩경이다. 불조공안은 극심난해(極深難解)하여 자재보살도 망연부지(茫然不知)하고 오직 대원경지로서만 요지(了知)하나니 공안을 명료(明了)하면 자성을 철견한다. 그러므로 원증불과인 견성을 할 때까지는 공안 참구에만 진력하여야 하나니 원오(圓悟)가 ‘항상 공안을 참구하지 않음이 큰 병’이라고 가책(加責)함은 이를 말함이다.
공안을 타파하여 자성을 철견하면 삼신사지(三身四智)를 원만증득하고 전기대용(全機大用)이 일시에 현전한다. 이것이 살활자재(殺活自在)하고 종횡무진(縱橫無盡)한 정안종사(正眼宗師)이니 정안이 아니면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지 못한다. … 그러나 개개가 본래 비로정상인(毘盧頂上人)이라 자경자굴(自輕自屈)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정안을 활개(豁開)하여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가 되나니 참으로 묘법(妙法)중 묘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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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이 안거하며 도를 깨쳤던 동화사. 70년이 흐른 지금 동화사의 청명함이 스님의 오도송을 다시 한 번 생각게 한다. 김형주 기자 |
법을 전하고 받는데 대해 스님은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이렇게 말한다.
“승가에는 두 종류의 스승이 있다. 하나는 삭발을 허락하고 계를 주는 스승 득도사(得度師)이고 또 하나는 마음을 깨우쳐 법을 이어받게 해주는 스승 사법사(嗣法師)이다. 만약 수계한 스승에게서 마음을 깨우쳐 법을 전해 받게 되면 두 종류의 스승을 겸하게 되지만 다른 스승으로부터 마음을 깨우쳐 법을 전수받게 되면 법을 전해 받은 스승을 따로 정하게 된다.
법을 이은 스승의 계통을 일러 법계(法系) 법맥(法脈) 혹은 종통(宗統) 종맥(宗脈)이라고 한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목적은 불도(佛道)를 이루고 또 전하여 잇게 함에 있으므로 법의 스승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승가에서 서로 전해 받는 계보는 법을 잇는 것을 위주로 하는 법맥이 이어오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법을 잇고 등불을 전함’이라고 한다. … 그리고 이 불법을 전승하는 것은 몸소 수기(授記)함을 이어받아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것(以心傳心)’을 생명으로 한다. 직접 수기함을 이어받지 않으면 법을 이어받고 마음을 전하는 것이 되지 않는다.
이는 법을 전해주고 법을 전해받는 당사자 사이에서만 결정되는 일이요, 제삼자는 인정하느니 안하느니 상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혈맥을 서로 이어받음(血脈相承)이라고 한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피가 아들에게 전하여짐과 같이 스승과 제자(師資)가 주고받아서 부처님의 법을 서로 이어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법맥을 전하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혈맥을 서로 이어받은 법맥 즉 종통은 제삼자가 변경시켜 바꾸지 못한다.”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는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黃河西流崑崙頂
日月無光大地沈
遽然一笑回首立
靑山依舊白雲中
- 성철스님의 오도송(悟道頌, 도를 깨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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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中道가 부처님
중도(中道)가 부처님이니 중도를 바로 알면 부처님을 봅니다. 중도는 중간 또는 중용(中庸)이 아닙니다.
중도는 시비선악(是非善惡) 등과 같은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입니다. 시비선악 등의 상호 모순된 대립, 투쟁의 세계가 현실의 참모습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허망한 분별로 착각된 거짓 모습입니다.
우주의 실상은 대립의 소멸과 그 융합에 있습니다. 시비(是非)가 융합하여 시(是)가 즉 비(非)요 비(非)가 즉 시(是)이며, 선악이 융합하여 선이 즉 악이요 악이 즉 선이니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의 진리입니다.
자연계뿐만 아니라 우주전체가, 모를 때에는 제각각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모두 일체(一體)입니다. 착각된 허망한 분별인 시비선악 등을 고집하여 버리지 않으면 상호투쟁은 늘 계속되어 끝이 없습니다.
만법이 혼연융합한 중도의 실상을 바로 보면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은 자연히 소멸되고 융합자재한 일대단원(一大團圓)이 있을 뿐입니다.
악한과 성인이 일체(一體)이며 너는 틀리고 나는 옳다함이 한 이치이니 호호탕탕한 자유세계에서 어디로 가나 웃음뿐이요, 불평불만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대립이 영영 소멸된 이 세계에는 모두가 중도(中道) 아님이 없어서 부처님만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 중도실상의 부처님 세계가 우주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래로 평화의 꽃이 만발한 크나큰 낙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비선악의 양쪽을 버리고 융합자재한 이 중도실상을 바로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휴전을 하고 절대적 평화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삼라만상이 일제히 입을 열어 중도를 노래하며 부처님을 찬양하는 이 거룩한 장관 속에서 손에 손을 맞잡고 다같이 행진합시다.
- 1983년 부처님오신날 법어 -
[불교신문 2725호/ 6월8일자]
8. 송광사 삼일암
Posted by admin on Jun 21, 2011
“시냇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설법이니 산빛이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리오.
밤이 되어 팔만 사천 게송이나 되는 것을 다른 날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들어 보이리오. -소동파 오도송 중에서.
(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揭 他日如河擧似人)”
물소리 바람소리…. 부처님 말씀 아닌 것이 없다.
사진은 조계총림 송광사 경내 계곡.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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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은 1940년 금당선원에서 동안거 때 오도(悟道)한 후 이듬해 1941년 전남 순천 송광사 삼일암으로 갔다. 하안거를 하기 위한 걸음이었다. 삼일암(三日庵)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큰절에 딸린 암자가 아니었다. 송광사 큰 절내에 있는 한 당우(堂宇)를 말한다.
응진전 옆에 상사당(上舍堂)과 하사당(下舍堂)이 있다. 이 상사당 하사당은 한 건물에 두 현판이 있는데 각각 상사.하사당이라 했다. 상사당과 하사당 현판의 중간에 당대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로 ‘世界一花 祖宗六葉(세계일화 조종육엽)’이라 쓴 편액이 있다.
지난 5월 하순 송광사에 들렀다.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3대 사찰의 하나로 승보종찰(僧寶宗刹)이다. 송광사에는 많은 명안종사(明眼宗師, 눈 밝은 큰스님)들이 나와 선풍을 드날렸다. 보조 지눌스님을 비롯하여 16국사(國師)가 나왔다. 그래서 ‘승보종찰’이라 한다.
당대 선지식 효봉-만공스님 친견 위한 구도행 ‘짐작’
“사람노릇하려면 옳은 중노릇 못한다”
‘철 수좌’ 말씀 일타스님 평생에 큰 영향
삼일암 머문 불과 닷새…정진대중에 ‘깊은 인상’ 남겨
대웅전 앞마당의 매화나무에는 꽃은 다 떨어졌고 매실이 부는 바람에 하나둘 마당에 떨어지고 있었다. 상사.하사당 뒤편에는 삼일암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한 건물인데 앞쪽은 상사당.하사당이요 뒤편엔 삼일암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삼일암은 송광사 16국사 중 제9대 조사 담당(湛堂)국사가 이 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오도했으므로 부쳐진 이름이라 한다. 담당국사는 고려 때 스님으로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송광사에 전해오는 말에는 그가 중국인이라 한다.
원(元)나라 순종(順宗, 1343년) 때 고려에 왔다고 한다. 그는 본래 송광사 암자인 천자암(天子庵)에서 수도하다가 이 곳 상사당에서 3일 만에 오도하고 그 우물을 삼일영천(三日靈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상.하사당이 선방으로 쓰일 때 상사당에는 구참납자(舊參衲子)가, 하사당에는 신참납자가 정진했다고 한다.
건물의 크기는 전면과 측면 각각 3간이며 1951년 한국전쟁 때에도 다행히 화재를 모면했다. 그러나 건립연대를 고증할 자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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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이 오도 이듬해인 1941년 하안거를 위해 들렀던 승보종찰 송광사 삼일암. 김형주 기자 |
성철스님이 삼일암에 갔을 때 그곳에는 당대의 고승 효봉스님이 있었다. 효봉(曉峰, 1888~1966)스님은 평안남도 양덕에서 태어나 1925년 37세 때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石頭)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스님은 1927년 여름 신계사 미륵암 선원에서 안거에 들면서 정진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반야에 인연이 엷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 없습니다. 묵언을 하면서 입선과 방선, 경행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만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양해를 구하고 석 달 동안 정진했다. 줄곧 앉아만 있으니 엉덩이 살이 헐어서 진물이 나와 바지와 방석이 들러붙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1930년 늦은 봄 스님 나이 42세 때. 법기암 뒤에 토굴을 짓고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이듬해 여름, 비가 갠 어느 날 아침, 스님은 토굴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1년6개월만이었다. 스님은 그때 오도했다.
이후 효봉스님은 1954년 교단정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1957년 총무원장, 1962~ 1966년 통합종단 초대종정을 역임했다. 1966년 10월15일 세수 78, 법랍 42세로 열반에 들었다.
성철스님이 오도 후 첫 발걸음을 송광사 삼일암으로 향한 의중은 헤아리기 힘들다. 그러나 스님의 행적은 송광사 삼일암 이후 충남 예산 수덕사 정혜사로 향한 것으로 보아 당대 선지식 효봉, 만공스님을 친견하기 위함이 아닌가 짐작되기도 한다. 효봉스님과 만남의 자리에서 법거량(法擧揚)이 있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을 못 찾았다.
그러나 성철스님이 삼일암에 갔을 때의 기록은 있다. 성철스님문도회에서 불기2540(서기1996)년 펴낸 계간지 <고경(古鏡)> 겨울호에 게재된 일타스님과의 인터뷰 기록에서 당시 상황을 살필 수 있다.
일타스님의 회고를 인용한다.
“…오로지 대선지식을 만나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름 결제를 하기위해 효봉스님이 조실로 계신 송광사를 찾아갔어요. 그 때 성철스님을 처음 뵈었어요. 결제전인 어느 날 저녁 대중이 공양을 마치고 나왔는데 대중스님들이 ‘철 수좌 왔다. 철 수좌 왔다’하며 좀 소란스럽더군요. 그래 철 수좌가 누구냐고 물으니 ‘말도 마.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는 굉장한 스님이야’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듣고는 호기심이 생겨 나도 가봐야지 하고는 갔어요. 다른 대중들은 일어나 있고 효봉스님 그리고 나이가 많으신 입승 영월스님이 앉아있는데 성철스님이 두 분에게 절을 하고는 턱하니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시더군요. 어른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면 무릎 꿇고 앉는 것이 보통인데 ‘철스님’은 당당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어요.
영월스님이 ‘생식을 하시는 분은 여기서 대중과 함께 살수가 없습니다’ 하니 철스님도 ‘잘 알겠습니다. 며칠 쉬어 가겠습니다’라고만 했어요.
그 당당한 모습이 어찌나 인상 깊던지.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있고 특기한 사람이 있는데 철스님은 특기한 사람 중의 한 분이구나 싶었어요. 찬연히 빛나는 눈빛에서는 지혜가 샘솟는 것 같고 훤칠한 이마에 흠씬 커 보이는 키가 대중을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철스님은 법웅스님과 함께 국사전 노전에 머물렀는데 나는 스님이 생식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말뚝신심이 나서 상추를 뜯어다 씻어서 자꾸 갖다 드렸어요. 그때 대중 가운데서 내가 나이가 가장 어려 다른 스님들보다 편안하게 스님을 뵐 수 있었지요. 하루는 밖에 나가시길래 따라 나섰어요. 송광사 위쪽에 경치 좋은 ‘수석대’라는 곳이 있어요. 그 위에 올라가면 석두스님이 지었다는 ‘무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어요. 그쪽으로 올라가던 스님이 나를 보고는 ‘와 따라 오노’ 하고 묻기에 ‘따라갑니까? 그냥 가지요’ 하니 허허 웃으면서 은사가 누구냐, 본사는 어디냐 등 물었어요.
그때 스님에게 들은 말씀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말씀이 ‘중노릇은 사람노릇이 아니다. 중노릇하고 사람노릇하고는 다르다. 사람노릇하려면 옳은 중노릇을 못한다’는 말씀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말씀이 내 중노릇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스님이 송광사에 한 닷새 있다가 떠날 때 나도 은근히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그 소리는 못하고 ‘혼자 가십니까’ 하니 ‘중이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다’ 하셨어요. 경에도 있듯 ‘구도자의 길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이라는 그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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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보종찰 순천 송광사 일주문. 김형주 기자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하심(下心)
좋고 영광스러운 것은 항상 남에게 미루고 남부끄럽고 욕된 것은 남모르게 내가 뒤집어쓰는 것이 수도인의 행동이다.
“항상 자기의 허물만 보고 남의 시비와 선악은 보지 못한다”는 육조대사의 말씀이야 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눈이다. 도가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낮추어야 하니, 사람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긴다.
어린이나 걸인이나, 어떠한 악인이라도 차별하지 않고 극진하게 존경한다.
낮은 자리에 앉고 서며, 끝에서 수행하여 남보다 앞서지 않는다.
음식을 먹을 때나 물건을 나눌 때 좋은 것은 남에게 미루고 나쁜 것만 가진다.
언제든지 고되고 천한 일은 자기가 한다.
- 방장 대중법어(1982년 5월)
[불교신문 2729호/ 6월22일자]
9. 덕숭산 정혜사 능인선원
Posted by admin on Jul 7, 2011
성철스님은 1941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정혜사에서 동안거를 했다. 정혜사에는 능인선원이 있다. 정혜사(定慧寺)는 수덕사(修德寺)와 함께 599년(백제 법왕1년) 지명(智明)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많은 고승 대덕이 수도한 곳이나 중창 및 중수의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30년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이 중수한 이후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지금은 덕숭총림 수덕사의 대표적 선원이다.
성철스님이 이 절을 찾았을 때 능인선원(能仁禪院)에는 당대의 선지식으로, 참선수행자의 지도자이자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만공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만공스님이 정혜사의 조실로 있을 때는 그 문하에 항상 100여 명의 비구.비구니가 있었다고 한다.
한 선지식 아래서 세 철을 지낸 곳…유일
성철스님은 만공스님 회상에서 평생의 도반 청담(靑潭, 1902~1971)스님을 만났다. 당시 만공스님의 회상에서 처음 만난 두 스님은 이후 평생토록 도반으로 지내면서 당대 우리 불교계를 이끌었다. 청담스님은 성철스님보다 세수로 10년 연상이다. 그러나 나이를 상관치 않고 두 분은 절친하게 지냈다. 성철스님은 “청담스님과 나 사이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 그런 사이”라고 했다. 청담스님 또한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던 모양”이라 했다.
