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대왕(89-179년) 과 명림답부(67-179)의 관계
신대왕은 태조왕의 동생이며, 차대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백고이다. 성품이 어진 그는 형님이 왕이 되자 변란이 일어나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산속으로 도망쳐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왕이 되었던 것은 차대왕은 살해한 명림답부가 왕으로 추대되면서이다. 명림답부가 산으로 찾아왔을 때 신대왕은 세 번이나 사양을 하였다고 한다.
신대왕은 왕이 되면서 대사면령을 내렸고 차대왕의 태자조차 죽이지 않고 도리어 두 곳의 땅을 식읍으로 주고 양국군에 봉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어진 정치를 펼쳤으나 모든 권력은 명림답부가 장악하였다. 명림답부는 왕에게 고하여 좌보와 우보를 합쳐 국상이란 자리를 만들었고 그 자리에 앉았다. 내외병사까지 장악하였으니 명림답부의 권력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명림답부는 절노부 출신이었는 데 이 때부터 절노부는 왕비를 배출하는 부족으로 자리를 잡았고 계루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권력의 핵심에 앉게 된다.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했을 때가 99세였고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다가 죽을 때가 113세였다고 한다. 신대왕은 명림답부가 죽자 신대왕은 7일동안 조회를 중지했고 무려 20명의 묘지기를 두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3개월 후 신대왕도 죽었다고 한다(179년 12월).
2. 후한의 현도태수 경림의 공격.
169년과 172년에 후한의 현도태수(玄都太守) 경림(耿臨)의 침공 등을 받기도 하였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요동군을 공격하여 후한의 압박을 분쇄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서방으로의 진출을 계속 추진하였다.
3. 172년 한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오다.
신대왕8년(172)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서 막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의당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의당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