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군 장군의 무덤
임병식rbs1144@daum.net
부모님 산소를 찾아 뵈려 갈 때마다 들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이정표를 만난다. 그것은 동학혁명 때 분연히 일어나 투쟁하다가 처형 당한 김개남(金開南 1853-1895)장군의 묘소를 알리는 안내판이다. 위치한 곳은 전북 정읍시 산외면. 나는 그 길을 지나칠 때마다 그것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찾아가 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 연 초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아우가 잠시 고향을 방문하여 부모님 산소를 찾은 길에 장군의 묘소를 둘러보게 되었다. 묘소는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묘비는 전면에 <동학농민혁명 동강 김개남 장군 묘비>라고 쓰여 있었다. 그 옆에는 개남문(開南文)을 적은 비석도 있었다.
분묘는 웅장하고 둘레석도 잘 단장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허묘(虛墓)였다.그렇지만 개남문을 보니 반가웠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노랫말이 적혀 있어서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개남문이 울고 간다.(이하생략)'
가사 중 알고 보니 개남이라는 뜻은 남쪽으로부터 개혁한다는 뜻이며 그것은 바로 김개남 장군을 지칭한 것이었다. 무덤은 비교적 근래에 조성해 놓은듯 보였다. 동학혁명이 벌서 100여 년이 지났음을 생각하면 너무나 늦게 조성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시 상황을 감안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대역죄인으로 몰려서 극형에 처해졌으니 당시로서는 누가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조성된 묘소는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옷 한벌 수습하여 묻히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묘소는 관광객도 많이 찾아오지 않는 듯 보였다. .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는 1894년. 당시 농민군에 세명의 장군이 있었다. 총대장 전봉준(全琫準 1855-1895)장군과 부대장격인 김개남장군, 그리고 무장대접주 손화중(孫華仲1861-1895)장군이다.
이들은 교조신원운동과 고부군수 조병갑의 불법 수탈과 폭정, 동학교도의 탄압을 명분으로 기치로 들었다. 특히 관리의 부정부패가 극심하여 분연히 일어났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혹세무민을 한다며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풀어주려는 뜻도 있었다.
그들은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구호로 내세웠다. 그리고는 사발통문을 돌려 고부군수 조병갑의 목을 벨 것과 한양으로 쳐들어 갈 것을 결의했다.
이에 놀란 고종은 외세를 끌어들였다. 폭정을 일삼은 자를 자르고 백성구제에 힘을 쓰면 될 것을 고종은 그렇지 않고 일본군을 불러들여 조선군과 합동으로 동학군을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유독 저항이 가장 심했던 전라도가 크게 피해를 입었다. 장정들이 거지반 도륙을 당했다.
결국 고종의 실책은 조선이 망국으로 가는데 단초가 되었다. 세 장군은 관군과 왜군의 공격으로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전봉준장군은 함거에 실려서 한양으로 압송되고, 두 장군은 정읍 땅에서 참형을 시켜 머리가 보내졌다.
그러니 시신을 거둘 수가 있었겠는가. 그나마 전봉준장군은 경허선사에 의해 나중 시신이 거둬졌다고 한다. 그 내력과 이유가 궁금했는데 최근에 그 시신수습의 단서가 될 만한 보도를 접하게 되었다. 바로 <경허연구소> 홍현지 소장이 인터뷰를 통해서 밝힌 내용인데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다.
조선의 대선사 경허선사와 전봉준장군과는 남이 아니고 ‘처남 매제’사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경허선사의 연구를 하다가 경허선사의 친필 ‘사문 경허’라는 이름이 보여서 부친 송두옥을 찾아보니 전봉준장군의 부친 전창혁의 이름도 함께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윗분들과도 무슨 연분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서예가를 찾아 내용을 물으니 혼사와 관계된 것이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혹시 두 분과의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니 그가 혼자사는 스님인데 무슨 혼사에 관여했겠느냐고 하더란다.
그래도 궁금하여 행적을 조사해 보니 놀랍게도 두 분은 처남 남매간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즉, 선사의 여동생이 전봉준장군과 혼인하여 4남매를 낳았고 23세에 죽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계속 추적해 보니 두 집안은 이웃에 살았고, 당시 장군의 비서실장격인 송희옥이 바로 경허스님의 삼촌인 것도 드러났다.
전봉준장군의 부대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러한 것은 불승인 경허선사의 불살생 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경허선사는 '오도가'를 읊으며 도를 깨달은 후 기행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분의 기행은 유명하다. 이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선사는 입은 옷은 빨지 않고 계속 입어 그곳에 이와 빈대가 득실거렸는데, 그것을 보고 만공스님이 빨아 드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유는 미물들이 피를 빨아먹고 사는데 빨아버리면 어찌되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공이 꾀를 내어 말했다.
" 스님, 어느 불자가 옷을 지어왔는데, 새것으로 갈아입으시지요?"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알았다. 그런데 옷에 붙어있는 이와 빈대는 새 옷으로 모두 옮겨놓아라."
선사께서는 그 의도를 훤히 알아보고 한 말이었다.
전봉준장군이 순교하자 그 자식들은 오갈 데가 없어졌다. 경허스님은 장군의 딸 전옥련을 독립지사 김대완이 주지로 있던 진안마이산 고금당에 보내 숨어 살게 했다. 그리고 아들 전용현은 동학도들이 많은 전남무안 배씨 집성촌으로 보냈다.
숨어 살기는 경허선사도 마찬가지였다. 장군과의 관계 때문에 삼족을 멸하는 역적의 몸이 되어서 쫓기며 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한때 선사에게는 취광승(취하고 미친중)이라는 오명이 붙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살기 위한 것이었다.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장군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경허 선사가 어떻게든 시신을 찾아내어 어디엔가 은밀하게 묻었을 것으로 믿고 있단다. 아직 찾아내지 못했는데. 유족들은 장군의 시신이 경허선사사가 한때 살던 충남 서산 천장암 어디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측한단다.
그래서 금년 봄이 되면 연구소에서는 수덕사의 허락을 얻어 전봉준장군의 가묘로 추정되는 천장암 제비바위 배씨 부도탑을 파보기로 했다고 한다. 부디 성과를 내어 실체가 드러나기를 기대해 본다.
동학혁명의 한이 서린 외침. 그것은 오늘까지도 역사적 함성으로 귀에 쟁쟁하다. 하나 이날 김개남장군의 무덤을 바라보는 마음은 광중에 시신이 없이 비어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였다. (2023)
첫댓글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자 거점이었던 고부( 현 정읍)에 김개남 장군의 묘소가 있군요 한말 대한제국을 차지하려는 외세의 침탈 와중에도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고 무능한 조정은 이미 청일의 외세에 휘둘리고 있었으니 국운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고 정권 유지에 급급했던 민씨일파로 말미암아 청국이 개입함에 따라 결국 일본군이 진주하는 빌미가 되고말았으니 한말 우리 민중의 최후의 몸부림은 너무나도 참담한 종말을 맞고 말았군요 이로써 민족정기는 좌절되고 그때부터 조선은 일제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슬픈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시대의 변곡점을 돌아보며 깊은 원망에 잠깁니다
장군의 허묘를 둘러보는 마음이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동학혁명은 오늘날을 나는 우리에도 여전히 미완의 과제이고
울림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관리가 부패하고 위정자가 바른 정치를 못하면 지정학적 취약점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는 늘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백성은 어리석은듯 하지만, 늘 바른 지표를 제시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창작수필 2023 여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