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석등을 불을 밝히는 도구나 정원을 꾸미는 장식물로만 보면 안 된다. 고려 말부터 장명등이라는 이름으로 능묘 앞에 세우긴 했어도 석등은 그 자체가 부처가 중생에게 전하는 진리의 말씀인 법(法)을 상징하거나 진리를 밝히는 지혜의 상징물이다.
절에 석등이 하나만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설령 하나 이상 있다하더라도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석등을 가로등과 같이 줄지어 세우는 것은 몰상식한 생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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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 영암사지쌍사자석등 석등은 진리의 말씀이며 진리를 밝히는 지혜의 상징물이다. 사자두마리가 오롯이 서서 부처님의 말씀을 토해내듯 불집을 받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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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석등은 장식용으로 사용되지 않아 공원이나 주거공간에는 세워지지 않았다. 청와대 앞에 세워진 일본식 석등이나 지금은 철거됐지만, 경복궁 지하철에 일본식으로 배열된 석등은 우리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 석등을 장식처럼 세워놓는 경우가 많다. 일산 호수공원의 경우, 호수를 건너는 다리에 4개의 석등이 서있는데, 4개의 석등이 한데 몰려있는 데다가 아래 받침돌, 기둥돌, 윗 받침돌이 모두 생략돼 우리의 정통 석등 양식에서 벗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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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산호수공원 석등 석등4기가 장식용으로 설치되어 있어 이 다리를 건널 때면 기분이 좋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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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 불릴 만큼 탑이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석등도 많아 '석등의 나라'라 불린다. 모두 280여 기가 남아 있다고 하니 과연 그럴 만하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석등을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그 수가 많다보니 형태도 다양하다. 석공의 창조능력에 따라 혹은 지방 호족의 힘을 과시하거나 정치세력의 다툼과정에서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이형형태의 석등이 나타났다. 이형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이기도 해 통일신라시대에는 이형 형태로 보이지만 고려시대에 와서는 딱히 이형이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통일신라의 석등은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불국사대웅전·극락전 앞 석등과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 보림사석등, 법주사사천왕석등이 전형이다. 바닥돌(지대석)만 네모고 하대석(아래받침돌), 간주석(기둥돌), 상대석(윗받침돌), 불집, 지붕돌 모두 팔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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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보림사석등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등이다. 지붕돌만 이중으로 되어 있는 점은 특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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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기본형과 비교하여 이형 형태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으나 새로운 스타일이 지방에서 나타나난다. 주로 호남지역에서 유행한 장구모양석등(고복형)이다.
장구모양석등은 일반석등과 다를 바 없으나 기둥돌이 장구몸통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단순한 팔각 양식에서 벗어나 큰 불집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게끔 기둥돌을 장구모양으로 바꾸고 규모도 크게 해 웅대하게 보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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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 개선사지석등 기록에 등장한 최초의 석등(891년, 진성여왕5년)이다. 불집 둘레에 ‘건립석등(建立石燈)’이라 명기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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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장구모양석등은 합천(청량사석등)이나 양양(선림원지석등)에 세워지긴 했으나 구례(화엄사각황전앞석등), 임실(용암리석등), 남원(실상사석등), 담양(개선사지석등) 등 대부분 호남지역에서 유행했다.
그 중 선림원지석등은 호남에서 멀리 떨어진 양양에 세워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 만큼 선림원지는 과거에 사세(寺勢)가 대단한 절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데 석등도 비례가 아름다워 아주 맵시가 있고 조각솜씨가 뛰어난 수작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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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 선림원지석등 호남지역에서 유행한 장구모양석등이 양양에서 만들어진 점이 특이하다. 시대는 개선사지석등보다 앞선 804-886년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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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에 따라서는 합천 청량사석등이 장구모양석등으로 시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개선사지석등은 891년에 만들어지고 용암리석등은 고려 때에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으니 용암리석등이 가장 늦게 만들어졌다고 보면 장구모양석등은 거꾸로 호남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후 호남지역에서 대유행했는지 모른다.
통일신라시대의 이형석등은 기둥돌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위의 장구모양석등보다 더 파격적인 것은 기둥돌에 사자를 등장시킨 것이다. 부처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 하고 석등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전하는 진리의 말씀인 법을 상징하므로 석등에 사자를 등장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법주사쌍사자석등, 중흥산성쌍사자석등, 영암사지쌍사자석등 등은 사자두마리가 서로 마주서서 뒷발은 아랫돌에 버티어 서고 앞발은 윗돌을 바치고 있는 모양이다. 양다리를 벌린 채 엉덩이는 바짝 당겨 긴장감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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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쌍사자석등 기둥돌에 쌍사자를 등장시킨 이형석등이다. 보호각 속에 갇혀있어 사자후(獅子吼)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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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계단으로 통하는 석축위에 황매산의 힘찬 기운을 드러내며 석등을 받치고 서 있는 영암사지쌍사자석등의 쌍사자의 모습은 압권이다. 박물관 안에 갇혀있는 중흥산성쌍사자석등이나 보호각안에서 보호받는 법주사쌍사자석등과 달리 영암사지쌍사자석등은 자연 속에 우뚝 서 만물을 호령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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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사지쌍사자석등 무지개계단으로 이어진 석축위에 황매산 기운을 받아 힘차게 서있는 쌍사자석등은 석등 중에 수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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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앞 석등처럼 석등에 인물상을 배치한 파격적인 석등도 있다. 탑 안 인물은 화엄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스님 어머니고 석등에 있는 인물은 연기스님이라 하는데, 누구라도 상관없다. 누가 보더라도 무릎 꿇고 불집을 받치고 있는 인물은 주변을 환하게 밝히며 사사자탑 안에 계신 인물에 극진한 예를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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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앞 석등 기둥돌에 인물상을 배치한 이형석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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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신복사지석조보살좌상과 월정사석조보살좌상과 같이 탑 앞에서 공양을 드리는 공양보살좌상은 있어도 탑 앞에서 공양을 드리는 공양석등은 이게 유일하다.
