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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龍門寺) 경기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 782 031-773-3797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홈페이지 : http://www.youngmunsa.biz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 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또한 한국전쟁 때 용문산전투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때 불타버려서 천년고찰이지만 다른 천년고찰에 비해 그에 걸맞는 오래된 나무가 드문 편이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미소전(오백나한전), 산령각, 칠성각, 요사채, 일주문, 템플스테이 수련관,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보물 제 1790호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 30호 은행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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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용문사가 여러 군데 있다. 그 중 3곳 정도로 압축할 수가 있는데,
윤장대(보물 제 684호)로 유명한 예천의 용문사가 있고,
우리나라 3대 지장도량에 속하는 남해 용문사가 있으며,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된 수령(樹齡)이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가 있다.
대구불교대학 총동문회 53선지식에서 오늘 그 중 양평 용문사를 참배하였다. 비가 추적거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참배하는 마음만큼은 상쾌한 기분으로 출발하였다.
주차장에서 내려 사찰로 가는 길목 초입에는 좌우로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양문 용문사 참배에 이해를 돕기 위해 템플스테이 팜플렛에 있는 용문사 배치도록 올리오니 클릭하여 확대해서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양평 용문사 배치도(사진을 클릭하여 확대해서 보세요)
양평 용문사 일주문
용문사 일주문(一株門) - 용문사 일주문에는 용문산 용문사(龍門山 龍門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 기둥에는 용이 모습을 하고 있어 용문(龍門)답게 조성되어 있다.
용문산은 남한강과 홍천강에 둘러쌓여 있고, 주변에는 유명산을 비롯하여 중원산, 도일봉 등이 산세를 더하고 있는 암산이다. 경기도에서 화악산, 명지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으로 미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용문산’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위키백과)
일주문을 지나면 그야말로 용문(등용문, 이무기가 승천하여 용이 되는 문)의 광경이 펼쳐진다. 길 옆에 기나긴 계곡이 있어 용문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 약 10분을 걸어가면 이 다리를 만나고 다리를 건너자 마자 우측에는 전통찻집이 있고 10시 방향에 한참 불사중인 사천왕문이 있다.
전통찻집
불사중인 사천왕문
용문사 사천왕문(四天王門) - 용문사 사천왕문은 현재 한창 불사 중에 있다. 동쪽의 지국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북쪽의 다문천왕을 차례로 모셔, 대개의 경우 대웅전을 바라보고 대웅전 쪽을 기준으로 동남서북의 배치를 하는데, 걸려 있는 탱의 순서를 보니 북동남서의 순으로 되어 있어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다. 불사가 완성되었을 때 다시 배치 순서를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천왕의 지물은 경전의 내용대로 지국천왕이 비파를, 증장천왕이 보금을, 광목천왕이 용과 여의주를, 다문천왕이 보탑을 들고 있다.
용문사의 사천왕문 불사가 원만히 회향되길 기원해 본다. 은행나무는 유명세도 있고 하니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보았다.
양평용문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 30호) -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67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로 29.1m, 남북으로 25.9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우리나라 노거수의 대표적인 존재인데 그것은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수령과 수고에 있어서 가장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고 또 전설이 담겨 있는데 있다.
이 나무는 용문사 경내에 서 있는데 배수가 잘 될 수 있는 적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나무에는 얽힌 전설이 많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 때 태자(太子)였던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망국의 서러움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손수 심었다고 말이 있는가 하면 역시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이 은행나무로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것은 삽목신화의 하나로서 세계 각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神德王) 2년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그때가 서기 913년에 해당한다. 또 한편으로는 경순왕이 친히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고려할 때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약 천년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의 수령이 천년을 넘는지라 그동안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각종 피해를 입었을 것이 짐작된다. 그러한 역경을 거쳐 오면서 오늘날의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가령 정미 의병(丁未 義兵)이 발발했을 때 일본 군인들이 절에 불을 놓았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해를 면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방화수(防火樹)로 잘 알려지고 있는 터이다. 그때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타버렸는데 이 은행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대신했다는 것이다.
