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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한수산
"문학은 통념·일상에서 저항하는 내삶의 양식"
오랜만에 찾은 여주의 효종대왕능에는 봄이 흐드러져 있었다.
작년에도 몇 번을 찾아갔었으나, 그때마다 보수공사 관계로 입장객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새롭게 단장을 끝낸 탓인지, 왕능의 신록은 한결 더 싱그러워 보였다.
이제 쓰려고 하는 작품의 하나에 효종대왕의 이야기가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않고 1649년 즉위한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8년여 중국에 볼모로 잡혀가 치욕을 겪어야 했던 그다. 그리고 돌아와서 북벌계획이라는 웅대한 꿈을 펼치다가 겨우 10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요즈음 나는 몇 개의 공간에 대한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마치 주술에 걸린 듯이.
10여년 전 타이페이에 있는 고궁박물관에 몇 번 들른 적이 있었다.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밀리면서 타이완으로 피해올 때 본토에서 가지고 온 보물들이 진열된 박물관이다. 거기에서 극세공의 조각 작품들을 보았던 기억을 나는 충격 속에 간직하고 있다.
손가락만한 작은 상아 조각은 그냥 보아서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이 뱃놀이 모습을 새긴 것임을 알았다.
새끼손가락 크기의 상아를 깎고 깎아서 배를 만들었는데, 배 위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의 술병과 술잔까지 파놓고 있었다.
허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극한의 허무, 무엇을 위해서라는 전제가 전연 사라진 허무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한숨을 쉬면서 확대경으로 그 보물, 그 허무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위해서 그런 조각이 필요했는지.
몇개의 공간에 대한 기억
일관된 집념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에는 어떤 목적도 없었다. 목적성이 없는 허무였다. 왜 무엇을 위해서 그 뼈를 파고 깎고 한 것일까.
조그마한 상아에 대(代)를 물려가면서 배를 새겼던 사람들을 그때 나는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어떻게 이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삶의 기술’을 종교라고 한다면, 그들의 삶에서 그런 믿음을 보았다.
나를 위해, 무엇을 위해… 라는 그 단순하고 명확한 명제가 빠져나간 ‘다만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삶’이라는 무위의 한 평생이 거기에는 있었다.
나는 내 문학도 그러하기를 얼마나 기도했던가.
전장에서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쓰러진 병사의 군화 옆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개미로서는 상상도 안 될 그 거대한 가죽 덩어리. 개미가 그것이 죽어 가는 병사의 발을 감싼 신발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이 쓴 ‘적과 흑’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개미가 병사의 군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듯이, 여름날 하룻밤을 사는 하루살이가 어떻게 계절의 변화를 알 것인가.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그 장렬한 생애를 마치고 떠나는 자리에서, “그토록 기다렸으나 이렇게도 늦게 찾아온 죽음”이라고 자신의 죽음을 노래했다.
딸아이가 고등학생일 때, 한동안 열심히 아이를 데리고 음악회엘 다닌 적이 있었다. 듣고 싶은 곡이 아니라 연주가를 찾아다닌 음악회였다.
그때 딸아이와 함께 들었던 연주회에는 아이작 스턴이 있었고, 로스트로포비치가 있었고, 중년의 온화함으로 성숙한 안네 소피 무터가 있었다.
어린 딸이 아비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렸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 아이에게 노인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이제 자신의 삶을 경영해 갈 그 아이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동기를 마련해 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음악에 몸 바친 노대가의 모습을 알게 함으로써, 아 저런 삶도 있구나 하고 아이가 눈뜨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가르침이 어디에 있을 수 있으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시베리아서 비우는 삶 배워
97년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까지 열흘을 달린 적이 있었다.
기차에서 자고, 기차에서 먹고, 기차에서 흔들려야 했던 그 여행이 끝났을 때는 며칠을 땅이 기우뚱거리는 것 같았다. 문명에서 원시로, 도시에서 황무지로 가는 기나긴 여로였다.
하루 종일 달려도 창 밖의 풍경이 변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륙이라는 그 넓이를 실감하기보다 먼저 두려움에 가까운 대지의 장엄함이 거기에는 있었다.
금빛으로 물든 자작나무가 하루 종일 차창 밖을 지나가기도 했다. 어두운 잿빛으로 뒤덮인 구릉지대가 참혹한 모습으로 차창을 메운 채 한나절을 지나가기도 했다.
그 공간과의 만남은 나에게 소리 없이 말해 주었었다. 더 무엇을 찾아 헤매고 더 무엇을 가지려 하지 말라고.
그렇게 나를 비우도록 한 공간이 있는가 하면 나를 채우게 했던 공간도 있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가 그랬다.
비 내리는 거리를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헤매던 바르셀로나의 하루. 행복에 겨워서 우산을 받지 않고 빗속을 걸었었다. 이제 돌아가면 더 치열하게 살리라. 내 몸의 비늘 하나하나를 떼어내듯 그렇게 시간을 아끼리라 생각했었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을, 이렇게 한적하고 고요하고 우아한 거리를 거닐 수도 있는 것을.
그러나 서울로 돌아온 나는 아무 것도 변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이 닦고, 머리 감고, 전화를 걸고, 약속을 하며… 철 지난 낡은 양복처럼 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못했다. 시베리아 벌판에는, 그 마른 초원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우뚝 서서 내가 탄 열차를 바라보던 사내가 있었다.
벌판에는 오직 그 남자 하나였다. 저 드넓은 초원에서 경영하는 그의 삶, 그것은 얼마나 찬란하던가. 느릿느릿 그의 생애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 않던가.
그 변하지 못하는 나에게, 불에 타들어 가듯 묻는다.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무엇으로 느끼는가. 끊임없는 교통체증에 화를 내면서, 저녁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계단을 뛰어오르면서, 작은 자존심 하나를 지키기 위해 무참하게 구겨버린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버리지 못한 채 늘 부대끼며 살아가는 경쟁심, 그런 속에서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는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잠들 때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하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요즈음은 기도하고 있다.
