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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피사로 곤살레스(스페인어: Francisco Pizarro González, 1471년 또는 1476년 ~ 1541년 6월 26일)는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이다. 잉카 제국을 정복하였으며,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의 건설자이다.
피사로는 스페인의 에스트레마두라의 트루히요에서 태어났다. 피사로의 출생년도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사생아 출신이며,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 친척이다.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으며, 마지막 생애 2년간을 리마에서 보냈다.
동료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칠레 원정에 실패한 뒤 피사로의 형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피사로의 형제들을 가둔 사건이 있었는데 피사로는 이를 구실로 알마그로를 처형했다.
이에 1541년 6월 26일 알마그로의 아들과 그의 친구들이 피사로의 궁을 공격해 칼로 피사로의 목을 찔러 살해했다. 피사로는 죽을 때 목에서 나온 피로 십자가를 그린 다음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죽었다고 한다.
19세기 말 중국에서 10여 년 간의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Absalom Sydenstricker)는 만삭의 아내 캐리를 데리고 웨스트버지니아 힐스버러로 돌아왔다. 남북전쟁 당시 남과 북 사이에 끼어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던 지역인 힐스버러는 캐리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캐리 시던스트라이커는 딸을 낳았다. 첫째 아들 에드거 이후 중국에서 낳은 세 아이를 모두 잃고서 미국으로 돌아와 낳은 아이였다. 부부는 딸아이의 이름을 펄(Pearl) 이라고 지었다. 이 딸아이는 훗날 소설 [대지]를 써 미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하였고, 동양과 서양, 여성과 아이, 인종을 아우르는 열정적인 사회 인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생후 3개월 만에 아기 펄은 그녀의 부모와 함께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간다.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가 다시 중국선교활동을 재개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펄은 중국에서 자랐다. 펄에게 생후 3개월 만에 떠나온 미국은 그저 모국일 뿐 피상적인 이미지의 나라였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중국이 발 디딜 수 있는 굳센 땅으로 느껴졌고 중국 사람들의 삶이 더욱 친숙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중국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중국을 가까이 느낀다고 하여도 중국인들에게 그녀는 벽안(碧眼)의 서양인이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포교하는 엄격한 선교사로서 중국인들과 자신들의 삶을 확실히 분리하였다. 서양인으로서의 자각도 완전하지 못하고 중국인으로 동화될 수도 없는 사춘기를 보낸 펄은 18세에 어머니 캐리의 강력한 원조로 미국 랜돌프-메이컨 여대에 진학했다. 이때의 4년이 그녀가 1934년 중국을 완전히 떠나기 전 가장 긴 시간 미국에 머문 기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펄은 3년 뒤 미국인 농학자인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하고 벅이라는 성을 얻었다. 펄 벅의 남편 로싱 벅은 여성에게 다감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일에는 열정적이었지만 아내를 이해하고 가정에 충실한 스타일의 남편이 못됐다. 선교 일에만 열중하며 가정을 나몰라라해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펄 벅은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결혼생활에 절망했다. 더구나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캐롤은 펄 벅의 절망을 더욱 가중시켰다. 캐롤은 정신지체아였다. 펄 벅이 딸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닐 때 남편 로싱 벅은 아내와 딸에게 무심했다. 남편의 무관심과 딸로 인한 죄책감과 고통을 잊기 위해 펄 벅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7년 국민군이 난징을 공격했을 때 펄 벅은 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위기를 겪는다. 이때 그녀는 중국과 서양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균열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무리 중국에 살면서 중국을 사랑한다 하여도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미국인이라는 뼈아픈 자각은 그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들었고 이것은 펄 벅 문학의 평생 테마가 되었다. 1930년 그녀의 처녀작 [ 동풍 서풍]은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이었다. 미국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1년이 채 안되어 3번이나 인쇄하는 인기몰이를 하였다. 펄 벅 문학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자, 그녀의 남은 반평생을 확정 지을 소설을 발표하였다. 1931년 출판된 소설 [대지]는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와 부와 명성을 주었다, [대지]는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주인공 왕룽을 중심으로 왕룽의 아내 오란과 세 명의 아들들의 역사를 그린 장편 소설이다.
[대지]는 왕룽이 죽은 후 세 아들이 지주, 상인, 공산주의자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묘사한 [아들들](1933년), [분열한 집](1933년)과 함께 3부작 [대지의 집]을 구성한다.
[대지]는 수많은 독자들의 탐독 속에서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스웨덴의 노벨상 심사위원들은 그 해의 문학상으로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 [대지]를 결정하였다.