이 나무에 대한 전설은 더 있다. 즉 나라에 큰일이 있다든가 변고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이 나무는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다고 한다. 나무가 소리를 낸다는 말은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종(高宗)께서 승하하였을 때에는 큰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고자 톱을 대는 순간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는 말도 있다.
조선조 세종(世宗)때 당상관(堂上官)이란 품계가 주어졌는데 그 위계는 정삼품(正三品)에 해당된다.
약 60년전 이 나무에 대한 측정치를 보면 눈높이 줄기둘레가 약 10.3m, 수고 약 41m, 그리고 줄기는 지상 12m쯤 되는 곳에서 3갈래로 분기했으며 수령은 천년을 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의 수고가 약 67m인 것을 생각하면 숫자를 잘못 적은 듯하다.
여전히 용문사의 명물인 이 은행나무를 찾는 사람이 많다.
2015년 4월 2일 문화재청과 국립산림과학원은 “천연기념물 중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등 수령이 오래되고 큰 나무의 유전자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DNA 추출을 통해 복제·육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천연기념물 유전자원 보존 사업은 평균 800년 이상의 수령과 높이 20m, 둘레 8m 이상인 노거수(老巨樹)의 우량 유전자를 보존하고 그 혈통을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사업 대상은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와 용동 영국사 은행나무(223호),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365호) 등 은행나무 17본과 회화나무 5본, 느티나무와 향나무, 다래나무, 뽕나무 각 1본 등 6종 26본으로 선정했다.
문화재청은 “이 노거수들은 수백 년간 마을의 전통과 함께해 왔으며 역사적 사실과 전설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토문화적 가치를 지닌다”며 “뿐만 아니라 그 모양이 아름다워 경관적 가치도 뛰어나고 수령이 오래된 만큼 생물학적 가치도 적지 않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심심풀이로 나무의 수령을 추정해 보자.
즉 마의태자의 지팡이와 의상대사의 지팡이의 경우를 놓고 수령을 추정...
마의태자 기준 천백년 - 신라 멸망(935년)과 동시에 마의태자가 떠났다고 보면 2015년 기준으로 1,081년 되었으니 수령이 1,100년 정도로 추정이 되며
의상대사 기준 천사백년 - 의상대사가 625년에 태어났으니 의상대사를 기준으로 보면 약 1,400여년 쯤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 곳곳에 지팡이가 자라 나무가 된 사례는 이 곳 말고도 아주 많이 있다.
⊙ 신라 시대 적멸보궁을 지은 자장 율사가 꾲은 지팡이이가 자라난 태백산 정암사 주목,
신라 시대 의상 스님의 지팡이가 자라난 영주 부석사의 선비화,
고려 시대 보조 국사 지눌 스님의 지팡이가 자라난 순천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과 고향수,
고려 공민왕 때 장성 백양사를 중창하고 비자나무 숲을 조성한 각진 국사의 지팡이의 이팝나무,
신신령이 나타나 점지해 준 터에 꽃은 지팡이가 자라난 태안 흥주사의 은행나무,
5백 여전 전 어떤 스님의 지팡이가 자라나사 해마다 한 번씩 막걸리 열두 말을 먹는 청도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한암 스님이 거꾸로 꽂아 둔 지팡이가 자라난 오대산 중대 사자암의 단풍나무,
신라 마의태자의 지팡이가 자라난 이 곳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 등등 무수히 많다. ⊙
⊙~⊙ 위 내용은 목경찬의 들을수록 신비한 사찰이야기에서 발췌함.
용문사 범종루
용문사 범종루 - 범종루에는 불전사물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장엄되어 있다.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릴 때 이 불전사물을 울린다. 범종루 전면에는 한문으로 ‘梵鐘樓’라는 편액이 뒷면에는 한글 ‘범종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범종에는 노란 은행잎을 조각하였다.