좀 더 작은 것에서 눈부신 발견을 하면서 가자고. 그렇게 느리게 가자고. 여유와 진정함, 내 삶을 꾸며 줄 그 두 날개를, 주여, 잃지 않게 하소서.
요즈음에 와서야 안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아야 코스모스 꽃잎이 흔들림을 볼 수 있듯이, 개미는 쪼그리고 앉아야 보인다.
달려가는 사람에게 땅 위를 기어가고 있는 저 작은 개미가 보일 까닭이 없다. 개미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나는 얼마나 모르고 살았는가. 여유도 진정함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개미를 바라볼수 있는 지혜
조금 천천히, 조금 느리게, 그렇게 해서 찾아지는 여유로 좀 더 단순해지자. 내 삶에서 진실로 빛나는 것이,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것이 보이지 않는가.
달리고 달리면서 개미 따위가 아니라 사자와 코끼리같이 크고 엄청난 것만을 찾아왔다면 그 한평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지나쳐 버리게 하는지를 왜 나는 이제야 깨닫는 것일까.
문학은 내 삶의 한 양식이었다.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의례(儀禮)였다. 이제 남아 있는 시간에 기대어 그렇게 담담히 가야할 길을 바라본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일그러진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아직도 나에게는 남아 있다.
그것이 복원이라면 남한산성에서 효종대왕능까지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역사에 대한 증언이 될 것이다.
분단 조국에서 태어나 살아오면서 한 지식인으로서 한 치도 비켜설 수 없었던 척(斥)과 화(和)의 문제 그리고 조국이란 무엇이었나를 거기에서 묻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작업으로 역사에 대한 탐구가 남는다. 천주교 박해사를 통해 고결한 영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려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란 무엇인가에 가 닿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진설명> “내가 쓰는 글이 정말로 내가 아침마다 이를 닦는 칫솔만한 사회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한수산씨는 묻고 또 묻는다. 아름답고 섬세한 언어를 하나하나 올려서 지은 그의 소설은 ‘서정의 눈물방울’을 맺는다. 그 눈물은 인간의 마음을 닦아준다.
/김재현기자
<연보>
▦1946년 강원 인제 출생
▦196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 ‘해빙기의 아침’ 당선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4월의 끝’ 당선
▦1973년 경희대 영문과 졸업ㆍ한국일보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해빙기의 아침’ 가작 입선
▦1997년~현재 세종대 국문과 교수
▦단편집 ‘모래 위의 집’ ‘말탄 자는 지나가다’ ‘4백년의 약속’ 장편소설 ‘부초’ ‘밤의 찬가’ ‘유민’ ‘욕망의 거리’ ‘모든 것에 이별을’ ‘사랑의 이름으로’ ‘먼 그날 같은 오늘’ ‘엘리아의 돌계단’ ‘마지막 찻잔’ 등
▦오늘의작가상(1977) 녹원문화상(1984) 현대문학상(1991) 등 수상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성석제
내가 본 "호랑이 발자국" 믿게 하려고 쓴다
어느날 나는 호랑이 발자국을 보았다.
엉덩이를 돌려대고 발자국을 찍는 호랑이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 발자국은 호랑이가 남긴 것이었다.
스무 살의 싱싱한 직감과 생생한 정황에 의한 명백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그 뒤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호랑이, 또는 호랑이 발자국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때는 나마저도 남한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는 둥 호랑이가 왜 발자국 하나만 남기고 주변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겠느냐는 둥 호랑이의 세력권이 천리인데 왜 천리 사방에 그런 이야기가 없느냐는 둥 해가며 그때의 그 발자국을 부정하는 대열에 합류하려고 했다.
이처럼 나는 내가 보고 겪은 것, 만난 사람과 그때의 느낌을 남은 물론이고 스스로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기게 하기 위해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더 범위를 넓혀 말하자면 누구나 인생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호랑이, 혹은 호랑이의 발자국 같은 ‘그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의 호랑이 발자국은 내 고향인 경상북도 상주군 공성면 하고도 어느 산자락에 나 있었다. 1980년에서 81년 사이의 겨울이었는데 대략 81년 1월초였다.
12월 중순에 그 곳으로 들어간 건 알지만 산중에는 달력이 없어 날짜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겨울에는 스님들이 큰 절로 가는 바람에 비는 자그마한 암자가 있었고 그에 딸린 요사채가 내 거처였다.
요사채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 출입문을 닫으면 방안은 그대로 캄캄절벽이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불을 밝히려면 초를 켜야 했다.
그래서 문을 닫아놓고 있으면 밤인지 낮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문을 열면 어느 때는 눈에 반사된 겨울 햇빛이 눈에 시려서, 어느 때는 정말 눈이 시리도록 맑은 겨울밤의 별빛에 신음 소리를 내곤 했다.
그때는 사물과 사물의 경계선이 조리개를 한껏 조이고 찍은 사진처럼 선예도(線銳度)가 높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을 뜨러 양동이를 들고 요사채에서 백 걸음쯤 떨어진 계곡으로 향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가는 길이라 아무 생각 없이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 가운데 무슨 발자국이 하나, 그 길이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는 낙인처럼, 아니 낙관이라 해도 좋고 문장(紋章)이라 해도 상관없다, 찍혀 있는 것이었다.
그 발자국을 보는 순간 나는 머리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는데 그건 내 머리털이 곤두서는 소리였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에 직면한 연약한 한 인간이 느낄 그런 공포, 양동이 하나로 온몸이 무기인 희대의 살인마를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한 개인이 느낄 법한 전율이 그럴까.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내 발을 그 위대한 발자국 위에 얹어 보았다.
길 위에 단 하나밖에 찍혀 있지 않은 그 발자국은 눈이 녹았다 얼었다 하면서 원래의 크기보다 훨씬 커졌을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컸다.
농구화를 신은 내 발이 쑥 들어갈 정도였으니까.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달려 방으로 뛰어들었다.