고려로 넘어오면 전체적으로 둔중해지면서 신라의 팔각에서 벗어나 네모 모양(방형)이 나타난다. 윗받침돌, 아래 받침돌, 불집 모두 네모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하는데, 특히 불집에 네 개의 돌기둥을 세워 네 면의 화창이 모두 뚫려 보이게 하였다.
고려시대 석등으로 관촉사석등, 현화사지석등이 대표적인데 기둥돌 외에는 네모 모양을 띠고 있다. 두 석등 모두 파격적이고 개성이 강하며 기존 형식에서 탈피하여 새롭게 만들어졌다. 지방호족의 힘이나 종파끼리 다툼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내기 위해 육중하고 둔중해 보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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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화사지석등 고려시대 석등양식인 네모모양석등이다.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내기 위해 우람하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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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미륵리사각석등은 기둥돌마저도 네모다. 사각모양의 석등은 현화사지석등과 같이 주로 고려수도인 개경지역에서 나타난 양식인데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지역에 나타난 것이 특이하다. 바로 곁에 있는 미륵리석등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팔각석등인데 같은 장소에서 고려와 신라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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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리 사각석등 고려시대 때 유행하던 네모모양석등인데 기둥돌도 네모나게 만들어 앙증맞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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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는 개성의 시대다. 불상과 같이 개성이 강한 석등이 만들어졌다. 신라인의 눈으로 보면 고려시대의 석등은 모두 이형석등으로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기둥돌은 전형적인 양식 없이 다양해 졌다.
관촉사석등은 원형이고 현화사지석등과 화천계성리석등은 장구모양이고 고달사지석등은 쌍사자와 부재로 만들어졌으며 미륵리사각석등은 네모이고 미륵리석등은 팔각이다. 기둥돌 기준으로 보면 고려에는 이형이 없거나 모두 이형석등으로 간주돼야 한다. 그만큼 고려는 개성의 시대였다.
사자를 이용한 석등은 고려시대로 그대로 이어진다. 고달사지쌍사자석등은 통일신라 때의 쌍사자석등과 달리 사자두마리가 쭈그리고 앉아 윗돌을 직접 받치지 않는다. 윗돌과 사자사이에 다른 부재를 넣어 장구모양 기둥돌을 덧댔다. 고려시대의 불집이 대체로 방형인데 반해 이것은 부등변팔각형이어서 흥미롭다. 쌍사자와 장구모양 기둥돌, 부등변팔각형의 불집, 이 석등은 그야말로 이형 중의 이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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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쌍사자석등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이형만을 취해 만든 이형 중에 이형석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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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유행했던 네모 모양석등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진다. 회암사지쌍사자석등과 청룡사지사자석등은 모두 네모 모양이다. 윗받침돌과 불집, 지붕돌 모두 네모난데 조선시대에 오면 사자가 기둥돌 뿐만 아니라 아래받침돌로도 사용되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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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룡사지사자석등 사자가 아래받침돌역할을 하는 이형석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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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석등 중 압권은 흥국사석등이다. 여수 흥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이 석등은 거북을 아랫돌로 삼아 직사각형의 기둥돌 위에 네모난 불집을 올렸다. 불집기둥에는 공양인물상이 새겨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지붕돌에는 기왓골을 새겨 넣어 목조기와집 지붕을 재현했다.
아랫돌을 거북모양으로 새긴 것은 이 석등이 유일한데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만든 개성 강한 석등이다. 흥국사대웅전 축대와 모서리에는 게와 자라가, 처마에는 용두가 조각되어 있어 대웅전이 반야용선을, 그 앞마당은 바다를 상징하고 있다. 거북이 석등을 이고 가는 거북석등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거북석등은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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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국사석등 거북이 아래받침돌 역할을 하는 이형석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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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세계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진리의 세계, 정의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거북석등은 우리 곁에는 없는 것인가. 돌로 굳어버린 거북을 살려 등불을 밝히고 우리 모두를 보듬고 정의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거대한 반야용선을 이끌 진짜 선장이 나타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