용문 팔경 중에 용문사의 새벽종소리가 가장 으뜸이라고 하니 템플스테이 등을 통해서 체험해 볼 만 할 것 같다.
용문사 삼층석탑
용문사 삼층석탑(三層石塔) - 1989년 선걸스님이 조성한 불사리탑이라고 한다. 이때 함께 모셨던 미륵불은 찾고 또 찾아도 보이지 않길래 종무소에 문의를 하니 미륵불은 상원사로 이운되었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 삼층석탑과 관음전 사이에 한 전각을 지어 놓고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셨는데, 개금불사를 한다고 하면서 돈을 내고 금딱지를 붙일 수 있다고 하는데 왠지 썩 내키지는 않는다...
공덕을 지을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석을 하면 좋을까....
하긴 미얀마 등에서는 저런 방식의 개금불사로 인해 부처님 몸집이 자꾸 불어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때는 환희심이었는데, 지금은 시큰둥인 내가 문제는 문제인가 본다.
용문사 대웅전
용문사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은 정면 3칸 팔작지붕으로 1984년에 중건하였다.
안에는 중앙에 석가모니삼존불을 모셨고 삼면의 좌우에 천불을 봉안하였다. 신중탱과 동종이 있다. 대웅전 편액은 봉은사의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변각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에 오르는 길에 자비무적(慈悲無敵)이란 글을 새겨놓았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면 적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자비로운 사람인지 무자비한 사람인지 되돌아보며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린다고 한다. 우리 모두 생각해 볼 문제이다.
용문사 대웅전 내 석가모니삼존불(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웅전 처마 밑에 있는 용은 여의주를 물고 머리는 대웅전 바깥에 꼬리는 대웅전 안에 있다.
용문사 대웅전 내 신중탱(중간에 삼두팔비의 대예적금강을 중심으로 39위 신중탱)
용문사 원응당
용문사 원응당(圓應當) - 대웅전 앞 서편에 위치하며 용문사 종무소, 신도회 사무실 등이 있다.
용문사 지장전
용문사 지장전(地藏殿) - 지장전 편액은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의 글씨다.
지장전 내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계신다. 또 그 좌우에는 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 안에는 장상명주를 든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이 협시
용문사 관음전(觀音殿) - 용문사의 관음전은 1912년에 건립되었고, 안에는 보물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좌상과 관음탱을 봉안하였다.
관음전은 지붕이 6면인 6각 지붕이다. 따라서 기둥도 6개이다
육바라밀의 6과 육도윤회의 6의 만남이라고 억지로 해석을 해 본다.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 1790호) - 통일신라 선덕여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한 용문사의 관음전에 모셔진 관음보살로, 청동으로 만든 뒤 금칠을 하였다. 관음보살은 현실세계에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머리에는 나무로 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상체는 뒤로 약간 젖혀져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어,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보살상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목 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의 소매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발목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접힌 八자형의 옷주름을 만들면서 양 무릎을 덮고 있다.