두께가 십 센티미터쯤 되는 굵은 나무로 테를 두른 육중한 방문, 도대체 절간의 요사채에 왜 그런 성문 같은 방문이 필요한지 알 수 없게 만들었던 그 방문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눈이 내렸다. 겁이 나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물이 필요하면 방문을 살짝 열고 팔을 내밀어 코펠로 눈을 긁어 담아 녹여서 썼다.
다행히 요사채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따로 있어서 황송하게도 부엌을 화장실 대용으로 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살다가 행복하게 늙어죽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사흘이 한계였다.
나흘째 되는 날, 나는 가지고 온 옷을 몽땅 꺼내 입고 요사채 벽에 걸려 있던 암자 소유의 털옷까지 겹쳐 입었다.
싸구려 화학섬유로 만든 그 털옷은 백결선생(百結先生)이 두고 갔는지 온통 기운 자국이었고 한 번도 빤 적이 없는 듯 소 덕석 같은 냄새가 났다.
털옷까지 껴입은 건 날이 추워서가 아니었다. 호랑이가 혹시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 때 고생 좀 하라고, 호두처럼 알맹이를 꺼내 먹기가 쉽지 않도록 하려고 껴입은 것이었다.
부엌에는 불을 땔 때 장작을 다듬기 위해 들여놓은 손도끼가 있었다. 또 전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해우소를 치울 때나 쓸 법한 장화를 마루 밑에서 찾아 신고 한 손에 손도끼를, 한 손에는 기특하게도 양동이를 들고 나는 호랑이 아가리 또는 발자취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의미를 모르는 이상한 고함을 내지르며.
공포의 그 발자국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워낙 단단히 얼어붙어 내린 눈이 쌓이지를 못하고 바람에 쓸려간 듯 했다.
나는 여전히 입속말로 "이이이이" 하는 소리를 내며 그 발자국 속에 장화 신은 발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크기가 비슷했다.
무섭지 않았다. 사흘동안 그 발자국을 화두로 면벽수도를 한 뒤라 그런지 실물을 보니 반갑기까지 했다.
겨울산 오후의 잔양 속 어디고 호랑이, 혹은 호랑이 같은 존재의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계곡으로 가서 물을 떴다. 방으로 돌아와 사흘 만에 밥을 지어 먹었다.
배가 부르고 정신이 돌아오자 내가 본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산중의 유일한 이웃인 고개너머 채석장에 갔더니 사람들은 일 나가고 없었고 밥 해주는 아주머니는 자고 있었다. 내친 김에 마을까지 내려갔다.
마을회관의 새마을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저녁이 되었고 동네 청년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청년들이 건네주는 고구마를 낫으로 깎아먹다가 손가락을 깊이 베었다.
피를 막고 붕대를 감고 소독을 하는 의미에서 한 잔 더 마시고 취해서 구석에 오그리고 자느라 바빴다. 그래서 소설적인 가감 없이 순수한 호랑이, 또는 호랑이 발자국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관념이나 정신의 모험은 일생 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면 진짜 도사는 못되었다. 자꾸 그 이야기를 떠들면서 허풍선이가 되는 데는 성공했다.’
인용부호 속의 글은 ‘나는 왜 자꾸 집을 나가는가’라는 요지의 글의 일부분인데 글을 쓴 시기는 십여 년 전이다.
그때는 소설을 쓰지 않고 품고만 있었을 때다. 품고 있는지 몰랐을 때이기도 한데 그 겨울 그 호랑이 발자국을 본 때로부터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때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오로지 시만 생각하고 살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시가 제일의 의의였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일생 분의 모험, 진짜, 도사, 허풍선이 같은 단어들은 시적이지 않다. 이런 불순하고 수상쩍은 것들은 한 이틀 조용히 내린 눈처럼 순수한 세상에 조금만 섞여도 그 세상 자체를 불순하게 만든다. 돌아보니 그 때 이미 시에서도 삶에서도 불순은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혈기가 방장해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는 불온하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나는 소설은 불순하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내가 쓰는 소설은 불순하다고, 원래는 순수했는지 모르지만 웬 놈의 호랑이 발자국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가 물 뜨러 가는 길 위에 찍힌 이후, 모든 길이며 겨울 오후며 시며 소설이며 양동이며 부엌이며 요사채, 손도끼마저 불순해졌다고.
90년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제 제 길을 찾았다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말을 듣는 김에 더욱 잡스러워지려고, 이른바 크로스오버로 놀아보려고 노력했다. 잡(雜)은 잡대로 재미와 의의가 있다.
불순이 내면적인 것이라면 잡은 외부의 조건이다. 또는 외부와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성향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있다. 나는 잡스러운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잡의 세계에는 ‘세계 콤플렉스’ 따위는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하늘의 섭리인지 잡종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다. 가령 내가 아는 최고의 멧돼지 전문 사냥개는 투견과 수렵용 개의 혼혈인데 자신의 형질을 물려받은 새끼를 낳지 못하고 있다. 지금 명견으로 이름을 떨치고는 있지만 그 명성도 당대에서 그치고 말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또 어떤가, 당대를 넘어설 그 무엇이 불순한 운명에 있을까. 내가 멧돼지 사냥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더 사납고 더 예민하고 더 흉악스럽기를 바라겠다, 멧돼지에게만은.
왜 소설을 쓰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한동안은 호랑이 덕분이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는 건지, 호랑이 발자국에 가만히 발을 넣어보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강석경
내 영혼을 탐색, 그 본질에 닿고 싶다
많은 작가들이 성장기부터 작가를 꿈꾸었다고 하지만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대학신문에 난 추계문예현상 공고를 보고 응모했고 당선이 되었다. 졸업반 때였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금 때문에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써본 것인데 심사했던 이어령 선생님이 나를 불러 격려했다.
선생님은 당신이 맡고 있던 ‘문학사상’에 등단하라면서 단편 2편을 써오라고 했다. 기대치 않았던 추천이었지만 나는 교수 연구실을 빌려 밤늦도록 소설이라는 것에 매달렸다. 혼자 글을 쓸 나만의 방이 없었고 이런 악조건이 나를 문학으로 떠밀었는지 두 편의 단편이 통과되었다.
