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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답사 1번지인 강진의 만덕산(萬德山·408.6m)으로 떠난 봄 맞이 산행.
완주의 만덕산(761.8m)보다 낮지만 강진의 만덕산은 크고 작은 암봉 7~8개를 넘나들면서 암릉을 타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강진만을 비롯한 주변 풍광을 원없이 바라보며 걷는 맛이 일품으로 조망처가 따로 없이 눈을 들면 조망처다.
거기다 백련사 동백꽃과 함께라서 더욱 좋다.
동백은 모가지째 뚝뚝 떨어져 바닥에 선혈이 낭자한 꽃.
봄이 황홀하면서도 서러운 것은 동백의 이러한 속성에서 기인하는 지 모른다.
꽃샘추위가 잠깐 주춤하고,봄볕이 대지를 따스이 녹일 즈음 진홍색 핓빛울음은 전국에서 아우성칠 것이다.
꽃의 북상속도가 하루에 평균 22㎞라고 하니 머잖아 전국이 꽃잔치로 들썩일 것이 분명하다.
동백숲은 대개 남부 도서지방에 군락을 이뤄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동백숲은 나주 송죽리 금사정(515호), 전남 광양(489호), 서산 마량리(169호), 고창 선운사(184호), 거제 학동리(233호),
강진 백련사(151호) 등 6군데.
천천히 걸으며 다산의 자취를 더듬고, 아름다운 동백까지 감상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다산초당(사적 제107호)~백련사 동백숲길이다.
다산초당은 목민심서를 비롯한 다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곳이다.
그곳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나무와 야생녹차, 편백나무, 삼나무, 소나무 등 녹색 일색이다.
산행코스: 석문교-용문사-석문공원갈림길-주의지점-바람재-다산초당갈림길-깃대봉-백련사-다산초당-다산수련원(4시간30분)
참고할 국제신문 개념도
네비엔 '석문교'를 입력, 석문교를 건너자마자 용문사 표석앞에서 차를 댄다.
옆엔 '정다산유허지통로'라는 표석이 서있다.
돌아보니 지나온 석문교
용문사를 하는 진입로 위로 만덕산 자락의 암봉이 내려와 있다.
용문(龍門)으로 드는 산세가 작지만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부처의 몸은 흙으로 빚은 토불(土佛)이지만 양손은 나무를 깎아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12세기쯤의 불상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동백이 봄마중을 하는 절집뒤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규모는 작지만 터를 아주 잘 잡은 절집으로 보인다.
산행들머리는 큰법당에서 좌측으로 능선으로 올라도 되고,마당에서 좌측 종무소로 올라도 된다.
우선 토불은 어디에 모셔져 있는 큰법당으로 향한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연신 주위의 산세에 눈길이 간다.
큰법당의 문을 열었지만 막 산을 드는 참이라 신도 벗지않고 카메라만 살짝 들이밀었지만 어둠에 사진이 흔들려 폐기하였다.
대신에 큰법당의 한글 주련에 '청산은 나를보고...'라는 나옹선사의 선시를 훑어보고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절마당 좌측의 종무소로 오르는 계단길이 들머리이다.
산으로 접어들어 큰법당에서 올라오는 길과 주변 가람배치를 내려다 본다.
조금 오르자 바위절벽에 팔각정이 보인다. 산세는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용문사가 내려다 보이더니...
삼거리 푯말이 붙은 지점을 지난다. (석문공원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다.)
돌아보니 주작 덕룡으로 뻗어내리는 능선이 역동적이다.
290m봉을 지나면...
조망은 더욱 넓게 펼쳐진다.
한반도의 끝자락으로 산세는 그리 높지않아 보이고...
작은 구릉과 벌판은...
이미 바다에 닿아있다.
강진만은 간척사업을 한 듯 자로잰 듯 반듯하다.
야트막한 산에 이처럼 암팡진 기가 살아있는 산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사방 눈을 뗄 수가 없다.
유달리 표식기가 많이 나풀거리는 이 지점은 주의지점.
무심코 좌로 둘러가기 십상이다. 등로는 돌무더기를 밟으며 우측 내리막으로 내려서야 한다.
만덕산(깃대봉)이 바라보인다.
깃대봉과 우측 산아래의 강진만과 날머리가 보인다.
강진만 너머로 천관산이 짚어진다.
기세등등한 암봉이 버티고 섰다.
살짝 에둘러 만덕산을 바라본다.
가학산 흑석산도 짚어보고...
월출산도 짚어본다.
그 사이 다시 암봉으로 올라선다.
지금 나는 남도의 끝자락을 걷고 있다.
칼날같은 암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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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시설물인 듯한...
지점을 내려서면 바람재.
후미를 담당한 회장님을 만덕산 기도원 방향으로 탈출시킨다.
바람재에선 마지막 안간힘을 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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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암릉을 올라서서...
주위 내로라하는 산군들을 조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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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봉은 에두르고...
조망이 돋보이는 지점은 놓치지않고...
그렇게 산행재미는 최고조에 달한다.