가슴과 양 무릎 사이의 구슬장식,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삼각형의 장식 등에서 전형적인 14세기의 보살상 양식을 볼 수 있다.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이나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보다는 신체의 표현이 덜 경직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이들 작품보다는 시대가 약간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고려 후기 보살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용문사(龍門寺) 대웅전(大雄殿)아래 향좌측(向左側)에 있는 관음전(觀音殿)(요사(寮舍)를 겸함)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현재 사찰측에는 이 상(像)의 조성(造成)이나 이전봉안(移轉奉安)에 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1993년에 행했던 개금불사(改金佛事)때도 복장(腹藏)을 열었을 때도 이미 내용물이 없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용문사(龍門寺)는 수양대군이 세종29년(1447)에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위해 불상(佛像) 2구(軀)와 보살상(菩薩像) 8구(軀)를 봉안(奉安)한 일도 있었으나, 한국전쟁시 용문사(龍門寺)가 전소(全燒)하였으므로 이 상(像)은 본래의 용문사(龍門寺) 보살상(菩薩像)이 아닐 가능성이 크고, 이후 어디서 어떤 연유로 이곳에 봉안되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양식적인 특성으로 볼 때 전형적인 고려후기(高麗後期) 보살양식(菩薩樣式)을 계승한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작(作)으로 판단된다. 용문사(龍門寺)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은 상체(上體)를 다소 뒤로 제낀 채 전신(全身)에는 영락(瓔珞)을 가득 드리우고 있어 전체적으로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특히 이 상(像)은 결발(結髮)모습이나 전신(全身)에 드리워진 영락(瓔珞)과 가슴께의 금구장여(金具裝飾) 등에서 영덕(盈德) 장육사(莊陸寺) 건칠보살좌상보살(乾漆菩薩坐像菩薩)이나 고려말-조선초기 작으로 알려진 청양(靑陽) 운장암(雲藏庵) 철보살좌상(鐵菩薩坐像)·상주(尙州) 갑장사(甲藏寺)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과 좋은 비교가 된다. 상호(相好)는 개금시(改金時)의 현대적(現代的) 표현에 의해 미소가 없어 보이나 작은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양볼에 탄력있게 살이 있는 원만한 얼굴을 보이고 있으며, 높게 결발(結髮)한 고계(高계)에 목조보관(木造寶冠)을 쓰고 양 어깨에 보발(寶髮)이 [ ]식으로 마치 리본처럼 표현되었는데, 이런 표현은 장육사(莊陸寺) 상(像)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수법이다. 그러나, 보관(寶冠)은 머리부분과 꼭 맞지 않을뿐더러 목조(木造)여서 조선전기(朝鮮前期)에 유행했던 보살관(菩薩冠)처럼 양쪽으로 흩날리는 관수식(冠垂飾)을 보이고 있어 원래의 관(冠)이 아니라 후대(後代)에 보수한 것 같다. 자세는 완만하게 내려 온 어깨와 당당한 가슴을 하고 수인(手印)은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을 지은채 길상좌(吉祥坐)를 결(結)하였는데, 가슴에 수식(垂飾)이 달린 1줄의 영락(瓔珞)이 있고, 복부(腹部)에는 군의(裙衣)자락을 묶은 매듭이 보이며, 왼쪽 가슴께는 승각기를 고정시킨 삼각형 금구장식(金具裝飾)이 있다. 이같은 신체에 걸쳐진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목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다가 손목부분에서 한번 접혀지고 오른쪽 소매자락은 배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였고, 발목부분에서 부드럽게 중첩된 팔자(八字)형을 그리며 양 무릎을 덮고 그 위에는 영락이 장식되었다. 이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은 탄력있는 장대(長大)한 신체에 당당함과 화려함이 넘치는데, 이렇듯 고계(高계)나 가슴과 양 무릎에 영락이 드리워진 점, 왼쪽가슴에 삼각형의 금구장식이 있는 점은 전형적인 14세기 보살양식을 보여주지만 장육사(莊陸寺) 상(像)과 비교할 때 영락(瓔珞)이 다소 간략해지고, 파계사(把溪寺)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1447년 이전)보다는 상호나 신체가 덜 경직된 느낌을 주므로 장육사(莊陸寺) 상(像)(1395)과 같은 시기이거나 그보다 조금 늦은 1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보살좌상은 장육사 건칠보살좌상(1395, 보물 제 933호)이나,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1447년 이전, 보물 제 992호) 등과 더불어 고려말과 조선초의 조각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관음전에서 바라 본 용문사
용문사 대웅전 앞에서 잠시 동영상을....
용문사 심검당 등의 당우가 있는 곳인데,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일반인은 출입을 금하고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안에는 심검당을 비롯하여 공양간, 안심당, 현응당, 설선당 등의 당우가 있다고 한다.
이제 차례로 미소전 칠성각 산령각을 참배하기로 한다.