이리하여 대학을 졸업한 해에 나는 내 인생의 설계도에 없었던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원래는 미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조각과 함께 미술 평론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무의식 중에 썼지만 등단 단편들을 보면 무엇이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는지 알게 된다. 세 편 다 조직 사회에서 자기를 잃은 인물의 자아찾기가 주제였다. 아동잡지사에 근무하다 잡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세 달만에 첫 직장을 잃게 된 당시의 경험이 조직사회 속의 개인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고 사회의식을 싹트게 했다.
20대의 마지막에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작가 생활로 들어섰다. 삼 년간 직장 생활을 했으나 나는 늘 물 위에 뜬 기름 같았다. 마음이 공허했고 어떤 영혼의 갈망에 흔들렸다. 언어는 늘 머리 속에 있었기에 원고지 위에서 그것을 모색해야 했다. 영혼의 눈은 어느덧 조각에서 문학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문학은 필연으로 다가온 자아찾기의 방편이었다.
전업작가 생활로 들어서면서 문학에만 매달리자 글쓰기가 높은 산을 넘는 것처럼 힘겨웠다. 그즈음 기지촌을 배경으로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취재는 충분히 했으나 글이 도무지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늪에 빠진 듯 했고 절망한 나머지 소설을 못쓰면 자살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객관적 거리감과 함께 여유가 생겼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는 것이 힘이 되었다.
소설 하나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다니. 그만큼 젊었고 그때는 문학이 삶의 전부였다. 문학으로 삶의 무의미와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에 매달리지 않으면 반생의 내 삶에 어느새 침투한 허무주의에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이 허무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했다.
나도 한때는 보랏빛 꿈으로 사랑에서 구원을 찾기도 했지만 인간의 사랑은 허망하지 않은가. 인간 자체가 늘 변하므로 감정은 변덕스런 바람일 뿐.
우리가 찾아다니는 사랑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도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끼니 걱정을 했던 50년대 말에도 자가용을 탔던 유년은 풍족했지만 나는 지금도 자개농이 늘어선 방에서 맴돌던 공허의 냄새를 기억한다. 뒷날 생각하니 그것은 행복과도 무관한 물질의 공허였다.
이렇듯 공허한 것들은 비본질적인 것이다. 나는 비본질적인 것에서 등돌리고 문학으로 삶의 본질에 다가가고 나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자아찾기란 다름 아닌 나의 본질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본질에 다가가기’를 위한 모색으로 나는 두 가지 주제를 나의 문학적 화두로 삼았다.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에서 나를 탐구하고, 또 하나는 제도에 상처받은 인물들을 통해 완고한 인습과 제도가 얼마나 우리 삶을 억압하며 비인간적인가를 고발하면서 그 모체인 한국사회를 탐구하려 했다.
1989년도에 인도를 여행했던 일이 떠오른다. 사막지대인 라자스탄에서 사파리투어를 했는데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사막에서 잠을 잤다. 여행자로부터 별이 쏟아지는 사막의 밤하늘에 대해 이미 들은지라 기대에 찼지만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니 광대무변한 우주가 펼쳐진 듯 했고 나는 우주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보는 신세계 앞에서 나의 자아도 해체되었지만 그 작은 반도에서 상처만 받고 살았구나, 불현듯 생각했다. 내가 받은 고통은 본질과 무관한 것이 아니던가. 나는 사막의 밤하늘 아래서 고통의 낭비를 깨닫고 억울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상처를 문학의 화두로 삼고 있다. 그 상처를 푸는 방법으로 문학을 택한 것 같다. 분단 현실로 가족이 상처받은 작가는 끊임없이 분단소설을 쓰고 아버지의 부재도 번번히 작품에 등장한다.
사랑에 상처받은 자의 시엔 사랑과의 투쟁이 되풀이해 그려진다. 그래서 문학을 패자의 기록이라 말하는지 모르지만 작가의 상처 혹은 작중 인물의 상처는 곧 그 사회의 단면이므로 작가들은 상처를 추적하면서 그들이 속한 사회의 왜곡된 면이나 인생의 환부를 열어젖힌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이렇게 기도했다.
“신이여, 지켜보기에는 너무나 역겨운 상처의 밑바닥까지 응시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대중의 무감각한 일상-본질에서 먼-을 비트는 작가의 이 ‘온순한 복수‘는 물론 보다 인간다운 세계를 위한 것이다. 하여 문학은 궁극적으로 휴머니즘이다.
권력이든 제도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은 폭력이니, 문학은 진정한 삶을 방해하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벗겨내면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소설 속에서 크게든 작게든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은 이러한 억압적인 인생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본질에 다가가려는 자유정신에서다.
내가 사는 천년 고도 경주에는 수백 개의 고분들이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작은 산처럼 솟아있는 1,500년의 거대 고분들은 죽음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태고로부터 강물처럼 흘러온 세월 속에 생성과 소멸이 되풀이되는 인류의 삶. 희로애락 속에 발버둥치다가 나도 너도 풀잎처럼 스러지고 저렇게 생명이 순환하는구나, 생각하면 이 단순한 삶의 법칙 앞에 구원의 한 자락을 보는 듯하다.
경주의 고분들은 삶의 원형을 보여주고 한 장의 풍경으로 본질을 말해주는데 왜 나는 밤을 지새우며 광대처럼 수많은 인물들을 조정하고 보상도 없는 소설을 쓰는 것일까.
인도에서 체류할 때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바라나시 힌두대학 교정에 인도 전통의학 체계인 아유르베다에 쓰이는 약초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의 영적 진화에 있어 기초가 되는 육체의 치료로서 아유르베다를 공부하여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나무 그늘 아래서 살까, 생각한 적이 있다. 정말 인생을 바꾸고 싶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국 사회 곳곳에 배치돼있는 정신적 독재자들, 완고한 가부장제, 여성들조차 한몫 하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으로 왜곡된 가족주의를 생각하면 여성작가로서의 나의 문학작업이 바위에 달걀치기 같은 헛된 것으로 느껴졌다.
