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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14 - 러시아 내전에 참전한 일본군과 철수하면서 한국 독립군과 청산리 전투!
1917년 3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은 무느지고 멘세비키와 부르주아 정부가 들어섰으나 상류층 정부는
1차세계대전을 계속하자 물가는 뛰고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니 노동자와 농민이 궐기해
11월 레닌의 볼세비키가 정권을 잡아 소비에트를 수립했고.... 백군과 내전이 벌어져서 적군이 승리합니다.
외부 간섭군이던 미군과 영국군에 캐나다군이 철수한후 연해주에서 버티던 일본군도 1925년초 북사할린에서
철수했는데,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 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고 협상국에 약속했지만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에 이어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호수 서쪽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합니다.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보다 수십배나 많았으며 다른 간섭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주둔하며
괴뢰국을 건설하려고 했으니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행동에 ' 땅
욕심을 부리는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으며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니, 빈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으니 일본군은 단독이나 백군
과 협동으로 진압했고 자국군이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웁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 더 떨어뜨렸으며, 그리하여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쪽으로 향했고, 1920년 반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도 철수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부농, 무슬림 등 러시아 제국 시대부터
통치를 받다가 독립한 세력들이 바스마치 운동을 일으켜 1940년대 초반까지
산발적인 싸움을 계속했지만 대세는 기울어서 적군과 이후의 소련군에게 진압됩니다.
러시아 내전은 백군의 완벽한 패배와 신생 강대국 소련의 성립으로 끝났으니..... 적군은
'군대' 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병력과 패권을 획득했으나, 백군은 완전히 찢어져
군벌 집단으로 변해 버리고 러시아 백군 파벌 인사들은 도망가거나 죽었거나 추방 당합니다.
내전 중 백군 인사들이 유럽 국가로 망명을 하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맹목적인 공포에 가까운 유럽의
반공주의를 강화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소련군 포로들이나 반공 러시아인들을
긁어 모아 만든 러시아 해방군등 친독 부역자 세력은 백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소련은 세계 열강의 침공을 받은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공을 우려하게 되었는데,
스탈린은 광적으로 공업화에 집착했으며 또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 실패와 러시아 내전의 위기는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혁명 확산론을 좌절시키고 공업화 및 생존을 주장한 스탈린의 주장을 강화시켰습니다.
이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훈은 소련식 기동전에 대한 교리가 정립되는 배경이 되었으며 또한
러시아 내외의 반볼셰비키 세력을 제거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첩보 능력이 발달해 냉전시기
소련의 첩보전 능력에 일조하기도 했고..... 강제수용소가 설치되았지만 내전후 대부분은 석방되었습니다.
또 소비에트 적군이 실전을 거치면서 군 내의 합의적· 민주적 분위기가 약화되고 일사불란한
군대식 관료체제가 대세가 된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지니,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의
성격을 크게 바꾸었고 이것이 소련의 관료 독재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여겨집니다.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연해주 일대와 중국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그때까지 일본의
뒤를 봐주던 영국과 미국의 반감을 사게 되어 1930년대에는 미일관계가 전쟁만
없을 뿐서로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게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러시아 내전에서 극동 지방의 수많은 한인들이 적군에 가담했는데, 일본이 연해주로 들어오니 적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에서 건너온 한인들은 사상적인 이유 보다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적군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으며.... 적군 내에서 한인 부대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증언이 많습니다.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 지휘에 따라 백군과도 전투했으며,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가담했던 한인들도 국공내전에서 국민혁명군과 전투에서 소모된 경우가 비슷한데,
적군뿐만 아니라 백군에 가담한 한인들도 있었으니 국군 제5보병사단의 초대 사단장 김상겸 대령 입니다.
또 이 전쟁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진영의 분열을 일으킨 한 요인이
되기도 했으니 그 결과가 자유시 참변으로 좌우 할것 없이 수많은 독립군이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국민혁명군과 대한민국 육군 장성으로 중일전쟁과 6.25 전쟁에서 일본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우는 김홍일 중장도 불과 21세의 나이로 적군에 가담해
대한의용군을 지휘하며 시베리아 전역에서 백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연 철수전을 수행합니다.
다만 정치적인 이유로 적군에 가담한 것이 아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자유시
에 독립군들이 집결하니 휘하 병력을 데리고 자유시로 가라는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중간쯤 왔을 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걸 알게 됩니다.
