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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서단(해맞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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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소탐방 스크랩 ▣【2013.12.01】44-3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었으며 잉태의 효염을 보였던 수락산 내원암 있는 청학리 계곡산길...
古方 추천 0 조회 106 16.06.09 22: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매월당의 흔적을 만날수 있는 금류동천을...



 


    ○ 수락산[水落山] 내원암 [內院庵]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창건자는 미상이다. 조선 숙종 때부터 이 절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사세[寺勢]를 확장하였다. 1693년 숙종은 파계사[把溪寺]의 영원[靈源]을 불러 수락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게 한 뒤에 영조를 얻었고, 그 뒤 순정왕후[純貞王后]가 왕손을 얻고자 용파[龍坡]를 시켜 이 절에서 300일기도를 올린 뒤, 1790년[정조 14]에 순조를 출산하였으므로 1794년에 칠성각을 짓고 관음전[觀音殿]이라고 쓴 어필을 내렸다. 또한 1795년에는 이 절을 성사[聖寺]라고 칭호 하였는데, 지금까지 이 절의 이명[異名]으로 불리고 있다. 1796년 사성전[四聖殿]을 지었고, 1825년[순조 25]에는 왕실의 자금인 내탕금으로 지족루[知足樓]를 지었다. 1831년에는 상궁 최씨와 하경호[河敬鎬]가 순원왕후[純元王后]에게 청하여 건물을 모두 중창하고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는 넉자를 하사받았다. 그 뒤 1851년[철종 2]에는 용암[庸庵]이 광응전[光膺殿]을 중수하였고, 1880년[고종 17]에도 내탕금을 받아 모든 당우를 중수하였다. 그러나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55년 인법당을 지어 중건하였다. 1959년에는 칠성각, 1966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970년에는 영산각, 1973년에는 요사 2동을 새로 지었다. 1991년 미륵전이 복원되었고, 1993년에는 새로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그 역사와 함께 영험 있는 기도처로서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과 영산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경내에 있는 미륵석불입상은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참고문헌 『전통사찰총서』 5[사찰문화연구원, 1995] 『기내사원지』[경기도, 1988]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권상로 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번 산행포스팅은 수락산 정상 아래 수락산장에서

내원암을 지나 폭포 구경과 함게 청학리로 하산 마무리 합니다... 

 

 

. 수락산 산장 지기님의 통기타 노래소리 귀가에 맴돌지만.

아쉬웠던 ㅅ간을 다시 회상 할려고 항장 더해 봅니다.. 

 

 

. 수락산장에서 주문한 생강차와 모과차

특새있는 등산용 머그컵에 기득하게 담은 생강차 맞으면서 향기가 풍기내요.. 그윽한향기~~~~ Perfume ~~~

 

 

. 수락산장 아래 음료 가능한 약수터

아마도 수락산장에서 관리하여 그나마 음료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을해 봅니다..

청학리 코스중에 음료수 챙길수 잇는 곳이다..

이곳에서 약 500m 쯤 응지 눈길 미끄러운길을 내려 서면 만나게 되는 내원암.... 

 

 

. 이한성 동국대 교수님의 말에 의하면...

대웅전과 영산전 사이에 서 계시는 마애불[磨崖佛] 약간은 고졸한데 갸름한 얼굴과 오똑한 코,

입고리가 살짝 올라간 작은 입..., 현대의 미인상을 이처럼 잘 표현한 마애불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마애불을 만날 때마다 너무 예뻐서 할 수만 있다면 러브레터 한 통씩 보내고 싶습니다.

비구니 노스님 말씀으로는 6.25에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할 때 땅 속에 묻혀 있던 부처를 찾아 세웠던 것이어서 그런지

아들을 낳고자 하는 이 나라 어머니들로 부터 그 코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는데,

땅 속에 묻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다른 부처상처럼 그 코가 갈려 이미 어머니들 뱃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제작 시기는 정확치 않은데 표현 형식으로 보아 조선조 초기라고도 하고, 고려 때라고도 하고, 조선 말기라고도 하니 분명치는 않습니다.

스님의 말씀으로는 고려 때 작품이라는데 전문가들의 견해가 있으니 조선시대의 작품일 것입니다.

시기에 관계없이 민초들의 소박한 조각 솜씨가 정겨울 뿐입니다.

[자료 인용]

 

 

. 마애석불입상 옆으로는 영산전[靈山殿]이 자리 하고 있습니다..  

 


    ○ 수락산[水落山] 내원암 [內院庵] 마애석불입상 영산전 옆에 있는 석불입상은 개울 건너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1961년에 대웅전 바로 아래에 옮겨 모셔놓았다가 절 뒤쪽 200m 쯤에 있는 바위 절벽 아래로 옮겼으며, 최근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모셨다. 이 석불입상은 광배와 불신이 한 돌로 새겨진 것으로 정상이 뾰족하게 올라갔고 앞쪽으로 구부러진 보주형[寶珠形]으로 돌을 다듬어 광배를 삼고 그 위에 불상을 고부조로 조각하였다. 불신은 불두의 크기가 전체의 1/4가량으로 머리와 손이 유난히 크고 다리는 짧아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다. 불상의 표현양식 역시 치졸하게 보이는데 둥글고 평판적인 얼굴에 표현된 이목구비는 귀를 제외하고는 작고 형식적이며, 몸 전체를 덮은 U자형의 옷주름 표현 역시 도식적인 평행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어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심신이 안정 되었을 쯤에 어디선가 들려 오는

풍경소리를 찾아 봅니다..