용문사 미소전(나한전)
용문사를 참배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 은행나무와 미소전일 것 같다. 용문사측에서 미소전 앞 안내문을 그대로 소개해 본다.
용문사 미소전(나한전, 羅漢田) - 용문사 미소전에는 삼소의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 삼계의 고통받는 일체중생을 대자재비로 안아주시는 자비의 미소...
두 번째는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실 때 꽃비가 내리자 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시니 마하가섭만이 뜻을 알아 미소를 짓자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을 전하노라 이심전심의 염화미소...
세 번째는 아라한과를 증득한 분을 나한이라 하며 용문사 516나한 미소전 앞에서 기도 참배하는 이들이 미소일색하여 복과 지혜가 가득하시길...
용문사 주지스님은 말하신다.
‘오늘 미소전을 참배하기 전 나의 미소와 참배 후 나의 미소를 어떻게 많은 이들의 가슴에 새길 것인가?
미소전 참배하실 때 눈이 마주치는 나한님의 미소를 통해 세상에서 제일 편안하고 아름다운 나의 미소로 한번 만들어 보세요‘ 라고...
이 미소전 안에는 500나한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는 흔치 않은 벽화가 있다.
미소전 중앙에 모신 석가모니불과 아난과 가섭 존자 그리고 나한
미소전 내 서편 벽화 - 500마리 원숭이
500마리 원숭이 - 이 벽화는 언양 석남사 극락전 벽화에도 있는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부처님 오셨다 하니까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망고도 갖다 올리고, 좋은 과일도 올리고 공양을 여러 가지로 자꾸 갖다 바치었다.
원숭이들이 멀리서 보고는
“야~ 우리도 부처님한테 공양 올려야지”
하고 연구한 끝에
“사람들이 안 갖다 바친 것. 귀한 것을 갖다 바치자.”
라고 생각하고는 어느 날 보름 달, 달 밝은 밤에 못에 보니까 풍덩 달이 빠져 있는 것이었다.
“야~ 저것 근사하다. 저것을 건져가지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면 제일 좋겠다.”
이렇게 원숭이들이 의논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500마리의 원숭이가 나무에서 쭉 매달려 늘어 뜨려가지고 마지막의 원숭이가 달을 건지는 것이다. 건지려니까 물이 흔들리니까 달이 깨지고, 가만히 있으니까 물이 고요해지니까 또 둥근 달이 거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건지고 건지고 하였다. 두세 번 건져봐야 알겠는가? 그러니까 그 원숭이들이 다 지쳐가지고, 탈진하고 지쳐서 그 못에 빠져 죽었다. 부처님한테 공양 올리려고 한 그 공덕으로 나중에 아라한이 되었는데, 오백아라한의 전신이다.
용문사 미소전 내 동편 벽화( 극락도를 창작한 것이라고 함 )
위 벽화를 보고 내심 생각하기를 탑의 층수가 9층인 것 같아 '아미타구품도'이거나 법화경 '견보탑품'을 그린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하여서 용문사 측에 공식 질의를 하였고, 권중서 전문포교사님에게도 질의를 해 놓은 상태인데, 용문사 측에서 이 그림은 여성이 그린 벽화로 극락도를 창작하여 그린 것이라고 함.
벽화설명 : 가운데 9층 탑이 있고 아래층에는 동남서북의 사방에 문이 열려 있어 누구든지 출입이 가능하다. 탑 주위 하늘에는 구름을 탄 세 명의 주악천녀와 세 명의 산화천녀가 꽃을 뿌리거나 연주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허공에는 음악의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뿌려진 꽃비가 내리고 있다.
탑 주위에는 합장을 하고 서 있는 사람, 꽃바구니를 들고 꽃을 줏어 담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남녀노소가 서 있는 모습이다.
이 글을 1차 완성하고 한 후 <불교미술의 해학>, <사찰의 문과 다리>, <스님 계십니까>의 저자이시며 선배 포교사님이신 권중서님에게서 답변이 왔길래 가감없이 그대로 전달합니다.