그때 과감하게 인도전통의학을 시작했더라면, 십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데 죄를 씻듯 수도하듯 공부했더라면 지금쯤은 인도에서 가난한 자들을 치료해주고 약초를 키우며 살아갈 텐데. 그것이 문학보다 더 보람되지 않을까? 나는 왜 문학을 버리지 못했을까? 명예욕이 강한 작가는 자신이 없으면 한국문학사에 공백이 생긴다고 확신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망상을 하지 않는다.
인도 여행 후 ‘모든 집착은 미개한 것’임을 깨닫고 내 존재의 기반인 문학까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언어로 돌아오고 만 것은 그것이 본질인 영혼을 탐색하는 최적의 보루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기술을 연마한다면 누구나 육체의 치료사가 될 수 있지만 작가는 상처에서 진주를 캐내는 정신의 의사가 아닌가.
■ 연보
▲1951년 대구 출생
▲1974년 이화여대 조소과 졸업
▲1974년 ‘문학사상’에 단편 ‘근(根)’ ‘오픈게임’이 추천 등단
▲작품집 ‘밤과 요람’ ‘숲 속의 방’
장편 ‘순례자의 노래’ ‘청색시대’ ‘가까운 골짜기’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내 안의 깊은 계단’
산문집 ‘인도기행’ ‘일하는 예술가들’ ‘능으로 가는 길’ 등
▲녹원문학상(1986) 오늘의작가상(1986) 21세기문학상(2001) 등 수상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윤후명
소설속에서 잃어버린 내 꿈★이 이루어진다
마라토너가 달리는 걸 보면 가슴이 뛴다. 한때 나는 마라토너의 삶을 꿈꾸었다. 중학교 때는 방과후에 홀로 남아 운동장을 돌았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인 서울역 근처에서 노량진 장승백이까지 뛰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내가 이렇듯 ‘토굴’ 속에 들어앉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새다리’인 내 다리를 안쓰럽게 내려다본다.
문학을 한다고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식물학자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고, 역사학자가 되고 싶은 꿈도, 철학자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다. 그러나 문학이 괴물처럼 다가와 버티고 있었다.
도대체 문학이 무엇이건대 내 꿈뿐만 아니라 나를 키워준 아버지의 꿈, 법조인을 만들고 싶어한 꿈도 앗아갔을까.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하지만 분명히 아닐 것이다. 문학을 한다고 나는 그것들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식물과 함께 있고자 애쓰며, 가야 역사를 되풀이 음미하며, 플라톤과 장자를 머리맡에 두고 있다.
그것들을 내 문학 속에 어떻게 녹여 넣을지 골몰한다. 그러니까 나는 잃어버린 게 아니라 문학 속에 아우른다고 해야 하겠다. 나는 문학을 통해서 그것들을 얻는 길을 택하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고등학교 때 내가 처음 택한 특별활동은 문예반이 아니라 원예반이었다. 그리고 싫증을 잘 내는 내가 도무지 싫증내지 않고 지금까지 가장 꾸준히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 풀과 나무들을 사귀는 것이었다.
흔한 것, 안 흔한 것, 이를테면 이름부터 미나리아재비같이 잘 알려진 것에서 참배암차즈기나 놋젓가락나물같이 잘 안 알려진 것까지…그리고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리하여 어느덧 소설에서 묘사 부분에 식물을 갖다놓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이때 나는 식물학자가 되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비록 우장춘이나 현신규 같은 육종학자는 못 되더라도, 나름대로.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식물은 위대하다고 나는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원초적인 뿌리에 닿아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내게 구휼(救恤)과 구제의 빛이며, 이차적으로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먼저인 것은 신목(神木)으로 표징되듯이 기도드리는 대상으로서의 식물이다. 내 고향 땅 대관령의 산신제에서 한 줄기 물푸레나무는 어떻게 몸을 떨어서 신을, 하늘을 맞이하는가. 이토록 영검스럽고 아름다운 식물들이 문화가 되어 함께 숨쉬는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 어떤 ‘거대담론’보다 거대담론이다. 자연, 이른바 환경 앞에 누가 비루한 기치창검을 치켜들고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 문학은 여기에 눈을 돌리는 데 인색하다. 삶의 뿌리를 사랑하는 문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 역사학자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묻지는 말기 바란다. 생각하기로, 역사는 진보하는 것도, 반복되는 것도 아닐 듯한데, 이에 관해서는 여기서 말할 계제가 아니다.
다만 나는 소박한 사실들에 눈길이 쏠려서, 특히 가야국을 중심으로 돌아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여기에 먼저 ‘삼국유사’라는 책이 놓인다. 아아, 아름답고 신비한 책이여. 그걸 쓴 스님이여.
얼마 전에 경북 군위에 있는 인각사라는 절에 다녀온 것도 그래서였다. 그곳은 고려 충렬왕 때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쓴 곳이었다. 지금 그 절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곤 해도, 나는 ‘삼국유사’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의 향기를 느끼려고 코를 흠흠거렸다.
30년도 더 지난 날에 우연히 이 책을 집어든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삼국시대에 있었던 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더 예전, 우리의 시조 단군임금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건국 이야기와 옛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깊은 눈물겨움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울림을 주는 향가!
이 책에 따르면, 가야국의 왕인 수로는 ‘구지가(龜旨歌)’라는 이상한 노래 속에서 하늘에서 내려온다. 무슨 뜻일까. 이어서 ‘여뀌 잎사귀같이 좁은 땅’을 수도로 정한다. 무슨 뜻일까. 그리고 인도에서 왔다는 허왕후를 맞아들인다. 무슨 뜻일까.
그는 임금인 데도 그녀를 왕후로 맞기까지 왜 4년 동안이나 홀로 살았을까. 그때가 서기 48년. 그녀는 분명히 불교를 가지고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건만 왜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훨씬 뒤인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못박히는가.