성철스님의 행장(行狀)에서 어느 한 기록 소홀히 넘길 것이 없지만 정혜사에서의 기록은 더욱이나 예사롭지 않다. 만공회상에서 청담스님을 만난 성철스님. 만공-성철, 청담-성철은 두고두고 후학에게 많은 가르침을 일깨우고 있다.
정혜사 능인선원 가는 길. KTX 천안아산역에서 수덕사까지는 승용차로 근50분 거리다. 수덕사 큰절에는 들르지 않고 정혜사로 바로 갔다. 정혜사는 수덕사 뒤쪽 산꼭대기로 향한 길을 따라 약 3km 올라간다. 근래 찻길을 내서 그나마 가기 수월하다고 하나 여전히 깔꼬막(가파른 오르막)이다.
승용차 두 대가 스쳐지나가기도 힘든 좁은 길이다. 이런데다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가야 하니 웬만한 운전솜씨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거의 정상 아래에 자리 잡은 정혜사 앞마당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덕사 큰절이 멀리 자그맣게 보였다.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 발 그것이었다.
결제중이라 방장 스님을 뵐 수 있을까 속으로 걱정했는데 원주 스님 말씀이 “방선(放禪)하면 뵐 수 있다”고 했다. 원주 스님의 배려가 고마웠다. 오후4시 방선이었다. 방장 시자 스님은 큰 스님 뵙기 전에 땀부터 식히라면서 시원한 차를 내주었다.
설정(雪靖) 방장 스님은 우리를 흔쾌히 맞아주었다. 스님께 찾아온 연유를 간단히 말씀 드리고 나서 물었다.
“철 수좌가 여기 왔을 때 만공스님과 나눈 대화를 들으신 적이 있으면 일러 주십시오.” “제가 듣기로는 당시 만공 큰스님은 성철스님에게 ‘책을 많이 보셨다고 들었다. 참선을 오롯이 하려면 문자를 놓아야 한다. 식견(識見)을 버려야 한다. 참선의 병폐는 정식(情識) – 망정(妄情)과 의식이다. 정식을 떨쳐버리는 것이 조사관문(祖師關門)을 뚫는 요긴한 길이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만공스님
“참선공부는 정식(情識)으로는 안된다”
청담스님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던것 같아”
성철스님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 그런 사이”
성철스님은 만공회상에서 세 철을 지냈다. 1941년 정혜사에서 동안거, 그리고 그 이듬해 충남 서산군 간월도의 만공스님 토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 성철스님 행장 가운데 한 선지식 아래서 세 철을 지낸 기록은 이때의 것뿐이다.
설정스님이 들은 대로라면 만공스님이 성철스님에게 했다는 말은 언뜻 들으면 성철스님에게 공부의 길을 일러준 말인 듯하다. 그런데 당시 성철스님은 정혜사에 오기 전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동안거 때 오도(悟道)했다.
생각해 보면 당시 ‘철 수좌’의 오도는 제방 선방에 널리 알려졌을 터이고 정혜사의 만공스님도 모를 리가 없었을 게다. 그런데도 만공스님이 ‘철 수좌’를 대하여 한 말씀이 “참선공부는 정식으로는 안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달리 말하면 성철스님은 참선공부의 궁극목표인 깨침이 정식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고 그 길을 다 거쳐 이른바 조사관문을 뚫었기에 스스로 오도송을 읊은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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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의 푸르름은 70년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짙은 녹음에서 정혜사 능인선원 수행자들의 기상이 느껴지는듯 하다. 김형주 기자 |
만공-성철의 대화에서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참선수행 단계 중 화두가 일상에 여일(如一)할 때를 동정일여(動靜一如)라 하고 그 다음 단계로 몽중일여(夢中一如) 즉 꿈속에서도 화두가 여일함이다. 그 다음이 오매일여(寤寐一如)요, 오매일여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견성이라 한다. ‘철 수좌’가 만공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몽중일여가 되십니까.” 만공스님은 “그렇지” 했다고 한다.
전해오는 두 이야기에서 필자는 만공.성철 두 어른의 견처와 법거량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이 말만은 필자는 이해로써 알고 있다. “깨친 사람은 깨친 사람만이 알아본다”는 말이다.
통도사 경봉(鏡峰, 1892~1982)스님도 평소 이 말을 자주 일러주셨다. 목격도존(目擊道存, 눈이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다)이라고. 만공.성철스님의 대좌는 이미 그것으로도 도가 있었을 것이고 이 대목에서는 두 분 외에 제3자는 거기에 도가 있었다 없었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이다.
필자가 성철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 스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스승과 제자가 무인도에 떨어졌다. 먹을 거라고는 없었다. 마침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잡아먹어야 그나마 한사람이라도 살아남을 그런 처지였다. 이럴 때 제자가 스승에게 말한다. ‘스님 저를 잡아 잡수시고 스님은 사세요’ 그러자 그 스승은 ‘응, 그래’ 하면서 서슴없이 제자를 잡아먹는다. 그 스승과 제자는 경허(鏡虛, 1849~1913)스님과 만공스님이다. 두 사제 사이는 그러했다.”
필자는 그 때 스님의 그 말씀을 그냥 듣고 말았다. 그 후 세월이 한참 지나면서 문득문득 스님의 그 이야기가 생각나곤 했다. 스님께서 그때 왜 그 말을 하셨을까. 그 말의 뜻은 무엇일까. 잡아먹고 먹힌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 말을 왜 내게 하셨을까. 스승과 제자란 무엇인가. 진정 어떠해야 하는가. 곱씹을수록 어렵고 회한(悔恨)이 남는 말씀이었다.
그때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스님,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쉽게 말씀해 주십시오.” 소리를 왜 못했을까. 생각할수록 그 말을 못한 게 한스럽다. 한편으로는 그때 내 깜냥이 스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만큼 못되었기에 다시 묻는다는 건 생각조차 못했음을 이제야 안다.
어디 그뿐이랴. 스님 모시고 스님 곁에 있을 때 더 많이, 더 자세히 여쭙지 못한 게 가슴을 치는 일이나 이제 어쩌랴. 당신이 남긴 말씀을 앞으로라도 더 곰곰이 더 깊게 새길 뿐이지 않은가.
스승과 도반, 이 두 말은 절집에서만이 아니라 재가불자의 일상에서도 항상 깊이 새길 명제가 아닌가.
설정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당시 만공 큰스님은 성철스님에게 ‘참선을 오롯이 하려면 문자를 놓아야 한다. 식견(識見)을 버려야 한다.
참선의 병폐는 정식(情識) – 망정(妄情)과 의식이다.
정식을 떨쳐버리는 것이 조사관문(祖師關門)을 뚫는 요긴한 길이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죽으므로 저것이 죽는다.
이는 두 막대기가 서로 버티고 섰다가 이쪽이 넘어지면 저쪽이 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만물은 서로서로 의지하여 살고 있어서 하나도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이 깊은 진리는 부처님께서 크게 외치는 연기(緣起)의 법칙이니 만물은 원래부터 한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쪽을 해치면 저쪽은 따라서 손해를 보고, 저쪽을 도우면 이쪽도 따라서 이익을 받습니다.
남을 해치면 내가 죽고 남을 도우면 내가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우주의 근본진리를 알면 남을 해치려고 해도 해칠 수가 없습니다.
이 진리를 모르고 자기만 살겠다고 남을 해치며 날뛰는 무리들이여!
참으로 내가 살고 싶거든 남을 도웁시다. 내가 사는 길은 오직 남을 돕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상반된 처지에 있더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침해와 투쟁을 버리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물과 불은 상극된 물체이지만 물과 불을 함께 조화롭게 이용하는데서 우리 생활의 기반이 서게 됩니다.
동생동사(同生同死)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대진리를 하루빨리 깨달아서 모두가 침해의 무기를 버리고 우리의 모든 힘을 상호협조에 경주하여 서로 손을 맞잡고 서로 도우며 힘차게 전진하되 나를 가장 해치는 상대를 제일 먼저 도웁시다. 그러면 평화와 자유로 장엄한 이 낙원에 영원한 행복의 물결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화창한 봄 날 푸른 잔디에
황금빛 꽃사슴 낮잠을 자네.
– 1984년 부처님오신날 법어
[불교신문 2733호/ 7월6일자]
10. 간월도 간월암
Posted by admin on Jul 19, 2011
육지에서 본 간월도. 썰물에는 길이 열리지만 밀물 때는 문자 그대로 수평선이 아득히 펼쳐진 망망대해의 외딴섬이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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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은 1942년 충남 서산 간월도의 만공스님 토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지냈다. 스님은 1941년 예산 수덕사 덕숭총림의 선원인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간월도의 간월암으로 갔다. 간월암은 수덕사 입구에서 23km 떨어진 곳에 있다.
지난 7월5일 간월도를 찾아갔다. 장맛비가 전국을 오르내리며 많은 피해를 입히던 때였다. 집중호우로 전국을 강타하던 장맛비가 잠시 주춤하고 모처럼 햇볕이 쨍쨍하던 날이었다. 날을 잡아도 참 잘 잡았다고 생각했다.
대웅전엔 무학·만공 두 스님의 영정…법당 앞은 망망대해
“간월암은 과거 피안도(彼岸島) 피안사(彼岸寺)로 불리며 밀물 때는 물위에 떠 있는 연못 또는 배와 비슷하다 하여 연화대(蓮花臺) 또는 낙가산(落伽山) 원통대(圓通臺)라 부르기도 했다. 고려말 무학(無學, 1327~1405)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던 중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쳤다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이라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라 하였다.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이 폐사되었던 것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천일기도를 드리고 바로 그 후에 광복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간월암은 밀물과 썰물 때 섬과 육지로 변화되는 보기 드문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주변의 섬들과 어우러진 낙조와 함께 바다위로 달이 떠올랐을 때의 경관이 빼어나다.”
절 입구에 세운 안내판의 글이다.
육지에서 절까지는 100m도 안된다. 필자 일행이 간월도에 갔을 때는 물이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육지 쪽에서 절에 가려면 물이 들어왔을 때는 쪽배를 타고 건넌다고 했다. 쪽배는 해병대 상륙용 보트만한 크기의 뗏목 아래 부기(浮器)를 몇 개 달아 물에 뜨게 한 것이었다.
부기는 어린이 물놀이용으로 쓰는 타이어 튜브 같은 것이었다. 이 쪽배는 15명이 정원이라 했다. 육지에서 간월암이 있는 섬까지 긴 밧줄이 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쪽배를 타고 밧줄을 잡아당기며 배를 앞으로 가게 하여 바닷물을 건너 절에 간다. 물이 빠지면 사람도 차도 다니는 길이 열린다. 그래서 육지와 절이 때로는 물길로, 때로는 걸어서 가는 ‘변화의 길’이라 한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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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대웅전.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홀연히 깨쳤다 하여 붙여진 ‘看月庵’ 현판이 눈에 띈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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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은 대웅전과 요사채로 단출한 암자였다. 법당 앞마당에는 200년 된 사철나무와 그와 맞먹는 수령의 팽나무가 있어 고찰로서의 모습을 일러준다. 이 절은 이름 그대로 토굴이지 대중이 지낼 도량은 아니었다. 대웅전 안에는 무학대사와 만공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법당 앞마당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문자 그대로 수평선이 아득히 펼쳐진 망망대해(茫茫大海)다.
지금 간월암은 중창불사 계획을 널리 알리고 있다. 대웅전 요사채 등 10여 당우(堂宇)를 중창하는 대작불사다. 절로 들어가는 솔밭은 넓은 주차장으로 이미 터를 닦아 찾는 이들이 이용하고 있다.
만공스님이 간월도에 암자를 짓게 된 연유를 알게 하는 글이 본지 2459호(2008년 9월13일자)에 실렸다. 당시 화계사 한주 진암스님(1924~)이 ‘염화실 법향’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서산 간월암은 원래 무학대사가 지어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곳인데 무학대사가 떠나자 양반들이 절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만들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만공스님이 서산군수를 불러서 묘를 이장하고 다시 절을 짓기로 했다. 당시 출가 전 사회경험이 많던 서해(瑞海)스님이 공사를 관리감독하기 위해 파견됐다. 거처할 곳만 만들고 천일기도가 시작됐다.
섬에는 약 40호정도 살았는데 일본말 하는 사람도 없었다. 젊은 사람은 징용에 끌려가고 나이 많은 사람도 보국대로 갔다. 서해스님은 묘안을 냈다. ‘간월암은 일본 천황을 위해 짓는 것이니 절에서 일하는 것도 징용이나 보국대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관공서 사람들을 설득했다. … ‘안면 면사무소에 가서 쌀 7~8가마를 배급 타왔어. 그렇게 서해스님은 언변과 교제술이 좋았어. 그러니까 만공스님이 그에게 절 공사를 맡겼지. 서해스님의 묘안대로 당시 주민들은 간월암 불사에 임하고 배급도 많이 주고 징용에도 안 가게 했지.’”
간월암은 이렇듯 곡절 많은 사연을 지닌 절이다.
이 한적한 외딴 섬에서 생식하며 두 철…
‘무생무위 대안락’ 해탈경계서 우유자재
성철스님이 이 암자에 가게 된 것은 만공스님의 배려라 한다. 당시 성철스님은 생식(生食)을 하고 있었다. 스님이 생식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필자는 잘 모른다. 그러나 스님이 1941년 송광사 삼일암에 갔을 때 입장을 거절당한 이유가 생식하는 수좌였기 때문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수덕사 정혜사 능인선원에 있을 때나 간월암에 있을 때도 여전히 생식했음을 알 수 있다.
정혜사에서 성철스님이 청담스님과 함께 있을 때 청담스님은 성철스님을 위해 손수 솔잎을 따와 말려서 성철스님에게 건넸다고 한다. 청담스님이 도반을 아끼는 자상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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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경내. 200년된 사철나무도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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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여러 수행자가 살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성철스님은 이 한적하고 외딴 섬에서 생식을 하며 두 철을 보냈다. 스님의 이 시절을 필자는 ‘오후보림(悟後保任)의 시절’이라 하고 싶다. 스님은 1940년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동안거 때 오도(悟道)하고 그 이듬해 정혜사에서 동안거를 한 후 간월암으로 거처를 옮겨 1년을 보냈다.
보림(保任)은 무생무위(無生無爲, 남도 없고 함도 없다)인 대안락(大安樂)의 해탈경계에서 우유자재(優遊自在)하는 것이다. 원오 극근(圓悟 克勤, 1063~1135, 중국) 선사는 <심요(心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중(心中)에 일물(一物)도 잔류하지 않으면 직하(直下)에 목석과 같은 무심인(無心人)이 되어서 우치둔올(愚痴鈍兀, 어리석고 우둔)함과 같아 승해(勝解,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 양래(養來)하고 양거(養去)하여(오고감을 잘 다스려) 생사(生死)를 관(觀)하되 심히 무사 한가로움과 같아 문득 조주.남전(南泉)과 덕산.임제와 더불어 동일한 견지(見地)에 서게 되니 간절히 스스로 보림(保任)하여 이 무생무위의 대안락한 경지에 단거(端居, 일상생활) 하느니라.”