이렇듯 하나의 불상을 놓고 '석가모니불'이다, 아니다 '아미타불'이다 라고 서로 다른 의견이 개진되듯이 벽화를 해석하는 것 역시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권중서 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동쪽 벽면의 벽화는 부처님께서 영취산 야단법석(野壇法席)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다보여래가 출현하여 부처님께서 탑 속으로 들어가 다보여래와 함께 계시는 장면의
법화경 견보탑품을 그려 장엄한 야단법석 벽화입니다. 참고로 견보탑품을 꼭 읽어 보세요.
벽면 중앙의 탑이 바로 다보탑입니다.
왕사성 기사굴산에 운집한 대중이 큰 비구 대중, 보살, 천인, 여래팔부중 등 운집한 대중이
256만 6천 명이나 되었다고 법화경 서품에 기록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시끌벅적 야단법석입니다.
그래서 벽면의 수많은 대중이 공중에 들려 다보탑속의 다보여래를 친견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늘의 천인들은 주악과 꽃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부분이 윗부분의 장면입니다.
영산회상을 나타낸 벽화이기 때문에 나한전 벽면을 장엄하였습니다.
물론 조각으로 모신 500나한은 그 당시 제자로 보시면 됩니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명쾌한 설명이시다.
- 감사합니다-
미소전 참배를 끝내고 뒷편 칠성각 산령각으로 이동한다.
칠성각과 산령각
양평 용문사 칠성각
용문사 칠성각 내에는 상당히 특이한 점이 있다.
칠성탱을 모셔 놓고 칠성탱의 칠원성군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에 일광보살 월광보살상을 모셔 놓은 점이다. 즉 일광보살 월광보살은 칠성탱 안과 밖 모두에 계시는 형태이니 이 얼마나 특이한 배치인가?
용문사 산령각
산령각 내 산신과 산신탱
미소전 칠성각 신령각 참배를 끝내고 정지국사부도를 참배하러 가는 길에 부도전을 만난다.
용문사 부도전
용문산 용문사 사적비
양평 용문사 부도전 내 부도군
부도군을 지나 정지국사 부도로 가는 길목에 근래에 불사를 한 듯한 템플스테이 수행관이 있다.
템플스테이 수행관
정지국사비로 가는 길은 여러 군데이다.
첫째, 용문사 초입에서 우측 산비탈로 날 길로 사찰 참배하기 전에 곧바로 가는 길이다.
둘째, 사찰을 참배한 후 범종루, 부도전, 템플스테이 수행관 등을 차례로 거쳐 가는 길이다.
셋째, 사찰을 참배한 후 사천왕문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다음 사진과 같은 출렁다리를 건너서 가는 길이다.
정지국사부도로 가는 출렁다리( 여기서 부도까지는 약 800미터이다)
어느 길을 선택을 하든 중간 지점에서는 만나게 되어 있고 다음 사진과 같이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한다.
정지국사 부도로 가는 길
용문사 정지국사 비
비는 부도에 딸린 탑비로 조선 태조(太祖) 7년(1398)에 건립되었으며, 조성 당시의 찬조자 명단과 정지국사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지국사 부도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楊平 龍門寺 正智國師塔 및 碑, 보물 제 531호) -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과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탑은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 받침돌과 탑 몸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 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장식 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 몸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權近)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탑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대개의 경우 사찰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전각은 산신각이다. 그러나 이 곳 용문사에서 제일 높은 곳은 바로 이 정지국사의 부도이다.
갑자기 미국 백악관이 생각났다. 백악관 앞에 초대대통령을 지낸 워싱턴기념관이 백악관 맞은편에 서서 후대의 대통령들이 잘 하는지 어떤지 지켜 보고 있듯이, 이 곳 정지국사의 부도는 아주 높은 곳에서 용문사를 내려다 보면서 후대 스님들이 잘 하는지 어떤지 지켜 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용문사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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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제 대충 초고가 완성된 상태이나,
혹시 글자나 내용상 오류 등이 있으면
기탄없이 댓글 부탁합니다.
