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사무쳐 더욱 처연해 보이는 아름다운 섬
사시사철 섬이 푸르다고 해서 ‘청산도’라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신선이 산다는 섬이라 해서 ‘선산도’로도 불렀고 ‘선원도’라고도 했다고 한다.
‘청산도(靑山島)’는 이름 그대로 푸른 섬이다. 맑고 푸른 다도해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예로부터 신선들이 산다는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이라고도 불렸다.
면적 33.28km2, 해안선 길이 42km로 섬 한가운데에는 385m인 매봉산 이외에 대봉산(334m)·보적산(330m) 등 300m 내외의 산이 사방에 솟아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해 사방으로 흐르는 소하천 연안을 따라 좁은 평야가 발달했으며, 중앙부와 서부 일부 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남쪽 해안에는 10∼20m의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여 경승지를 이룬다. 청산도는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 등 4개의 유인도와 여러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5배 정도. 1,500여 가구가 살고 있지만 대부분이 노인이다.
청산도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서남해안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일대가 전란에 휩싸여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가 효종 때 다시 입도(入島)했다. 이 지역은 제주도와 연결되는 해로상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끊임없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왔다. 이들 왜구들의 침해 사실을 살펴보면 고려 말, 조선 태종(1409년) 때부터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도주하는가 하면 약탈도 많이 하였다. 이러한 왜구들의 잦은 출몰과 임진왜란으로 청산도를 비롯한 주변 도서 지역 주민들이 흩어지게 되었고 청산도 역시 공도(空島)에 이르다가 지리적 요충지로서 크게 부각되어 군대가 주둔했다.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가 촬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다. 전라남도 끝머리에 위치한 완도에서도 남동쪽으로 약 20km 남짓 떨어진 청산도는 동쪽에 거문도, 서쪽에 소안도, 남쪽에는 여서도와 제주도, 북쪽으로는 신지도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경치는 두말할 나위 없이 빼어나다. 뱃길로 1시간 정도 걸리는 먼 길이지만, 한번 다녀온 후에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두고두고 남는 환상의 섬이다.
청산도의 관문 도청항
완도항에서 비릿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철부선을 타고 50여 분을 달리면 나타나는 청산도길은 도청항을 기점으로 당리와 지리해수욕장으로 나뉜다. 어디서 출발해도 한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청산도의 나들목인 도청항. 도청이라는 지명이 특이하다. 맨 처음 마을 이름을 ‘경치(鯨峙)’라 하였으나 이후 ‘불목리(佛目里)’라 하였고 조세를 받던 기관 국세미도봉청(國稅米都奉廳)이 설치되면서 ‘도청리(都廳里)’로 불려 오다가 폐진됨에 따라 도봉청(都奉廳)이 폐지되고 ‘도청리(道淸里)’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 도청리는 완도항에서 출발하여 목포로 향하는 여객선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항구이다. 해 뜰 무렵 도청리 선착장에 여객선이 들어오면 깨끗한 햇살을 받으며 물결을 가르고 힘차게 들어오면서 울려 대는 뱃고동 소리와 여객선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유행가는 너무나 구성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해질 무렵 목포에서 완도로 가기 위해 여객선이 들어올 때면 황금빛 노을 속에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고, 유행가 〈처녀 뱃사공〉는 섬 전체를 뒤흔들다시피 하며 그 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당시로서는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동네 아이들뿐만 아니라 길을 가던 동네 사람들 모두 유행가를 따라 부르며 내일은 무슨 노래가 흘러나올까 궁금해 하던 때가 있었다.
청산도 중심의 도청항은 주변 해역의 어장 조건이 비교적 양호하여 과거부터 수산업이 크게 발달되었다. 지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삼치와 고등어 파시로 인해 전국적으로 이름난 어항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1968년 청산도를 어업 전진 기지로 지정하고 연근해 조업에 대한 보급 지원 유통 기지가 되었다. 면 소재지인 도청리 항구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유명한 곳으로 여름 성어기에는 사방에서 건착선 수십 척이 몰려와 호황을 이루고 전국에서 고등어가 제일 많이 잡히는 섬이 되었다. 그러나 70~80년대 들어서면서 어업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외지에서까지 몰려든 어선들이 치어까지 싹쓸이하는 불법 저인망 어장이 성행하면서 점차 바다가 황폐해져 갔다. 지금 청산도 근해의 어선 어업은 이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과거보다 훨씬 못하지만 지금도 철에 따라 멸치·삼치·갈치 어장이 형성되고 소라·전복·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채취한다.
고인돌이 남아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나 남해안에 왜구의 출몰이 많아 사람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1608년(선조 41년) 조선시대에 처음 사람들이 청산도에 정착하였다. 1681년(숙종 7년)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설치되어 군사적 요충지로 역할을 하였다. 1866년(고종 3년)에는 청산도에 당리진(堂里鎭)이 설치되어 강진, 해남, 완도 일대를 관장하였다. 1895년 당리진이 해체되었고 완도군이 설치되면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남쪽의 여서면(여서도)을 포함하여 청산면에 소속되었고 1964년 10월 1일 청산면 모도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1년 12월 23일에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청산면사무소와 보건지소가 있고 경찰서, 우체국이 있으며 청산중학교, 청산초등학교가 있다. 마을버스 1개 노선이 운행되며 청산항 선착장에서 도청리, 동초리 방면으로 운행된다.
지리해수욕장, 신흥리해수욕장, 진산리 갯돌밭, 읍리의 고인돌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