 


    경주 금오산[金鰲山, 남산]에 칩거했으나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올라와 수락산 내원암에 머물렀다. 이 수락산 은거 시기를 매월당 연구가들은 대체로 1472~1480년으로 보고 있다. 이 때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완성했으니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룬 곳이다. 수락산 칩거 기간에 읊었을 그의 시 한 수를 읽어 본다. ⊙ 水落殘照 [수락의 저녁 햇살] 一點二點落霞外[일점이점낙하외] : 한점 두점 지는 노을 밖으로 三?四?孤?歸[삼개사개고무기] : 서너 마리 외로운 따오기 돌아오네 峰高剩見半山影[봉고잉견반산영] : 봉이 높아 산허리 그림자 너끈히 보고 水落欲露靑苔磯[수락욕노청태기] : 수락은 이끼 낀 바위 드러내려 하네 去雁低回不能度[거안저회불능도] : 가는 기러기 낮게 맴돌며 건너지 못하고 寒鴉欲樓還警飛[한아욕루환경비] : 겨울가마귀 깃들려다 놀라 다시 난다 天涯極目意何限[천애극목의하한] : 하늘은 한없이 넓은데 뜻에 끝이 있나 斂紅倒景搖晴暉[염홍도경요청휘] : 붉은 빛 그림자는 밝은 빛에 흔들리네 고즈넉함을 주는 내원암 풍경이 오늘 산행길에 피로는 물론 마음까지 정화를 해주는 분위기에 즐거움을 더해 주는것 같기도 합니다..


    ○ 내원암 [內院庵] 설화 조선 중기 이래로 승려에 대한 압박이 극도에 달했을 무렵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파계사[把溪寺]에는 수행이 높은 용파[龍坡]대사가 있었다. 용파대사는 당시 승려들에 대한 핍박을 직접 탄원하고자 한양으로 올라왔으나 승려들은 사대문 안을 드나들 수 없는 법령으로 남대문 밖에서 물장수를 하며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3년 동안이나 있었으나 계속 뜻을 못하여 할 수 없이 파계사로 다시 돌아가기로 작정한 전날 밤이었다. 이날 밤 정조 임금이 꿈을 꾸었는데 남대문 밖 어느 집 위에서 서기[瑞氣]가 서리는 것을 보게 되었고, 곧 사람을 시켜 꿈에 본 집을 찾게 했다. 신하가 그곳을 가보니 물장수 차림의 용파대사가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임금에게 아뢰어, 마침내 스님은 정조 임금을 알현할 수 있었다. 이 때 임금은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스님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스님에게 후사를 이을 기도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따라 용파스님은 북한산 금선암[金仙庵]에 있던 농산[聾山]스님과 함께 기도 정진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용파스님은 참선 중에 나랏일이 위태로움을 헤아리고 즉시 농산스님에게 편지를 내어 농산스님에게 직접 이 땅의 왕자로 태어나 줄 것을 부탁하고 농산스님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날 밤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가 어떤 노스님이 방에 들어와 자신에게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리고는 곧바로 태기를 느끼고 순조를 나았다. 이같은 사연을 들은 정조는 용파스님과 농산스님의 도력과 청정한 계행에 감동해 이후 더욱 더 불법에 마을을 쏟게 되었고, 이어 내원암에 칠성각과 사성전을 짓고 토지를 하사하여 불사에 충당하도록 했다고 한다.

 

. 내원암 대웅전에 있는 괘불도

경기도 유형문화제 197호로 지정되어 관리 되고 있습니다.. 

 


    ○ 수락산[水落山] 내원암 [內院庵]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대웅전은 1967년에 성민(性敏)스님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최근에 보수 및 단청불사를 하면서 법당 내부에 화려한 닫집을 새로 가설해 놓았다. 중앙에 불단을 마련하여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삼존불을 모셨으며, 후불벽에는 석가모니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좌우측의 단 위에는 신중탱과 감로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신중탱 앞에는 석조로 된 제석상이 1구 있다. 대웅보전 내부의 불상 및 불화들은 모두 건물이 건립되었던 당시에 함께 조성된 것이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주련柱練] 허공경계기사량[虛空境界豈思量] : 허공경계를 어찌 생각해야 헤아릴 수 있으리 대도청유리갱장[大道淸幽理更長] : 대도는 맑고 그윽하여 이치가 더욱 심원하네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 : 다만 오호[五湖]의 풍월[風月]을 얻을 수 있다면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 : 봄이 오면 옛과 같이 백화가 향기로우리

 

. 이쯤에서는 산행길을 정리 수준으로 들어 갑니다..

아늑함에 잠시 머물며 내원암을 역사적인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도 둘러 보고는 하산 할렵니다.. 