또 이르기를 “일념불생(一念不生)하는 심오한 경계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본래면목 즉 자성(自性)을 철견(徹見)하고 무심과 무사(無事)로 장양성태(長養聖胎, 성태를 잘 다스림)하는 것이 불조(佛祖)도 엿볼 수 없는 정안납승(正眼衲僧, 바른 안목을 갖춘 수행승)의 불가사의 한 ‘오후의 보림’이다.”
“오후(悟後)의 수행은 자성을 원증(圓證)하여 구경무심(究竟無心)을 성취한 후에 시작되나니 이는 자재해탈(自在解脫)이며 자재삼매(自在三昧)이다.”
성철스님의 간월암 시기에서 ‘오후보림’을 되새긴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마음의 눈을 떠라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으로 그토록 많지만 마음 심(心)자 한 자에 있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삼세제불을 다 볼 수 있는 것이고 일체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바로 자성을 보는 것이고 견성(見性)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든지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바로 떠야 되는데 그 가장 빠른 길이 화두입니다.
이 화두란 것은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一如)한 경계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거기에서 크게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무슨 경계가 나서 크게 깨친 것 같아도 실제 동정에 일여(動靜一如)하지 못하고 몽중에 일여(夢中一如)하지 못하고 숙면에 일여(熟眠一如) 못하면 화두를 바로 안 것도 아니고 견성도 아니고 마음의 눈을 뜬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근본표준이 어디 있느냐하면 잠들어서도 일여 하느냐 않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부지런히 화두를 참구하여 잠이 꽉 들어서도 크게 살아나고 크게 깨쳐서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 1981년 음력 6월 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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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2737호/ 7월20일자]
11. 법주사 복천암 복천선원
Posted by admin on Aug 11, 2011
속리산 복천암 전경. 조선의 세조가 사흘간 기도하여 난치병이 완치됐다는 이야기도 전하는 유서 깊은 도량이다. 근현대에도 경허 만공 혜월 고봉(高峰) 운봉 효봉 동산 금오 청담스님 등이 다녀간 수행처로 이름이 높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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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이 공양주를 했다.’ 1943년 충북 보은 법주사 복천암 복천선원에서 하안거를 할 때다. 공양주라 하면 절에서는 행자나 신참 납자가 맡는 일로 흔히들 알고 있다. 그런데 오도(悟道)를 한 도인이 공양주를 했다니 언뜻 듣기에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지금의 절 사정에 비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공양주 소임은 사실이다. 필자도 스님의 행적을 좇다 처음 안 일이다. 이 사실은 도우(道雨, 1922~ 2005, 법호는 보봉, 菩峯)스님이 남긴 당신의 책 <도란 무엇인가 如何是道>(2003년 도서출판 화남 刊)에서 밝혀 놓았다.
입승 월현, 경봉, 금포, 현칙, 영천스님 등 모두 8명…
평생 지속한 ‘무염식’ 기록상으로는 이곳이 처음
“…성철스님이 복천암으로 오시어 처음 상봉하였다. 성철스님은 오시자마자 생식을 하셨는데 염분 있는 것은 일체 안 드시기로 하여 부식은 없고 쌀 2홉에 들깨 약간 넣고 맷돌에 갈아서 그것을 물 한 대접에 나눠 잡수셨다. 무나 감자가 생기면 한쪽씩 들깨에 찍어서 먹으니 맛이라고는 없었다. 그해 큰 절 재무 벽산스님이 복천암 선방을 청담스님께 맡기신다고 올라와서 전하니 청담스님께서는 청암 수도암에 계시는 법춘스님을 청해다가 원주를 맡겨야 선방이 잘 될 거라면서 수도암을 갔다 오셨다.
…복천암에 올라와 결제를 하고보니 원주도 공양주도 없는 집안 꼴이 되었다. 당시 대중으로는 입승 월현 노장스님, 경봉 노장스님, 조금포스님, 현칙스님, 영천스님, 성철스님, 나 그리고 부목, 모두 8명이었다.
성철스님께서 자신은 입산하고 나서는 공양주 한번 안 해 보셨다며 생식을 하면서도 15일간을 깔끔하게 공양주 일을 잘 해 마치셨다. 그 다음에는 금포스님께서 나도 스님 되고 나서 조실(祖室) 노릇은 하여도 공양주는 해보지 못하였다 하시면서 자원하시기도 했다. 금포스님은 백용성스님의 법제자이시다. 성철스님이 공양주는 하고나서는 현칙스님이 나머지 결제기간에 공양주를 했다.…”
성철스님의 무염식에 관한 기록은 이때 처음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복천암 시절 무염식 이야기가 나오니 이때부터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이전에 생식 기록으로 보아 무염식도 복천암 앞서의 일로 볼 수도 있다.
무염식(無鹽食)이란 글자 그대로 염분(소금기)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식사다. 스님은 식물(食物) 자체가 갖고 있는 염분 성분의 섭취만으로 식생활을 한 것이다. 스님의 무염식은 이후 평생 지속되었다. 생식을 언제 그쳤는지 알 수 없다.
도우스님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1934년 경북 상주 남장사에서 임제응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40년 문경 김룡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1942년 직지사 천불선원에서의 안거를 시작으로 서울 선학원, 문경 대승사 쌍련선원, 문경 봉암사, 창원 성주사, 합천 해인사 등 여러 선원에서 안거했다.
이 무렵 성철스님과 여러 선원에서 함께 지냈다. 특히 1947년 봉암사 결사 때는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에 참석했고 1954년 봉암사 주지 때는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다. 1962년 경북 선산 도리사 주지를 역임하고 청담스님을 법사로 건당했다. 부석사.고운사 주지, 조계종 감찰원장을 역임하고 1980년 이후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 주석했다. 2005년 세수 84세 법랍 71세로 입적했다.
도우스님은 “성철 큰스님은 법에 있어서는 고불고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태고(太古)스님이나 나옹(懶翁)스님 이후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문 하나를 보아도 완전히 불조(佛祖)에 계합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하던 근래의 명안종사(明眼宗師, 눈 밝은 큰스님)로서는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믿습니다. 제 자신 개인적으로 은혜를 입은 큰스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마음 가운데 일성종자를 심어준 성철스님께 매일 꽃 공양을 올리고 있습니다.”(<古鏡> 여름호)
법주사 복천암은 큰절 입구 수정교를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 문장대 가는 길로 접어들어 3.24km 떨어진 곳에 있다. 신라 성덕왕19(서기 720)년에 창건했다. 본당인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중건한 건물이고 나한전은 1909년 중수했다.
복천암에 있는 ‘속리산 복천선원 복원기념비’(2004년 건립)에는 단기 4309(서기 1976)년 소옹(消翁) 선사가 극락전과 나한전을 시작으로 복원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일타스님이 쓴 ‘속리산 복천선원 사적비’에 의하면 당대 고승 경허 만공 혜월 고봉(高峰) 운봉 효봉 동산 금오 청담 성철 보문 월산 현재(玄財) 영천 서옹 관응스님 등이 다녀갔다고 한다.
‘福泉禪院(복천선원)’이란 현판은 일제 때 주지를 역임한 임환경(林幻鏡)스님의 글씨다.
복천암은 조선 세조가 기도를 올린 유서 깊은 도량이다. 경내에는 큰 바위가 있어 그 속에서 석간수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복천암이라고 한단다. 전설에 의하면 세조가 이곳에서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흘간 기도드리고 병을 완치했다고 한다. 그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욕했다는 목욕소(沐浴沼)가 바로 복천암에 이르는 길목에 있다.
다리 한 쪽에는 ‘이 뭣고’
반대편엔 ‘시심마교’…
선승들의 수도처로 유명
복천암 입구 다리는 그 이름이 ‘이 뭣고 다리’다. 다리 한 쪽에는 ‘이 뭣고 다리’, 그 반대편에는 한자로 ‘是甚橋(시심마교)’라 새겨놓았다. ‘이 뭣고’라는 화두를 다리 이름으로 한 것으로도 복천암 선원이 예부터 선승들의 수도처로 유명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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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암 입구 ‘이뭣고 다리’. 반대편에는 한자로 ‘是甚橋(시심마교)’라 새겨놓았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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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암에서 얻은 큰 수확은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월성스님을 뵙고 그 어른의 말씀을 들은 일이다. 스님은 세수나 법랍을 묻는 데는 답을 않으셨다. “그저 여태까지 살고 있다”는 말씀이 그 대답이었다. 스님이 지금 하고 있는 큰 일이 하나 있다.
그 일은 조선시대 이곳에 머물던 신미(信眉)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간여하여 큰일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었다. 월성스님의 이 대작불사를 스님 뵙기 전에 우리신문(불교신문)의 기사를 통해 알게 된 필자는 스님께 물었다.
신미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에 한 역할을 알고 싶다고 하니 스님은 “시간이 얼마나 있소? 이 이야기 다 들으려면 몇 날 며칠을 해도 모자라요” 했다. 필자는 아차 싶었다. 그래서 “스님, 그 이야기는 다음에 제가 시간을 많이 내어 다시 스님을 뵙고 듣겠습니다”하고 얼른 꽁무니를 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월성스님은 신미스님이 한글창제에 큰 역할을 했으며 그에 관한 온갖 자료를 준비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월성스님은 올 추석 안에 <복천사지(福泉寺誌)>를 엮어낼 계획을 일러주었다. 그 속에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고 했다. “30년 동안 이 일을 했는데도 듣는 사람은 들을 때뿐이었어. 돌아서면 그만 이었어” 스님의 그 말이 복천선원을 떠나는 필자의 뒤통수에 깊이 박혔다.
“… 제 생각으로는 태고(太古)스님이나 나옹(懶翁)스님 이후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문 하나를 보아도 완전히 불조(佛祖)에 계합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하던 근래의 명안종사(明眼宗師)로서는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믿습니다.” - 도우스님(1922~2005)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가
“어떤 도적놈이/나의 가사 장삼을 빌어 입고/부처님을 팔아/자꾸 죄만 짓는가”(云何賊人 假我衣服 販如來 造種種業)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 의복인 가사 장삼을 빌어 입고 승려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 장삼 입고 도를 닦아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활도구로 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에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봐야 하고 근처에는 가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안 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人身難得 佛法難逢).”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 되었으나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제도는 못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그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 곳은 절이 아니고 ‘도적의 소굴(賊窟)’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이 됩니까? 도적놈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적에게 팔려 있으니 도적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의 딱지를 면할 수 있는 승려는 얼마나 되며 또 도적의 소굴을 면할 수 있는 절은 몇이나 되며 도적의 앞잡이를 면할 수 있는 부처님은 몇 분이나 되는지 참으로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승려노릇 잘못하고 공부를 잘못해서 생함지옥(生陷地獄, 산채로 지옥에 떨어지다)할지언정 천추만고의 개벽 이래 가장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 앞잡이를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도적놈 되는 것은 나의 업이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지옥으로 간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지만 부처님까지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어서는 어떻게 살겠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노력해서 이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의 앞잡이가 안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이 모두 바로 살게 하라는 말입니다.
- 1981년 3월1일 <주간한국> 849호 게재 글 발췌. |
[불교신문 2741호/ 8월10일자]
12. 도리사 태조선원
Posted by admin on Aug 2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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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 태조선원. 설선당 왼쪽 한적한 곳에 있다. 창건의 뜻이 깊은 도리사에 선원이 재개원 될 날을 기다리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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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 도리사(桃李寺)의 현주소다. 그러나 우리는 도리사를 얘기할 때는 보통 ‘선산(善山) 도리사’라고 한다. 성철스님은 1943년 이 절 태조선원(太祖禪院)에서 동안거를, 그 이듬해 하안거를 했다.
도리사는 신라불교 최초 가람이다. 도리사에서 펴낸 절 안내 팸플릿과 사찰입구 안내판에는 “묵호자(墨胡子)로 알려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 불교의 공인(公認, 법흥왕 15년)보다 앞서 눌지왕대(417~458)에 신라로 건너와 불교의 포교를 위해 일선군(선산) 모례장자의 집에 머문 바 있다.
실로 신라불교는 아도화상의 전교(傳敎)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는 선산의 태조산에서 오색의 복사꽃이 눈 속에서 피어남을 보고 그 자리에 비로소 절을 창건하니 이가 곧 해동최초 가람 도리사…”라 도리사의 창건을 밝히고 있다.
오도 3년…광복 두해 전 이곳서 두 차례 안거
<삼국유사>에 아도스님에 관한 기록이 있어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연기와 널리 퍼진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우리말 사전에는 아도스님은 중국 진(晉)나라 스님으로 고구려에 귀화하고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도리사 태조선원은 도리사가 있는 산 이름이 태조산이어서 그리 부친 이름인 것 같다. “도리사 선원은 파계사 성전(聖殿), 은해사 운부암, 비슬산 도성암(道成庵)과 더불어 영남 4대 도량의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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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禪院’ 현판글씨는 3ㆍ1운동 민족대표의 한 분인 위창(韋滄) 오세창 선생의 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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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들어 도리사 선원 청규(淸規, 선원의 규율)가 보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본격적인 도리사 선원의 개원은 1930년으로 보아야 한다. 1930년에 도리사 전 주지 이석우(李石牛)스님이 선원을 창설하고 안거대중 20여명을 수용하였다는 <불교>지(일제시대의 잡지)의 기록(제104호)이 그 사정을 잘 보여준다.
선원이 개원되고 1931~1943년 조실 정운봉(鄭雲峰)스님, 선덕 김남화(金南化)스님을 모시고 17~20명 대중이 수선 정진했으며 석우스님은 화주(化主)로서 선원을 외호하였다.
이몽경(李夢耕), 이해산(李海山), 김월호(金月湖), 김영광(金靈光), 박석두(朴石頭), 정의운(鄭義雲), 김만화(金晩華), 유보문(柳普門), 윤관하(尹貫河), 김성월(金聖月), 김성오(金性悟), 김영경(金影耕) 스님 등이 입승으로 활약했다.
