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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24호.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는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마다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다. 공포에 출목(出木)이 없는 이익공계로 팔작지붕에 2층으로, 규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 인공방지(方池)에 정면 7칸, 측면 5찬으로 총 35칸이다. 연못 속에는 4개의 장방형의 인공 섬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원래의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짓도록 명하여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완성하였다.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돌기둥만 270여년 남았던 것을 고종 4년 경복궁을 중창할 때 재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재건 후 130여년이 지난 1999년 지붕 일부를 해체 수리하였다. 임진왜란 전의 경회루는 유득공(柳得恭)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남아 있는 경회루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세 길이나 되고 모두 마흔 여덟 개인데. . ."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 때 다시 지은 경회루와 같은 규모인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에는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용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며,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이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 4월 20일에 새로 지은 건물로서 경복궁의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과 천추전(千秋殿)의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경회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인공으로 만든 커다란 방형 연못 안 동쪽에 치우쳐 있는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건물 하층의 바닥은 네모난 전돌을, 상층 바닥은 장귀틀과 결합하는 동귀틀이 각 칸에 하나로 구성된 장판자를 깔았고, 동쪽과 서쪽에는 하층에서 상층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을 두었다. 1층 천장, 2층 마루의 귀틀 밑부분은 소란우물천장을 꾸미고 화려하게 단청해 놓았다. 경회루 서쪽으로 있는 네모난 섬 두 개는 당주(當洲)이며, 이곳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경회루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삼은 네모 반듯한 섬 위에 세워졌으며, 세 벌로 조성된 돌다리를 통하여 연결되는데, 남쪽의 것이 임금을 위한 다리다. 다리의 돌난간과 네 귀는 짐승 모양의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섬을 이루는 돌 기단 둘레에도 돌난간이 둘러있고, 모퉁이마다 돌로 조각한 12지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돌난간은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로 구성되었다.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에서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의 경회루 1층 부분은 민흘림을 한 높은 사각 돌기둥이 외부 둘레에, 원형의 돌기둥이 내부에 배열되어 있고, 2층 부분은 나무기둥으로 조영되어 있다. 1·2층 바닥에는 모두 건물 공간 사용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바깥보다 안쪽의 바닥을 조금씩 높였고, 2층에서는 중앙부분의 바닥을 더 높여서, 외진-내진-내내진(內內陣)을 형성했다. 2층의 세 공간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공간의 위계를 명확히 했고, 필요에 따라 들어올려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토록 했으며,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현재 내진과 내내진 사이에 문은 없고, 문선만 있다. 2층 둘레로는 계자난간을 설치했고, 기둥과 창방 아래 부분에는 당초문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이 곳 2층에서는 북쪽으로 백악, 서쪽으로 인왕, 남쪽으로 남산을 멀리 볼 수 있어서 이 곳이 자연과 함께 하며 연회를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2층 상부의 가구(架構)형식은 11량 구조로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결구되어 있다.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얹어서 하중을 균등하게 분포시켰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해 매우 거대하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ㆍ추녀마루ㆍ용마루는 모두 회반죽을 바른 양성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용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설치했으며, 지붕 합각면에는 풍판과 쫄대를 사용하여 판벽을 구성하였다.
고종 때 재건된 경회루는 당시 유가(儒家)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건설되었는데, 그 내용은 정학순(丁學洵)이 경복궁 중건 후인 1865년에 쓴《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나타나 있다. 1층 내부 기둥을 원기둥〔圓柱〕, 외부 기둥을 사각기둥〔方柱〕으로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2층 기둥은 외진주만 사각기둥이고, 내진주는 모두 원기둥이다. 외진-내진-내내진 3겹으로 구성된 2층 평면의 제일 안인 내내진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이 세 칸을 둘러싼 여덟 기둥은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제일 안 세 칸을 둘러싼 다음 겹인 내진은 12칸인데 1년 12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16칸에 달린 64문짝은 64괘를 상징한다. 가장 바깥을 둘러싼 24칸은 1년 24절기와 24방(方)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는 당시 유가의 세계관을 건축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경회루에는 불을 잡아먹는 짐승인 불가사리 둘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연못 속에 넣어 화기(火氣)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을 정학순은 기록하였는데, 이 상징물 하나가 최근 경회루 방형 연못을 청소하면서 나왔다. 방형 연못 서북쪽으로 돌기둥 두 개가 물 속에 담겨져 있는 육각형 평면의 하향정(荷香亭)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으로 인왕산ㆍ북악산ㆍ남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연못의 물과 섬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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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와 연못 慶會樓 대한민국의 국보 224호 1985년 1월 8일 지정
초창기에는 태조가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다락집이었으며,
1412년에 태종이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여
지금의 경회루의 모습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을 때마다 축하연을 베풀던 곳
공포에 출목(出木)이 없는 이익공계로 팔작지붕에 2층
규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인 인공방지(方池)에
정면 7칸, 측면 5찬으로 총 35칸이다.(기동은 6×8=48개)
연못 속에는 4개의 장방형의 인공 섬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에는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용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며,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을 조성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다음카페 '한가족한마음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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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수
정전앞에는 넓은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이 연못은 북악계곡의 물과 경복궁 뒤편의 향원지에서 나오는 물로 채워진다 또한 이지대 자체가 원래 습한 지역이라고 한다. 연못안에는 세 개의 임공섬이 조성되어있는데 하나는 경회루이고 두 개는 동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문헌에 의하면 경회루는 연못의 물로써 불을 제압하여 궁궐을 지키며,궁의 부족한 명당수를 확보하고 땅의 습기를 다스리기 위해 팠다고 한다.