러시아 한인촌에서 백군측에 일본군이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적군에
가담한 것인데, 김홍일은 공산주의자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고 소련측이 한국
독립운동을 돕지 않자 배신감에 치를 떨며 미련없이 러시아를 떠나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합니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 전편에서 언급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서는 배를 타고 유럽으로 귀국했는데......
이 과정에서 돈을 구하기 위해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측에 매각합니다.
체코군 무기의 입수로 한국독립군이 일본군과 봉오동 전투 및 청산리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1909년 신민회
(新民會) 는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등을 파견해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터를 잡은후
이동녕을 소장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으며 1911년 제1기 졸업생 변영태(卞榮泰)등 40명을 배출합니다.
청년들이 모여들자 1919년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로 이전해 신흥무관학교로 바꾸었으며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는 중에 3·1 운동후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였으니,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육군 중위 지청천 (池靑天), 윈난 (雲南 운남) 사관학교 출신
이범석 (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들어오면서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날로 증가합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잇단 사고로 1920년 가을 2,100명의 졸업생을 낸 가운데 폐교되니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지역 안도현 (安圖縣)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 (洪範圖)
부대와 연합하였고 김좌진 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 에 도착해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합니다.
그후 봉오동 전투가 벌어지니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길림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
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승리한 전투로 삼둔자 - 안산 - 봉오동 전투 3차례를 말합니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鳳梧洞) 에서 홍범도 (洪範圖) 가 이끈 대한독립군, 안무(安武)
가 이끈 국민회군, 최진동 (崔振東) 이 이끈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
독군부와 한경세 (韓景世) 가 이끈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야스카와
지로 (安川二郞)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 (越江追擊大隊) 에 승리합니다.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 독립군이 함경북도 종성군 (鐘城郡) 강양동에 진입해 일본 순찰소대를 습격하자
일본군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19사단에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를 침입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서니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대를 삼면에서 포위하여 사격한후 폭우가 내리자 재빨리 후퇴합니다.
독립운동사와 상하이 독립신문등은 임시정부의 호외를 근거로 삼둔자 - 안산 전투
일본군 120명 사살, 봉오동 전투 150명 사살에 아군 전사 4명이라 했으나, 강
룡권의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에 따르면 현장을 수차례 답사한 안화춘씨의 말을 근거로....
첫번째 6월 5일 삼둔자 전투는 남양수비대 17명이 두만강을 건너 산기슭을 따라 삼둔자 마을
김명오 노인집으로 접근하자 눈치를 챈 신민단원 30명은 서남쪽 마패
방향으로 재빨리 후퇴했으니 죽은 사람은 김명오 노인의 아내와 장남, 차남의 처와 손자뿐입니다.
2번째 6월 6일 안산 전투는 강용권씨가 현장을 방문해 당시 12살 이었던 최상준 노인을 만나 들은 얘기로는
신민단원 10여명이 최진국의 집에 묵고있는데 일본군 척후병 한명이 3채뿐인 집을 수색하다 최진국
의 집 방문을 여니 독립군이 사살했고 그 총소리에 일본군이 사격하니 독립군은 뒷문으로 해서
숲으로 달아나는 중에 1명이 죽은게 전부인데.... 두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했다고 엄청 부풀린 것입니다?
6월 7일의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800명 부대가 봉오동으로 들어오는 계곡에 매복해
일본군을 습격한 제대로 된 전투로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했는데 오후 4시 경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더니 폭우가 쏟아진후 독립군은 재빨리 후퇴했으며 일본군은 호박골로 퇴각하면서
조선 풍리에서 두만강을 건너오던 지원병과 피파골에서 저들끼리 오인 사격으로 수십명이 죽었습니다.