펄 벅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미국의 여성작가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대지]는 미국인으로 태어나 중국에서 40여 년을 산 펄 벅이 미국과 중국 두 나라에 동시에 안긴 선물이었다. [대지]의 성공은 펄 벅에게 작가로서의 성공도 주었지만 그녀의 개인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무심한 결혼생활에 지쳐있던 펄 벅은 작가로 얻은 명성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출판해주던 출판사 J.데이의 사장 R.J.월시에게 사랑을 느끼고 로싱 벅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1934년 딸 캐롤과 입양한 딸 재니스를 데리고 미국행 배에 오른 펄 벅은 중국에 남은 로싱 벅과 중국땅에 영원한 이별을 고하게 된다. 이 날 이후 펄 벅은 단 한번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미국에 돌아온 후 펄 벅은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더불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사회 인권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비록 아버지 압솔룸의 교조적 선교 활동에 염증을 느끼고 남편 로싱 벅의 계몽사상을 비웃었지만 그녀는 40여 년 간 선교사의 딸로 계몽운동가의 아내로 산 사람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사회활동은 그녀의 운명이었다. 작가의 조용한 은둔생활은 그녀의 인생에 맞지 않았다. 의욕적인 글쓰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사회활동에 더 많은 정열을 쏟았다.
그녀는 1930년대 미국 내 인종 차별에 반기를 들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1942년에는 민족 간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동서협회(The East and West Association) 설립하였고 1949년에는 세계, 특히 아시아 지역의 전쟁과 가난 속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키는 웰컴하우스(Welcome House.Inc)를 창설하였다. 그녀도 이 기관을 통해 7명의 피부색이 각기 다른 아이를 입양하였다.
또한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주둔한 뒤 생긴 미국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1964년 펄 벅 재단(PearlS. Buck International)을 세웠다. 이 재단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의 중국계 아내 호미리와 친분이 있던 펄 벅이 소설의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버려진 미국계 사생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만든 것이었다. 펄 벅 재단은 한국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1개의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본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데 현재는 혼혈 아동뿐만 아니라 고아, 신체 장애우 등 사회에서 고통 받는 소외 아동을 돕고 있다.
펄 벅의 사회활동이 너무 지나친 것이었을까? [대지] 이후 나온 그녀의 소설들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평단에서는 반응이 좋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의 평론가 일부는 [대지]가 어쩌다 우연히 노벨상을 타게 된 작품이라고 폄하하였다. 또한 그녀의 맹렬한 사회 인권운동은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및 많은 반공주의자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밝힘으로써 중국 및 공산권의 미움도 샀다. 펄 벅은 닉슨 대통령 때 미국과 중국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될 시기 중국방문을 열렬히 희망했지만 그녀의 반공산주의적 입장표명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거부로 방문은 끝내 무산되었다.
펄 벅에 대한 세간의 인상도 말년 행보 탓에 상당히 구겨졌다. 펄 벅은 두 번째 남편 R.J.월시를 사별하고 외로움을 겪었다. 그런 그녀의 외로움을 파고 든 것은 40여 살 연하의 댄스 선생이었던 테드 해리스였다. 테드 해리스는 70대의 펄 벅을 쥐고 흔들며 그녀의 돈을 빼내 사리사욕을 채웠다. 펄 벅 재단에 들어갈 돈의 일부를 횡령하였으며 유산을 가로챌 궁리를 하였다. 늙은 펄 벅은 젊은 애인의 요사스러운 말에 눈이 멀어 그의 부정을 알면서도 그를 옹호하였다. 이것이 펄 벅 80 평생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펄 벅은 언제나 열정적이었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장 섰다. 그녀는 미국의 인권과 여권운동, 매카시즘 시기의 마녀사냥 같은 민감한 주제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기꺼이 논쟁에 참여했으며, 신념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남성 평론가들은 펄 벅의 문학적 성공이 그녀의 주 독자층인 여성 독자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며 펄 벅이 과대평가된 작가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차별에 고통 받던 아동들이 그녀가 만든 펄 벅 재단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펄 벅이라는 이 불세출의 작가이자 사회인권운동가의 삶을 더욱 값지게 해주고 있다.
작가 펄 벅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대표작인 소설 [대지 The Good Earth]를 읽어 보아야 한다.
빈농이었던 왕룽이 노비출신인 오란을 만나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가족을 이루며 거부로 성장해가는 삶의 굴곡을 그린 이 작품은 중국의 문화와 종교를 그림 그리듯 묘사하는 작가의 펄 벅의 섬세함이 잘 드러나 있다. 안정효의 번역으로 읽어보는 것이 좋다.
소설가이자 사회인권운동가로서의 펄 벅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펜실베니아 대학의 영문과 교수이자 펄 벅 재단의 위원장인 피터 콘이 쓴 [ 펄 벅 평전]을 추천한다. 여성으로서 펄 벅 개인의 고통과 미국인도 중국인도 될 수 없었던 정체성의 갈등, 맹렬한 사회운동 속에서도 늘 느끼던 불안감. 정신지체아 딸 캐롤에 대한 애정과 죄책감 등개인사의 고뇌와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