1944년에는 이곳 도리사에서 성철스님이 하안거를 지냈다. 1957년 진제(眞際)스님이 태백산 동암(東庵)에서 두 달 동안 홀로 정진하다 도리사로 옮겨와 7~8명의 납자와 동안거를 하며 한 철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선원은 6.25 한국전쟁과 정화운동의 와중에서 폐원된 듯하다. 1975년에 들어 하안거를 맞이하여 주지 법성(法聲)스님의 원력으로 선원을 다시 개원했으나 도리사가 관광사찰이 되면서 일반인들이 많이 드나들어 수행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자 문을 닫게 되었다.”(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 편 <선원총람> 956쪽)
도리사 태조선원을 찾아가던 날. 제9호 태풍 ‘무이파’가 서해안을 비롯하여 전국곳곳을 할퀴고 간 뒤인 8월9일. 태풍은 지나갔다고 해도 국지성 호우라는 이름으로 간간이 소나기가 사납게 퍼붓는 그런 날이었다. 절 근처까지는 흐린 날씨이기는 해도 비는 내리지 않았는데 일주문에 이르자 비가 내렸다.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海東最初伽藍聖地 太祖山 桃李寺)’라는 현판의 일주문.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린 우람한 모양을 자랑하는 일주문은 1993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절까지는 10리도 넘었다(약4.5킬로미터). 일주문이 본당과 이렇듯 멀리 떨어져 있는 절도 도리사에 와서 처음 본데다 일주문 크기도 여느 절과 달라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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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린 우람한 모양의 일주문. 여기서 도리사 본당까지 거리가 약4.5킬로미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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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는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절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여전했다. 여기저기 사진촬영을 할 때도 우산을 받쳤다.
현재의 도리사는 법등(法燈)스님(조계종 호계원장) 주석이후 경역을 넓히고 당우(堂宇)를 건축하여 이름그대로 신라불교초전지로서의 위용을 두루 갖추었다. 극락전,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15평 크기의 건물이다.
17세기에 건립되어 고종12년(1875년) 용해화상(龍海和尙)이 중수하고 이듬해 단청을 올린 도리사 중심 불전이다. 이 극락전을 비롯하여 도리사 석탑, 석가세존사리탑 등 옛날 그대로의 유물에다 도리사 중건 10개년 계획을 세운이래 건립된 삼성각, 수선료, 설선당 등이 있다.
부처님 법 아무리 귀해도 이를 바로 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랴…스님의 심회는 얼마나 깊었을까
불교개혁의 절실함 그 의지가 태동하는 시절
법등스님이 주지를 맡아 1982년 건립된 적멸보궁과 사리탑, 아도화상 존상(尊像)은 사부대중을 비롯한 참배객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태조선원은 설선당 왼쪽 한적한 곳에 있다. 太祖禪院 현판 글씨는 현대의 명필이자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분인 위창(韋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필체다.
사세가 여느 사찰보다 크고 창건의 뜻이 깊은 도리사에 선원이 재개원되지 않고 있는 아쉬움은 크다.
비 내리는 산사(山寺), 비를 맞으며 태조선원 앞에 섰다. 큰 비가 아니라 그냥 맞았다.
성철스님은 당시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때는 일제말기, 우리가 광복을 맞기 두 해 전이다. 스님은 오도이후 3년을 맞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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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건립된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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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가람에서의 도인 성철스님의 심회(心懷)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필자 나름대로 당신의 심중을 헤아려 보았다. 이 절이 갖는 한국불교사에서의 위상을, 그리고 아도화상의 전법륜(轉法輪) 의지, 부처님 법이 아무리 높고 귀해도 이를 바르게 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랴 하는 생각을 필자는 새삼 가져 보았다. 여기에 오면 시원찮은 공부를 한 필자도 여러 생각이 오고가는데 하물며 도인 성철스님의 심회는 얼마나 깊었을까.
필자는 스님의 도리사 시절을 ‘전법륜의 큰 틀’을 구상한 기간이라 자리매김하고 싶다. 아도화상이 신라 땅에 부처님 법을 전한 뜻 그대로 스님은 당신의 불법 전파의 큰 뜻을 이곳에서 구상했다고 본다. 이는 스님의 다음 행적에서 유추한 것이다. 스님은 도리사를 떠나 경북 문경 대승사로 갔다. 거기서 스님은 도반 청담스님과 우리 불교의 앞날, 종단의 미래를 두고 깊은 논의를 한다.
“… 두 분은 밤을 새면서 이야기해도 다함이 없었겠지요. 대승사에서는 두 분이 해인사에 가서 총림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영산도를 그리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 이 말법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재현을 해보자고 하셨지요.
…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속에서 풍기는 것을 남한테 보여줄 수 있는, 말 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이런 중노릇을 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쌍련선원에서 하셨어요.
… 두 분이 얘기를 하는데 무슨 도표 같은 것을 의논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중국 총림의 도표이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율원을 하고, 율원을 하는 데는 누구누구다, 사람도 배치하고 하시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두 분의 뜻이 같았기 때문에 두 분은 시종(始終) 변화가 없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경>에서 묘엄스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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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화상의 존상. 참배객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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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성철스님의 평생 의지는 이후 봉암사 결사로 그 실현을 대중 앞에 처음 드러냈다. 스님은 일제치하에서 허물어져가는 불교의 정황을 깊이 보고 파악했다. 또한 청정승가 수행가풍의 확립 의지도 불태웠다. 불교개혁의 절실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게다가 도반 청담스님이 있었다. 두 분의 의기투합의 결실은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았다. 그 의지의 태동이 도리사 시절이었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부처님 法으로 돌아갑시다
부처님 법(法)으로 돌아갑시다. 삼계의 도사(導師)이시며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은 불교 만대의 표준입니다. 무상대지(無上大智)와 무애혜안(無碍慧眼)으로 통찰하여 제정하신 숭고하고도 장엄한 부처님의 법은 참으로 삼계의 지침이며 사생의 등불이니 불자의 절대적 의지처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제도도 부처님 법에 위배되는 것은 불교의 반역이며 파괴이니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교단내에 부처님 법에 어긋난 점이 있다면 이를 단연코 시정하여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 불자입니다.
청정한 계율을 견지하여 훼범(毁犯)하지 말라고 하신 부처님의 최후 유촉은 불교의 생명입니다. 승려가 될 때에는 반드시 계법(戒法)을 수지(受持)하여 이를 훼범하면 자격을 상실함은 불교의 영원한 철칙입니다. 과거 수천년간 우리 불교는 철석같은 계율의 기반위에서 크게 융성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불교의 성쇠(盛衰)는 승려의 지계(持戒) 여하(如何)에 달려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불교를 파괴하는 식민정책으로 승려의 대처(帶妻)를 권장하여 대처중(帶妻衆)이 교단을 지배하여 우리 불교사상 일대 오점을 남겼습니다.
광복후 산간에 칩거하던 비구스님들이 분연히 궐기하여 정화불사(淨化佛事)를 일으켜 부처님의 율법을 회복하여 청정비구로서 교단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이 정화가 성공한 근본요인은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교단의 내외가 일제히 호응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처님 법에 어긋난 행동이었다면 정화불사는 실패하였을 것이며 앞으로도 어떠한 불사든지 부처님 법에 어긋난다면 그러한 행동은 교단 내외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할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청정의 기치를 높이들었던 정화불사가 엊그제인데 승단의 극히 일부에서 청정한 계율을 문란케 하는 일이 있다하니 크게 우려치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시대에 와서 계율이 침해되어 교단이 쇠퇴하게 된다면 우리는 부처님 앞에 크나큰 죄인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니 우리는 교단내의 율법에 위배된 점을 철저히 구명(究明)하여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교단이 유지되고 발전할 것이요 그러지 못하면 교단이 쇠퇴의 길로 들어 설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입니다. 이는 우리 교단의 사활(死活)문제이니 오직 정법(正法)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않는 용맹 신심으로 대동단결하여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 이 땅위에 불교를 영원히 꽃피게 합시다.
- 종정교시(宗正敎示) 198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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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2745호/ 8월24일자]
13. 대승사 대승선원
Posted by admin on Sep 14, 2011
대승사 선원인 쌍련선원은 대웅전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선원 정면에는 월산스님이 쓴 ‘大乘禪院(대승선원)’이란 현판이 있다. 대승사 대승선원 전경. 김형주 기자 |
성철스님은 1944년 동안거와 이듬해 1945년 하안거를 경북 문경 대승사(大乘寺) 쌍련선원(雙蓮禪院)에서 지냈다. 지금은 대승선원이라 한다. 여기서는 평생도반 청담스님과 같이 있었다. 스님은 당신 도반의 둘째 딸을 이때 발심 출가시켰다. 1945년 단오날이었다.
“나는 (계를 설하기 위해)법상에 안 올라가는 사람인데, 순호스님(청담스님을 당시엔 순호스님이라 했다) 딸이니까 내 딱 한번 사미니계를 설한다.” 법상에 오른 성철스님은 청담스님 딸 인순이를 앉혀놓고 계를 설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이 명(命)과 목숨이 다하도록 일생동안 산목숨을 죽이지 말 것이니, 능히 이를 지키겠느냐?” “능지(能持, 능히 지키겠습니다)”
한국 최초 비구니강사 묘엄스님
선지식으로 우뚝 서
이렇게 5계와 10계를 다 설한 후 성철스님은 “이제 그대는 사미니가 되었으니 법명은 묘할 묘(妙)자, 장엄할 엄(嚴)자, 묘엄이라 할 것이다.” 이때 인순의 나이 14살. 현대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巨木) 묘엄스님은 이렇게 스님이 되었다.
묘엄스님은 지금 수원 봉녕사(奉寧寺)에 주석하고 있다. 봉녕사 주지이자 봉녕사승가대학 학장을 거쳐 종단의 품계(品階)로는 비구의 대종사에 해당하는 명사(明師)인 이 시대의 선지식이다.
묘엄스님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낸 작가 윤청광(尹靑光)은 <회색고무신>으로 이름한 이 책에서 이렇게 써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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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엄스님. |
“일제시대의 움츠러들고 변질된 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열반에 드는 순간까지 불교정화를 외치던 청담스님. 그는 노모(老母)의 원을 들어주기 위해 하룻밤의 파계를 행한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딸은 그 출생의 사연 때문인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일제치하, 정신대(지금은 일본군 종군위안부라 부른다)에 가지 않기 위해 딸은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생의 큰 스승을 만나게 된다. 친구의 딸에게 불교, 역사, 교양 등을 손수 가르쳐주고 ‘묘엄’이라는 법명을 내려준 성철스님. 딸은 아버지 청담스님과 스승 성철스님의 바람대로 우리나라 비구니계를 바로 세우고 비구니들의 스승이 되기 위한 고된 수행길에 나선다.
청담스님, 성철스님뿐만 아니라 경봉스님, 운허스님, 동산스님, 효봉스님, 향곡스님, 자운스님 등 내로라하는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딸은 한국 최초의 비구니강사가 된다. 그 후 딸은 동학사, 운문사에서 비구니강원을 이끌었으며 지금은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으로서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뿌리가 되었다.”
<회색고무신>은 청담스님의 딸, 성철스님이 제자인 묘엄스님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스님의 딸로 태어나 오늘날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큰 스승이 된 묘엄스님은 어쩌면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남긴 가장 큰 사리가 아닐까.” (<회색고무신> 2002년 시공사 刊)
하늘에서 네 부처님이 내려오고
땅에선 쌍으로 된 연꽃이 솟아오르는 곳…
책 인용이 길었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어서다. 이 책은 한 여성수행자의 일대기면서 한국불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의 도반으로서의 일생과 당신들의 행적을 후학에게 되새기게 하려는 필자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대승사에서의 성철스님의 행적이 갖는 의미 가운데서 ‘묘엄스님의 출가’ 이야기는 그만큼 의의가 크지 않을 수 없다.
대승사 가던 날, 지난 8월23일이었다. 그날이 절기로는 처서(處暑)였다. 참 무서운 게 절기였다. 더위가 물러난다는 처서. 정말 그랬다. 부산서 시외버스로 3시간40분이 걸리는 문경터미널에 한낮에 도착했다. 한적한 시골버스정류장. 한낮인데도 언제 그렇게 더웠느냐는 듯 바람이 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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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사 대웅전 전경. |
끊임없이 울어쌓는 매미소리만 아니라면 버스정류장은 마냥 조용하리라 여겨졌다. 대합실에 앉은 한 할머니는 차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시원한 바람을 쐬러 산책 나온 모습으로 간혹 조는 듯도 했다.
문경에서 대승사까지는 승용차로 약30분 거리.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8번지. 사불산(四佛山) 대승사는 제8교구본사 직지사 말사다. 사불산은 소백산맥을 관통하는 죽령 서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북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오른쪽 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높이 올라가면 해발 600미터 산마루에 뛰어난 풍광을 지닌 절이 있다. 대승사다.
신라 진평왕대인 587년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공덕봉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왕이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법화경>을 열심히 읽는 이름 없는 비구를 주지로 앉혀 사면석불에 공양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설화다.
6ㆍ25전쟁 화재 등으로 문 여닫기 수차례 거듭
1995년 ‘대승선원’으로
재개원하면서 수선납자 모여들기 시작
임진왜란 때 전소(全燒)된 후 조선말까지 몇 차례 중수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대승사에는 유일강원이 개설되어 근현대사에서 석학으로 칭송받는 권상로, 안진호 등이 대승사에 적(籍)을 두었으며 전국 13도에서도 가장 우수한 학인들이 모였다고 한다. 1928년 “선원과 강원을 영구히 개설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있다. 일제시대에 대승사에는 선원.강원.염불원까지 있어 오늘날의 총림을 연상케 해준다.
대승사 선원인 쌍련선원은 대웅전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현대의 명필 시암(是菴) 배길기(裵吉基) 선생은 ‘天降四佛 地聳雙蓮(천강사불 지용쌍련, 하늘에서 네 부처님이 내려오고 땅에서 쌍으로 된 연꽃이 솟아올랐다)’이라는 현판을 각각 특유의 필체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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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降四佛 地聳雙蓮(천강사불 지용쌍련)’이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
선원 정면에는 월산(月山)스님이 쓴 대승선원(大乘禪院)이란 현판이 있다. 묘엄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쌍련선원에는 아버지 순호스님과 성철스님을 비롯해서 청안스님, 성수스님, 자운스님, 홍경스님, 우봉스님, 정영스님, 법응스님, 성오스님 등 20여분의 스님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1950년 6.25한국전쟁 이후 선원의 문은 오랫동안 닫혀 있었다. 현재 대승사의 기록에는 1960년대 안타까운 화재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1982년 선문이 다시 열렸다. 1985년에는 법달(法達)스님이 선원장으로 들어서서 대중들과 수선(修禪)했으며, 그 다음해인 1986년 월산스님이 조실을 맡아 대중들과 1년간 정진했지만 이후 선원은 한동안 운영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5년 조실 월산스님이 대승선원이란 이름으로 대웅전 옆 당우에 선원을 다시 개원하여 많은 수선 납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서슬퍼런 가풍이 살아 움직이는 대표적 선도량으로서의 면목을 과시하고 있다.
현재 대승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 극락전, 응진전, 선원, 요사채가 있으며 한쪽 외진 곳에 총지암을 새로 지어 선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 주지 철산(鐵山) 탄공(呑空)스님은 ‘부지런하기로 유명한 스님’이라 불린다고 한다. 일주문 옆에 도자기 굽는 가마를 만들어 템플스테이 때 도자기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산약초도 재배한다. 도량도 대작불사를 일구어 새 당우도 깨끗하고 훤칠하게 건립해 놓았다.