모든 것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니만큼....
용문사를 지나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는 용각바위와 마당바위도 아주 유명하다.
용각바위(사진은 펌) 내용은 용문사 안내 팜플렛에서 발췌.
용문사에서 북서족으로 계곡을 따라 1시간 쯤 올라가면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마당바위(사진, 펌) 내용은 용문사 안내 팜플렛에서 발췌.
마당같이 넓고 평평하여 마당바위라고 불리우며 높이가 2m, 둘레가 50m이다.
용문사에서 북서쪽으로 1시간쯤 올라가면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비오시는데 구석구석 찍어주셨네요.
두번째방문이지만 제대로보지못한부분도있었는데 자세히찍어올려주셔
용문사절마당에 서있는느낌입니다.
다시한번 생각을 되돌릴수있어 감사드립니다.수고하셨어요.
함께 하는 기쁨이 큽니다.
양평 용문사
가보진 않았지만 실제로 가본 것보다 더 생생하게 참배할 수있도록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울러 멋진 글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담 달에는 함께 순례길에서 뵙기를 희망합니다.
뭣꼬? 선지식이 처음이라며? 근데100번이상간 나보다 더 성의와 애착이 대단해요~-역쉬 준함입니다~~_()_
산악회회장님, 선지식 첫경험 맞습니다...잘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준함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1차 교정 안내 :
① 미소전 벽화에 대하여 양평 용문사의 통보를 받고 수정해 놓았습니다.
탑의 내용과 그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② 심겅당 영역에 있는 당우명을 추가하였습니다.
용문사 잘 보고 갑니다.
수고 했습니다.
단장님...감사합니다.
준함 법우님 감동글과 함께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늘 수고로움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음ㅡㅡㅡㅡ감탄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선배님 따라갈라면 멀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넘~~감사합니다
시간관계상 둘러보지못한아쉬움을 사진으로
상세하게올려주셔서 직접보는것처럼생생합니다~~ 대불동문에 보석이십니다
부처님 가피 듬뿍받으시옵소서
재무국장님....아직은 부족한 게 많습니다.
더 배우고 익혀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죄송한데 제가 잘 모르신분 같아서요.
다음달에 꼭 저와 눈 도장 부탁드립니다. 궁금합니다 뉘신지..
대단한 것은 아니고요 ...그냥 열심히는 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얼굴 올려 드리겠습니다...
대단 하십니다...언제 구석구석 사진을 모두 찍으시고
또 이렇게 깊고 상세한 내용을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시며
사진과 내용을 짜임세 있게 정리 하시고
정말 대단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선배님의 견지에 따라 갈려면 아직은 요원합니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지금보다는 발전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 07.17 우리나라 사찰의 나무 중 지팡이가 자라서 나무가 된 사례를 추가하여 2차 교정을 완료하였습니다.
겨우 시간을 내어 오늘에야 3차 수정에 들어갑니다.
이무가==> 이무기가
용와 여의주==> 용과 여의주
대웅전 내 신중탱에서
대예정금강==> 대예적금강
관음전 설명에서
금동관음보살좌상와 관음탱
==> 금동관음보살좌상과 관음탱
관음보살좌상설명에서
고려말고 조선초의
==> 고려말과 조선초의
출렁다리 밑 설명에서
어는 길==> 어느 길
위의 6 군데 맞춤법이 틀린 것이 발견되어 수정하였습니다.
협조하여 주신 적광 강지호선배님을 비롯하여
관심갖고 조언 해주신 선후배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건넵니다.
향후에라도 맞춤법 등과 내용상 오류 등이 있으면 댓글 부탁합니다.
<불교미술의 해학>, <사찰의 문과 다리>, <스님 계십니까>의 저자이시고 선배포교사님이신 권중서님에게 용문사 미소전 동편 벽화에 대해 질의를 한 결과 명쾌한 답변이 왔길래 본문에 수정하여 실어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