그녀의 아들들이 들어간 지리산 칠불사의 이야기는? 함께 온 삼촌의 이름이 지금도 김해에 장유면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가야’ 혹은 ‘가라’의 뜻은?
많은 의문들이 소설 속에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핏속을 흐르는 옛 사람의 정신이 또한 나의 주제가 되는 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우리 삶의 원천, 원류로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사막의 어떤 풀은 물을 찾아 뿌리를 몇 ㎞나 벋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 뿌리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비록 혁명과 같이 엄청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근본 정신을 다루려고 노력한다. 대상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의 글’을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뿌리’로 가야 한다. 내가 20년 전에 돈황으로 간 것도 실크로드와 연결된 우리의 뿌리를 찾아간 것이었다. 우리 소설의 무대가 좁다고 무작정 엉뚱한 바깥 세상으로 가는 ‘여행담’이 아니다.
우리의 아픈 이야기, 깊은 이야기가 얽혀 있는 곳, 그곳에서 우리와 나를 접합시키는 작업이어야 한다. 나는 사막에서 물을 찾아 몇 ㎞를 벋어 나가는 뿌리를 알려고 러시아로, 혹은 다른 나라로도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쯤해서 철학을 등장시켜도 좋을 듯하다. 무슨 거창한 철학은 결코 아니다. 단순히 ‘나’에 대한 몇 마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말을 끌어다 쓰면 어떨까. 아무려나 소설가가 되고 나서 우리에게 참으로 부족한 게 ‘나’ 의식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요즘과는 달리 3인칭 소설이 주류였던 시절이었다.
‘나’를 써서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여기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 중요한 촉매가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자아’이다. 자아를 확립하지 않으면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오늘날 소설이 어차피 서양의 방법론을 가져온 것이라면, 근대 정신도 가져와야 한다.
그 지름길이 ‘나’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인(私人) 윤후명으로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나’는 세계를, 우주를 인식하는 깨달음의 주체로서의 ‘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소설이란 이러이러하다’는 고정 관념을 깨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수구적일 때 소설은 발전하지 못한다.
소설은 날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이야기로서의 소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소설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말라 죽고 있다.
소설의 다양성과 아울러 ‘내적 서사’의 중요성은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세계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있다고 하나, 의식은 뒤쳐져 그에 따라가기 힘겨운 모습이 소설에서도 역력하다.
나는 내 인생에서 잃어버렸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소설 속에서 다시 찾는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 가상 공간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내게는 현실 공간이 된다. 환상이 살아나 실현되는 공간이다. 소설 속에서 내 ‘꿈★은 이루어진다.’
오늘도 ‘새다리 마라토너’는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째 홀로 달린다. 절대 고독이 밀려와 숨이 막힌다. 그러나 누가 뭐라든 내 꿈은 북극성처럼 빛나며 나를 이끈다.
내 소설을 바라보는 편견이 있다면, 나를 바라보는 오해가 있다면 그 절대 고독의 심연에서 거기에 답하리라. 누구든 잃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문학은 내게 그것을 찾는 길이다.
그리하여 ‘나’를 찾는 길이다. 그것이 비록 ‘가장 멀리 있는 나’일지라도 이 세상 마지막까지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완성은 어디에 있는가. 결정적인 해답은 아직 없다. 끝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든, 어디까지든 찾아가는 고행(苦行)의 길이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신경림
"詩는 스스로 충만한 한그루 나무"
내가 시 쓰는 일에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이다.
내가 추천을 받은 시는 ‘낮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탄으로 허물어진 집이 즐비하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절망감이었다. 하지만 내 시는 내 절망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시가 우리가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나는 시와 서서히 멀어졌다.
그 무렵 우리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전통적 서정이 아니면 신이니 존재니 하는 관념이었던 터다.
그때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은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들이었다.
거기서 이미 알고 있던 백석의 ‘사슴’이며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의 시집을 구해 읽으면서 내 시에 대한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지만, 특히 내 생각을 크게 바꾼 것은 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힌 것 같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때부터 만나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문학하는 친구들 대신 고서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들의 본을 따서 수요회라는 이름을 붙인, 말하자면 독서그룹으로였다.
이 모임에서는 새로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날 그날의 리더가 되므로 경쟁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는데, ‘공산당 선언’ 같은 문서도 이때 처음 접한 것이다.
시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면서 문학 따위 하지 않으면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와 10년 가까이 살게 된다. 그동안 소설도 써보고 번역도 해보고 또 진로를 바꾸겠다고 엉뚱한 공부도 해보았지만, 별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살이를 계속할 능력도 내겐 없었다. 그럴 때 수요회의 한 멤버가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이 되었다.
겁이 많은 나는 무작정 서울을 탈출했고, 대학을 다니고도 밥벌이도 못하는 미운 털이 되어서 거의 10여 년을 시골서 떠돌게 된 것이다.
이미 아버지는 자식들 학비다 사업이다 해서 전답을 거의 팔아 없애 농사거리도 제대로 없었다.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른 봄 마당에 있는 작약 뿌리를 다 캐 팔았겠는가.
유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시샘도 많은 할머니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때가 되면 보리밥만 한 사발씩 축을 내는 부자를 앞에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종주먹질을 했다.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찾아가 보름씩 혹은 일주일씩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막일이라고 내가 왜 못하랴, 나는 이런 생각이었지만, 나는 이내 현장 감독들과 술친구가 되거나 장부 정리나 해주는 보조가 됨으로써 먹물 티를 냈고, 결국 내 노동현장의 삶은 늘 단명으로 끝났다.
이것을 나는 아는 사람들이 있는 탓으로 돌리고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내가 먼저 먹물임을 내세워 편한 일자리를 찾음으로써 스스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장돌뱅이 친구가 있어 나도 한번 해볼 것이라고 며칠씩 따라다닌 일도 있고, 그의 물건을 나누어 받아 따로 다녀보기도 했으나, 깨달은 것은 먹고 살기가 이렇게도 힘드는구나 라는 사실 뿐이었다.
