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월요일) 스물셋째 날 -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제목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본문 - 누가복음 2장 38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개역개정)
“바로 이 때에 그가 다가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삶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새번역)
말씀묵상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말이지요. 중국의 시인 이백은 어렸을 때 산에 들어가서 공부했답니다. 공부가 뭐 그렇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백도 싫증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어느 개울가에서 도끼를 돌에 가는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뭘 만들려는 것일까요? 그걸로 바늘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큰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있을까요?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할머니가 어느 세월에 바늘을 만들겠습니까? 그러나 할머니는 그 도끼를 갈고 또 갈면 반드시 바늘을 만들 수 있다면서, 멈추지 않고 계속 도끼를 갈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백은 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자기 도끼도 한 번 다시 갈아보려고! 말입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사람은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대책(大冊) 없이 무모한 사람이겠지요. 더구나 다 늙은 사람이 그런 희망을 품고 산다면, 노망(老妄)이 들렸다고 수군댈 것입니다. 그러나 바늘이 꼭 필요(必要)하다면, 도끼든 절굿공이든 누군가는 갈아야 합니다. 그걸 다 갈지 못하고 끝날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갈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뒷 사람이 더 수월하게 바늘을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도끼를 갈지 않는다면, 바늘은 영영 만들어지지 않겠지요? 우리의 공부도,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역사(歷史)는 더욱 그렇지요. 우리는 지금 먼저 도끼를 갈았던 사람들에 잇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셀 지파에 속하는 바누엘의 따로 ‘안나’라는 예언자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결혼(結婚)을 했는데, 남편과 딱 일곱 해 살고는 과부(寡婦)가 되었답니다. 그렇게 여든네 살이 되었습니다. 당시 평균 수명이 채 마흔이 안되었다고 하니, 정말 많은 나이입니다. 평생 그녀는 성전(聖殿)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그녀의 삶은 얼마나 고단(孤單)하고 파란만장(波瀾萬丈) 했을까요? 그녀는 그 오랜 세월동안 왜 성전을 떠나지 못하고 거기에 있었을까요? 네, 그녀는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約束)’이라는 도끼를 갈고 또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 말고도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있지요.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25절).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의롭고 경건(敬虔)한 사람이었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慰勞)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 뿐이 아니지요.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나는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루살렘의 구원(救援)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해 말했습니다(38절). 그들 말고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 말이지요.
때로 나 혼자만 기다리는 것 같아서, 칠흑 같은 외로움에 휩싸이기도 하지요. 뒤늦게 도끼를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늪 같은 회의(懷疑)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칠천 명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밤마다 문을 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그 할머니의 도끼는 바늘이 되기는 했을까요? 아, 이백의 시가 되었군요!
찬송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기도
주님,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평화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 이 땅에 속히 오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학생들을 위해 한자어 병기(倂記)하였습니다.