올 하안거에는 선방에서 27명의 수선납자가 정진했다고 한다. ‘숲이 짙으면 호랑이가 깃든다’고 했다. 쌍련선원에서 눈 밝은 납자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생명의 참모습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둥근 햇빛보다 더 밝고 푸른 허공보다 더 깨끗하여 항상 때 묻지 않습니다.
악하다 천하다 함은 겉보기일 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며 숭고합니다. 그러므로 천하게 보이는 파리, 개미나 악하게 날뛰는 이리, 호랑이를 부처님과 같이 존경해야 하거늘 하물며 같은 무리인 사람들끼리는 더 말할 것 없습니다.
살인 강도 등 악한 죄인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할 때 비로소 생명의 참모습을 알고 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광대한 우주를 두루 보아도 부처님 존재 아님이 없으며 부처님 나라 아님이 없어서 모든 불행은 자취도 찾아 볼 수 업고 오직 영원한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서로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 1981년 부처님오신날 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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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2751호/ 9월14일자]
14. 대승사 : 책을 기증받는 인연을 만나다
Posted by admin on Oct 4, 2011
김병룡 거사로부터 귀중한 장서를 받은 성철스님은 당시 해인사 백련암 경내에 장경각을 새로 지어 보관하며 대출은 철저히 금했다. 대신 책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절에서 재워주며 공부를 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사진은 장경각을 헐고 새로 지은 백련암 법당안의 서가(書架).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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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이 문경 대승사에 머물 시절, 스님은 또 하나의 획기적인 인연을 맺었다. 스님이 평생 간직한 책을 갖게 된 기연이 바로 대승사에서 싹튼 것이다. 스님은 참선수행자에게는 ‘책을 읽지 말라’고 엄하게 일러오셨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어느 불교학자나 어느 스님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말한다. 장서도 많았다.
스님들에겐 절대로 책을 주지 않겠다던 ‘金 거사’
‘유식학 강론’에 이은 심도 있는 대화와 신뢰 끝
성철스님에게 모두 기증
출가하고서도 스님은 다른 스님들로부터 ‘철 수좌는 팔만대장경을 바로 외고 거꾸로 왼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런 스님이 참선 공부하는 불자들에게는 ‘책을 읽지 말라’고 했으니 언뜻 들으면 모순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스님의 이 가르침은 지극한 도(至道)는 언어나 문자에 있지 않음을 일러준 말임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스님의 장서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자.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이 대승사에서 함께 수행할 때 주지는 김낙순스님이었다. 어느 날 주지 스님이 청담스님에게 말했다.
“내게 친척이 되는 김병룡(金秉龍) 거사라는 분이 있는데 서울에 삽니다. 경전에도 밝고 어록에도 밝다 합니다. 그분은 돈 많은 부자라서 불교책을 많이 모았다고 합니다. 대장경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발간된 선어록 등 3000여권의 불교관련 책과 목판본도 갖고 있답니다. 그분은 충주에 살던 천석꾼인데 불교에 심취했던 아버지로부터 불교책을 물려받은 데다 자기가 또 모았답니다. 그런데 중한테는 자기의 책을 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스님께서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청담스님은 주지 스님의 말을 성철스님에게 전했다. 성철스님은 “그렇게 불교공부를 많이 한 거사가 있나. 책을 그리도 많이 갖고 있고. 그런데 뭐라? 중한테는 절대로 책을 안 주겠다고?” 스님은 호기심에다 오기까지 일어 그 거사를 만나기로 하고 서울로 갔다.
김 거사와 성철스님은 서로 만나 불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당시의 이야기를 성철스님이 시자 원택스님에게 한 말이 있다.
“김 거사가 보기 드물게 경전을 많이 읽었고 특히 반야경전에 달통했더구만. 그 사람이 유식학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해. 그래서 내가 말했지. ‘거사가 아는 불교이야기는 어지간히 했소?’ 하니 ‘그렇습니다’ 카는 거야. 내 차례다 싶어 유식학에 대해 한참 얘기했제. 자기도 잘 모르는 유식학을 강론하니 귀가 번쩍 뜨였던 모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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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지보(法界之寶)’. 성철스님은 김 거사에게 받은 장서에 일일이 이 글자를
새긴 도장(오른쪽)을 찍었다. 스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온누리의 보배’로 귀하게 간직하고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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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글은 원택스님이 쓴 <성철스님 시봉이야기2>에서 인용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김 거사가 ‘중에게는 책을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필자가 다른데서 들은 얘기다. 그 다른데서 들은 이야기를 보자.
스님과 김 거사는 이후 여러 번 만났다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스님과 김 거사는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갔다고 한다.
그날도 두 분은 만났다. 그 자리는 이미 두 분의 신뢰가 쌓인 후라 김 거사는 ‘이 스님 같으면 내 책을 전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테고 스님도 이쯤이면 내 할 말을 해야겠다고 작심했을 때였다.
전과 같이 불교이야기를 나눈 후 잠깐 뜸을 들이고 난 뒤 스님이 말했다.
“김 거사, 당신이 갖고 있는 책은 중한테는 절대로 안준다고 했다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스님은 “그거 참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님은 “그런데 나도 중인데 나한테도 그 책을 주지 않겠소?” 했다. 그랬더니 김 거사는 “스님이시라면 다 드리겠습니다”했다고 한다.
‘시봉이야기’의 글과 필자가 들은 이야기가 약간 다르기는 하나 공통점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책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책을 자기보다 더 잘 지닐 사람을 찾기 마련이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갖고 싶은 마음을 갖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갖든 누가 갖든 그 책이 오래남아 여러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 하려는 마음이 있다.
현재 해인사 백련암에는 스님의 책이 간직돼 있다. 최근 원택스님은 필자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일러주었다. 책 정리를 하다가 당시의 기록을 찾았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스님이 김 거사에게 책을 받을 때가 ‘응화(應化) 2974년 정해(丁亥) 9월’이라는 것이다. 응화 2974년 정해이면 당시에는 불기(佛紀)를 2900년대를 쓸 때이니까 서기로는 1947년이 된다.
이 기록에는 또한 ‘증여인(贈與人) 김병룡(金秉龍), 영수인(領收人) 성철’로 쓰여 있다고 했다. 원택스님은 이로써 시봉일기에 ‘방대한 장서’ 제목으로 쓴 글에서 “성철스님이 방대한 장서를 갖게 된 것은 경남 양산 내원사에 머물 무렵이다”라는 문장에 자세한 설명이 더해져야 한다고 필자에게 일깨워주었다.
다시 말하면 책을 인수한 시기는 1947년 9월이니까 그때 스님은 경북 문경 봉암사결사에 들어갈 때였다. 내원암에 머문 시기는 1947년 하안거였다.
성철스님, ‘장경각’ 지어 ‘법계의 보물’ 같이 활용
절 밖 대출 금지하면서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재워주고 먹여주며 보게 해
스님이 김 거사의 책을 인수한 이후 스님의 장서는 해를 거듭하면서 숫자와 내용을 더해갔다. 필자가 해인사 백련암을 출가했을 당시 백련암 염화실 앞에는 ‘장경각(藏經閣)’이라는 현판이 걸린 당우가 한 채 있었다.
스님은 당신의 장서를 집 한 채를 지어 모두 모셔 놓았다. 시멘트로 된 이 건물은 좌우로 창을 냈는데 쇠창살에다가 철문이었다. 출입문 역시 철문이었다. 지금은 장경각을 헐어 없애고 새로 지은 법당에 스님 책을 모셔놓았다.
스님의 장서이야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스님은 당신의 장서에 도장을 책마다 다 찍었다. 헌데 그 도장문구가 독특하다. 여느 장서가라면 ‘OO소장’식으로 도장에 새길 텐데 스님은 그러지 않았다. 스님이 책에 찍은 도장은 ‘법계지보(法界之寶)’. 즉 ’법계의 보물‘이란 뜻이다. 내가 갖고 있는 이 책들은 온누리의 보배라는 말이다.
그만큼 지중한 것이며 또한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하나 더 독특한 것이 있다. 스님은 당신의 책을 어느 누구에게 빌려주어 절 밖으로 나가게 하지 않았다. 요즘말로 이를테면 ‘관외대출’은 절대 금지였다.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내게 오라. 책을 볼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겠다. 그러나 절 밖으로 갖고 가서는 안된다’는 철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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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각’ 현판. 지금은 법당 서가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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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스님을 모시고 백련암에 살 때다. 1960년대 말인지 1970년대 초반인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 한 청년이 백련암에 와서 스님을 친견했다. 그 청년이 가고난 뒤 스님이 필자에게 한 말이다.
“그놈 참 재밌는 놈이데. 내가 책 자랑을 하고 이 책은 절대로 밖으로 못나가게 한다고 하니까 그럼 밖으로 나가게 하려면 어찌하면 됩니까 하기에 내 죽고 나면 그 때는 모르지 했지, 그러니까 그놈이 뭐라 캤는지 아나? 그렇다면 스님께서 얼른 돌아가셔야 하겠습니다 안 카나. 글 마 참 재밌제.”
그 때 그 청년이 오늘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이다. 지금은 어디에서 그분이 이 글을 볼지 모르겠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정진(精進)
모든 육도만행(六度萬行)은 그 목적이 생사해탈(生死解脫) 즉 성불에 있으니 성불의 바른 길인 참선에 정진하지 않으면 이는 고행외도(苦行外徒)에 불과하다.
정진은 일상(日常)과 몽중(夢中)과 숙면(熟眠)에 일여(一如)되어야 조금 상응(相應)함이 있으니 잠시라도 화두(話頭)에 간단(間斷)이 있으면 아니된다.
정진은 필사(必死)의 노력이 필수조건이니 등한(等閒).방일(放逸)하면 미래겁이 다하여도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못하나니 다음의 조항을 엄수하여야 한다.
-. 4시간이상 자지 않는다.
-. 벙어리같이 지내며 잡담하지 않는다.
-. 문맹같이 일체 문자를 보지 않는다.
-. 포식ㆍ간식하지 않는다.
-. 적당한 노동을 한다. [수도8계(修道八戒) 중에서] |
[불교신문 2754호/ 9월28일자]
15. 대승사 묘적암
Posted by admin on Oct 21, 2011
사불산 묘적암. 성철스님은 1945년 동안거를 이곳에서 지냈다. 차에서 내려 돌계단을 스무 개 남짓 걸어 올라가면 일주문이 있다. 현판은 불이문. 작지만 고풍스런 품격의 일주문을 지나면 법당 한 채, 요사채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김형주 기자
성철스님은 1945년 동안거를 대승사 암자인 묘적암(妙寂庵)에서 지냈다. 이 해는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8.15광복을 맞은 해다. 스님은 큰절 대승사에서 산내 암자인 묘적암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서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한 구상을 깊게 했다.
일본은 한국을 강제점령한 후 불교계를 그릇치고 비뚤어지게 했다. 독신출가 수행이 근본인 한국불교를 자기네 마음대로 승려의 결혼을 강제하고 절간에서 처자식을 기르는 등으로 수행공간을 훼손시켰으며 육식을 하는 등 막행막식의 풍토를 조성했다.
일제치하에서 왜색불교의 병폐를 너무나 절감한 스님은 광복 후 우리불교의 청정승가 수행을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 방안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성숙시켜나갔다. 스님의 이 구상은 1947년 봉암사결사에서 하나하나 드러나게 된다.
법당 한 채·요사채 한 채 ‘침묵이 곧 우레(一如雷)’
‘가장 완벽하고 높은 경지’ 실현하는 도량(妙寂庵)
고려말 나옹스님 출가사찰 백련암 입구와 너무나 닮아…
묘적암은 창건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라 말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 나옹(懶翁)스님이 출가한 절로 유명하다. 나옹스님(1320~1376)은 경북 영해(寧海, 현재 경북 영덕군 창수면) 출신이다.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이며 당호는 강월헌(江月軒). 불명은 혜근(惠勤)이며 속성은 아(牙)씨다.
나옹스님은 20세 때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어른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비통한 생각을 품고 공덕산(功德山, 지금의 사불산) 묘적암으로 와 요연(了然)화상에게서 스님이 되었다.
나옹스님이 처음 요연스님을 찾아 스님이 되기를 청하였을 때 요연스님이 물었다. “여기 온 것이 무슨 물건이냐?” 나옹스님은 “말하고 듣는 것이 왔거니와 보려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나이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나이까” 하니 요연스님이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께 가서 물어라”고 했다. 뒷날 나옹스님이 도를 깨닫고 다시 이 절로 돌아와서 회목 42그루를 심었으며 나옹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절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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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적암 법당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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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스님으로 인해 이 묘적암은 조선후기까지 불교의 한 성지(聖地)로 부각되었다. 1668년 성일(性日)스님이 중건하였고 1900년 취원(就圓)스님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묘적암. 큰절에서 약 1.5㎞ 거리다. 가파른 산길인데 차 2대가 마주 스쳐지나가기도 힘든 좁은 길이다. 오르막 내리막 굴곡이 심하여 길이 났다고 해도 차를 타고 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큰절 대승사 총무국장 현광(玄光)스님이 자기 차로 앞장서서 암자에 이르는 길을 안내했다.
묘적암 입구에 서니 꼭 해인사 백련암 입구와 형상이 많이 닮아 이름난 수행처는 이런가 싶었다. 차에서 내려 돌계단을 스무 개 남짓 걸어 올라가니 묘적암 일주문이 있었다. 그 일주문, 불이문이라는 현판이었다.
또한 백련암 일주문과 너무 닮았다. 옛 산중 깊은 곳 암자 일주문은 이런 형태로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고풍스런 품격의 일주문을 지나니 작은 마당이었다. 법당 한 채, 요사채 한 채. 중수이후 손을 보지 않은 듯 고색창연했다.
이 작은 공간, 작은 법당 그보다 더 작은 요사채가 있는 이 암자는 여러 명이 공부하기엔 힘든 그런 공간이었다. 도회지의 웬만한 집도 이보다는 크지 싶었다. 절을 지키는 스님도 출타하고 없었다. 빈집 같았다.
마침 법당 안에서 젊은 부부가 나왔다. 절을 얼마나 했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부부가 절을 나간 후 법당에 참배했다. 법당 옆에 조그만 방이 있었다. 마치 선방의 지대방 같은 곳이었다. 그곳이 이곳 스님의 거처인 듯 했다.
요사채 벽에 있는 일묵여뢰(一如雷, 침묵이 곧 우레)라는 현판이 눈에 띄었다. 진주의 명필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선생의 필체다. ‘정사(丁巳) 하(夏)’라고 쓴 것을 보아 그분이 1977년 여름에 이 문구를 쓴 것으로 알 수 있다. ‘침묵이 우레와 같다’는 이 말이야말로 이 암자 이름인 ‘묘적’과 정말로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해방 후 왜색불교병폐 절감…나라 앞날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깊고 무거운 고뇌 속에서 보냈으리라 …
이곳에서 정진하고 있는 영진스님. 그는 출가한지 40년 된 구참이라 한다. 영진스님은 지난 4월말 불교신문 인터뷰에서 묘적암을 이렇게 말했다.