시골살이 10년에 내가 제대로 밥벌이라도 한 직업은 아마 학원강사 또는 개인교수였겠는데, 이 일도 내가 종종 저지르는 엉뚱한 사건 때문에 대개 뒤끝이 개운치 않게 끝났다.
나는 주위에서 무책임하고 싱거운, 이상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또라이로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이 사이 나는 세상 공부를 다시 했다. 생각보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었고, 장사고 노동이고 쉬운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땅은 사람 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척박한 땅이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뿐 아니라 우리 역사가 할퀴고 간 자국이 너무 깊이 남아 있었다. 가령 어떤 동네에 가 보면 같은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 집이 되었으며 또 어떤 동네는 온통 과부 뿐이었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하기도 하고 그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 동네 살면서 서로 쳐다도 보지 않고 사는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다시 내게 글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글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런 사람들의 정서, 설움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그 10여 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조각 같은 데 시를 끄적였으니 말이다.
그때 그렇게 끄적였던 작품이 ‘눈길’, ‘그날’ 같은 시다. 뿐 아니다. 고(故) 김관식 시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우리 서울 가서 함께 좋은 시 한번 써보자는 권고를 받았을 때 나는 환호작약했다.
그의 말에 큰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 무조건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상경해서 처음 쓴 시가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 시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한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아 시에 대한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몇 해 동안 시골서 다시 글 쓸 기회가 오면 쓰겠다고 생각한 대로 시를 썼으니, 여기에는 내 시를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의 격려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이때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은 날이 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무렵에도 나는 여기저기서 만난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는데, 이들의 생각과 떠돌이 생활 10년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서로 같았다.
이때 쓴 시들이 시집 ‘農舞(농무)’에 들어 있는 시들이다.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나는 한동안 이 명제에 충실했다.
결국 반유신, 반군사독재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 시는 그 무기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이 드러나면 동료나 후배는 나를 문학주의자로 매도했다.
이 매도를 감수하면서 내 시는 경직되었던 것 같다. 문득 나는 시를 쓰기가 싫어졌고, 지루해졌다. 내가 민요에 몰두한 것은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보자는 의도였는데,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는 역시 지난날의 정서요 그 말들은 오늘 살아있는 말이 되기 어려웠던 터이다.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길’ 속의 시를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헤어났다.
고지식하게 민요 어쩌고 할 것이 아니라 민요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배우지 말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란 명제도 그렇다. 그것도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새로 낸 시집 ‘뿔’의 후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내가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단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보고도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그 나무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보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을 줄 것인데.
하지만 그 나무는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이 심은 나무요 키워낸 나무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점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소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라
소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라
문학의 소재 발견이나 창작에 있어서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등 5감각(感覺) 기능을 잘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보는 것은 글을 쓰고 싶은 동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기능을 한다.
숱한 소재들 중에서 어떤 것을 제재(題材)로 선택할 것인가?
이는 사람마다의 안목과 경지에 따라 달라지며,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여행지에서 유적이나 풍경을 함께 접했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안목과 시각에 따라
보석처럼 빛나는 제재를 얻을수도 있고, 그냥 스쳐버릴 수고 있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사물이나 사건을 보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 문학을 하는 것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다름없다.
18세기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각되는 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앞면만, 어떤 사람은 측면만, 어떤 사람은 뒷면만 볼 수 있다.
어떤 사태나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일부분만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볼 수 있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될 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의 삶을 통한 총체적 경험과
지식 정보를 투과해서 인식하는 행위이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본다고 할 때, 한쪽에서 보는 한, 4면을 보지 못하고 항상 3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꺼번에 어떤 사물에서 얻어지는 측면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에서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고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한 바퀴 돌아야 하며, 공중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피라미드들 그냥 거대한 입방체의 구조물로만 보아선 안된다.
도대체 망망한 사구(沙丘) 위에, 인간의 힘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을 왜,
무엇 때문에, 세워 놓았으며 그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불가사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의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이집트를 누비고 지나가다가
사막의 하늘을 찌르고 있는 피라미드와 마주쳤을 때, 그들은 멍하니 숨을 죽여 바라보았다.
알렉산더 시대에 그리스의 성현들이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할 때,
피라미드를 그 첫째로 꼽았다.
피라미드가 불가사의한 것은 이 구조물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에 있다.
피라미드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였지만,
정확히 그 용도와 위치 선정, 건축 방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할 때 데리고 간 과학자와 전문가들에게
이집트의 국토 조사를 위임했을 때 그들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경도를 재었다.
하류 이집트의 지도를 완성했을 때 이 중심 경선이 나일강 하구에 의해 형성된,
사실상 하류 이집트 전역을 이루고 있는 델타 지역을 정확하게 이분하고 있다는 우연의 일치에 놀랐다.
그리고 피라미드에서 직각으로 대각선을 그으면 그 안에 델타 지역이
완전히 들어간다는 사실에는 더욱 놀랐다.
또한 연구 끝에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단지 이집트의 중심 경선으로서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중심 경선으로 적합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피라미드는 정확히 세계지도의 중앙분할선 위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대피라미드의 위치에서 기인한다.
피라미드를 통과하는 세로 선을 그으면 그 동편에 있는 육지의 면적은
서편의 육지 면적과 동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피라미드의 경도는 자연히 지구를 통틀어서 제로 선이 된다.
지구에서 대피라미드가 접하고 있는 위치는 ‘특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치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피라미드의
네 사면(斜面)이 나침반의 네 방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물이 세계의 중심선에 놓여야 한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는 힘으로써 상상을 강요한다.
인간은 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매달린다.
사막 한 가운데 마주치는 고대 인류가 세운 가장 거대한 구조물인 이 피라미드는
풀리지 않는 영원한 물음표로 탐구와 명상의 화두를 던져 준다.