우측 어깨너머엔 계속 강진만이 따라온다.
.바위를 에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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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트이는 바다.
미옥씨가 칼날같은 암봉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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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깃대봉) 정상이다.
함께한 일행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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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선 이정표의 헬기장을 따라야...
뒤로 살며시 접근하면 '국제신문 가이드'의 옥련암쪽 암봉(필봉)들이 계속 어깨를 맞대고 있다.
정상에서 누리는 이만한 호사는 나의 발품이 빚어낸 댓가.
보이는 쪼뼛한 봉이 필봉인 듯.
백련사와 동백림
백련사에 내려섰다.
'강진 만덕산 백련사'는 고려시대 불교 개혁운동인 백련결사(白蓮結社)의 진원지이다.
신라 문성왕 1년에 무염(無染)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문화재로는 보물로 지정된 백련사 사적비를 비롯해 천연기념물 151호인 동백나무숲,
지방문화재인 대웅전, 원구형부도, 지장보살도 등이 있다.
고려 희종 7년(1211)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 1163~1245) 스님이 중창하면서 백련사(白蓮社)라고 고쳤는데, 이때 절 이름 사(寺)가 아닌 단체 사(社)로 한 것은
1208년 최씨 무신정권이후 요세 스님이 문벌귀족체제와 결탁한 기존 불교계에 대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주창하면서 사찰 개혁운동인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할 때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통하는 만경루는 정면 5칸과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누하진입방식(樓下進入方式)으로 대웅보전에 올라선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대웅보전.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
대웅보전 내부에 걸려있는 현판으로 통일신라 성덕왕 때의 서예가로서 진나라 왕희지를 능가한다는 海東書聖 김생(金生, 711~790)의 글로 추정하고 있으며,
백련사를 '白蓮寺' 대신 '白蓮社'로 쓴 것은 이곳이 결사(結社)의 본거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현판의 ‘대웅보전’ 글씨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이다.
대웅전 안내판
만경루(萬景樓)는 앞에서 보면 2층누각이지만 뒤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인다.
만경루의 현판도 대웅보전과 마찬가지로 이광사의 글씨.
만경루는 경치가 좋은 누각이라는 말.
명부전과...
천불전.
천불전의 천불(千佛)
소나무 사이로 스님이 합장하며 맞으니
금릉(강진)의 옛 절 쓸쓸하여 고요하다.
돛은 나무 그림자 사이로 비쳐
섬을 돌아가고
산은 누각의 빛을 안아 늦은 조수에 떴네.
빈 뜰 늙은 바위엔 비취빛 항상 적시고
지경이 높아 가파른 돌계단 바람에도
흔들리겠네.
천년을 전해 온 김생의 글자 여섯
아직도 은구인양 푸른 하늘을 당긴다.
* 이 시의 제목은 ‘산포루광(山抱樓光)’인데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만덕사지〉에 실려있다.
시를 지은 사람은 정재원(鄭載遠 1730~?)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다.
'강진 백련사 사적비(康津 白蓮寺 事蹟碑)'는 2004년 1월 26일 대한민국의 보물제1396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00㎝, 귀부 높이 110㎝, 비신 높이 233㎝, 너비 118㎝, 두께 29㎝. 귀부(龜趺)·이수(螭首)·비신(碑身)을 모두 갖춘 완형으로 비명은
‘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사사적비(全羅道康津萬德山白蓮寺事蹟碑)’이다.
비문은 모두 19행으로 1행은 45자로 되었으며 행서체이고, 홍문관수찬 조종저(趙宗著)가 찬하였다.
이 비문과 만덕사지(萬德寺志)에 의하면 최자(崔滋)가 찬한 고려시대의 고비(古碑)가 있었으나 그 비신을 잃어, 이 사적비를 세울 때 그것의 귀부를 그대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자료>
제일 윗면에 '만덕산 백련사비(萬德山 白蓮寺碑)'라 새겨져 있고,빗돌 위로 새로 만들어 세운 보호각 상량문이 보인다. '불기 2554년 경인년'이면 2010년이다.
그 옆엔 '동산대종사비(東山大宗師碑銘)'가 서있다.
동산 대종사 비명(東山 大宗師 碑銘). 동산 혜일 대종사께서 한때 백련사에 주석하셨다.그런 인연으로 세운 비.
동산 스님(1890~1965)은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다 신학문을 접했고,다시 의학을 공부했다.
24세 때 민족지도자 백용성 선사를 만나 금정산 범어사로 출가하였다.
1919년 민족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동산도 3.1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 후 성철 스님을 비롯해서 광덕, 지유, 능가, 정관, 무진장 스님 등 걸출한 범어사 문중의 인물을 배출했다.
청담, 효봉, 금오 스님 등과 더불어 불교정화운동을 펼치셨고,1965년 4월24일 세수 75세, 법랍 53세로 범어사에서 열반에 드셨다.
다산 정약용은 매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800m의 산길을 오가면서 혜장스님과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백련사 주지 혜장스님은 10살 위인 다산을 스승 겸 글벗으로 모셨고,또는 제자로서 선(禪)과 다도를 가르쳐주었다.