강룡권의 동북항일운동 유적 답사기에는 연변대학 역사학 교수 박창욱이 도문시 오공촌의 최상준과 홍광향
홍위촌(곡수) 리종만의 증언을 들었고, 안산의 김동진(1986년 72세), 남봉오동의 한동선 (1986년 75세),
김리환(1986년 75세)등도 폭우가 전투를 종결지었다고 말했으며 야스가와 소좌 보고서등은 일본군의
전사자는 1명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봉오동 전투 희생자는 없고 청산리 전투는 11명이 죽었다며 합사했습니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제는 10월에 훈춘 사건을 일으켜 이것을 병력 진입
구실로 삼고서 만주의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합니다. 러시아 내전에 개입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귀국하면서 1920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부 병사들은 무기를 북로 군정서에 판매했습니다.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는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 수비대
가 송화강 을 건너 서진해 북로 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됩니다.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을 피해 화룡현 서부로 이동해 홍범도 부대와 만났으며 10월 19일 회의에서 전투를
피하기로 결정했으나 일본군이 근접한 상황이라 추적을 따돌릴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하니, 10월 21일 김좌진의 제1제대와 이범석의 제2제대는 청산리 백운평 위쪽 고개
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해 전투준비를 하는데 청산리 계곡은 25km 에 달하며 울창한 삼림지대 였습니다.
21일 아침에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 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였고 야마다가 지휘하는 본대가 도착해 총격전이 벌어지자 김좌진은 이범석
에게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하는데, 독립군은 일본군 960명을 사살
하는 등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했으나... 일본측 기록에는 반대로 독립군을 격퇴했다고 나옵니다.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 본대를 피해 철수하던 시각에 인근 이도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해
일본군이 자기들 끼리 서로를 오인 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져서 독립군이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했지만, 일본측 기록에서는 아예 전투 자체를 벌이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22일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 고지로 이동시켜 포위 공격해 오는 일본군 가노 노부테루
대좌가 지휘하는 27기병연대와 교전했는데..... 날이 저물자 탄약 부족과 일본군 증원
부대를 우려한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는 어랑촌 부근 고지에서 철수했으며 23일 부터
추격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 를 따라 상류로 이동합니다.
24일 저녁 8시 천보산의 일본군 중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 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해 급습하니 난전이 벌어졌는데.... 새벽에 일본군을 피해 안도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으며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아져오자 북만주로 후퇴를 거듭하다가 부대 유지가 불가능해져 독립군은 해산합니다.
독립군은 3천~4천 중에 1,200~3,000 명이 교전에 참가했으며 일본군은 3만 중에 5,000명이
교전했는데 아군은 60명 전사에 90명 부상이고, 일본군은 한국의 주장은 1,000명 사살에
3,300명 부상이지만.... 반면에 일본의 기록은 "11명 전사에 24명 부상" 이니 엄청 차이가
나는데... 고구려 연구재단 장세윤 교수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전과가 과장됐다고 말합니다.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에서 가노 연대장 이하 1,600명을 사살했다고 했고 해방후 이범석의 자서전
에는 3,300명으로 늘렸는데 박창욱 연변대 교수는 야스가와 소좌 1개 중대 병력이 선두부대로 21일 백운평
에서 김좌진 부대와 9시 반부터 접전하니 전투는 30분간 이어졌으며 그후 야마다지대는 오후 2시 반까지
북로 군정서를 추격해 노령까지 갔으나, 후퇴한 북로 군정서 부대를 잃어버리고 철군하니 '백운평 전투' 입니다.
한국측에서는 이 전투를 대서특필하지만 전투 시간은 한 시간도 못 되며 일본군의 추격· 수색 시간
까지 합해도 4시간 정도이고 설령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가 전멸되었다고 하여도
백여명 남짓일 것인데 이를 가노 기병 대좌 이하 960명을 사살했다고 말하니 백운평이나
야지골, 완루구나 고동하 현장에 가본 이들은 가파르고 협소한 산지라 큰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실명이 거론되는 '연대장 가납' 은 가노 노보테루 연대장인데, 제27기병 연대는 퇴로 차단을 위한
기동에 나섰으나 습지가 너무 많아 퇴로 차단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어랑촌에 포진한 것으로
나타나니 현장에서 멀리 있었으며 가노 노보테루는 1922년까지 군 생활을 계속한 것으로
나오고 제3자 중국측 기록에도 11월 13일 중국지방 군경들이 조사한 보고서에도 이름이 나옵니다.
후퇴를 거듭한 독립군은 소련 국경에 이르러 해산했음에도 일본군의 추격이 멈추지 않자 국경인
밀산으로 불러모으니 10개 독립군 단체 3,500명은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해 강을 건너
소련땅 자유시로 들어가는데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지휘권 다툼에 휘말리게 됩니다.