피라미드는 이 불가사의성으로 인류가 피운 고대 문명의 꽃이 되고,
명상의 한 복판에서 삼각뿔의 위용을 조금도 변색시키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나일강만은 알고 있을 테지만 어쩌면 인류가 만들어 낸 것 중에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가 있다면, 이는 곧 신비성의 획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막 가운데서 조우하는 피라미드는 기하학적 단순성을 취하고 있지만,
쉴새없이 불어닥치는 모래 바람에 견딜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견고한 구조체인 것만 분명하다.
이것이 무덤으로 ‘영혼의 집’으로 건축된 것인지,
아니면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능과 영화를 보여주기 위한 기념물로 지어진 것인지 단정할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이 구조물은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영원성의 꽃으로
당시의 모든 역량과 총체성을 다 기울여 완성시켰다는 점이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수많은 재화가 투입되었다.
거기에다 모든 지혜와 경험이 보태어졌다.
사막의 한 가운데 덩그랗게 하늘 높이 치솟은 피라미드를 보면서,
한 시대의 총력을 다 끌어 모아 저것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될 절대적인 의미나 가치가 있었던가,
생각해야 한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되었을가.
생사(生死)와 물질과 정신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와 믿음을 포용한 신앙적인 힘을 터득한 소치였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의 한가운데엔 언제나 ‘인간’이란 화두가 있다.
피라미드를 보면서 그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 앞에 서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삶과 죽음은 무엇이며,
사후의 세계란 또한 무엇인가.
인간으로 풀 수 없는 영원한 물음 앞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모든 힘을 기울인 끝에 건립해 놓은 것이 바로 피라미드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피라미드는 불가사의한 의문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피라미드의 외형만을 보지 않고, 신비속에 가려져 있는 불가사의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나무』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상의 가시영역의 것일 뿐, 지하의 불가시영역의 뿌리는 보지 못한다.
또한 나무의 보이는 모습과 접촉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이를테면 햇빛, 바람, 비, 세월, 새, 나무의 일생을 연상해서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 닿아있는 세계까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보는 것은 눈을 통한 ‘가시영역’에만 국한돼 있다.
그리고 가시영역의 대상물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수필을 쓰는 법을 깨닫는 일이다.
새를 보면서 단순히 보이는 외양만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하늘, 구름, 자유, 방향, 바람, 새의 삶,
이런 불가시영역의 것까지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꽃의 외양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볼 수 있다.
꽃의 보이지 않는 세계, 꽃씨가 새싹을 튀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햇빛, 물, 바람, 나비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꽃이 져야 할 때와 의미까지를 보아야 한다.
‘본다’는 것은 충동, 발견, 관찰, 탐구와 관련이 돼 있다.
‘본다’는 행위가 오감과 닿아있을 뿐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다음 동시, 시 한편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어떻게 형상화하였는가를 살펴본다.
꽃씨 속에는 !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최계락 ‘꽃씨’ 전문>
답답할 땐 귀 대고 / 바다 소리를 듣노라/ 네 목소리 듣는다
격정의 성난 파도/ 어떻게 잠 재웠나
피가 맺혀 뼈가 된 /빠알간 산호초
비늘 고운 물고기떼/ 헤일 길 없는 네 가슴 속
그 세상이 꾸는 꿈은 / 미주알 고주알까지
알고 싶어 슬픈 날엔 / 귀 대고 듣는다
<유안진 ‘소라 껍질’ 전문>
‘꽃씨’라는 소재에서 외형적으로 보는 것은, 꽃씨의 모양(생김새)이지만,
이 보이는 것과 접촉해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은 ‘파아란 잎’ ‘빠알간 꽃’ ‘노오란 나비떼’가 있다.
글쓰는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또한 ‘소라 껍질’이란 소재는 그냥 외형적으로는 한낱 조가비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바다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성난 파도, 천길 물속, 헤아릴 길 없는 네 가슴속을 응시하고 들을 줄 아는
눈과 귀를 가져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소재를 발견하였다고 하여, 단번에 글이 씌어지지 않는다.
이 소재를 면밀히 관찰하여 속속들이 알고나서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오랜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소재와 친근해지지 않으면 그 소재가 지닌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예컨대, 어떤 집에 할아버지가 정성껏 기르던 난초에 꽃이 피었을 때,
할아버지에게선 1년만에 감격과 전율을 느끼는 큰 일이 되겠지만, 무관심했던 다른 가족들은 감격하지 않는다.
미지의 별 하나를 찾기 위해 밤마다 망원경으로 우주공간을 탐색했던 천문학자가
드디어 새로운 별을 찾아냈을 때, 충격과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처럼 관심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좋은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곧 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 소재와 대화를 나누고 정을 들여야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사회학자, 법률학자, 의사, 생물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는 각각 자신의 학문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려 할 것이다. 보는 법과 시각을 달리한다.
사람마다 다른 시각과 안목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새로움과 개성이 빛을 말한다.
보는 법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과 이치를 깨닫는 일이며 글을 쓰는 법을 깨치는 것이 된다.
가시영역의 것만 보지 않고 불가시 영역의 것을 보는 법, 가청영역의 것만 듣지 않고,
불가청영역의 것도 듣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보는 법’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만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
*바깥만 보지 않고 내부를 본다.
*시(時), 공(空)을 초월해 본다.
*정면에서만 보지 않고 거꾸로 본다.
*일시적으로 보지 않고 오랫동안 본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본다.
*형식만 보지 않고 내용을 본다.
사물을 보는 눈썰미가 있어야 하며 새로운 발견과 해석과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첫댓글 우리 반장님 최고!!!
이렇게 좋은 글을 올려주심에 감사!!!
와~~ 너무 좋아요 감사해요.
♥ 100개
이런 좋은글을? 땡큐! 땡큐! 반장님 수고, 최고!^^
저도 아직 다 읽지못했는데요~ ^^ 숙제하시는데 참고하시라구~
꾸뻑--아주 좋은 글, 감사 합니다.
역시 우리 반장님 짱이예요, --꾸뻑
음메 - 좋은거 - 반장님 짱 - ^^
정성이 대단하십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도 반장님 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