“불교에서 묘(妙)라는 글자는 ‘가장 뛰어나다, 깊다,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불교에서 대승(大乘)의 지극(至極)을 이르는 말, <법화경>에서도 묘(妙)는 가장 완벽한 글자이지요. 또 적(寂)은 적멸, 열반과 같이 형상적으로 보면 ‘주변이 고요하다’는 뜻이지만 ‘가장 높은 경지’를 일컫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암자는 ‘묘와 적을 실현하는 도량’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묘적암, 언제나 이렇듯 조용하고 적적할까. 여기 사는 스님은 이 깊고 고요한 절에서 어찌 지낼까. 끼니는 어찌 꾸려나갈까를 생각하는 것은 속인의 어리석은 마음일까.
출가수행자는 이런 묘적의 공간에서도 자신의 길을 닦아나가고 시장바닥 같은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 동과 정(動靜)에서 변치 않는 항상심을 지니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일체경계에 무심, 일체(一切)에 무심(無心)이 수행자가 추구하는 곳이라는 말일까.
성철스님이 묘적암에서 지낼 때 생식(生食)을 했음도 짐작할만하다. 출가수행자나 재가불자나 가릴 것 없이 끼니를 때우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다. 절에서는 그래서 각자 소임이 있다. 밥 짓는 공양주, 찬 만드는 채공 등이 후원 공양간에서 수행자의 공양을 맡는다.
그러기에 선방 수좌나 강원 학인을 비롯한 스님들은 각자 자기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 공부하다가 때가 되면 공양하면 된다.
묘적암처럼 공양간을 차리기도 힘든 공간에서는 먹는 일이 여간 아니다. 어쩌면 성철스님도 그래서 생식했나보다. 먹는 일에 끄달리지 않고 수행할 수 있음이 생식의 장점이다. 그러나 생식이라 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느 스님, 누구라고 말하면 웬만한 불자는 다 아는 스님이다. 그 스님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철 큰스님이 생식하신다고 해서 나도 해 보았어요. 그런데 생쌀을 그냥 씹어 먹으려니까 이도 아프고 잘 씹히지도 않고 해서 큰스님께 물었어요. ‘스님, 생식은 어찌 합니까’ 스님은 ‘그래, 생식한다꼬 생쌀 씹어 묵었나. 허허, 그라모 안되지. 쌀을 물에 불려놓았다가 꼭꼭 씹어 묵어야지’ 그러셨어요. 생식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광복을 맞은 우리나라. 이른바 해방공간에서 성철스님은 묘적암, 그 고요하고 깊은 산중암자에서 무슨 구상을 그리 깊게 했을까. 한국불교의 앞날, 나아가 해방된 나라의 앞날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깊고 무겁게 보냈으리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 시대의 격변기에서 진리를 체득한 선지식으로서 스님의 구상은 그 이후로 크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고행(苦行)
병(病) 가운데 제일 큰 병은 게으름 병이다. 모든 죄악과 타락과 실패는 게으름에서 온다. 게으름은 편하려는 것을 의미하니 그것은 죄악의 근본이다. 결국은 없어지고 마는 이 살덩어리 하나 편하게 해 주려고 온갖 죄악을 다 짓는 것이다.
노력 없는 성공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대성공자는 대노력가가 아님이 없다. 그리고 이 육체를 이겨내는 그 정도만큼 성공이 커지는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이 말했다. “나의 발명은 모두 노력에 있다. 나는 날마다 20시간 노력하여 연구했다. 그렇게 30년간 계속 하였으나 한 번도 괴로운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의 정법이 두타제일(頭陀第一)인 가섭존자에게로 오지 않았는가. 총림을 창설해서 만고에 규범을 세운 백장(百丈)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하지 않았는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편히만 지내려는 생각, 이러한 썩은 생각으로서는 절대로 대도(大道)는 성취하지 못한다. 땀 흘리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남의 밥 먹고 내 일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서는 만사불성(萬事不成)이다.
예부터 말하기를 차라리 뜨거운 쇠로 몸을 감을지언정 신심 있는 신도의 의복을 받지 말며 뜨거운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인(信心人)의 음식을 얻어먹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결심 없이는 대도는 성취하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잊지 말고 잊지 말자.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만고 철칙을!
오직 영원한 대자유를 위해 모든 고로(苦勞)를 참고 이겨야 한다.
- 수도8계(修道八戒) 중에서 |
[불교신문 2758호/ 10월12일자]
16. 희양산 봉암사 (상)
Posted by admin on Nov 1, 2011
봉암사 가는 길로 들어서다. 보면 정면 멀리 원추형으로 생긴 흰 바위 봉우리가 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우람한 봉우리 전체가 화강암이어서 나무나 풀이 붙어있지 못한다. 한국의 산악 중에서 이런 형태의 봉우리는 유일하다고 한다. 이곳에 근대선원이 처음 개원된 것은 1947년이라 한다. 아래 작은 사진은 가까이서 본 선원 모습. 희양산 봉암사(曦陽山太古禪院)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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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봉암사(曦陽山 鳳巖寺)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길 313이 현주소다. 점촌에서는 자동차로 20여분 결린다. 성철스님은 1947년 동안거 때 이 절에 와서 이른바 ‘봉암사 결사’에 들어갔다. 봉암사는 신라 말 지선(智詵, 824~882, 智證大師, 호 道憲)스님에 의해 창건되었고 고려 초 긍양(兢讓, 878~956)스님에 의해 다시 창건되면서 희양산파(曦陽山派,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의 중심 사원이 되었다.
고려 초 광종의 칙령에 의해 부동사원으로 지정되고 고려 중기 원진국사, 고려 말 원증국사가 주석한 사원으로 유명하다. 조선 초에는 함허 득통스님이 주석하여 배불론(排佛論)에 맞서는 현정론(顯正論)을 폈다. 현대에는 조계종의 혁신운동인 봉암사 결사운동의 발상지로서 조계종 특별수도원(종립선원)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신라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봉암사의 위상은 각 시기마다 사상사에서 주목되고 있다.(문경시에서 펴낸 <희양산 봉암사>에서 인용)
희양산은 태백산맥이 태백산을 거쳐 남쪽으로 곧게 뻗어 내려오다가 갈지(之)자로 꺾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봉암사 가는 길로 들어서다 보면 정면 멀리 원추형으로 생긴 흰 바위 봉우리가 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우람한 봉우리 전체가 화강암이어서 나무나 풀이 붙어있지 못한다.
한국의 산악 경관 중에서 이런 형태의 봉우리는 유일하다고 한다. 이 화강암 바위는 하늘로 치고 올라가는 형상이어서 ‘마치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내달리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봉우리 아래 너른 터에 봉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봉암사에 들어서면 드세고 기가 센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유서 깊은 도량에 근대선원이 처음 개원된 것은 1947년이라 한다.(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편 <선원총람>)
1947년 ‘근대 선원’ 개원…6·25 한국전쟁으로 와해
서암스님 등 원력 힘입어 1970년 수좌들 모여들어
1982년부터 일반인 출입제한…종립특별선원으로 우뚝 서
봉암사 결사로 선원이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봉암사 결사도 1950년 6?5한국전쟁으로 인해 와해되고 그 후 봉암사는 날로 황폐되었다. 1970년 초부터 공부하는 수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전 종정 서암(西庵)스님(1917~2003)의 원력이 있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했다. 봉암사는 1982년부터 지금까지도 산문을 폐쇄해 일반인·등산객·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오신날은 개방한다.
당시 산문폐쇄의 발단이 되었던 정황을 알아본다.
봉암사 태고선원(太古禪院, 1990년 이전엔 희양선원)에는 안거기간 외에도 선승들이 항상 머물며 여법히 정진한다. 1982년 하안거 때 많은 수좌들이 용맹정진하고 있었다. 행락객들이 봉암사 계곡으로 몰려왔다. 사찰경내인 마애불 옆에서 텐트를 치고 숙박과 취사를 했다. 스님들은 이들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곤 했지만 행락객의 그런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선방 스님들은 대중공사를 통해 일반인의 출입을 삼가는 전문수도원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적극 개진했다. 스님들은 사찰의 관광화로 인해 수행환경의 폐해가 심각해 질 것을 감안해 선수행 결사의 성지인 봉암사만이라도 교단의 전문수도원으로 설립해야 한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산문을 닫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자는 의견이 공론으로 채택된 것이다.
결의된 내용을 대중대표 스님들이 당시 종정인 성철스님에게 상세히 말씀드렸다. 성철스님은 대중의 뜻을 치하하면서 1947년부터 실시했던 봉암사 결사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일이 원만히 성사되는데 큰 힘을 주었다.
그 후로 봉암사는 교단의 명실상부한 전문수도장으로써의 면모와 위상을 갖추었다. 그런 후에도 돌광산 개발을 비롯하여 수행환경 파괴행위가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특히 행정당국은 1982년 이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만들어 사찰을 합법적으로 개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 역시 스님들의 의연하고 단호한 대처로 오늘에 이르게 됐다.
2002년에는 산림청으로부터 봉암사와 희양산 일대가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되었다. 그 후 봉암사 일대의 생태계는 수달이 서식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으며 최근에는 희귀식물 여러 종이 새롭게 발견될 정도로 크게 좋아졌다.
봉암사 일대는 절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산세의 빼어남은 이를 것 없고 계곡과 그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 또한 명징하다. 큰절에서 2㎞도 채 못간 곳에 마애불이 있다. 그 앞에는 너른 바위가 평상처럼 펼쳐져 있다. 근 100여명이 이곳에 앉고 서서 야외법회를 할 만한 공간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크고 너른 바위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은 거울 같았다.
그 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입으로 바로 넣었다. 봉암사 계곡의 이 물맛은 문자 그대로 가슴 속까지 시원할 정도였다. 그 큰 바위 위에 벌렁 누었다. 오후의 햇살이 마애불 앞에는 그늘이 없어 따사했다. 굳이 큰절 법당 안에서 법회를 열지 않아도 여기에서 법석을 벌인다면 ‘오죽 상쾌하랴’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 행락객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 스님들의 수행환경을 그르치지 않았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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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일주문 |
주지 원타스님은 우리 일행에게 차를 권하면서 “성철 큰스님께서는 이 일대와 참 인연이 깊은가 봅니다. 대승사를 거쳐 봉암사에 머무셨고 1960년대 중반에는 김용사에 계시기도 했잖습니까. 당신이 이곳 봉암사에 오실 때가 세수로는 36세였었지요. 한창 나이, 장년의 나이에 여기서 당신의 큰 꿈을 펼치지 않았습니까”라고 했다.
원타스님 말에 따르지 않더라도 장년의 한 도인이 스스로의 웅지를 활짝 펼치던 곳. 그곳이 바로 봉암사가 아니던가. 그곳에서 행해진 여러 일들이 오늘날 우리 종단에 큰 교훈을 남겼으며 앞으로의 종단이 나아갈 방향에 지남(指南)이 되고 있지 않은가.
봉암사 그리고 봉암사 결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짚어 보는 글을 다음 회에도 이어가 보기로 한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利他
수도의 목적은 이타(利他)에 있으니 이타심이 없으면 이는 소승외도(小乘外道)이니 심리적 물질적으로 항상 남에게 봉사한다.
자기 수도를 위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남에게 봉사하되 추호의 보수도 이를 받아서는 안된다. 노인이나 어린이나 환자나 빈궁한 사람을 보거든 특별히 도와야 한다. 부처님의 아들 라후라는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한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이라도 귀신도 모르게 한다. 오직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성(自性) 가운데 쌓아둘 따름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 한 푼 어치 착한 일에 만 냥 어치 악을 범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만 손해 볼뿐이다.
예수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오른손으로 남에게 물건을 주면서 왼손도 모르게 하라.” 하물며 우리 부처님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천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행, 실행 없는 헛소리는 천번만번 해도 소용이 없다. 아는 것이 천하를 덮더라도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한 털끝의 가치도 없는 쓸데 없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고인(古人)은 말하였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나니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말했다. “옳은 말 천 마디 하는 것이 아무 말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 오직 실행만 있을 뿐 말은 없어야 한다.
- 수도팔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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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2762호/ 10월26일자]
17. 희양산 봉암사 (하)
Posted by admin on Nov 10, 2011
2007년 봉암사 결사 60주년법회.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이 참여해 결사정신을 되새겼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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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동안거부터 시작한 ‘봉암사 결사’는 불교 조계종단 나아가 현대 한국불교사에 획기적인 일로 ‘신화’로 불리기까지 한다. 성철스님은 왜 ‘봉암사 결사’를 했는지, 결사장소가 왜 봉암사였는지, 어떻게 결사를 수행했는지 즉 어떻게 살았는지, 봉암사 결사가 그 이후 불교계에 어떤 영향과 교훈을 주고 있는지 되짚어보는 것 또한 큰 의미를 갖는다.
“봉암사에 들어간 것은 정해년(丁亥年) 내 나이 그 때 36세 때입니다. 봉암사에 들어가게 된 근본동기는, 죽은 청담스님 하고 자운스님 하고 또 죽은 우봉스님 하고 그리고 내 하고 넷인데, 우리가 어떻게 근본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인 원(願)이었습니다. 즉 근본목표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처소는 어디로 정하나? 물색한 결과 봉암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우봉스님이 살림 맡고, 보문스님 하고 자운스님 하고 내하고 이렇게 넷이 들어갔습니다. 청담스님은 해인사에서 가야총림(伽倻叢林)한다고 처음 시작할 때에는 못 들어오고. 서로 약속은 했었지만…” 성철스님이 생전에 해인사에 있으면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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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태고선원 입구 묘유문.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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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은 이미 대승사 시절 함께 살면서 공동수행체 즉 총림에 대한 구상을 서로 나눴었다. 그러나 청담스님은 1946년 10월께 가야총림이 출범하자 해인사에 갔다.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함께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평소 가졌던 뜻을 펴려했으나 여건이 마땅치가 않아 성철스님은 해인사를 떠나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 하안거(1947년)를 지내고 그해 동안거를 봉암사에서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우봉 보문 자운스님 뒤이어 향곡 월산 종수 …
그 후에도 여러 명 동참 특히 묘엄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도 참여해
“그 뒤로 향곡, 월산, 종수(宗秀), 젊은 사람으로는 도우, 보경(寶鏡), 법전(法傳), 성수(性壽), 혜암(慧菴), 의현(義玄)이는 그때 나이 열서너 댓 살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그 멤버가 한 20명 되었습니다.” 성철스님은 후속 참가자를 이렇게 회상했다.
