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면장실에 시한수가 액자로 표구되어 걸려있습니다.
그 시는 1597년 9월 21일 임자면 재원도리에서 씌여졌습니다. 임자도의 시 중 가장 오래전에 씌여진 시인 것입니다. 정유재란 때 씌여진 시를 최근 몇년전 임자도 회산마을 출신 김영길이라는 서예가가 글씨로 쓴 것입니다. 김영길은 임자중학교 1회출신입니다.
[정호인]
오르락 내리락 돛대는 위험스러운데,파도는 북치듯 배밑창을 두드린다.
서쪽으로 가려던 피난 계획을 이 곳 재원도에 이르러 포기하였도다.
고향집 정원의 노랗고 하얀 국화꽃을 안타까이 생각하노니
싸움터 가까운데도 난만히 뒤섞여 피어 있으리다.
出沒危檣底處敲 向西一計此中抛
遙憐鄕園黃白菊 應傍兵場爛漫交
[정희득]
바람은 돛대를 흔들고 삿대는 안개에 잠긴 달밤,파도 뱃전을 친다.
머리 들어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고 피난 계획을 포기하였도다.
외로운 밤 호올로 막막한 창해를 만났음이여.
고향산천 어느메 싸움은 벌어지는고
風檣霧예(木+世, 상앗대 예)月中敲 回首人間百計抛
獨夜孤蓬 滄海外 故山何處甲兵交
시의 내력과 뜻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여기에 소개합니다.
그때는 1597년 정유재란때의 일입니다.
산과 바다길로 쏟아져 들어온 왜군들의 만행은 극에 달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피난길에 나섰습니다.산야는 물론 바다 위까지도 피난민으로 뒤덮혔습니다.그러나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바다에는 일본수군들이 발호하였고 육지에는 일본군들이 돌아다녔다.붙잡힌 피난민 중 여자들은 능욕을 당하였고 남자는 죽임을 당하였으며 산자는 일본에 끌려갔습니다.당시의 피난민들 중 자신들의 피난과정을 정리해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정유피난기에 관련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정유피난기]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내동 부락에 정호인(鄭好仁)이라는 선비는 19세의 나이로 정유재란을 맞았다.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할머니와 아내 등 가족들을 데리고 1597년 8월 12일 피난길에 나섰다.그들은 길 없는 산야로 가기보다는 배를 타고 바다로 피난하는 것이 안전하리라고 믿고 바닷가로 나갔다.
1597년 9월 16일
그들이 배를 얻어타고 영광 백수읍 구수포 부근을 지나치는데 육지에 있던 일본군들이 그들을 향해 조총을 쏘아 대었다. 허겁지겁 배를 몰아 영광 법성포 쪽으로 달아났다.탄환이 핑핑 날아 왔으나 배까지 미치지 못하여 안전하였다. 법성포에 가보니 일본 수군의 배가 법성포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멀리 도망치는 것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한 그들은 배를 서쪽으로 몰았다.불고 있던 북풍에 떠밀려 배는 서남쪽으로 내려가 임병도(지금의 영광군 낙월면 임병도)에 닿았다.
임병도에도 피난나온 배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느라 아우성을 치는가 하면 전황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듣기 위해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정호인의 가족들은 그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1597년 9월 21일
아침일찌기 출발하여 북동풍을 타고 서남쪽으로 계속 떠밀려 3일 후 재원도에 도착하였다.재원도에 가자 다도해의 끝이 보였다.그곳부터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있었다.이제 더 이상 서쪽으로 갈 수 없었다.바람도 사나워져 폭풍으로 바뀌었다.그들은 바람이 잘 때까지 재원도에서 묵은 다음 다시 배를 돌려 고향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 날 정호인은 숙부 정희득과 배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임자도 면장실에 걸린 시로 피난의 감회를 주고 받았다.
1597년 9월 26일
바람은 나흘이 지나고서야 잦아들었다.재원도를 떠나 안마도를 거쳐 칠산바다에 이르렀다.갑자기 왜군의 배 한 척이 나타나 그들을 쫓아오기 시작하였다.죽기로 도망쳤으나 민간인의 배가 싸움배의 속도를 당해낼 수 없었다. 위기일발의 짧은 순간 사람들은 선상회의를 가졌다.
부녀자들은 일본들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능욕의 대상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들은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바다물로 뛰어 들어 자결키로 하고서 [우리는 물에 빠져 죽을 것이나 남자들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집안의 대를 이어달라]고 당부하였다.그리고 뱃난간에 늘어서 한 번씩 뒤의 가족들을 돌아본 다음 치마로 얼굴을 감싸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영광군 백수면 대신리 묵방포 앞바다였다. 이 때 목숨을 끊은 12명의 여인 중 정씨 집안의 여인 8명은 함평군 월야면 지변부락에 세워진 팔 열녀 정려각八烈婦女旌閭閣에 배향되고 있다. 아래사진이 팔열부녀정려각이다.
배는 나포되었다. 정호인의 아버지는 나포과정에서 일본군을 꾸짖다 그들이 휘두른 칼에 양 팔이 잘리어 목숨을 잃었다.그리고 나머지 남자들은 모두 생포되어 일본에 끌려갔다.정호인은 일본에서 2년 동안의 포로 생활 끝에 목숨을 지켜내어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그가 기록한 책이 정유피난기이다.
-205.3.31, 성헌기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