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는 과거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을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김영한(1916~1999)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은 15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하게 되고 시댁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이후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그림, 글씨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전쟁 후 1950년대에 한식당을 차렸는데, 이 식당이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이 되었다. 아주 대형 요정이었다고 한다.
김영한은 요정을 운영하며 많은 부를 쌓았지만, 아무래도 기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명예롭지는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게 된다. 이에 큰 감명을 받은 김영한은 법정스님께 대원각 터 7,000여평과 40여채의 건물을 조건 없이 시주할테니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법정스님은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10년을 간청하니 1995년, 결국 이를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1995년 당시, 대원각은 시가 1000억 원이 넘었다고 한다. 그 당시 1000억 원이었으면 현재 가치로는 대략 1조원이라고 한다.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던 것인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그렇게 대원각이 개보수되어 만들어진 절이 지금의 길상사이다.
김영한은 불교에 귀의하여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사망한 후 유골은 길상사에 뿌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길상사에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 길상사는 시인 백석과 기생 진향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설처럼 스며들어 있다.
기생 진향은 바로 김영한이다. 그녀는 기생이었지만 꽤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생활했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을 지녔던 엘리트 여성이었다고 한다. 권번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날리던 기생.
그녀가 23살에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우연히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기행이라는 남자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백기행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인 백석이다.
당대 최고의 모던보이였던 백석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정말 많았다고 한다. 그는 맘에 드는 여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하는데, 김영한에게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온 이름인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선물해주었다.
백석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둘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백석은 아예 서울에 있는 김영한을 위해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 조선일보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석의 집안에서는 기생 신분의 진향을 사랑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 시켰는데, 신혼 첫날 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 번 시도했다고 한다.
결국 드라마같이 집안의 반대로 진향을 못 만나게 된 백석은, 어느 날 진향에게 만주로 함께 도망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영한은 이를 거절했고, 이후에도 몇 번이나 도피를 거절했다고 한다.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가 가족과 등지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석은 할 수 없이 만주에서 시 100편을 써오겠다고 다짐하며 홀로 떠났다. 그는 만주를 유랑한 후 광복 이후 함흥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김영한은 서울로 떠난 후였고, 그 후 전쟁이 터지고 38선이 생겨버려 둘은 영원한 이별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