봉암사 결사에는 그 후 여러 명이 참여했다. 특히 묘엄스님 등 비구니도 참여하여 봉암사 백련암에 머물면서 청담스님 성철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비구니의 참여는 결사를 주도한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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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친필 공주규약(위)과 봉암사 결사 대중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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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철스님의 회고를 보자.
“처음에 들어가서 첫 대중공사를 뭣을 했느냐 하면 … 법당정리부터 먼저 하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습니다. … 그 다음에는 불공인데, 불공이란 것은 자기가 뭣이든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서 스님네가 축원해 주고 목탁치고 하는 것은 본시 없는 것입니다.
이제 법당은 어느 정도 정리되는데 가사니 장삼이니 바릿대니 이런 것이 또 틀렸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에 바릿대는 와철(瓦鐵)입니다. 쇠로 하든지 질그릇으로 하지 목(木)발우는 금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쓰고 있습니다.
가사 장삼을 보면 비단으로 못하게 했는데 그 당시에 보면 전부 다 비단입니다. 색깔도 벌겋게 해서. 순수한 색이 아니고 괴색(壞色, 청색 황색 적색의 3종 색을 섞어 만든 색)을 해야 되는 것이니 당시엔 그런 것도 비법(非法)입니다.
그래서 비단가사, 장삼 그리고 목 바릿대 이것을 싹 모아 가지고 탕탕 부수고 칼로 싹싹 기리고(자르고) 해서는 마당에 갖다놓고 내 손으로 불 싹 다 질렀습니다. 육환장도 새로 만들고 요새는 안하지만 스님은 언제든지 육환장 짚게 되었으니까. 삿갓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죽을 먹었습니다. 공양은 사시(巳時)밖에 없으니까. 오후에는 약석(藥石)이라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율(律)에 보아서는 저녁공양은 없는데 청규(淸規)에는 약석이라고. 약이라 해서 참선하는데 너무 기운이 없어도 안되므로 바릿대 펴지 말고 조금씩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6ㆍ25전쟁으로 중단…2007년 60주년 법회 통해
‘결사 정신’ 되새겨 오늘의 ‘자성과 쇄신’으로 새롭게 이어져
포살(布薩)도 처음으로 거기서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제도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나무를 하는데 식구수대로 지게를 스무 남 개 만들었습니다. 그래놓고 나무를 하는데 하루 석 짐씩 했습니다. 석 짐씩 하니 좀 고된 모양입니다. 고되니깐 몇 이가 도망 가 버렸습니다.”
그 뿐만 아니다. 108배를 처음 실시하고 신도가 스님에게 3배 예배하는 법도 이때 처음 한 것이다. 수행차원에서 1000배의 절을 하고 공양은 모든 스님이 평등하게 했다. 천도재 때는 <금강경>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신중단에는 반야심경 독경으로, 운력은 모든 대중이 능엄주를 암송케 했다.
일상생활은 공주규약(共住規約)에 의해 철저하게 수행했다. 공주규약은 성철스님이 작성하고 대중들이 지키겠다는 다짐아래 시행되었다.
총 18개항의 공주규약은 지금 보면 한문으로 된 것이어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부처님 가르침을 부지런히 닦아 구경각을 하루속히 성취한다.
2.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 가르침 이외의 각자 의견은 절대 배제한다.
3. 일상생활은 자주자치의 기치아래 물 긷기, 나무하기, 밭 갈기, 바느질, 탁발 등 어떠한 고역도 마다않는다.
4. 소작인이 내는 것과 신도의 시주에 의한 생계유지는 단연 청산한다.
5. 신도의 불전 헌공은 재례 지낼 때의 현품과 지극정성으로 하는 절(拜)에 그친다.
6. 대소변 때와 운력 그리고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장삼을 입는다.
7. 바깥출입 때는 반드시 삿갓 쓰고 석장(錫杖) 짚고 여럿이 함께 간다.
8. 가사는 마(麻)나 면(綿)에 한하고 괴색이어야 한다.
9. 바루는 질그릇 이외의 것은 금한다.
10. 매일 1회 능엄주를 왼다.
11. 매일 2시간이상 노동한다.
12. 보름마다 포살을 시행한다.
13. 불전헌공은 오시(午時, 오전11~오후1시) 이후는 안되며 아침식사는 죽으로 한다.
14. 좌차(앉는 차례)는 비구계를 받은 순서로 한다.
15. 방안에서는 면벽좌선하고 잡담은 엄금한다.
16. 정한시각 이외에는 눕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17. 각자 쓸 물자는 스스로 마련한다.
18. 이외 것은 청규와 율에 정한 바에 따른다.
이 사항을 거부하는 자는 함께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는 3년도 채 못 되어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그치게 되었다.
지난 2007년 조계종단은 봉암사에서 결사 60주년을 기념하는 큰법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종도들은 당시의 결사정신을 되새기고 깊이 참회하고 앞으로의 수행 자세를 다시 한번 곧추세웠다. 오늘의 ‘자성과 쇄신’을 이끌어 낸 봉암사 결사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이어져야 할 것이며 보다 더 깊고 다각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자기의 본래 모습이 부처님이다
물음 :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는 융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여 절대적인 창조주가 화복(禍福)을 정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업(業)에 따라서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하게 되고 악한 일을 하면 불행하게 된다고 하는 데 이해가 어렵습니다.
답 : 예수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만든 이도 하나님이고 따라서 구원도 그에게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누가 만든 사람이 따로 없고 누가 따로 구원해주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아(自我)본위입니다. 예수교는 철두철미 남을 의지하는 것이니 두 관점이 정반대입니다. 요즘의 과학적 증명에 의하면 남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말했듯이 예수교에서도 자체 전환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본시 주장하는 것은 우주 이대로가 상주불멸(常住不滅)이고 인간 이대로가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며, 또 사람이나 짐승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사람이 모두 금덩어리 아님이 없는 데 자기가 착각해서 금덩어리를 똥덩이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이라는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금덩어리인줄 모르는 것이니 수행을 하여 본래 눈을 뜨고 보면 본시 금덩어리인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모두 진금(眞金)이고 모두가 부처님 세계이고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원’한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개발이고 자기복귀(復歸)입니다. 자기의 본래 모습이 부처님인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의 조사스님네들이 항상 하는 말이 그렇고 또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석가도 믿지 말고 달마도 믿지 말고 지금 말하는 성철이도 믿지 말라. 오직 자기를 바로 보고 자기 능력을 바로 발휘시키라.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 1968년 8월 대불련 수련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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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2766호/ 11월9일자]
18. 월내 묘관음사(妙觀音寺) : 향곡스님 회상에서 인홍스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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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길상선원(吉祥禪院) 전경. 김형주 기자 |
성철스님은 1947년 동안거부터 1949년 하안거를 봉암사에서 보내고 그해 동안거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묘관음사(妙觀音寺)에서 했다. ‘봉암사 결사’를 3년도 채우지 못하고 거처를 옮긴 것이다. 그 연유를 알아본다.
“당시 봉암사 인근에는 지방 빨지산이 자주 출몰했다. 그들은 봉암사에도 간혹 들이닥쳐 식량을 약탈하였다. 이렇게 지방 빨지산이 등장하자 그에 비례하여 경찰들도 진압차원에서 출동하였다. 이렇게 봉암사 인근의 정치적 사정이 급변하자 수행결사를 지속할 수 없었다.
이에 결사 주도자들은 수행 장소를 이전하기로 하고 그 대상 사찰로 고성의 문수암으로 정했다. 그 후 성철스님은 봉암사에 있던 책을 도반인 향곡스님의 토굴인 부산 묘관음사로 옮겨놓았다. 이렇게 이전 준비를 한 연후에 성철스님은 대중들에게 통보하였다.(문경문화연구총서 7집 <희양산 봉암사> 71쪽에 실린 김광식의 글 ‘봉암결사의 역사적 의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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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종가(臨濟宗家) 묘관음사(妙觀音寺)와 ‘여하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如何是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 새겨진 절 입구의 큰바위. 김형주 기자 |
당시 상황을 성철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절대 비밀로 하여 (경남)고성 문수암(文殊庵)을 딱 얻어 놓았습니다. 대중은 모르게 그래놓고 가을이 되고 보니 뭣인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거기 있으면 안되겠다 말입니다. 딴사람은 있어도 괜찮지만 나는 거기 있으면 안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추석 지나고 난 뒤에 대중공사를 했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여기서 떠나야 하니까 그리 알고, 오늘부터는 순호스님(청담스님), 순호스님이 입승을 보았거든, 입승스님 한테 전부 맡기니 입승스님 시키는 대로 하시오’ 이렇게 하고 봉암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월내(月內, 묘관음사가 있는 곳)에 와서 겨울은 거기 있었습니다.”
이상의 회고로 보아 스님은 6.25한국전쟁이 나기 전 해인 1949년 가을 묘관음사로 거처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묘관음사는 흔희들 ‘월내(月內) 묘관음사’로 부른다. 위치가 부산 기장군 월내에 있으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주소지 표기와 다르다.
봉암사인근 빨지산 출몰로 평생도반 향곡스님 주석처
묘관음사로 장서 옮기고 동안거 나며 ‘법열’ 나눠
묘관음사는 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절이다. 부산 해운대를 거쳐 동해남부선 철길이 이어진 송정을 지나 임랑에 이르면 산속에 묘관음사가 있다. 동해남부의 맑고 푸른 바다가 펼쳐진 곳, 해운대 송정 임랑은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모래가 고운 이름난 해수욕장이다.
임랑 해수욕장에서 시골길을 가로지르면 동해남부선 철길이 이어지고 철길을 건너면 묘관음사로 들어가는 솔숲길이 나선다. 법림산(法林山) 묘관음사라 했다. 절이 자리한 산 이름도 법(法)의 수풀(林)이란다.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智者樂水)고 했다.(논어)
수행자는 지혜와 자비(仁)를 닦는다.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법림산 묘관음사에서 수행하는 수선납자들이야말로 자신의 수행처가 지혜와 자비를 닦기에 이보다 더함이 없음을 익히 알 것이라 여겨진다.
이곳서 ‘지견’ 열렸던 비구니계 거목 인홍스님
성철스님 법문에 ‘은산철벽’ 다시 대용맹 대신심 일으켜
묘관음사는 운봉(雲峰, 1899~1943)스님이 토굴은 짓고 수행하던 곳인데 그 제자 향곡스님이 머물면서 1960년부터 대작불사를 일구어 오늘에 이른다.
절 입구에는 어른 키보다 더 큰 바위를 우뚝 세워놓았다. 묘관음사라는 글과 ‘임제종가(臨濟宗家), 여하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如何是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어떤 것이 부모님 몸을 받아 태어나기 전의 너냐)’이라 새겼다. 선풍(禪風)을 드날리는 임제스님의 법을 이어 내려온 종가답게 인간존재의 근본을 찾으라는 선구(禪句)가 이 절이 눈 푸른 납자를 길러내는 도량임을 절 입구에서부터 일깨우고 있다.
솔숲 길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가면 묘관음사 현판이 걸린 문이 보인다. 당대의 명필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 1908~1991) 선생의 글씨다. 이 문이 바로 일주문 격이다.
맞은편이 대웅전이요 대웅전 오른쪽에 길상선원(吉祥禪院), 왼쪽에 후원격인 산호당(珊瑚堂)이 있다. 이렇듯 입 ‘구(口)’자 형으로 도량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앞뜰의 고요하고 적정함은 절 주변의 대숲(竹林)과 어울려 마냥 화평한 기운이 흐른다.
향곡스님은 이 절을 가꾸면서 나무들을 많이 심었다고 한다. 야자수 동백 단풍 모과 편백 대나무 등. 이 모두가 이제는 60~70년이 지나 키가 크고 우거지고 야물어져 세월의 자취를 느끼게 해준다. 필자 일행이 찾았을 때인 지난 11월 4일 노랗게 익은 모과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가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법당 옆을 돌아 산 쪽으로 약간 올라가면 금모대(金毛臺)와 염화실이 있다. 금모대는 향곡스님의 법제자 진제스님(동화사 조실)이 수행, 득도(得道)한 곳이라 한다.
성철스님은 평생도반인 향곡스님 절에 당신의 장서를 옮기고 동안거 한 철을 보내면서 향곡스님과 서로 법담을 주고받으며 도반끼리 만이 지닐 수 있는 법열을 느끼는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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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홍스님 |
이즈음 스님은 평생에 한 획을 긋는 인연을 맺게 된다. 비구니 인홍(仁弘)스님을 만난 것이다. 인홍스님(1908~1997)은 한국 근현대불교사에서 두드러진 분이다. 전국비구니회 총재.대한불교비구니 우담바라회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경남 언양 석남사를 오늘의 대가람으로 일군 분이다.
“인홍스님은 1941년 34세 때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으로 출가,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得度)후 1942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43년 일운(一雲)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1945년 38세 때 서울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아 지녔다.
이후 만공스님, 한암스님 회상에서 수행 정진했다. 1949년 42세 때 월내 묘관음사에서 지견(知見)이 열렸으나 성철스님의 법문을 듣고 은산철벽(銀山鐵壁)이 앞을 가로막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 때 다시 대용맹 대신심을 일으키니 평생토록 불퇴전의 정진으로 일관하였다.” (인홍스님 일대기 <길찾아 길 떠나다> 박원자 지음.김영사 刊 365쪽, 석정(石鼎)스님이 쓴 ‘조계종 대장로니(大長老尼) 인홍선사 부도 조성 연기문’에서 발췌)
인홍스님은 이후 성철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 성철스님의 법과 가르침에 따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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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철스님과 향곡스님. 사진제공=성철선사상연구원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향곡선형의 법어에 씀
푸른 바다의 신기한 구슬이요
형산 땅의 보배 옥돌이라
하늘과 땅 비추어 환희 밝히고
해와 달을 삼키고 토하는 도다.
목인(木人)은 노래하고 석녀(石女)는 춤을 추니
소나무는 곧고 가시덩굴 굽으며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도다
알겠는가?
번쩍이는 칼 빛으로 빠른 천둥 쫓아내니
수미산 정상에는 피 물결이 넘쳐흐르도다.
