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밤9시 경북 구미시 임은동의 한 아파트내 작은 방. 인형이 가득한 방 안에 특이하게도 수학공식이 빼곡한 작은 화이트보드가 놓여있다. 맞은편 휠체어에 앉아있는 김지혜(24.여.지체장애 1급) 씨. 힘들게 수학공식을 노트에 옮겨적는다. 그의 앞에 앉은 정순형(48) 씨. 매직펜을 들고 2차 함수에 대해 강의하는 모습이 진지하다.
특별한 선생과 특별한 제자. 이 둘은 작은 교실인 김 씨의 방에서 수학수업?하는 중이다. 정 씨는 매주 목요일 8시30분부터 10시까지 이 곳에 와서 지혜 씨를 가르친다. 과목은 수학과 영어. 정식 교사는 아니지만 정 씨는 가르치는 데는 이력이 났다. 구미에 있는 한 건설회사에 다니는 정씨는 야학교인 구미 상록학교에도 매주 금요일 저녁 중등 검정고시반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6개월을 다닌 것이 정규공부의 전부인 지혜 씨가 야학교사 정 씨를 만난 건 지난해 4월. 지혜 씨는 2년 전 자신 만의 삶을 꿈꾸며 야학교인 구미 상록학교 인터넷 게시판에 ‘영어교사 구함’이라는 글을 올렸다. 밤 늦은 시간까지 장사를 해야 하는 김 씨의 부모는 장애 딸을 가르칠 엄두를 못냈다. 더구나 야학교까지 매일 데려다 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3개월이 넘도록 글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 때마침 정 씨가 상록학교에 교사로 등록했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던 터라 퇴근 이후 뭔가 의미있는 일을 찾던 중이었다. 정 씨가 지혜 씨의 글을 보고 뒤늦게 댓글을 남기면서 두 사람은 연락이 됐고 1년이상 함께 공부해오고 있다.
지난 1년간 수업을 빠진 건 정 씨가 전라도 쪽에 출장을 갔을 때 딱 1번 뿐이었다.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퇴근하자마자 지혜 씨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 덕인지 1년동안 지혜 씨의 성격도 많이 밝아졌다. 그동안 몸이 불편해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이젠 현곡동 장애인복지관에서 열리는 중증 장애인모음에도 참석할 정도로 활동적으로 변했다.
지난 1년동안 힘들게 공부한 것도 곧 결실을 맺는다. 지혜 씨는 지난 9일 대입검정고시를 치렀다. 다음 달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그는 "웬일인지 잘 기억이 안나도 추측한 답이 대부분 정답인 경우가 많다."며 "8과목이 평균 60점을 넘어야 하는데 잘 될 것 같다."고 살짝 미소지었다.
대입검정고시 시험을 치른 날에도 정 씨는 고사장을 찾았다. 교실인 김 씨의 방 밖에서 만난 건 처음. 지혜 씨는 아직도 그 때 선생님이 해주신 격려의 말을 잊지않는다. “매일 집안에서만 보다 밖에서 보니 더 예쁘네. 지혜야, 시험 잘 쳐.”
선생과 제자인 둘은 사이버 상에서는 친구다. 서로의 블로그에 들어가 방명록에 글도 남겨주고 친구를 소개시켜주기도 한다. 정 씨의 블로그(blog.naver.com/soon1258)에 자주 놀러간다는 지혜 씨는 선생님의 블로그 안에서 마음이 통하는 언니, 친구들도 만났다.
정 씨는 "지혜의 순수한 감성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며 "가르치면서도 오히려 더 많이 배우고 큰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부모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지혜 씨의 꿈은 정규대학 사회복지학과 또는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는 것.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하고 직업도 구할 작정이다. 그는 "모든 게 아직은 그저 꿈만 같지만 언젠가는 꿈을 이룰 것"이라고 수줍어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정 씨는 나즈막히 김 씨에 대한 바람을 말했다. "지혜 양에게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칠 지 모르지만 모든 인생의 과정이 한단계씩 나아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