혜장은 제자들이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고 불렀을 만큼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불가의 큰 학승이지만 과도한 음주로 40살에 죽었다.
다산은 혜장이 죽자 만시(輓詩)와 제문(祭文) 그리고 탑명(塔銘)을 지어 그와의 우정을 그렸다.
혜장의 다비식에 다녀온 후 다산이 지은 만시.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랐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책 자주 읽었고/
구가(九家)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우측 동백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은 다산이 백련사로 오가던 숲길이다.
숲길 초입의 안내문
숨겨둔 속살을 살포시 드러내는 동백
다산이 오가던 숲길은 아직 엄동이 깨어나지 않았지만 온통 녹색으로 물든 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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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남도유배길'은 다산초당에서 왕인박사유적지까지이다.
이정표에 만덕산(깃대봉 900m)정상가는 길이 안내되어 있다.
동백숲과 야생차밭이더니 다시 오솔길은 대숲으로 변한다.
다산초당과 백련사 가는 오솔길은 다산과 혜장선사의 우정의 길이기도 하였다.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마시기도 하였겠지만 밤 깊도록 대작(對酌)을 하였을 생각도 해본다.
천일각(天一閣)은 다산이 초당에 거주할 때는 없었던 정자다.
안내문
강진만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다산은 이 언덕에서 바다를 자주 바라보았을 것이다. 다산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제는 의금부를 출발해서 나주까지 유배 길을 함께했다.
그러다 나주 율정주막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해야 했다. 유난히 정이 깊었던 형제는 그 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동암(東菴)으로 내려선다.
다산은 동암에서 2,000여 권의 책을 갖추고 저술을 하며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집필하였다고 한다.
동암에 붙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보정산방(寶丁山房)'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
동암을 송풍암(松風菴)이라고도 한다.
동암의 안내판
연못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에 들른다. 연못 한가운데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
잉어도 키웠다고 하는데,유배가 끝났어도 서신으로 잉어의 안부를 물었다고 전한다.
다산초당에는 강진의 초딩들이 견학을 와있다. 열심히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고...
다산초당(茶山草堂)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뒤뜰에는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샘 약천(藥泉)이 있다. 다산이 차를 끓이던 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실 수 없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처음엔 촉촉히 젖어있던 곳을 직접 팠더니 물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약천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적혀있다.
왼편 산비탈로 올라가면 다산이 유배를 끝내면서 바위에 손수 쓰고 새겼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다산 와당(瓦堂)의 지붕 뒤로 동백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다산초당을 벗어나 굵은 혈관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듯한 '뿌리의 길'을 지난다. 뿌리의 길이란 시인 정호승님의 시에서 비롯되었다.
- 뿌리의 길 -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함
길이 되어 눕는다
<정 호 승>
다산이 18년 간 머문 강진에서 제일 긴 11년(1808~1818)을 머문 다산초당
백련사에서 다산수련원(구,다산유물전시관)까지의 길안내. *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수련원으로 명칭이 바뀌어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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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수련원(구,다산유물관)으로 가는 길이 이정표에 오른쪽으로 가라고 표시되어 있다.
다산수련원 대형주차장에 우리 버스가 대기하고 있지만 나는 귤동마을회관을 지나 신설된 '다산기념관'으로 곧장 내려간다.
도중에 국제신문 만덕산 가이드의 날머리인 '다산명가'도 지난다.
그리고 허허벌판에 썰렁하게 새로 지어진 '다산기념관'을 산악회 사정상 패스다.
아스팔트 도로에 내려서서 찾아가는 다산수련원.
다산수련원 대형주차장에 우리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강진이 고향인 회원이 제공한 강진만 바지락으로 푸짐한 남도의 봄맛을 느낀다.
그리고 굳게 입을 다문...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기념관'으로 명칭이 바뀌어 이전되었고 이곳은 '다산수련원'으로 바꼈다.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의 남도유배길은 장장 61km.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내 눈도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
먼데서 보면 크고 높은 산줄기의 일렁임이
나를 부르는 은근한 손짓으로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봉우리에 제 모습을 감춘다.
오르고 또 올라서 정수리에 서는데
아니다 저어기 저 더 높은 산 하나 버티고 있다.
이렇게 오르는 길 몇번이나 속았는지
작은 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가두고
그때마다 나는 옥죄어 눈 바로 뜨지 못한다.
사람도 산속에서는 미물이나 다름없으므로
또 한번 작은 산이 백화산 가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것도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알았다.
다산은 이것을 일곱살 때 보았다는데
나는 수십년 땀 흘려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예순 넘어서야 깨닫는 이 놀라움이라니
몇번이나 더 생은 이렇게 가야하고
몇번이나 더 작아져버린 나는 험한 날등 넘어야 하나
- 이성부
小山蔽大山 (소산폐대산)
* 폐(蔽): 가릴 폐
遠近地不同 (원근지부동)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멀고 가까움의 지리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 다산 정약용이 7세 때 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