경회루는 국보 제 224호이며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태종때 하륜은 기문에 그 뜻을 "경회는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만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누각으로 쓰여 그 규모가 작았으나 태종 12년(1412)에 박자청이 연목을 확장하고 누각을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하였다. 그후 임진란으로 불타고 후에 대원군때 다시 더 크게 늘려 중건하였다.현재 경회루는 일반인이 출입을 금하고 있으며 당시에도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그 누구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경회루 살펴보기
경회루가 있는 섬에는 세 개의 돌다리가 걸쳐져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은 다른 두 개의 돌다리보다 폭이 넓게 하여 어도로 삼았다. 또한 다른 반대쪽에는 배를 탈 수 있도록 돌계단이 내려와있다.경회루는 3개의 다리를 보유한다.그 다리의 기둥을 보면 마름모 꼴로 만들어 져있는데 이는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위해서 이다.
누각 둘레에는 하엽동자와 팔각의 돌란대를 두어 돌난간을 만들었고 난간의 엄지 기둥에는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다.경회루는 중층의 누각이다. 아래층 기둥은 모두 48개이다. 그중 바깥기둥은 모가난 네모꼴이고 안기둥은 원모양의 두리기둥이다. 네모는 (땅을 의미하고 원은 하늘을 의미한다)바깥 모기둥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사다리꼴로서 미끈한 느낌을 줄뿐아니라 유난히 넓고 큰 기둥의 육중함을
경회루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물매를 급하게 하여 시각적으로 지붕을 크게 보이도록 하였다.위엄을 갖추기 위해 용마루를 높이 올렸다. 그리고 지붕마루에는 각기 취두 용두. 잡상을 올리고 옆면의 합각머리를 크게 마련하여다.경회루 잡상은 궁의 여느 전각의 잡상보다 그 수자가 많다 처마밑에 걸린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로 전해진다.단일 평면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큰 누각이면서도 둔중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날렵한 팔작지붕의 선과 깊숙한 겹처마 간결한 익공양식 무리없는 가구방식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붕마루를 덮은 흰색 양성도 전체 분위기를 밝게 해주고 있다. 양성이란 지붕의 용마루.합각마루.처마마루를 회로 두껍게 덮어올린 것을 말한다.
경회루의 바닥은
경회루의 연못바닥은 땅의 침하를 막기위해 전복대 같은 나무기둥을 수 없이 박아놓았다는 사실은 언젠가 연못의 물을 빼면서 밝혀졌다. 거대한 건물을 물속에 세우면서 그와같이 기초를 견고히 한점은 실로 놀납다. 연못바닥은 물이 들어오는 동북쪽은 높게 물이 나가는 서남쪽은 낮게 하여 끊임없이 물이 흐르게하여 썩지 않게 하였다. 경회루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의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연못에는 수백명이 탈 수 있는 황룡주가 떠다녔고, 연회가 있을떄면 촛불을 켠 꽃과 동물 모야의 등을 물위에 띄었다고 전한다.연산군때 연목 위에다 두 개의 네모난 만세산을 조성하였는데 이를 당주라 하였다 .이 당주에는 나무와 쫓들을 심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그러나 연산은 흥청이라는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모아 밤낮으로 흥청거혔다 현재 연못 북쪽에는 육모지부의 하향정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곧잘 찾아와 낚시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다음카페 '인천중년행복의징검다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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