독립군은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자 거부하다가 소련군과 이르쿠츠크파의 공격을 받아 전투에서 수십명
이 죽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어 소련군에 편입되었고..... 소련으로 가지 않은 이범석과 탈출한
김좌진을 제외한 독립군은 소멸되니 이후 13년간 만주에서의 부대 단위 독립군 전투는 전혀 없습니다.
홍범도 부대는 소련군의 무장 해제 요구에 순순히 응했던 덕분에 피해는 없었는데 포로가
된 독립군에 대한 재판관으로 참석한 후에는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을
만나 권총을 선물받고는 소련 공산당원으로 연금을 받으며 살다가 1943년에 죽었습니다.
“저명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 묘,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홈은 천추만대에 길이 길이 전하여
지리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시의 홍범도 장군 묘에 세워진 철비에 새겨진 문구 입니다.
한국에서는 독립군 측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군
1,000여명 (훗날 이범석은 무려 3천명?) 을 사살한 대전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교차연구를 통해 너무 과장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전투는 추격하는 일본군을 피해 독립군이 계속 후퇴하는 양상이었으며 적을
수없이 죽였다는 백운평 전투는 일열 종대로 통과하는 좁은
길이고 불과 1시간 짜리 전투 인데다가 일본군은 모두 1개 중대에 불과 합니다.
1979년 일본 사학자 사사키 하루타카의 청산리 전투 논문에 따르면 일본 제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 측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일본인 사상자가
1천명 이라는 한국측 기록 보다 훨씬 적은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이 수치는 후생성의 명단 및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명부와 정확히 일치하며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에서 편찬한 “간도출병사 (間島出兵史)” 도 피해가 미미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 서전에서 승리한 독립군이 일본군 본대의 포위를 피해 달아나자.... 일본군은 독립군을
뒤쫓았으나 소련땅으로 도주해버리니, 독립군에게 군자금과 식량을 제공했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만주의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 학살하고 불질러 폐허로 만들었는데 화룡현 장암동에서
28명의 기독교인을 세워놓고 소총사격을 했으며, 연길현 의란구에서는 30호 전 주민을 몰살했습니다.
연길현 와룡동에서는 얼굴 가죽을 모두 벗기고 두 눈을 빼냈고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태워
버렸으며 어린 소녀를 폭행한 뒤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으니 미국인 선교사 마틴은
“피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 라고 개탄하고 있으며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 까지 27일간 학살된 조선인은 3,469명이었다니... 만주에서 독립군의 근거지는 사라진 셈입니다.
이범석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싸운후 일본군에 쫃겨 만주를 떠나 다른 독립군들이 소련땅으로
달아나 자유시 참변에서 2,800명이 죽거나 행불 또는 항복해 소련군에 편입되었지만,
그는 용케 중국 본토로 달아나서는 운남 육군 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을 지낸 후 광복군 참모장을 지내고 해방후 귀국해 대한민국 국무총리겸 국장장관을 지냅니다.
이 시기에 반볼셰비키 세력인 러시아 귀족들과 지주층, 러시아 정교 사제, 반공산주의자들이 난민이 되어
이스탄불, 파리, 베를린, 뉴욕 등 전 세계로 망명했는데, 극도의 반소· 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 미국의 반공 정서 형성에 기여했으니 나치를 지지했던 반공주의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기도 합니다.
일부 백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독일이 조직한 러시아인 부대에 입대하기도 했는데, 백군 장군 중 하나인 표트르 크라스노프는
백군이 망하자 독일로 탈출했고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SS 카자크 군단을 지휘합니다.
그외 살아남은 백군과 반공주의자들은 소련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중앙아시아나 몽골,
시베리아 등지로 숨어들어 도적이 되거나 중화민국의 땅이었던 만주와 신장 중가리아
로도 넘어갔으니 이들을 '백계 러시아인' 이라고 하며 중화민국에만 8만명이 넘게 망명했습니다.
백군 출신들은 중국 군벌의 용병이 되어 중국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으며, 백계 러시아인
여성들은 군벌의 정부나 첩이 되기도 했으니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도
백계 러시아인들 묘사가 나오며, 하얼빈에는이들만의 디아스포라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백계 러시아인은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공산화될때 제3국으로 피난가거나, 국공내전 전후 소련
으로 송환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러시아계 중국인이 되었지만, 중화민국에서 살다 죽은
어떤 백군 장군의 묘비는 수십년후 문화대혁명 당시 지나가던 홍위병들에게 폭파되기도 했습니다.