題 香谷禪兄 法語
碧海神珠요
荊山寶玉이라
照耀乾坤하고
呑吐日月이로다
木人放歌하고
石女起舞하니
松直曲이요
鵠白烏黑이로다
會아
閃劍光이 走雷霆하니
血流滔滔須彌頂이로다
辛酉(1981) 四月
道友 性徹 和南
* 이 법문은 향곡스님 열반이후 펴낸 <향곡선사법어집>에 실린 글이다. |
[불교신문 2770호/ 11월23일자]
19. 경남 고성 문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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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청담스님 사리탑이 보인다. 멀리보이는 건물은 약사전이다. |
1950년 6ㆍ25한국전쟁이 나던 해 하안거와 동안거를 경남 고성군 문수암(文殊菴)에서 지냈다. 스님은 봉암사 결사 2년이 지났을 때인 1949년 하안거를 지낸 후 그해 동안거는 경남 기장군 월내의 묘관음사에서 보냈다. 그리고 전쟁이 나던 해에 난을 피하여 이곳 문수암으로 온 것이다. 스님은 봉암사를 떠나면서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이미 이곳에 옮겨놓았다. 책만 먼저 문수암으로 보내놓고 묘관음사에서 한 철을 나고 여기 와서 전란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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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암 현판. | 문수암이 자리 잡은 산 이름은 청량산(淸凉山)이라 한다. 예부터 수려한 산세(山勢)를 자랑하여 해동(海東)의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특히 신라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산 이름도 무이산(武夷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청량산은 문수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중국의 산 이름을 빌려 온 것으로 이곳에 문수신앙이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기암절벽이 암자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암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남해 한려수도에 떠 있는 섬들이 마치 징검다리와 같이 이어져 있다.
봉암사 있던 책 옮겨 놓고
6.25전쟁 와중에도
‘수행정진 일념’ 이어가
청담스님 수행정신 상징
사리탑.탑비도 눈에 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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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암 전경. |
문수암은 남해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 청도 운문사(雲門寺) 사리암(舍利庵)과 함께 영남의 3대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문수암의 창건 설화가 흥미롭다. 신라 신문왕 8년 서기 688년에 의상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구도행각을 하다가 아랫마을의 어느 불교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꿈속에 거지 모습을 한 스님 두 분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튿날 아침에 스님이 공양을 들고 있는데 마침 그 거지들이 찾아와 밥을 구걸하므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두 거지는 말없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의상스님은 그들을 따라갔는데 바로 지금의 절터에 이르렀다. 주변경관을 살펴보니 주위는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해에 자리한 수많은 섬들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절경을 이루어 황홀감에 빠져 있었다. 그 때 걸인모습의 두 스님이 나타나 이르기를 “의상아, 우리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인데 이곳 바위벽 속에 산다”라고 하고는 바위 사이로 들어갔다. 이에 의상스님은 3일 낮과 밤을 기도한 후 절을 지었는데 바로 문수암이라는 것이다.(<전통사찰총서20〉,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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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의 문수동자상. 뒤편 유리벽으로 문수보살이 있다는 법당 뒤 암벽을 바로 보게 해 놓았다. |
지금도 법당 뒤 암벽에는 5m쯤 되는 굴이 있는데, 그 안에 백색의 문수보살상이 있으며 암벽의 바깥으로 돌출한 부분이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어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이 머무르고 있는 곳임을 보여준다. 문수암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보현사(普賢寺)가 있다. 이 또한 창건설화와 관련된 믿음이 오래토록 전승되고 있음을 알게 해주고 있다.
문수암은 1642(조선 인조20)년에 이르러 중창되었다고 하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다. 현대에는 청담(靑潭, 1902~1971)스님이 이곳에서 정진했다고 한다.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이 가운데 모셔져 있고 그 오른쪽엔 지장보살 그리고 왼쪽엔 문수보살상이 모셔졌다.
문수보살상 뒤편 벽은 유리벽으로 법당 뒤 문수보살이 있다는 암벽을 바로 보게 해놓았다. 법당에서 조금 내려오다 왼쪽 바위 위에 청담스님의 사리탑과 탑비가 있다. 탑비문은 운허스님이 썼다. 청담스님 열반 후 사리 15과(顆)를 수습, 이곳 문수암에 6과를 모셨다고 한다. 사리탑은 1973년 10월25일 정천(正天)스님이 주지, 현성(玄惺)스님이 총무로 있을 때 세웠다.
청담스님의 수행정신이 오롯이 살아있는 이곳 문수암은 결제철인 데도 선방은 열리지 않았고 정진대중도 없었다. 마침 법당 안에서 비구니 스님 한 분을 만났는데 문수보살 정근기도를 3년 넘게 하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천일기도를 한 번 끝내고 다시 한 번 천일기도에 들어갔다고 한다. 장한 신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수암으로 가는 길 반대편 길 끝에 약사전(藥師殿)이 있다. 대형 약사여래불이 가부좌를 틀고 좌대 위에 앉은 모습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약사전 3층 법당에는 얼마 전 입적한 정천 대종사의 진영과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문수암은 많은 대중이 기도하거나 정진할 만큼 넓고 크지 않은 도량이다. 약사전의 건립은 문수암의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넓고 크게 지은 것 같다.
필자 일행이 문수암을 찾아간 지난 11월22일 암자 주변은 마냥 조용했다. 날씨도 밝지 않아 멀리 바다가 부옇게 보였다. 청담스님 사리탑에서 바라 본 바다의 오른편 끝 쪽에 약사여래의 거대한 모습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약사전에도 참배객은 이날따라 드문드문 했다.
성철스님이 문수암에 머무르던 때에는 약사전도 없었다. 그때 스님은 6ㆍ25전쟁을 피해 책을 이곳에 봉안하고 조용히 한 해를 보낸 것임을 알게 한다. 전쟁은 수행자가 정진하는 도량을 포화와 총검으로 불태우고 짓밟았다. 수도자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전쟁터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 전란의 와중에도 수행정신을 버리지 않고 스님들은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각자 나름대로의 수행처를 찾아 정진일념을 이어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청량산 문수암은 전란을 피하여 조용히 수행하기엔 정말 알맞은 처소였다.
사진 김형주 기자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자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여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실상무구상청정(實相無垢常淸淨)
귀천노유사여불(貴賤老幼事如佛)
극중죄인극존경(極重罪人極尊敬)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모든 일체 만법의 참모습은 때(垢)가 없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 무정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 성불입니다. 옷은 아무리 떨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모두 다 같이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지침, 근본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만큼 우리 서로서로 노력합시다.
- 1982년 5월 방장 대중법어
[불교신문 2774호/ 12월7일자] | |
20. 통영 천제굴 - 고승이 머물던 옛터 잡초만 무성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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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안정사 천제굴 터. 성철스님을 10여년 시봉한 성일스님이 필자에게 당시 현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왼쪽 아래 사진은 은봉암에서 바라본 남해 전경.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겨울철 큰 눈이 내린다는 절기인 대설(大雪)을 이틀 앞둔 지난 5일 경남 통영 안정사(安靜寺) 천제굴(闡提屈)을 찾았다. 통영 벽발산(碧鉢山), 현지에서는 벽방산(碧芳山)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 곳의 천제굴. 성철스님은 1951년 안정사 은봉암(隱鳳庵)에서 하안거를 나고 그해 동안거부터 천제굴에 머물렀다. 스님은 1952년 경남 창원 불모산(佛母山) 성주사(聖住寺)에서 동안거 한철을 지낸 것을 빼고는 1951~1954년까지 천제굴에서 보냈다.
천제굴은 성철스님이 안정사 큰절 뒤 산자락에 초가삼간을 짓고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친 토굴이다. 현 종정 법전(法傳)스님이 시봉을 한 곳, 맏상좌 천제스님이 처음으로 스님을 찾아와서 만난 곳이다. 천제스님은 이후 10년 행자생활 뒤 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6.25 한국전쟁을 피해 남해 바닷가에서 보낸 시절. 스님은 여기에서 조계종단의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던 해까지 살았다.
천제굴을 찾아간 날. 대설을 앞둔 날이지만 낮 기온은 포근했다. 오후 들어 추울까봐 지레 겁먹고 잔뜩 겨울 옷차림을 했는데 괜한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멋쩍은 생각을 갖게 했다. 천제굴은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스님이 살던 집도 모두 없어졌고 그 터엔 허물어진 돌담만 남아있다. 집터는 잡초만 무성했다. 천제스님 못지않게 ‘성철스님을 모신 10년 행자’인 성일스님이 동행해 주지 않았으면 천제굴 터를 찾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하니 선뜻 동행을 허락해준 성일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이었다.
반백년도 못되어 흔적만 남은 천제굴 옛터를 보고 있노라니 산천의구(山川依舊)라는 옛말도 헛말이구나 싶었다. 성일스님은 법당 터에 서서 “저 나무들이 그 때는 한 길도 채 안 되는 쬐끄만 것이었는데 지금은 내 키 두 배나 되게 컸네” 했다.
“안정사 천제굴엔 조그만 법당 한 채, 그리고 노장님(성철스님)이 머물던 위채, 내가 있던 식당채가 있었다”고 천제스님은 당시를 회상했다.
“벽방산이 짙푸른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한 안정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성철 노장은 나와 문일조스님, 법웅스님(도우스님) 등의 시봉을 받았다. 문일조스님은 안정사 뒤쪽 평평한 곳에 천제굴을 지었다. 덕분에 우리는 성철 노장을 모시고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나중엔 두 사람이 가고 나서 나 혼자 노장을 모시다가 천제굴을 떠나올 무렵, 노장의 맏상좌가 된 천제가 왔길래 그에게 시봉을 맡기고 나왔다.”
(법전스님 자서전 <누구없는가> 90쪽)
재 지낼 때 음식 차리지 않고
경 읽고 능엄주 외우고 108배
‘참회의 3000배’ 시작한 곳
현 종정 법전스님을 비롯
도우.일조스님에 이어
맏상좌 천제.성일스님이 시봉
“천제굴 주변에는 밭이 꽤 많았다. 그 밭을 다 갈고 세끼 밥을 짓고 청소와 빨래하며, 노장이 주무시는 방에 장작불을 땠다. 약을 달여 드리고 과일즙을 내 드렸으며 손님이 오면 선별해서 만나도록 해 드리고 고성 읍내까지 가서 장을 보아오는 등 날마다 바빴다. … 성철 노장은 참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다. 모든 것에 철저하고 분명했으며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공부를 제대로 이루기 전에는 공부라는 이름도 붙이지 못한데이. 적어도 하루 20시간이상 화두가 한결같게 들려야 비로소 화두공부 한다고 할 수 있단 말이다’ … 부엌바닥에 깔개를 깔아놓고 상을 차려 스승과 단둘이 공양을 했던 단출한 시간들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속세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함께 한 시간들이었다. 노장은 늘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 정신은 노장의 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돈은 비상(砒霜)과 같데이. 거저 얻게 되는 돈을 뿌리치는 사람이 가장 용기 있고 청정한 사람인기라.” …
“그 시절엔 청담스님을 비롯해 자운.운허.서옹.향곡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다녀갔다.”(위 책에서 인용)
법전스님이 천제굴을 떠날 무렵 천제스님이 왔다. 1953년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스님을 모시고 머리를 깎았다.
“열네 살 되던 해 가을(천제스님은 1939년생). 6.25전쟁으로 병을 얻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안정사로 부친의 사십구재를 모시러 갔다가 속가의 부친 대신 성철스님을 부친으로,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나도 더 이상 살지 못할 것 같았는데 거기서 스님을 만나고부터 다시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님 곁에 머물렀으니까 전생의 인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처음 절에 와서 노장님이 일러 준 것을 그대로 써 놓은 공책을 펴 보면 이런 구절이 보인다. ‘수시여전(受施如箭)’, 즉 시주받는 것을 날아오는 화살 받는 것처럼 하라는 뜻이다. 그 당시 노장님의 ‘중들이 돈의 노예가 되었으니 스승이 아니고 종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들은 것을 메모한 것이다. 또 ‘어려운 가운데 가장 어려움은 알고도 모르는 체 함이요, 용맹 가운데 가장 용맹스러움은 옳고도 지는 것이니라. 공부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남의 허물을 쓰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은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이다’라는 노장님의 말씀을 적은 메모도 있다.”(박원자 엮음 <나의 행자시절> 196~197쪽)
“성철스님은 천제굴 시절부터 재를 지낼 때 음식을 차리지 않고 경을 읽게 했고(轉經) 매일 신역 능엄주를 외우고 108배를 했다. 등(燈)을 다는 것에 대해서도 본인이 와서 등을 다는 것은 백천 개를 달아도 상관없지만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큰 것을 달아주는 것과 같은 등 장사는 결코 못하게 했다. 또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미신화 되고 토속화 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은 불교에서 탈피하여 본래의 면목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에 대단한 노력을 하신 분이다. 참회의 3000배를 처음 시작한 곳도 천제굴이다. 노장님은 늘 그러셨다.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을 수행하고 전하는 일이 내 할 일이다.”(위 책에서 발췌 인용)
“해마다 초가지붕을 이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었어. 그 때는 지금처럼 기와지붕이 아니었거든. … 노장님은 법당 앞마당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 참 좋다’라는 말을 자주하셨지.”
스님이 즐겨 바라보던 그 바다. 천제굴 터에서 지금은 잘 보이지 않았다. 길길이 자란 나무들이 전망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천제굴, 터만 남은 그 곳을 떠나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고는 하나 ‘시대의 어른’이 살던 자취가 이렇듯 변할 수 있나하는 마음에서였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시비와 선악이 본래 공(空)하고
시비와 선악이 본래 공(空)하고
마군(魔軍)과 제불(諸佛)이 원시동체(元是同體)입니다.
생사열반(生死涅槃)은 꿈속의 꿈이요
이해득실(利害得失)은 거품 위의 거품입니다.
진여(眞如)의 둥근 달이 휘황찬란하여
억천만겁 변함없이 일체를 밝게 비추니 사바가 곧 정토입니다.
물거품인 이해득실을 단연히 버리고
영원한 진여의 둥근 달을 항상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만법이 청정하여 청정이란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가없는 이 법계에 거룩한 부처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들판의 괭이소리 공장의 기계소리 함께 같이 태평가를 노래하니
푸른 언덕 잔디 위에 황금빛 꽃사슴이 즐겁게 뛰놉니다.
- 1986년 서의현 총무원장 취임식 |
“적어도 하루 20시간이상 화두가 한결같게 들려야 비로소 화두공부 한다고 할 수 있다. …
늘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 정신은 노장(성철스님)의 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돈은 비상(砒霜)과 같데이. 거저 얻게 되는 돈을 뿌리치는 사람이 가장 용기 있고 청정한 사람인기라.” (법전스님 자서전 ’누구없는가‘에서)
“‘수시여전(受施如箭)’, 시주받는 것을 날아오는 화살 받는 것처럼 하라.… ‘어려운 가운데 가장 어려움은 알고도 모르는 체 함이요, 용맹 가운데 가장 용맹스러움은 옳고도 지는 것이니라. 공부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남의 허물을 쓰는 것’이라는 노장님의 말씀을 적은 메모도 있다.”
(박원자 엮음 ‘나의 행자시절’ 천제스님 편에서)
[불교신문 2778호/ 12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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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몇 곳은 저도 참배했던 덕분에 더욱 새삼스럽습니다~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_()_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따라가 볼까 마음먹고 있습니다
성불하십시요_()_
스님 잘 정리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님의 자료정리가 저의 신심을 더욱 굳게하고~지침서를 삼을까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