 

 

. 내원암 이정표 입니다..

수락 산장 0.55km,  돌계단 0.15km 이곳은 금류동천[金流同天] 폭포가 있는곳이다..  

 

 

. 내원암 이름모를 석탁은 세월의 흔적을 볼수 있기도 합니다만

누군가 작은 정성어린 기도 흔적에 우리도 나름은 기도를 해 보게 됩니다....[하루라도 빠른 건강회복을.....] 

 

 

. 금류동천[金流同天] 여기서 보면 함어동천을 보았을때는 천[川] “내천”자를 이용하였던대

이곳은 천[天] “하늘천”자를 이용한것이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글을 보기만 하여도 매월당께서는 당시 세조의 왕위 찬탈과 밑에서 권력을 누린 이들을 싫어했다는 말에 의하면

한명회가 압구정[狎區亭] 기둥에 걸린 한명회가 지은 주련[柱聯]을 보고는 고쳐 버렸다는 흔적도 있는것으로 보아

하늘을 표현 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압구정 주련을 보면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 젊어서는 나라를 돕고,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 : 늙어서는 강호에서 편히 쉬네,

라고 쓰였습니다..

그러나 김시습은 이 시를 보고 부[扶]자를 망[亡]으로, 臥]자를 오[汚]로 고쳐

청춘망사직[靑春亡社稷] : 젊어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수오강호[白首汚江湖] :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

라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 금류동천[金流同天] 안내문 자리 하고 있습니다..

지나는 사람들이 이곳을 보고는 의미와 뜻을 숙지할것이지만 이한선 교수님의 이야기 속에는

오자가 발견되어 제기 하기도 하였습니다..

안내판을 보면 “道光 丁西五月[도광 정서오월]”이라 쓰고 1873년[헌종 3년]이라고 기록하였다.

도광[道光]이란 청나라 8대 선종[宣宗] 임금의 연호로 선종은 1820~1850년 재위했으니 1873년이 될 수가 없다.

정서[丁西]는 정유[丁酉]의 오자[誤字]일 터이고 선종 재위 기간에 해당하는 정유[丁酉]년을 찾아보니 1837년이다.

나름은 개인적으로도 확인해 보니 맞는것 같더군요.. 수정이 필요 합니다.

 

 

. 금류동천[金流同天] 주변이 모습입니다..

사진상 좌축으로 희미하게 글씨가 보일것이며 이런 의미 있는 역사적인 흔적을 두고 자리한

매전도 지나는 산객들에게 눈에 가스름을 주기도 합니다.. 

 

 

. 이잰 모든 내원암을 정리 하며 게단으로 내려 섭니다..

이계단을 보면 안전상으로는 난간이 부족하여 위험 스럽게 보이지만 

우회길이 있으니 그곳을 이용 하시면 되며 보호 차원에도 이렇게 두는것도 개인적으로는 좋게 보인다.  

 

 

. 산게단을 내려 서면서 만나게 되는 금류폭포

금루동천 아래 부분입니다.. 수락산의 이름이 옥류, 은류와 함게 대표적인 폭포에서

발원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하게 합니다.. 

 

 

. 산수량은 없다 싶이하여 아쉬움을 주지만

여름철이면 수량이 많아 물떨어지는 소리를 느낄수 있는 곳이기 합니다.. 

 

 

. 그래도 자연이 주는 작을 물줄기

나름은 담아 봅니다..  

 

 

. 작게 들리기도 합니다..

금류의 생명력으로  주어지는 자연의 흐름을 느낄수 있기도 합니다.. 

 

 

. 다시 한번 계단을 올려다 보기도 합니다.. 

 

 

. 게단 하단부 금류폭포 하단부로 이곳도 자리 하고 있는

음식점 높은곳 까지 올라와 장사를 한다..  

 

 

. 이재 부터는 빨라진 걸음 등산로 따라 하산 합니다.. 

 

 

. 이쯤에서는 보일것 같은대 역광에 의해

잘 않보이지만 방향으로 보면 사진 중앙 부분이 은류폭포 지점입니다... 

 

 

. 옥류폭포 지나 한참을 내려 오다 보면 등산로 옆으로는

이런집이 보일것입니다.. 

 

 

. 바로 이집은 미들급 참피온이 였던 박종팔 참피온이 운영하는 먼남의 광장 

 

 

. 또다시 어러움을 격으며 이곳에서 다시 제기를 마련한 박종팔 인생 역전기

얼마전에 TV에서도 방영된것을 보기도 하였답니다. 

시간이 있으면 들어가 만나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앉고 하산을 서둘러 봅니다..  

 

 

. 다음번 수락산 산행시에는 이곳을 들어가 분위기며

이야기도 듣고 한찬의주억을 느겨볼 시간 만들어 다시 찾아 볼렵니다..

오늘산행은 특별히 만들어진 산행길로 나름은 걱정반 기대반 산행길로 흔적을 뒤돌아 보면

뿌듯함을 느낄수 있는 산행이 되었던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늘 함게 할수 있는 불친이 되기를 바래 봅니다..

끝까지 읽어 주신것 깊은 감사 합니다....

다음 산행기는 북한산으로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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