백계 러시아인 난민들은 일제강점기 조선까지 들어왔는데 다시 미국이나 호주로 떠났으나
일부는 조선 땅에 남았으니 1936년 서울에 73명을 포함해 203명이 거주했는데
약장수, 화장품 장수, 양장점을 운영하거나 포수로 생계를 이었으며 북한 지역에
있었던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던 러시아인들은 6.25 전쟁 때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압록강변의 만포로 끌려갔다가
종전협정 직후 1954년에 교환으로 8명이 남한으로 다시 돌아왔으니, 이때 돌아온 백계 러시아인
들은 거의 미국 등지로 이민갔지만 1961년까지 서울에 남아있던 찌호노프 노인 같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화 고요한 돈강 원작은 미하일 숄로호프의 소설이니 소련시절에 제작되었으며 CG 사용 없이 대규모 인원이
투입되었는데, 주인공은 카자크족 청년 그리고리 멜레호프로 우크라이나 돈강 부근 시골 마을의
생활상을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되니 영화는 3부작으로 한 편당 3시간인데 러시아 내전 파트는 2부 부터 입니다.
딕터 지바고는 러시아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장편 소설로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의 20세기 러시아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는 대하소설이니 그 명성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하며 러시아의 눈보라치는 설원이 나오니 노벨상을 수상했고 영화로 촬영됩니다.
영화에서 볼세비키가 장학한 모스크바에 부잣집 대 저택에는 가난한 빈민 여러 가구가 들어오니 주인은 그들
에게 대부분의 방을 내 주고 단 한 개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모습이 아직도 인상적인 장면인가 합니다.
적과 백은 내전에서 적군 편으로 가담한 헝가리 의용군들이 주인공이니 전투에서 패한후 백군 카자크에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기도 하고 러시아인만 처형하고 헝가리인은 풀어주기도 하는데, 백군 지휘관이 헝가리인
포로에게 "이건 우리들의 전쟁이다" 라면서 끼어들지 말고 너희나라로 돌아가라고 타이르는 장면도 나옵니다.
제독의 연인 (러시아어 원제는 '제독') 에서 제목의 "제독" 은 남주인공인 백군 사령관이자 러시아국의 수반이었던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뜻하며 콘트리부치야는 마지막 백군 지휘관 아나톨리 페펠랴예프가 주인공 입니다.
소비에트 정권은 서슬푸른 체카의 감시 아래에서도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시위가 만연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던
1차 세계대전후 대도시 식량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볼가강 유역 등지에서 철저하게 집행된 식량
공출 작업을 벌였는데 이로 인한 아사자와 병사자가 100만명 단위인 전사자와 부상자 보다 훨씬 많이 나왔습니다.
소련 정부가 내전 이후 인정한 통계에서도 공출로 인한 농민 아사자만 500만명에 달하고, 최대 1,000만명을 넘길
거라는데, 아사 사태로 이어진 우크라이나 대기근과는 달리 레닌 정권은 조건부로 국제 구호단체의 구호를
막지는 않았고 아사사태를 완화하기 위해 종교계의 재산을 1920년대 초반부터 압류해 기근 대처에 활용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만 제국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붕괴된 4대 제국
중 하나였으며, 이들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한 날은 6월 22일로 프랑스군이 침략한 날인 6월 24일과
비슷했고 스몰렌스크를 점령한 날도 8월 10일로 양쪽이 모두 같았고 둘 다 수도를 공략 못한 것도 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수도는 아니지만 러시아 제국의 상징적인 도시였던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위해 길목에 있는 거점 도시들만 점령한 반면 히틀러는 유럽 러시아 지역을 모두 점령해서
게르만땅을 만들려고 했기에 진군하는 지역마다 소도시든 대도시든 상관없이 모든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때문에 나폴레옹 보다 3개월을 더 쓰고도 모스크바 지척에서 후퇴했지만.... 한겨울인 12월
2일 까지도 진격했으며 모스크바에서 30km 지점인 힘키 부근에 다다랐는데, 힘키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던 노선표 중 하나의 종점이 붉은 광장이었고 얼어붙은
망원경으로 겨우 크렘린궁의 첨탑이 보였다는데... 그 자리에는 현재 이케아가 들어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